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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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사살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아들로, 기원전 556년 나보니두스가 왕위에 오른 후 부유한 가문의 수장이자 사업가로 등장했다. 아버지가 아라비아로 원정을 떠난 기간에는 섭정으로 바빌론을 통치했으나, 스스로 왕을 칭하지는 않았다. 벨사살은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등장하며, 벨사살의 연회에서 손가락이 벽에 글씨를 쓰는 사건으로 유명하다. 다니엘서는 벨사살을 느부갓네살의 후손이자 바빌론의 왕으로 묘사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나보니두스의 아들이었고 왕위에 오른 적은 없다. 벨사살은 바빌론 함락의 밤에 살해되었거나, 오피스 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벨사살의 이야기는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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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사살 | |
---|---|
기본 정보 | |
이름 (아카드어) | Bēl-šar-uṣur |
칭호 | 바빌론의 왕세자 |
출생 | 알 수 없음 |
사망 | 기원전 539년 10월 12일 (?) 바빌론 (?) |
가문 | 칼데아 왕조 (모계) (?) |
아버지 | 나보니두스 |
어머니 | 니토크리스 (?)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딸) (?) |
통치 기간 | |
재위 기간 | 기원전 556년 - 기원전 539년 기원전 605년 - 기원전 562년 기원전 556년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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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 |
역할 | 바빌로니아 섭정 |
2. 생애
아카드어로는 벨-샤르-우수르()로 표기되며, “벨이여 왕을 지켜주소서”라는 뜻이다.[2] 기원전 553년, 나보니두스가 아라비아의 테이마로 원정을 떠나면서 벨사살은 섭정으로 임명되어 바빌론에 남았다. 벨사살은 상당한 권한을 가졌지만, 공식적으로 바빌로니아 왕을 자칭하지는 않았다. 발행된 공문서의 날짜는 나보니두스의 재위 연호로 기록되었고, 사원 건설도 나보니두스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547년 바빌로니아의 사원 인사가 변경되었는데, 이를 벨사살의 인사권 장악으로 보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구약성서에서 벨사살을 왕으로 기록한 것은 그의 상당한 권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벨사살은 왕국 멸망 후 행적이 불분명하나, 페르시아 군에 붙잡혀 사면받은 아버지와 달리, 성서 기록대로 바빌론 함락 당시 밤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3]
2. 1. 배경

벨사살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아들이었다.[2] 나보니두스의 출신과 왕위 계승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당대 기록에는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나보니두스가 느부갓네살 2세의 딸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통해 벨사살이 느부갓네살의 후손으로 묘사되는 후대의 역사적 전승을 설명할 수 있다. 히브리어 성경의 다니엘서에서는 벨사살이 느부갓네살의 (손)자로 언급된다. 그러나 벨사살이 느부갓네살의 후손이라는 전승이 왕실 선전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으며, 이전 칼데아 왕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마지막 위대한 여왕"을 니토크리스라고 칭했지만, 그 이름은 당대 바빌로니아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윌리엄 H. 셰이는 니토크리스를 나보니두스의 아내이자 벨사살의 어머니로 잠정적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벨사살 시대에 대한 주요 자료는 나보니두스 연대기, 키루스 원통, 나보니두스의 운문 기록 등인데, 이들은 모두 아케메네스 제국에 의해 바빌론이 정복된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키루스에게 유리하고 나보니두스와 벨사살에게 불리하게 편향되어 있을 수 있다.



