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디바라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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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디바라니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12월 9일부터 11일까지 이집트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 이후,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의 방어선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624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탈리아군은 47명의 장교와 2,147명의 사병이 사망하고 38,300명이 포로로 잡히는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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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퍼스 작전은 1940년 12월부터 1941년 2월까지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서부 사막에서 감행한 공세 작전으로, 이집트 침공 후 시디 바라니 탈환을 목표로 시작되어 리비아 동부에서 이탈리아군을 몰아내고 북아프리카 전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40년 이집트 - 니베이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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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디바라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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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서부 사막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
작전명 | 컴퍼스 작전 |
날짜 | 1940년 12월 10일 ~ 1940년 12월 11일 |
장소 | 이집트 시디바라니 |
결과 | 영국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
지휘관 | |
지휘관 1 | 아치볼드 웨이벌 헨리 마이트랜드 윌슨 리처드 오코너 |
지휘관 2 | 로돌포 그라치아니 주세페 텔레라 (Giuseppe Tellera) 아니발레 베르곤졸리 |
병력 규모 | |
병력 1 | 36,000명, 화기 120개, 전차 275대, 항공기 142대 |
병력 2 | 60,000명, 화기 250개, 전차 120대, 항공기 331대 |
피해 규모 | |
피해 1 | 624명 |
피해 2 | 2,194명 사망, 2,286명 부상, 38,300명 포로, 화기 237개, 전차 73대, 차량 약 1,000대 |
2. 배경
시디바라니 전투의 배경은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 체결 이후 이집트에 주둔하던 소규모 영국군과 영연방 군대가 수에즈 운하와 홍해 항로를 지키던 상황에서 시작된다. 이 항로는 영국이 극동 및 인도양 지역과 통신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1939년 중반, 아치볼드 웨이벌 중장이 지중해 및 중동 전역을 담당하는 중동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투르크 전쟁 (1911–1912) 이후 리비아 동부 키레나이카 지역은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이자 공군 원수(Maresciallo dell'Aria|마레샬로 델라리아it)인 이탈로 발보의 지휘 아래 북아프리카 최고 사령부를 설치하여 양쪽 전선을 방어할 준비를 했다. 1940년 중반, 이탈리아군은 약 21만 5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영국군은 이집트에 약 3만 6천 명, 팔레스타인에 2만 7천 5백 명의 훈련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부 사막은 메르사 마트루에서 리비아 해안의 가잘라까지 폭이 약 약 386.24km이고, 유일한 포장 도로는 Via Balbiait였다. 사구는 내륙으로 약 241.40km 떨어진 지점에서 가장 넓었으며, 자라부와 시와까지 사막의 남쪽 경계를 이루었다. 영국에서는 서부 사막이 리비아의 동부 키레나이카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 해안에서 내륙으로 뻗어 있는 것은 해발 약 약 152.40m 높이의 평평하고 돌이 많은 사막으로, 남쪽으로 사구까지 200km에서 300km 뻗어 있었다.
사막에서의 항해는 태양, 별, 나침반 방위, 그리고 환경에 대한 경험을 통해 얻은 "사막 감각"에 의존했다. 1940년 9월 이탈리아군이 이집트로 진격했을 때, 말레티 부대는 시디 오마르를 떠나 길을 잃었고, 결국 정찰기에 의해 발견되어야 했다. 봄과 여름에는 낮에는 매우 덥고 밤에는 매우 춥다. 특히, 시로코ar(Giblehar/Ghibliar)라고 불리는 뜨거운 사막 바람은 고운 모래 구름을 날려 시야를 몇 미터로 줄이고 눈, 폐, 기계, 음식, 장비를 덮는다.
이탈리아군의 일반적인 보급 경로는 리비아의 트리폴리 항구였다. 육상에서는 보급품을 도로로 장거리를 수송하거나 작은 화물선으로 운반해야 했다. 트리폴리에서 벵가지까지의 거리는 이탈리아가 건설한 해안 도로인 Litoranea Balboit (Via Balbiait)를 따라 약 약 1046.07km였다. 1940년 말 이집트 침공으로 인해 트리폴리에서 케디발 자동차 도로를 통한 수송 거리가 증가했는데, 이 도로는 Via Balbiait보다 훨씬 열악했다.
1940년, 영국군은 알렉산드리아 서쪽 약 321.87km 지점에 위치한 이집트 국영 철도, 도로 및 메르사 마트루 (마트루) 항구를 기지로 사용했다. 철도를 따라 물 파이프라인 건설이 시작되었고, 수원지가 조사되었다. 1939년에는 마트루와 마텐 바구시에 있는 로마 시대의 수도교가 주요 담수원이었다. 마트루는 리비아 국경에서 동쪽으로 약 193.12km 떨어져 있었다. 국경에서 설룸까지는 물이 없었고, 설룸 동쪽 약 80.47km 지점인 시디바라니까지는 케디발 자동차 도로만 있었는데, 이 도로는 침략에 대비하여 의도적으로 열악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1940년 9월, 뉴질랜드 철도 대대와 인도 노동자들이 해안 철도 건설을 시작하여 1941년 10월까지 시디바라니에 도달했다.
