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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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가야는 고대 가야 연맹에 속했던 고사포국(古史浦國)을 고려 태조가 부른 명칭이다. 삼한 시대 변한 12국 중 하나였던 고사포국은 가야 연맹에 속해 있다가, 209년 구야국과 안라국을 공격하며 가야 연맹에서 이탈했지만 신라의 지원을 받은 가야에게 패배했다. 이후 대가야에 편입되었다가 남가야에 소속되었고, 신라에 복속되어 멸망했다. 신라 시대에는 고자군으로, 고려 시대에는 고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성 지역을 중심으로 수산업과 농업이 발달했으며, 제철 기술도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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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한 - 대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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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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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현지 이름 | 고자국 (古資國) |
다른 표기 | 고자국(古資國) |
존속 기간 시작 | 42년 |
존속 기간 끝 | 562년 |
수도 | 고성 |
공용어 | 가야어 |
민족 | 한인 |
종교 | 불교, 샤머니즘 |
정부 형태 | 군주제 |
국성 | 고성 김씨 |
정치 | |
지도자 칭호 | 국왕 |
지도자 이름 | 말로왕(초대) |
역사 | |
사건 | 건국 (42년) 멸망 (562년) |
기타 |
2. 명칭
애초에 소가야와 함께 6가야의 각국 명칭인 "某가야"라는 명칭은 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에 가야 부흥 세력을 이끌던 호족들의 지역에 고려 태조가 OO가야라는 명칭을 부여하면서 옛 가야 시대의 이름인 양 와전된 것으로, 실제 가야 제국과는 전혀 무관한 이름들이다.[1] 실제로 가야 연맹은 6개국이 아니라 10~13개 이상의 나라들의 집합체였다.[1] 고성군 일대에 있던 나라의 이름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사포국'''(古史浦國) 혹은 '''고자국'''(古自國)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한조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으로 되어 있다. 일본서기에는 고(구)차국(古(久)嵯國)이라고도 한다.
3. 역사
단군조선이 위만에 패망하자 조선 유이민이 한반도 지역으로 대거 유입되어 기준(奇準)왕의 목지국을 중심으로 삼한 소국을 형성했고, 그 중 고사포국이 있었다. 고사포국은 변한 12국 중 하나였다. 백제가 마한을 강제 합병하여 진국이 멸망한 후 변한이 구야국을 중심으로 독립하여 가야연맹을 결성하자 고사포국도 이에 속했다. 고사포국은 지금의 고성읍을 중심으로 때때로 사천, 남해 등지로 세력을 확장하기도 했다. 반면에 고성군 내륙 지역은 고사포국의 영역에서 제외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고사포국을 포함한 가야 남부의 8개 나라, 소위 포상팔국(浦上八國)은 남해안에 있음에도 해상 무역에서 구야국에 주도권을 넘긴 채 주도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 구야국이 있는 김해 지역은 당대에 고 김해만이라는 천연 항구를 기반으로 남해 무역의 허브로 기능하고 있었고, 포상팔국은 가야 외의 지역(가령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역을 구야국에 의존해야 했다.[2] 이에 불만을 품은 포상팔국은 골포국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구야국에 대항해 가야 연맹에서 이탈했고, 209년에 구야국과 안라국을 공격하여 가야 연맹과 전쟁을 벌였지만 신라의 지원을 받은 가야의 반격으로 1차 전쟁은 패퇴했다. 215년 고사포국은 칠포국 및 골포국과 함께 신라의 주요 항구인 갈벌(竭火)[3]을 침공했지만 신라군의 방어에 패퇴하고 물러나야 했고, 결국 포상8국은 굴복하여 다시 가야 연맹에 부속될 수 밖에 없었다.
