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관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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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섭관정치는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초에 걸쳐 후지와라 씨가 천황의 외척으로서 섭정 또는 관백의 지위에 올라 천황을 보좌하며 정치를 주도한 형태를 말한다. 후지와라 씨는 딸을 천황에게 시집보내 외척 관계를 형성하고, 조와의 변, 오텐몬의 변 등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섭정으로,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관백으로 취임하면서 섭관 정치의 기틀을 다졌으며, 후지와라노 타다히라 대에 이르러 섭정과 관백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이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 시대에 섭관 정치는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고산조 천황의 친정, 인세이의 시작과 함께 쇠퇴했다. 섭관 정치는 가마쿠라 막부 시기,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쇠퇴했고, 에도 시대에는 막부의 지원으로 섭관가의 세력이 부흥했지만 막부의 개입으로 섭관 정치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1867년 왕정복고로 섭정과 관백이 폐지되면서 섭관 정치는 종말을 맞았다. 섭관 정치의 배경에는 율령제의 변화, 국정의 안정, 혼인 제도의 변화 등이 있으며, 이는 무가 정치의 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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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섭관정치 | |
|---|---|
| 개요 | |
| 명칭 | 섭관정치 |
| 로마자 표기 | Seopgwanjeongchi |
| 주요 시기 | 헤이안 시대 |
| 정치 형태 | 섭정과 관백을 중심으로 한 정치 체제 |
| 특징 | 후지와라 씨의 권력 독점 |
| 배경 | |
| 시작 |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섭정이 되면서 시작 |
| 요인 | 천황의 외척으로서의 지위 강화, 율령 정치의 약화 |
| 전개 | |
| 권력 기반 | 천황과의 인척 관계, 장원을 통한 경제력 확보 |
| 주요 가문 | 후지와라 북가 |
| 정치적 영향력 | 인사권 장악, 정책 결정 주도 |
| 주요 인물 | |
| 섭정 |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후지와라노 모토쓰네, 후지와라노 다다히라 등 |
| 관백 |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후지와라노 고레미치 등 |
| 쇠퇴 | |
| 원인 | 천황의 친정 강화, 무사 세력의 성장 |
| 결과 | 인세이의 시작, 헤이시 정권의 등장 |
| 영향 | |
| 정치 |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 지방 분권화 심화 |
| 문화 | 귀족 문화의 발달, 국풍 문화의 융성 |
| 사회 | 장원 중심의 사회 구조 심화 |
| 기타 | |
| 관련 사건 | 안나의 변,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
| 관련 용어 | 셋칸가, 미나모토 씨, 다이라 씨 |
2. 전사(前史)
을사의 변에서 공을 세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신의 딸들을 천황에게 시집보내는 전략을 사용했다. 미야코는 몬무 천황에게, 야스쿠히메(고묘 황후)는 쇼무 천황에게 시집을 갔다. 후히토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인 후지와라 사형제는 나가야 왕의 변을 일으켜 황족 중심의 정치를 종식시키고, 야스쿠히메를 황후로 옹립하여 후지와라 가문의 지위를 굳건히 했다. 그러나 사형제가 역병으로 쓰러진 후 후지와라 씨는 다치바나노 모로에와 겐보에게 쇼무 천황의 신임을 빼앗겨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에 이르거나, 고묘 황후 사후 그의 딸인 고켄 상황으로부터의 신임을 도쿄에게 빼앗겨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으로 내몰리는 등 후퇴 국면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후지와라 씨 관료의 다수는 반란 진압 측에 섰기 때문에 반란 후에도 후지와라 씨의 명맥은 유지되었다. 쇼토쿠 천황(고켄의 재즉위)의 붕어 후, 후지와라 씨는 고닌 천황 옹립을 주도하여 그 지위를 보전했다.
