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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시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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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으로,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즈사노온조시라 불리며 간토 지방에서 세력을 키웠고, 호겐의 난에서 고시라카와 천황 편에 서서 아버지와 동생들을 처형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헤이지의 난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오와리국에서 암살당했다. 그의 아들 요리토모는 가마쿠라 막부를 세워 일본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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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시토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헤이지 모노가타리 에마키에서)
다른 이름가즈사노미조시, 사쿄노쓰카사, 아타마도노, 다이부쿄
계명쇼조주인
묘소아이치현 지타군 미하마정의 노마다이보
국적일본인
관직 정보
직위가와치 겐지의 수장
관위종4위 하, 좌마두, 시모쓰케노카미, 하리마노카미, 증 정2위 내대신
생애
출생1123년
사망1160년 2월 11일 (향년 38세)
가문
씨족가와치 겐지 (세이와 겐지 요시치카 류)
가문미나모토 씨
가족 관계
아버지미나모토노 다메요시
어머니후지와라노 다다키요의 딸
배우자유라 고젠
측실도키와 고젠, 미우라 요시아키의 딸, 하타노 도오요시의 딸, 도토미국이케다슈쿠 유녀, 아오하카 쵸자 오이
자녀미나모토노 요시히라
미나모토노 도모나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미나모토노 요시카도
미나모토노 마레요시
미나모토노 노리요리
아노 젠세이
미나모토노 기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보몬히메
여자
경력
주군도바인고시라카와 천황(고시라카와인) →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소속미나모토 씨
충성미나모토 씨
후임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전임미나모토노 다메요시

2. 생애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1123년(호안 4년) 시라카와 상황이 인세이를 행하던 시대에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시라카와 상황의 신하였던 아와지노카미 후지와라노 다다키요의 딸이었다. 아버지 다메요시는 가와치 겐지의 도료였으나, 당시 가와치 겐지는 내분으로 몰락한 상태였고, 다메요시 자신도 문제 행동으로 상황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어린 시절 도고쿠(간토 지방)로 내려간 요시토모는 가즈사 집안 등 호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가즈사노온조시(上總御曹司)'라 불렸으며, 미우라 요시아키, 오바 가게요시 등 유력 호족들을 휘하에 두었다. 또한 재지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미나모토노 요리요시 이래 연고지였던 가마쿠라의 가메가타니에 저택을 짓고 사가미국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형성했다.

요시토모의 세력 신장은 간토의 다른 겐지, 특히 미나모토노 요시쿠니의 세력과 충돌을 빚기도 했지만, 요시쿠니의 사촌 가와치노 쓰네쿠니의 중개로 동맹을 맺었다. 20대 초반에 남관동 지역 무사단을 통솔하는 지위를 확립한 요시토모는 중앙 정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147년(규안 4년) 정실 유라 고젠과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얻었다. 도바 상황의 근신이었던 처가의 후광으로 상황과 셋쇼간파쿠 후지와라노 다다미치에게 접근하여, 1153년(닌표 3년) 종5위하 시모쓰케노카미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우마노스케(右馬助)를 겸하게 되었다. 이는 미나모토노 요시치카 이래 50년 만에 가와치 겐지가 구니의 지방관에 취임한 것이었으며, 아버지 다메요시의 지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러한 승진은 도바 상황이 요시토모의 무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셋칸케를 섬기던 아버지와의 대립을 의미했다.

1155년(규쥬 2년) 요시토모는 맏아들 요시히라를 시켜 남동생 요시카타를 죽이게 하여(오쿠라 전투) 도고쿠에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러나 이는 동생 요리카타와의 충돌로 이어져 부자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156년(호겐 원년) 7월 호겐의 난이 일어나자 요시토모는 고시라카와 천황 편에 서서 아버지 다메요시, 동생 요리카타, 다메토모 등과 갈라섰다.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함께 작전회의에 참석한 요시토모는 선제공격과 야간기습을 주장하며 출진했다. 난은 천황 측의 승리로 끝났고, 요시토모는 아버지 다메요시를 구명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처형해야 했다.