2. 1. 리비아
이탈리아-투르크 전쟁 (1911–1912) 이후 리비아 동부 키레나이카 지역은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다. 서쪽으로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의 일부인 튀니지, 동쪽으로는 이집트와 접해 있던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이자 공군 원수(Maresciallo dell'Aria|마레샬로 델라리아it)인 이탈로 발보의 지휘 아래 북아프리카 최고 사령부를 설치하여 양쪽 전선을 방어할 준비를 했다. 최고 사령부에는 제5군 (이탈로 가리볼디 장군)과 제10군 (마리오 베르티 장군)이 있었는데, 1940년 중반에는 각 부대당 약 13,000명으로 구성된 9개의 본토 사단, 3개의 흑셔츠 (Milizia Volontaria per la Sicurezza Nazionale|밀리치아 볼론타리아 페르 라 시쿠레차 나치오날레it) , 그리고 각 8,000명으로 구성된 2개의 이탈리아령 리비아 식민지 사단이 있었다.1930년대 후반에 이탈리아 사단은 기계화되면서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각 3개 연대에서 2개 연대로 축소되었다. 예비군은 1939년에 징집병과 함께 소집되었다. 사기는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고, 육군 (Regio Esercito|레조 에세르치토it)은 최근 군사 작전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해군 (Regia Marina|레자 마리나it)은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번성하여 빠르고 잘 지어진 무장한 함선과 대규모 잠수함 함대를 갖추었지만, 해군은 경험과 훈련이 부족했다. 공군 (Regia Aeronautica|레자 아에로나우티카it)은 침체되었고, 1939년까지 영국은 높은 작전 수행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8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5군은 튀니지와 인접한 지역인 트리폴리타니아에, 6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10군은 동쪽의 키레나이카를 방어했다. 전쟁이 선포되자 제10군은 제1 리비아 사단을 자라부브에서 시디 오마르로, 제21군단을 시디 오마르에서 해안, 바르디아 및 토브루크로 이동시켰다. 제22군단은 반격 부대로서 토브루크 남서쪽으로 이동했다.
2. 2. 이집트
영국은 1882년부터 이집트에 군사력을 주둔시켰지만, 그 수는 영국-이집트 조약에 의해 대폭 감소했다. 소규모의 영국 및 영연방 군대는 수에즈 운하와 홍해 항로를 주둔했는데, 이는 영국이 극동 및 인도양 지역과의 통신에 매우 중요했다. 1939년 중반, 아치볼드 웨이벌 중장은 지중해 및 중동 전역을 관할하는 새로운 중동 사령부의 사령관 (GOC-in-C)으로 임명되었다. 프랑코-추축국 휴전까지, 튀니지의 프랑스 사단은 리비아-튀니지 국경에서 이탈리아 제5군과 대치했다. 리비아에서 왕립군은 약 21만 5천 명, 이집트에서는 영국군이 약 3만 6천 명의 병력을 보유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다른 2만 7천 5백 명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영국군에는 1939년 중반 기갑 사단 (이집트)(1940년 2월 16일 제7 기갑 사단)으로 개명된 2개의 영국 기갑 훈련 부대 중 하나인 기동 사단(이집트) (페르시 호바트 소장)이 포함되었다. 이집트-리비아 국경은 이집트 국경 경비대가 방어했으며, 1940년 6월에는 제6 보병 사단 사령부(리처드 오코너 소장)가 서부 사막의 지휘권을 인수하여 이탈리아군을 국경 초소에서 몰아내고 전쟁이 시작되면 배후지를 장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7 기갑 사단은 제7 기갑 여단을 제외하고 메르사 마트루에 집결하여 제7 지원단을 전방으로 보내 방어 세력으로 삼았고, RAF도 대부분의 폭격기를 이동시켰다. 몰타도 증강되었다.
완전하고 충분히 훈련된 부대가 부족했던 제6 보병 사단 사령부는 6월 17일에 서부 사막군(WDF)으로 개명되었다. 튀니지에는 제한적인 작전만 가능한 8개의 프랑스 사단이 있었고, 시리아에는 4만 명의 병력과 민간인에 대한 점령 임무를 수행하는 국경 경비대와 함께 무장과 훈련이 부족한 3개의 사단이 있었다. 리비아의 Regio Esercitoit(왕립 육군)와 Regia Aeronauticait(왕립 공군)는 이집트의 영국군보다 훨씬 우세했지만, 사기가 낮았고 열등한 장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Africa Orientale Italianait)에는 다른 13만 명의 이탈리아 및 아프리카 병력이 있었고, 400문의 대포, 200대의 경전차 및 2만 대의 트럭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1일부터 전쟁을 선포했다.
