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동-과천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신사동-과천 전투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2일까지 서울 함락 이후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국군은 병력 열세와 장비 부족, 통신망 미비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신사리, 과천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 결과, 국군은 수원까지 후퇴했지만, 북한군의 한강선 돌파를 지연시켜 미군 증원 시간을 확보하고 국군 재정비 시간을 벌어주며 대한민국 존립에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과천시의 역사 - 과천군
과천군은 현재의 과천시 일대에 있었던 행정 구역으로, 백제 시대 동사힐현에서 시작하여 여러 차례 명칭 변경을 거쳐 조선 시대 과천현으로 개명되었고, 1895년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시흥군에 통합된 후 1986년 과천시로 부활하였다. - 과천시의 역사 - 제2경인고속도로 갈현고가교 화재
2022년 12월 29일 제2경인고속도로 갈현고가교 인근 방음터널에서 폐기물 집게 트럭 화재로 시작되어 차량 45대가 소실되는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 서울특별시의 역사 - 한성부
한성부는 조선의 수도를 관할하며 행정, 사법, 재정 등의 업무를 담당했고,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였으며, 1895년 지방 행정 구역으로 개편되었다가 1910년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 서울특별시의 역사 - 경성제국대학
경성제국대학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대한제국 최초의 제국대학으로,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시작으로 이공학부를 설치했으며,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 흡수 통합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참가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 인천 상륙 작전
인천 상륙 작전은 1950년 9월 15일 한국 전쟁 중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킨 작전으로,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으나 지형적 어려움, 서울 진격 속도, 민간인 피해 등에 대한 논란도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참가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 무극리 전투
무극리 전투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6일, 충청북도 음성군 무극리 일대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 제7연대가 북한군 제15사단을 상대로 벌여 국군이 육상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로, 북한군의 전략 수정에 영향을 주었다.
신사동-과천 전투 | |
---|---|
전투 정보 | |
분쟁 | 한국 전쟁 |
날짜 | 1950년 6월 28일 ~ 7월 3일 |
장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경기도 과천시 (당시 경기 광주군 언주면, 시흥군 과천면 일대)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대한민국 | 김홍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소장 이종찬 혼성수도사단장 대령 서종철 제8연대장 중령 이철원† 제1대대장 소령 고백규 제2대대장 소령 박태원 제3대대장 소령 박철용 제18연대 1대대장 소령 박무열 기갑연대 제1장갑대대장 소령 유재흥 혼성 제7사단장 준장 이희권 제1연대장 중령 강원래 혼성대대장 대위 윤춘근 제9연대장 중령 유항박 혼성대대장 소령 박기병 제20연대장 대령 김한주 혼성대대장 소령 배운용† 제25연대 혼성 2대대장 소령 이존일 제15연대 1대대장 소령 최병순 제3대대장 소령 임선하 혼성 제2사단장 대령 이한림 혼성 제2사단장 대령 (7월 1일부터) 최수창† 제3연대장 중령 임백진 제1대대장 소령 김봉익 제3대대장 소령 최창언 제5연대장 중령 박기성 제5연대장 중령 (7월 3일부터) 이경수 제1대대장 소령 차갑준 제2대대장 소령 문용채 제16연대장 대령 유의준 제1대대장 중령 윤태호 제2대대장 소령 유해준 보병학교혼성연대장 중령 하갑청 혼성대대장 중령 장철부 기갑연대 제2기병대대장 소령 이준식 혼성 제3사단장 준장 강태민 제22연대장 중령 황명 제1대대장 소령 김재규 제2대대장 소령 손영을 제3대대장 소령 김병경 제25연대장 중령 나희필 제2대대장 대위 고동기 제3대대장 대위 손관도 사관학교생도대장 소령 백선엽 제1사단장 대령 최경록 제11연대장 대령 김점곤 제12연대장 중령 김진위 제13연대장 대리 소령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김웅 제1군단장 중장 리영호 제3사단장 소장 김창봉 제7연대장 대좌 김병종 제8연대장 중좌 김만익 제9연대장 대좌 안백성 포병연대장 대좌 리권무 제4사단장 소장 최인덕 제5연대장 대좌 박승희 제16연대장 대좌 김희준 제18연대장 대좌 유경수 제105기갑여단장 소장 최광 제1사단장 소장 방호산 제6사단장 소장 이청송 제2사단장 소장 |
병력 규모 | |
대한민국 | 알 수 없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알 수 없음 |
사상자 규모 | |
대한민국 | 알 수 없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알 수 없음 |
2. 배경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의 서울 함락으로 국군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한강을 건너 철수하였다. 의정부 방면의 병력은 주로 광나루, 뚝섬, 한남동, 서빙고, 마포, 하중리(서강) 나루터를 통해, 문산 방면의 병력은 행주와 이산포 나루터에서 부선이나 작은 목선을 이용하여 강을 건넜다. 광나루를 거친 병력은 수원으로, 뚝섬과 한남동, 서빙고를 경유한 병력 일부는 시흥과 수원으로 나뉘었으며, 마포, 하중리, 행주로 건넌 병력 대부분은 시흥으로 집결하였다.
