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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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의석은 청송 심씨 본관의 인물로, 서울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우고 서구 건축에 눈을 뜨면서 개화기 건축가로 활동했다. 그는 배재학당, 독립문, 정동제일교회, 이화학당 본관, 환구단 등 다양한 건축물에 참여했으며, 대한제국 시기에는 관직에 올라 내부아문의 기사직을 역임했다. 심의석은 한국 전통 건축의 마지막 세대이자 개화기 신건축의 첫 세대로 평가받으며, 도시 건설과 건축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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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석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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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심의석 |
한자 표기 | 沈宜錫 |
출생일 | 1854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924년 |
사망지 | 일제강점기 경성부 |
직업 | 건축가, 도시건설자, 건축기사 |
경력 | |
분야 | 건축 |
2. 생애
심의석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정동(貞洞)에서 거의 평생을 보냈으며, 한학(漢學)을 배운 세대이다.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구 건축에 눈뜨게 되었으며,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를 중심으로 서구 문명을 접할 수 있었다.
심의석은 독립문과 환구단 건설에 참여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 스케치하고, 심의석이 공사 감독을 맡아 1897년에 완공했다.[1][2] 환구단은 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위해 심의석이 설계하여 10일 만에 지어졌다.[5]
그는 배재학당(1887) 건축에 처음으로 참여하였다. 단층 벽돌조 건물인 교사(校舍)는 그가 처음으로 벽돌건축에 참여한 경험을 쌓은 건축물이었다. 이어 시병원(施病院, 1890)을 건립하였으며, 1896∼1897년에는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Sabatin, A. I. S.)의 설계에 따라 서대문 영은문 자리에 석조 독립문을 세웠다.
그는 서양인들을 통하여 서양건축술을 터득하여 학교·병원 등 각종 건축물의 신축에도 계속 참여하였다. 정동제일교회는 1895년에 착공, 1898년 10월에 준공되었는데, 이 교회의 3층 벽돌조 종탑(鐘塔) 건조는 건축기술사적으로 독립문의 석조구조물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밖에 서양건축물로서 정동 이화학당(1897∼1899), 상동교회(1900∼1901)가 있다.
한편 그는 파고다공원 내의 팔각정(1897), 조선호텔 내의 원구단과 황궁우(皇穹宇) 그리고 석고단(石鼓壇, 1901.11.), 광화문 소재 기념비각(紀念碑閣, 1902.9.) 등 전통건축에도 참여하였다. 또, 이채연, 남궁억과 함께 서울을 개혁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며 또한 최초의 원형극장인 협률사(1902.8.)는 그가 세운 것이다. 그 밖에 이화여자고등학교 프라이홀 자리에 있던 손탁호텔(1902∼1903), 덕수궁 내의 석조전(1909) 등도 그가 지었다.
한일병합 후에는 관직에도 올라, 유길준과 함께 참사(參事)가 되어 참사제도가 폐지된 1919년까지 내부아문(內部衙門)의 기사직(技師職)에 있었다.
