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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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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탁호텔은 1902년 완공된, 당시 대한제국 정동에 위치했던 서양식 호텔이다. 호텔 지배인인 앙투아네트 손탁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을 돕는 등 고종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건립되었다. 2층 건물로, 1층에는 한국 최초의 커피숍이 있었다. 1909년 손탁이 호텔을 매각한 후, 1917년 이화학당에 넘어가 기숙사로 사용되었으며, 1922년 철거되었다.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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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호텔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손탁 호텔
로마자 표기Sontag Hotel
1909년 J. Boher가 소유권을 인수한 후의 건물 엽서
상세 정보
완공일1902년
철거일1922년
좌표37°34′8″N 126°58′30″E

2. 명칭

손탁호텔이라는 명칭은 호텔 지배인인 앙투아네트 손탁의 성인 '손탁' (Sontag)를 따와 불렀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한국어로는 손택양 (孫澤, 孫擇, 孫㡯) 내지는 손택 부인이라 불리었기에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다.[10]

2. 1. 다양한 명칭

손탁호텔이라는 명칭은 호텔 지배인인 앙투아네트 손탁의 성인 '손탁' (Sontag)를 따와 불렀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한국어로는 손택양 (孫澤, 孫擇, 孫㡯) 내지는 손택 부인이라 불리었기에 이에 따른 명칭도 다양했는데, 다음과 같았다.[10]

손택부인가 (孫澤夫人家)손택양가 (孫擇孃家)손택양여관 (孫擇孃旅館)
손택양저 (孫擇孃邸)손택양가 (孫宅孃家)궁내부 용달여관 (宮內府 用達旅館)
손택저 (孫澤邸)손택양씨가 (孫擇孃氏家)정동화부인가 (貞洞花夫人家)
손탁빈관 (孫澤賓館)손택양사저 (孫擇孃私邸)정동화부인옥 (貞洞花夫人屋)
한성빈관 (漢城賓館)손택양관저 (孫擇孃官邸)정동화옥 (貞洞華屋)
손택낭저 (孫澤娘邸)


3. 역사

안토니에트 손탁은 1885년 조선에 도착하여 뛰어난 외국어 능력과 다방면의 재능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었다.[1][2] 왕실을 위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궁중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1895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 정동에 위치한 한옥을 하사받았다.[1][2]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이후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돕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고종은 손탁의 공로에 보답하고자 1898년 3월 16일, 기존 한옥 부지에 서양식 건물을 지어 하사했는데,[1][2] 이 건물이 훗날 손탁호텔의 모태가 되었다.

3. 1. 앙투아네트 손탁

앙투아네트 손탁은 1885년, 한국 주재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따라 서울에 처음 도착했다.[1][2][9] 당시 한국은 오랜 쇄국 정책을 끝내고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던 시기였기에, 외국어에 능통한 인력이 절실했다. 손탁은 Deutsch|독일어deu, Français|프랑스어fra, Русский|러시아어rus, English|영어eng 등 4개 국어에 능통했고, 곧 한국어도 익혀 5개 국어를 구사하게 되었다.[9][1][2]

뛰어난 언어 능력 외에도 손탁은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훌륭한 요리사였으며, 고종과 명성황후는 그녀가 만든 서양 요리와 음료를 즐겨 찾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예술과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 왕실로부터 궁궐 내부 장식을 맡기도 했다. 우아하고 재치 있는 손탁은 외국 사절단을 위한 연회를 성공적으로 주최하며 왕실의 깊은 신임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궁중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1][2][9]

1885년 베베르 공사 부임 이후 손탁은 베베르 부인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으나, 1897년 8월 베베르 부인이 러시아로 돌아간 뒤에는 공사관 맞은편 가옥으로 거처를 옮겼다.[11] 이곳은 본래 미국인 선교사 다니엘 기포드가 살던 정동 29번지였는데, 손탁이 사들여 사저로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10] 정확한 매입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1895년 공로를 인정받아 이 한옥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1][2] 손탁의 사저는 이미 호텔이 되기 전부터 서울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의 중요한 교류 장소로 이용되었다. 1902년 4월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는 자신의 서한에서 손탁의 집을 자주 방문했으며 "그 집 요리는 일품"이고, 벨기에 영사와 프랑스 공사 비서도 그곳에서 프랑스어로 대화하며 식사한다고 언급했다.[11]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자, 손탁은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안전하게 피신하는 아관파천 과정을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이 일을 계기로 고종과 손탁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으며, 손탁은 종종 고종에게 커피를 대접하기도 했다. 고종은 손탁의 공로와 충성심에 보답하고자 1898년 3월 16일, '로공관좌변 양관 하사증서(露公館左邊 洋館 下賜證書)'를 통해 정동 16번지 땅에 서양식 건물을 지어 하사했다.[10][1][2] 이 건물이 훗날 손탁 호텔의 모태가 된다.