6월 28일 북한군의 서울 함락 이후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국군은 시흥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급히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한강 방어선 구축에 나섰다. 초기에는 임선하 대령의 혼성 제2사단을 중심으로 말죽거리(현 양재동)에서 양화교에 이르는 강변 지역 방어를 시도했으며, 특히 신사리와 과천 남태령 일대에 방어 거점을 마련했다.
철수 병력의 집결은 6월 28일 밤과 6월 29일 아침 사이에 대체로 마무리되었다. 이 동안 육군본부는 수원농업시험장에 새로운 지휘소를 마련하고, 6월 28일 낮에는 시흥에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전투사령부는 수습되는 병력을 부대 편성이나 병과에 관계없이 혼성부대로 편성하여 우선 노량진 부근에 투입,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임선하 대령의 혼성 제2사단, 유재흥 준장의 혼성 제7사단, 이종찬 대령의 혼성 수도사단이 각각 연대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으로 말죽거리부터 양화교에 이르는 한강 남쪽 강변을 나누어 맡아 임시방편으로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국군은 매우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병사들은 거듭된 철수로 극심한 피로 상태였고, 수습된 병력도 각 연대의 실병력이 대대 규모에 불과했다. 중장비는 대부분 한강 북쪽에 버려두고 와 공용화기도 연대당 박격포 2~3문과 기관총 5~6정이 전부였다. 더욱이 통신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부대 간의 협조는 물론 상하 지휘 체계도 원활하지 못해 각급 지휘관들은 전령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부대 자체가 급하게 편성된 혼성 부대였기 때문에 지휘관과 부하가 서로를 알지 못해 통솔이 어려웠고,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원래 소속 부대를 찾아가려는 경향마저 보였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국군은 점차 전열을 가다듬었다. 북한군 전차가 쉽게 한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미군의 지원에 대한 희망을 품고, 한강이라는 자연 방어선을 최대한 활용하여 오래 버티며 굳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3. 전투 과정
6월 29일에는 증원된 병력으로 방어선을 재편하여 말죽거리와 우면산-남태령 일대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의 도하에 대비했다. 이날 청담리 부근에서 소규모 도하를 시도한 북한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월 30일부터 북한군 제3사단이 한남동 일대에서 본격적인 도하 공격을 시작하면서 신사리의 기병대대 진지가 돌파되었고, 국군은 역습을 시도했으나 화력 부족으로 후퇴하며 방어선을 우면산-남태령 선으로 축소해야 했다.
7월 1일에는 정일권 소장이 육군 총참모장으로, 이한림 대령이 제2사단장으로 새로 부임하여 전열을 정비하고자 했으나, 7월 2일 새벽 북한군의 야간 공격으로 말죽거리 부근의 제5연대 진지가 돌파되면서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국군 제2사단은 과천-군포 도로 확보에 주력하며 한강선 주력 부대의 측면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작전 목표를 변경하게 되었다.
3. 1. 1950년 6월 28일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의 서울 함락으로 국군은 큰 혼란 속에서 한강을 건너 철수했다. 의정부 방면 병력은 주로 광나루, 뚝섬, 한남동, 서빙고, 마포 등에서, 문산 방면 병력은 행주, 이산포 등에서 부선이나 작은 목선을 이용해 도하했다. 철수 병력은 대부분 6월 28일 밤과 6월 29일 아침 사이에 수원과 시흥으로 집결했다.
같은 날 낮, 수원 농업시험장에 새로운 지휘소를 연 육군본부는 시흥에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시흥사령부는 수습되는 병력으로 부대 건제나 병과 구분 없이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우선 노량진 부근에 투입, 한강 방어선을 지키도록 했다. 이에 따라 임선하 대령의 혼성 제2사단, 유재흥 준장의 혼성 제7사단, 이종찬 대령의 혼성 수도사단이 각각 연대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으로 말죽거리(현 양재동)-양화교에 이르는 한강 남쪽 강변 방어를 급히 맡게 되었다.
