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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부쿄노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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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부쿄노산미는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가메야마 천황의 측실이었으며 고다이고 천황, 손친 법친왕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기타바타케 지카코, 가데노코지 쓰네코, 기타바타케 스케코 등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특히 『태평기』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묘사되며, 겐코의 난 당시 남편과 아들의 안위를 기원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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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부쿄노산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민부쿄노산미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태평기』 권6의 장면. 사이타마현립 역사민속박물관 소장
민부쿄노산미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태평기』 권6의 장면. 사이타마현립 역사민속박물관 소장.
인물 정보
이름민부쿄노산미
로마자 표기Minbukyō no Sanmi
출생13세기 후반
사망겐토쿠 원년 (1329년) 또는 그 이후
배우자가메야마 상황
존치 친왕 (후의 고다이고 천황)
요시다 사다후사?
자녀손친 법친왕 (아버지: 가메야마 상황)
모리요시 친왕/존운 법친왕 (아버지: 존치 친왕)

2. 비교적 확실한 생애

『마스카가미(増鏡)』 「무라시우(むら時雨)」에 따르면 통칭은 민부쿄노산미(民部卿三位)라고 한다. 『가나자와 문고 문서』에 수록된 전 싯켄 가나자와 사다아키의 서장(겐토쿠 원년(1329년) 12월 11일자)에서는 「민부쿄노산폰(民部卿三品)」이라고 불렸다.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2017년 시점에서도 일본사 연구자 가메다 토시타카는 명확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가메야마 상황가겐 3년 9월 15일(1305년 10월 4일)에 붕어하기 전에 그의 측실이 되었다. 가메야마 상황이 붕어하기 직전에 임신하여, 이듬해인 가겐 4년(1306년)에 손친 법친왕을 낳았다. 가메야마 상황의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마스카가미』 「무라시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가나자와 사다아키의 서장을 통해 손친 법친왕의 통칭이 쇼고인준미야(聖護院准宮)였음을 알 수 있다. 손친의 생년은 『미치히라공기(道平公記)』 겐코 4년(1324년) 8월 22일조에 당시 세는 나이로 19세였다는 기록을 통해 역산할 수 있다.

그 후,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엔쿄 원년(1308년), 가메야마 상황의 손자인 타카하루 친왕(훗날의 고다이고 천황)과의 사이에서 손운 법친왕(훗날의 모리요시 친왕)을 낳았다. (덧붙여, 『마스카가미』 「무라시우」에서는, "요즘 후(중궁 사이온지 기시)의 뇨보 (여관)가 되어 있는 분으로, 민부쿄노산미라 불리는 분이 금상의 아들 (모리요시 친왕)이 태어나" 라며 쓰여있다. 하지만, 모리요시의 탄생은 엔쿄 원년 (1308년)이고, 타카하루 (고다이고)가 기시를 만난 것은 쇼와 2년 (1313년, 중궁 선하는 겐오 원년(1319년)이기 때문에, 시기가 맞지 않는 이유는 불명하다.) 타카하루와의 아들임은 『마스카가미』 「무라시우」에 있으며, 생년은 『천대좌주기(天台座主記)』에 가랴쿠 2년(1327년)에 세는 나이 20살로 천대좌주(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장)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산할 수 있다.

역시 경위는 불분명하지만, 늦어도 겐토쿠 원년(1329년)까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인 "노치노산보(後の三房)" 중 한 사람인 요시다 사다후사의 총애받는 아내(寵姬, 총희)라는 소문이 돌았다. 앞서 언급된 가나자와 사다아키의 서장에서, 사다아키는 사다후사의 아내인 "산미노츠보네(三位局)"라는 인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자신이 들었던 "요시다(사다후사)와 한몸(一体)"이라는 소문의 "민부쿄노산폰"(손친과 고다이고 황자의 어머니)과 동일 인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묻고 있다. 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이 소문의 진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나, 오카노 토모히코는 민부쿄노산미가 사다후사의 총희였다는 부분은 사실이며, 사망 소식은 사다후사의 다른 아내에 대한 오보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출신에 관한 여러 설

민부쿄노산미의 정확한 출신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가메야마 상황1305년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의 아이를 임신하여, 다음 해인 1306년에 손친 법친왕을 낳았다. 이후 어떤 경위인지는 불분명하나 가메야마 상황의 손자인 다카하루 친왕(훗날의 고다이고 천황)과 관계를 맺어 1308년에는 손운 법친왕(훗날의 모리요시 친왕)을 낳았다. 그 후 약 20년간 행적이 묘연하다가 1329년 무렵,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인 '노치노산보' 중 한 명인 요시다 사다후사와 특별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다.

