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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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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산 전투는 162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이끄는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 군대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보헤미아의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려는 황제에 대항하여 프로테스탄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틸리 백작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로 인해 보헤미아는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받고 민족 정체성을 잃었으며,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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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백산 전투
시기1620년 11월 8일
장소프라하 근교, 백산 (), 보헤미아 연맹(현재 체코)
결과제국-스페인 연합군의 승리
영향합스부르크 군, 프라하 점령
교전 세력
교전 1신성 로마 제국
가톨릭 연맹
스페인 제국
교전 2보헤미아 연맹
팔츠 선제후국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 1 지휘관요한 폰 틸리
샤를 드 부케
기예르모 베르두고
카를로 스피넬리
교전 2 지휘관크리스티안 폰 안할트
인드르지흐 마티아슈 투른
병력 규모
교전 1 병력23,000명
대포 12문
교전 2 병력21,000명
대포 10문
사상자 규모
교전 1 사상자전사 및 부상 650명
교전 2 사상자전사 및 부상 2,800명
관련 전쟁
관련 전쟁30년 전쟁
보헤미아 반란
참고
참고
추가 정보 (일본어판 참고)
교전 2 병력 구성주로 보헤미아,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동맹에서 온 용병 15,000명
교전 1 병력 구성주로 신성 로마 제국, 가톨릭 연맹, 스페인 및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군대, 폴란드 용병 집단 리소프치치에 의한 27,000명
교전 2 사상자 (일본어판 참고)~5,000명
교전 1 사상자 (일본어판 참고)~2,000명

2. 배경

1617년, 보헤미아 왕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페르디난트 2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페르디난트 2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1618년 국왕의 사절 3명이 프라하 성을 습격한 민중에 의해 창밖으로 던져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가톨릭 성직자들을 추방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팔츠 선제후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하며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를 반란으로 간주하고, 가톨릭 동맹의 맹주 바이에른 공 막시밀리안 1세 등과 협력하여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크라에스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려 했다.

2. 1. 보헤미아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

17세기 초, 보헤미아 영지는 대부분 가톨릭 국가인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많은 프로테스탄트 인구가 있었고,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보장받았다.[2]

1617년, 마티아스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의 사촌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 로마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많은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들은 재산 손실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반자치적인 체제(많은 영지들이 제국과의 관계를 규율하는 별도의 개별 헌법을 가지고 있었고, 국왕은 지역 지도자들에 의해 선출되었음)의 상실을 두려워했다.[2]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망한 후 페르디난트 2세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제국에 해로운 것으로 보고, 보헤미아에 절대주의 통치를 부과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종교 개혁 초기에 프로테스탄트들이 몰수했던 교회 재산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불쾌했던 것은 루돌프 2세 황제의 1609년 칙령(Letter of Majesty)의 위반이었다. 이 칙령은 보헤미아 전역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었다.[3] 1618년 5월, 보헤미아 귀족들은 프라하 왕궁에서 황제 대표들과 만났으나, 회의는 두 명의 대표와 그들의 서기관이 높은 창문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 것으로 끝났다. 프라하 제3의 창밖 투척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보헤미아 반란을 촉발했다.[4]

1619년 11월, 칼뱅주의 신자인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선거인단에 의해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2. 2.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 (1618년)

1617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열렬한 가톨릭 신자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하자,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이에 반발했다. 이들은 페르디난트 2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1618년 국왕의 사절 3명이 프라하 성을 습격한 군중에 의해 창밖으로 던져지는 사건이 발생했다.[4] 이 사건은 프라하 제3의 창밖 투척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헤미아 반란을 촉발시켰다.

페르디난트 2세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제국에 해로운 것으로 보고 가톨릭으로 개종을 장려하면서 보헤미아에 절대주의 통치를 부과하고자 했다.[2] 그는 또한 종교 개혁 초기에 프로테스탄트들이 몰수했던 교회 재산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불쾌했던 것은 루돌프 2세 황제의 1609년 칙령(Letter of Majesty) 위반이었는데, 이 칙령은 보헤미아 전역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었다.[3]

2. 3. 프리드리히 5세의 즉위와 반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1619년 보헤미아의 왕위를 받아들였으나, 개신교 제후동맹은 가톨릭 동맹과 울름 협약을 체결하고 중립을 선언하여 프리드리히 5세를 지원하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반란군은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기 위해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개신교 제후동맹의 지원을 받지 못해 정치적 고립 상황에 놓였다.