2. 1. 후지와라 가문의 초기 권력 장악 과정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딸인 미야코를 몬무 천황에게, 야스쿠히메(고묘 황후)를 쇼무 천황에게 시집보냈다. 후히토 사후 그의 아들들인 후지와라 사형제는 나가야 왕의 변을 통해 황친 정치를 끝내고, 야스쿠히메를 신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황후로 옹립하여 후지와라 가문의 지위를 확립했다.[1]그러나 후지와라 사형제가 역병으로 사망한 후, 후지와라 가문은 다치바나노 모로에와 겐보에게 쇼무 천황의 신임을 빼앗겨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고묘 황후 사후에는 그의 딸인 고켄 상황의 신임을 도쿄에게 빼앗겨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으로 내몰리는 등 권력이 후퇴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지와라 가문 관료들은 대부분 반란 진압 측에 섰기 때문에 반란 후에도 후지와라 가문의 명맥은 유지되었다.[1]
쇼토쿠 천황(고켄 천황의 재즉위) 붕어 후, 후지와라 가문은 고닌 천황 옹립을 주도하여 지위를 보전했다. 간무 천황의 황위 계승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은 후지와라 시가의 후지와라노 모모카와였다. 시가의 후지와라노 다네쓰구·후지와라노 나카나리 부자도 천황의 신임을 얻었지만, 약자의 변으로 나카나리는 처형되었다. 후지와라노 후유쓰구는 810년 약자의 변 때 사가 천황에 의해 구로도노카미에 임명되었고, 변에서 승리한 후 고닌시키 편찬에 참여하는 등 공을 세워 북가 지배의 발판을 마련했다.[1]
3. 섭관 정치의 성립과 발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는 조와의 변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인신 최초의 섭정이 되었다. 그의 양자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는 관백 직을 확립하며 섭관 정치의 기틀을 다졌다. 우다 천황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등용하여 후지와라 가문을 견제하려 했으나, 쇼타이의 변으로 미치자네가 몰락하면서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후지와라노 다다히라는 섭정과 관백을 모두 역임하며 천황의 나이에 따른 섭정과 관백의 역할을 구분하는 관례를 확립했다. 무라카미 천황의 친정 시기에는 섭정과 관백이 공석이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후지와라 북가에 있었다.
3. 1.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의 섭정 취임과 권력 강화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는 842년 조와의 변을 통해 자신의 외손자인 세이와 천황을 즉위시켰다. 866년 오텐몬의 변으로 정적들을 제거한 후에는 인신 최초의 섭정이 되었다. 요시후사는 태정대신에 취임했는데, 당시 태정대신은 태정관의 모든 것을 관할하며 천황의 스승으로 여겨지는 직책이었고, 그 직무는 후에 섭정에 흡수되었다.3. 2.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経)의 관백 취임과 권력 승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사망한 후, 그의 양자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권력을 계승했다. 876년 세이와 천황이 아들 요제이 천황(9세)에게 양위하자, 요제이의 어머니 타카코의 형인 모토쓰네는 섭정이 되었다.[1] 884년 모토쓰네는 요제이 천황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사촌이자 연상인 고코 천황을 즉위시키면서 사실상의 관백이 되었다.[1]고코 천황의 아들 우다 천황 즉위 후, 887년 아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모토쓰네를 관백으로 임명하려는 칙문에 모토쓰네가 불복한 사건이었다.[1] 모친이 한시 여왕인 우다 천황은 후지와라 씨와 혈연관계가 옅었지만, 모토쓰네가 출사를 거부하자 많은 관리가 이에 따라 정무가 정체되었다. 결국 우다 천황은 모토쓰네의 권세를 인정하게 되었다.[1]
