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밀로라도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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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일 밀로라도비치는 세르비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정 총독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및 스위스 원정, 암슈테텐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군 경력을 쌓았으며,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당시에는 후방에서 민병대를 모집하고 훈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81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정 총독으로 임명된 그는 예술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검열관으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1825년 12월 당의 난 당시 반란군을 진정시키려다 암살당했다.
미하일은 유아기에 군에 입대했고, 십대 시절 쾨니히스베르크와 괴팅겐, 스트라스부르, 메츠에서 군사학을 공부했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에 따르면 이 교육은 피상적이었고, 미하일은 프랑스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고 한다. 1787년, 16세의 미하일은 러시아로 돌아와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 소위(하급 장교 계급)로 군에 입대했고, 곧 1788년-1790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에 참전했다.
밀로라도비치는 1788년부터 1790년까지의 전쟁에서는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평화 시기에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1796년 근위대 대위였던 그는 파벨 1세의 총애를 받아 1797년 대령, 1798년에는 소장이자 아프셰론 포병 연대장으로 진급했다.
2. 초기 생애
2. 1. 가문 및 유년 시절
미하일 밀로라도비치는 소장 안드레이 밀로라도비치(1726–1798)의 아들이었다. 밀로라도비치 가문은 동방 정교회 세르비아 귀족 가문과 훔(Hum) 출신의 카툰(katun) 씨족에서 유래했으며, 헤르체고비나 산자크에서 유명한 지위에 올랐다. 밀로라도비치 가문의 러시아 분파는 1715년에 설립되었는데, 이때 세 형제 중 한 명인 미하일 1세 밀로라도비치 ()가 투르크에 대한 반란을 선동하기 위해 표트르 1세가 모집했던 인물로, 헤르체고비나에서 러시아로 도망쳐 표트르 1세의 부하로 대령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그는 하디아치 연대의 지휘관이었다. 표트르 1세의 통치 말기에 그는 파블로 폴루보톡의 반역 사건과 관련하여 투옥되었지만, 표트르 1세의 죽음으로 더 이상의 불행을 면했다. 그의 손자 안드레이는 러시아 군대에서 30년간 복무한 후 소러시아 총독과 체르니히우 주 총독으로 민정에 종사했다. 이 가문은 폴타바 주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최대 1,500명의 농노를 상속받았다.
미하일의 아버지는 그를 유아기에 군에 입대시켰고, 나중에 십대 미하일을 쾨니히스베르크와 괴팅겐 대학교, 그리고 스트라스부르와 메츠에서 군사 과학을 공부하도록 보냈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에 따르면, 교육은 피상적이었다. 레스코프는 미하일을 프랑스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 "매력적인 무지"의 소년으로 묘사했고, 그의 프랑스어는 "가장 심각하고 흥미로운 실수"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했다. (일화에 따르면 그는 ''pittoresque''와 ''synagogue''를 ''"pittagogue"''로 혼합했다고 한다). 16세의 미하일은 1787년 러시아로 돌아와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의 소위(하급 장교 계급)로 군에 입대했고, 곧 1788년-1790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에 참전했다.
3. 군 경력
알렉산더 수보로프의 이탈리아 원정군에 합류한 그는 카사노 전투 전야에 렉코를 함락시키고, 고트하르트 패스 통과 과정에서 후위를 지휘하는 등의 공로를 세웠다. 바시냐나 전투에서는 적의 공격으로 세 번이나 말을 바꿔 타면서도 자신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알트도르프에서는 불타는 다리를 건너 보병 돌격을 이끌었다. 이러한 일화들은 그를 용감하고 운 좋은 야전 사령관으로 만들었다.
암슈테텐 전투에서 쿠투조프는 바그라티온의 부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그의 활약은 성 게오르기 훈장 3등급과 중장 승진으로 이어졌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러시아-오스트리아 합동 보병 부대의 러시아 부대를 지휘했으며, 알렉산더 황제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군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1806년부터 1812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1806년 12월 13일 부쿠레슈티를 함락시키고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금검을 받았다. 1807년 5월 지우르지우 점령은 실패했지만, 6월 2일 오빌레슈티에서 튀르크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1812년 전쟁 초기, 보로디노 전투 전야에 14,600명의 민병대원을 이끌고 전투에 복귀했다. 쿠투조프는 그를 우익(북부) 최전선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프랑스군의 좌익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투 후, 후위를 지휘하며 뮈라와 협상을 맺어 프랑스군이 모스크바를 무사히 점령하도록 했다.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이후, 러시아군은 세 개의 추격대열로 나뉘었고, 비아즈마 전투에서 승리했다. 1813년 뤼첸 전투에서는 늦게 도착하여 전투 결과에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바우첸 전투에서는 우디노를 격퇴했다.