3. 전투

1620년 11월 8일,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가 이끄는 가톨릭 군대는 프라하 근교 백산에서 보헤미아 반란군과 맞붙었다.[5]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들의 반란은 초기에 반란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으나, 개신교 제후동맹이 가톨릭 동맹과 울름 조약을 체결하고 중립을 선언하면서 상황이 불리해졌다. 이에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가톨릭 동맹 군대를 재집결시키고 틸리 백작을 프라하로 보냈다.[5]

보헤미아군 사령관 안할트-베른부르크 대공 크리스티안 1세프라하로 가는 길목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지만, 틸리 백작은 적의 약점을 간파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3. 1. 양측 군대의 배치와 전략

보헤미아군 사령관 안할트-베른부르크 대공 크리스티안 1세프라하로 가는 길목인 백산 언덕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가톨릭 동맹 군대를 기다렸다. 보헤미아군의 방어 진지는 견고했는데, 우익은 수렵용 요새로 보호되었고, 좌익에는 시내가 흘러 접근이 어려웠다. 전방에는 습지에 작은 개울이 있어 적의 접근을 막았다.[5] 크리스티안은 이곳이 견고한 방어 지형이라 판단하여 대규모 회전은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5]

유럽 극장(Theatrum Europaeum)에서 발췌한 전투 계획: 위쪽이 보헤미아군, 아래쪽이 황제군과 바이에른군


백산 전투 (1620)


그러나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는 보헤미아군 방어 진영의 약점을 발견하고, 신성 로마 제국군의 부쿼이와의 합의 없이 독단적으로 정예부대를 이끌고 개울을 건너 공격을 시작했다. 막시밀리안이 틸리의 주장을 채택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5] 일부 기록에 따르면, 한 수도승이 프로테스탄트가 훼손한 성모 마리아 그림을 가져오자, 로마 가톨릭 신자인 황제군은 분노에 휩싸였다고 한다.[5]

전투를 예상하지 못한 크리스티안은 당황했고, 전투 준비가 부족했다. 트란실바니아 출신 용병 기병들은 전면전을 거부하여 후방에 배치되었다. 진드리히 마티야스 투른은 기병대를 이끌고 가톨릭군 우측을 공격하여 패퇴시켰고, 보병대까지 공격했다. 크리스티안은 좌측 보병대에게 협공을 명령했으나, 이들은 허공에 일제 사격을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도주했다.[5]

크리스티안의 아들 안할트-베른부르크 공작 크리스티안 2세는 기병을 이끌고 제국군 중앙을 공격하여 보병대를 와해시켰다. 그러나 틸리는 고트프리드 하인리히 그라프 주 파펜하임이 이끄는 기병대로 크리스티안 2세의 우측을 공격하게 했다. 크리스티안 2세는 포로로 잡혔고, 보헤미아군 중앙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폰 호헨로헤가 도주하면서 무너졌다. 트란실바니아군도 달아났고, 보헤미아군 우측 요새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전투는 가톨릭군의 승리로 끝났다.[5]

3. 2. 전투 경과

진드리히 마티야스 투른이 이끄는 보헤미아 기병대는 전투 초반 가톨릭 군대의 우측을 공격하여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투른의 기병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적 기병대를 강하게 몰아붙여 패퇴시키고, 적 보병대까지 공격했다.[5] 이에 고무된 안할트-베른부르크 대공 크리스티안 1세는 좌측 보병대에게 적 보병대에 접근하여 기병대와 협공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보병대는 적에게 접근하자마자 첫 전열뿐만 아니라 모든 전열의 병사들이 허공에 일제 사격을 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는 급하게 선형진을 채택하면서 테르시오 진형의 사격법에 익숙했던 병사들이 적응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폭음과 연기에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도주했고, 보헤미아군 부대 하나가 와해되었다.[5]

크리스티안 2세는 위기를 느껴 기병대를 이끌고 적 중앙으로 돌격, 부쿼이가 이끄는 제국군 중앙 기병대를 쫓아내고 보병대까지 와해시키는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틸리가 가톨릭 동맹군 우측 기병대 두 부대로 하여금 크리스티안 2세의 우측을 공격하게 했는데, 이 중 한 부대 대장이 고트프리히 하인리히 그라프 주 파펜하임이었다.[5]