3. 3.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의 등용과 몰락
891년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사망하자, 우다 천황은 후지와라노 도키히라가 어리다는 이유로 관백을 두지 않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등용하여 후지와라 가문을 견제하려 했다. 이를 간페이의 치라고 한다.[3] 우다 천황은 다이고 천황에게 양위한 후에도 섭정을 두지 않고, 도키히라와 미치자네를 함께 내람에 임명했다. 그러나 901년 도키히라는 미치자네를 좌천시키고 우다 법황의 개입을 배제했는데, 이를 쇼타이의 변이라고 한다.[3] 단독 내람이 된 도키히라는 엔기노 치를 이끌었지만,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섭정이나 관백에는 취임하지 못했다.[3]3. 4. 후지와라노 다다히라(藤原忠平)의 섭정, 관백 취임과 섭관 정치 확립
후지와라노 다다히라는 930년 다이고 천황이 위독해져 어린 스자쿠 천황에게 양위할 때 섭정이 되었다.[4] 941년 스자쿠 천황이 성인이 되자 섭정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관백으로 임명되었다.[4] 이는 천황이 어릴 때는 섭정, 성인이 된 후에는 관백이 되는 관례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4]3. 5. 무라카미 천황(村上天皇)의 친정과 덴랴쿠의 치(天暦の治)
후지와라노 다다히라 사후, 무라카미 천황의 친정(덴랴쿠의 치)이 행해져 섭정과 관백은 공석이었다.[10] 그러나 다이고 천황의 엔기의 치와 무라카미 천황의 덴랴쿠의 치는 후세에는 섭정이 없고 천황이 친정을 행한 시대로서 이상적으로 여겨졌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섭정・관백은 비상시의 지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임명해야 할 상황이 없으면 공석이 되는 관직이었다.[10] 또한, 섭정・관백이 없더라도 다다히라의 장남 후지와라노 사네요리가 좌대신(잇죠)으로서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지와라 북가 요시후사 류가 국정을 장악하는 구조 자체에는 변화가 없었다.[10] 무라카미 천황이 붕어하자, 병약하고 정무 수행이 어려웠던 레이제이 천황이 즉위하면서 후지와라노 사네요리가 관백에 취임하고, 이어서 태정대신・준섭정에 임명되었다.[10]4. 섭관 정치의 전성기와 쇠퇴
안화의 변으로 미나모토노 타카아키라가 추방되고, 미나모토노 카네아키라가 황족으로 복귀하면서 타 씨족 배척이 완료된 후, 후지와라 북가 내부에서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레이제이, 엔유 양 천황의 외척이었던 후지와라노 모로스케의 아들들인 후지와라노 카네미치, 카네이에 형제가 섭관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곤츄나곤에서 간파쿠(関白) 지위에 오른 카네미치는 나이다이진을 거쳐 간파쿠에 취임했다. 카네미치는 태정대신에 취임하여 미나모토노 카네아키라를 황족으로 복귀시키고 좌대신을 그만두게 했으며, 요리타다를 이치노카미(一上)로 임명했다. 자신의 자제들을 공경으로 승진시키려 했으나, 아들들을 공경에 임명한 직후 병사하여 좌절되었다.
카네미치에게 오랫동안 억눌렸던 카네이에는 이치조 천황의 외조부로서 섭정에 취임했다. 카네이에는 준산궁 대우와 이좌 선지를 받아 전 대신이면서 섭정, 후에 간파쿠로서 백관의 상위에 올랐다. 이후 섭정・간파쿠는 태정대신보다 상위로 여겨졌지만, 진정에는 출석하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칸와의 예」). 카네이에는 아들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에게 간파쿠 지위를 물려준 뒤 사망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995년 내람에 임명되어 권력을 확립했고, 1016년 외손자 고이치조 천황이 즉위하자 섭정에 취임하고 1년 만에 아들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에게 물려주었다.
