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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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성사는 단군을 비롯한 세 성인(단군, 환웅, 환인)을 모시던 사당으로, 황해도 구월산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 시대부터 존재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여러 차례 중건과 제사 부활을 거쳤으나, 일제강점기에 대종교의 활동과 관련되어 훼철되었다.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이 이곳에서 순교하기도 했다. 이후 남북한은 삼성사를 성지로 지정하고 복원하기로 합의했으며, 2000년 북한에서 개건되었다. 삼성사는 민족 정체성과 단군 신앙의 상징이자, 남북한의 공동 유산으로 여겨진다.
삼성사는 고려 공민왕 때의 문인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에 처음 언급된다. 이 책에는 단군이 아사달산(지금의 구월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는 기록과 함께, 그곳에 사당이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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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적
제왕운기
2. 역사
조선 시대의 기록에는 삼성사의 위치와 상태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다. 성종 때 황해도관찰사 이예의 보고에 따르면, 삼성사는 원래 구월산 패엽사 서쪽 대증산의 어느 절에 속해 있던 것을 패엽사 아래 작은 봉우리로 옮겼다가 다시 소증산으로 옮겼다. 태종 때 재상 하륜의 건의로 전국의 사당에 있던 목상은 없어지고 위패만 남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삼성사는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조정은 구월산의 단군 제사를 평양으로 옮기거나 제사를 폐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의 요청으로 다시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사당을 중수하거나 단청을 칠하고 제기를 교체하는 등 유지 보수 작업도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종교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삼성사에서 일어났다. 1909년 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하였고, 1916년에는 삼성사에서 단식 수도 중 순교하였다. 이후 삼성사는 일제에 의해 헐렸으나, 1926년 대종교선교회가 재건을 추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1994년 남북한 종교 지도자들은 구월산 삼성사를 포함한 여러 유적지를 성지로 지정하고 복구하기로 합의했다. 2000년에는 북한에서 삼성사를 개건(改建)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2. 1. 고려 시대
고려 공민왕 때의 문인 이승휴는 자신의 저서 《제왕운기》에서 "요와 함께 무진년에 일어나/우·순을 지나 하를 거치도록 왕위에 계시더니/은 무정 8년 을미에/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셨네"라고 단군왕검에 대해 읊었다. 그리고 아사달산에 대해 주석을 달아 "지금의 구월산이다. 궁홀(宮忽) 또는 삼위(三危)라고도 하니, 그 사당이 아직도 있다"[1]고 기록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사당이 바로 삼성사이다.
2. 2. 조선 시대
세종 10년(1428년)에 퇴직한 정승 류관은 문화현 동쪽에 있는 장장이라는 지역이 단군의 도읍이라는 전승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하며, 문화현 노인들로부터 들은 삼성당(三聖堂)에 대한 내용을 보고했다. 삼성당은 북쪽 벽에 단웅천왕, 동쪽 벽에 단인천왕, 서쪽 벽에 단군천왕을 모셨고,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2]
조선 조정은 구월산의 단군 제사를 평양의 숭령전으로 옮기고 삼성사의 제사를 폐지했으나, 1450년에 현령 신효원이 사당 건물을 중창하는 등 사당 자체는 유지되었다.[3] 단종 즉위년(1452년) 황해도에 역병이 돌자, 구월산 삼성사를 평양으로 옮기고 제사를 없앤 탓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경창부윤 이선제가 삼성사를 복구하고 제사를 지낼 것을 요청했다.[4] 세조 4년(1458년)에는 현령 매좌가 사당에 단청을 칠하고 제기를 놋그릇으로 바꾸었다.
성종 3년(1472년) 황해관찰사 이예의 보고에 따라 평양 단군묘의 예에 따라 매년 봄·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자는 예조의 건의를 왕이 받아들여 삼성사의 제사가 다시 이루어지게 되었다.[5] 이때부터 삼성당은 삼성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광해군 때의 문인 허균도 삼성사를 방문해 시를 남겼다. 그러나 삼성사에서 단군뿐 아니라 환웅, 환인까지 함께 제사하는 것은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환인, 환웅은 제거하고 단군만 제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영조실록》에는 영조대에 삼성사 훼철 문제가 거론되었으나, 유생들의 반대와 대신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철회되었다는 기록이 있다.[7] 정조 5년(1781년) 정조는 삼성사를 수리하고 제사 축문을 내려보냈다.[8]
2. 3. 일제 강점기
1909년, 을사오적 암살 미수 혐의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나철은 음력 1월 15일에 대종교를 창시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였다. 대종교는 단군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기원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해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을 정해 단군교 원년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2년 뒤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단군교의 이름을 도용한 친일 세력의 행각으로 인해 원래 명칭으로 환원한다는 의미로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6년 음력 8월 14일, 나철은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 등 여섯 명과 함께 삼성사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나철은 사흘간 단식 수도에 들어갔으나, 이틀 뒤인 16일 새벽 유서를 남기고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9]
나철이 순교한 후, 일제는 민심 동요를 우려하여 삼성사를 파괴하였다. 삼성사가 있던 자리에는 무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1926년 대종교선교회는 삼성사 재건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28년 일제가 무덤이 늘어난 삼성사 터를 가족공동묘지로 불하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기도 했다.[10]
2. 4. 해방 이후
1994년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남한 대종교 총전교 안호상은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조선천도교 중앙지도위원장 류미영과 만나, 10월 3일로 예정된 평양 단군릉 준공 행사에 초청받고, 북측의 백두산 천지와 평양 단군릉, 구월산 삼성사, 평양 숭령전, 그리고 남측의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등 다섯 곳을 성지로 지정해 복구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11]
2000년 10월 27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삼성사가 개건(改建)되었다고 보도했다.[12]
3. 삼성사의 의미와 위상
참조
[2]
서적
세종실록
1428-06-14
[3]
논문
구월산 삼성사 복원 과정을 통해 본 조선 초기 사대부의 신이인식 - 황해도 기이담론 연구의 일환으로 -
https://www.krm.or.k[...]
열상고전연구회
2017
[4]
서적
단종실록
1452-06-28
[5]
서적
성종실록
1472-02-06
[6]
서적
동사강목
[7]
서적
영조실록
1741-09-02
[8]
서적
홍재전서
[9]
서적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총본사
1971
[10]
뉴스
동아일보
1926-06-13
[11]
뉴스
한겨레
1994-03-20
[12]
뉴스
북한 단군제 지낸 구월산 삼성사 개건
http://www.tongilnew[...]
통일뉴스
200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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