민부쿄노산미의 정체는 오랫동안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다. 그 이유는 그녀의 정체가 공경 기타바타케 모로치카의 딸인 기타바타케 지카코라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인데, 이 경우 모리요시 친왕남조의 핵심 인물인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가까운 친척(계보상 조카, 혈연상 사촌)이 된다. 이는 겐무 신정 당시 무츠 쇼군부 설치 등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 모리요시 친왕과 지카후사의 정치적 연합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와카(和歌) 연구가 진행되면서 기타바타케 지카코가 교고쿠파의 주요 가인이자 가메야마 및 고다이고 천황과 대립했던 지묘인통후시미 천황의 측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지카코 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새로운 설들이 제기되었다.


  • 카데노코지 쓰네코 설: 1988년 모리 시게아키가 제기한 설로, 카데노코지 츠네미츠(히로하시 쓰네미쓰)의 딸이라는 주장이다.
  • 기타바타케 스케코 설: 2009년 오카노 토모히코가 제기한 설로, 기타바타케 모로치카에게 지카코 외에 계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스케코(資子)라는 딸이 있었으며 이 인물이 민부쿄노산미라는 주장이다.


2010년대 후반까지도 이 논쟁은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으며,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각 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단을 참조하라.

3. 1. 기타바타케 지카코(北畠親子) 설

민부쿄노산미의 정체는 공경 기타바타케 모로치카의 딸인 기타바타케 지카코라는 설이 오랫동안 제기되었고, 20세기 후반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이 설은 천황가의 계보 기록인 『본조황윤소운록』과 공가(公家)의 계보 기록인 『존비분맥』의 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기타바타케 지카코 설은 큰 주목을 받았다. 만약 지카코가 모리요시 친왕의 어머니라면, 모리요시 친왕은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 그룹인 '노치노산보'의 핵심 인물이자 남조의 정치를 이끈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혈연상으로는 사촌 관계, 계보상으로는 조카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 이야기인 『태평기』에는 모리요시 친왕이 지카후사의 여동생과 결혼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모리요시 친왕과 지카후사는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겐무 신정 및 남북조 시대 연구에서는 기타바타케씨가 중심이 된 무츠 쇼군부 설치를 주도한 인물이 고다이고 천황이었는지, 아니면 모리요시 친왕이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논쟁이 있었다. 모리요시 친왕과 지카후사의 강한 혈연관계는 모리요시 친왕이 주도했다는 설의 주요 근거 중 하나로 여겨졌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교고쿠파 와카(和歌)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기타바타케 지카코는 교고쿠파의 주요 가인이었으며, 가메야마고다이고와는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던 지묘인통후시미 천황덴지(典侍)이자 측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기타바타케 지카코 설은 현재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기타바타케 지카코 문서를 참조.

3. 2. 가데노코지 쓰네코(勘解由小路経子) 설

1988년, 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민부쿄노산미의 정체를 카데노코지 츠네미츠(히로하시 쓰네미쓰)의 딸인 카데노코지 츠네코라고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하며 주장했다. 모리는 '히로하시 츠네미츠', '히로하시 츠네코'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히로하시가는 츠네미츠의 후손이 무로마치 시대에 사용한 가명이며, 츠네미츠 본인은 '카데노코지'를 사용했으므로, 여기서는 동시대 가명인 '카데노코지'로 표기한다.

모리는 기존의 기타바타케 치카코 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만약 모리요시 친왕의 어머니가 기타바타케 모로치카의 딸이라면, 모리요시는 기타바타케 치카후사와 혈연상 사촌 관계가 된다. 더욱이 치카후사는 할아버지 모로치카의 양자가 되어 적통을 이었기 때문에(『공형공기(公衡公記)』 쇼와 4년 3월 25일 조, 같은 해 4월 17일 조), 계도상으로는 모리요시가 치카후사의 조카가 되어 더욱 가까운 관계가 된다. 그러나 치카후사가 저술한 『신황정통기』에는 모리요시가 단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으며, 모리요시 암살 장면에 대해서도 "혼란 속에서 숙원을 이루었는가"(아시카가 타다요시가 나카센다이의 난의 혼란 속에서 모리요시를 살해하여 숙원을 이루었을 것이다)라며 무로마치 막부 비판의 소재로 삼을 뿐, 모리요시 개인에게 특별한 동정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정치적으로 매우 가까웠다는 기존 설과 배치되는 점이다.