1068년 고산조 천황이 즉위하면서 후지와라 북가의 외척 독점이 깨지기 시작했다. 고산조 천황은 관백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천황의 위엄과 율령을 부흥시키려는 정책을 펼쳤다. 시라카와 천황은 호리카와 천황에게 양위하고 인세이를 시작했다. 후지와라 모로자네, 후지와라 모로토시가 잠시 섭관을 맡았으나, 모로토시 사후 섭관가 내분으로 시라카와 법황이 개입, 섭정과 관백 임명에 상황의 의향이 반영되는 관례가 생겼다. 토바 천황 즉위 후, 후지와라 킨자네가 섭정직을 요구했으나 시라카와 법황은 후지와라 타다자네를 섭정으로 임명, 섭정과 관백은 외척과 분리되어 가직(家職)화되었다. 황위 계승자와 인사권도 상황(치텐노키미)에게 집중되었고, '임인 접지'라는 비공식 문서를 통해 원(院)에서 인사 지시를 내리는 방식이 되었다.
4. 1.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와 요리미치(藤原頼通) 시대의 섭관 정치 전성기
안나의 변 이후, 후지와라노 가네이에는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이치조 천황의 외조부로서 섭정에 취임했다.[2] 가네이에의 사후,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미치타카가 잠시 간파쿠를 맡았으나, 995년 가네이에의 다섯째 아들인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내람에 임명되어 권력을 확립했다.[3] 미치나가는 1016년 외손자인 고이치조 천황 즉위 후 섭정이 되었고, 곧 아들인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에게 섭정직을 물려주었다.최근 연구에 따르면, 섭관 정치기의 천황은 권력이 약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는 경우가 많았다.[3] 그러나 천황과 관료 사이의 문서 교환에 섭관(내람 포함)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인사 관련 의식에는 섭관이 문서 내용을 확인하는 절차가 포함되어 섭관 없이는 의식이 성립되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정의 인사권을 섭관이 장악하게 되었다.[3]
또한, '국모'의 존재도 중요했는데, 특히 천황의 역할을 대행・보조하는 섭정・간파쿠에 대한 '국모'의 영향력은 컸다. 이치조 천황의 생모인 후지와라노 센시와 고이치조 천황, 고스자쿠 천황의 생모인 후지와라노 쇼시는 '국모'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특히 쇼시는 섭관가에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4]
이 시기 섭관가의 경제 기반은 인사 결정권에 있었고, 섭관으로 지명된 수령이 임지에서 축적한 재산의 일부를 섭관가에 바치는 것으로 충당되었다.[5]
4. 2. 섭관 가문의 권력 기반과 경제적 배경
섭관 가문의 경제 기반은 인사 결정권에 있었다. 수령으로 지명된 이들이 임지에서 축적한 재산의 일부를 섭관 가문에 공납하는 것이 주요 수입원이었다.[5] 이들 수령은 대부분 가사 수령이라 불렸으며, 사위・오위의 관인이었음에도 섭관가의 가신과 같은 입장이었다. 과거에는 섭관가가 정소를 통해 국정을 직접 지배했다는 정소 정치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최근 연구에 따르면, 섭관 정치기의 천황은 권력이 약하지 않았고, 스스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천황과 공경, 관사 간 문서 교환에는 섭관(내람 포함)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서위・제목 등 인사 관련 의식에는 섭관이 문서 내용을 확인하는 절차가 포함되어 있어, 섭관 없이는 의식이 성립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정의 인사권은 섭관이 장악하게 되었고, 이는 섭관의 존재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3]
4. 3. 섭관 정치의 쇠퇴와 인세이(院政)의 시작
고산조 천황의 즉위로 후지와라 북가의 외척 독점이 깨지면서 섭관 정치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068년 고산조 천황은 후지와라 북가를 외조부로 하지 않는 약 170년 만의 천황이었다.[8] 고산조 천황은 관백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천황의 위엄과 율령을 부흥시키려는 정책을 펼쳤다.시라카와 천황에게 황위를 물려준 후, 시라카와 천황은 자신의 아들에게 황위를 잇게 하기 위해 8세의 호리카와 천황을 황태자로 세우고 바로 양위했다. 호리카와 천황의 섭정은 후지와라 모로자네가 맡았고, 성인이 된 후에는 후지와라 모로토시가 관백이 되어 잠시 섭관 정치가 부활하는 듯 했다.
