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다굽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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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칸다굽타는 굽타 제국의 황제 쿠마라굽타 1세의 아들로, 굽타 시대 136년(455-456년경)에 왕위에 올라 훈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왕위 계승 분쟁을 겪었다. 그의 어머니의 신분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즉위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스칸다굽타는 쥬나가드 암석 비문과 비타리 기둥 비문을 통해 업적을 알 수 있으며, 서부 인도 지역 통치와 수다르샤나 호수 복구에도 기여했다. 그는 굽타 제국을 위해 금화를 발행했으며, 힌디어 문학 작품과 영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스칸다굽타의 뒤는 이복형제 푸루굽타가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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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다굽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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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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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 굽타 |
종교 | 힌두교 |
통치 | |
칭호 | 비크라마디티야 크라마디티야 |
재위 기간 | 기원후 |
전임자 | 쿠마라굽타 1세 |
후임자 | 푸루굽타 |
가족 | |
아버지 | 쿠마라굽타 1세 |
생애 | |
사망 | 467년 |
2. 초기 생애
스칸다굽타는 굽타 제국의 황제 쿠마라굽타 1세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쿠마라굽타의 후궁이나 첩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어머니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이는 스칸다굽타의 비문에 아버지의 이름만 언급되고 어머니의 이름이 명확히 나오지 않는 점 등에서 비롯된 논란이다.
2. 1. 어머니에 대한 논란
스칸다굽타는 굽타 제국의 황제 쿠마라굽타 1세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쿠마라굽타의 후궁이나 첩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데, 이는 스칸다굽타의 비문에는 아버지의 이름만 언급될 뿐 어머니의 이름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칸다굽타의 비타리 석주 비문에는 그의 조상인 찬드라굽타 1세, 사무드라굽타, 찬드라굽타 2세의 주요 왕비(마하데비) 이름이 열거되어 있지만, 정작 아버지 쿠마라굽타의 주요 왕비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학자 J. F. 플리트는 비타리 비문의 한 구절을 "음유시인의 찬사에 의해 아리아인 지위를 얻었다"라고 해석했다. 이를 근거로 A. L. 바샴은 스칸다굽타의 어머니가 낮은 카스트인 수드라 출신이었을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다샤라타 샤르마와 같은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이론을 비판한다. 그들은 비타리 비문이 오히려 스칸다굽타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매우 고귀한 존재였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한다. 비문에는 스칸다굽타가 적들을 물리쳐 가문의 몰락한 운명을 회복한 뒤, 마치 전설 속 영웅 크리슈나가 그의 어머니 데바키를 찾아갔던 것처럼 자신의 어머니를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간나트 아그라왈은 비문 작성자가 의도적으로 관례를 벗어나 왕의 어머니에 대해 한 줄을 할애했으며, 이는 어머니의 지위가 낮아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그라왈은 플리트의 "아리아인 지위"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며, 해당 구절을 "고귀함이 그의 행적에 대한 노래와 찬사를 통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는 의미로 다르게 해석했다. 이 구절은 칼리다사의 작품 ''라구밤샤''의 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아그라왈은 비타리 비문이 왕을 찬양하기 위한 프라샤스티(찬양 비문)이므로, 작성자가 왕의 어머니의 낮은 신분에 대해 경멸적인 암시를 했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자펜 오베로이는 스칸다굽타의 어머니가 (주요 왕비가 아니더라도) 왕비였으며, 이는 스칸다굽타가 쿠마라굽타 1세의 적자임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일부 학자들은 비문에 근거하여 스칸다굽타 어머니의 이름이 '데바키'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가 R. C. 마줌다르는 이 비유가 어머니의 실제 이름보다는, 스칸다굽타가 크리슈나가 데바키에게 했던 것처럼 어머니를 명성과 권력의 자리로 회복시키기 전까지 그녀가 처했던 어려운 상황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3. 즉위 과정
스칸다굽타는 굽타 시대 136년(서기 455년경-456년)에 왕위에 올랐다. 스칸다굽타의 비타리 기둥 비문에 따르면, 그는 "몰락한 가문의 운명"을 회복하기 위해 어려운 과정을 거쳐 적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비문에는 그가 이를 준비하며 맨땅에서 밤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쥬나가드 암석 비문은 스칸다굽타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의 무용으로 "세상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행운의 여신 락슈미가 다른 모든 "왕의 아들들"을 제치고 그를 선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스칸다굽타의 즉위 과정에 왕위 계승 경쟁이나 외부 세력의 위협(푸시야미트라스 혹은 유드야미트라스)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다.
