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저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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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저십리는 조선 시대 한성부에 속했던 지역으로, 한양 도성 밖 10리에 해당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경계에 큰 변화가 없었으며,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원과 대현, 서쪽으로는 양화도, 남쪽으로는 노량진, 북쪽으로는 덕수원을 경계로 삼았다. 초기에는 삼림 자원 공급과 조세 수납, 외교 및 군사 시설 등의 기능을 담당했으며, 15세기 후반부터는 한성 도성의 교외 지역으로 개발되어 인구가 증가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산업화 정책의 영향을 받았으나,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의 관할 지역이 축소되었다. 성저십리 지역은 오늘날 서울의 용산구, 서대문구 연희동 등 여러 지명의 유래가 되었으며, 특히 서교 지역은 교통의 요지이자 외교 및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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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저십리 | |
---|---|
개요 | |
이름 | 성저십리 (城底十里) |
로마자 표기 | Seongjeosimni |
위치 | 서울, 대한민국 |
유형 | 도시 주변 지역 |
행정 구역 | (한성부) |
시대 | 조선 |
건립 | 1394년 |
상세 정보 | |
설명 | 조선시대 한성부의 주변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한성의 방어와 치안 유지를 위해 설정되었다. 한성부의 5부(오부)에 속해 있었다.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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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성저십리는 처음부터 조선의 새로운 수도 한성부에 속해 있었다. 성저십리 지역을 관할하는 내부 경계는 몇 차례 변경되었지만, 그 외부 경계는 조선 초기 세종대왕 치세부터 조선 후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성저십리의 경계는 동쪽으로 양주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 서쪽으로는 양화도(楊花渡), 남쪽으로는 한강의 노도(露度), 북쪽으로는 고양 덕수원(德水院)을 기준으로 정해졌다.[6]
동국여지비고 및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종합하면, 동쪽의 송계원과 대현은 현재의 서울 중랑구 묵동 일대와 성동구 금호동 1가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의미하고, 북쪽의 고양 덕수원은 오늘날의 덕수천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양화나루(양화진) 지명의 유래가 된 양화도의 정확한 위치는 알기 어렵다. 남쪽의 노도는 오늘날 노량진 지명의 유래가 된 노량으로 추정되는데, 조선 초기에는 한강 이북만을 의미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부근 유역 전체를 일컫는 표현으로 쓰였다.[7]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자율성을 잃었지만, 그 이전 짧은 기간 동안 대한제국 정부는 여러 자생적 산업화 정책을 펼쳤고, 일부는 성저십리 지역에도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서대문 밖의 서교(西郊) 지역에는 물류 개선을 위한 도로 정비 등이 이루어졌다.[9] 그러나 을사조약 이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탄하면서,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의 관심은 서울 내 일본인들의 이익을 지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편된 직후, 경성부의 관할 지역은 주로 성 안쪽 지역과 용산으로 한정되었고, 성저십리 지역은 극히 일부만 경성부에 포함되었다. 결국 1936년 경성부는 경계를 대규모로 확장했고, 이때 옛 성저십리 지역 대부분이 경성부에 포함되어 해방 후 서울의 경계로 이어지게 된다.[10]
2. 1. 조선시대
