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나보니두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보니두스는 기원전 556년 어린 왕 라바시-마르두크를 몰아내고 신바빌로니아의 왕이 된 인물이다. 그의 출신은 불분명하며, 아시리아인이라는 설과 하란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종교 개혁을 통해 달의 신 신을 숭배하고 바빌로니아의 주신 마르두크를 경시했으며, 이로 인해 바빌로니아 사제들과 백성들의 반발을 샀다. 나보니두스는 테이마에서 약 10년간 통치하며 건설 사업을 벌였지만,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2세의 침공으로 바빌로니아가 멸망하면서 체포되었다. 그는 고고학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역사상 최초의 고고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아들 벨사자르는 섭정으로 바빌로니아를 통치했고, 딸 엔니갈디-난나는 우르의 엔툼 여사제로 임명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우주의 왕 - 나람신
    나람신은 기원전 23세기 아카드 제국의 왕으로, 정복 활동을 통해 제국 최대 영토를 건설하고 중앙 집권 정책과 신격화를 추진했으나 반란에 직면했으며, 그의 치세는 제국의 번영과 멸망에 대한 전설로 남았다.
  • 하란 출신 - 이븐 타이미야
    이븐 타이미야는 1263년 시리아에서 태어나 다마스쿠스에서 활동한 중세 이슬람 학자이며, 몽골의 침입, 수피즘, 이단에 대한 비판과 이슬람 율법의 문자적 해석을 강조했으며, 1328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 하란 출신 - 바타니
    바타니는 9세기 이슬람 과학자이자 천문학자, 수학자로, 천문 관측, 금환일식 원인 규명, 태양 원지점 위치 변화 발견, 삼각법 활용 키블라 계산 등 천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저서 《키타브 알-지 알-사비’》는 천문학적 계산을 다룬다.
  • 신바빌로니아 국왕 - 네부카드네자르 2세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제2대 국왕으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제국을 확장하고 바빌론 유수를 일으켰으며 바빌론 재건을 통해 황금기를 이끌었으나, 잔혹한 통치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 신바빌로니아 국왕 - 나보폴라사르
    나보폴라사르는 기원전 625년부터 605년까지 바빌론을 다스리며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건국하고 신아시리아 제국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왕으로,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고 메디아와의 동맹으로 아시리아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바빌론 재건의 기반을 마련했다.
나보니두스
기본 정보
이름 (아카드어)Nabû-naʾid
출생기원전 620년 – 기원전 615년 경
출생지하란
사망기원전 522년 이후 추정, 카르마니아 (?)
배우자니토크리스 (?)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딸 (?) )
자녀벨샤자르, 엔니갈디-난나, 이나-에사길라-레마트, 아카부우마 외 다수
나보니두스 석비 세부, 전통적인 바빌로니아 왕 복장을 하고 정의와 힘을 상징하는 물건을 들고 있음
나보니두스, 대영박물관 소장 석비 세부, 아마도 이라크 바빌론 출토
통치 정보
왕조칼데아 왕조 (혼인 관계를 통해) (?)
즉위신바빌로니아 왕
칭호바빌론
수메르와 아카드 왕
세계 사방의 왕
우주의 왕
재위 기간기원전 556년 5월 25일 –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선임자라바시-마르두크
후임자키루스 대왕 (아케메네스 제국)
가계
아버지나부-발라츠-이크비
어머니아다드-구피

2. 출생 배경

나보니두스의 출생 배경은 분명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비문에서 자신이 변변치 않은 출신이라고 언급했다.[3] 그의 어머니 아다고페는 하란에 있는 달의 신 신의 신전과 관련이 있었지만, 그녀의 비문에서도 그녀의 집안 경력은 나타나 있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나보니두스가 아시리아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나보니두스가 자신의 왕으로서의 선전에서 신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위대한 왕 아슈르바니팔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하란 출신이라는 점과 하란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을 든다. 하란아시리아의 도시이면서, 신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 함락 이후 마지막 거점이 된 곳이다.[4][5]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보니두스 이전 왕들의 선전과 거의 다를 바 없고, 그의 뒤를 이은 페르시아 제국키루스 대왕도 키루스 원통형 비문에서 아슈르바니팔을 언급하기 때문이다.[6] 나보니두스는 칼데아 왕조 출신이 아니었으며, 기원전 556년, 전임의 젊은 왕 라바시-마르두크의 정권을 뒤엎고 왕위에 올랐다.

