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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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소황후는 후한 말, 조위의 황제 조비의 아내이자 조예의 어머니이다. 견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현숙한 성품으로, 원소의 아들 원희와 혼인했으나 조조에게 패한 후 조비에게 시집갔다. 조비의 총애를 받았으나, 곽귀인의 모함으로 자결했으며, 아들 조예가 황제가 된 후 문소황후로 추존되었다. 조식과의 로맨스, 낙신부 전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며, 조예의 출생에 대한 의문과 곽태후와의 갈등 등 그녀를 둘러싼 논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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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소황후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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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견부인 / 甄夫人 |
| 출생 | 183년 1월 26일 |
| 출생지 | 허베이성우지현 |
| 사망 | 221년 8월 4일 |
| 사망지 | 허베이성한단시 |
| 아버지 | 견일 |
| 어머니 | 장씨 |
| 배우자 | 원희 조비 |
| 자녀 | 조예 동향공주 |
| 시호 | 문소황후 (文昭皇后) |
| 생애 | |
| 출생 | 광화(光和) 5년 12월 정유일에 출생 |
| 가족 관계 | |
| 남편 | 원희 조비 |
| 자녀 | 조예 동향공주 |
| 아버지 | 견일 |
| 어머니 | 장씨 |
| 추가 정보 | |
| 사서 기록 | 삼국지, 위서 |
2. 생애
견씨는 한나라 태보(太保) 견한(甄邯)의 후예로, 대대로 2천 석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했으며, 난세에 가족에게 검소한 생활과 백성을 위한 자선을 권하는 등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었다.
원소의 차남 원희와 결혼했으나, 하북 쟁탈전에서 조조가 승리한 후 조비가 견씨의 미모에 반해 아내로 삼았다. 견씨는 조비의 총애를 받아 아들 조예와 딸 동향공주를 낳았다. 조비의 사랑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고 다른 부인들을 격려했으며, 조비에게 더 많은 후궁을 들여 자손을 번성시킬 것을 권하기도 했다.
조조의 아내 변씨와의 관계도 좋아, 변씨가 병에 걸렸을 때 진심으로 걱정하고 쾌유를 빌었다. 216년 조조가 손권을 공격할 때 변씨, 조비, 조예, 동향공주가 종군했지만, 견씨는 병 때문에 업에 남았다.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음에도 "아이들이 어머님(변씨)과 함께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라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조비의 총애는 점차 곽귀인에게 옮겨갔고, 견씨는 황후에 책봉되지 못했다. 헌제의 두 딸이 입궁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견씨는 조비에게 원망하는 말을 했고, 이는 조비의 분노를 샀다. 결국 견씨는 221년 조비의 명으로 죽음을 맞았다.[18]
2. 1. 초기 생애
한나라 태보(太保) 견한(甄邯)의 후예로 집안은 대대로 2천 석을 지낸 중산국의 손꼽히는 명문이었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관상 보는 사람인 유량(劉良)이 찾아와 견씨와 그 자매들을 보았는데, 견씨를 가리키면서 "이 아이는 말도 못할 만큼 귀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놀기를 싫어하고 독서를 좋아하였다. 견씨가 열 살 남짓할 무렵, 천하에 전란이 일어나고 기근까지 겹치자 사람들은 보물을 팔고 곡식을 샀는데 견씨의 집안은 부유했기 때문에 오히려 보물을 많이 사들였다. 그러자 견씨는 어머니에게 보물을 사들이지 말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자고 건의하였고 집안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 일화에서 견씨는 어려운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추고 있었고 윗 사람들에게는 옳은 일을 권하는 곧은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후한 말기, 헌제가 죽은 후, 중국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중앙 정부의 권위가 약해지고 지방 관리들과 군벌들이 패권을 다투며 서로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보석과 같은 값비싼 물건을 소유한 많은 부유한 집안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이러한 귀중품을 팔려고 했다. 진부인의 가족은 곡물을 많이 비축하고 있었고, 그들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곡물을 팔아 귀중품을 얻으려 했다. 당시 10세였던 견씨는 어머니에게 "값비싼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지만,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그런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잘못이 됩니다. 이웃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 잉여 곡물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어떻겠어요? 이것은 은혜와 친절을 베푸는 행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의 제안을 칭찬하며 그녀의 조언을 따랐다.[7]
견씨가 14세가 되었을 때, 그녀의 둘째 오빠 견엄(甄儼)이 사망했고, 그녀는 깊이 슬퍼했다. 그녀는 견엄의 미망인에게 계속 존경을 표했고, 심지어 견엄의 아들을 키우는 것을 도왔다. 견씨의 어머니는 특히 며느리들에게 엄격했고 가혹하게 대했다. 견씨는 어머니에게 "둘째 오빠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둘째 형수님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셨고, 이제 아들만 남았습니다. 며느리들을 더 잘 대하고 자신의 딸처럼 사랑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견씨의 어머니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고, 며느리들을 더 잘 대하고 그들이 그녀를 따르고 시중들도록 했다.[8]
건안 중에 견씨는 원소의 차남인 원희의 아내가 되었다.
