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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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건빵은 밀가루에 효모를 첨가하여 구워 만든 과자 종류로, 비상식량이나 보존식으로 널리 사용된다. 수분 함량이 적어 보존성이 뛰어나며, 군대에서 전투식량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건빵은 유럽에서 기원하여,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에 군용 비스킷을 개량하여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이후 이순택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현재는 군대, 자위대에서 비상용 식량으로 사용되며, 별사탕과 함께 제공되기도 한다.
밀가루에 효모를 첨가하여 오랜 시간 발효시킨 뒤 섭씨 150도 정도의 고온으로 굽는다. 이 과정에서 수분은 거의 다 증발한다. 깨나 흑미, 현미 등을 첨가한 경우도 있다.[1] 밀가루, 설탕, 식염, 쇼트닝 등에 이스트를 더하여 발효시킨 후, 140-150℃에서 굽는 방식으로 제조한다.[6] 영양가를 높이고 식미를 향상시키기 위해, 검은 참깨를 첨가하는 경우도 있다.[6]
건빵은 비상식이나 보존식으로 주로 이용된다. 한 입 크기와 적은 수분 덕분에 휴대와 보관이 용이하며, 담백한 맛으로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전투식량으로 적합하여 한국군에서는 건빵을 증식 및 전투식량으로 보급하고 있다. 2010년부터는 쌀가루를 첨가한 쌀건빵을, 2018년 하반기부터는 야채건빵과 참깨건빵을 보급하여 장병들의 선호도를 높였다.[1]
건빵은 현재 비상 식량 외에도 군대나 등산객의 휴대 식량으로 사용된다. 함수량이 적어 저장성이 뛰어나며, 특히 저온에서도 변함없는 상태를 유지하므로 한랭지에서 중요한 식량이 된다.
2. 제조과정
3. 활용
건빵의 기원은 고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에는 비상 식량 외에도 군대나 등산객의 휴대 식량으로 사용된다. 낮은 함수량 덕분에 저장성이 뛰어나며, 특히 저온에서도 상태 변화가 적어 한랭지에서 유용한 식량이 된다.
일본에서 건빵은 1842년 에가와 타로자에몬이 비상시를 대비한 휴대 식량으로 빵을 굽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메이지 시대 대일본제국 육군은 구미의 군용 비스킷을 개량하여 휴대 식량으로 사용했으며, 초기에는 "중소면포"라고 불렸다. 이후 "건면포"를 거쳐 쇼와 시대에 현재와 같은 소형 건빵으로 개량되면서 "건빵"이라는 명칭이 정착되었다.
1877년 서남 전쟁 당시 해군의 전투 식량이었던 "하드 비스킷"을 참고하여 건빵이 비상 식량으로 채택되었다. 1890년에는 고기 건빵이 시험되었으나, 일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아 채택되지 않았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는 소형화된 건빵이 사용되었으며, 1904년 러일 전쟁에서는 취반과 중소면빵이 함께 사용되었다. 러일 전쟁 후, 중소면빵은 건빵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칭다오 요새 공략전에서 개량된 건빵이 사용되었다.
1931년에는 독일군 식량을 참고하여 건빵이 소형화되었고, 별사탕이 동봉되었다. 1938년에는 건빵 220g과 별사탕 10g을 면 봉투에 포장하는 방식이 규정되었다.
자위대는 대형과 소형 두 종류의 건빵을 비상 식량으로 사용한다. 해상자위대는 15개의 침공이 있는 대형 건빵을, 육상자위대와 항공자위대는 2개의 바늘 구멍이 있는 소형 건빵을 채용하고 있다.
3. 1. 별사탕
건빵은 많이 먹으면 목이 메어 불쾌할 수 있는데, 이럴 때 별사탕을 함께 먹으면 좋다. 별사탕은 보통 건빵 봉지 안에 작은 봉지에 싸여 함께 들어 있지만, 모든 건빵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군용 건빵의 별사탕에 정력감퇴제가 들어 있다는 속설이 있지만, 국방부는 과거 별사탕 제조 기술이 부족했을 때 좁쌀을 넣어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밝혔다.
현재는 기술 발전으로 100% 설탕만으로 별사탕을 만든다고 한다.