2. 1. 가계와 왕족과의 관계

나보니두스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그의 아버지 나부-발라투-이그비는 비문에 "학식 있는 조언자",[1] "현명한 군주", "완벽한 군주", "영웅적인 총독"으로 묘사되지만,[2] 바빌로니아 왕족(칼데아 왕조)과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1] 나보니두스는 자신의 비문에서 자신보다 먼저 바빌론의 왕들을 언급하지만, 그들 중 누구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7] 아버지의 출신과 민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고, 단지 용감하고 현명하며 독실하다고 기록되어 있다.[8]

나보니두스의 어머니 아다드-구피는 하란 출신으로,[9] 달의 신 신을 섬기는 여사제였다.[10] 그녀는 자신의 비문에서 바빌로니아 왕실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나보폴라사르(기원전 626–605년), 네부카드네자르 2세(기원전 605–562년), 네리글리사르(기원전 560–556년)와 같은 왕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한다.[11] 아다드-구피는 나보니두스가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 아슈르바니팔(기원전 669~631년)의 왕조 출신이라고 주장했다.[12] 그러나 마이클 B. 딕은 나보니두스가 사르곤 왕조와 관련이 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지적했다.[13]

아슈르바니팔의 부조. 나보니두스는 아슈르바니팔과 그의 왕조인 사르곤 왕조를 모방했다.


나보니두스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딸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11] 이는 그의 왕위 계승과 아들 벨사자르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후손으로 묘사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11] 구약성경다니엘서에서 벨사자르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손자)로 언급된다.[11]

3. 즉위와 업적

나보니두스는 기원전 556년 어린 왕 라바시-마르둑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1] 그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과거 영광에 관심을 가졌으며, 재위 기간 동안 종교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 바빌로니아의 주신은 마르둑이었으나, 나보니두스는 달의 신 신을 더 숭배하도록 하여 반발을 샀다. 그는 재위 후반기에 아들 벨사살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섭정으로서 제국을 통치했다.

나보니두스는 즉위 초기에 시파르를 방문하여 에바바르에 금을 기증하고,[10] 킬리키아의 후메로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포로와 전리품을 바빌론으로 가져왔다.[11] 이후 남부 바빌로니아를 순방하며 키쉬, 라르사, 우루크, 우르를 방문하여 에안나 사원을 재정비하고 제물을 복원했다.[13][14][15] 기원전 555년에는 킬리키아로 다시 원정을 떠나 하마를 공격하기도 했다.[16][17]

나보니두스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종교 개혁을 시도하여 달의 신 신을 마르둑보다 더 높이 숭배하려 했다.[10] 그는 신에게 "빛나는 신", "인류의 빛"과 같은 칭호를 부여하고, 하란의 신전 에쿨쿨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10] 그러나 이러한 종교 개혁은 마르두크 사제단의 반발을 샀다.[11]

기원전 553년, 나보니두스는 안티레바논 산맥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라비아 원정을 떠났고, 다다누 왕을 물리치고 테이마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그는 테이마에 약 10년간 머무르며 도시를 바빌로니아식으로 재건했다.

테이마의 고대 유적
이 기간 동안 아들 벨사자르가 바빌론을 섭정으로 통치했다. 나보니두스가 테이마에 장기간 머문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경제적 이득, 종교적 신념, 정치적 투쟁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1. 왕위 계승

나보니두스는 기원전 556년, 네리글리사르의 아들 라바시-마르두크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1] 라바시-마르두크는 짧은 통치 후 귀족들의 음모로 살해되었는데,[11] 나보니두스는 이 음모의 주도적인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4]

나보니두스는 자신의 비문에서 왕위를 탐내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14] 이는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라바시-마르두크에 대한 쿠데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라바시-마르두크와 그의 아버지는 부유하고 인맥이 좋았지만, 귀족 혈통이 없는 평민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있다.[12] 혹은, 라바시-마르두크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왕조 단절을 의미했기 때문에 바빌론 대중의 반대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13]

나보니두스는 마지못해 왕위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음모자들에게 설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0] 나보니두스의 아들 벨사자르는 라바시-마르두크에 대한 음모의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일의 가장 큰 수혜자였기 때문이다. 벨사자르는 왕위의 지정된 상속자가 되었고, 라바시-마르두크의 대규모 사유지를 상속받아 바빌로니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21]

3. 2. 초기 통치와 군사 원정

나보니두스는 기원전 556년, 어린 왕 라바시-마르둑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1] 즉위 초기에 나보니두스는 정치적, 종교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펼쳤다. 그는 시파르를 방문하여 도시의 사원인 에바바르에 금을 기증했는데,[10] 이는 나보니두스가 왕으로 선포된 지 거의 한 달 후, 그리고 라바시-마르둑을 왕으로 인정한 지 불과 2주 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56년 가을, 나보니두스는 바빌론 군대를 이끌고 동부 킬리키아의 후메로 원정을 떠났다.[11] 이 원정은 성공적이었으며, 포로와 전리품을 바빌론으로 가져와 연례 신년 축제에 사용했다. 바빌론 기록에 따르면, 이후 사원 노예로 분배된 포로의 수는 2,850명이었다.[12] 신년 축제를 치른 후, 나보니두스는 남부 바빌로니아로 짧은 여행을 떠나 키쉬, 라르사, 우루크, 우르를 방문했다.[13] 그는 우루크에서 에안나 사원을 재정비하고, 희생 제물 계획을 조정했으며,[14] 네리글리사르 통치 하에 중단되었던 몇몇 제물을 복원했다.[15]