2. 3. 보급
영국은 1882년부터 이집트에 군대를 주둔시켰지만,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으로 병력이 줄었다. 소규모 영국군과 영연방 군대는 수에즈 운하와 홍해 항로를 지켰는데, 이는 극동 및 인도양 지역과의 통신에 중요했다. 1939년 중반, 아치볼드 웨이벌 중장은 지중해 및 중동 전역을 담당하는 새로운 중동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 6월 22일 프랑스와 추축국 간 휴전 전까지, 튀니지의 프랑스 사단은 리비아-튀니지 국경에서 이탈리아 제5군과 대치했다. 당시 리비아에는 약 21만 5천 명의 이탈리아 왕립군이, 이집트에는 약 3만 6천 명의 영국군이 있었고, 팔레스타인에서 2만 7천 5백 명이 훈련 중이었다.영국군에는 1939년 중반 기갑 사단 (이집트)(1940년 2월 16일 제7 기갑 사단으로 개명)으로 개명된 2개의 영국 기갑 훈련 부대 중 하나인 기동 사단(이집트) (페르시 호바트 소장)이 포함되었다. 이집트-리비아 국경은 이집트 국경 경비대가 방어했으며, 1940년 6월에는 제6 보병 사단 사령부(리처드 오코너 소장)가 서부 사막의 지휘권을 인수하여 이탈리아군을 국경 초소에서 몰아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7 기갑 사단은 메르사 마트루에 집결하여 제7 지원단을 전방으로 보내 방어 세력으로 삼았고, RAF도 대부분의 폭격기를 이동시켰다. 몰타도 증강되었다.

제6 보병 사단 사령부는 6월 17일에 서부 사막군(WDF)으로 개명되었다. 튀니지에는 제한적인 작전만 가능한 8개의 프랑스 사단이, 시리아에는 4만 명의 병력과 민간인에 대한 점령 임무를 수행하는 국경 경비대와 함께 무장과 훈련이 부족한 3개의 사단이 있었다. 리비아의 Regio Esercitoit(왕립 육군)와 Regia Aeronauticait(왕립 공군)는 이집트의 영국군보다 훨씬 우세했지만, 사기가 낮았고 열등한 장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Africa Orientale Italianait)에는 13만 명의 이탈리아 및 아프리카 병력, 400문의 대포, 200대의 경전차, 2만 대의 트럭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1일부터 전쟁을 선포했다.
이탈리아군의 일반적인 보급 경로는 리비아의 트리폴리 항구로, 시칠리아 서쪽으로 항해한 다음 리비아 해안을 따라 항구로 향하는 약 600nmi의 거리였다. 이는 몰타에 주둔한 영국 항공기, 선박 및 잠수함의 방해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육상에서는 보급품을 도로로 장거리를 수송하거나 작은 화물선으로 운반해야 했다. 트리폴리에서 벵가지까지의 거리는 이탈리아가 건설한 해안 도로인 Litoranea Balboit (Via Balbiait)를 따라 약 약 1046.07km였으며, 알렉산드리아까지는 절반 정도의 거리였다. 이탈리아가 전쟁을 선포한 후 이탈리아 상선의 3분의 1이 억류되었다. 도로는 침수될 수 있었고, 사막 공군(DAF)에 취약했으며, 대체 사막 트랙은 차량 마모를 증가시켰다. 1940년 말 이집트 침공으로 인해 트리폴리에서 케디발 자동차 도로를 통한 수송 거리가 증가했는데, 이 도로는 Via Balbiait보다 훨씬 열악했다.
이탈리아의 지리적 위치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지중해를 봉쇄할 수 있게 했고, 이집트 항구에 주둔한 영국 지중해 함대는 보급을 위해 수에즈 운하에 의존하게 되었다. 1939년, 웨이벌은 중동 지역에 약 15개 사단(300,000명) 규모의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 중 6개 사단은 이집트에, 3개 사단은 팔레스타인에 배치하고 나머지는 더 멀리 배치할 계획이었다. 자재의 대부분은 식민지에서 수입되었고, 나머지는 수입 대체품 생산을 자극하여 현지에서 조달되었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9개 사단 규모의 주둔군을 위한 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계획은 1941년 6월까지 14개 사단으로, 1942년 3월까지 23개 사단으로 확대되었다.
1940년, 영국군은 알렉산드리아 서쪽 약 321.87km 지점에 위치한 이집트 국영 철도, 도로 및 메르사 마트루 (마트루) 항구를 기지로 사용했다. 철도를 따라 물 파이프라인 건설이 시작되었고, 수원지가 조사되었다. 우물이 파였지만 대부분 염수에 오염되었고, 1939년에는 마트루와 마텐 바구시에 있는 로마 시대의 수도교가 주요 담수원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물 수송선과 마트루에 있는 증류 시설이 보급을 늘렸지만, 엄격한 절약을 시행해야 했고, 많은 물을 내륙 지역으로 수송해야 했다. 1939년에 이용 가능한 차량 수가 부족했고, 장갑 사단에 더 나은 후방 연결을 제공하기 위해 트럭이 전용되었다. 사막에서 사용할 수 있는 차량만 오프로드로 운행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전차는 마트루에서 멀리 이동할 수 없었다. 마트루는 리비아 국경에서 동쪽으로 약 193.12km 떨어져 있었다. 국경에서 설룸까지는 물이 없었고, 설룸 동쪽 약 80.47km 지점인 시디바라니까지는 케디발 자동차 도로만 있었는데, 이 도로는 침략에 대비하여 의도적으로 열악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이는 침략자가 주요 영국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물도 없고 트랙도 없는 사막을 통과해야 함을 의미했다. 1940년 9월, 뉴질랜드 철도 대대와 인도 노동자들이 해안 철도 건설을 시작하여 1941년 10월까지 시디바라니에 도달했다.
