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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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만타는 고대 인도와 중세 인도에서 사용된 용어로, 원래는 '이웃'을 의미했으나 굽타 제국 이후 '봉신'의 의미로 변화했다. 마우리아 시대에는 인접국의 통치자를, 굽타 제국 후기에는 번속령의 제후를 지칭했으며, 중세 인도에서는 독립적인 토후를 봉신으로 복속시켜 왕이나 황제를 섬기게 하는 사만타 제도가 발전했다. 사만타는 주군에 대한 군사적 의무를 지녔으며, 조공, 경의, 군사 지원, 행정 및 사법 기능 수행 등의 의무를 다했다. 사만타는 마하라자에게 봉건적 경의를 표하는 봉건 영주, 세습 총독, 또는 왕조의 지배 가문과 결혼하여 지위를 얻는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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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타 | |
---|---|
개요 | |
유형 | 칭호 |
사용 지역 | 고대 인도 및 중세 인도 |
설명 | 사만타는 고대 인도와 중세 인도에서 사용된 칭호이다. 일반적으로 이웃 왕을 지칭했다. |
2. 기원과 발전
'사만타(Samanta)'는 원래 '이웃'을 의미하는 단어로, 마우리아 시대의 문헌인 아르타샤스트라와 아소카 칙령에서도 제국 주변 인접국 통치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31][6] 굽타 제국의 황제 사무드라굽타가 프라야그라지 비문에서 언급한 '국경의 영주'( ''pratyan-tanripati'' ) 역시 이러한 초기 의미에 해당한다.[31][6]
그러나 굽타 제국 후기에 이르러 이 용어는 점차 '봉신'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만타 제도의 등장은 고대 인도와 중세 인도를 구분하는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된다.[32][6] 굽타 시대 말기와 6세기 무렵에는 정복 후 복속된 번속령의 제후를 가리키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32][6]
중세 인도 초기 왕국들은 "사만타-차크라", 즉 '복속된 토후들의 원'으로 자신들을 둘러쌌으며,[33][7] 특히 하르샤 황제 시대에는 사만타 제도가 더욱 발전하여 사만타들이 강력한 인물로 부상했다.[34][1] 이들을 왕국의 위계질서에 통합하기 위해 종종 궁정에서 높은 지위가 부여되기도 했다.[35][8] 사만타 제도는 분열된 소규모 독립 지역 통치자들을 정복하여 왕이나 황제의 봉신으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사만타의 지위는 독립적인 이웃 통치자에서 시작하여 조공을 바치는 토후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고위 궁정 관료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이는 인도 역사에서 국가 형성 방식의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2. 1. 초기 기원
사만타(Samanta)는 원래 '이웃'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마우리아 시대의 아르타샤스트라와 아소카 칙령에서는 사만타가 제국의 인접국 통치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굽타 제국의 황제 사무드라굽타가 프라야그라지 ''프라샤스티''(비문)에서 언급한 '국경 영주'( ''pratyan-tanripati'' )는 이러한 원래 의미에 가까웠다.[6]그러나 굽타 제국 후기에 이르러 이 용어는 점차 '봉신'을 의미하게 되었다. 사만타 제도는 고대 인도와 중세 인도를 구분하는 주요 특징 중 하나로 간주된다. 굽타 시대 말기와 6세기에 이르러서는 정복 후 복속된 속국 군주를 가리키는 용어로 널리 받아들여졌다.[6]
중세 인도의 초기 왕국들은 종종 "사만타-차크라", 즉 '복속된 토후들의 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7] 하르샤 황제 시대에는 사만타 제도가 더욱 발전하여 사만타들이 강력한 인물로 여겨졌다.[1] 이들을 왕국의 위계질서에 통합하기 위해 종종 궁정에서 높은 지위가 부여되었다.[8] 예를 들어, 하르샤에게 패배한 후 마하사만타(Maha-samanta)가 된 발라비의 왕은 이후 하르샤 치하에서 마하프라티하라(Mahapratihara, 왕실 문지기장) 및 마하단다나야카(Mahadandanayaka, 왕실 야전 사령관)의 지위까지 올랐다.[8] 사만타 제도는 분열되거나 부족적인, 작고 독립적인 지역의 통치자들을 정복하여 왕이나 황제의 봉신으로 섬기게 했다.