2. 2. 나보니두스의 즉위와 벨사살
기원전 556년 5월,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는 이전 왕 라바시-마르두크를 폐위시키고 살해한 음모의 결과로 왕위에 올랐다.[3] 나보니두스의 즉위 이후, 벨사살은 부유한 가문의 수장이자 저명한 사업가로 등장하는데, 이는 신바빌로니아 시대 왕족 구성원들이 흔히 맡지 않던 역할이었다.[3]벨사살은 라바시-마르두크 사후 네리글리사르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여 차지하고 인수했던 것으로 보인다.[3] 이를 통해 벨사살은 바빌로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의 상속자가 될 수 있었다.[3] 그는 바빌로니아 전역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예를 들어 우루크 근처 농업 정착지를 소유하고 있었다.[3]
벨사살은 쿠데타의 주요 수혜자였던 만큼, 라바시-마르두크의 폐위와 죽음으로 끝난 음모의 주요 배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3] 나보니두스는 당시 상당히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의 통치는 짧고 과도적인 것으로 예상되었고, 벨사살은 몇 년 안에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3]
2. 3. 섭정 통치
나보니두스는 기원전 553년 5월, 서쪽 원정을 위해 바빌론을 떠나 아라비아의 타이마를 정복하고 그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나보니두스는 약 10년 동안 타이마에 머물렀으며, 기원전 543년 또는 542년에 바빌론으로 돌아왔다.[3] 나보니두스가 자리를 비운 기간 동안 벨사살은 바빌로니아의 행정을 맡았다.[3] 이 기간은 종종 "공동 섭정"이라고 불리지만, 벨사살은 공식적인 왕의 칭호를 얻지 못하고 '왕세자(mār šarri, 문자 그대로 "왕의 아들")'로 불렸다.[3]벨사살은 아버지의 부재 기간 동안 왕의 권한을 일부 행사했지만, 다음과 같은 제한이 있었다.[3]
- 벨사살은 나보니두스에게만 쓸 수 있는 왕(šarru)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3]
- 벨사살은 자신의 "재위 기간" 이후에 문서의 연대를 기록할 수 없었다.[3]
- 벨사살은 왕의 의무였던 바빌로니아 신년제를 주관할 수 없었다.[3]
- 벨사살은 일반적으로 왕을 언급하는 건축 비문에 언급되지 않았다.[3]
그러나 벨사살은 다음과 같은 왕실 특권을 행사했다.[3]
- 섭정 기간 동안 신상에 바친 음식 제물의 나머지(rēḫātu, 문자 그대로 "나머지")가 벨사살과 나보니두스 모두에게 보내졌다.[3]
- 바빌로니아에서 신전은 일반적으로 왕에게 제물을 바쳤는데, 섭정 기간에는 "왕에게 바친 제물"과 "왕의 아들에게 바친 제물"이 모두 언급되었다.[3]
- 신바빌로니아 제국에서 여러 서비스를 수행하려는 사람들은 보통 왕과 여러 신에게 맹세했다. 섭정 기간 대부분은 나보니두스만 언급했지만, 후반의 일부 맹세는 "바빌론의 왕 나보니두스 폐하와 그의 아들 벨사살" 또는 "나보니두스와 벨사살 폐하"에 의해 맹세되었다.[3]
- 바빌로니아 군대가 분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
- 벨사살은 왕이 부여한 것과 동일한 왕실 특권을 부여할 수 있었다.[3]
벨사살 섭정기 동안 바빌로니아는 키루스 대제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위협에 직면했다. 벨사살은 시파르의 방어 시설을 강화하는 등 군사적 대비를 했다.[3] 기원전 546년, 키루스 대제가 티그리스 강을 건너 바빌로니아의 동맹국이었던 리디아를 침략했을 때, 벨사살은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리디아에 직접적인 지원을 보내지는 않았다.[3]
벨사살은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전통적인 바빌로니아 최고신 마르두크보다 달의 신 신을 숭배하려 하자,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마르두크의 지위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며, 나보니두스가 바빌론으로 돌아왔을 때 행정 책임에서 해임되고 그가 임명한 관리들은 해고되었다.[3]
2. 4. 몰락
나보니두스와 벨사살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벨사살은 왕세자이자 왕위 계승 예정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3] 그러나 나보니두스가 귀환한 이후 벨사살의 정확한 지위와 역할은 불분명하다. 벨사살은 기원전 539년 키루스 2세의 침공에 맞서 바빌론 방어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 오피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이 승리한 후, 바빌론은 별다른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 나보니두스는 사로잡혀 카르마니아로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벨사살의 운명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바빌론 함락 당시 페르시아군에 의해 살해되었거나, 오피스 전투에서 이미 사망했거나, 아버지와 함께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 다니엘서에서의 묘사
다니엘서에서 벨사살(בֵּלְשַׁאצַּר|벨샤차르he)은 벨사살의 연회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다. 이 이야기는 느부갓네살의 광기 이야기와 비슷하게, 왕이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연회 도중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성물로 술을 마시고, 벨사살 왕은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파르신"이라는 글씨가 쓰이는 것을 본다. 다니엘은 이 글을 이스라엘의 신 야훼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바빌론의 멸망을 예언한다. 다니엘은 벨사살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그의 왕국이 메대와 페르시아에 넘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날 밤 벨사살은 죽고, 메대의 다리우스가 왕위를 계승한다.
