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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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응균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전직하여 '한국 포병의 아버지'로 불린 인물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미군정 시기 국군 포병 병과를 창설했다. 이후 주 터키 대사, 국방부차관, 주 서독 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5.16 군사 정변에 가담했다. 외교안보연구원 원장, 국방과학연구소 초대 소장 등을 지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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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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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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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신응균 |
본관 | 평산(平山) |
별명 | 호(號): 고운(孤雲) |
일본식 이름 | 히라야마 가쓰토시(平山勝敏) |
출생일 | 1921년 1월 22일 |
태어난 곳 |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
사망일 | 1996년 3월 25일 |
죽은 곳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종교 | 불교 |
군 복무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0년 ~ 1959년 |
최종 계급 | 일본 제국 육군 소좌 대한민국 육군 중장 |
근무 | 육군 포병사령부 |
지휘 | 육군 포병사령관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가족 | |
배우자 | 유정희 |
기타 이력 | |
기타 이력 | 국방과학연구소 소장 |
2. 생애
일본군 장교였던 신태영의 아들로 태어났다.[11]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3기로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종전 당시 계급은 육군 소좌였으며, 1946년 대한민국으로 귀국했다.[12]
해방 후 미군정 시기에 대한민국 국군에 합류하여 포병사령부를 창설하는 등 국군 포병 병과 창설에 크게 기여하여 '한국 포병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13] 한국 전쟁 당시 제1야전포병사령관을 지냈으며, 이후 제3사단장,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 등을 역임했다. 1951년 미국 포병학교, 1957년 미국 육군참모학교를 졸업하는 등 군사적 전문성을 쌓았다.[13]
195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주 터키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4·19 혁명 이후 사임했다.[14] 장면 정부 시기인 1960년 11월 국방부 차관보에 임명되었고[15], 이듬해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정변 세력에 가담하여 국방부 차관, 주 서독 대사 등을 지냈다.[16] 이후 외교안보연구원 원장(1965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소장(1966년)을 거쳐 1970년에는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을 맡았다. 1976년에는 한국경영과학회의 전신인 운영과학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아버지 신태영과 함께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8]
2. 1. 일제강점기 군 복무
일본군 장교인 신태영의 아들로,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 태어났다.[11] 아버지는 당시 일본 제국 육군 소좌였다.1940년 2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3기로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그의 동기생 중에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도가시키섬 수비대장 赤松嘉次|아카마쓰 요시쓰구일본어와 자마미섬 수비대장 梅澤裕|우메자와 유타카일본어 등이 있었다. 이후 육군과학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여 고등 군사 기술을 익혔고, 1943년 8월에는 육군중포병학교 교도대에서 근무했다. 같은 해 12월, 포병 대위로 진급했다.
태평양 전쟁 중인 1944년 6월, 독립중포병 제100대대 소속 소대장으로 동원되어 일본 제국 육군 제32군 (일본군)에 배속되었다. 7월 21일 오키나와섬에 도착하여 国頭|구니가미일본어 부대에 파견되었고, 12월에는 제1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부대(히라야마 부대)는 본토 반도에서 이에섬 비행장을 포격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실제 포격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포가 파괴되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자, 신응균은 제24사단 (일본군) 예하 독립중포병 제100대대의 임시 편성 부대(히라야마 부대)를 이끌고 본부 반도에서 이에섬 비행장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4월 11일 미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신응균은 포격을 건의했으나, 상급 지휘관인 宇土|우토일본어 지대장이 이를 거절했다. 결국 중포는 한 번도 사용되지 못했다. 4월 16일, 우토 지대장은 유격전을 위해 타노다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신응균의 부대는 4월 19일 타노다케에 도착하여 다른 부대와 합류했다. 4월 21일에는 유격전 계획을 제안했으나[1], 4월 23일 미군의 추격으로 24일에는 구니가미 동해안의 아하 지역으로 후퇴했다. 4월 28일에는 나이후쿠치에서 미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1945년 6월 10일, 그는 육군 소좌로 진급했으나, 이후 사령부와의 연락은 두절되었고 6월 23일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牛島満|우시지마 미쓰루일본어) 중장이 자결하면서 오키나와에서의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종전 후인 1945년 6월경, 신응균은 부하 6명과 함께 이세나섬으로 건너갔다. 이 섬에서 패잔병들은 한동안 섬을 장악했으며, 이 과정에서 주민 키나 마사아키가 스파이 혐의로 신응균 부대에게 살해되었다는 유족의 증언이 있다.[2] 당시 이세나섬에는 육군 나카노 학교 출신 특무 공작원, 주재원, 다른 패잔병 등 여러 세력이 뒤섞여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민 증언에 따르면, 신응균 부대는 종전 후에도 '군 당국' 행세를 하며 주민 학살과 포로 학살에 가담했다는 주장이 있다. 1946년 1월, 미군 정보기관이 섬에 도착하기 직전 요론섬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구치노에라부섬 인근에서 특무 공작원 등과 함께 체포되어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3] 당시 포로 수용소에서는 한국인과 오키나와인이 일본인과 분리 수용되었는데, 신응균은 한국인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국으로 송환된 것으로 추정된다.[12]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군 부문에 아버지 신태영과 함께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이 올랐다.