그러나 모로토시가 젊은 나이에 급사하고, 섭관가 내에서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면서 시라카와 법황이 개입하여 해결하였다. 이후 섭정과 관백의 임명에는 상황(법황)의 의향이 반영되는 관례가 생겼다.[9] 게다가 후지와라 타다자네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여, 호리카와 천황은 시라카와 법황에게 정무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9] 이렇게 시라카와 인세이가 시작되었다.
토바 천황이 즉위하면서, 외조부인 후지와라 사네모토의 아들 후지와라 킨자네가 섭정 자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시라카와 법황은 자신의 측근인 미나모토 토시아키의 의견을 받아들여 타다자네를 섭정으로 임명했다.[8] 이로써 섭정과 관백은 외척과 분리되어 가직(家職)화되었다.[10]
황위 계승자와 인사권도 상황(치텐노키미)에게 집중되었고, '임인 접지'라는 비공식 문서를 통해 원(院)에서 인사 지시를 내리면 천황이나 섭정이 따르는 방식이 되었다.[11] 인사권이 원으로 넘어가자, 섭관가는 장원을 늘려 경제 기반을 유지하려 했다.[5]
결과적으로, 고전적인 의미의 섭관 정치는 인세이로 인해 끝나게 되었다. 인세이는 섭관가의 권력을 약화시켰지만, 동시에 '섭관가'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5. 섭관 정치 이후의 변화
1068년 고산조 천황이 즉위하면서 170년 만에 후지와라 씨를 외척으로 두지 않는 천황이 등장했다.[8] 고산조 천황은 원정(院政)을 펼치며 천황의 권위를 회복하려 했으나, 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시라카와 천황은 후지와라 씨와 혈연관계가 있었기에, 섭관 정치가 다시 부활하는 듯했다. 그러나 시라카와 천황은 자신의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기 위해 호리카와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섭정, 관백의 임명에는 상황(법황)의 의향이 반영되는 관례가 생겨났다.[9]
도바 천황이 즉위하면서, 칸인류의 킨자네가 섭정 지위를 요구했지만, 시라카와 상황은 미나모토 토시아키의 건의를 받아들여 후지와라 타다자네를 섭정으로 임명했다.[8] 이로써 관백뿐만 아니라 섭정마저 외척으로부터 분리되어 섭관이 가직화되었다.[10]
이후 황위 계승과 섭관 임명 등 주요 인사는 상황(치텐노키미)이 결정하게 되었고, 원에 대한 권력 집중이 더욱 강화되었다.[11] 섭관가는 장원을 축적하여 세력을 유지하려 했으나,[5] 헤이제이 상황의 변 이후 퇴위한 태상천황은 내리에 들어가지 않는 원칙[12] 때문에, 치텐노키미는 섭관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13]
1272년 고사가 법황 붕어 후 카메야마 천황이 치천이 되었을 때, 원평정 형식을 답습하여 내리에서 의정이 행해졌다. 1290년 고후카쿠사 상황 은퇴 후 후시미 천황 친정 때도 마찬가지였다.[15] 이로써 원이 없어도 천황이 치천으로서 친재하는 관행이 성립되었고, 내람 권한은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남북조 시대에는 쇼헤이 일통 파기 후 북조 재건에 니조 요시모토가 전 관백으로서 정통성 기여를 위해 일했다.
에도 시대에는 에도 막부의 지원으로 섭관가의 세력이 부흥했다. 그러나 막부의 개입으로 섭관가 당주에 의한 "합의제" 의사 결정이 의무화되면서 섭관 정치는 부정되었다. 금중 및 공가 제법도에서 섭관 석차를 친왕보다 상위로 한 것은 섭관가 권위를 높이고 황실 권위를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노에 모토히로처럼 막부의 자문을 받은 섭관가 당주도 있었지만, 이는 고노에가 조정 내 친막부파였기 때문이다. 막부는 황실과 섭관가를 분단시켜 조정 통제에 이용했다.