제국군과 교전 중 측면을 공격당한 크리스티안 2세의 기병대는 무너졌고, 포위된 크리스티안 2세는 포로로 잡혔다. 보헤미아군에서 가장 무능한 장수로 중앙을 맡고 있던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폰 호헨로헤는 가톨릭군의 진격을 막을 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 겁을 먹고 달아나 중앙 보헤미아군 전체가 무너졌다. 후방의 트란실바니아군 역시 재빨리 달아났다.[5]

결국 보헤미아군 우측 요새와 주변 수비 부대가 항복하면서 전투는 가톨릭 군대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5]

3. 3. 전투의 특징

백산 전투는 대규모 회전이라기보다는 소규모 전투에 가까웠으며, 실제 전투 시간은 1시간 정도에 불과했다.[6][11] 보헤미아군은 페르디난트 2세의 군대에 비해 병력과 사기 면에서 열세였고, 제대로 된 방어 시설도 구축하지 못했다.[5][6] 전투 초반 진드리히 마티야스 투른이 이끄는 기병대가 분전하고, 크리스티안 2세가 이끄는 기병대가 적의 중앙부를 돌파하는 활약을 펼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보헤미아군은 황제군에게 압도당했다.[6] 특히 보병대는 급하게 선형진을 채택하면서 테르시오 진형에 익숙했던 병사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허공에 일제 사격을 가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6] 결국 보헤미아군은 4,0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황제군은 약 700명의 손실만을 입고 승리했다.[6][11]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백산 전투에서 가톨릭 군대가 승리하면서 보헤미아 반란은 진압되었고, 30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보헤미아 군대가 궤멸되자 틸리는 프라하에 입성하고 반란은 무너졌다. 국왕 프리드리히 5세는 즉위 1년 만에 아내 엘리자베트와 함께 나라를 떠났고, "겨울왕"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 47명의 반란 지도자들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중 27명이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되었는데, 이는 "구시가 광장 처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처형된 자들 중에는 크리슈토프 하란트와 얀 예세니우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에는 처형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27개의 십자가가 조약돌에 새겨져 있다.[7]

요한 게오르크, 크르노프 공작의 지휘 아래 실레시아에는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군대가 남아 있었고, 1623년까지 모라바와 오늘날 슬로바키아 지역에서 황실 군대와 계속 싸웠다.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 속주를 포위하려는 에스파냐군은 팔츠를 점령했다.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교가 압도당할 가능성이 커지자 덴마크가 전투에 참여했다. 스웨덴은 1630년에 프로테스탄트 세력에 합류하게 된다.

보헤미아 왕관령의 인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1/3 감소했다.

4. 1. 보헤미아의 운명

백산 전투의 승리로 로마 가톨릭 세력은 반종교개혁 운동의 승리를 확신했다. 보헤미아에서 수백 명의 칼뱅파 성직자들이 추방되었고, 신분 의회의 45명이 반란죄로 처형되었다.[13] 틸리 백작은 프라하에 입성하여 반란을 진압했고, 보헤미아 왕 프리드리히 5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국외로 망명하여 ''겨울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구 프라하 광장 돌길에 새겨진 27개의 십자가


안톤 슈테벤스가 그린 가톨릭의 승리를 기념하는 그림. 상단에는 성인들에 둘러싸인 승리의 성모가 있고, 하단 왼쪽에는 승리한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그의 아들 페르디난트 3세, 그리고 보헤미아 사자가 있다.


폭동의 주요 지도자 27명은 체포되어 구 프라하 광장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날은 "피의 날"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이들을 기리기 위해 27개의 십자가가 도로 바닥에 새겨져 있다.

체코인에게는 종교적 의미보다 민족적 의미에서 더욱더 중요한 사건이었다. 보헤미아 지역의 개신교 자유는 급작스럽게 종결되었고,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가톨릭교회개종을 강요받거나 국외로 망명 또는 추방당했다. 스페인 군대는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 지방을 포위하기 위해 팔츠(Palatinate)지방을 공략하였다.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위협이 커지자, 덴마크가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체코 귀족들의 영지는 독일 지역에서 불러들인 가톨릭 귀족들이 차지하였다. 결국 체코 귀족의 몰락으로 체코 국가의 맥이 끊어졌고 체코 역사와 체코 문화의 전통도 단절되었다. 체코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습지로 전락하였고, 1918년 독립을 되찾을 때까지 300년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14]

4. 1. 1. 프로테스탄트 탄압과 강제 개종

페르디난트 2세보헤미아에서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고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했다.[14] 1621년, 황제는 모든 칼뱅파 신자와 루터파 신자가 아닌 사람은 3일 안에 영토를 떠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명령했다.[8] 1622년에는 루터교 신앙을 금지했고,[9] 1626년에는 모든 루터교도에게 개종하거나 나라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9]