모리는 『동사본천대좌주기(東寺本天台座主記)』라는 사료에 주목했다. 이 문서의 정확한 성립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고코쿠 2년 / 랴쿠오 4년(1341년)의 유죠 법친왕이 천태좌주에 임명되기까지의 기록이 있어 적어도 그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일부 종이 뒷면에는 "조와 2년"(1346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1346년 전후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리는 이 문서가 고다이고 천황을 '고다이고인(後醍醐院)'이 아닌 '고다이고 천황'으로 표기하는 등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동사본천대좌주기』에는 손운 법친왕(모리요시 친왕)에 대해 "고다이고 천황 황자, 어머니 3품 후지와라노 츠네코"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미 히라타 토시하루가 이 기록을 근거로 후지와라노 츠네코 설을 제기했지만, 어느 후지와라씨 가문 출신인지는 밝히지 못했다. 『존비분맥』에는 9명의 후지와라노 츠네코가 등장하는데, 활동 시기가 맞는 인물은 이츠츠지 츠네우지의 딸, 나카노미카도 츠네타다의 딸, 카데노코지 츠네미츠의 딸, 신기백 스케모토 왕의 딸 등 4명이다. 이 중 3품(종3위)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이츠츠지 츠네우지의 딸과 나카노미카도 츠네타다의 딸 2명이지만, 전자는 고후시미 천황의 어머니이고 후자는 사이온지 킨히라의 애첩이므로 민부쿄노산미일 수 없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민부쿄노산미가 될 수 있는 후지와라노 츠네코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리는 카데노코지 츠네코에 주목했다. 히노가(카데노코지가/히로하시가의 본가)의 계도에는 카데노코지 츠네코에 대해 『존비분맥』에는 "텐지 츠네코", 『속군서류종(続群書類従)』 제6집 상에는 "고우다 천황 텐지 츠네코, 황자를 낳았다(生皇子云々)"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계도에 종3위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고우다 천황(고다이고 천황의 아버지, 재위 1274년 ~ 1287년)의 텐지로서 황자를 낳았으므로, 실제로는 그 공으로 종3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또한 츠네코의 아버지 츠네미츠가 사망하기 전까지 14년 이상 민부쿄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민부쿄노산미(民部卿三位)'라는 호칭의 '민부쿄' 부분과도 일치한다. 비록 '종3위 스케코(資子)'라는 이름을 기록한 계도도 존재하지만, 사료의 신뢰도를 고려할 때 스케코보다는 츠네코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모리는 주장했다.

만약 츠네코 설을 따른다면, 민부쿄노산미는 고다이고 천황보다 상당히 연상인 여성이 된다. 아버지 츠네미츠는 분에이 11년 4월 15일(1274년 5월 22일)에 향년 63세로 사망했으므로, 츠네코가 아버지 사망 직전에 태어났다고 가정해도 1275년생이 된다. 이는 1288년생인 고다이고 천황보다 최소 만 13세 연상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1308년에 모리요시 친왕을 출산했을 때 츠네코의 나이는 최소 34세 이상이었고, 당시 고다이고 천황은 21세였다. 또한 츠네코 설에 따르면, 그녀는 고우다 천황(아버지)의 텐지가 되어 황자를 낳고, 이후 가메야마 상황(할아버지)의 측실이 되어 손친 법친왕을 낳았으며, 마지막으로 고다이고 천황(아들)과 관계하여 모리요시 친왕을 낳은 것이 되어, 개인의 연애 편력은 더욱 복잡해진다. (교제 순서: 아버지 → 할아버지 → 아들) 이 설을 채택할 경우, 민부쿄노산미의 존재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의 정치 상황과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적어지게 된다.

3. 3. 기타바타케 스케코(北畠資子) 설

2009년, 오카노 토모히코는 민부쿄노산미의 정체가 기타바타케 모로치카의 딸인 北畠資子|기타바타케 스케코일본어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했다.