기원전 555년, 나보니두스는 킬리키아로 두 번째 원정을 떠나 성공을 거두었다.[16] 이 과정에서 시리아의 도시 하마를 공격했을 수도 있지만,[17] 기록은 단편적이다.[18]

3. 3. 종교 개혁

나보니두스는 기원전 556년 어린 왕 라바시-마르둑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종교 개혁을 시도했는데, 당시 바빌로니아의 주신은 마르두크였다. 하지만 나보니두스는 의 신 신을 더 높이 숭배하려 했고, 이로 인해 상당한 반발을 샀다.[10]

나보니두스는 신에게 이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빛나는 신", "인류의 빛", "고귀한 신"과 같은 칭호를 부여했다. 반면 마르두크에게는 "신들의 왕"과 같은 최소한의 칭호만을 부여했는데, 이는 통상적인 것보다 훨씬 적은 수였다.[10] 그의 초기 비문은 표면적으로는 정통적이었지만, 마르두크에 대한 찬양을 의도적으로 절제하고 신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경향을 보였다.[10]

나보니두스가 아라비아 반도의 테이마에서 오랜 기간 머문 후 바빌론으로 돌아온 뒤의 비문들은 그가 더 이상 신을 숭배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적어도 6세기 동안 바빌론의 주신이었던 마르두크를 거부하는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10] 몇몇 비문에서는 마르두크의 전통적인 칭호인 "신들의 왕", "신들의 아버지이자 창조주" 등을 신에게 부여하기도 했다.[10]

예를 들어, 라르사의 에바바르 사원 건축에 관한 비문에서는 마르두크의 전통적인 칭호를 신에게 부여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몇몇 비문은 역사 수정주의의 시도 또한 보여준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업적을 신의 공으로 돌리고, 아시리아의 신 아슈르가 아닌 신이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아슈르바니팔에게 세계 통치를 맡겼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또한 신은 통치자를 불러오는 마르두크의 역할까지 대신했다. 한 비문에서는 나보니두스가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신과 닌갈(신의 배우자)에 의해 왕위에 오르도록 정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10]

나보니두스는 하란에 있는 신의 신전 에쿨쿨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이 신전은 그의 어머니가 신관이었던 곳으로, 나보니두스는 이 신전에 특별한 헌납을 했다.[10] 그는 신을 "신들의 신"이라는 칭호로 불렀는데, 이는 메소포타미아 신에게 주어진 가장 높은 칭호였다.[10]

이러한 종교 개혁은 마르두크를 주신으로 섬기는 바빌로니아인들에게는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보니두스가 타이마에 머물면서 장기간 바빌론을 비웠고, 마르두크 신과 관련된 중요한 신년 축제를 열지 못했던 것과 그가 달의 신 신을 중요시했던 것에 분개한 마르두크 사제단의 영향으로 그의 이미지는 더욱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11]

마르두크 사제단과 키루스 2세는 나보니두스가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가장 중요한 신상을 바빌론에 인질로 모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많은 비문에서 페르시아 제국 군의 진군 직전에 이 신상들이 바빌론으로 옮겨졌음을 보여준다.[11]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행동에 대해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신이 그 상 안에 머물며 도시를 지킨다고 믿었다. 다만 이 가호는 신상이 적절하게 취급될 경우에만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나보니두스는 이러한 신상을 특별히 취급하여 신들이 확실히 그와 함께하도록 했다.[13]

하지만 이 행위는 나보니두스의 정적, 특히 키루스 2세에게 비난을 받았다. 키루스 2세는 자신이 나보니두스보다 더 나은 왕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사건을 나보니두스의 결함으로 이용했다.[14]

