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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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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첨은 촉한의 장수로, 현재의 신양시 출신이다. 222년 이릉 전투에서 아버지 부융이 사망한 후 관직을 이어받아 좌중랑장과 관중 도독을 지냈다. 263년 위나라의 촉 정벌 당시 양평관을 지키다 장서의 항복으로 인해 고립되어 전사했다. 사후 그의 충절을 기려 서진에서 아들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위군에 맞서 싸우다 자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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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첨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부첨
원어 이름傅僉
로마자 표기Fu Qian
생년미상
출생지신양, 허난 성
사망년도263년
사망 장소닝창 현, 산시 성
아버지부융
자녀부저
부목
직업군인
관직 정보
관직관중 도독
좌중랑장
임관 시기미상
군주유선

2. 생애

부첨은 아버지 부융222년 이릉 전투에서 전사한 후, 촉한에서 좌중랑장(左中朗將)에 임명되었고, 후에 관중도독(關中都督)이 되었다.[5]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첨과 그의 아버지를 "대대로 충의로운" (奕世忠義) 인물로 칭송했다.[2]

263년 위의 촉 정벌에서 전사한 이후, 서진황제사마염은 부첨 부자의 충의를 칭찬하는 조서를 내렸다. 아들인 부저와 부모는 관노가 되었지만, 후에 사면되어 서인이 되었다.[4]

2. 1. 출생과 초기 관직

부첨은 현재의 신양시(新陽市)인 의양군(義陽郡)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부융은 222년 육손의 군대에 맞선 이릉 전투에서 전사했다. 부첨은 아버지의 관직을 물려받아 촉에서 좌중랑장(左中郎將)을 지냈고, 이후 관중의 도독(都督)으로 승진했다.[2]

2. 2. 위의 촉 정벌과 양평관 전투 (263년)

263년 위의 촉 정벌 당시 사마소가 대군을 편성하여 촉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 그해 9월 종회(鍾會)는 양평관(陽平關) 부근까지 진군하고 호군(護軍) 호열(胡烈)로 하여금 양평관의 입구에 해당하는 관구(關口)를 공격하게 하였다. 부첨과 함께 관구를 지키던 장서(蔣舒)가 나가 싸울 것을 주장하자, 부첨은 자신이 관구를 지키고 장서가 나가 싸우도록 했다. 그러나 장서는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기에 호열이 이끄는 위군을 만나자 바로 항복했다.[5]

부첨은 장서가 밖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라 믿고 별다른 대비를 갖추지 않았다. 호열은 촉군의 대비가 허술한 것을 틈타 관구를 공격했다. 부첨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끝내 전사했고 양평관은 위군에게 점령되었다.[5]

위나라에서는 비록 적이었지만 부첨의 충의를 높이 평가했다. 촉나라가 멸망한 후, 부첨의 두 아들 부저(傅著)와 부모(傅募)는 죄인의 자식으로 취급받아 노비가 되었다.[5]

경요 6년(263년), 조위의 침공을 받았을 때 부첨은 장서와 함께 양안관을 지키고 있었다. 수비 명령과 부첨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장서는 "출격하여 적에게 이기는 것이야말로 공이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하자"고 주장하며 군세를 이끌고 출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싸울 의지가 없어 조위의 선봉 호열에게 항복해버린다. 그 허점을 찌른 호열의 습격을 받은 부첨은 분전했지만, 결국 전사했다[4]

사마광(司馬光)이 쓴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주석을 단 호삼성(胡三省)은 부첨이 죽은 일을 두고 <장서에게 싸우게 했더라도 그가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데, 부첨은 어째서 대비하지 않았는가. 관문과 성을 지키지 못한 데에는 부첨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평가했다.[5]

2. 3. 사후 평가와 혈연

263년 위의 촉 정벌 당시 부첨은 장서와 함께 양안관(陽安關)을 지키고 있었다. 부첨은 관구를 지키고 장서는 나가 싸우도록 했으나, 장서는 조위의 선봉 호열에게 항복했다. 호열은 촉군의 대비가 허술한 것을 틈타 관구를 공격했고, 부첨은 분전했지만 결국 전사했다.[5]

위나라에서는 비록 적이었지만 부첨의 충의를 높이 평가했다. 촉나라가 멸망한 후, 부첨의 두 아들 부저(傅著)와 부모(傅募)는 죄인의 자식으로 취급받아 노비가 되었다. 269년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은 조서를 내려 부첨이 촉나라를 위해 전사한 것을 선한 일이라고 칭찬하고, 부저와 부모를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 서인(庶人)으로 살아가도록 했다.