3. 1. 왕위 계승 분쟁설
스칸다굽타는 굽타 시대 136년(서기 455년-456년경)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스칸다굽타의 비타리 기둥 비문에 따르면, 그는 "몰락한 가문의 운명"을 회복했다고 한다. 이 비문에는 그가 이를 위해 준비할 때 맨땅에서 밤을 보냈으며, 이후 부유하고 강력해진 적들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적들을 물리친 후, 그는 어머니를 찾아갔는데, 어머니는 과부였으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한다.많은 학자들은 비타리 비문에 언급된 적들을 푸시야미트라스라고 해석한다. 푸라나스에 따르면 이들은 부족이었으며, 아마도 나르마다 강 유역을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비문의 다른 해석에서는 이 단어를 "푸시야미트라스"가 아닌 "유드야미트라스"(적을 뜻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읽기도 한다.
이 적들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두 가지 주요 이론이 있다. 첫 번째 이론은 이 적들이 쿠마라굽타 1세의 통치 말년이나 그의 사후에 굽타 제국을 침략했고, 스칸다굽타가 이들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론은 비타리 비문에 언급된 갈등이 왕위 계승 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 쥬나가드 암석 비문: 이 비문에는 스칸다굽타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의 용맹으로 "세상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가 무력을 사용하여 왕위를 획득했음을 시사할 수 있다.
- 어머니의 지위: 스칸다굽타의 어머니는 쿠마라굽타 1세의 정실 부인이 아닌 후궁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위의 초기 생애 섹션 참조). 만약 그렇다면, 그의 왕위 계승 주장은 정통성이 약했을 수 있다.
- 락슈미 여신의 선택: 쥬나가드 비문에는 행운의 여신 락슈미가 다른 모든 "왕의 아들들"을 거부하고 스칸다굽타를 남편으로 선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스칸다굽타가 발행한 일부 동전에는 여성이 그에게 바르말라(화환)나 반지로 보이는 물건을 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여성이 락슈미라면 동전의 묘사는 비문 내용의 시각적 표현일 수 있다. (일부 학자는 이 여성을 락슈미가 아닌 왕비로 보기도 한다). 이는 다른 왕자들과의 경쟁에서 스칸다굽타가 승리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 비타리 비문의 "가문" 언급: 비타리 비문은 굽타 "가문"(''쿨라'' 또는 ''밤샤'')의 몰락한 운명에 대해 세 번 언급한다. "제국"이 아닌 "가문"을 강조한 것은 왕위 계승 분쟁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만약 비문에 언급된 적을 "푸시야미트라스"가 아닌 "유드야미트라스"(적들)로 해석한다면, 이들은 왕위를 놓고 다툰 경쟁자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다른 왕위 주장자: 여러 역사 기록에 따르면 쿠마라굽타 1세 사후 굽타 제국 내에서 여러 인물이 주권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쿠마라굽타의 형제 고빈다굽타, 친척 가토트카차굽타, 그리고 일부 금화에 이름이 나타나는 프라카샤디티야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이들이 스칸다굽타의 경쟁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왕위 계승 분쟁 이론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주장으로, 후대 굽타 왕들의 기록에서 스칸다굽타의 이름이 왕실 계보에서 생략되고 쿠마라굽타 1세 다음에 푸루굽타의 이름이 나온다는 점이 있다. 예를 들어 6세기 왕 쿠마라굽타 3세의 비타리 인장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생략은 후대의 왕들이 스칸다굽타의 이복형제인 푸루굽타의 후손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즉, 그들의 기록에 나타난 계보 목록은 모든 이전 굽타 왕들을 포괄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직계 조상만을 기록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3. 2. 외세 침입설
''스칸다굽타의 비타리 기둥 비문''
스칸다굽타는 굽타 시대 136년(455년경-456년)에 왕위에 올랐다. 스칸다굽타의 비타리 기둥 비문에 따르면, 그는 "몰락한 가문의 운명"을 회복했다고 한다. 비문에는 그가 이를 위해 준비하며 맨땅에서 밤을 보냈고, 이후 부유하고 강력해진 적들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적들을 물리친 후 그는 어머니를 찾아갔는데,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한다.