사만타의 지위가 독립적인 이웃에서 조공을 바치는 토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위 궁정 관리로 변화한 것은 국가 형성의 의미론적 변화를 나타냈다.
2. 2. 굽타 제국 이후의 변화
'사만타'라는 용어는 원래 '이웃'을 의미하며, 마우리아 시대에는 아르타샤스트라와 아소카 칙령에서 볼 수 있듯이 제국에 인접한 독립적인 통치자를 지칭했다. 굽타 제국의 황제 사무드라굽타가 그의 프라야그라지 비문에서 언급한 '국경의 영주'(pratyan-tanripati)는 이러한 원래 의미에 가까운 사용례였다.[31][6]그러나 굽타 제국 후기에 이르러 이 용어의 의미는 점차 '봉신'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만타 제도의 등장은 고대 인도와 중세 인도를 구분 짓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여겨진다. 굽타 시대 말기와 6세기에 이르러서는, 정복되었으나 다시 복속된 번속령의 제후나 지배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만타'가 널리 사용되었다.[32][6]
중세 인도의 초기 왕국들은 스스로를 "사만타-차크라", 즉 '복속된 토후들의 원'으로 둘러싸는 경향을 보였다.[33][7] 특히 하르샤 황제 시대에는 사만타 제도가 더욱 발전하여 사만타들이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34][1] 중앙 권력은 이들을 왕국의 위계질서 안으로 통합하기 위해 종종 궁정에서 높은 관직을 부여했다.[35][8] 대표적인 예로, 하르샤 황제에게 패배한 후 마하사만타가 된 발라비의 왕을 들 수 있다. 그는 이후 하르샤 황제 아래에서 왕실 관문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마하프라티하라 직위에 올랐고, 나아가 왕실 야전 사령관 격인 마하단다나야카가 되기도 했다.[35][8] 이처럼 사만타 제도는 분열되어 있거나 부족 단위로 존재하던 소규모 독립 지역의 통치자들을 정복하고, 이들을 왕이나 황제를 주군으로 섬기는 봉신으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사만타의 지위는 독립적인 이웃 통치자에서 시작하여, 조공을 바치는 종속적인 토후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중앙 정부의 고위 관료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었으며, 이는 인도 역사에서 국가 형성 방식의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2. 3. 중세 인도의 사만타 제도
'사만타(Samanta)'는 본래 '이웃'을 뜻하는 단어로, 마우리아 시대의 아르타샤스트라와 아소카 칙령에서도 마우리아 제국에 인접한 국가의 통치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굽타 제국의 황제 사무드라굽타가 그의 프라야그라지 석주 비문(''프라샤스티'')에서 언급한 '국경의 영주'( ''pratyan-tanripati'' ) 역시 이러한 원래 의미에 가까운 용례였다.[31][6]그러나 굽타 제국 후기에 접어들면서 이 용어의 의미는 점차 '봉신'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사만타 제도의 등장은 고대 인도와 중세 인도를 구분 짓는 중요한 변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굽타 시대 말기와 6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만타'가 정복되었으나 다시 복속된 번속령의 제후를 가리키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32][6]
중세 인도의 초기 왕국들은 스스로를 "사만타-차크라", 즉 '복속된 토후들의 원'으로 둘러싸는 경향을 보였다.[33][7] 하르샤 황제 시대에는 사만타 제도가 더욱 발전하여 사만타들이 강력한 세력으로 간주되었다.[34][1] 왕국은 이들을 위계질서 내에 통합하기 위해 종종 궁정에서 높은 지위를 부여했다.[35][8] 대표적인 예로, 하르샤 황제에게 패배한 후 마하사만타(대봉신)가 된 발라비의 왕을 들 수 있다. 그는 이후 하르샤 황제 아래에서 마하프라티하라(왕실 궁문 수호대장)와 마하단다나야카(왕실 야전 사령관)의 지위까지 올랐다.[35][8] 본질적으로 사만타 제도는 분열되어 있거나 부족 단위로 존재하던 소규모 독립 지역의 통치자들을 정복하여 왕이나 황제를 주군으로 섬기는 봉신으로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이처럼 사만타의 지위는 독립적인 이웃 통치자에서 시작하여 조공을 바치는 토후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고위 궁정 관료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었으며, 이는 인도 중세 국가 형성 과정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다.
