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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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축은 동해군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서주 자사 도겸의 초빙으로 별가종사가 되었으며, 도겸 사후 유비를 서주목으로 추대하는 데 기여했다. 유비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누이를 유비에게 시집보내는 등 유비를 보좌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안한장군이 되었으며, 동생 미방의 배신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미축은 유비 휘하에서 존경받았으며, 촉한 건국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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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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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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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미축 |
로마자 표기 | Mi Zhu |
본관 | 랴오닝성롄윈강 시, 장쑤 성 |
자 | 자중 (子仲) |
관직 정보 | |
소속 | 도겸 → 유비 → 조조 → 유비 |
최종 관직 | 안한장군 (安漢將軍) |
임관 시기 | 214년 |
해임 시기 | 221년 |
주요 경력 | 별가 (別駕) 종사중랑 (從事中郎) |
가족 관계 | |
형제 | 미방 (동생) |
자매 | 미부인 (누이, 유비의 부인) |
자녀 | 미위 |
생애 | |
출생 | 기원전 165년경 |
사망 | 221년경 (55-56세) |
2. 생애
미축은 선조 대대로 부유하여, 거느린 전객(식객)이 1만 명에 달하며 막대한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명성을 들은 서주목 도겸은 미축을 별가종사로 임명했다.[27]
흥평 원년(194년), 도겸이 병들어 위독해지자, 미축은 유비에게 서주를 맡기라고 권했다. 도겸이 죽자 미축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서주 사람들을 거느리고 유비를 맞이하여 서주목을 대행하게 했다.[27][28] 건안 원년(196년), 유비가 원술과 대치하던 중 여포가 하비를 탈취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유비는 근거지를 잃고 광릉과 해서 사이를 떠돌았는데, 이때 미축은 자신의 누이를 유비에게 아내로 주고, 노객 2천 명과 군자금을 지원했다.[27][28]
조조는 태산군의 일부 현을 잉군으로 분리하고 미축을 잉군태수로, 동생 미방을 팽성상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형제는 모두 사직하고 유비를 따라 각지를 전전했다.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할 때, 미축을 먼저 보내 유표와 만나게 했다.[27][28][29]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미축은 안한장군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군사장군 제갈량보다도 높은 지위였다.[27] 건안 24년(219년), 동생 미방이 손권에게 투항하자, 미축은 이 일로 괴로워하다 1년여 만에 사망했다.[27] 장무 원년(221년), 태부 허정, 군사장군 제갈량, 태상 뇌공, 광록훈 황권, 소부 왕모 등과 함께 유비를 황제로 추대하는 표를 올렸다.[28]
2. 1. 초기 생애와 서주 시절
미축은 동해군 취현(현재의 장쑤성 롄윈강시) 출신으로, 대대로 상업에 종사하여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에는 하인과 종자가 1만 명에 달했고, 재산은 수억에 이르렀다고 한다.[2]서주목 도겸은 미축의 명성을 듣고 그를 별가종사로 임명했다.[27] 194년, 도겸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미축에게 유비에게 서주를 맡기라고 권했다. 도겸 사후, 미축은 도겸의 유지를 받들어 서주 사람들을 이끌고 유비를 맞이하여 서주목을 대행하게 했다.[27][28]