1813년의 공로로 성 안드레아 훈장, 백작 칭호, 알렉산더의 휘장을 어깨에 착용할 권리를 얻었다. 1814년 파리에서는 고르차코프 장군의 보병과 함께 도시에 포격을 가했다.
3. 1. 이탈리아 및 스위스 원정 (1799-1800)
밀로라도비치는 1788년부터 1790년까지의 전쟁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평화 시기에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1796년 근위대 대위였던 그는 파벨 1세의 총애를 받아 1797년 대령, 1798년에는 소장이자 아프셰론 포병 연대장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알렉산더 수보로프의 이탈리아 원정군에 합류했다.
그는 카사노 전투 전야에 렉코를 함락시키고, 고트하르트 패스 통과 과정에서 후위를 지휘하는 등의 공로를 세워 수보로프의 깊은 신뢰를 얻었다. 바시냐나 전투에서는 적의 공격으로 세 번이나 말을 바꿔 타면서도 자신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알트도르프에서는 불타는 다리를 건너 보병 돌격을 이끌었다. 이러한 일화들은 밀로라도비치를 용감하고 운 좋은 야전 사령관이라는 이미지를 굳혔고, 그는 평생 동안 이러한 이미지를 유지했다.
밀로라도비치는 러시아에서 칭송받았지만, 프랑스 측의 평가는 달랐다. 아돌프 티에르는 밀로라도비치를 "뛰어난 용맹함을 지닌 세르비아인(sic)이지만, 군사적 지식이 전혀 없고, 방탕하며, 문명의 모든 악덕과 야만의 모든 악덕을 결합한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파벨 1세는 밀로라도비치에게 1등급 성 안나 훈장, 예루살렘 성 요한 훈장, 알렉산더 네프스키 훈장을 수여했다. 수보로프는 군사 규정을 어기고 밀로라도비치를 야전군에서 자신의 참모("대기 중 장군")로 전출시켰는데, 파벨은 훗날 이를 수보로프 해임의 구실로 삼았다. 밀로라도비치와 파벨의 차남 콘스탄틴의 우정 또한 스위스 원정에서 시작되었다. 콘스탄틴은 밀로라도비치에게 "나의 친구 밀로라도비치에게"라는 문구가 새겨진 금검을 선물했고, 밀로라도비치는 죽을 때까지 이 검을 간직했다.
3. 2. 암슈테텐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
밀로라도비치는 암슈테텐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쿠투조프는 그의 세 개 연대에 바그라티온의 부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밀로라도비치의 시기적절한 도착과 그의 처분하에 있는 예비군의 지능적인 활용을 포함한 러시아군의 능숙한 기동은 후위의 붕괴를 막았다"라고 평가받았다. 암슈테텐에서의 행동 덕분에 쿠투조프는 프랑스군과의 접촉을 끊을 수 있었고, 러시아에게 치명적이었을 전면전을 피할 수 있었다. 밀로라도비치 자신의 전투 보고서는 프랑스군의 기록과 모순되며, 바그라티온의 간결한 보고서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양측은 각자의 관점을 제시했고, 밀로라도비치는 자신의 행동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암슈테텐에서의 그의 활약은 성 게오르기 훈장 3등급과 중장으로의 승진으로 보상받았다. 1805년 11월 11일, 밀로라도비치는 뒤렌슈타인 전투(러시아 자료에서는 크렘스 전투로 언급됨)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했지만, 프랑스군은 그의 부대가 큰 피해를 입히기 전에 철수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밀로라도비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합동 보병 부대(11,795명 중 2,875명)의 러시아 부대를 지휘했다. 이 부대는 프랑스군이 버리고 간 프라첸 고지에 배치된 네 개의 부대 중 하나였다. 다른, 더 큰 부대는 오스트리아군의 지휘 아래 있었고, 쿠투조프의 긴밀한 존재는 분할된 지휘의 위험을 다소 완화했다. 알렉산더 황제는 다른 부대가 배치되기 전에 이 부대가 이동하도록 명령했고, 황제의 명령에 반대할 수 없었던 쿠투조프는 적의 행동과 어려운 지형을 무시하고 밀로라도비치에게 골드바흐 시내를 건너 코빌니체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언덕과 안개로 시야가 가려져 부대는 프랑스군의 대부분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장 드 뒤 소의 부대는 혼성 부대를 맹렬하게 공격했고, 밀로라도비치는 후퇴했다. 알렉산더는 그의 형제 콘스탄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하지만 스콧 보우든과 크리스토퍼 더피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밀로라도비치가 직접 콘스탄틴에게 연락했다고 주장한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우위를 점한 거의 유일한 러시아 장군이었다"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카를 빌헬름 폰 톨 장군은 밀로라도비치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의 부대가 가장 먼저 후퇴했고, 연합군을 멸망으로부터 구한 것은 밀로라도비치가 아니라 바그라티온이라고 주장했다.