3. 사만타의 종류
바나바타는 그의 저서 《하르샤차리타》에서 여러 종류의 사만타에 대해 설명한다. 이 책은 다양한 사만타 종류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36][1] 바나바타는 왕실 진영에서 새로운 임무를 기다리는 정복된 제후들, 즉 마하사만타들이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37][9] 바나바타가 언급한 사만타에는 지위나 황제와의 관계 등에 따라 다양한 유형이 존재했다.[38][39][10][11]
3. 1. 일반적인 사만타
바나바타는 그의 저서 《하르샤차리타》에서 여러 종류의 사만타에 대해 설명한다. 바나바타의 《하르샤차리타》는 다양한 종류의 사만타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1] 바나바타는 왕실 진영에 정복당한 다수의 적국 마하사만타가 있었으며, 그들은 아마도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한다.[9]바나바타가 언급한 몇 가지 유형의 사만타는 다음과 같다.
- 사만타: 가장 낮고 일반적인 유형의 봉신을 의미한다.[10]
- 마하사만타: 사만타보다 한 단계 높은 존재이다.[10]
- 샤트루마하사만타: 정복당한 적국의 수장이다.[10]
- 압타사만타: 기꺼이 봉신 지위를 받아들이고 황제를 주군으로 섬기는 자들이다.[10]
- 프라다나마하사만타: 황제의 가장 신뢰받는 측근으로, 황제는 그들의 조언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11][10]
- 프라티사만타: 왕에게 적대적인 봉신을 의미한다.[11][10] 적대적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만타는 군사적 의무를 졌다. 만약 그들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왕은 그들의 영토를 압수하고 새로운 사만타를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만타는 왕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통치를 확립하려 끊임없이 시도했다.
바나바타는 아누락타마하사만타라는 용어를 단 한 번 사용했으며, 이는 주군에게 특별히 헌신하는 자들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있다.[10]
3. 2. 관계에 따른 사만타
바나바타는 그의 저서 《하르샤차리타》에서 여러 종류의 사만타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는 다양한 사만타 유형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36][1] 바나바타는 왕실 진영에서 새로운 임무를 기다리는 정복된 제후들, 즉 마하사만타들이 있었다고 언급한다.[37][9]바나바타가 언급한 사만타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프라티사만타처럼 왕에게 적대적인 봉신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만타는 주군에 대한 군사적 의무를 지녔다. 만약 사만타가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왕은 해당 영토를 몰수하고 새로운 사만타를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만타들은 왕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독립적인 통치를 시도하기도 했다.[11][10]
4. 사만타의 의무
하르샤차리타에 따르면 사만타에게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의무가 있었다.[41]
- 매년 황제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 황제에게 직접 찾아가 경의를 표해야 했다.
- 전쟁에서 패배한 사만타는 자신의 아들이나 가까운 왕족을 인질로 황제에게 보내야 했다. 이 인질들은 제국의 전통에 따라 교육받고 황제에게 충성하도록 길러졌다.
- 황제가 요구할 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야 했다.
- 평화 시기에는 맡은 지역의 행정과 사법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군사 지원, 조공 납부, 행정 및 사법 기능 수행이라는 측면에서 사만타의 역할은 비자야나가라 제국에서 볼 수 있었던 나야카와 비교될 수 있다.[10] 사만타 제도는 북인도와 남인도 전역의 여러 왕국에서 시행되었다.[10]
5. 지역별 사례
사만타 제도는 인도 아대륙의 여러 지역과 네팔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나타났다. 각 지역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사만타의 역할, 지위, 칭호 등은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구체적인 사례는 하위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5. 1. 남인도
남인도에서 사만타가 사용된 몇 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다.- 호이살라 제국에서 사만타는 마하라자에게 봉건적인 경의를 표하며 세습 총독으로 왕을 섬기는 봉건 영주였다. 호이살라의 세습 총독의 예로는 훌리야라(Huliyara)를 다스린 사만타 차타야, 마가레(Magare)를 다스린 사만타 고위데바, 세나바기리(Senavagere)를 다스린 사만타 반케야 등이 있다. 사만타 간다라디트야와 같이 아라키리(Arakere), 칼리군다(Kaligunda), 쿤두루(Kunduru), 벨루기리(Belugere) 등 여러 지역을 합쳐 더 넓은 영토를 다스린 경우도 있었다.[12]