196년, 유비가 원술과 대치하던 중 여포가 하비를 탈취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유비는 근거지를 잃고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때 미축은 자신의 누이를 유비에게 시집보내고, 노객 2천 명과 군자금을 지원하여 유비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다.[27][28]
이후 조조는 미축을 영군태수로, 동생 미방을 팽성상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형제는 모두 사직하고 유비를 따라 각지를 떠돌았다.[27]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할 때에는 미축을 먼저 보내 유표와 만나게 했다.[27][28][29]
2. 2. 유비와의 동행
도겸이 병들어 위독해지자, 미축은 도겸에게 '유비에게 서주를 맡기자'며 권했다.[27] 도겸이 죽자 미축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서주 사람들을 거느리고 유비를 맞이하여 유비가 서주목을 대행하게 했다.[27][28] 건안 원년(196년), 유비가 서주로 쳐들어온 원술과 대치하던 도중 여포가 하비를 탈취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으니, 유비는 근거를 잃고 광릉과 해서 사이를 떠돌았다. 이때 미축은 자신의 누이를 유비에게 아내로 주고, 노객 2천 명과 군자금을 지원했다.[27][28]조조는 태산군의 일부 현을 갈라 영군을 설치하면서 당시 편장군이었던 미축을 영군태수로, 그의 동생 미방은 팽성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형제는 모두 사직하고 조상 대대로 살던 서주를 떠나, 세력 기반을 잃고 조조, 원소, 유표 등의 밑을 떠돌던 유비를 따라 각지를 전전했다.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할 때, 미축을 먼저 보내 유표와 만나게 했다.[27][28][29]
2. 3. 촉한 건국과 죽음
도겸이 병들어 위독하자, 미축은 도겸에게 '유비에게 서주를 맡기자'며 권했다. 도겸이 죽자 그의 유지를 받들어 서주 사람들을 거느리고 유비를 맞이하여 유비가 서주목을 대행하게 했다.[27][28] 건안 원년(196년), 유비가 서주로 쳐들어온 원술과 대치하던 도중 유비에게 의탁한 여포가 하비상 조표와 손잡고 하비를 탈취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으니 유비는 근거를 잃고 광릉과 해서 사이를 떠돌았다. 미축은 자기 누이를 유비에게 주고 또 노객 2천 명과 군자를 댔다.[27][28]조조는 태산군의 일부 현을 갈라내 잉군을 설치하면서 당시 편장군을 지내던 미축으로 잉군태수를 맡기고 그의 동생 미방은 팽성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형제는 모두 사직하고 조상 대대로 살던 서주를 떠나, 세력 기반을 잃고 조조, 원소, 유표 등의 밑을 떠도는 유비를 따라 각지를 전전했다. 유비가 유표에게 들어갈 때, 먼저 미축을 유표에게 보내 만나게 했다.[27][28][29]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그의 지위는 안한장군으로, 군사장군이었던 제갈량보다도 높았다.[27] 건안 24년(219년), 남군태수를 지내던 그의 동생 미방이 모반하여 손권(孫權)에게 돌아서자, 괴로워하며 1년여 만에 죽었다.[27] 장무 원년(221년), 태부 허정, 군사장군 제갈량, 태상 뇌공, 광록훈 황권, 소부 왕모 등과 함께 유비를 황제로 추대하는 표를 올렸다.[28]
3. 특징 및 평가
미축은 온화하고 성실하며 선량한 인물이었으나, 사람을 다루는 데는 능숙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높은 예우를 받았지만 군사를 이끈 적은 없었다. 그러나 궁술과 마술에는 능하여 아들 미위는 호분중랑장, 손자 미조는 호기감이 되었다.[27] 유비에게 두터운 총애를 받아 비견할 자가 없었다.[27]
미축이 서주에 있을 때 낙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름다운 신부를 만나 태워준 일화가 있다. 신부는 하늘의 사자로 미축의 집에 불을 지르러 왔으나, 미축의 친절에 감사하여 정오에 불이 날 것을 알려주었다. 미축은 서둘러 가재도구를 옮겼고, 정오에 큰 불이 났다.[30]
진수는 미축, 손건, 간옹, 이적을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 평하며, 예의를 잘 지키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기록했다.[13]