많은 학자들은 비타리 비문에 언급된 적들을 푸시야미트라스(Pushyamitras)라고 해석한다. 푸라나스(Puranas)에 따르면 이들은 부족으로, 아마도 나르마다 강 유역을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비문을 다르게 해석하여 "푸시야미트라스"가 아니라 "유드야미트라스"(Yudhyamitras, 적을 뜻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기르나르 산의 쥬나가드 암석에는 스칸다굽타의 비문이 있으며, 이전 왕 아쇼카와 루드라다만 1세의 비문도 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스칸다굽타의 즉위 과정을 둘러싼 논쟁과 연결된다. 한 이론은 푸시야미트라스와 같은 외부의 적들이 쿠마라굽타 1세 통치 말년이나 그의 사후에 굽타 제국을 침략했고, 스칸다굽타가 이들을 격퇴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본다. 이것이 '외세 침입설'이다.
반면, 또 다른 이론은 비타리 비문에 언급된 갈등이 외부의 적이 아닌 왕위 계승 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 쥬나가드 암석 비문에는 스칸다굽타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의 용맹함으로 "세상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스칸다굽타가 무력을 사용하여 왕위를 획득했음을 시사할 수 있다.
- 스칸다굽타의 어머니는 쿠마라굽타 1세의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따라서 그의 왕위 계승권은 정통성이 약했을 수 있다.
- 쥬나가드 비문에는 행운의 여신 락슈미가 다른 모든 "왕의 아들들"을 거부하고 스칸다굽타를 남편으로 선택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스칸다굽타가 발행한 일부 동전에는 여성이 그에게 바르말라(Varmala, 화환)나 반지로 보이는 물건을 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여성을 락슈미로 본다면 비문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여성을 락슈미가 아닌 왕비로 보기도 한다).
- 비타리 비문에서 '제국'이 아닌 '가문'(쿨라 또는 밤샤)의 몰락한 운명을 세 번 언급하는 점은 왕위 계승 분쟁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만약 비문의 '유드야미트라스'를 '푸시야미트라스'로 읽는 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외부의 적이 아니라 왕위를 놓고 다툰 경쟁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 다양한 역사 기록에 따르면 쿠마라굽타 1세 사후 여러 인물이 굽타 제국의 주권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쿠마라굽타의 형제 고빈다굽타, 친척 가토트카차굽타, 그리고 일부 금화에 이름이 등장하는 프라카샤디티야 등이 포함된다. 이들이 스칸다굽타의 경쟁자였을 수 있다.
왕위 계승 분쟁설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는 후대 굽타 왕들의 기록에서 스칸다굽타의 이름이 왕실 계보에서 생략되고, 쿠마라굽타 1세 다음에 푸루굽타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6세기 왕 쿠마라굽타 3세의 비타리 인장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생략은 후대의 왕들이 스칸다굽타의 이복형제인 푸루굽타의 후손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즉, 그들의 기록에 나타난 계보 목록은 모든 이전 왕들을 포괄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직계 조상만을 기록하려 했을 가능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4. 훈족과의 전쟁
스칸다굽타의 통치 기간 동안 굽타 제국은 북서쪽으로부터 인도-에프탈족(백색 훈족 또는 후나족으로도 알려짐)의 침입에 직면했다. 이들과의 전쟁은 스칸다굽타 시대의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여러 비문과 후대 문헌 기록을 통해 그가 훈족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침입의 정확한 시기와 구체적인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4. 1. 훈족 격퇴

스칸다굽타 시대에 인도-에프탈족(백색 훈족 또는 후나족으로 알려짐)이 북서쪽에서 인도를 침략하여 인더스강까지 진격했다.
비타리 기둥 비문에는 스칸다굽타가 후나족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은 스칸다굽타가 후나족과의 격렬한 전투를 통해 승리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스칸다굽타) 그의 두 팔로 대지가 흔들렸고, 그는 끔찍한 소용돌이와 같은 혼란을 일으키며 후나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적들 사이에서... 화살은... 마치 (강) 강가의 포효와 같이... 그들의 귀에 들렸다.