400년 구야국이 고구려에 패망하여 전기가야연맹이 소멸하자 고사포국은 뚜렷한 세력권을 형성하지 못한 채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에 편입되었다. 대가야가 백제 및 신라와의 항쟁에서 패퇴하여 남북으로 분열되자 안라국 중심의 남가야(南加倻)에 소속되었고, 남가야가 신라에 투항함과 동시에 고사포국도 신라에 주권을 뺏기고 멸망했다. 고사포국 왕족의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3. 1. 삼한 시대 (기원전 2세기 ~ 기원후 4세기)
단군조선이 위만에 패망하자 조선의 유이민이 한반도 지역으로 대거 유입되어 기준(奇準)왕의 목지국을 중심으로 삼한 소국을 형성했고, 그 중에 고사포국이 있었다. 고사포국은 변한 12국 중 하나였다. 서기 9년에 백제가 마한을 강제 합병하여 진국이 멸망한 후 변한이 구야국을 중심으로 독립하여 가야연맹을 결성하자 고사포국도 이에 속했다. 고사포국은 지금의 고성읍을 중심으로 때때로 사천, 남해 등지로 세력을 확장하기도 했다. 반면에 고성군 내륙 지역은 고사포국의 영역에서 제외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고사포국을 포함한 가야 남부의 8개 나라, 소위 포상팔국(浦上八國)은 남해안에 있음에도 해상 무역에서 구야국에 주도권을 넘긴 채 주도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 구야국이 있는 김해 지역은 당대에 고 김해만이라는 천연 항구를 기반으로 남해 무역의 허브로 기능하고 있었고, 포상팔국은 가야 외의 지역(가령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역을 구야국에 의존해야 했다.[2] 이에 불만을 품은 포상팔국은 골포국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구야국에 대항해 가야 연맹에서 이탈했고, 곧이어 209년에 구야국과 안라국을 공격하여 가야 연맹과 전쟁을 벌였지만 신라의 지원을 받은 가야의 반격으로 1차 전쟁은 패퇴했다. 215년 고사포국은 칠포국 및 골포국과 함께 신라의 주요 항구인 갈벌(竭火)[3]을 침공했지만 신라군의 방어에 패퇴하고 물러나야 했고, 결국 포상8국은 굴복하여 다시 가야 연맹에 부속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400년에 구야국이 고구려에 패망하여 전기가야연맹이 소멸하자 고사포국은 뚜렷한 세력권을 형성하지 못한 채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에 편입되었다. 대가야가 백제 및 신라와의 항쟁에서 패퇴하여 남북으로 분열되자 안라국 중심의 남가야(南加倻)에 소속되었고, 남가야가 신라에 투항함과 동시에 고사포국도 신라에 주권을 뺏기고 멸망했다. 고사포국 왕족의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3. 2. 가야 연맹 시대 (4세기 ~ 6세기)
400년, 구야국(금관가야)이 고구려에 패망하여 전기 가야 연맹이 소멸하자, 반파국(대가야) 중심의 후기 가야 연맹에 편입되었다. 대가야가 백제 및 신라와의 항쟁에서 패퇴하여 남북으로 분열되자, 안라국 중심의 남가야(南加倻)에 소속되었다. 남가야가 신라에 투항하면서 고사포국도 신라에 병합되어 멸망했다. 고사포국 왕족의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2]
3. 3. 신라 시대 (6세기 ~ 9세기)
562년 가야연맹이 신라에 완전히 흡수되자 고사포국도 신라에 합병되어 '''고자군'''(古自郡)이 되었다.[1] 757년 경덕왕 16년에 행정제도 개편으로 강주(康州)에 소속된 고성군(固城郡)이 되었고 상선현, 사수현, 문화량현의 3개 현을 영현으로 삼았다.[2]
3. 4. 고려 및 조선 시대 (10세기 ~ )
태조 23년(936년) 5가야의 이름을 고치면서 역사 속의 고사포국도 이때부터 소가야로 불리게 되었다.[1] 995년 성종 14년에 고주(固州)로 승격되어 자사주가 되었다.[1] 1018년 현종 9년에 고성현으로 격하되었고 거제에 합병되었다가 현으로 다시 독립한 후, 1266년 원종 7년에 고주로 재승격되었다.[1] 1391년 공양왕 3년에 최종적으로 고성현으로 격하되어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1]
4. 경제와 문화
고성군 일대는 해안 지대에 위치하여 수산업이 발달했고, 농업과 수렵도 이루어졌다. 고 김해만이 바다였던 것처럼, 당시 해수면이 지금보다 높아 수산업이 주를 이루었다. 동외동 유적에서 제철 기술이 발달했음이 확인되었으나, 철광을 직접 운영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성 지역의 가야 시대 유적은 동외동 패총을 비롯해 7~8개 지역이 확인되었는데, 대개 주요 계곡과 하천변에 분포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는 다른 지역에 비해 종류의 분화가 덜 되어 있었다.
마을은 구획 정리가 대체적으로 잘 되어 있었다. 주거는 아직 수혈식이 주종이지만 원시적인 온돌도 확인되었다. 장례 의식은 연당리와 율대리에서 호석 주변에 토기를 깨부숴서 깔아놓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인근 지역에서도 흔히 보이는 것이다. 사물국의 영역이지만 한때 고사포국에도 속했던 듯해 고성 문화권으로 간주되는 인근 늑도 지역에서는 개를 죽여 껴묻거나 시체 위에 육류를 얹어 놓는 풍습도 확인되었다. 이는 옥저에서 목곽에 쌀을 넣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는 풍습과 비교된다. 중국 은나라처럼 동물의 뼈를 태워 점을 친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대 사회에서 널리 이루어진 일이고 변한 시대부터 이어진 문신(文身) 풍습도 계속되고 있었다.
5. 역대 국왕
고성 김씨 대동보한국어에 언급되고 있는 소가야 역대 국왕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대수 | 제호 | 재위 기간 | 비고 |
---|---|---|---|
1 | 말로왕 | 42년 ~ 145년 | 소가야 건국 시조 |
2 | 대아왕 | 145년 ~ 162년 | |
3 | 미추왕(味雛王) | 162년 ~ 235년 | |
4 | 소가왕 | 235년 ~ 277년 | |
5 | 아도왕 | 277년 ~ 345년 | |
6 | 질노왕 | 345년 ~ 371년 | |
7 | 차아왕 | 371년 ~ 412년 | |
8 | 달나왕 | 412년 ~ 450년 | |
9 | 이형왕 | 450년 ~ 554년 | 소가야의 마지막 왕 |
참조
[1]
서적
한국사 7 (삼국의 정치와 사회3 신라.가야)
1970
[2]
문서
[3]
문서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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