그러나 거듭된 철수로 병사들은 극도로 피곤했고, 수습된 병력도 각 연대 실병력이 대대 규모에 불과했다. 중장비는 대부분 한강 이북에 버려두고 와 공용화기도 연대당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이 전부였다. 통신망 부재로 부대 간 협조는 물론 상하 지휘계통도 원활하지 못했으며, 혼성부대 특성상 지휘관과 부하가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흩어지는 경우도 잦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국군은 북한군 전차가 쉽게 도하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과 미군 지원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한강이라는 자연 방어선을 최대한 활용해 오래 버티며 굳게 지키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한편, 전날인 6월 27일 기갑연대장 유흥수 대령의 지시에 따라 장철부 소령이 이끄는 제2기병수색대대는 오후 2시경 한남동에서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도하 중 북한군 YAK기의 공습을 받았으나, 때마침 나타난 미 공군의 F-80 전투기가 공중전을 벌여 YAK기 1대를 말죽거리 부근 논에 격추시켰다. 제5중대 3소대장 김형식 소위 등이 추락 지점으로 가보니 조종사는 즉사했고, 중상을 입은 통신사는 함경남도 연포비행장에서 한강 교량 차단 임무를 띠고 출격했다고 진술했다. 기병대대는 기관총과 권총 각 1정, 낙하산 1착을 노획하고 대방동에 집결했으며, 그날 밤 한강대교 폭파 소리를 들었다.
6월 28일 오후, 김홍일 시흥사령관은 제2기병수색대대에 "말죽거리 부근에 수용진지를 점령하여 철수병력을 수습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기병대대가 과거 과천-말죽거리 일대 승마훈련장을 사용해 지형에 익숙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대대는 시흥-안양-과천을 거쳐 말죽거리 부근, 한남동 나루터를 마주보는 신사리 일대에 급히 진지를 구축하고 병력 수습에 나섰다.
같은 날 오후, 시흥사령관으로부터 혼성 제2사단장으로 임명된 보병학교 부교장 임선하 대령은 과천에 사단 지휘소를 설치하고 즉시 병력 수습과 사단 재편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사단의 원래 건제부대인 제5연대(최창언 대령), 제16연대(문용채 대령), 제25연대(김병휘 중령)는 대부분 수원으로 집결 중이거나 분산된 상태였다.
이에 임선하 사단장은 우선 강안에서 수습된 병력으로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다. 마침 한강대교 폭파 전에 다리를 건넌 제3연대장 이상근 중령이 서빙고 도하장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은 자기 연대 병력을 과천에서 수습하고 있었다. 부연대장 최수창 중령, 제3대대장 김붕상 소령 등이 이끄는 일부 병력이 실제로 과천에 집결했다. 임선하 사단장은 본래 수도경비사령부 소속이던 제3연대를 혼성 제2사단의 기간으로 삼고, 이들에게 과천 북쪽 우면산-관악산 사이의 요충지인 남태령 방어를 맡겼다. 이는 동작동-과천 간 도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상근 연대장은 과천에 집결한 병력으로 남태령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수원에 집결해 있던 제1대대(임백진 소령 지휘)를 과천으로 불러들였다. 제1대대는 6월 26일 밤 의정부 북쪽 금오동 부근 전투에서 연대 주력과 떨어져 양수리에서 한강을 건너는 등 우여곡절 끝에 6월 28일 오후 5시에 수원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렇게 제3연대는 과천 부근에서 약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수습하여 남태령 방어 준비에 들어갔다. 최전방인 신사리-매곡리 강변에서는 제2기병수색대대가 북한군의 도하 시도를 저지하고 있었다.
3. 2. 1950년 6월 29일
이날 대체로 방어편성을 끝냄으로써 한강 북안의 북한군과 대치태세를 이루게 되었다. 전날 밤 별다른 도발이 없는 가운데 날이 밝자,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은 곧 북한군의 도하공격이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병력증강을 모색한 결과 14:00에 시흥사령부에서 급편한 유해준 중령이 이끄는 보병학교 연대의 증원을 받게 되었다.