> — 스칸다굽타의 비타리 기둥 비문 15행
후나족의 침략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비타리 비문에서는 푸쉬야미트라(또는 유드야미트라)와의 분쟁 이후에 후나족과의 전투를 언급하고 있어, 스칸다굽타 통치 후반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쥬나가드 비문 역시 이 분쟁을 암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침략이 스칸다굽타 통치 초기나 심지어 아버지 쿠마라굽타의 통치 기간에 발생했을 수도 있다. 굽타 시대 138년(서기 457–458년경)으로 기록된 쥬나가드 비문에는 스칸다굽타가 믈레차(외국인)에 대해 거둔 성공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그[스칸다굽타]의 명성은 믈레차 국가의 적들조차도... 자부심이 뿌리째 꺾여 "진실로 그가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 — 쥬나가드 비문
이 믈레차에 대한 승리는 굽타 시대 136년(서기 455년경–456년) 이전 또는 그 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스칸다굽타가 왕위에 오르고 파르나다타를 쥬나가드가 위치한 사우라슈트라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한 때이다. 스칸다굽타가 다른 외국 세력과 싸웠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된 믈레차는 후나족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 추정이 맞다면, 스칸다굽타는 왕자 시절 국경에서 후나족의 침략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고, 아버지 쿠마라굽타는 이 분쟁 중에 수도에서 사망했을 수 있다. 이후 스칸다굽타는 수도로 돌아와 반란 세력이나 왕위 경쟁자를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후대의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도 스칸다굽타의 훈족 격퇴를 암시하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서기 7세기경의 문법서 ''찬드라-비야카라나''에는 "아자야드-굽토 후난"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굽타가 후나족을 정복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스칸다굽타의 승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일부 학자는 "굽토"를 "자토"로 읽기도 한다.) 또한, 11세기의 설화집 ''카타사리트사가라''에는 전설적인 왕 비크라마디티야가 아버지 마헨드라디티야가 퇴위한 후 왕위에 올라 믈레차를 궤멸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헨드라디티야는 쿠마라굽타의 칭호였고, 비크라마디티야는 스칸다굽타의 칭호였으므로, 이 이야기 역시 스칸다굽타의 후나족 격퇴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2. 훈족 침입 시기 논란
스칸다굽타 시대에 인도-에프탈족(백색 훈족 또는 후나족으로도 알려짐)이 북서쪽에서 인도를 침략하여 인더스강까지 진격했다.
비타리 기둥 비문에는 스칸다굽타가 후나족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 (스칸다굽타) "그의 두 팔로 대지가 흔들렸고, 그는 끔찍한 소용돌이와 같은 혼란을 일으키며 후나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적들 사이에서... 화살은... 마치 (강) 강가의 포효와 같이... 그들의 귀에 들렸다."
> — 스칸다굽타의 비타리 기둥 비문 15행
그러나 후나족의 침략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는 불확실하다. 비타리 비문은 푸쉬야미트라(또는 '유드야미트라')와의 분쟁 이후 후나족과의 전투를 언급하는데, 이는 스칸다굽타 통치 후반기에 침략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반면, 굽타 시대 138년(서기 457–458년경)으로 기록된 쥬나가드 비문에는 스칸다굽타가 믈레차(외국인)에 대해 거둔 성공이 언급되어 있다.
> ...그[스칸다굽타]의 명성은 믈레차 국가의 적들조차도... 자부심이 뿌리째 꺾여 "진실로 그가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 — 쥬나가드 비문
이 믈레차에 대한 승리는 굽타 시대 136년(서기 455년–456년경) 이전 또는 그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스칸다굽타가 왕위에 오르고 파르나다타를 쥬나가드가 위치한 사우라슈트라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한 때와 일치한다. 스칸다굽타가 다른 외국인과 싸웠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믈레차는 후나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 식별이 정확하다면, 스칸다굽타는 왕자 시절 국경에서 후나족의 침략을 막고 있었으며, 아버지 쿠마라굽타는 이 분쟁이 진행되는 동안 수도에서 사망했을 수 있다. 이후 스칸다굽타는 수도로 돌아와 반란 세력이나 왕위 경쟁자를 물리치고 왕위를 계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후나족과의 전투가 그의 통치 초기에, 혹은 즉위 이전에 일어났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후대의 산스크리트어 문헌들도 스칸다굽타의 후나족 정벌을 암시한다. 7세기경의 문법서 ''찬드라-비야카라나''(Candravyākaraṇasan)에는 "Ajayad-Gupto Hunansan"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굽타가 후나족을 정복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스칸다굽타의 후나족 승리를 언급한 것일 수 있지만, 학자 K. P. 자야스와르는 "Guptosan" 대신 "Jatosan"로 읽기도 한다.