2. 2. 원희와의 결혼과 조비와의 만남
204년 조조가 업을 함락시켰을 때, 조비가 원소의 저택에 들어가 유부인과 함께 있던 견씨를 보고 아내로 삼았다.[10][11]견씨는 원소의 차남 원희의 아내였으나, 하북 쟁탈전에서 조조가 기주를 공격했을 때 조비가 먼저 원소의 저택을 기습했다. 조비는 견씨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조조는 조비의 마음을 알고 둘을 결혼시켰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업을 함락시킨 조조는 견씨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즉시 데려오게 했으나, 조비가 먼저 견씨를 데려갔다는 보고를 받자 "올해 전쟁을 일으킨 건 다 조비 그 녀석을 위한 일이었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2. 3. 조비의 아내와 죽음
원희의 아내가 되어 업에 머물렀고, 원소 (원희의 아버지)의 아내인 유부인을 섬겼다. 건안 9년 (204년)에 조조가 업을 함락시켰을 때, 조비는 원소의 저택에 쳐들어가 견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조비의 총애를 받아 조예 (후의 명제)와 딸 동향공주를 낳았다. 견씨는 조비에게 아들과 딸을 낳았다. 그들의 아들 조예는 나중에 삼국 시대 조위의 제2대 황제가 되었다. 딸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역사 기록에서는 "동향공주"라고 불렸다.[14] 조비가 견씨를 깊이 사랑했지만, 견씨는 겸손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조비가 사랑하는 다른 부인들을 격려하고, 조비의 사랑을 덜 받는 부인들을 위로했다. 또한 그녀는 신화 속 황제의 예를 들며 조비에게 더 많은 자손을 얻도록 더 많은 첩을 들이라고 종종 권했다. 조비는 매우 기뻐했다. 한 번은 조비가 총애를 잃은 첩 임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이는 그녀를 내쫓는 것을 의미했다. 견씨는 이 소식을 듣고 남편에게 "임씨는 명문 출신입니다. 저는 도덕성과 외모 면에서 그녀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왜 그녀를 내쫓으시려는 겁니까?"라고 말했고 조비는 "그녀는 품행이 좋지 않고 충동적이며 순종하지 않소. 여러 번 나를 화나게 했소. 그래서 내쫓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견씨는 울면서 남편에게 "모두가 당신이 저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당신이 저 때문에 임씨를 내쫓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호의를 남용했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다시 한번 신중하게 결정하십시오."라고 간청했지만, 조비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임씨를 내쫓았다.[15]
211년, 조조는 마초와 한수가 이끄는 서북 지역 군벌 연합을 공격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고, 동관 전투와 그 이후의 전투로 이어졌다. 조조의 부인 변황후는 남편을 따라 맹진(孟津, 현재의 허난성 맹진현)에 머물렀고, 조비는 업(현재의 허베이성 한단시)에 남아 있었다. 변황후는 그 기간 동안 병을 앓았다. 견씨는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며 밤낮으로 울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시어머니의 상태를 물었지만, 변황후가 나아지고 있다는 보고를 믿지 않고 더욱 불안해했다. 변황후는 나중에 그녀에게 편지를 써서 완전히 회복했다고 말했고, 그제야 견씨의 걱정은 사라졌다. 약 1년 후, 변황후가 업으로 돌아왔을 때, 견씨는 시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 슬픔과 기쁨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광경에 깊이 감동했다. 변황후는 견씨에게 자신의 병이 심각하지 않다고 안심시키고 그녀의 효도를 칭찬했다.[16]