이 연대는 6월 25일에 문산으로 출동한 교도연대와 6월 26일에 김포로 급파된 후보생대대 중 전날과 이날 아침에 동교에 철수, 집결한 일부를 재수습하여 동교 교관인 임원석, 백운용, 권정식, 황석규 대위 등을 중대장으로, 하갑청 중령을 대대장으로 하는 1개 대대로 재편한 것으로서 연대라고 호칭되었으나 실병력은 대대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 무렵, 전날 수원에 집결한 제16연대는 유의준 중령과 윤태호 소령을 대대장으로 하는 2개 대대로 재편하였는데, 이날 사단장의 요청에 따라 육군본부는 이 연대를 사단의 지휘 하에 들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동 연대는 수원의 집결지에서 과천으로 달리게 되어, 이 역시 14:00 전후에 사단지휘소에 당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단의 골격이 대강 갖추어지자, 사단장은 전반적인 진지재편을 단행하여 남태령 부근의 제 3연대를 말죽거리 정면으로 돌려 우일선으로 삼고, 제16연대를 우면산-남태령으로 추진하여 좌일선으로 삼았으며 보교연대를 과천에 예비로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제 3연대는 부연대장 최수창 중령이 연대를 지휘하는 가운데 말죽거리 정면으로 이동하여 역삼리(말죽거리 북쪽 2.5km) 부근이 87고지 일대의 고지대에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그 북쪽의 신사리 부근에 위치한 기병대대와 함께 한남동 나루터로부터 말죽거리-판교를 거쳐 도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막게 되었다.
그리고 제16연대는 우면산-남태령에 주진지를 펴고, 그 북쪽 매곡리부근의 86고지-101고지 일대에 경계진지를 마련하여 동작동에서 과천과 군포를 거쳐 경부국도와 연결되는 도로를 사수하게 되었다.
이렇듯 사단이 방어진용을 새로이 가다듬는 동안, 신사리 부근에 수색거점을 두고 있던 장철부 소령이 이끄는 기병대대는 6월 26일에 김포로 출동한 김촌성 중위가 이끄는 임시 제7중대의 2개 소대가 전날 밤에 안양을 거쳐 과천에 집결함으로써 이날 오후에 본대와 합세케 되어 다소의 전력증강을 보게 되었다.
이에 대대는 종일토록 강안을 부단히 기마로 적정을 수집하였는데 해가 질 무렵에 박익균 중위가 이끄는 제3중대의 제 3소대가 청담리(신사리 동쪽 2km)부근에서, 뚝섬쪽으로부터 거룻배로 도하한 1개 소대규모를 포착한 바 북한군과 접안하여 하선하는 틈을 노려 소대장 조돈철 소위를 선두로 기마돌격을 감행함으로써 모조리 강물 속에 쓸어 넣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강 남안에 대한 북한군의 도하기도가 점차 노골화되는 가운데, 강 건너 한남동에 있는 대대의 병사가 적수에 들어가 그들의 조도기지로 이용되고 있음이 밝혀졌는데,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한 대대 장병들은 야음을 타서 60mm 박격포 6문을 사거리가 미칠 수 있는 강변사장으로 추진하여 22:00에 북한군이 점거한 대대본부 진지를 목표로 포탄 60여 발을 집중한 바, 한동안 화광이 하늘을 대낮같이 밝히더니 이윽고 흑연이 어둠을 더욱 짙게 뒤덮는 것이었다.
3. 3. 1950년 6월 30일
아침부터 말죽거리 정면으로 북한군의 도하 공격이 본격화되었고, 08:00부터 한강의 한남동-이촌동 부근에서 리영호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3사단이 예하 제8연대(김병종 중좌 지휘)를 앞세워 도하 공격을 시작하였다. 북한군은 일부 병력으로 동작동-흑석동 능선으로 도하하여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9연대의 주의를 끌고, 다른 일부는 서빙고에서 강 건너 매곡리 부근의 제16연대 경계진지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주력은 한남동에서 신사리를 직접 공격하여 말죽거리 도로 돌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북한군은 남산 기슭에 배치된 포병으로 신사리 부근의 기병대대 진지를 강타하며 화력의 우위를 보였고, 10:00경에는 20~30명씩 나눠 탄 나룻배로 도하하여 기병대대 정면으로 공격해왔다. 또한, 이날 새벽 이미 강을 건넌 것으로 보이는 북한군 선견대가 반포리(신사리 서남쪽 1.5km) 부근 야산에 확보한 거점에서 주력 도하 부대에 호응하며 기병대대의 서쪽 측면을 위협했다.