미축 및 미씨 가문에 대해서는 유교에서 낮게 평가된 상인 출신 대부호라는 견해가 있지만[20], 서주 동해 미씨는 단순한 상업 호족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21] 미씨 가문은 유학과 문학에 통달한 인물이나 관료를 배출하는 지방 명족이었으며, 미축 자신도 명사나 재인이 초빙되는 주의 별가종사라는 지위에 있었고 도겸에게 유명을 부탁받는 인물이었다.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는 미축과 미방 모두 칭찬받지만, 미축은 자(미자중)로 표기된 반면 미방은 이름만 표기되어 미방이 배신자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26]
4. 가계
미축은 아들 미위와 손자 미조를 두었다. 미위는 촉에서 호분중랑장을, 미조는 호기감을 역임했다. 이들은 미축과 마찬가지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등 마상무예에 능했다.[27][12]
5. 전설
미축은 한때 수도 뤄양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그는 친절하게 그녀를 태워주었고, 여인이 내릴 때 그녀는 자신이 하늘의 사신으로 미축의 집을 불태우라는 임무를 받고 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천천히 걸어가서 미축이 집을 대피할 시간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여인이 약속한 대로 정오에 큰 불이 실제로 일어났다.[3] 이 이야기는 간보(干竇, 干竇|간두중국어)의 저서인 『수신기(搜神記, )』에 수록되어 있다.[30]
『수경주』의 일문(佚文)에 따르면, 朐|朐중국어현에 있는 울주도(鬱洲島)의 섬 주민은 모두 미축이 사용하던 농노의 자손이다. 이들 주민들 사이에서는 미축을 "미랑(糜郎)"이라고 부르며 숭배하고 있으며, 주민이 새로이 며느리를 맞이할 때 "반드시 미랑의 신 앞에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내린다"라고까지 말해져, 엄격하게 이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30]
『화관색전』에서는 미방과 함께 관우를 배신하고, 화관색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다.[30]
6. 기타
朐중국어현에 있는 울주도(鬱洲島)의 섬 주민들은 모두 미축이 사용하던 농노의 자손이다. 우란촌(牛欄村)이라는 마을은 원래 미축 소유의 장원·목장이었다고 한다. 이들 주민들 사이에서는 미축을 "미랑(糜郎)"이라고 부르며 숭배하고 있으며, 주민이 새로이 며느리를 맞이할 때 "반드시 미랑의 신 앞에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내린다"라고까지 말하며 엄격하게 이 전통을 지키고 있다.[1]
『화관색전』에서는 미방과 함께 관우를 배신하고, 화관색에게 살해당했다.[1]
참조
[1]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2]
문서
Sanguozhi vol. 38
[3]
문서
Soushen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8
[4]
문서
Sanguozhi vol. 32
[5]
문서
Sanguozhi vol. 38
[6]
문서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2
[7]
문서
Sanguozhi vol. 38
[8]
문서
Gao C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8
[9]
문서
Sanguozhi vol. 38
[10]
문서
Sanguozhi vol. 38
[11]
문서
Sanguozhi vol. 38
[12]
문서
Sanguozhi vol. 38
[13]
문서
Sanguozhi vol. 38
[14]
문서
裴松之注の『曹公集』の曹操の上表によると「泰山郡の境内は広遠で、旧くから軽捷剽悍な者が多く、時宜の仮措置として五県を分けて嬴郡とし、清廉な者を揀選(選採)して守将とすべきです。偏将軍の麋竺は素より忠貞を履み、文武とも昭烈(明赫)であり、麋竺を領嬴郡太守として吏民を撫慰させたく存じます」とされた。嬴郡は5県で形成された新郡。
[15]
문서
蜀志「麋竺伝」
[16]
문서
蜀志「孫乾伝」「簡雍伝」
[17]
논문
後漢末の群雄の経済基盤と財政補填策
汲古書院
[18]
문서
蜀志「関羽伝」「麋竺伝」
[19]
문서
蜀志「先主伝」
[20]
논문
劉備集団と荊州名士
汲古書院
[21]
논문
劉備出自考
国士舘大学文学部
[22]
서적
隋書経籍志考証
[23]
서적
隋書経籍志考証
[24]
문서
『晋書』巻59・巻60
[25]
문서
『晋書』巻93
[26]
서적
正史 三国志5 蜀書
ちくま学芸文庫
[27]
문서
삼국지 권38 촉서 제8 허미손간이진전 중 미축전
[28]
문서
삼국지 권32 선주전
[29]
문서
《조공집재공표》 (진수의 삼국지 권38의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30]
문서
수신기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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