난 이후 요시토모는 사바노카미(左馬頭)에 임명되었다. 그는 논공행상에서 기요모리보다 낮은 관위를 받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고도 하지만, 기요모리와의 지위 차이를 고려하면 불만이 타당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사바노카미는 무사에게 중요한 관위였기에 파격적인 은상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1160년(헤이지 원년) 12월 9일, 요시토모는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함께 산조도노를 습격하여 헤이지의 난을 일으켰다. 난의 원인은 호겐의 난에서의 은상 차별, 신제에 대한 원한 등 다양하게 거론되지만, 실제로는 고시라카와 상황을 지지하는 인세이파와 니조 천황을 지지하는 친정파 사이의 대립, 그리고 신제이에 대한 불만이 주요 원인이었다.

요시토모는 노부요리와 함께 신제이를 타도하고 정국의 중심에 섰으나, 신제이가 사라지자 인세이파와 천황친정파는 분열되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천황친정파의 모략으로 니조 천황을 로쿠하라 저택으로 파천시키고, 고시라카와 법황도 닌나사로 탈출하면서 요시토모는 고립되었다. 결국 요시토모는 '관군'이 된 기요모리에게 패배했다.

요시토모는 아들 요시히라, 도모나가, 요리토모 등과 함께 도카이도로 향했지만, 추격 끝에 아들 도모나가와 일족 요시타카, 시게나리는 목숨을 잃었다. 요리토모는 일행과 떨어져 붙잡혔고, 요시히라는 기요모리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요시토모는 오와리국 노마에서 케닌 오사다 다다무네에게 의탁했지만, 배신당해 목욕하던 중 습격당해 살해되었다. 향년 38세였다.

요시토모의 죽음은 가와치 겐지의 몰락을 가져왔지만, 그가 도고쿠에 쌓아올린 지지 기반과 요리토모에게 준 높은 지위는 훗날 요리토모의 거병과 가마쿠라 막부 성립의 주춧돌이 되었다.

2. 1. 가즈사노온조시(上總御曹司) 시절

호안 4년(1123년) 시라카와 상황이 인세이를 행하던 시대이자 스토쿠 천황이 즉위한 해에,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시라카와 상황의 신하인 아와지노카미 후지와라노 다다키요(藤原忠淸)의 딸이었다.[6][7][8][9]

소년기에 도고쿠(간토 지방)로 내려가 아버지 다메요시가 전령했던 아와의 마루노미쿠리야로 이주했다. 이후 가즈사국으로 옮겨 현지의 유력 호족이었던 가즈사 씨의 후견을 받아 "가즈사노온조시(上總御曹司)"라 불렸다. 마루 씨, 안사이 씨나 반도 헤이 씨의 일부(미우라 씨, 가즈사 씨, 지바 씨 등)로부터도 연계하여 보호받았다.

도고쿠에서 성장한 요시토모는 미우라 요시아키·오바 가게요시 등 재지 대호족을 산하에 두었다. 소마노미쿠리야·오바노미쿠리야 등의 지배권을 둘러싼 재지 호족 간의 싸움에도 개입했다. 그전까지 거관이 있던 가마쿠라군 누마하마(현재의 가나가와현즈시시누마마)에서 고조부인 요리요시 이래 인연이 있는 가마쿠라의 가메가야에 관(가메가야덴)을 옮겼다.

장남 요시히라의 생모는 미우라 씨로 여겨지며, 사가미의 대호족인 하타노 요시미치의 여동생과의 사이에는 차남 도모나가를 두는 등, 재지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또한, 육남 노리요리의 생모는 도토미국이케다주쿠(현재의 시즈오카현이와타시)의 유녀로 여겨지는 등, 유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두었다는 기록이 많다.[10]

20대 초반에 미나미칸토의 무사단을 통솔하는 지위를 확립했고, 그 활약이 수도에도 알려지게 되면서, 중앙 진출의 발판을 잡았다.