3. 2. 호텔 건립 배경

앙투아네트 손탁은 1885년 러시아 제국 공사 베베르를 따라 조선에 처음 왔다.[9] 그녀는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영어, 한국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여 궁중과 인연을 맺었고, 서양 요리와 실내 장식을 담당하며 고종과 명성황후 등 왕가의 신임을 얻었다.[9][1][2]

손탁은 베베르 공사 부임 초기에는 베베르 부인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11] 이후 미국인 선교사 다니엘 기포드 (Daniel Lyman Gifford)가 살던 정동 29번지 구역의 한옥을 사들여[10][1][2] 자신의 사저로 삼았다. 정확한 매입 시기는 불분명하지만,[10] 이 사저는 이미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서양인들의 일상적인 교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902년 4월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는 손탁의 집을 자주 방문했으며, "그 집 요리는 일품"이고 "벨기에 영사와 프랑스 공사의 비서도 거기서 식사하며 프랑스어로 대화한다"고 기록하기도 했다.[11]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손탁은 고종이 아관파천하는 것을 도왔고, 이 과정에서 고종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1][2] 고종은 손탁의 공로와 왕실에 대한 기여를 인정하여 1898년 3월 16일, 정동 16번지의 토지를 하사했다.[10][1][2] 이는 손탁이 1895년에 경운궁 서쪽의 정동 29번지 가옥을 하사받았다는 일부 기록과는 다른 사실이다.[10]

당시 서울에는 외국인 방문객이 늘어나는 추세였으나, 이들을 수용할 만한 숙박 시설이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제국 정부는 손탁에게 하사한 정동 16번지 부지에 외국 귀빈들을 위한 숙박 시설, 즉 호텔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02년 10월, 고종이 하사한 부지에 새로운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호텔로 사용하게 되었다.[9]

3. 3. 손탁호텔 건립과 운영

앙투아네트 손탁은 1885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따라 서울에 처음 도착했다.[9][1] 그녀는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영어, 한국어 5개 국어에 능통했고 서양 요리와 실내 장식에도 재능이 있어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었다.[9][1][2]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것을 도왔다.[1][2] 고종은 이에 대한 보답과 늘어나는 외국 외교관 및 방문객을 접대할 필요성 때문에 1898년 3월 16일, 손탁에게 정동 16번지 땅과 함께 서양식 건물을 지어 하사했다.[10][1][2] (일부 기록에는 1895년 정동 29번지 한옥을 하사받았다고 되어 있으나[1][2], 이는 사실과 다르다.[10]) 이 건물은 손탁의 사저로 사용되면서 이미 서울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의 교류 장소로 이용되었다.[11]

외국인 방문객이 늘어나면서 서양식 숙소의 필요성이 커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자금을 지원하여 기존 건물을 헐고 더 큰 규모의 호텔을 짓기로 결정했다.[1][2] 1902년 10월,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사바틴의 설계로 2층짜리 서양식 호텔 건물이 완공되었다.[9][11][2] 호텔은 초기에 황실의 '프라이빗 호텔'처럼 예약 손님 위주로 운영되었다.[11] 2층은 귀빈용 객실로 사용되었고, 1층에는 일반 객실과 식당, 그리고 손탁의 거주 공간이 있었다.[11][1] 특히 1층에 문을 연 커피숍은 서울 최초의 호텔 커피숍이자 다방으로, 당시 서울에 체류하던 외국인들의 주요 사교 장소였다.[11][1][3]

호텔의 공식 명칭은 1909년 이전까지는 "손탁양저"(孫澤孃邸), "손탁빈관"(孫澤賓館), "한성빈관"(漢城賓館) 등으로 불렸으나, 외국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손탁 호텔'이라는 이름이 점차 공식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2]

손탁 호텔에는 여러 유명 인사가 투숙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윈스턴 처칠[12][13][4]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14][2]이 이곳에 묵었다.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도 투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14][4] 한편, 초대 대한제국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역시 이 호텔에 머물며 조선의 대신들을 불러 회유하거나 압박하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15][2][4]

3. 4. 매각과 이후

1909년 손탁은 궁내부 황실전례관 직책에서 물러나면서 호텔을 팔래스 호텔의 주인이었던 프랑스인 J. 보헤에게 매각했다.[16][5] 보헤는 1909년 8월 3일 호텔 소유권을 넘겨받았고,[5] 손탁은 같은 해 9월 19일 프랑스로 돌아가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16][1]

보헤가 호텔을 인수한 후, 기존의 프라이빗 호텔 방식은 폐지되고 일반 호텔로 운영 방식이 변경되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투숙객을 유치하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게재했다. 당시 <더 서울 프레스>에 실린 광고에 따르면, 손탁호텔은 "한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편리한 호텔"로, "각방에 욕실이 딸린 25개의 객실", "가족 투숙객 및 여행자 고객들을 위한 모든 가정편의시설과 최상의 프랑스 요리"를 제공한다고 홍보했다. 또한 "공식 연회, 결혼식, 무도회, 피로연" 등 다양한 행사가 가능하며, "통역자, 가이드, 짐꾼은 즉시 대기"한다고 밝혔다. 호텔의 케이블 주소는 "sontag.", 전화번호는 739번이었다.[17] 보헤가 인수한 당시 호텔은 25개의 침실 외에도 전등, 정원, 바, 당구장을 갖추고 있었으며, 본관의 1인실 요금은 하룻밤에 8, 2인실은 4~6원이었다. 이 시기 호텔 사업은 개선되어 봄과 가을에 특히 붐볐다고 한다.[6]