3. 4. 테이마에서의 통치

나보니두스는 기원전 553년 5월, 안티레바논 산맥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라비아 원정을 떠났다. 바빌로니아는 빠르게 승리했고, 나보니두스는 8월에도 안티레바논 산맥 인근에 머물면서 바빌론으로의 물자 수송을 감독했다. 병을 앓은 후, 나보니두스는 아무르와 에돔으로 이동하여 알려지지 않은 도시를 점령했다. 기원전 553년 12월 또는 기원전 552년 1월까지 나보니두스는 아라비아에서 다다누 왕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 3월 또는 4월까지 나보니두스는 다다누 왕을 물리치고 테이마를 포함한 아라비아의 다른 도시들을 점령했으며, 기원전 552년 여름까지 테이마를 임시 거점으로 삼았다. 바빌로니아 자료에 따르면, 나보니두스는 아라비아 땅을 메디나(당시에는 야트리부로 불림)까지 정복했다. 테이마를 정복한 후, 나보니두스는 약 10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으며, 기원전 543년 또는 542년 9월 또는 10월까지 바빌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기원전 543년 10월은 현존하는 바빌로니아 문서에서 가장 뒷받침되는 귀환 날짜이다.

나보니두스 시구에 따르면, 나보니두스는 테이마에서 광범위한 건설 작업을 수행하여 새로운 벽으로 요새화하고, 새로운 건물로 장식했으며, 바빌론의 왕궁과 유사하지만 훨씬 작은 왕궁을 건설하여 본질적으로 도시를 바빌로니아식으로 재건했다. 테이마에서 이루어진 현대 고고학 발굴을 통해 6세기 동안 도시가 상당한 확장을 겪었으며, 광범위한 관개 시스템의 건설이 포함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부 유적의 일부 문양은 바빌로니아의 종교적 문양을 연상시키는 초승달, 별, 날개 달린 원반이 있는 제물상과 같이 명확한 바빌로니아의 영향을 보여준다.

아라비아 원정은 서쪽으로 팽창하는 바빌로니아의 다음 단계로 보인다. 바빌로니아 군대는 앗시리아로부터 레반트를 정복하면서 처음으로 아라비아 왕국과 접촉했고, 이 원정은 바빌로니아 제국을 서쪽으로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라비아를 통과하는 많은 무역로로 인해, 이 지역은 매우 부유했고 매력적인 목표였다. 테이마 정복의 의도는 이 도시를 통과하는 중요한 무역로(이집트에서 바빌론으로 이어지는 주요 무역로 포함)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무역로의 이점을 효율적으로 얻기 위해서는 강력한 현지 바빌로니아 군대가 권위를 행사해야 했을 것이다.

나보니두스가 테이마에 장기간 머문 이유와 목적은 불분명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보편적인 지지를 받는 설명은 없다. 경제적 이득 외에는 테이마 지역은 전략적으로 큰 효용이 없었다. 아랍인들은 당시 바빌론이나 다른 어떤 세력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았고, 이집트는 잠재적으로 강력한 적이었지만, 아라비아 깊숙한 곳에 고립된 도시를 요새화하는 것보다 팔레스타인의 바빌로니아 영토를 요새화하고 주둔시키는 것이 이집트인들을 상대하는 데 더 적합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테이마의 외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위치 때문에, 나보니두스가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여 제국의 중심을 서쪽으로 옮기려 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나보니두스가 테이마에 머물도록 동기를 부여받았을 종교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지역에 여러 저명한 달 신이 있었고 나보니두스가 달의 신 신을 숭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거대한 노력이 단순히 신앙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와이즈먼에 따르면, 테이마에서의 장기간 체류에 대한 종교적 설명은 폐기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바빌로니아 사원의 존재나 건설, 또는 신에게 헌정된 사원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보리유는 또한 나보니두스의 종교적 신념에 초점을 맞춘 나보니두스 시구에서 원정과 장기간의 체류가 종교적으로 동기 부여되었다면 확실히 언급했을 테이마에서의 어떠한 종교 활동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나보니두스가 테이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벨사자르가 바빌론을 섭정으로 통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테이마에서의 장기간 체류는 나보니두스의 개혁적인 종교적 입장에 반대하는 파벌, 아마도 그의 아들 벨사자르가 이끄는 파벌과의 정치적 투쟁의 결과였을 수 있으며, 벨사자르가 바빌론에서 섭정으로 통치하는 동안 자진 유폐하기로 합의했을 수 있다. 나보니두스는 자신의 비문에 테이마 체류의 원인을 "바빌로니아인들의 불경함"으로 돌리고 있다.