1627년까지 프라하 대주교 에른스트 아달베르트 하라흐(Ernst Adalbert of Harrach)와 야로슬라프 보르지타 폰 마르티니체(Jaroslav Borzita of Martinice)는 평화적인 수단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을 개종시키려고 했다.[9] 그러나 대부분의 보헤미아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상당수의 프로테스탄트는 그대로 남았다.[9] 결국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국외로 망명하거나 신앙을 포기해야 했다.[14]

1872년, 안토닌 드보르자크는 비체슬라프 할레크(Vítězslav Hálek)의 가사에 의한 칸타타 「찬가 - 백산의 계승자들(Hymnus "dědicové bílé hory")」을 작곡했다.

4. 1. 2. 체코 민족 정체성의 위기

백산 전투에서 가톨릭 세력이 승리하면서 보헤미아 귀족들은 몰락했고, 체코 민족 정체성은 큰 위기를 맞았다.[14] 보헤미아 지역의 개신교 자유는 종결되었고, 프로테스탄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개종을 강요받거나 국외로 망명, 추방당했다.[14] 1621년 황제는 모든 칼뱅파와 루터교 신자에게 3일 안에 영토를 떠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명령했고,[8] 1622년에는 루터교 신앙을 금지했다.[9] 1626년에는 모든 루터교도에게 개종하거나 나라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9]

체코 땅은 2세기 동안 재가톨릭화되었고, 체코어를 사용하는 귀족과 엘리트 계층은 물론 체코어도 쇠퇴했다.[7] 19세기까지 체코어는 문어로만 사용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체코 민족 부흥으로 이러한 과정은 늦춰졌다. 알로이스 지라섹(Alois Jirásek)과 같은 체코 민족주의 역사가와 작가들은 17세기와 18세기의 체코 땅을 암흑기(Těmno)로 불렀다.

4. 2. 30년 전쟁의 확전

백산 전투의 승리로 로마, 비엔나, 마드리드에서 반종교개혁 운동이 힘을 얻었다. 보헤미아에서는 수백 명의 칼뱅파 성직자들이 추방되었고, 신분 의회의 45명이 반란죄로 처형되었다.[13]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는 보헤미아 군대를 궤멸시키고 프라하에 입성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국외로 망명하였고, 폭동의 주요 지도자 27명은 체포되어 구 프라하 광장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날은 "피의 날"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이들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27개의 십자가가 도로 바닥에 새겨져 있다.

이 사건은 체코인에게는 종교적 의미보다 민족적 의미에서 더욱더 중요한 사건이었다. 보헤미아 지역의 개신교 자유는 급작스럽게 종결되었고, 프로테스탄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개종을 강요받거나 국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당했다. 스페인 군대는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 지방을 포위하기 위해 팔츠 지방을 공략하였다. 체코 귀족들의 영지는 독일 지역에서 불러들인 가톨릭 귀족들이 차지하였다. 결국 체코 귀족의 몰락으로 체코 국가의 맥이 끊어졌고 체코 역사와 체코 문화의 전통도 단절되었다. 이리하여 체코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습지로 전락하였고, 합스부르크 절대 군주의 절대주의에 편입함에 따라 1918년 독립을 되찾을 때까지 300년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14]

1621년 황제는 모든 칼뱅파와 다른 루터파 교도가 3일 안에 영토를 떠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명령했다.[8] 1622년에는 루터교 신앙을 금지했다. 1626년에는 (대부분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던) 모든 루터파 교도에게 개종하거나 나라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9] 1627년까지 프라하 대주교 에른스트 아달베르트 하라흐와 야로슬라프 보르지타 폰 마르티니체는 이단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대부분의 보헤미아인들이 개종했지만 상당한 프로테스탄트 소수파가 남아 있었다.

4. 2. 1. 덴마크와 스웨덴의 참전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위협이 고조되자, 덴마크가 전쟁에 개입하였다. 스웨덴은 1630년에 프로테스탄트 세력에 합류하였다.[14]

4. 3. 한국에 주는 교훈

백산 전투는 체코인들에게 종교적 의미보다 민족적 의미가 더 컸던 사건이다. 전투의 패배로 체코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잃었고,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받거나 국외로 추방당했다. 체코 귀족들의 영지는 독일계 가톨릭 귀족들이 차지했고, 이는 체코 국가와 문화 전통의 단절로 이어졌다.