또한, 11세기의 설화집 ''카타사리트사가라''에는 전설적인 왕 비크라마디티야가 아버지 마헨드라디티야가 퇴위한 후 왕위에 올라 믈레차를 궤멸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헨드라디티야는 쿠마라굽타가 사용했던 칭호이고, 비크라마디티야는 스칸다굽타가 사용했던 칭호이므로, 이 설화 역시 스칸다굽타의 후나족 격퇴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5. 서부 인도 통치
주나가드 암석 비문은 스칸다굽타의 서부 인도 통치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 비문에 따르면 스칸다굽타는 수라슈트라를 포함한 모든 속주의 총독을 임명했으며, 파르나다타를 수라슈트라 총독으로 삼았다. 파르나다타는 아들 차크라팔리타를 기리나가라(현대 주나가드-기르나르 지역)의 행정관으로 임명했고, 차크라팔리타는 고대 수다르샤나 호수의 댐 복구와 같은 중요한 사업을 수행했다. 이러한 총독 임명과 대규모 토목 사업은 스칸다굽타 시대 굽타 제국의 행정력이 서부 인도 지역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한편, 동시대 바카타카의 왕 나렌드라세나가 말와 지역을 침략하여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나렌드라세나의 비문에는 그의 명령이 코살라, 메칼라, 말라바(말와) 등에서 준수되었다는 주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칸다굽타는 곧 말와 지역에 대한 굽타 제국의 통제권을 회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460-461년경의 한 비문이 "백 명의 왕의 군주인 스칸다굽타의 평온한 통치"를 언급하고 있어, 당시 굽타 제국의 통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음을 시사한다.
5. 1. 파르나다타의 임명
주나가드 암석에는 초기 황제인 아쇼카의 마애 비문과 루드라다만의 비문과 더불어, 스칸다굽타의 총독 파르나다타의 명령으로 새겨진 비문이 있다. 이 비문은 스칸다굽타가 모든 지방의 총독을 임명했으며, 그 과정에서 파르나다타를 수라슈트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고 기록한다. 이것이 왕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총독 임명이었는지, 아니면 왕위 계승 전쟁이나 외적의 침입 같은 정치적 혼란 이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비문은 수라슈트라 총독이 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자격을 나열하며, 파르나다타만이 이 요건들을 모두 갖추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이 스칸다굽타 통치 하에서 실제로 요구되었던 자격인지, 아니면 단순히 파르나다타를 칭송하기 위한 미사여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파르나다타는 자신의 아들 차크라팔리타를 당시 수라슈트라의 수도로 추정되는 기리나가라 시(오늘날 주나가드-기르나르 지역 근처)의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주나가드 비문에는 차크라팔리타가 수다르샤나 호수를 수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호수는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처음 건설하고 그의 손자인 아쇼카가 후에 보수한 고대 저수지였다. 이후 서기 150년경 루드라다만에 의해 댐이 재건되었으나, 서기 456년에서 457년 사이(굽타 시대 137년)에 붕괴되었다. 차크라팔리타는 댐을 다시 건설하는 데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을 썼다고 전해지며, 비슈누 사원을 짓는 데에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2. 수다르샤나 호수 복구
주나가드 암석에는 초기 황제인 아쇼카와 루드라다만의 비문과 더불어, 스칸다굽타의 총독 파르나다타의 명령으로 새겨진 비문이 남아있다. 이 비문은 스칸다굽타가 파르나다타를 수라슈트라의 총독으로 임명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파르나다타는 그의 아들 차크라팔리타를 수라슈트라의 수도로 추정되는 기리나가라 시(현대 주나가드-기르나르 지역 근처)의 치안 판사로 임명했다.주나가드 비문은 특히 차크라팔리타가 고대의 수다르샤나 호수를 복구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호수는 본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시대에 처음 건설되었고, 이후 그의 손자인 아쇼카 시대에 개선되었다. 기원전 150년경에는 루드라다만에 의해 댐이 재건되었으나, 시간이 흘러 기원후 456년에서 457년 사이(굽타 시대력 137년)에 댐이 다시 붕괴되었다. 차크라팔리타는 이 붕괴된 댐을 복구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재산을 투입했으며, 이와 더불어 비슈누 신을 모시는 사원을 건설하는 데에도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6. 후계자
스칸다굽타의 마지막 알려진 연대는 서기 467~468년경(굽타 시대 148년)이며, 아마도 몇 년 더 통치했을 것이다.