2. 2. 교토 진출과 권력 투쟁

맏아들 요시히라에게 도고쿠(東國)를 맡기고 수도로 돌아온 요시토모는 규안(久安) 4년(1147년)에 정실로 맞아들인 유라 고젠(아쓰타 대궁사후지와라 스에노리의 딸)과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 요리토모를 얻었다. 도바 상황(鳥羽上皇)의 인근신이기도 했던 처가의 후광에 힘입어 상황이나 셋쇼간파쿠(攝政關伯) 후지와라노 다다미치(藤原忠通)에게도 접근해, 닌표(仁平) 3년(1153년)에는 종5위하 시모쓰케노카미(下野守)로 임명되고, 이듬해에는 우마노스케(右馬助)를 겸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가와치 겐지(河內源氏)로서 수령에 취임한 것은 미나모토노 요시치카(源義親) 이래 50년 만의 일이었으며, 당시 게비이시(檢非違使)에 불과했던 아버지 다메요시의 지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급격한 인사 승진은 사찰 세력의 진압이나 인(院)에 속한 영지 지배를 위해서는 도고쿠 무사단의 수장 요시토모의 무력이 필요하다는 도바 상황의 판단에 의한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셋칸케를 섬기던 아버지 다메요시와의 대립을 의미했다.[11]

규쥬(久壽) 2년(1155년)에 요시토모는 앞서 다메요시의 의향으로 도고쿠에 내려가 세력을 키워가던 남동생 요시카타(義賢)를 맏아들 요시히라를 시켜 죽이게 했으며(오쿠라 전투), 이를 통해 그에게 맞설 세력을 배제하고 도고쿠에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러나 이는 복수를 위해 시나노국으로 내려간 다른 한 명의 동생 요리카타(賴賢)와의 충돌 직전까지 이어지는 등, 부자간의 대립은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오쿠라 전투는 교토에서는 그다지 문제로 여기지 않았는데, 이 배경에는 무사시노카미(武蔵守)였던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賴)의 묵인이 있었으며, 셋칸케에 속한 다메요시파에 대한 억압이 있었다고도 한다.[11]

종래 요시토모가 다메요시의 맏아들로서 그의 적자로 여겨져왔지만, 최근의 연구에는 관위 등의 문제를 들어 이를 의심하는 견해가 있다. 요시토모가 도고쿠에서 세력을 키우던 초기만 하더라도 아버지 다메요시가 섬기던 셋칸케에 편향된 자세를 보였지만, 요시토모의 기반인 사가미 국 등이 도바 상황의 지행국(知行國)이 되면서 그 자신이 도고쿠에서 세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도바 상황에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고, 셋칸케를 섬기던 아버지와 거리를 두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7] 이에 요시토모의 도고쿠에서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다메요시가 보낸 것이 남동생 요시카타였다는 것이다. 또 요시카타도 곧 적자 자리를 잃고 그 아우인 요리카타가 다메요시의 적자 자리를 차지했다는 견해도 있다.[12]

2. 3. 호겐의 난 (1156년)

호겐 원년(1156년) 7월, 스토쿠 천황후지와라노 요리나가가 일으킨 호겐의 난 때, 요시토모고시라카와 천황 편에 서서 도고쿠 무사단을 이끌고 참전했다. 아버지 타메요시와 동생 타메토모 등은 스토쿠 천황 측에 가담하여 부자, 형제간 대립이 일어났다.[1]

다이라노 키요모리와 함께 작전 회의에 참석한 요시토모는 선제공격과 야간 기습을 주장하며, 결단을 망설이는 신제와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에게 결단을 재촉했다. 공격 명령이 내려지자 요시토모는 "이번 싸움은 추토(追討) 선지(宣旨)를 받았으니 아무 염려 없이 싸울 수 있겠다"라며 의기양양하게 출진했다고 한다.[13]