1620년 백산 전투 이후 체코는 2세기 동안 재가톨릭화 과정을 겪었고, 체코어를 사용하는 귀족과 엘리트 계층이 쇠퇴하면서 체코어도 함께 쇠퇴했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체코 민족 부흥 운동을 통해 변화를 맞이했다. 알로이스 지라섹과 같은 체코 민족주의 역사가와 작가들은 17세기와 18세기를 체코의 암흑기로 묘사했다.

4. 3. 1. 종교 갈등과 국제 분쟁

백산 전투에서 가톨릭 세력의 승리는 로마, 비엔나,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반종교개혁 운동의 승리를 의미했다. 보헤미아에서는 수백 명의 칼뱅파 성직자들이 추방되었고, 신분 의회 의원 45명이 반란죄로 처형되었다.[13] 보헤미아 군대를 격파한 틸리 백작은 프라하에 입성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보헤미아 왕 프리드리히와 왕비 엘리자베스는 국외로 망명했으며,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겨울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폭동 주동자 27명은 체포되어 구 프라하 광장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날은 "피의 날"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도로 바닥에 27개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이 사건은 체코인에게 종교적 의미보다 민족적 의미가 더 컸다. 보헤미아 지역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는 갑작스럽게 끝났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개종을 강요받거나 국외로 망명 또는 추방당했다. 스페인 군대는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를 포위하기 위해 팔츠(Palatinate) 지방을 공략했다.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위협이 커지자, 덴마크가 전쟁에 개입했다. 체코 귀족들의 영지는 독일 지역에서 온 가톨릭 귀족들이 차지했다. 결국 체코 귀족의 몰락은 체코 국가와 문화 전통의 단절로 이어졌다. 체코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습지로 전락했고, 합스부르크 절대 군주정에 편입되어 1918년 독립할 때까지 300년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배를 받았다.[14]

4. 3. 2. 민족 정체성과 문화 보존

백산 전투는 체코인들에게 종교적 의미보다 민족적 의미에서 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보헤미아 지역의 개신교 자유는 갑작스럽게 종결되었고, 프로테스탄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개종을 강요받거나 국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당했다.[14] 체코 귀족들의 영지는 독일 지역에서 불러들인 가톨릭 귀족들이 차지하였다. 결국 체코 귀족의 몰락으로 체코 국가의 맥이 끊어졌고 체코 역사와 체코 문화의 전통도 단절되었다.[14]

1620년 전투 결과로 체코 땅의 재가톨릭화가 2세기 동안 이어졌고, 체코어를 사용하는 귀족과 엘리트 계층은 물론 체코어도 쇠퇴했다(독일어를 사용하는 엘리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과 함께). 이 과정은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체코 민족 부흥에 의해 속도가 늦춰졌다. 알로이스 지라섹과 같은 체코 민족주의 역사가와 작가들은 17세기와 18세기의 체코 땅을 암흑기로 언급했다.

참조

[1] 뉴스 The Battle of White Mountain http://www.radio.cz/[...] Radio Prague 2003-06-11
[2] 서적 Central Europe enemies, neighbours, friends Oxford UP 1996
[3] 서적 The Thirty Years' War: A Documentary History Hackett Company, Inc. 2009
[4] 서적 Battles of the Thirty Years' War from White Mountain to Nordlingen, 1618–1635 Greenwood 2001
[5] 웹사이트 Thinkers at War – Descartes | Military History Matters https://www.military[...] 2014-03-21
[6] 서적 Battles of the Thirty Years' War from White Mountain to Nordlingen, 1618–1635 Greenwood 2001
[7] 웹사이트 Consequences of Czech Defeat http://countrystudie[...] U.S. Library of Congress
[8] 서적 Unknown Memeland https://books.google[...] Lulu.com 2017
[9] 서적 The Thirty Years' War Jonathan Cape 1964
[10] 웹사이트 Bílá Hora http://encyklopedie.[...] Ottův slovník naučný (1888-1909) a Ottův slovník naučný nové doby (1930-1943)
[11] 서적 Battles of the Thirty Years War from White Mountain to Nordlingen, 1618-1635 Greenwood 2001
[12] 문서 빌라 호라는 번역하면 백산(白山)이란 뜻으로, 체코에 있는 하얀 산(White Mountain)의 이름이다.
[13] 서적 동유럽사 대한교과서
[14] 서적 체코.슬로바키아사 한국외국어대 지식출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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