나보니두스는 북쪽의 메대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서쪽에서 원정을 벌였을 것이다. 보리유는 나보니두스가 키루스 2세에게 메대에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을 벌이도록 장려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심지어 그와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데, 이는 나보니두스가 테이마에 머물기 시작한 시기가 키루스의 통치 시작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보리유에 따르면, "왕이 전략적 능력이 전혀 없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바빌로니아 군대의 상당 부분을 아라비아에 대한 장기간의 원정에 투입하면서 제국의 북부와 동부 국경이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안전하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테이마에서의 체류가 계속되면서 키루스 2세는 그의 통치 아래 광대한 제국을 통합했다. 섭정으로서의 벨사자르는 키루스의 성장하는 아케메네스 제국이 제시하는 위협을 날카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시파르와 인근 방어 시설에 자원을 투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 바빌로니아의 패망

키루스실린더에 따르면, 페르시아 군이 바빌론 시를 포위했을 때, 성안 백성들이 문을 열고 그들을 해방자로 맞이했다고 한다. 헤로도투스는 키루스가 시 공성전에서 초기에 실패했고, 오랜 시간이 걸리자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돌려 강바닥을 말린 후 병사들이 마른 강바닥을 통해 행군해 들어갔다고 기록했다. 크세노폰도 비슷하게 기록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언급하지 않았다.[19]

나보니두스 시대 신바빌로니아 제국 지도. 테이마는 제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북아라비아에 있다.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나보니두스는 보르시파로 도망쳤고, 키루스가 성을 함락시킨 후 군대를 보르시파로 돌리자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이후 나보니두스에 대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키루스가 그를 살려주고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해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19]

나보니두스는 북쪽의 메디아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서쪽 원정을 벌였을 것이다. 보리유는 나보니두스가 키루스 2세에게 메대에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을 벌이도록 장려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심지어 그와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이는 나보니두스가 테이마에 머물기 시작한 시기가 키루스의 통치 시작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보리유는 "왕이 전략적 능력이 전혀 없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바빌로니아 군대의 상당 부분을 아라비아에 대한 장기간의 원정에 투입하면서 제국의 북부와 동부 국경이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안전하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라고 주장한다.[15] 테이마에서의 체류가 계속되면서 키루스 2세는 그의 통치 아래 광대한 제국을 통합했다. 섭정으로서의 벨사자르는 키루스의 성장하는 아케메네스 제국이 제시하는 위협을 날카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시파르와 인근 방어 시설에 자원을 투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6]

나보니두스 연대기. 후기 페르시아 통치 기간에 작성된 이 점토판은 나보니두스와 그의 통치를 조롱하며, 그의 바빌론 부재 기간과 그의 종교 정책을 비판했다.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을 정복한 키루스 2세가 헴헴 왕관 또는 네 개의 날개를 가진 케루빔 수호 신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나보니두스가 테이마에서 바빌론으로 돌아온 이유는 불분명하다. 가능한 설명으로는 키루스 2세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는 벨사자르와의 종교 및 그의 권위의 범위에 대한 심각한 의견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23] 그는 귀환 후 즉시 종교 개혁을 시행하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노령으로 인해 죽기 전에 개혁을 끝내고 싶어했을 것이다.[22] 나보니두스 후기 통치의 주요 사업은 하란의 에쿨쿨 건설 사업 완성이었다.[22] 그는 성전을 원래 기초 위에 직접 재건했으며,[11] 자신의 통치 주요 업적으로 여겼다.[22] 우르, 라르사, 시파르, 아카드에서도 건설 작업이 수행되었다.[22] 일부 증거에 따르면 나보니두스 후기 통치 기간 동안 바빌로니아에 기근이 있었다. 나보니두스는 이를 백성이 왕의 종교 개혁에 반응하지 않는 신의 분노의 징조로 여겼지만, 백성은 이를 왕의 이단적인 신앙에 대한 마르두크의 분노로 여겼을 것이다.[23]

나보니두스가 테이마에 부재 중이던 신년 축제는 그가 돌아온 후 매년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시 거행되었다.[16][20] 이 축제는 마르두크의 권위를 매년 복원하고 바빌론의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수행되었기 때문에, 나보니두스의 부재 중에 중단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23] 키루스의 위협은 점점 더 가까워졌으며, 기록이 단편적이지만 기원전 540/539년 겨울에 우루크 근처에서 페르시아군과 바빌론군 사이에 이미 대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2]

4. 1. 키루스 2세의 침공

나보니두스가 테이마에서 돌아온 후, 아케메네스 제국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침공했다. 나보니두스는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비하여 우루크, 아카드, 키시, 마라드, 쿠르사갈라마의 신상들을 수도 바빌론으로 옮겼지만, 이는 오히려 운반된 신들의 종교 의식에 혼란을 야기했다.[20]

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 침공 중 통과한 경로 지도.


기원전 539년, 오피스 전투에서 바빌로니아 군은 페르시아 군에게 패배했다.[20] 그 직후, 기원전 539년 10월 10일, 시파르는 전투 없이 키루스에게 함락되었고,[19]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으로 후퇴했다.[21] 시파르가 전투 없이 항복한 이유는 나보니두스의 종교 정책에 대한 불만이나 오피스에서의 패배를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0월 12일, 우바루 총독이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가 전투 없이 바빌론에 입성했다.[21]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에서 체포되었고,[20] 우루크에서 발견된 10월 13일자 점토판을 마지막으로 그의 통치는 끝난 것으로 여겨진다.