3. 3. 러시아-튀르크 전쟁 (1806-1812)
1806년부터 1812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러시아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튀르크 군대가 부쿠레슈티를 점령하며 대응하자, 러시아 총사령관 이반 이바노비치 미헬손은 밀로라도비치를 투입했다. 밀로라도비치는 1806년 12월 13일 큰 저항 없이 부쿠레슈티를 함락시켰고, "부쿠레슈티 함락"에 대한 공로로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금검을 하사받았다. 프랑스 특사 세바스티아니의 조종을 받은 튀르크는 5일 후에야 전쟁을 선포했다. 그 이후 대규모 군사 작전은 없었다. 1807년 5월, 밀로라도비치는 지우르지우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부쿠레슈티로 퇴각했다. 1807년 6월 2일, 그는 오빌레슈티에서 튀르크군의 진격을 막아내며 자신의 명성을 회복했다.
1808년과 1809년에는 주목할 만한 군사 작전은 없었고, 러시아 최고 장군들 사이의 이중 간첩 활동이 두드러졌다. 최고위급에서는 미하일 쿠투조프가 알렉산드르 프로조로프스키와 갈등을 겪었고, 그 아래에서는 밀로라도비치와 표트르 바그라티온 사이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바그라티온은 일시적으로 프로조로프스키를 대신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이후 밀로라도비치와 바그라티온 모두 지휘권을 상실했다. 1810년 초, 알렉산더 1세는 밀로라도비치를 최전방 임무에서 불러들여 벨라루스에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도록 지시했다. 1810년 4월, 밀로라도비치는 키예프 주지사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1810년 9월 공식적으로 해임되었지만, 11월에 다시 키예프 주지사로 복귀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3. 4.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1812)
1812년 전쟁 초기에 밀로라도비치는 후방에서 자원군 민병대를 모집하고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보로디노 전투 전야에 14,600명의 민병대원을 이끌고 전투에 복귀했다. 쿠투조프는 밀로라도비치를 우익(북부)측 최전선 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이 부대는 바고부트의 제2보병군단과 오스테르만-톨스토이의 제4보병군단으로 구성되었다. 전투 계획은 밀로라도비치에게 옛 스몰렌스크-모스크바 도로를 방어할 것을 요구했다. 전투 당일 쿠투조프는 적의 공격이 중앙과 좌익에 집중되어 있음을 깨닫고, 오전 9시경 밀로라도비치에게 남쪽으로 진격하여 프랑스군의 좌익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밀로라도비치는 자신의 부대 앞에서 기병으로 진격하다가 세묘노브스코예 전투의 격전에 휘말렸고, 바클레이 드 톨리, 예르몰로프, 라예프스키와 함께 제4사단 방어선으로 피신했다.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에 그의 부대는 러시아 전선 중앙에 자리 잡고 프랑스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바고부트 군단은 정오 무렵, 오스테르만 군단은 오후 4시 무렵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가 끝날 무렵,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을 방어선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밀로라도비치의 부대는 출발했던 스몰렌스크 도로로 후퇴했다. 바고부트는 그곳에 자리 잡고 밤까지 폴란드 기병대의 맹렬한 공격에 맞서 도로를 지켰다.