막말 왕정복고로 섭정, 관백은 폐지되었고, 이후 관백 및 인신 섭정은 설치되지 않았다. 대일본제국 헌법 및 구 황실전범에서 황족 섭정 제도가 다시 정해졌고, 일본국 헌법 및 황실전범에서도 상징 천황의 국사 행위 대행자로서 섭정 규정이 있다.
5. 1.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와 섭관 가문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 이후 섭관 가문의 영향력은 약화되었으나, 겐큐의 정변 이후 일시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조큐의 난 이후, 섭관의 인사권은 막부에게 빼앗겼다.[14] 이후 섭관의 교체는 더 이상 정치적 사건으로서의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5. 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관백 취임
근세에 들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스스로 관백에 취임한 것은 섭관 정치의 부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섭관을 정2품에 대신하는 무가(武家)의 영수로 위치시키려 했던 것으로, 종래의 섭관 정치 부활과는 궤를 달리한다.6. 섭관 정치의 배경과 의의
1068년, 미도류를 어머니로 하는 남자 황족이 끊어진 상황에서 고레이제이 천황이 붕어하자 고산조 천황이 즉위했다. 고산조 천황은 후지와라 북가의 조부를 갖지 않은 약 170년 만의 천황이었다.[8] 후지와라 요시노부(요리미치의 이복 동생)의 양녀 시게코를 뇨고로 삼는 정도 외에는 미도류와의 연결 고리가 없었지만, 관백에는 요리미치의 동복 동생인 노리미치가 취임하여 외척과 관백의 지위가 분립하게 되었다. 고산조는 관백의 헌언을 별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질적인 친정을 행하며, 천황의 위신과 율령의 부흥을 의도하는 정책을 잇달아 내놓았다.
황위는 시게코 소생의 시라카와 천황에게 양위되었다. 시라카와 천황은 자신의 아들 요시히토 친왕(호리카와 천황)을 황태자로 세워 즉위시키고, 섭정 후지와라 모로자네(요리미치의 아들)에게 정치 실권을 맡겼다. 호리카와 천황 성인 후에는 후지와라 모로토시 (모로자네의 아들)가 관백이 되어 한동안 섭관 정치가 부활했다.
그러나 모로토시가 급서하고 섭관가에서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자, 시라카와 법황이 개입하여 섭정·관백 임명에 상황의 의향이 반영되는 관례가 생겼다. 후지와라 타다자네는 정치 경험이 부족하여[9] 호리카와 천황을 보좌하기 어려웠고, 천황은 시라카와 법황에게 정무 보좌를 부탁해야 했다. 이로써 시라카와 인세이가 시작되었다.
도바 천황 즉위 후, 시라카와는 미나모토 토시아키의 헌언을 받아들여 타다자네를 섭정으로 지명,[8] 섭관이 가직화되었다. 황위 계승자 결정과 인사 지명도 상황(치텐노키미)이 행하게 되어 권력 집중이 관례화되었다. 인사권이 원으로 옮겨가자 섭관가는 장원을 축적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인세이로 인해 귀족의 가격이 고정되고, 후지와라 북가 요리미치류만이 섭정·관백직을 세습하게 되었다. 섭관 정치를 종언으로 이끈 인세이가 '섭관가'라는 개념을 낳은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6. 1. 율령제의 변화와 섭관 정치
율령제 하에서 천황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이 섭관 가문에게 위임되면서, 섭관 정치가 확립되었다.