키루스 2세는 10월 29일[17] 또는 30일[21] 바빌론에 입성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21] 나보니두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는데, 크세노폰은 그가 바빌론 점령 당시 죽었다고 기록했지만,[17] 베로소스는 키루스가 그를 살려주고 카르마니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고 주장한다.[19]

4. 2. 나보니두스의 최후

키루스가 바빌론을 점령한 후 나보니두스의 최후는 고대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기원전 5세기/4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크세노폰은 우가루(또는 '고브리아스')가 바빌론 점령 당시 나보니두스를 죽였다고 주장했다.[24] 그러나 이는 크세노폰이 다니엘서에 기록된 벨사살을 나보니두스로 오해했을 가능성도 있다.[24]

베로소스는 나보니두스가 바빌론 함락 후 보르시파에서 키루스에게 항복했고, 키루스는 그를 "호의적으로 대우"하여 목숨을 살려주고 은퇴를 허락하거나, 카르마니아(오늘날 이란의 케르만 주)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고 기록했다.[24][26] 왕실 연대기에는 나보니두스가 후퇴 후 바빌론에서 체포되었다는 간략한 내용만 기록되어 있어 그의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다.[26] 왕조 예언은 나보니두스가 왕위에서 쫓겨나 "다른 땅"에 정착했다는 베로수스의 기록을 뒷받침한다.[24][26]

베로수스의 기록을 따르면, 나보니두스는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년)의 치세까지 생존했으며, 키루스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보다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베로수스는 "다리우스 왕이 그의 지방 일부를 빼앗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아다드-구피가 사망했을 때의 나이를 고려하면 나보니두스 역시 100년 이상 살았을 수도 있다.[26]

키루스는 자신이 무찌른 몇몇 왕의 목숨을 살려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리디아크로이소스는 패배한 후 키루스의 궁정에서 조언자로 살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크로이소스는 처음에 화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지식을 키루스에게 보여준 결과 처형을 면했다고 한다.[24] 바킬리데스는 불길이 크로이소스를 덮치기 직전에 아폴론 신이 그를 구출하여 (북방의) 상춘의 나라로 데려갔다고 한다.[25]

5. 유산

나보니두스는 종교 개혁 시도와 테이마 장기 체류 등으로 인해 후대 역사가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아케메네스 제국은 나보니두스의 통치를 결코 모방해서는 안 되는 사례로 간주했으며,[1] 키루스 2세는 바빌론 정복을 마르두크가 신성하게 임명한 챔피언이라고 자처하고 나보니두스의 "이단적인" 행위에 대한 기록을 씀으로써 정당화했다.[1]

바빌론 멸망 이후 나보니두스가 종교 정책 때문에 미쳤다는 전설이 점차 형성되어 헬레니즘 시대와 유대교 전통에 영향을 미쳤다.[1] 사해 문서에서 발견된 아람어 텍스트 《나보니두스의 기도문》은 나보니두스가 7년 동안 끔찍한 피부병에 시달렸고, 유대인의 신에게 기도함으로써 치유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왕들이 신들에게 피부병에 걸려 야생 동물처럼 건조한 대초원을 방황하도록 강요받는 메소포타미아 전통과 유사하다.[1]

현대 역사가들은 나보니두스를 다양하게 묘사하는데, 어떤 이들은 고고학 발굴에만 몰두하는 늙은 골동품 애호가로, 또 다른 이들은 그의 고대 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무능한 찬탈자로 보았다. 또 다른 이들은 나보니두스를 달의 신을 그의 제국의 최고 신으로 만드는 데 집착한 종교적 광신자로 보기도 한다.[1]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의 업적과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멸망에 대한 책임을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보니두스는 많은 건축 사업을 수행하고 바빌로니아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었으며 그의 제국이 번영하도록 보장한 비교적 성공적인 통치자였다는 평가도 있다.[1]

나보니두스는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아들 벨사자르와 딸 엔니갈디-난나이다. 벨사자르는 나보니두스가 테이마에 있는 동안 섭정으로 바빌로니아를 통치했고, 엔니갈디-난나는 우르의 엔툼 여사제로 임명되었다. 후기 바빌론인 중 일부는 나보니두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5. 1. 고고학적 업적

나보니두스는 역사상 최초의 고고학자로 알려져 있다.[7]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태양신 샤마슈의 신전, 전쟁의 여신 아누니투의 신전(모두 시파르에 있음)과 하란에 있는 달의 신 나람 신의 성소 등, 역사상 최초의 발굴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예전 상태로 복원하기까지 했다.[8] 그는 또한, 나람 신의 신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그 연대를 특정하려 시도했으며, 고고학적 유적의 연대 추정을 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9] 그의 연대 추정은 비록 1500년 정도 차이가 났지만, 당시의 연대 추정 기술로 볼 때 상당히 정확한 수준이었다. 그는 시파르의 에바바르 사원, 하란의 에쿨쿨 사원 등 고대 건축물을 발굴하고 복원했다.