스칸다굽타의 뒤는 아마도 그의 이복형제였을 푸루굽타가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푸루굽타는 쿠마라굽타 1세의 으뜸 왕비의 아들이었으므로 정당한 계승자로 여겨진다. 쿠마라굽타 1세가 사망했을 당시 푸루굽타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스칸다굽타가 먼저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있다. 스칸다굽타는 후계자 없이 사망했거나, 혹은 그의 아들이 푸루굽타 가문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을 수도 있다.
7. 화폐
스칸다굽타는 그의 전임자들보다 더 적은 수의 금화를 발행했으며, 이 금화들 중 일부는 상대적으로 금 함량이 낮았다. 이는 그가 치른 여러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압박을 받았기 때문일 수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스칸다굽타는 다섯 가지 종류의 금화를 발행했다: 궁수형, 왕과 여왕형, 차트라형, 사자 사냥꾼형, 기마병형이다.[5] 그의 은화는 네 가지 종류로 발행되었다: 가루다형, 황소형, 제단형, 마디야데샤형이다.
초기에 발행된 금화는 그의 아버지 쿠마라굽타가 사용했던 약 8.4g의 구 표준 중량을 따랐으며, 이 초기 금화는 매우 드물다. 통치 기간 중 스칸다굽타는 화폐 가치를 재평가하여, 기존 디나르 표준에서 약 9.2g의 새로운 '수바르나' 표준으로 전환했다.[6] 이 새로운 표준에 따라 발행된 후기 금화는 모두 궁수형이었으며, 이 표준과 유형은 이후 모든 굽타 통치자들이 따르게 되었다.
8. 대중문화 속의 스칸다굽타
현대 힌디어 문학의 유명 시인인 자이샨카르 프라사드는 굽타 제국의 황제 스칸다굽타의 삶을 바탕으로 1928년에 희곡 ''스칸다굽타''를 썼다.[8] 이후 1960년대에는 국립 연극 학교에서 고대 인도 드라마 교수로 재직하던 샨타 간디가 프라사드의 희곡 ''스칸다굽타''를 원본 대본에서 거의 변경 없이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리면서 작품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9][10]
한편, 인도 신문 다이니크 자그란의 기사에서는 인기 영화 바후발리 2: 더 컨클루전이 스칸다굽타의 삶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1]
참조
[1]
서적
The Pimlico Dictionary Of Classical Civilizations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2011-06-30
[2]
서적
Catalogue of the coins of the Gupta dynasties
https://archive.org/[...]
1914
[3]
서적
Cometh the Hour , Cometh the Man : The Saga of Skandagupta
Manak Publication Pvt. Ltd.; New Delhi /Michigan
2024
[4]
웹사이트
Junagadh Rock Inscription of Rudradaman
http://projectsoutha[...]
2009-02-23
[5]
간행물
Treasures of the Gupta Empire
Shivlee Trust
2017
[6]
간행물
The Coinage of the Gupta Empire
Banaras Hindu University
1957
[7]
문서
[8]
웹사이트
स्कंदगुप्त (नाटक) : जयशंकर प्रसाद
https://www.hindikah[...]
[9]
뉴스
Re-discovering Dhruvaswamini
http://www.thehindu.[...]
The Hindu
2009-10-29
[10]
서적
The Encyclopaedia of Indian Literature – Volume 5
Sahitya Akademi
[11]
웹사이트
स्कंदगुप्त की कहानी पर बनी है बाहुबली फिल्म
https://www.jagran.c[...]
[12]
서적
The Pimlico Dictionary Of Classical Civilizations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2011-06-30
[13]
서적
Catalogue of the coins of the Gupta dynasties
https://archive.org/[...]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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