난은 천황 측의 승리로 끝났고, 패자가 된 타메요시는 요시토모에게 자수했다. 요시토모는 자신의 전공을 내세워 아버지의 구명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7월 30일 후네오카야마 부근에서 아버지와 동생들을 직접 처형해야 했다. 이 일로 요시토모는 '제 아비 목을 친 놈'이라는 세상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13]

난이 끝난 뒤, 요시토모는 사바노카미(左馬頭)에 임명되었다. 일각에서는 요시토모가 키요모리보다 낮은 관위를 받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고도 하지만, 키요모리는 이미 10년 전에 공경 지위에 오르기 직전이었던 반면, 요시토모는 난 직전에야 간신히 수령 정도의 레벨이 되었기에, 요시토모의 지위는 키요모리와 비교하면 원래부터 큰 차이가 있었다는 반론도 있다.[12] 또한, 사바노카미는 무사 가문의 수장에 비견될 만큼 중요한 관직이었기에 파격적인 은상이었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12]

타메요시의 처형은 조정의 결정이었고, 키요모리 또한 적에 가담한 동족을 처형했으므로, 요시토모의 불만이 헤이지의 난으로 이어졌다는 견해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7] 그러나, 모반 진압에 대한 무가(武家)의 은상은 본인의 관위에 상관없이 "월계(越階)", "희망하는 나라의 수령 임명", "자제·낭당에 대한 관위 수여"가 관례였고, 요시토모는 이러한 기대를 충족받지 못했기에 냉대받았다는 반론도 있다.[14]

2. 4. 헤이지의 난 (1159년)

헤이지 원년 12월 9일 (1160년1월 19일),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미나모토노 미츠야스, 스에자네, 시게나리 등과 함께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작당하여 고시라카와 상황의 신임이 두터운 신제이 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산조 전을 습격했다. 이것이 헤이지의 난이다.[1]

우타가와 요시토라의 그림, "겐페이 시대의 전투,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시라카와 전 멸망도" (도쿄 도립 도서관 소장)


헤이지의 난의 원인으로는, 군담소설 《헤이지 이야기》의 기술대로 호겐의 난에서 기요모리와의 은상 차별에 요시토모가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겐지 대 헤이케'의 구도를 그리려는 설, 자신과의 혼담을 거절한 신제이에 대한 원한설이나 그 결과로 똑같이 신제이를 미워하는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작당하게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속적 이해는 오늘날에는 재검토되고 있다. 노부요리를 따른 무사들은 요시토모만이 아니었으며 각자 독립된 세력으로서 각자의 권문을 섬기는 무가가 자신의 의지로 노부요리에게 가담했을 뿐이지 요시토모의 지시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헤이지의 난의 원인은 실제로는 고시라카와 상황을 지지하는 인세이파와 니조 천황을 지지하는 친정파 사이의 대립, 그리고 이 두 파벌이 모두 똑같이 신제이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고시라카와 상황이 이를 제대로 추스려 달래지 못했던 데에 있다고 한다.

요시토모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의 관계도, 신제이를 미워한다는 공통점에서 결탁하게 된 것이라는 설도 이야기로서야 이해하기 쉽지만, 이미 헤이지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요시토모가 남관동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을 때 노부요리는 무사시노카미였고 그 후로도 그곳의 지행국주로 있었으며, 요시토모의 무사시에서의 세력 확대도 갑작스런 종5위하 시모쓰케노카미로의 임명도 노부요리 등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산조전을 습격하고 도망친 신제이를 타도한 뒤 노부요리는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며, 요시토모도 신제이 추토에 대한 포상으로 하리마노카미로 임관되었으며, 그 아들 요리토모는 우효에노스케(右兵衛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통의 적이었던 신제이가 사라지자 더 이상 결속할 필요가 없어진 인세이파와 천황친정파는 공중분해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천황친정파 사이에 반목이 발생한다. 교토를 떠나 후쿠하라에 있던 기요모리는 승자인 노부요리를 따를 의향을 보이며 교토로 돌아왔지만, 그 뒤 천황친정파의 모략으로 니조 천황이 기요모리가 있던 로쿠하라(六波羅) 저택으로 파천하고, 형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고시라카와 법황도 닌나사(仁和寺)로 탈출하면서, 요시토모는 자신이 매달릴 모든 연결고리를 잃고 고립되고 만다.