3. 2. 건푸로스트
한국 군대에서는 배급받은 우유와 건빵을 이용해 '건푸로스트'라는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어원은 콘푸로스트+건빵이다. 건푸로스트는 우유에 잘게 부순 건빵과 별사탕을 넣어 섞어 먹는 음식으로, 현재 군대 대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1]
4. 역사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포장을 통조림으로 만든 제품도 있다. 통조림 제품에는 당분 보충 및 타액 분비 촉진을 위해 빙설탕이나 별사탕이 들어 있기도 하다. 건빵은 밀가루, 설탕, 식염, 쇼트닝 등에 이스트를 더해 발효시킨 후 140-150℃에서 굽는다. 수분이 적어 처음에는 딱딱하고 맛이 없는 비스킷 같지만, 잘 씹으면 밀의 고소함과 단맛이 난다. 영양과 식감을 높이기 위해 검은 참깨를 넣기도 한다.
비상 식량용 건빵에는 평균 2.3% 정도의 벤토나이트가 첨가되어 팽윤성(수분을 포함하면 부피가 증가하는 성질)을 갖게 하여 포만감을 지속시킨다. 벤토나이트는 규조토와 함께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성 축성 시 농성에 대비하여 토란 줄기와 함께 비상 식량용 토벽으로 이용했다.
건빵은 기아, 대재해, 전쟁 피해를 입은 국가나 지역에 긴급 원조 물자로 보내지기도 한다. 연료나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조리 없이 섭취할 수 있어 유용하지만, 상황이 심각하지 않은 경우에는 맛 때문에 불평을 듣기도 한다.
4. 1. 기원
건빵의 기원은 오래되어, 유럽에서는 로마 시대에 군량으로 지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에서 건빵의 시조는 1842년(덴포 13년), 이즈 니라야마 다이칸 에가와 타로자에몬 탄안 공이 비상시에 대비하여 보존 가능한 군용 휴대 식량으로 빵을 굽기 시작한 것이다. 외국 문화 도입에 열심이었던 당시, 미토번은 "병량환", 조슈번은 "비급병", 사쓰마번은 "증병"이라는 군용 빵을 만들어 비상시에 대비했다.
메이지 시대의 대일본제국 육군은 구미의 군용 비스킷을 개량하여 휴대 구량으로 "중소면포(重焼麺麭, 쥬쇼멘포, 중소=〈횟수를〉'''중'''첩해서 '''구'''운, 면포=빵, 즉 비스킷을 의미)"라고 불렀다. 한 장의 크기는 뒤에서 설명할 대형 건빵 정도였다. 후에 "건면포(かんめんぽう, 건조시킨 빵)"라고 불렸고, 쇼와 시대에는 더욱 개량되어 맛과 모양 모두 현재의 소형 건빵과 다를 바 없게 되었으며, 명칭도 "건빵"이 되었다.
4. 2. 일본
19세기 일본의 개화기 때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빵, 비스킷과 함께 전투식량도 전해졌다.[1] 1904년 일본은 전투식량용으로 딱딱한 비스킷을 개발하여 '중소면포(重焼麺麭|じゅうしょうめんぽう일본어)'라 불렀는데, 이는 여러 번 구운 빵이라는 뜻이다. 이후 '건면포(乾麺麭|일본어)'로 불리다가 건빵(乾パン|かんパン일본어)으로 불리게 되었다. 초기 건빵은 크기가 컸으나, 현재와 같은 작은 크기로 변하고 별사탕이 들어가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1]
일본 건빵의 시초는 1842년 이즈 니라야마 다이칸 에가와 타로자에몬 탄안 공이 비상시 대비 휴대 식량으로 빵을 굽기 시작한 것이다. 미토번은 "병량환", 조슈번은 "비급병", 사쓰마번은 "증병"이라는 군용 빵을 만들어 비상시에 대비했다.