216년, 조조는 동남 지역 군벌 손권을 공격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고, 217년에는 유수 전투로 이어졌다. 변황후, 조비, 조예, 동향공주는 모두 조조를 따라 원정에 참여했지만, 견씨는 병으로 인해 업에 남았다. 조비와 견씨의 자녀들이 원정 후 217년 말에 업으로 돌아왔을 때, 변황후의 시녀들은 견씨가 매우 쾌활한 모습에 놀랐다. 그들은 "부인, 자녀들을 약 1년 동안 보지 못하셨습니다. 아이들을 그리워하고 걱정하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낙관적이시니, 어찌된 일이십니까?"라고 물었고 견씨는 웃으며 "(조)예 등이 부인(변황후)과 함께 있는데 제가 왜 걱정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17]
그러나, 조비의 총애는 점차 식어 곽귀빈 (후의 곽황후)이나 이귀인·음귀인에게로 옮겨갔다. 황초 원년 (220년), 조비가 즉위한 후에도 황후로 책봉되지 못했다. 게다가 산양공 유협 (후한의 헌제)의 두 딸이 입궁한 일도 있어, 비탄에 잠긴 견부인은 문제에게 원망하는 말을 했다. 220년 3월 조조가 사망한 후, 그의 봉신 왕의 칭호인 "위왕"(魏王|위왕중국어)은 조비가 상속받았다. 그해 말, 조비는 명목상 복종하던 헌제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사실상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조비는 황제가 되어 조위를 건국했고, 이는 삼국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폐위된 헌제는 산양공(山陽公|산양공중국어)의 지위로 강등되었다. 전 황제는 자신의 두 딸을 조비에게 바쳐 첩으로 삼게 했다. 조비는 특히 곽여왕을 비롯한 다른 첩들을 총애하기 시작했다. 견씨는 조비가 자신을 덜 총애한다는 것을 깨닫고 불만을 토로했다. 조비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이것이 문제의 노여움을 사, 같은 해 2년 (221년) 6월에 죽음을 맞았다. 221년 8월 4일, 그는 사자를 업 (현재의 한단시, 허베이성)으로 보내 견씨에게 자결을 강요하도록 했다. 그녀는 같은 달에 업현에 묻혔다.[18] 그녀가 사망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녀의 아들 조예의 통치 기간 동안, 조예는 227년 3월 20일에 견씨를 업현의 종묘에서 숭배하도록 명령했다.[19]
견씨의 몰락은 조비가 총애했던 곽여왕 때문이었다. 견씨가 사망한 지 1년 후, 조비는 잔잠(棧潛|잔잠중국어)이라는 관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곽씨를 황후로 세웠다.[20] 역사서 한진춘추(漢晉春秋|한진춘추중국어)는 견씨의 시신이 사망 후 훼손되었으며, 그녀의 얼굴이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었고 입에는 쌀겨가 채워졌다고 언급했다. 조예는 견씨가 사망한 후 곽여왕에 의해 길러졌다.[21]
2. 4. 사후
조비가 조위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 후, 총애는 곽귀인 등 다른 첩들에게 쏠렸다. 견씨는 조비의 총애를 잃고 원망하는 말을 했다가 조비의 분노를 사서 221년에 죽음을 당했다.[18] 하지만 《위략(魏略)》이나 《한진춘추(漢晋春秋)》 같은 당대 사서들은 견씨의 죽음이 곽귀인의 음모라고 주장한다. 《자치통감》도 이와 비슷하게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자 곽귀인이 거짓으로 참소하여 조비가 견씨에게 죽음을 명했다고 기록하였다.견씨가 자결한 다음 날, 일식이 일어나자 제관은 태위를 파면해야 한다고 상주했지만, 조비는 천변지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 대한 견책이라며 반대했다.