학자들은 다니엘서가 기원전 160년대 마카비 혁명 직후에 쓰여졌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그래서 벨사살의 연회 이야기는 역사 소설로 여겨지며,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벨사살은 바빌론의 왕이자 느부갓네살의 "아들"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나보니두스의 아들이었고, 왕위에 오른 적도 없으며, 왕이 주관해야 할 종교 축제를 이끈 적도 없다. 이야기에서 바빌론을 차지하는 정복자는 메대의 다리우스로 나오지만, 역사에는 그런 인물이 없다. 이는 역사적 정확성이 중요하지 않은 "궁정 경쟁 이야기"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다니엘서 5장 원문에서는 벨샤살(בֵּלְשַׁאצַּר|벨샤차르he)로, 칠십인역 성경에서는 발타살(Βαλτασαρ|발타사르grc), 불가타에서는 발타살(Balthasar|발타사르la)로 표기된다. 새번역성경에서는 “'''벨샤살'''”로 표기하지만,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벨사살”로 표기한다.
칼데아의 왕 벨사살은 1000명의 귀족과 궁녀들과 함께 연회를 열고 포도주를 마시던 중, 갑자기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씨를 썼다. 벨사살은 두려워 떨며 글씨를 읽을 사람을 찾았지만, 아무도 읽지 못했다. 그때 왕비가 느부갓네살 시대에 신과 같은 지혜를 가진 다니엘이라는 제사장이 있었다고 말하며, 그를 추천했다.
벨사살은 다니엘을 불러 글씨를 해석하게 했다.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신은 당신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에게 권세와 영광을 주었지만, 그가 거만하고 횡포하게 행동하여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왕위에서 쫓겨났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알면서도 신을 따르지 않고, 신성한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돌과 나무로 만든 신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그 손을 보내 글씨를 쓰게 한 것입니다. 글씨는 「메네 메네 데겔 우 파르신」입니다. 메네(메네)는 ‘세다’는 뜻으로, 당신의 통치를 세어 끝냈다는 뜻입니다. 데겔(데겔)는 ‘달다’는 뜻으로, 당신은 저울에 달려 부족하다고 판정되었다는 뜻입니다. 파르신(파르신)는 ‘나누다’는 뜻으로, 당신의 왕국이 메디아와 페르시아로 나누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했다. 다니엘이 환상을 본 해는 벨사살 왕 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서의 기록 중 벨사살이 왕이라는 기록과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명백히 사실과 다르다. 하지만 성서에서는 고위 권력자를 "왕"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으므로, 대리 통치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오류가 아니다. 또한, 히브리어에는 할아버지나 손자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고, 자손을 "자(子)", 조상을 "부(父)"라고 하기 때문에, "아버지 왕 네부카드네자르"가 "조상인 왕 네부카드네자르"라는 의미로 기록되었다면 오류가 아니다.
대연회 중 나타난 손가락이 왕궁 벽에 글씨를 쓴 것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힌 벨사살은 "글씨를 풀이하는 자에게 왕국의 '제3의 지위(제3의 권력)'를 줄 것이다"라고 선포했고, 그 수수께끼를 푼 다니엘에게 벨사살로부터 '제3의 지위(제3의 권력)'가 주어졌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벨사살의 포고에 '제3의…'라는 단서가 붙은 것은 나보니두스(제1)와 벨사살의 권력(제2)을 전제로 한 지위 수여로 볼 수 있다.
또한, 다니엘서 5장에서 다니엘을 벨사살에게 추천한 왕모를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딸 니토크리스라고 본다면, 다니엘서 이야기의 논리적 일관성과 사실과의 일관성을 설명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4. 유산 및 평가
벨사살의 이야기는 "벨사살의 향연"이라는 주제로 여러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벨사살 왕"이라는 시를 썼고,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은 이 시를 바탕으로 가곡을 작곡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은 오라토리오 벨사살을, 윌리엄 월턴(William Walton)은 오라토리오 "벨사살의 향연"을 작곡했다.[3]
영국의 19세기 낭만파 화가 존 마틴(John Martin)은 이 주제로 『벨사살의 향연(Belshazzar's Feast)』이라는 그림을 그렸다.[3]
다니엘서에서 벨사살은 악인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1] 후대의 탈무드와 미드라쉬 저술가들은 벨사살이 유대 백성을 억압했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벨사살을 느부갓네살과 함께 이스라엘을 압제한 불경건하고 폭압적인 군주로 묘사하며, 그의 파멸은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해석한다.[1]
역사학계에서는 벨사살이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고, 다니엘서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일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벨사살이 당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기원전 553년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아라비아의 테이마로 원정을 떠났을 때 섭정으로 임명되어 바빌론에 남았다. 그는 공식적으로 왕을 자칭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2]
참조
[1]
백과사전
Belshazzar
[2]
서적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https://archive.org/[...]
Clarendon Press
[3]
서적
ニネヴェとバビロン
みすず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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