성저십리는 조선의 새로운 수도 한성부의 일부로 시작되었다. 성저십리의 내부 경계는 몇 차례 변경되었지만, 외부 경계는 조선 초기 세종대왕의 치세부터 조선 후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성저십리의 경계는 동쪽으로 양주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 서쪽으로는 양화도(楊花渡), 남쪽으로는 한강의 노도(露度), 북쪽으로는 고양 덕수원(德水院)을 기준으로 정해졌다.[6]동국여지비고 및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종합하면, 동쪽의 송계원과 대현은 현재의 서울 중랑구 묵동 일대와 성동구 금호동 1가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의미하고, 북쪽의 고양 덕수원은 오늘날의 덕수천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양화나루(양화진) 지명의 유래가 된 양화도의 정확한 위치는 알기 어렵다. 남쪽의 노도는 오늘날 노량진 지명의 유래가 된 노량으로 추정되는데, 조선 초기에는 한강 이북만을 의미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부근 유역 전체를 일컫는 표현으로 쓰였다.[7]
조선 초기 성저십리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정부에 삼림자원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성저십리 내에서는 새로운 취락 건설과 벌채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성저십리는 삼림자원 공급 외에도 곡식 창고, 외교 시설, 군사 시설 등이 건설되어 조선 정부의 다양한 기능을 보조했다. 한편, 조선 초기 정부는 성저십리의 지방행정에 엄격하지 못해, 성저민(城底民)들은 한성부에는 성내(城內) 거주민과 같은 부담을 지면서도 인접한 고양군 등의 요역에 징발되는 이중 부담을 지기도 했다.[6]
15세기 후반, 서울 도심에 해당하는 성내(城內) 지역의 인구밀도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조선 정부는 성저십리를 신도시와 같은 거주지역으로 재개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세종 시대에 성저십리의 세대수는 1,779호, 성내 지역은 17,015호였으나, 정조 시대에는 성저십리가 21,835호로 크게 성장한 반면 성내 지역은 22,094호로 완만한 성장에 그쳤다.[8] 이러한 성장에 따라 조선 정부는 1751년 및 1788년에 성저십리가 한성부 오부에 속하여 한성부에 대해서만 부담을 진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였다.[6]
2. 2.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자율성을 잃었지만, 그 이전 짧은 기간 동안 대한제국 정부는 여러 자생적 산업화 정책을 펼쳤고, 이 정책의 일부는 성저십리 지역에도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서대문 밖의 서교(西郊) 지역에는 물류 개선을 위한 도로 정비 등이 이루어졌다.[9] 그러나 을사조약 이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탄하면서,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의 관심은 서울 내 일본인들의 이익을 지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당시 서울 내 일본인들은 주로 도성 안 청계천 남쪽, 오늘날의 남산 북측에 해당하는 '남촌'(南村)과 용산 지역에 모여 살고 있었다. 이러한 인구 분포의 차별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완화되었지만, 남촌과 용산 지역에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므로 이 지역을 보호해야 한다는 경성부의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9]한성부가 경성부로 개편된 직후, 경성부의 관할 지역은 주로 성 안쪽 지역과 용산으로 한정되었고, 성저십리 지역은 극히 일부만 경성부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경성의 경계 축소는 실제 지방 행정 수요와 맞지 않아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결국 1936년 경성부는 경계를 대규모로 확장했고, 이때 옛 성저십리 지역 대부분이 경성부에 포함되어 해방 후 서울의 경계로 이어지게 된다.[10]
3. 주요 지역과 유산
성저십리에는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여러 주요 지역과 유산이 있다.
성저십리의 경계는 동쪽으로는 중랑구 묵동 일대의 송계원(松溪院)과 성동구 금호동 1가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대현(大峴), 서쪽으로는 양화도(楊花渡), 남쪽으로는 노량진 지명의 유래가 된 노량, 북쪽으로는 덕수천 근방의 고양 덕수원(德水院)이었다.[6]
오늘날 서울의 지명 중 상당수는 성저십리에서 유래되었는데, 용산구와 서대문구의 연희동이 그 예이다. 용산구는 성저십리 내 '용산방'에서, 연희동은 '연희방'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성저십리 내 반송방 서교(西郊) 지역은 오늘날의 서대문구 현저동, 천연동과 종로구 교남동, 무악동 지역에 해당하며, 여러 흔적들이 남아있다. 반송방(盤松坊)은 개성, 평양과 통하는 교통의 길목이자 중국으로 가는 출발점이었기 때문에 인가가 조밀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11] 이곳은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한 모화관(慕華館) 및 영은문 등의 외교시설이 있던 조선의 국제적 외교공간이었으며, 무역 등 상업 기능도 활성화되었다. 경기감영 역시 조선 중기에 서교 지역으로 옮겨오면서 거주민이 더욱 늘어났다.[8]