아들 조예는 황제로 즉위한 후 어머니 견씨의 명예를 회복하고 '''문소황후'''(文昭皇后)로 추존했다.[27] 견씨의 일족에게도 막대한 하사품을 내리고, 견씨 남자들을 열후에 봉했다. 230년에는 견씨의 무덤을 조양릉으로 이장했다.[39]
정사 《삼국지》에는 곽귀인이 견씨의 죽음과 관련되었다는 기록이 없어 조예가 곽귀인에게 복수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러나 《위략(魏略)》이나 《한진춘추(漢晋春秋)》에는 조예가 곽귀인에게 복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치통감》도 이와 유사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예는 곽태후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묻자 곽태후는 선제(조비)의 명이었다고 답했다. 조예는 분노하여 곽태후에게 자결을 강요하고, 어머니가 당한 것처럼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입에 왕겨를 채워 장례를 치렀다.[28]
3. 견황후를 둘러싼 논란과 전설
삼국지에 따르면,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자 그의 총애는 문덕황후 곽씨나 이귀인, 음귀인 등에게로 돌아갔고, 후한 헌제의 두 딸도 비빈이 되었다. 견황후는 점점 실의에 빠져 원망하는 말을 했고, 이것이 조비를 화나게 하여 황초 2년(221년) 6월에 죽음을 내렸다고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4]
하지만 당대 사서인 《위략(魏略)》이나 후대 사서인 《한진춘추(漢晋春秋)》는 견황후의 죽음이 곽귀인의 음모라고 주장한다. 《자치통감》도 이를 따라 견황후가 원망하는 말을 하자 곽귀인이 이를 거짓으로 조비에게 참소했고, 그래서 조비가 견황후에게 죽음을 명했다고 기록하였다.[4] 《위서》에서는 조비가 견황후를 죽이지 않았고 병으로 죽자 애통해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역사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다.[4]
삼국지 위지 주선전에 따르면, 조비는 푸른 기운이 땅에서 하늘까지 이어지는 꿈을 꾸고 주선에게 해몽을 부탁했다. 주선은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가 원한을 품고 죽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때 조비는 견황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고, 후회하며 사자를 보내 말리게 했지만 이미 그녀는 죽은 뒤였다.
이 외에도 세설신어에 나오는 조조가 견황후를 차지하려 했다는 이야기, 낙신부 전설에 기반하여 조식과의 관계로 설명하는 가설도 있다. 많은 대중적인 이야기들은 견황후가 조비의 동생인 조식과 은밀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죽었다고 추측하지만, 이는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고 가능성도 희박하다.[24]
정사에는 견황후의 용모에 대한 묘사가 없지만, 후세에는 낙빈의 이미지와 겹쳐 조조와 조식에게 흠모받았다는 전설(사실 여부는 불명)이 더해져 절세 미녀가 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옥 같은 피부에 꽃 같은 용모"의 미인으로 묘사된다.
다음은 견황후와 관련된 기타 전설들이다.
- 뱀을 길러 그 움직임을 관찰하여 기발한 머리 모양을 만들었는데, 매일 변화했고 "영사계"라고 불렸다 (『채란잡지』).
- 『요산당외기』는 업성에 들어간 조조가 견황후를 부르자 조비가 이미 원소의 저택에 갔다는 말을 듣고 "올해 적을 격파한 것은 그녀를 얻기 위해서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 『한진춘추』에 따르면, 견황후의 죽음 후, 조비는 그녀의 유해에 대해, 정돈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그 입에 겨를 채워 넣었으며, 관에도 넣지 않고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 후세에, 민간에서는 신격화되어 수선화 꽃의 신으로 숭배받는다.