2. 4. 지형
서부 사막은 메르사 마트루에서 리비아 해안의 가잘라까지 폭이 약 약 386.24km이고, 유일한 포장 도로인 Via Balbiait를 따라 뻗어 있었다. 사구는 내륙으로 약 241.40km 떨어진 지점에서 가장 넓었으며, 자라부와 시와까지 사막의 남쪽 경계를 이루었다. 영국에서는 서부 사막이 리비아의 동부 키레나이카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 해안에서 내륙으로 뻗어 있는 것은 해발 약 약 152.40m 높이의 평평하고 돌이 많은 사막으로, 남쪽으로 사구까지 200km에서 300km 뻗어 있었다. 이 지역에는 전갈, 살모사, 파리가 서식했으며, 소수의 베두인 유목민들이 거주했다. 베두인족은 우물(비르)과 더 쉽게 통과할 수 있는 땅을 연결하는 길을 알고 있었다.사막에서의 항해는 태양, 별, 나침반 방위, 그리고 환경에 대한 경험을 통해 얻은 "사막 감각"에 의존했다. 1940년 9월 이탈리아군이 이집트로 진격했을 때, 말레티 부대는 시디 오마르를 떠나 길을 잃었고, 결국 정찰기에 의해 발견되어야 했다.
봄과 여름에는 낮에는 매우 덥고 밤에는 매우 춥다. 특히, 시로코ar(Giblehar/Ghibliar)라고 불리는 뜨거운 사막 바람은 고운 모래 구름을 날려 시야를 몇 미터로 줄이고 눈, 폐, 기계, 음식, 장비를 덮는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자동차와 항공기에는 특수 오일 필터가 필요했으며, 황량한 땅은 군사 작전을 위한 물품이 외부에서 운송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독일 엔진은 과열되는 경향이 있었고, 탱크 엔진 수명은 약 2253.08km에서 약 2574.94km에서 약 482.80km에서 약 1448.41km로 떨어졌는데, 이는 독일과 이탈리아 장비에 대한 표준 부품 부족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3. 전초전
영국은 1882년부터 이집트에 군대를 주둔시켰지만,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으로 그 수가 줄었다. 수에즈 운하와 홍해 항로는 영국에게 매우 중요했기에, 1939년 중반 아치볼드 웨이벌 중장이 중동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프랑코-추축국 휴전까지, 튀니지의 프랑스 사단은 리비아에서 이탈리아 제5군과 대치했다. 당시 리비아에는 이탈리아군 약 21만 5천 명, 이집트에는 영국군 약 3만 6천 명, 팔레스타인에는 2만 7천 5백 명이 훈련 중이었다.
영국군에는 1940년 2월 16일 제7 기갑 사단으로 개명된 기동 사단(이집트) (페르시 호바트 소장)이 포함되었다. 이집트-리비아 국경은 이집트 국경 경비대가 방어했고, 1940년 6월 제6 보병 사단 사령부(리처드 오코너 소장)가 서부 사막 지휘권을 인수하여 이탈리아군을 몰아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7 기갑 사단은 메르사 마트루에 집결하여 제7 지원단을 전방으로 보내 방어 세력으로 삼았고, RAF도 대부분의 폭격기를 이동시켰다.
1940년 6월 17일, 제6 보병 사단 사령부는 서부 사막군(WDF)으로 개명되었다. 튀니지에는 8개 프랑스 사단, 시리아에는 4만 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무장과 훈련이 부족했다. 리비아의 왕립 육군과 왕립 공군은 이집트의 영국군보다 우세했지만, 사기가 낮고 장비가 열등했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는 13만 명의 이탈리아 및 아프리카 병력, 400문의 대포, 200대의 경전차, 2만 대의 트럭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1일부터 전쟁을 선포했다.
3. 1. 국경 소규모 교전
1940년 6월 11일,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고 영국군은 국경을 장악하고 자라부브 포위전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날 밤 영국군은 리비아로 건너가 시디 오마르에서 이탈리아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이탈리아군 일부는 전쟁이 선포된 것을 알지 못했다. 6월 14일, 영국군은 포트 카푸초와 포트 마달레나를 점령하여 220명의 포로를 잡았다. 이틀 뒤 영국군은 토브루크-바르디아 도로에서 호송대를 급습하여 이탈리아군 21명을 사살하고 88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여기에는 제10군 공병 참모인 Generale di Brigata|제네랄레 디 브리가타it 로몰로 라스트루치가 포함되었다. 네주에트 기르바의 국경 철선 근처에서 벌어진 교전에서는 경전차 17대, 포 4문, 보병 400명으로 구성된 이탈리아군이 영국 전차, 포병, 기동 보병 혼성 부대에 의해 격파되었다.