전투 후, 밀로라도비치는 후위를 지휘하여 쿠투조프의 군대를 진격하는 프랑스군으로부터 보호했다. 적의 압력으로 인해 그는 모스크바 항복을 결정한 필리 필리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밀로라도비치는 쿠투조프를 대신하여 뮈라와 협상을 맺었다. 프랑스가 모스크바를 무사히 점령하고 싶다면, 밀로라도비치가 동쪽으로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끈질긴 시가전에 직면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헤리퍼드 조지는 "뮈라는 단순한 장군과 협상하는 것을 자신의 체면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적었고, 그는 세바스티아니에게 협상을 맡겼다고 썼다. 그러나 표도르 글린카에 따르면, 뮈라와 밀로라도비치는 모스크바 항복 전에 서로 직접 협상했고, 밀로라도비치는 프랑스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기병이 러시아 후위를 공격한 후에야 세바스티아니에게 연락했다. 세바스티아니는 협정을 존중하여 기병을 불러들이고 진격하는 프랑스군 사이에 갇힌 두 개의 러시아 연대의 안전한 후퇴를 허용했다. 뮈라와 러시아 후위 사이의 일시적인 연락 두절로 쿠투조프는 서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뮈라는 브론니츠를 향해 남동쪽으로 계속 진격한 반면 쿠투조프는 반대 방향으로 진격했다.
쿠투조프는 포돌스크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밀로라도비치를 파견하여 동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진격하는 프랑스군 앞에 진을 치게 했다. 4일 후, 뮈라는 밀로라도비치와 교전하여 그를 크라스나야 파흐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글린카에 따르면 의도적으로 함정을 파놓았다) 프랑스 기병 정찰병이 그의 본부를 급습했을 때 밀로라도비치는 간신히 죽음이나 포로에서 벗어났다. 밀로라도비치는 치리코보에서 뮈라의 군단을 성공적으로 역습하여 한 준장을 포로로 잡았다. 이 시점에서 쿠투조프는 더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선호했고, 주력군은 타루티노로 진격한 반면, 이제 오스테르만-톨스토이의 군단을 지휘하게 된 밀로라도비치는 타루티노에서 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체르니시냐 강에 후퇴 지점을 확보했다. 글린카는 밀로라도비치가 프랑스군과 끊임없이 싸웠으며, 4번의 중요한 전투를 포함했고, 그의 업적 중 소수만이 대중의 눈에 띄었다는 것을 개탄했다. "그는 '''베도모스티'''의 영웅이 아니라 역사와 미래의 영웅이다." 체르니시냐에서 대치하는 동안 밀로라도비치는 뮈라와 또 다른 일대일 협상을 했는데, 그의 진영에는 포로로 잡힌 많은 프랑스군 병사들이 가득했다. 현대 러시아 역사가들은 러시아 기둥의 부족한 조정이 프랑스 진영의 부족한 규율과 맞먹는 타루티노 전투에서 그의 행동을 결정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했지만, 글린카와 윌리엄 캐스카트와 같은 당대인들에게는 그 전투가 분명한 승리였다.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후, 러시아군은 밀로라도비치, 마트베이 플라토프 및 쿠투조프 자신이 이끄는 세 개의 추격대열로 나뉘었다. 밀로라도비치는 네 개의 프랑스 군단(보아르네, 다부, 네이, 포냐토프스키)이 점령한 비아즈마로 직접 진격했고, 플라토프는 북쪽에서 그곳으로 접근했다. 밀로라도비치와 플라토프는 비아즈마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비아즈마 전투는 새벽에 시작되었다. 밀로라도비치는 보아르네의 반격을 견뎌내고 다부의 부대가 숲 속으로 숨도록 강제한 최전방 포병을 신속하게 배치했다. 다부는 비아즈마에서 네이와 재결합하기 위해 우회로를 사용하는 데 2시간을 낭비했고, 오후 2시에 밀로라도비치가 총공격을 명령했을 때 프랑스군은 이미 저항할 수 없었다. 오후 5시까지 밀로라도비치는 도시를 장악하고 프랑스군 보급열차를 압수했지만(단 세 문의 대포만 압수했다).
후퇴하는 프랑스군 앞에서 행군하는 밀로라도비치의 세 개 군단은 크라스니 근처 프랑스군 후방에 진을 쳤다. 밀로라도비치는 대규모 보급열차를 압수하고 네이와 보아르네를 나폴레옹의 군대와 분리하면서 3일간의 크라스노이 전투를 시작했다. 다음 날, 보아르네는 돌파에 부대를 지치게 했고 밀로라도비치의 항복 제안을 거절했으며, 밤에 그의 군단 잔여 병력은 숲을 통해 탈출했다. 네이는 밀로라도비치의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밀로라도비치는 다시 명예로운 항복을 제안했지만, 네이는 사자를 체포하고 10사단과 11사단을 정면 공격에 투입했다. 밤에 3,000명의 병력이 얼어붙은 드네프르를 건너 탈출했지만, 오르샤에 도착한 것은 800명뿐이었다. 밀로라도비치는 베레지나 강 도하를 이틀 늦게 차단할 기회를 놓쳤다.