3. 1. 조예의 출생에 대한 논란
조비가 견황후에게 자결 명령을 내린 직접적인 이유는 삼국지에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황제에 즉위한 조비의 총애는 문덕황후 곽씨, 이귀인, 음귀인에게로 돌아갔고, 후한 헌제의 두 딸도 비빈이 되었다. 견씨는 점점 슬픔에 빠져 원망하는 말을 했고, 이것이 조비를 화나게 하여 6월에 죽음을 내렸다는 것이다.[4]하지만 당대 사서인 《위략(魏略)》이나 후대 사서인 《한진춘추(漢晋春秋)》는 견씨의 죽음이 곽귀인의 음모라고 주장한다. 《자치통감》도 이를 따라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자 곽귀인이 이를 거짓으로 조비에게 참소했고, 그래서 조비가 견씨에게 죽음을 명했다고 기록하였다.[4]
그 외에 당대 사서인《위서》에서는 조비가 견씨를 죽이지 않았으며 견씨가 병으로 죽자 애통해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역사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다.[4]
한편, 삼국지집해의 저자 노필은 견씨의 아들 조예가 조비의 아들이 아니라 견씨의 전남편인 원희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이 때문에 조비가 견씨를 사사했다고 주장했다.[4]
《위지》(魏志) 문제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황후가 자살 명령을 받은 다음날 일식이 일어났다. 제관은 태위(太尉)를 파면하듯이 상주했지만, 조비는 “천변지이는 나라를 치료하는 사람에게의 견책이다. 어째서 자기보다 하위의 사람에게 책임을 물리는가”라고 해서 탄핵을 그만두게 했다.[6]
『삼국지』 위서 명제기에는 명제가 경초 3년(239년)에 36세로 붕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역산하면 출생 연도가 건안 9년(204년)이 된다.[10] 이 점에 대해「삼국지집해」의 저자 盧弼|노필중국어은 조예가 문제로부터 특별히 냉대받은 점 등을 방증으로 제시하며, 조예의 친부는 문제가 아니라 견씨의 전 남편인 원희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0]
이 설에 따르면, 조조가 기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조비가 원희의 아내였던 견씨를 빼앗았을 때, 훗날의 조예는 원희의 아들로서 이미 세상에 태어났으며, 조비는 그 아들을 (냉대하면서도) 양자로서 양육했다는 것이 된다.[10]
다만 일반적으로는 『삼국지』 위서 명제기의 몰년이 오류라고 해석되며, 예를 들어 『삼국지』의 주석가 배송지는 명제의 몰년은 34세가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경우 명제의 아버지는 문제로 문제없게 된다.[10]
3. 2. 조식과의 로맨스 및 낙신부 전설
조비의 동생인 조식은 견황후를 흠모하였으나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조비가 견황후에게 자살을 명하고, 남동생 등을 푸대접한 것을 모티브로 하여 창작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42] 특히 조식의 대표작 “낙신부”(洛神賦)의 모델이 견황후라는 설은 진나라와 육조 시대부터 이미 원형을 볼 수 있다. 남조에서는 궁체시로 불리는 감미로운 연애시가 유행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련 전설이 나타나기 쉬웠다고 추정된다.[42] 이 이야기는 지금도 여러 매체의 소재로 쓰이고 있으며, 낙(洛)수의 여신 복(宓)비가 견씨의 원형이기 때문에 해당 매체에서 견씨의 이름은 복(宓) 혹은 낙(洛)으로 나온다.
견부인의 개인적인 이름은 현존하는 어떠한 역사적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견부인에게 "부"(宓, Fú)와 "락"(洛, Luò)[33]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녀와 조식 사이의 로맨스에 대한 전설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조식 연구 전문가인 로버트 조 커터는 이를 "아름다운 부인, 황제, 그리고 낭만적인 형제 사이의 삼각관계에 내재된 가능성을 이용하여, [''낙신부''(洛神賦)]에서 영감을 얻은 일화적 허구"라고 결론 내린다.[34]
당나라 작가 이선의 《문선》 주해에 실린 익명의 필기에 따르면, 조식이 최근 세상을 떠난 견황후의 혼령을 만나 ''감견부''(感甄賦, 견부인에게 감동받아 쓴 부)라는 시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후 조예는 삼촌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 대한 이 시를 발견하고, 제목을 "낙신의 부"(洛神賦)로 변경했는데, 이는 "낙의 여신에 대한 랩소디" 또는 "신성한 락에 대한 랩소디"로 번역될 수 있으며, 이 두 번째 해석은 견부인의 이름인 락을 언급하는 것으로 추정된다.[35] 이 시에는 부비 (宓妃, Fúfēi)라는 이름의 낙수(洛水)의 정령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조식이 그녀에게 반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견황후를 대신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35]
3. 3. 기타 전설
세설신어에 나와 있는 조조가 견황후를 차지하려 했다는 이야기에 기반하여 견씨의 죽음을 조조와의 관계로 설명하는 가설도 있고, 낙신부의 전설에 기반하여 조식과의 관계로 설명하는 가설도 있다. 많은 대중적인 이야기들은 견씨가 조비의 동생인 조식과 은밀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죽었다고 추측하지만, 이는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고 가능성도 희박하다.[24] 일부 더 환상적인 이야기에서는 그녀가 204년 업 전투를 조조가 시작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26]정사에는 견씨의 용모에 대한 묘사가 없지만, 후세에는 낙수의 여신인 낙빈의 이미지와 겹쳐, 조조와 조식에게 흠모받았다는 전설(다만,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불명)이 더해져, 이른바 절세 미녀가 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옥 같은 피부에 꽃 같은 용모(肌는 옥과 같고, 아름다운 용모는 꽃과 같다)"의 미인으로 묘사된다.