4. 한국 근현대사와의 관계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으로 자율성을 잃기 전까지 여러 자생적 산업화 정책을 펼쳤는데, 이러한 정책의 일부는 성저십리 지역에도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서대문 밖의 서교(西郊) 지역에는 물류 개선을 위한 도로 정비 등이 이루어졌다.[9] 그러나 을사조약을 지나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탄한 뒤에 조선총독부 및 경성부의 관심은 서울 내 일본인들의 이익을 지키는 편으로 기울어졌다. 당시에 서울 내 일본인들은 주로 도성 내 청계천의 남쪽이자 오늘날의 남산 북측에 해당하는 '남촌'(南村) 및 오늘날의 용산에 주로 모여 살고 있었다. 비록 이러한 인구 분포의 차별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완화되었지만, 일종의 심상지리로서 남촌 및 용산 지역에 일본인이 주로 살고 있으므로 이 지역을 보호해야 한다는 경성부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9]
이에 따라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편된 직후에 경성부의 관할 지역은 주로 성내 지역 및 용산으로 국한되었으며, 이 시기에 성저십리 지역은 극히 일부만이 경성부 관할 지역으로 남았는데, 이러한 경성의 경계 축소는 실제의 지방 행정 수요와는 일치하지 않는 변화였으므로 심각한 진통을 유발했다. 결국 1936년에 이르러 경성부는 경계를 대규모로 확장하게 되었으며, 이때에 옛 성저십리 지역의 대부분이 경성부에 포함되어 해방 후 서울의 경계로 이르게 된다.[10]
5. 현대 서울에 미친 영향
성저십리의 오랜 역사는 오늘날 서울의 많은 지명이 이곳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현대에도 깊은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성저십리 내 '용산방'에서 이름이 유래한 용산구와 '연희방'에서 이름이 유래한 서대문구의 연희동이 있다.[10]
조선 시대 후기 성저십리 중 가장 번성했던 지역은 오늘날 종로구의 교남동, 무악동과 서대문구의 천연동, 현저동에 해당하는 '서교'(西郊)였다. 서교는 중국과 한국의 수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국제 관계를 위한 장소로 주로 사용되었다.[8] 이 지역의 중심에는 '모화관'(慕華館)이라는 유명한 건물과 그 상징적인 문인 영은문이 있었다. 이곳은 주로 중국 외교관을 위한 국빈관이었지만, 다양한 중요 국가 의식의 행사장이기도 했다. 또 다른 중요한 시설로는 경기감영(京畿監營)이 있었는데, 이곳은 경기도의 지방 통치와 수도 한성 방어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이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이후 '서교' 지역의 국제적, 상업적 발전을 촉진했다.[8]
참조
[1]
서적
조선시대 다스림으로 본 성저십리 (서울역사중점연구 5)
https://lib.seoul.go[...]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2019-06-03
[2]
논문
Axes of urban growth: urbanization and railway stations in Seoul, 1900–1945
https://www.tandfonl[...]
2013-11-04
[3]
논문
View from the map of Hansungwonmangdo to description of landscape and change in westside of Seoul in the end of the 19th century
https://www.kci.go.k[...]
2024-02-20
[4]
서적
서울2천년사 제26권 경성부 도시행정과 사회
https://lib.seoul.go[...]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2015-12-20
[5]
논문
The Expansion of Administrative Districts in Gyeongseong and the Perception of the Suburbs - An Analysis of the a featured articles on the suburban areas in the newspaper, 1920~1930s -
https://scholarworks[...]
2024-02-25
[6]
서적
조선시대 다스림으로 본 성저십리 (서울역사중점연구 5)
https://lib.seoul.go[...]
서울역사편찬원
2019-06-03
[7]
저널
전통시기 露梁의 장소성과 용산의 성장
https://www.kci.go.k[...]
2024-02-26
[8]
저널
「漢城遠望圖」에 묘사된 19세기 후반 한양 도성 西郊의 풍경
https://www.kci.go.k[...]
2024-02-20
[9]
서적
서울2천년사 제26권 경성부 도시행정과 사회
https://lib.seoul.go[...]
서울역사편찬원
2015-12-20
[10]
저널
경성부 확장과 교외(郊外)인식 - 1920~30년대 신문의 교외탐방기사를 중심으로 -
https://scholarworks[...]
2024-02-25
[11]
서적
한양: 그곳에서 살고 싶다
https://lib.seoul.go[...]
199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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