5. 2. 역사적 평가

나보니두스는 종교 개혁 시도와 테이마 장기 체류 등으로 인해 후대 역사가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아케메네스 제국은 나보니두스의 통치를 결코 모방해서는 안 되는 사례로 간주했으며, 그의 전통적인 업적인 사원 재건 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바빌로니아 왕에게 기대되는 것과 반대되는 나보니두스의 행적을 강조했다.[1] 키루스 2세는 바빌론 정복을 마르두크가 신성하게 임명한 챔피언이라고 자처하고 나보니두스의 "이단적인" 행위에 대한 기록을 씀으로써 정당화했다.[1]

바빌론 멸망 이후 나보니두스가 종교 정책 때문에 미쳤다는 전설이 점차 형성되었고, 결국 헬레니즘 시대와 유대교 전통에 영향을 미쳤다.[1] 일부 학자들은 다니엘서에서 나보니두스의 추정된 광기가 느부갓네살 2세에게 재귀속되었다고 믿는다.[1] 그러나 어떤 설형 문자 자료에서도 정신 이상에 대한 비난은 발견되지 않는다.[1]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인 ''느부갓네살''(1795). 이 그림은 느부갓네살 2세를 벌거벗은 채 미친 모습으로 야생 동물처럼 묘사하고 있다. 느부갓네살 2세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는 원래 나보니두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람어로 쓰여진 사해 문서에서 발견된 텍스트 중 하나인 《나보니두스의 기도문》은 수 세기 후에 쓰여졌는데, 나보니두스가 미쳤다는 이야기의 기원일 수 있다.[1] 이 기도문은 나보니두스가 7년 동안 끔찍한 피부병에 시달렸고, 유대인의 신에게 기도함으로써 치유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는 왕들이 신들에게 피부병에 걸려 야생 동물처럼 건조한 대초원을 방황하도록 강요받는 메소포타미아 전통과 유사하다.[1]

현대 역사가들은 나보니두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해 왔다. 어떤 이들은 그를 정부 일에는 관심이 없고 고고학 발굴에만 몰두하는 늙은 골동품 애호가로 묘사했고, 또 다른 이들은 나보니두스를 그의 고대 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무능한 찬탈자로 보았다. 다른 이들은 나보니두스를 달의 신을 그의 제국의 최고 신으로 만드는 데 집착한 종교적 광신자로 보았다.[1]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의 업적과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멸망에 대한 책임을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보리외에 따르면, 오늘날 역사가들이 가지고 있는 나보니두스에 대한 모습은 강력했지만 서둘러 건설되었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왕국인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내부 불안정과 절박한 지정학적 위치로부터 구하려 했던 분명히 유능한 통치자였다.[1] 바이얼스호이저와 노보트니는 페르시아 시대의 노골적인 부정적 평가와는 달리, 나보니두스는 많은 건축 사업을 수행하고 바빌로니아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었으며 그의 제국이 번영하도록 보장한 비교적 성공적인 통치자였다고 썼다.[1]

5. 3. 가족

나보니두스는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아들 벨사자르와 딸 엔니갈디-난나이다. 벨사자르는 나보니두스가 테이마에 있는 동안 섭정으로 바빌로니아를 통치했다. 엔니갈디-난나는 우르의 엔툼 여사제로 임명되었다.

나보니두스의 알려진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 '''벨사자르''' (Bēl-šar-uṣurakk) – 아들. 나보니두스 통치 기간 내내 왕세자였으며 기원전 553–543/542년 섭정이었다.
  • '''엔니갈디-난나''' (En-nigaldi-Nannaakk) – 딸. 아버지에 의해 우르에서 ''entum'' 여사제로 봉헌되었다.
  • '''이나-에사길라-레마트''' 또는 '''이나-에사길라-리삿''' (Ina-Esagil-rīšatakk) – 딸. 십일조시파르에서 받았다고 언급되었으나, 그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 '''아카부운마''' (Akkabuʾunmaakk, 정확한 판독 불확실) – 딸. 시파르의 기록 보관 텍스트에 기록되어 있다.
  • 시파르의 기록 보관 텍스트에 기록된 또 다른 딸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후기 바빌론인 중 일부는 나보니두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기원전 522년 말에 아케메네스 왕조다리우스 1세에 반란을 일으켜 바빌론의 왕으로 선포된 니딘투-벨은 네부카드네자르 3세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나보니두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니딘투-벨의 실제 아버지는 현지의 저명한 자자쿠 가문의 무킨-제리라는 사람이었다. 니딘투-벨이 패배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바빌론은 기원전 521년에 다시 다리우스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아라카라는 지도자가 니딘투-벨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나보니두스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네부카드네자르 4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아라카는 실제로는 할디타라는 사람의 아들이었으며 바빌론 출신이 아니라 우라르투인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참조