메이지 시대 대일본제국 육군은 서양 군용 비스킷을 개량한 휴대 식량인 "중소면포"를 만들었다. 이는 후에 "건면포"로 불렸고, 쇼와 시대에 맛과 모양이 현재 소형 건빵과 비슷하게 개량되면서 "건빵"이라는 명칭과 호칭이 정착되었다.[1]
1877년 서남 전쟁 때 해군 전투식량이었던 "하드 비스킷"을 참고하여 건빵이 비상 식량으로 채택되었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는 중국 대륙의 물 부족 상황을 고려하여 물이 필요한 취반 대신 소형화된 건빵이 사용되었다.[2] 1904년 러일 전쟁 중에는 취반과 중소면빵이 모두 사용되었으나,[3] 전쟁 후 중소면빵은 중상(重傷)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건빵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다이쇼 시대에는 건빵 제조법이 정리되고, 군 지정 민간 회사도 건빵 생산에 참여했다. 1931년에는 독일군 식량을 참고하여 건빵이 소형화되고 별사탕이 동봉되었다.[6] 1938년에는 건빵 220g과 별사탕 10g을 면 봉투에 포장하는 방식이 규정되었다.[7]
4. 3. 한국
1940년경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많았는데 제빵업, 과자를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그 공장에 취직했다가 기계의 공정을 파악하고 과자를 만드는데에 관심이 있었던 이순택이란 한국 사람이 일본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웠는데 해방 후에는 일본인들이 모두 다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순택이라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 기계를 다루거나 과자를 만드는 공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기계를 혼자 다룰 수 있었던 이순택은 그것을 바탕으로 건빵이라는 과자를 만들어 냈다. 당시엔 먹을 것이 부족하였고 과자도 마땅한 것이 없었기에 건빵이라는 과자는 성공적으로 팔렸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이 침입하였을 때, 서울에 공장이 있어 미쳐 도망가지 못한 이순택은 인민군의 협박 아래 건빵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건빵이라는 식량을 댔다. 그러다가 건빵 공장이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서지게 되었고 이순택은 그것을 기회 삼아 도망쳐서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부산에서 이순택은 다시 건빵 사업을 하였고 주로 대한민국 국군에게 납품하였다. 기반을 마련하여 휴전을 하자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 크게 건빵사업을 하였고 그 공장에서 배운 후계자들이 제빵, 제과업체(대표적으로 해태제과)에서 건빵을 대중화하였다.
5. 현대적 이용
현대에 들어 건빵은 비상 식량으로 사용되는 것 외에도 군대나 등산객의 휴대 식량으로 사용된다. 함수량이 적어 저장성이 뛰어나며, 특히 많은 식료품이 동결되는 저온에서도 평상시와 거의 변함없는 상태를 유지하므로 한랭지에서 중요한 식량이 되고 있다. 포장을 통조림으로 하여 보존성을 더욱 높인 제품도 있으며, 통조림 제품에는 당분 보충 및 타액 분비 촉진을 위해 빙설탕이나 별사탕이 동봉되기도 한다.[1]
건빵은 밀가루, 설탕, 식염, 쇼트닝 등에 이스트를 더하여 발효시킨 후 140-150℃에서 굽는다. 수분이 적어 처음에는 딱딱하고 맛이 없는 비스킷 같지만, 잘 씹으면 밀의 고소함과 단맛이 퍼진다. 영양가와 식미 향상을 위해 검은 참깨를 첨가하기도 한다. 비상 식량용 건빵에는 평균 2.3% 정도의 벤토나이트가 첨가되어 포만감을 지속시켜 주기도 한다.[1]
1931년에는 독일군 식량의 하드 비스킷을 참고하여 건빵을 소형화하고 1식에 225g의 건빵과 별사탕을 동봉하였다. 1934년 당시 건빵 가격은 1식분 15전이었다.[6] 1938년에는 건빵 220g과 별사탕 10g을 면 봉투에 포장하고, 이를 다시 양철 상자에 66식씩 넣어 밀봉한 후 나무 상자에 넣는 방식으로 포장 규정이 정해졌다.[7]
자위대에서는 비상용 식량으로 대형과 소형 두 종류의 건빵을 사용한다. 해상자위대는 표면에 15개의 침공이 있는 대형 건빵을 채용하며, 10개 1포장으로 1식을 구성하고 튜브형 오렌지 스프레드를 함께 배포한다. 육상자위대와 항공자위대는 표면에 2개의 바늘 구멍이 있는 소형 건빵을 채용한다.
육상자위대의 전투 식량 I형 No.1에서는 건빵 150g과 금 평당 15g을 주식으로, 오렌지 스프레드 및 소시지 캔을 부식으로 하여 1인분을 구성한다. 전투 식량 II형에서는 건빵 150g과 금 평당 15g을 주식으로 하고 부식으로 소시지와 참치 샐러드 75g을 제공한다.
참조
[1]
서적
戦場の衣食住
[2]
서적
戦場の衣食住
[3]
서적
戦場の衣食住
[4]
서적
戦場の衣食住
[5]
서적
戦場の衣食住
[6]
서적
戦場の衣食住
[7]
서적
戦場の衣食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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