3. 5. 1813-1814년 대프랑스 동맹 전쟁
표트르 비트겐슈타인이 러시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자, 밀로라도비치는 바클라이 데 톨리, 랑제롱, 플라토프, 토르마소프 등과 함께 공개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토르마소프는 비트겐슈타인에게 복종을 거부하고 군을 떠났고, 밀로라도비치는 반대파의 "공식 대변인"이 되었다. 이 갈등은 뤼첸 전투와 바우첸 전투에서 패배 후 비트겐슈타인이 사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813년 5월, 뤼첸에서 밀로라도비치의 1만 2천 명 군단은 늦게 도착하여 전투 결과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후 엘베 강으로 후퇴를 지원했지만, 프랑스군은 그의 "허풍"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다. 캐서카트는 그의 후위 작전을 칭찬했지만, 5월 12일까지 그의 군단은 약 1만 명으로 줄었다고 지적했다. 바우첸에서 밀로라도비치는 우디노를 트론베르크에서 몰아냈지만,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밀로라도비치와 콘스탄틴은 1년 동안 보병과 기병 예비대 지휘관으로 긴밀히 협력했다. 1813년 8월 플레슈비츠 휴전 만료 후, 밀로라도비치는 2만 4천 명의 근위대와 척탄병 예비군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향했고, 콘스탄틴은 1만 1천 명의 기병과 포병을 이끌고 뒤따랐다. 그들은 드레스덴으로 집결한 4개 연합군 기둥 중 하나였으나, 드레스덴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사흘 후 쿨름 전투에서 방담을 상대로 승리했다. 라이프치히 전투 전날, 마르게본 근처에 주둔한 밀로라도비치와 콘스탄틴의 군대는 연합군 예비대를 구성했다. 1813년 12월, 그들은 라인 강을 건너 프랑스로 진격했다.
밀로라도비치는 1813년의 공로로 성 안드레아 훈장, 백작 칭호, 알렉산더의 휘장을 어깨에 착용할 권리를 얻었다. 그는 1814년 파리에서 마지막 전역을 마무리했는데, 고르차코프 장군의 보병이 프랑스 방어 포병을 제압한 후, 20문의 곡사포를 가져와 도시에 사격을 개시했다.
4.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정 총독 (1818-1825)
폰텐블로 조약(1814년) 이후 알렉산드르 1세는 밀로라도비치를 러시아 근위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818년, 밀로라도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지사가 되어 수도의 군대, 경찰, 민정 행정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1825년 데케엠브리스트 봉기 진압 실패에서 볼 수 있듯, 경찰청장으로서 정치 감시와 수사에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데케엠브리스트에 대한 증거를 "허튼소리"라며 무시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헤르첸은 행정가로서의 밀로라도비치를 조롱하면서도, 그를 "시를 이해하는 전사 시인"이라고 불렀다.
밀로라도비치는 "완벽한 혼란과 가장 절묘한 취향이 결합된" 사치스러운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고, 침실 하나 없이 "나는 기분에 따라 밤을 보낸다"라고 말하곤 했다. 황제로부터 받은 재산과 보상은 그의 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는 토지와 농노의 대부분을 매각해야 했다. 남은 재산의 사후 매각으로도 그의 빚을 간신히 충당할 수 있었다.
4. 1. 예술계와의 관계 및 검열
밀로라도비치는 러시아 시의 황금기 (Golden Age of Russian Poetry) 절정기에 검열관으로서 작가, 배우들과 자주 접촉했다. 그의 행정은 주로 예술가들의 회고록을 통해 기억된다.1820년, 밀로라도비치는 정치 선전 혐의로 알렉산드르 푸쉬킨을 심문했다. 푸쉬킨은 "밀수입 시"를 태우고 기억나는 몇 편을 낭송했다. 밀로라도비치는 혐의를 기각하고 푸쉬킨을 남부로 보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밀로라도비치의 상냥한 행동이 없었다면 푸쉬킨의 친구들이 그를 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작가이자 출판인인 니콜라이 그레치는 1824년 밀로라도비치가 자신과 베자크 소유 인쇄소의 검열 규정 위반 혐의를 조사했다고 회상했다. 그레치는 증거를 반박하고 무사히 벗어났지만, 밀로라도비치는 1828년까지 경찰 및 법원 조사를 받게 했다.