[1] 논문 COLLECTING AND CONNECTING HISTORY: NABONIDUS AND THE KASSITE REBUILDING OF E(UL)MAŠ OF (IŠTAR)-ANNUNĪTU IN SIPPAR-ANNUNĪTU Journal of Cuneiform Studies 2014
[2] 서적 The reign of Nabonidus king of Babylon 556-539 B.C. Yale University Press 1989
[2] 논문 Kyros und Nabonid: Propaganda und Gegenpropaganda Dietrich Reimer 1983
[2] 논문 Nabonidus and the Babylonian priesthood Duckworth
[2] 논문 Nabonidus, Nabû-šarra-uṣur, and the Eanna temple Zeitschrift für Assyriologie 1991
[2] 논문 The jasper cylinder seal of Aššurbanipal and Nabonidus’ making of Sîn’s statue Revue d’Assyriologie 1993
[2] 논문 Heavenly wisdom CDL Press 1993
[2] 서적 Die Inschriften Nabonids von Babylon und Kyros’ des Großen samt den in ihrem Umfeld entstandenen Tendezschriften: Textausgabe und Grammatik Ugarit-Verlag 2001
[2] 논문 Nabonidus the mad king: A reconsideration of his steles from Harran and Babylon Eisenbrauns 2007
[3] 논문 1989
[4] 서적 Nabonidus Herkunft Ugarit-Verlag 1998
[5] 논문 National and Ethnic Identity in the Neo-Assyrian Empire and Assyrian Identity in Post-Empire Times Journal of Assyrian Academic Studies (JAAS) 2004
[5] 웹사이트 Assyrians after Assyria
[6] 논문 "'Ex oriente lux': How we may widen our perspectives on ancient history" Verlag Antike 2007
[7] 강의자료 ANP203-History-of-Archaeology-Lecture-2
[8] 웹사이트 Nabonidus Cylinder from Sippar 2014-04-07
[9] 웹사이트 The History of Archaeology Part 1
[10] 서적 1989
[10] 논문 Heavenly wisdom 1993
[11] 기타 1990
[12] 기타 Hursagkalamaの暫定訳。キシュと密接に関連する場所?
[13] 논문 An episode in the fall of Babylon to the Persians Journal of Near Eastern Studies 1993
[14] 기타 1993
[14] 논문 The Cyrus cylinder and Achaemenid imperial policy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1983
[15] 서적 タイマの交易上の重要性 1989
[15] 논문 History of Tayma' and Hejazi trade during the first millennium B.C. Journal of the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the Orient 1989
[16] 웹사이트 Deutsches Archaologisches Institut: Tayma 2007-10-16
[16] 논문 First evidence of Nabonidus in the Ancient North Arabian inscriptions from the region of Tayma Proceedings of the Seminar for Arabian Studies 2001
[17] 서적 歴史
[18] 서적 キュロスの教育
[19] 서적 Babyloniaca
[20] 기타 ここでは、新バビロニア軍のことを意味する
[21] 서적 From Cyrus to Alexander: A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Eisenbrauns 2002
[21] 논문 Quelques elements concernant la prise de Babylon par Cyrus (octobre 539 av. J.-C.) Arta 2005-03
[21] 서적 Ancient Near Eastern history: The case of Cyrus the Great of Persia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22] 기타 Ugbaruの暫定訳
[23] 논문 Kontinuitat oder Zasur? Babylon under den Achaimeniden SDV 1999
[23] 논문 The transition of Babylonia from the Neo-Babylonian empire to Achaemenid ru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24] 서적 歴史
[25] 기타 took him to the Hyperboreanの暫定訳
[26] 논문 Review of R. Rollinger, Herodots babylonischer logos: Eine kritische Untersuchung der Glaubwurdigkeitsdiskussion (Innsbruck: Institut fur Sprachwissenschaft 1993) Archiv fur Orientforschung 1999/2000
[26] 논문 The Median "empire", the end of Urartu and Cyrus' the Great campaign in 547 B.C. (Nabonidus Chronicle II 16) Ancient West & East 20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