이로 인해 기병대대가 가장 먼저 북한군과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제6중대장이었던 박익균 중위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전투가 벌어지자, 적이 언제 숨어들었는지 기관총으로 우리의 좌측방을 위협하는 가운데, 배들이 강을 건너 남안으로 올라붙었는데, 적의 치열한 포들에 말이 먼저 놀라 (이때까지 병사의 승마 훈련만 끝났을 뿐, 말 자체는 전투소음에 대한 음향훈련이 되어있지 않아, 포성과 포탄의 파편에 동요되었던 것으로)고삐를 풀고 달아나고 말았다. 말을 붙잡으랴, 적을 막아내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도무지 싸움이 되지 않았다. 전투가 그 모양으로 얼켜들자 김포지구에 출동하였다가 돌아 온 최영화 소위는 분기가 치솟아 홀로 적중으로 돌격을 감행하여 장렬히 전사하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그때에 달아난 말들이 귀소본능에 따라 한강을 헤엄쳐서 한남동으로 가는 데에는 정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말이 적진으로 향하였으나 차마 총으로 쏘아 죽이지는 못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내 말이 당시 한남동의 연대본부 근처에 있던 내 집으로 찾아가, 미처 피난하지 못한 집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기병대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났고, 이 과정에서 말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정오 무렵, 기병대대는 군포장으로 집결하여 부대를 재정비하게 되었다.
한편, 역삼리 부근에 있던 최수창 중령의 제3연대는 기병대대 진지가 돌파되자 역습을 감행했다. 임백진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선두로 신사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먼저 도착해 있던 북한군 선견대 1개 중대 병력을 격멸했다. 또한 뒤따르던 북한군 일부를 강변으로 몰아내고, 부선으로 도하 중이던 76mm 포 5문과 장갑차 등 지원 장비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분전에도 불구하고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사단장 임선하 대령은 16:00경 수원에서 증원된 최창언 중령의 제5연대에게 말죽거리 동쪽의 95고지와 서쪽의 우면산 진지를 잇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명령하고, 제3연대는 과천으로 이동시켰다. 제5연대는 6월 28일 낮 광나루에서 도하하여 천호동 부근에서 후퇴 병력을 수습하다가 6월 29일 수원에 집결한 부대로, 본래 영등포 전선 증원 예정이었으나 수원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로써 수도사단은 제5연대와 제16연대로 95고지-우면산-남태령 선에서 방어 태세를 재정비하게 되었다. 이 무렵 매곡리 부근의 제16연대 경계 병력도 우면산의 주 진지로 철수하였다.
3. 4. 1950년 7월 1일
이날 육군본부에서는 채병덕 소장이 총참모장 직에서 물러나고, 미국에서 귀국한 전 참모부장 정일권 소장이 신임 총참모장으로 취임하여 한강선 방어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전날 제3연대는 과천 방면으로 물러났고, 제16연대는 우면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어선을 급히 편성했다. 이날 새벽, 제16연대 수색중대(중대장 양수철 중위) 75명은 제5연대와 제16연대의 경계 지역인 말죽거리로 나아가 도로를 경계했다.
이 수색대는 새벽 어둠 속에서 북한군 보급 차량으로 보이는 차량 5대가 말죽거리-시흥리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것을 발견하고 급습했다. 그 결과 북한군 군관 4명을 포로로 잡고 차량을 노획했다. 이 차량들은 한강 이북에서 나룻배로 건너온 것으로, 원래 국군이 버리고 간 차량이었으며, 적재물 역시 국군의 건빵 등 비상식량이었다. 이 사건은 북한군 일부가 이미 전날 밤 국군 제5연대의 방어선을 뚫고 말죽거리를 지나 판교 방면으로 침투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러한 후방 침투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북한군 주력의 도하를 막기 위해 낮 동안 95고지-우면산 진지를 계속 지켰다.
한편, 새로 군 지휘를 맡은 정일권 총참모장은 수원 동북쪽으로 접근하는 북한군의 위협을 분석한 결과, 이 위협 제거가 말죽거리 정면에서의 북한군 도하 저지에 달려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사관학교 부교장이던 이한림 대령을 제2사단장으로 임명하고, 기존 사단장 임선하 대령은 한미 연락 업무를 위해 한미연락장교단장으로 전보 조치했다.
이한림 대령은 오후에 부관 전승철 소위만 데리고 지프차로 금곡리에서 과천으로 출발했으나, 도중에 미 공군기의 기총사격을 받아 부관 전승철 소위가 전사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저녁 6시에 사단 지휘소에 도착하여 임선하 대령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한 즉시, 야간에 있을 북한군의 도하를 예상하고 일선 진지를 순시하며 방어선 사수를 독려했다.