당초 요시토모와 함께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에 가담했던 미나모토노 미쓰야스는 원래 니조 천황을 지지하던 친정파였으므로 노부요리 진영에서 이탈해버렸고, 미나모토노 요리마사도 노부요리와 거리를 두면서 다른 조정 신료들도 잇달아 로쿠하라로 나가버렸다. 이에 기요모리는 '관군'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한순간에 조정에 대한 반역자이자 적군이 된 노부요리나 요시토모 등은 토벌 대상이 되었고, 마침내 12월 27일(2월 6일)에 교토 안에서 시작된 전투는 헤이케 등의 관군에 비해 숫자에서 이미 밀렸던 요시토모군의 괴멸로 끝났다.

요시토모는 교토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아들 토모나가를 희생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토모는 결국 배신당해 목욕을 하던 중 살해당했다. 그의 생존한 세 아들인 요리토모, 요시츠네, 노리요리는 승리한 기요모리에 의해 처형을 면하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요시토모의 동맹자인 요시히라와 노부요리는 모두 처형되었다.[2]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미나모토노 타메요시
어머니후지와라노 타다키요의 딸
정실유라노마에 (후지와라노 스에요시의 딸)
측실토키와 고젠
측실교토 교외 하시모토의 유녀
측실하타노 요시미치 여동생
측실도토우미 국 이케다 숙소 유녀
측실미우라 요시아키
측실아오하카 쵸자 오이
장남미나모토노 요시히라
차남미나모토노 도모나가
3남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
4남미나모토노 요시카도
5남미나모토노 마레요시 (도사 기라씨의 시조)
6남미나모토노 노리요리 (요시미씨의 시조)
7남아노 젠조 (아노씨의 시조)
8남기엔 (아이치씨의 시조)
9남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보몬히메


4. 관련 작품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MacMillan Publishing Co., Inc.
[3] 문서 ただし贈正二位と贈内大臣は『平家物語』のみの記載で他の文献に同内容は見当たらない。
[4] 문서 後出本の『平治物語』によると美濃国青墓宿の義朝の妻の名は延寿となっているが、成立年代の古い『平治物語』本においては「大炊」となっている。また『吾妻鏡』にも左典厩寵者「大炊」と記載されている。
[5] 문서 江口腹娘、夜叉御前という二人の娘が『平治物語』の後出本に登場する。しかし両者とも後出本にのみ記述が見られ、成立年代の古い『平治物語』やその他文献には登場しない。『尊卑分脈』には女子(一条能保室)の隣に「女子」とのみ記されその女子の詳細は不明である。
[6] 간행물
[7] 간행물
[8] 간행물
[9] 간행물
[10] 간행물
[11] 간행물
[12] 간행물
[13] 문서 『愚管抄』
[14] 간행물
[15] 문서 『愚管抄』の記述を元に義朝の縁組の申し入れに対して信西が「藤原是憲|我が子]]は学者であるので、武門の家の聟には相応しくない」と拒否しながら同じ武家である平家と縁組したことなど、あからさまな冷遇を受けたことに対して義朝が不満を募らせたといわれる説。
[16] 문서 孫の源頼家|頼家]]も入浴中に襲撃されている。
[17] 문서 『平治物語』
[18] 간행물
[19] 간행물
[20] 간행물
[21] 문서 『保元物語』
[22] 문서 『兵範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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