9세기 후기부터 10세기 초기에 걸쳐 당나라가 쇠퇴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나, 기존의 도해제를 유지함으로써 혼란의 파급을 억제할 수 있었다. 오우에서도 에조 정벌이 거의 완료되는 등, 국방·외교의 현안이 없어지고 국정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16] 그 때문에 적극적인 정책 전개보다는 행사나 의식의 선례대로의 수행이나 인사 결정이 정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국정 안정에 따라 정치 운영이 정형화되면서, 천황의 대권을 신하에게 위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속에서 후지와라 북가가 대권 위임을 받아 특권을 독점하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섭관가가 요직을 차지했기 때문에, 다른 귀족은 기술을 익혀 살아남기를 도모했다.
당시 귀족 사회의 혼인과 자녀 양육 제도도 섭관 정치 확립의 원인이 되었다. 고대 일본의 혼인은 "처가에 장가드는 혼인"으로, 부부는 동거하지 않고 아내의 거처에 남편이 찾아가는 형태였다. 태어난 아이는 아내의 집에서 양육되었고, 후지와라 씨를 어머니로 둔 황자는 후지와라 씨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이렇게 자란 천황은 후지와라 씨의 의향에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는 태어난 아이를 남편의 집에서 양육하게 되었다.
6. 2. 귀족 사회의 변화와 혼인 제도
고대 일본의 혼인은 "처가에 장가드는 혼인"으로, 부부는 동거하지 않고 아내의 거처에 남편이 찾아가는 형태였다. 태어난 아이는 아내의 집에서 양육되었고, 당연히 후지와라 씨를 어머니로 둔 황자도 후지와라 씨의 집에서 양육되었으며, 이렇게 자란 천황은 후지와라 씨의 의향에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제도가 변화하여, 태어난 아이를 남편의 집에서 양육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렇게 자란 천황은 후지와라 씨의 의향에 따르지 않게 되었다.[16]
6. 3. 무가 정치(武家政治)의 등장과의 관계
9세기 후기부터 10세기 초, 당나라가 쇠퇴하여 혼란스러워지자, 일본은 기존의 도해제를 유지하여 혼란의 파급을 억제하였다. 오우에서도 에조 정벌이 거의 완료되는 등 국방·외교 현안이 없어지고 국정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16] 이러한 국정 안정을 배경으로 권력 분산화가 두드러져, 지방관의 사령을 받은 자로부터 현지의 유력자에게 그 지방의 통치권이 위임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는 가마쿠라 막부·무가 정치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6. 4. 상황(上皇)의 역할과 섭관 정치
상황은 율령 정치 초기부터 '황실의 가부장'으로서 후견 역할을 담당해 왔다. 섭관 정치에서는 그것이 부계에서 모계로 옮겨지고, 인세이에서 다시 부계로 옮겨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후지와라 요시후사의 권력 장악은 가부장적 권력을 가진 사가 상황의 붕어에서 시작되었고, 우다 법황이 가부장으로서 배후에 있었던 다이고 천황의 시대에 잠시 섭관 정치가 정체되었으며, 오랫동안 끊겼던 가부장적인 상황의 부활인 시라카와 상황이 섭관 정치에 대신하는 인세이를 시작한 것은 우연으로 결코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16]
참조
[1]
서적
平安貴族サバイバル
笠間書院
2022-06-08
[2]
문서
藤原高藤는 危篤となった天皇の外祖父である大納言に対する礼遇であるため、実質は[[奈良時代]]末期の[[藤原魚名]]以来119年ぶりである。
[3]
서적
天皇と除目
同成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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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院政の確立と摂関家-上東門院と白河院の連続性に注目して-
校倉書院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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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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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藤原道長の三条家-家の伝領と居住者をめぐって-
奈良・平安文化史研究会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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摂関家の娘たち-藤原道長の娘・尊子-
奈良・平安文化史研究会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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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川
[9]
문서
頼通も就任時は若年の摂政であったが、実際には父親の道長が10年近く後見しているため状況が異なる。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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樋口
[1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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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陣定の成立
塙書房
2014
[17]
문서
神皇正統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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