- 뱀을 길러 그 움직임을 관찰하여 기발한 머리 모양을 만들었는데, 그 머리 모양은 매일 변화했고 "영사계"라고 불렸다 (『채란잡지』).
- 『문선』의 이선주는 조식의 대표작인 洛神賦|낙신부중국어의 모델이 견씨라는 『감견기』라는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조식은 견씨를 사모했지만 조조의 명으로 함께할 수 없었다. 견씨 사후 조식의 마음을 알고 있던 문제는 견씨의 베개를 조식에게 주어 위로했다. 낙수 변에서 야영한 조식이 베개를 베고 잠들자 꿈에 견씨가 나타나 조식에 대한 그리움을 전했다. 조식은 슬픔과 기쁨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감견부"를 지었다. 후에 조예가 "낙신부"로 개명했다고 한다.
- 오빠나 언니의 이름은 남아 있지만 그녀 자신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 널리 퍼졌으며, 현재에도 越劇|월극중국어 등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이들 극에서는 『낙신부』에 연유하여 견씨의 이름을 "견복(甄宓)"·"견락(甄洛)" 등으로 하고 있다("복(宓)"은 복희씨의 딸인 복비를 가리킨다. 낙수에서 익사하여 여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 『요산당외기』는 업성에 들어간 조조가 견씨를 부르자 조비가 이미 원소의 저택에 갔다는 말을 듣고 "올해 적을 격파한 것은 그녀를 얻기 위해서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 견씨가 죽을 때, 문제는 푸른 기운이 땅에서 솟아 하늘까지 닿는 꿈을 꿨고, 이를 주선에게 물었다. 이에 대해 주선은 "천하의 어느 곳에서 고귀한 신분의 여성이, 억울한 죄로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때 이미 문제는 견씨에게 죽음을 명하는 옥새 서신을 사자에게 보냈고, 이를 들은 문제는 후회하여 그 사자를 뒤쫓게 했지만, 결국 따라잡지 못했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주선전). 또한 『한진춘추』에 따르면, 견씨의 죽음 후, 조비는 그녀의 유해에 대해, 정돈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그 입에 겨를 채워 넣었으며, 관에도 넣지 않고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 후세에, 민간에서는 신격화되어 수선화의 꽃의 신으로 숭배받는다.
4. 평가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는 진부인(견황후)의 생애에 관한 권위 있는 역사적 자료이다. 배송지는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왕침, 순이, 완적이 저술한 위서와 어환이 저술한 위략 등 다른 텍스트의 정보를 통합하고 개인적인 해설을 덧붙였다.
''삼국지''에 실린 진부인의 전기에는 진씨가 가족을 돌본 일, 시어머니 변씨 부인에 대한 효심, 조비의 다른 부인들을 너그럽게 대했던 일 등 훌륭한 도덕적 행위에 대한 일화가 원래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일화는 대부분 ''위서''와 ''위략''에 기록되었으며, 배송지에 의해 ''삼국지''에 추가되었다.