- 찰루키아 제국 시대에는 바나스의 비크라마디트야 발리 인드라 바나라자(발리쿨라 틸라카 바나라자의 아들)가 찰루키아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Taruna Vasantham|타루나 바산탐san과 Samanta Kesari|사만타 케사리san라고 칭하였다.[13]
- 카카티야 왕조에서는 총독의 지위까지 오른 곤카 1세와 베타 1세(서기 1000년 ~ 1050년)의 사례가 있다. 베타 1세는 카르마 또는 캄마 불교 농민 공동체 내의 봉건 가문인 사만타 비슈티 밤사 출신으로, 이후 찰루키아 제국의 봉건 제후가 되었다. 베타 1세의 아들인 프롤라 1세는 찰루키아 왕 소메슈바라 아래에서 Mahamandaleshvara|마하만달레슈바라san가 되었다. 또한 프롤라 1세의 아들인 베타 2세(베타 라주)와 손자 프롤라 2세는 카카티야 왕조에서 왕족의 지위를 차지했다.[14]
- 사만타의 지위는 모계를 통해 상속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서기 1542년의 파두바 파남부루 비문에는 킨니카 사만타의 지위가 그의 알리야(Aliya, 누나의 아들)이자 물키의 자이나교 수장인 두그간나 사만트에게 계승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5] 물키의 토후들은 사만타로서 봉사하며 자이나교를 후원하였다.[16]
5. 2. 북인도
사가쿨라의 사만타 봉신들은 '사히'라고 불렸고, 그들의 군주는 '사하누 사히'(왕 중의 왕)라고 칭해졌다.[47][17] 사가쿨라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자이나교의 성인 칼라카는 그의 저서 "칼라카차르야 카타나카"에서 '사히'라고 불리는 사카 왕들의 무리가 '사가쿨라'에서 인도로 건너왔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인더스강을 건너 카티아와르와 우자이니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자신들의 지도자를 "왕중왕"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48][49][18][19] 학계에서는 이 사가쿨라가 파르티아의 미트라다테스 2세에 의해 시스탄 지역에서 쫓겨난 서사트라프의 사카족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47][17]5. 3. 동인도
카이바르타 사만타 디브야가 이끈 바렌드라 반란은 팔라 왕조에 대항하여 농민들을 동원하고 팔라 왕위를 찬탈했다.[20] 아디수라는 팔라 왕조 시대에 사만타 왕으로서 벵골 북부와 비하르의 일부 지역을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1] 소마밤시 왕조 가문의 사만타 왕(종속 통치자)인 사란가데바 또는 케사리가 오디샤의 사란가르를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2] 바르다만은 카야스타 공동체의 사만타 왕 이치아이 고쉬 또는 이스와니 고쉬가 통치했으며, 그의 후손들이 자민다르로 존속했다.[23]5. 4. 네팔
네팔의 리차비 마하라자 영토에서 사만타는 봉토를 소유하고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다른 네팔 왕국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레그미 박사에 따르면, 네팔의 사만타들은 봉신 지위에 있으면서도 마하라자나 마하라자디라자와 같은 높은 칭호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창구 지역의 사만타였던 암수-바르마는 마하라자디라자 칭호를 사용했다는 비문 기록이 있으며, 이들은 상위 칭호를 채택한 후에도 사만타 칭호를 유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마하사만타 마하라자 스리 카르마릴라가 그러한 예이다.[54][24]
이러한 칭호 사용은 인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는데, 왕과 그의 봉신 모두 마하라자 칭호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미드나포어에 있던 사산카 왕의 봉신 스리 사만타 마하라자 사마닷타는 웃칼라의 단다부크티 지역을 통치했다.[55][24]
사만타 지위는 지배 가문과의 결혼을 통해서도 획득될 수 있었다. 줌라의 차우간 라자스타나코트 출신 발리라자는 셈자 상속녀 메디니바르마의 딸과 결혼하여 해당 지역의 사만타 라자가 되었다. 결혼 후 발리라자는 사실상 왕국 내 모든 봉건 토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이는 서기 1404년의 동판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56][25]
6. 사만타 라주
사만타 라주는 남인도의 왕 또는 군주 아래에서 특정 지역을 다스리던 봉신이나 총독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이들은 군주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영토를 통치했다. 이는 식민지 시대 영국령 인도에서 사용된 칭호와는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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