1914년에 발행된 여행 책자 <테리의 일본제국 여행안내>에도 손탁호텔 광고가 실렸는데, "냉온수와 전기등, 최신 위생시설을 완전히 갖춤", "통역자, 가이드, 짐꾼, 승마 제공 가능", "바와 대형 당구장이 있는 별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영어로 접객 가능" 등을 내세웠으나 객실 수는 25개로 변함이 없었다.[17]

그러나 호텔은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 이후[1][6] 서서히 경영난에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1914년 말, 소유주인 보헤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위해 프랑스 정부의 소환을 받아 프랑스로 돌아간 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면서[6] 호텔의 명성은 더욱 쇠퇴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직영하는 64개 객실 규모의 조선호텔이 완공되면서 손탁호텔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17] 결국 1915년 8월 18일자 <매일신보>에는 손탁호텔의 비품을 경매에 부친다는 광고가 실렸고, 이후 호텔은 사실상 폐업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17]

1917년, 이화학당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모금한 기부금 23060USD으로 손탁호텔 건물과 부지를 매입했다.[1][4] 호텔 건물은 1922년까지 이화학당 학생들의 기숙사(메인홀 별관)로 사용되다가,[17] 더 큰 규모의 기숙사인 프라이홀(Frey Hall) 신축을 위해 철거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17][1][4] 이후 프라이홀은 한국 전쟁 중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으나, 1975년 화재로 다시 전소되어 철거되었다.[17]

손탁호텔 부지에 세워진 이화학당 기숙사 프라이홀


현재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에는 2006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이 들어서 있으며,[7][2][4] 호텔 터였음을 알리는 기념비가 남아 있다.[7]

4. 건축

대한제국 시기 외국인 방문객이 늘어났으나 이들을 수용할 만한 호텔 시설은 부족했다.[1] 이에 따라 고종 황제의 명으로 정동에 호텔을 건립하게 되었다. 건축에는 사바틴과 심의석(沈宜錫) 등이 참여하여 1902년부터 1903년 사이에 공사가 진행되었으며,[18] 1902년 10월에 완공되었다.[1][2] 건물 설계는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사바틴(Afanasy Seredin-Sabatin)이 맡았다.[2]

호텔 건물은 2층짜리 양옥으로 지어졌다. 1층에는 일반 투숙객을 위한 객실과 주방, 레스토랑, 그리고 한국 최초의 호텔 커피숍으로 여겨지는 다방이 있었다.[1][3] 2층은 주로 국빈이나 중요한 손님들을 위한 객실로 사용되었다.[1] 호텔 운영 자금은 대부분 대한제국 정부에서 지원했다.[2]

5. 대중문화 속 손탁호텔

손탁 호텔이라는 제목의 오페라가 있다.

1976년 차범석은 "손탁호텔"이라는 시나리오를 썼으며, 이는 2005년에 뮤지컬로 제작되었다.

2012년에는 이순우가 호텔과 손탁에 관한 책 ''손탁호텔''[8]을 출판했다.

참조

[1] 간행물 손탁호텔 (孫澤hotel)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3-12
[2] 웹사이트 손탁여사와 손탁호텔 http://modernseoul.c[...] 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3] 간행물 다방 (茶房)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3-12
[4] 웹사이트 "[천자 칼럼] 처칠과 마크 트웨인이 서울에?" https://www.hankyung[...] 2024-05-19
[5] 웹사이트 호텔‧여관 https://museum.seoul[...]
[6] 웹사이트 The fate of Sontag Hotel https://www.koreatim[...] 2024-05-19
[7] 웹사이트 손탁호텔 터 http://815book.co.kr[...]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Independence Hall of Korea
[8] 웹사이트 한말 외교 秘史(비사)의 현장, '손탁(Sontag) 호텔' http://www.economyta[...] 2024-03-12
[9] 서적 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 손탁호텔 하늘재 2017-10-11
[10] 서적 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 손탁호텔 하늘재 2017-10-11
[11] 서적 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 손탁호텔 하늘재 2017-10-11
[12] 뉴스 내가 만난 처칠경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65-01-19
[13] 뉴스 옛 서울 이야기 손탁호텔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1-07-25
[14] 뉴스 망국의 회한이 서린 손탁호텔 https://news.naver.c[...]
[15] 웹사이트 손탁여사와 손탁호텔 http://modernseoul.c[...] 한국콘텐츠진흥원
[16] 서적 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 손탁호텔 하늘재 2017-10-11
[17] 서적 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 손탁호텔 하늘재 2017-10-11
[18]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심의석(沈宜錫)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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