4. 2. 사생활 및 성적 취향 논란
밀로라도비치는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기에, 그의 사생활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당대 사람들은 그가 극장 학교에 "자신만의 하렘을 만들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샤호프스코이와 마이코프의 도움으로 그러한 일이 현실이 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밀로라도비치는 "여성에게 약한 구석이 있었고" 정기적으로 샤호프스코이와 그의 극장 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저녁을 보냈으며, 총애를 받는 여학생들은 졸업 후 장군의 호의를 누렸다고 한다. 캐서린 슐러(Catherine Shuler)는 밀로라도비치와 다른 고위 관리들의 욕망이 무대에서 여성 매매의 주요 원인이었을 수 있으며, "농노 여배우와 황실 여배우 사이의 유사성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1822년, 알렉산드라 콜로소바(Alexandra Kolosova)는 이러한 관행에서 벗어나 파리로 도망친 최초의 여배우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그녀는 알렉산더 황제의 보호를 구했지만, 밀로라도비치는 그녀에게 제안된 "가장 사소한 역할"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24시간 동안 체포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의 마지막 연인은 발레리나 예카테리나 텔레쇼바(Yekaterina Teleshova)였으며, 그녀는 이전에 외교관 알렉산더 그리보예도프(Alexander Griboyedov)와 관계를 맺었는데, 그는 "장기적으로 장군과 경쟁할 만큼 돈이 부족했다"고 한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브류하노프(Vladimir Bryukhanov)는 밀로라도비치가 동성애자였다고 주장했지만, 나데즈다 두로바(Nadezhda Durova)의 회고록과 같은 반대 증거는 무시되거나 일축되었다. 남자로 변장한 두로바는 1810년 밀로라도비치의 부관이었고, 이후 그의 여성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장군의 태도와 하급 장교들과의 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기록했다.
5. 12월 당의 난과 죽음
1825년 여름, 알렉산드르 1세는 콘스탄틴을 계승 순위에서 제외하고 니콜라이를 왕위 예비 상속자로 하는 비밀 칙령을 발표했다. 알렉산더 1세가 타간로그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밀로라도비치는 니콜라이를 압박하여 콘스탄틴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그는 국무원을 설득하여 니콜라이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콘스탄틴에 대한 충성 맹세는 사실상 퇴위 행위라고 주장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바르샤바 간의 서신 교환에는 2주가 걸렸고, 그 동안 밀로라도비치는 사실상 섭정으로 행동했다. 콘스탄틴은 왕위를 거부하고 니콜라이의 즉위를 축복했지만, 니콜라이는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니콜라이는 12월당의 봉기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고, 밀로라도비치와 이 문제를 논의했다. 밀로라도비치는 경찰력을 동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의 조사는 성과가 없었다.
12월 13일(율리우스력 12월 25일) 저녁, 니콜라이는 자신을 황제로 선포했다. 다음날 아침, 밀로라도비치는 니콜라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도시가 평온하다고 확신시켰다. 알렉산더 폰 벤켄도르프를 비롯한 목격자들은 그가 평소처럼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군대가 반란 상태로 궁전으로 행진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12월 14일(율리우스력 12월 26일) 정오 무렵, 밀로라도비치는 궁전 광장에서 니콜라이에게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했다. 니콜라이는 밀로라도비치에게 군사 총독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군대를 진정시켜야 한다고 대답했다. 밀로라도비치는 반란군에게로 가서 콘스탄틴의 칼을 보여주며 복종을 촉구했다.
12시 20분에서 12시 30분 사이, 표트르 카호프스키가 밀로라도비치에게 총을 쐈고, 예브게니 오볼렌스키가 총검으로 찔렀다. 밀로라도비치는 근처 집으로 옮겨졌으나, 외과의들이 도착하기 전에 약탈자들이 그의 소지품을 가져갔다. 의료진은 총알을 제거했고, 밀로라도비치는 유서를 작성하여 농노들에게 자유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밀로라도비치는 12월 15일(율리우스력 12월 27일) 오전 3시경 사망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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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Alexander Suvorov#Le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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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Dinastichesky rok (Династический ро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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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nitz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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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Ke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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