배송지는 진부인과 위나라 다른 귀부인들의 "덕행"과 관련된 일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는 대체 자료가 부족하여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위서''와 ''위략''은 조위의 공식 역사서였으므로 진부인에게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화 중 일부는 진부인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해 위나라 역사가들에 의해 조작되었을 수 있다. 배송지는 진수가 처음 ''삼국지''를 편찬할 때 의심스러운 정보를 생략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언급했다.
정사에는 견씨의 용모에 대한 묘사가 없지만, 후세에는 낙수의 여신인 낙빈의 이미지와 겹쳐, 조조와 조식에게 흠모받았다는 전설(다만,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불명)이 더해져, 이른바 절세 미녀가 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옥 같은 피부에 꽃 같은 용모(肌는 옥과 같고, 아름다운 용모는 꽃과 같다)"의 미인으로 묘사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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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后以漢光和五年十二月丁酉生
Book of Wei
[2]
서적
"[黃初二年六月]丁卯,夫人甄氏卒"
Chen and Pei
[3]
서적
會后疾遂篤,夏六月丁卯,崩于鄴
Book of Wei
[4]
서적
"文昭甄皇后,中山無極人,明帝母,漢太保甄邯後也,世吏二千石。父逸,上蔡令。后三歲失父"
Chen and Pei
[5]
서적
"逸娶常山張氏,生三男五女:長男豫,早終;次儼,舉孝廉,大將軍掾、曲梁長;次堯,舉孝廉;長女姜,次脫,次道,次榮,次即后"
Book of Wei
[6]
서적
"後相者劉良相后及諸子,良指后曰:「此女貴乃不可言。」 ...后自少至長,不好戲弄。年八歲,外有立騎馬戲者,家人諸姊皆上閣觀之,后獨不行。諸姊怪問之,后荅言:「此豈女人之所觀邪?」年九歲,喜書,視字輙識,數用諸兄筆硯,兄謂后言:「汝當習女工。用書為學,當作女博士邪?」后荅言:「聞古者賢女,未有不學前世成敗,以為己誡。不知書,何由見之?」"
Book of Wei
[7]
서적
"後天下兵亂,加以饑饉,百姓皆賣金銀珠玉寶物,時后家大有儲穀,頗以買之。后年十餘歲,白母曰:「今世亂而多買寶物,匹夫無罪,懷璧為罪。又左右皆饑乏,不如以穀振給親族鄰里,廣為恩惠也。」舉家稱善,即從后言"
Chen and Pei
[8]
서적
"后年十四,喪中兄儼,悲哀過制,事寡嫂謙敬,事處其勞,拊養儼子,慈愛甚篤。后母性嚴,待諸婦有常,后數諫母:「兄不幸早終,嫂年少守節,顧留一子,以大義言之,待之當如婦,愛之宜如女。」母感后言流涕,便令后與嫂共止,寢息坐起常相隨,恩愛益密"
Yu
[9]
서적
"建安中,袁紹為中子熙納之。熙出為幽州,后留養姑"
Chen and Pei
[10]
서적
"熙出在幽州,后留侍姑。及鄴城破,紹妻及后共坐皇堂上。文帝入紹舍,見紹妻及后,后怖,以頭伏姑膝上,紹妻兩手自搏。文帝謂曰:「劉夫人云何如此?令新婦舉頭!」姑乃捧后令仰,文帝就視,見其顏色非凡,稱歎之。太祖聞其意,遂為迎取"
Yu
[11]
서적
(初,曹操攻屠鄴城,袁氏婦子多見侵略,而操子丕私納袁熙妻甄氏。)
Houhanshu
[12]
서적
Hou Han Shu
Zhonghua Shuju
1965
[13]
서적
"[建安]十二年,太祖至遼西擊烏丸。尚、熙與烏丸逆軍戰,敗走奔遼東,公孫康誘斬之,送其首"
Chen and Pei
[14]
서적
"及冀州平,文帝納后於鄴,有寵,生明帝及東鄉公主"
Chen and Pei
[15]
서적
"后寵愈隆而彌自挹損,後宮有寵者勸勉之,其無寵者慰誨之,每因閑宴,常勸帝,言「昔黃帝子孫蕃育,蓋由妾媵衆多,乃獲斯祚耳。所願廣求淑媛,以豐繼嗣。」帝心嘉焉。其後帝欲遣任氏,后請於帝曰:「任旣鄉黨名族,德、色,妾等不及也,如何遣之?」帝曰:「任性狷急不婉順,前後忿吾非一,是以遣之耳。」后流涕固請曰:「妾受敬遇之恩,衆人所知,必謂任之出,是妾之由。上懼有見私之譏,下受專寵之罪,願重留意!」帝不聽,遂出之"
Book of Wei
[16]
서적