3. 5. 1950년 7월 2일
이날 노량진-영등포 부근의 한강선은 국군이 비교적 잘 지켜내고 있었지만, 말죽거리(현 양재동) 정면에서는 전황이 크게 악화되고 있었다.
전날 저녁, 새로 부임한 제2사단장 이한림 대령의 예측대로, 밤이 깊어지자 야음을 틈탄 북한군 일부가 신사리 부근에서 한강을 건너와 말죽거리 부근의 제5연대 진지를 돌파하려 시도했다. 95고지를 중심으로 진지를 구축한 제5연대는 이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의 공세는 매우 거세어 연대 진지를 포위하고 돌격해왔고, 연대장 최창언 중령과 제2대대장 차갑준 소령 등은 수류탄을 터뜨리며 북한군과 치열한 근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새벽이 되자 북한군의 공격은 더욱 격렬해졌고, 결국 연대장 최창언 중령이 다리에 부상을 입고 쓰러지면서 제5연대는 진지를 유지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연대는 과천으로 후퇴하여 병력을 수습했고, 부상당한 연대장은 수원-대전으로 후송되었다. 이로 인해 말죽거리-시흥리 간의 도로는 북한군에게 열리게 되었다.
한편, 이한림 사단장은 전날 밤 제5연대가 공격받자 예비대로 있던 유해준 중령의 보병학교 교도연대(보교연대)를 옥안봉(373고지, 말죽거리 남쪽 5km) 북쪽 기슭의 194고지(말죽거리 남쪽 3.5km)로 투입하여, 북한군의 예상 침투로인 말죽거리-시흥리 도로를 방어하도록 조치했다.
보교연대는 말죽거리 상공의 교전 불빛을 보며 과천-말죽거리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고, 이날 새벽 목표인 193고지 동쪽에 도착했다. 이때 마침 시흥리 쪽으로 남동진하는 북한군 차량 행렬을 발견했다. 이 행렬은 앞뒤로 장갑차의 엄호를 받는 트럭 30여 대로 이루어진 보급품 수송대였다. 이를 통해 전날 밤 제5연대 진지를 돌파한 북한군 보병 일부가 이미 시흥리 쪽으로 지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보교연대는 즉시 60mm 박격포로 선두와 후미의 장갑차를 격파하여 행렬의 이동을 막은 뒤,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차량을 모두 버리고 길 건너 평촌 마을로 도주했다. 보교연대는 마을을 포위하고 수색전을 벌여 북한군 2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북한군 차량을 모두 파괴하고 193고지로 돌아와 급히 진지를 구축했다. 낮 동안에는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미 공군기의 오인 공격 위협 때문에 종일 대기했지만, 해가 뜬 뒤로는 더 이상 북한군의 움직임은 없었다.
이처럼 북한군 일부가 금곡리 방면으로 증원된 것이 분명해지자, 이한림 사단장은 보교연대에게 193고지 부근에서 시흥리로 향하는 도로를 계속 지키도록 하는 한편, 제16연대로 우면산 진지를 고수하게 하여 우선 과천 정면으로의 북한군 공격을 막도록 했다. 또한 6월 29일 말죽거리 부근에서 철수한 제3연대를 과천 동남쪽 348고지 서북쪽에 배치했다.
이는 말죽거리-금곡리 축선상의 북한군에 대한 대응은 이준식 준장이 이끄는 제3사단에 맡기고, 제2사단은 과천-군포 도로를 확보하여 당시 한강선에서 전투 중이던 시흥사령부 주력의 측면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기로 방침을 변경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따라 제2사단은 오후에 지휘소를 과천에서 군포로 옮기고, 제5연대의 부대 수습에 힘썼다.
4. 결과 및 영향
7월 4일 수원마저 북한군에게 넘어가면서 국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국군의 입장에서 이 전투는 북한군 격멸보다는 미군 증원과 국군 재정비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따라서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의 지연전은 이후 반격의 실마리를 마련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반면, 북한군은 한강 방어선 돌파에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지연되면서 초기 작전 계획에 큰 차질을 빚었다. 당초 목표했던 수원 북방에서의 국군 주력 격멸과 미군 참전 전 조기 돌파 계획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는 북한 스스로 전쟁 목표 달성 실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분석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신사동-과천 전투를 포함한 한강 방어선 전투는 단순한 패배나 후퇴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해 결정적인 시간을 확보한 중요한 방어 작전으로 평가받는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