3. 대표작
3. 1. 독립문
독립문은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 아파나시 세레딘 사바틴이 설계했고, 당시 서양건축 조영 경험이 있던 심의석이 공사 감독을 맡았다.[1] 서재필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형으로 해 기본 스케치를 했고, 세부 설계도는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2]
1897년 11월 20일, 1년간의 공사 끝에 독립문이 완성되었다. 정초식을 한 날로부터 정확히 1년이 걸린 셈이다. 프랑스 개선문을 닮은 높이 14.28m, 폭 11.48m 크기의 이 문은 가로 45cm, 세로 30cm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들었으며, 문 가운데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배치했다.[1] 1898년 1월, 한국인 기사 심의석이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독립문을 건축했다.[3]
이맛돌 위에는 독립문이라는 글자를 쓴 현판석을 앞뒤로 달았다. 안쪽에는 한글로 ‘독립문’, 바깥쪽에는 한자로 ‘獨立門’이라고 썼다. 이 글씨는 독립협회 사무 위원장이자 당대 명필로 이름 높았던 이완용이 쓴 것이었다.[1] 현재 독립문의 편액 글씨를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이완용과 김가진이 썼다는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현재까지 나온 객관적 기록과 방증자료를 종합하면 이완용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4] 이 현판석 밑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을 새겼다.[1]
독립문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189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11월에 완공한 것이다. 조공과 책봉 체제로부터의 독립 의지를 담고 있다.[4]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 건립 비용은 조선 민중들의 성금으로 충당되었으며, 독립문 건립에는 총 3,825원이 지출되었다.[2] 이 비용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마련되었다.[4]
3. 2. 환구단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나아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등극했다. 이때 조선의 국호를 ‘대한’으로 고쳐 대한제국의 탄생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다음 날 고종은 외국 공사들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초청해 대한제국 선포를 알렸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뒤편과 서울시청광장 왼쪽에 위치한 환구단(서울 중구 소공로 106)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5]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됐다.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열렸고 설치와 폐지를 되풀이하다가 조선 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됐다.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해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됐다. 그러나 세조 10년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됐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다.[5]
환구단은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터에 3층의 원형 제단 형태로 조성했다. 당시 최고 도편수였던 심의석이 설계, 10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돼 10일 만에 완공했다. 풍수가들은 조선의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조성한 환구단에 대해 하늘의 천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곳이고, 하늘상제와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는 지기가 솟구쳐 오르는 곳이라고 주장했다.[5]
4. 평가
우리나라한국어 전통건축의 마지막 세대이자 개화기 신건축의 첫 세대로, 그 시대의 선각자로 활동했던 도시건설자이자 건축가였다.[1]
5. 심의석이 건축하거나 참여한 건축물 목록
- 배재학당(1887년): 단층 벽돌조 건물로, 심의석이 처음으로 벽돌 건축에 참여한 경험을 쌓은 건축물이다.
- 시병원(施病院, 1890년)
- 독립문(獨立門, 1897년)]: 서재필이 파리의 개선문을 보고 기본 스케치를 하였고, 사바틴이 설계를 했으며, 심의석이 건축을 하였다.[1][2][4] 189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11월에 완공하였다.[4]
- 파고다공원 내의 팔각정(八角亭, 1897년)
-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 1898년): 1895년에 착공, 1898년 10월에 준공되었는데, 이 교회의 3층 벽돌조 종탑(鐘塔) 건조는 건축기술사적으로 독립문의 석조구조물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정동 이화학당 본관(Main Hall, 1899년)
- 조선호텔 내의 환구단(圜丘壇, 1897년)과 황궁우(皇穹宇, 1899년) 그리고 석고단(石鼓壇, 1901년):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터에 3층의 원형 제단 형태로 조성했다. 당시 최고 도편수였던 심의석이 설계, 10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돼 10일 만에 완공했다.[5]
- 상동교회(尙洞敎會, 1901년)
- 협률사(協律社, 1902년): 대한민국 최초의 극장이자 최초의 원형극장이다.
- 광화문 소재 기념비각(紀念碑閣, 1902년)
- 이화여고 프라이홀(Fry Hall) 자리에 있던 손탁(孫鐸) 호텔(1903년)
- 덕수궁 내의 석조전(石造殿, 1909년)
참조
[1]
뉴스
레디앙 - 서대문 독립문에 담긴 역사
http://www.redian.or[...]
레디앙
[2]
뉴스
남도일보 - 전라도역사이야기-83.독립신문과 보성 서재필기념공원
http://www.namdonews[...]
남도일보
[3]
뉴스
트래블바이크뉴스
http://www.travelnbi[...]
트래블바이크뉴스
[4]
뉴스
가을빛 짙어가는 정동길을 걸으며...
https://news.naver.c[...]
프레시안
[5]
뉴스
1897년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 위해 옛 남별궁터에 환구단 조성
https://news.naver.c[...]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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