"十六年十月,太祖征關中,武宣皇后從,留孟津,帝居守鄴。時武宣皇后體小不安,后不得定省,憂怖,晝夜泣涕;左右驟以差問告,后猶不信,曰:「夫人在家,故疾每動,輙歷時,今疾便差,何速也?此欲慰我意耳!」憂愈甚。後得武宣皇后還書,說疾已平復,后乃懽恱。十七年正月,大軍還鄴,后朝武宣皇后,望幄座悲喜,感動左右。武宣皇后見后如此,亦泣,且謂之曰:「新婦謂吾前病如昔時困邪?吾時小小耳,十餘日即差,不當視我顏色乎!」嘆嗟曰:「此真孝婦也。"
Book of Wei
[17]
서적
"二十一年,太祖東征,武宣皇后、文帝及明帝、東鄉公主皆從,時后以病留鄴。二十二年九月,大軍還,武宣皇后左右侍御見后顏色豐盈,怪問之曰:「后與二子別久,下流之情,不可為念,而后顏色更盛,何也?」后笑荅之曰:「叡等自隨夫人,我當何憂!」后之賢明以禮自持如此"
Book of Wei
[18]
서적
"延康元年正月,文帝即王位,六月,南征,后留鄴。黃初元年十月,帝踐阼。踐阼之後,山陽公奉二女以嬪于魏,郭后、李、陰貴人並愛幸,后愈失意,有怨言。帝大怒,二年六月,遣使賜死,葬于鄴"
Chen and Pei
[19]
서적
中国帝王后妃大辞典
Hebei People's Publishing House
[20]
서적
"甄后之死,由后之寵也。黃初三年,將登后位,文帝欲立為后,中郎棧潛上疏... 文帝不從,遂立為皇后"
Chen and Pei
[21]
서적
"初,甄后之誅,由郭后之寵,及殯,令被髮覆面,以糠塞口,遂立郭后,使養明帝"
Xi
[22]
서적
"有司奏建長秋宮,帝璽書迎后,詣行在所,后上表曰:「妾聞先代之興,所以饗國久長,垂祚後嗣,無不由后妃焉。故必審選其人,以興內教。令踐阼之初,誠宜登進賢淑,統理六宮。妾自省愚陋,不任粢盛之事,加以寢疾,敢守微志。」璽書三至而后三讓,言甚懇切。時盛暑,帝欲須秋涼乃更迎后。會后疾遂篤,夏六月丁卯,崩于鄴。帝哀痛咨嗟,策贈皇后璽綬"
Book of Wei
[23]
서적
"臣松之以為春秋之義,內大惡諱,小惡不書。文帝之不立甄氏,及加殺害,事有明審。魏史若以為大惡邪,則宜隱而不言,若謂為小惡邪,則不應假為之辭,而崇飾虛文乃至於是,異乎所聞於舊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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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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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n and 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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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帝知之,心常懷忿,數泣問甄后死狀。郭后曰:「先帝自殺,何以責問我?且汝為人子,可追讎死父,為前母枉殺後母邪?」明帝怒,遂逼殺之,勑殯者使如甄后故事"
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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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明帝旣嗣立,追痛甄后之薨,故太后以憂暴崩。甄后臨沒,以帝屬李夫人。及太后崩,夫人乃說甄后見譖之禍,不獲大斂,被髮覆靣,帝哀恨流涕,命殯葬太后,皆如甄后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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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Luo Shen 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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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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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甄을 '견'으로 읽는 것은 삼국시대 이전이므로 진씨로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42]
서적
후비전(后妃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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