2. 2. 대한민국 군 복무
1946년 일본에서 귀국한 후[12] 미군정 시기에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여 장교가 되었다. 국군 창설 초기에 포병사령부를 설치하는 등 포병 병과를 개척하여 '한국 포병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 시기 포병사령관으로서 일본육군사관학교 후배인 박정희의 상관이기도 했다.[13]주요 군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59년 중장으로 예편한 뒤 주 터키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4·19 혁명 이후인 1960년 9월 1일 사임하였다.[14] 같은 해 11월 30일 장면 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에 임명되었다.[15] 국방부 차관보로 재직하던 중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정변 성공 후 이에 가담하여 1961년 국방부 차관에 임명되었다.
2. 3. 외교 및 과학기술 분야 활동
195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외교 및 과학기술 분야에서 활동했다.1959년 주 터키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4·19 혁명 이후인 1960년 9월 1일 사표가 수리되었다.[14] 같은 해 11월 30일, 장면 정부 하에서 국방부 차관보에 임명되었다.[15]
국방부 차관보 재직 중 5·16 군사 정변이 발생했으며, 정변 성공 후 정변 세력에 가담하였다. 1961년 국방부 차관으로 승진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주 서독 대사로 임명되었다. 1961년 7월 29일, 서독의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16]
1963년 7월,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기 위해 주 서독 대사직에서 물러나 본부 대기대사가 되었으며, 후임으로는 전 외무부 장관 최덕신이 임명되었다.[17]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특별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다음과 같은 직책을 역임하며 과학기술 분야 발전에 기여했다.
3. 논란 및 비판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특히 오키나와 전투 당시와 종전 후 이세나섬에서의 행적과 관련하여 여러 논란이 있다.[1][2][3] 또한 박정희 등이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8]
3. 1. 친일반민족행위 논란
일본군 장교였던 신태영의 아들로 태어났다.[11]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3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으며, 1943년에는 육군포공학교를 졸업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에는 중포부대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종전 당시 계급은 육군 소좌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주둔지였던 오키나와섬 산 속에 숨어 지내다가 1946년에야 한국으로 돌아왔다.[12]오키나와 전투 당시, 신응균은 제24사단 산하 독립중포병 제100대대 임시편성 부대(통칭 히라야마 부대)의 포병대대장으로, 본부 반도에서 이에섬 비행장 방어 임무를 맡았다.[1] 1945년 4월 11일 미군이 공격을 시작했을 때 신응균은 포격을 건의했으나, 직속상관인 우토 지대장은 이를 거절했고 이후 중포는 한 번도 발사되지 않았다. 부대는 미군의 공격으로 후퇴를 거듭했으며, 4월 16일에는 유격전을 위해 타노다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4월 19일 타노다케에 도착한 신응균은 다른 부대장과 함께 유격전 계획을 제안했으나[1], 4월 23일 미군의 추격으로 다시 동해안의 아하로 후퇴했다. 4월 28일에는 나이후쿠치에서 미군과 교전 후 아하의 국민학교에 도착했다. 6월 10일 육군 소좌로 진급했으나, 이후 사령부와의 연락은 두절되었고 6월 23일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츠루 중장이 자결했다.
1945년 6월경, 신응균은 부하 6명과 함께 이세나섬으로 건너갔다. 종전 후에도 이들 패잔병들은 섬을 장악했으며, 이 과정에서 군에 스파이 혐의를 받은 주민 키나 마사아키가 히라야마 부대장(신응균)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유족의 증언이 있다.[2] 당시 섬에는 신응균 외에도 육군 나카노 학교 출신 특무 공작원, 주재원, 다른 패잔병, 현지 청년단 등 여러 세력이 뒤섞여 있었다. 주민 증언에 따르면, 종전 후에도 "군 당국"으로 행세하며 주민 학살과 포로 학살에 가담한 히라야마 부대는 1946년 1월 미군 정보기관이 섬에 도착하기 직전 요론섬으로 탈출했으나, 결국 구치노에라부섬 근처에서 특무기관원, 신응균과 그의 아내(이세나섬에서 결혼) 등이 체포되어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3] 신응균은 한국인 수용소에 수용되어 비교적 빨리 한국으로 송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일본군 복무 경력과 오키나와 전투 및 이세나섬에서의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아버지 신태영과 함께 이름이 올랐다. 또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8]
3. 2. 오키나와 전투 당시 행적 논란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특히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행적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다.신응균은 1944년 6월 독립중포병 제100대대 소대장으로 동원 편성되어 제32군에 배속되었고, 7월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12월에는 제1중대장이 되었고, 독립중포병 제100대대의 임시 편성 부대인 '히라야마 부대'를 이끌었다. 이 부대는 오키나와 본섬 북부 본부 반도에 배치되어 이에섬 비행장을 포격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실제로는 단 한 발도 발사하지 못한 채 포가 파괴되었다.