사마광이 쓴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주석을 단 호삼성은 부첨이 죽은 일을 두고 "장서에게 싸우게 했더라도 그가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데, 부첨은 어째서 대비하지 않았는가. 관문과 성을 지키지 못한 데에는 부첨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평가했다.

부첨의 혈연은 다음과 같다.

  • 부융(아버지): 이릉 전투에서 전사했다.[2]
  • 부저(맏아들)
  • 부모(둘째아들): 부저와 부모는 진나라 시대에 문립이 사마염에게 전 촉한 관리들의 후손들에게 관대하게 대할 것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 후 등용되었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제갈량이 죽고 강유가 북벌에 나설 때 장서와 함께 발탁되면서 등장한다. 촉나라 경요 원년(서기 258년) 장서와 함께 우장군(右將軍)에 임명된다.[3] 위군과 마주쳤을 때 위나라 장수 왕진(王眞)이 창으로 찌르려 하자 팔로 왕진을 붙들었으며, 왕진을 구하기 위해 달려나온 이붕(李鵬)을 유인하여 얼굴을 쳐 죽였다. 촉나라에 거짓으로 항복한 위나라의 장수 왕관(王觀)의 계책을 강유가 간파하고 등애를 유인하는 계책을 세울 때 마른 풀을 실은 수레 수백 대를 가지고 매복해 있다가 한밤중에 등애가 당도하자 수레에 불을 붙여 군호로 삼고 위군을 공격하였다.[3]

부첨


삼국지연의에서 부첨은 양평관으로 쳐들어온 위군을 맞아 싸우다 죽었는데, 연의는 부첨이 나가 싸울 것을 주장했지만 장서가 듣지 않자 스스로 3천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다가 장서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아 고립되어 위군에게 죽은 것으로 서술하였다. 또한 사서에서는 부첨이 전사했다고만 말하고 있으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살아서 촉의 신하가 되었으니 죽어서도 촉의 귀신이 되겠다"고 외치고 싸우다가 이길 가망이 없어지자 자결하는 것으로 서술하여 보다 극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3]

그러나 부첨이 죽은 부분을 제외한 다른 장면은 사서에 실려 있지 않은 내용이다. 삼국지연의에서 부첨은 강유 휘하의 든든한 장수로 묘사되며 조위군이 양평관을 공격해오자 최고의 기량으로 이를 방어했다. 그러나 동료 장수가 항복했고, 이로 인해 전투 중에 사망했다.[3]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강인한 무사로, 철선과 언월도를 애용한다. 강유에게 눈에 띄어 북벌에 종군하여 위와의 싸움에서 활약했다. 왕진을 생포하고, 이붕을 쳐 죽였으며, 등애에게서도 승리를 거두었다.[3]

위나라 군대가 대거 촉나라로 쳐들어왔을 때, 부하인 장서와 함께 양평관을 지켰다. 종회의 군대가 닥치자 장서는 수비를 굳게 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부첨은 이를 듣지 않고 출격했다. 이 때문에 장서는 종회에게 항복하여 양평관을 넘겨주게 된다. 부첨은 분노하여 분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마지막에는 "촉의 신하로 태어났으니, 죽어서 촉의 귀신이 되리라"고 말하며 자결했다.[3]

참조

[1] 문서 While Fu Qian's birth year was not recorded, his father Fu Rong died in 222 and Fu Qian was not recorded to be a posthumous child. Thus, Fu Qian should be born in or before 222.
[2] 문서 (晉武帝詔曰:「蜀將軍傅僉,前在關城,身拒官軍,致死不顧。) In an imperial decree by Emperor Wu of the Jin dynasty, it was said that Fu Qian resisted the invaders and never attempted to return to the city until his death.
[3] 서적 Sanguo Yanyi
[4] 서적 漢晋春秋
[5] 서적 화양국지(華陽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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