영국군은 토브루크 서쪽까지 국경 지역을 순찰하며 제10군을 압도했다. 8월 5일, 이탈리아 전차 30대와 제8 기병대가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고, 웨이벌은 이탈리아군의 공세가 임박했을 때 차량 마모로 인해 작전을 지속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모래는 장비를 빠르게 마모시켜 전차의 궤도 수명을 단축시켰고, 예비 부품 부족으로 전차 전력의 절반만 작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8월부터 9월 초까지는 햇 작전이 지중해 함대를 증강시키고 케이프를 통해 전차와 승무원으로 구성된 육군 호송대를 수송하는 데 도움을 주면서 소강 상태가 이어졌다. 영국군은 6월 11일부터 9월 9일까지 150명의 손실로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주장했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양측 모두 장거리 사막 그룹(LRDG)과 사하라 자동-항공 회사it 같은 정찰 그룹을 조직하여 사막을 누비며 영국군의 배치 상황을 관찰하고 급습을 감행했다.
3. 2.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 (Operazione E)
1940년 9월 13일, 이집트 침공은 로마에서 구상한 전략적 목표보다는 메르사마트루를 향한 제한적인 전술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제5군에서 이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수송, 연료, 무선 장비 부족 때문이었다. 무시앗은 새벽에 "화려한" 포격에 시달린 후 점령되었다. 제1 리비아 사단은 살룸과 비행장을 점령했고, 저녁에는 제2 리비아 사단, 제63 보병 사단 "시레네", 무시앗에서 온 말레티 부대, 시디 오마르에서 온 제62 보병 사단 "마르마리카"가 영국군 교란 부대를 지나 할파야 고개로 진격했다.
영국군은 9월 14일 부크 부크 너머로 후퇴했고, 다음 날 알람 하미드로, 16일에는 알람 엘 답으로 후퇴하며 이탈리아군의 진격을 계속 교란했다. 50대의 이탈리아 전차 부대가 측면 이동을 시도했고, 이는 영국 후위 부대가 시디 바라니 동쪽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항구는 제1 CC.NN. 사단 "23 마르초"에 의해 점령되었고, 로돌포 그라치아니는 진격을 멈추었다. 영국군은 관측을 재개했고, 제7 기갑 사단은 마트루에 대한 공격에 대비했다.
이탈리아군은 마트루의 영국군 방어선에서 서쪽으로 약 약 128.75km 떨어진 시디 바라니와 소파피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군은 도로 파괴를 복구하고, 우물을 청소했으며, 12월 중순에 진격을 재개하기 위한 물자 축적을 위해 국경에서부터의 급수관 건설 작업을 시작했다. 이집트는 추축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고, 이탈리아 항공기는 10월 19일 카이로를 폭격했다. 이탈리아군을 교란하기 위한 영국 해군 및 공군 작전이 계속되었고,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기를 저하시키는 피해를 입혔다. 영국 장갑차 순찰대는 비무장 지대를 장악했지만, 전진 착륙장의 손실로 인해 영국 공군의 효율성이 감소했고, 몰타는 사정권 밖으로 벗어났다. 추가 장갑차 중대가 최전선 뒤편의 영국 정찰 작전에 합류했으며, 서부 사막군은 마틸다 II 전차를 갖춘 새로운 전차 연대로 증강되었다.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을 기다리는 대신, 4~5일 동안 이탈리아군 야영지 중앙 부대와 소파피에 대한 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 3. 영국군의 계획
이탈리아의 진격 이후, 헨리 메이틀랜드 윌슨 중장은 이탈리아군을 밀어내기 위한 제한적인 작전을 계획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치볼드 웨이벌은 이탈리아 방어 진지가 서로를 지원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작전은 원래 5일간의 급습으로 계획되었지만, 성공할 경우 연장할 수도 있었다.
제7 지원단은 소파피에 있는 이탈리아군 진지를 감시하고 서쪽 이동을 막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사단의 나머지 병력과 제4 인도 사단은 소파피-니베이와 간격을 통과할 예정이었다. 인도 여단과 보병 전차(I 전차) 제7 RTR은 제7 기갑 사단이 북쪽 측면을 보호하는 동안 서쪽에서 니베이와를 공격하기로 했다. 니베이와가 점령되면 두 번째 인도 여단과 제7 RTR이 투마르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마트루 주둔군(제3대대 콜드스트림 근위대 및 일부 포병)은 해안의 막틸라에 있는 적군 진지를 억제하고, 영국 해군은 막틸라와 시디바라니를 폭격할 예정이었다. 성공하면, 시디 바라니는 둘째 날 제4 인도 사단에 의해 공격받고, 서쪽으로 공세가 이어질 것이었다.
준비는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11월 25일과 26일에 마트루 근처에 표시된 목표가 니베이와와 투마르의 복제품이라는 것과, 훈련이 예행 연습이라는 것을 훈련 기간 동안 소수의 장교만이 알았다. 병사들은 두 번째 훈련이 있을 것이라고 들었고, 12월 7일에 출발 위치에 도착할 때까지 작전이 실제라는 것을 많은 사람이 몰랐다.