1945년 4월, 미군이 오키나와 북부 쿠니가미 지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을 때, 신응균은 포격을 건의했으나 당시 지대장이었던 宇土武彦|우토 타케히코jpn 대좌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에도 부대가 보유한 중포는 사용되지 않았다. 미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우토 지대장은 4월 16일 유격전을 위해 타노다케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고, 히라야마 부대는 19일 타노다케에 도착하여 다른 부대와 합류, 유격전 계획을 논의했다.[1] 그러나 미군의 추격으로 4월 24일 쿠니가미 동해안의 아하 지역으로 후퇴했으며, 28일에는 미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6월 10일 육군 소좌로 진급했으나, 이미 사령부와의 연락은 두절된 상태였다.
오키나와 전투가 막바지에 이른 1945년 6월경, 신응균은 부하 6명과 함께 이세나섬으로 건너갔다. 종전 후에도 이 섬에는 일본군 패잔병들이 남아 섬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논란이 발생했다. 당시 이세나섬 주민이었던 喜納政昭|키나 마사아키jpn가 군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신응균(당시 히라야마 대장)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유족의 증언이 있다.[2] 또한 일부 주민들은 종전 후에도 '군 당국' 행세를 한 히라야마 부대가 주민 학살과 포로 학살에 가담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3] 다만 당시 섬에는 신응균의 부대 외에도 육군 나카노 학교 출신의 특무 공작원, 다른 패잔병, 현지 청년단 등 여러 집단이 뒤섞여 있어 상황이 복잡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히라야마 부대는 1946년 1월, 미군 정보기관이 섬에 도착하기 직전 요론섬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구치노에라부섬 근해에서 특무 공작원 등과 함께 미군에 체포되어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3] 수용소에서는 한국인으로 분류되어 다른 한국인 노무자들과 함께 수용되었고,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국으로 송환된 것으로 추정된다.
4. 학력
출신 학교 |
---|
충청남도 대전고등보통학교 |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3기 졸업 |
일본 육군과학전학교 졸업 |
일본 육군포공학교 졸업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정훈 1기 졸업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
미국 육군포병학교 졸업 |
미국 육군야전포병학교 졸업 |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학사 졸업 |
5. 기타 약력
wikitext
연도 | 내용 |
---|---|
1972년 | 과학기술연구소 상임감사 |
1973년 ~ 1982년 | 재향군인회 부회장 |
1973년 | 외교협의회 이사 겸 사무총장 |
1975년 | 국방과학연구소 상임감사 |
1979년 |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
1982년 | 국제화재해상보험 고문 |
1982년 | 대일화학 감사 |
1984년 ~ 1990년 |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감사 |
1985년 | 국제로타리365지구 총재 |
1990년 |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고문 |
1990년 | 대한민국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
6. 신응균을 연기한 배우
- 코리아게이트 (드라마)(1995, SBS) - 강태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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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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集英社
2020
[2]
웹사이트
沖縄県史第9巻(1971年琉球政府編)及び同第10巻(1974年沖縄県教育委員会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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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府
2020-01-23
[3]
간행물
沖縄県史 第9巻・10巻 沖縄戦証言 伊平屋島・伊是名島篇
沖縄県
[4]
뉴스
<9>호국군
http://kookbang.dema[...]
국방일보
2008-03-19
[5]
간행물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5권(창군기)
http://www.imhc.mil.[...]
한국国防部軍史編纂研究所
2020-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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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政府人事(정부인사)
http://www.busan.com[...]
부산일보
1952-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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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사동정
http://www.busan.com[...]
부산일보
1957-07-01
[8]
웹사이트
06년 12월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 확정 공개
https://m.hankookilb[...]
2021-12-06
[9]
웹인용
신응균
http://people.empas.[...]
엠파스 인물정보
2008-04-17
[10]
뉴스인용
전국방부차관 신응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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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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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용
친일과 군사독재 가담... '오욕의 한국 근현대사' 집약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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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5-01-10
[12]
뉴스인용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나의 선택 나의 패션 16. 신랑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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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6-12-2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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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나의 선택 나의 패션 81. 대통령 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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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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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表를受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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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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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균씨임명 국방부차관보로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0-12-01
[16]
뉴스인용
申駐獨大使 信任狀提呈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1-07-30
[17]
뉴스인용
최덕신씨 내정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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