오카노는 기존의 北畠 親子|기타바타케 지카코일본어 설의 근거 중 하나였던 『본조황윤소운록』을 재검토했다. 이 문헌에서 모리요시 친왕의 어머니는 단순히 "다이나곤 미나모토노 모로치카의 딸"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카코라고 명시된 것은 아니다. 반면, 가메야마 천황의 황자 손친 법친왕의 어머니는 "従三位資子|종3위 스케코일본어"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오카노는 『본조황윤소운록』의 기록에 따르면 모리요시 친왕의 어머니는 모로치카의 딸인 '기타바타케 스케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스케코라는 인물이 『존비분맥』의 기타바타케 가계도에 없는 것은 단순히 누락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다이토쿠지 문서』에 포함된 1333년 8월 10일자 「고다이고 천황 윤지」도 중요한 근거로 제시되었다. 이 문서에는 겐무 신정 시작 약 2개월 후, "民部卿局|민부쿄노츠보네일본어"라는 여성이 겐코의 난 때 처형된 北畠具行|기타바타케 토모유키일본어(모로치카의 조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다이토쿠지에 영지를 기증하고 고다이고 천황이 이를 승인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오카노는 이 "민부쿄노츠보네"가 기타바타케 가문과 관련이 깊으며, 민부쿄노산미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는 이 동시대 천황 문서가 다른 기록보다 신뢰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1306년의 「쇼케이몬인 어령목록(昭慶門院御領目録)」에서는 "宰相典侍|사이쇼 텐지일본어"라는 여성이 아소 신사의 말사인 甲佐神社|고사 신사일본어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같은 문서에 기타바타케 모로치카가 인근의 다른 신사와 진구지를 소유했다는 기록이 있어, 오카노는 "사이쇼 텐지" 역시 기타바타케 가문 관련 인물로 보았다. 모로치카의 양녀였던 기타바타케 지카코는 친아버지 源基氏|미나모토노 모토우지일본어참의(사이쇼)였기에 해당될 수 있지만, 지카코는 이미 더 높은 지위인 "権大納言典侍|곤다이나곤 텐지일본어"로 불렸기 때문에 그보다 낮은 "사이쇼 텐지"로 불리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오카노는 "사이쇼 텐지"가 모로치카의 또 다른 딸인 기타바타케 스케코, 즉 민부쿄노산미를 가리키며, 이 명칭은 1305년 말까지 참의(사이쇼)였던 남편 요시다 사다후사의 관직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설은 1329년에 민부쿄노산미가 사망했다는 가나자와 사다아키의 서찰 내용과 모순된다. 오카노는 사다아키 자신도 서찰 말미에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냐고 의문을 표한 점을 들어, 이는 사다후사의 다른 아내의 사망 소식이 잘못 전달된 오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오카노 스스로도 인정한 이 설의 약점은, 모로치카나 가까운 친족 중에 民部卿|민부쿄일본어 관직을 가진 인물이 없어 '민부쿄노산미'라는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오카노는 스케코 역시 지카코처럼 실제로는 민부쿄 벼슬을 가진 다른 인물의 딸이었으나 어떤 사정으로 모로치카의 양녀가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스케코 설은 모리요시 친왕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사이의 정치적 연결 가능성을 다시 열어준다. 모리 시게아키는 지카후사가 『신황정통기』에서 모리요시 친왕에게 냉담했다고 지적했지만, 오카노는 이것이 지카후사 저술의 특징일 뿐이며, 사적인 서찰에서는 모리요시의 아들 興良親王|오키요시 친왕일본어을 자랑스럽게 언급한 점 등을 들어 실제로는 두 사람이 가까운 관계였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4. 『태평기(太平記)』에서의 묘사

군기 이야기 『태평기』(1370년경 완성) 유포본에서는 권6 '민부경 삼위 국 어몽상의 일'에서 민부쿄노산미가 등장한다.[1] 이 작품에서는 그녀의 복잡한 실제 연애 편력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고다이고 천황의 총애를 받는 총희로서 남편에게 헌신적인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로 그려진다.[1]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목표로 한 겐코의 난(1331년 - 1333년) 중, 첫 전투인 가사기 산 전투에서 패배한 고다이고 천황오키 섬으로 유배되었고, 아들인 모리요시 친왕 역시 행방불명되었다.[1] 민부쿄노산미는 미모가 쇠할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겼으며, 남편과 아들의 무사를 빌기 위해 교토의 기타노 텐만구에서 7일간 머물며 간절히 기도했다.[1] 이때 천신(스가와라노 미치자네)에게 바치는 노래로 忘れずば 神もあはれと 思ひ知れ こゝろづくしの いにしへの旅일본어라고 읊었다.[1] 그러자 꿈속에 매화 가지를 든 노인(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이 나타나 답가로 めぐり来て つひにすむべき 月かげの しばしくもるを 何なげくらん일본어라고 적힌 가지를 건네주었다.[1] 꿈에서 깬 민부쿄노산미는 이를 고다이고 천황이 머지않아 오키에서 돌아와 다시 천하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여기고 기뻐했다고 전해진다.[1]

민부쿄노산미의 이름은 『태평기』 유포본 권26 '집사 형제 사치의 일'에도 다시 등장한다.[2] 교토 이치조 이마데가와(가미교구 이마데가와정)에는 과거 모리요시 친왕의 어머니인 민부쿄노산미가 살았던 저택이 있었으나, 남북조 시대 초기에는 황폐해진 상태였다.[2] 그런데 무로마치 막부의 집사였던 고노 모로나오는 시조나와테 전투(쇼헤이 3년/조와 4년, 1348년)에서 남조의 무장 구스노키 마사쓰라에게 승리하고 요시노 행궁을 공략한 뒤 교만해졌다.[2] 그는 이마데가와에 있던 민부쿄노산미의 옛 저택 터를 강제로 빼앗아, 무사의 분수를 넘어서는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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