3. 4. 이탈리아군의 방어 준비
이탈리아-투르크 전쟁 (1911–1912) 이후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일부였던 키레나이카는 동쪽으로 이집트, 서쪽으로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의 일부인 튀니지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이자 공군 원수(Maresciallo dell'Aria|이탈리아 공군 원수it)인 이탈로 발보의 지휘 아래 북아프리카 최고 사령부를 설치하여 양쪽 전선을 방어할 준비를 했다. 최고 사령부에는 제5군 (이탈로 가리볼디 장군)과 제10군 (마리오 베르티 장군)이 있었는데, 1940년 중반에는 각 부대당 약 13,000명으로 구성된 9개의 본토 사단, 3개의 흑셔츠 (국가 안보 자원 민병대it) 부대, 그리고 각 8,000명으로 구성된 2개의 이탈리아령 리비아 식민지 사단이 있었다.
1940년 12월, 이집트 주둔 제10군은 국경 동쪽에 약 9개의 이진, 검은 셔츠, 식민지 사단으로 증강되었고, 부대 교대를 시작하여 영국이 이탈리아의 전투 서열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요새화된 야영지는 해안에서 절벽까지 약 약 80.47km 길이의 호를 따라 넓게 배치되었다. 시디 바라니 지역의 제10군은 약 40,000명이었고, 12월 8일, 리비아 군단(세바스티아노 갈리나 중장)의 제1 리비아 사단, 제2 리비아 사단은 마크틸라, 툼마르의 요새화된 야영지에 약 35.41km 전선을 펼쳤으며, 제4 CC.NN. 사단 "3 젠나이" (메르자리 장군)은 시디 바라니에서 약 약 19.31km 떨어진 곳에 예비대로 배치되었고, 갈리나와 리비아 군단 사령부가 있었다.
말레티 그룹은 니베이와에 주둔했고, 제XXI 군단(달마초 장군)의 제63 보병 사단 "치레네" (스파토코 장군)는 라비아와 소파피, 니베이와에서 서쪽으로 약 30.58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제64 보병 사단 "카탄자로"는 부크 부크 동쪽의 쿠르-사말루스 지역, 니베이와-라비아 간극 뒤로 이동했다. 서쪽에는 제XXIII 군단이 제1 CC.NN. 사단 "23 마르초", 제2 CC.NN. 사단 "28 오토브레"를 배치했고, 제62 보병 사단 "마르마리카"는 소파피에서 하파야까지 절벽에 주둔했다. 제10군은 이집트 내에 약 8만 명, 250문의 대포, 12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4. 전투
12월 9일 늦은 시각, 오코너와 베레스포드피어스는 예비대였던 제16 보병 여단(여단장 시릴 로맥스)을 시디 바라니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투입했다. 두 개의 야전 포병 연대가 진격을 지원했고, 제7 RTR은 고장난 전차를 수리하여 전투에 다시 투입하려 했다. 시디 바라니는 8개의 요새에 두 개의 이탈리아 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각 요새는 대대가 방어했지만 방어선은 효과적인 지휘를 하기에는 너무 길었다.
12월 10일의 진격은 이탈리아군의 배치에 대한 불확실성, 혹독한 추위, 그리고 시야를 약 45.72m로 줄이는 먼지 폭풍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제16 여단은 포병과 제7 RTR(늦게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오전 6시에 진격을 시작했지만 이탈리아 포병의 사격에 의해 저지되었다. 3시간 후, 두 개의 중포병 연대가 도착했을 때 제16 여단은 마틸다 전차 1개 소대, RAF 항공기, 왕립 해군 함선 및 포병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했다. 오전 내내 큰 진전 없이 전투가 계속되었고, 오후 1시 30분에 방어선 서쪽에 있는 두 개의 요새를 지키던 검은 셔츠단이 갑자기 항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단은 시디 바라니에서 남쪽과 서쪽 도로를 차단했다.
베레스포드피어스는 먼지 폭풍이 간헐적이고 영국군이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공격을 명령했다. 여단은 마지막 보병 전차, 추가 보병 대대, 그리고 제2 왕립 전차 연대(제2 RTR)의 지원을 받아, 순항 전차와 경전차를 좌익에 두고 진격했다. 오후 4시 직후에 공격이 시작되었고, 사단 포병의 지원을 받았다. 약 5.63km를 진격한 후 먼지 폭풍이 잦아들자 보병이 하차했고 이탈리아 포병이 사격을 시작했다. 마지막 10대의 마틸다가 왼쪽으로 이동하여 주요 도로 남쪽의 시디 바라니 방어선의 서쪽 면으로 돌진한 다음 모래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이탈리아 포병의 탄약은 마틸다 전차에 효과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탈리아 포병들은 소총과 수류탄으로 저항했지만 제압당했다.
오전 10시에 제16 여단이 진격을 시작했을 때 공격은 격전(mêlée프랑스어)이 되었고, 약 2,000명의 검은 셔츠단이 반격을 할 준비가 된 듯이 일어섰지만, 그들은 사기를 잃고 항복했다. 두 시간 만에 항구 서쪽, 남쪽 일부, 그리고 포병선에서 첫 번째 목표가 점령되었다. 오후 6시까지, 검은 셔츠단 군단과 제1 리비아 사단의 잔존 세력이 지키고 있는 항구 동쪽의 4km 구역만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4. 1. 시디 바라니 점령
12월 9일 늦은 시각, 오코너와 베레스포드피어스는 예비대에 있던 제16 보병 여단(여단장 시릴 로맥스)을 시디 바라니로 들어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보냈다. 두 개의 야전 포병 연대가 진격을 지원했으며, 제7 RTR은 고장난 전차를 다시 가동하기 위해 서둘렀다. 시디 바라니는 8개의 요새에 두 개의 이탈리아 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각 요새는 대대가 방어했지만 방어선은 효과적인 지휘를 하기에는 너무 길었다.12월 10일의 전진은 이탈리아군의 배치에 대한 불확실성, 혹독한 추위, 그리고 시야를 약 45.72m로 줄이는 먼지 폭풍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제16 여단은 포병과 제7 RTR(늦게 도착했다)을 기다리지 않고 오전 6시에 진격을 시작했지만 이탈리아 포병의 사격에 의해 격퇴당했다. 3시간 후, 두 개의 중포병 연대가 도착했을 때 제16 여단은 마틸다 전차 1개 소대, RAF 항공기, 왕립 해군 함선 및 포병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했다. 오전 내내 실질적인 진전 없이 전투가 계속되었고, 오후 1시 30분에 방어선 서쪽에 있는 두 개의 요새를 지키던 검은 셔츠단이 갑자기 항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단은 시디 바라니에서 남쪽과 서쪽 도로를 차단했다.
베레스포드피어스는 먼지 폭풍이 간헐적이고 영국군이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공격을 명령했다. 여단은 마지막 보병 전차, 추가 보병 대대, 그리고 제2 왕립 전차 연대(제2 RTR)의 지원을 받아, 순항 전차와 경전차를 좌익에 두고 진격했다. 오후 4시 직후에 공격이 시작되었고, 사단 포병의 지원을 받았다. 약 5.63km를 진격한 후 먼지 폭풍이 잦아들자 보병이 하차했고 이탈리아 포병이 사격을 시작했다. 마지막 10대의 마틸다가 왼쪽으로 이동하여 주요 도로 남쪽의 시디 바라니 방어선의 서쪽 면으로 돌진한 다음 모래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이탈리아 포병의 탄약은 마틸다 전차에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포병들은 소총과 수류탄으로 싸웠지만 제압당했다.
오전 10시에 제16 여단이 진격을 시작했을 때 공격은 mêlée프랑스어가 되었고, 약 2,000명의 검은 셔츠단이 반격을 할 준비가 된 듯이 일어섰지만, 그들은 사기를 잃고 대신 항복했다. 두 시간 만에 항구 서쪽, 남쪽 일부, 그리고 포병선에서 첫 번째 목표가 점령되었다. 오후 6시까지, 검은 셔츠단 군단과 제1 리비아 사단의 잔존 세력이 지키고 있는 항구 동쪽의 4km 구역만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4. 1. 1. 셀비 부대
셀비 부대는 시디 바라니로 접근하는 동쪽 방면을 방어했고, 서부 사막군(WDF)의 나머지 부대는 내륙의 요새화된 캠프를 공격했다. 12월 10일, 제4 기갑 여단이 북쪽으로 진격하여 시디 바라니와 부크 부크 사이의 해안 도로를 차단하고 장갑차 부대를 서쪽으로 보냈다. 제7 기갑 여단은 예비대로 남았고, 제7 지원대는 라비아와 소파피에서 남쪽으로 오는 접근로를 막았다.니베이와 함락 소식이 오후 3시 20분에 셀비에게 전해졌고, 그는 부대를 보내 막틸라에서 서쪽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았다. 이동은 험한 지형과 어둠으로 인해 늦어졌고, 제1 리비아 사단은 탈출했다. 12월 9일 늦은 시각, 오코너와 베레스포드피어스는 예비대에 있던 제16 보병 여단(여단장 시릴 로맥스)을 시디 바라니로 들어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보냈다. 시디 바라니는 8개의 요새에 두 개의 이탈리아 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각 요새는 대대가 방어했지만 방어선은 효과적인 지휘를 하기에는 너무 길었다.
12월 10일의 전진은 이탈리아군의 배치에 대한 불확실성, 혹독한 추위, 그리고 시야를 약 45.72m로 줄이는 먼지 폭풍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제16 여단은 포병과 제7 RTR(늦게 도착했다)을 기다리지 않고 오전 6시에 진격을 시작했지만 이탈리아 포병의 사격에 의해 격퇴당했다. 3시간 후, 두 개의 중포병 연대가 도착했을 때 제16 여단은 마틸다 전차 1개 소대, RAF 항공기, 왕립 해군 함선 및 포병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했다. 전투는 오전 내내 실질적인 진전 없이 계속되었고, 오후 1시 30분에 방어선 서쪽에 있는 두 개의 요새를 지키던 검은 셔츠단이 갑자기 항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단은 시디 바라니에서 남쪽과 서쪽 도로를 차단했다.
베레스포드피어스는 먼지 폭풍이 간헐적이고 영국군이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공격을 명령했다. 여단은 마지막 보병 전차, 추가 보병 대대, 그리고 제2 왕립 전차 연대 (제2 RTR)의 지원을 받아, 순항 전차와 경전차를 좌익에 두고 진격했다. 공격은 오후 4시 직후에 시작되었고, 사단 포병의 지원을 받았다. 약 5.63km를 진격한 후 먼지 폭풍이 잦아들자 보병이 하차했고 이탈리아 포병이 사격을 시작했다. 마지막 10대의 마틸다가 왼쪽으로 이동하여 주요 도로 남쪽의 시디 바라니 방어선의 서쪽 면으로 돌진한 다음 모래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이탈리아 포병의 탄약은 마틸다 전차에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포병들은 소총과 수류탄으로 싸웠지만 제압당했다.
공격은 mêlée프랑스어가 되었고, 오전 10시에 제16 여단이 진격을 시작했을 때 약 2,000명의 검은 셔츠단이 반격을 할 준비가 된 듯이 일어섰지만, 그들은 사기를 잃고 대신 항복했다. 두 시간 만에 항구 서쪽, 남쪽 일부, 그리고 포병선에서 첫 번째 목표가 점령되었다. 오후 6시까지, 검은 셔츠단 군단과 제1 리비아 사단의 잔존 세력이 지키고 있는 항구 동쪽의 4km 구역만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툼마르에서 해방된 증원군은 제16여단 서쪽에 도착하여 항구를 통과하며 진격하여 제1 리비아 사단, 제2 리비아 사단 및 제4 CC.NN. 사단 "3 겐나이오"의 잔여 병력을 셀비 부대에 가두었고, 사상자는 277명이었다. 셀비 부대는 제1 리비아 사단의 퇴각을 따라 마크틸라에서 시디 바라니까지 약 24.14km 이동했으며, 병력 일부를 해안 도로 북쪽의 모래 언덕으로 몰아넣었다. 제6 왕립 전차 연대(6th RTR)의 순항 전차들이 모래 폭풍 속에서 도착하여 오후 5시 15분경 모래 언덕에서 이탈리아군을 제압한 후 셀비 부대에 합류하여 추격을 계속했다. 이탈리아 방어군은 해안을 등지고 10× 규모의 포위망에 갇혔다. 12월 11일 새벽에 영국군이 다시 공격했을 때, 제2 리비아 사단의 제2 및 제16 대대 병력 2,000명이 Ras el Daiar로 알려진 포인트 90에서 12월 11일 이른 오후까지 저항한 것을 제외하고 대규모 항복이 시작되었다.
5. 후속 작전
12월 11일, 제7 기갑여단은 부크 부크 지역에서 제4 기갑여단을 지원하여 잔여 병력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고 예비대로부터 출동했다. 수많은 병력과 무기가 포획되었고, 제7 지원단 소속의 정찰대가 라비아에 진입했을 때, 제63 보병사단 "치레네"가 그곳과 소파피에서 밤새 철수했기 때문에 비어 있었다. 제4 기갑여단에게 그들을 차단하라는 명령이 너무 늦게 도착했고, 이탈리아군은 절벽 상단을 따라 할파야의 이탈리아 수비대로 후퇴했다. 절벽 꼭대기에 있던 제4 기갑여단과 해안에 있던 제7 기갑여단은 심각한 보급 문제, 특히 예상보다 20배나 많은 포로 수로 인해 더욱 악화된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을 추격하려 했지만 진격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시디 바라니와 부크 부크에서 후퇴하는 동안 이탈리아군은 해안 도로에 몰려 있었고, ''테러''와 두 척의 포격정에 의해 손쉬운 표적이 되어, 12월 11일 하루 종일과 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솔룸 지역을 폭격했다. 12월 12일 늦게까지 이집트에 남아 있던 이탈리아군 진지는 솔룸으로 가는 길목과 시디 오마르 인근에 있었고, 12월 15일에는 솔룸과 할파야 고개가 점령되었다. 영국군의 진격은 사막 남쪽의 이탈리아 수비대를 우회했다. 국경 철선 끝에서 내륙으로 약 64.37km 떨어진 포트 카푸초는 바르디아로 서쪽으로 진격하는 제7 기갑사단에 의해 앙파상(en passant)으로 점령되었다. 제7 기갑사단은 바르디아 남서쪽에 집결하여 제6 호주사단의 도착을 기다렸다.
6. 피해
12월 9일부터 11일까지 영국군은 시디바라니 전투에서 포로 38,300명, 야포 237문, 전차 73대, 차량 약 1,000대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영국군의 사상자는 624명이었다. 이탈리아군은 장교 47명과 사병 2,147명이 사망하고, 장교 78명과 사병 2,208명이 부상을 입는 피해를 입었다.
7. 전투 서열
컴파스 작전에 참여한 영국군과 이탈리아군의 부대 편성과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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