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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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이기(審食其)는 전한 초기의 인물로, 유방이 패공(沛公)이었을 때부터 유방의 아버지 유태공을 보좌했다. 항우에게 유방이 패하여 그의 처자와 유태공이 포로가 되었을 때 이들을 보살폈으며, 이후 한나라 개국 후 벽양후에 봉해졌다. 혜제 때 좌승상이 되었으나, 여후 사후 문제에 의해 파면되었다. 그는 회남왕 유장의 어머니 조부인의 사면을 돕지 않아 원한을 샀고, 결국 유장에게 살해당했다. 사후 유(幽)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 심평이 작위를 이었으나 모반죄로 자결했다.
심이기는 유방이 패공이 되어 자립할 때부터 유태공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으며, 형 유희와 함께 유태공을 보좌했다. 고제 2년(기원전 205년), 한왕 유방이 항우에게 패하여 처자를 두고 도망쳤을 때, 여치와 유태공은 항우의 포로가 되었지만 심이기는 이들을 따라 돌보았다. 이후 여후 등은 한왕에게 돌아갔고, 심이기도 한왕을 따랐다.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는 벽양후(辟陽侯)에 봉해졌다.[1]
심이기 사후 아들 심평(審平)이 작위를 이었으나, 경제 2년(기원전 155년) 모반이 발각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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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적
한서 권43 역육주유숙손전 중 주건열전
2. 생애
고제 8년(기원전 199년), 조왕 장오의 고조 암살 미수 사건 때, 조부인이 연좌되어 옥에 갇혔다. 조부인의 동생이 심이기를 통해 여후에게 사면을 청했지만, 여후는 질투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고, 심이기도 강하게 말하지 않았다. 결국 조부인은 유장을 낳고 자살했다.[1]
고제 12년(기원전 195년), 연왕 노관이 반란을 꾀한다는 정보를 얻은 고조는 심이기와 어사대부 조요를 보냈지만, 노관은 의심하여 병을 칭하며 나오지 않았다.[1]
고조 사후, 여후는 심이기와 모의하여 고제의 죽음을 공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상이 심이기를 설득하여 여후는 상을 발표했다.[1]
혜제 7년(기원전 188년) 전객이 되었고, 이듬해 좌승상이 되었다. 그는 승상이면서도 낭중령처럼 궁궐 안을 감시했으며, 관료들은 그를 통해 결재를 받았다.[1]
여후 사후 문제가 즉위하자 승상에서 면직되었다. 문제 3년(기원전 177년), 회남왕 유장은 어머니를 돕지 않았던 심이기를 원망하여 살해했다.[1]
시호는 유후(幽侯)이며, 후국은 심평이 이었지만, 경제 2년(기원전 155년) 모반죄로 자살했다.[1]
2. 1. 초기 생애와 개국
유방이 패공(沛公)이 되었을 때, 심이기는 유방의 형 유희와 함께 유방의 아버지 유태공(劉太公)을 보좌하였다.[1]
고제 2년(기원전 205년), 한왕(漢王) 유방은 초나라의 항우에게 패하여 처자를 이끌고 달아났다. 유방의 아내 여치와 유태공은 항우의 포로가 되었으나, 심이기는 이들을 뒤따라 보살폈다. 이후 여치 등은 한왕의 곁으로 돌아갔고, 심이기도 이를 따랐다.[1]
고제 6년(기원전 201년), 개국공신으로써 벽양후에 봉해졌다.[1]
2. 2. 조씨의 죽음과 여후의 신임
고제 8년(기원전 199년), 조왕 장오의 신하 관고 등이 고제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였다.[1] 이때 장오의 옛 측실이자 고제의 총애를 받은 조(趙)씨도 연좌되어 옥에 갇혔는데, 조씨의 아우 조겸(趙兼)은 심이기를 통하여 여후에게 조씨의 목숨을 구걸하였다.[1] 그러나 여후는 질투심에 들어주지 않았고, 심이기는 또한 애써 부탁하지 않았다.[1] 결국 조씨는 회남왕을 낳았고, 원한에 사무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
2. 3. 조정에서의 권력 장악
기원전 195년(고제 12년), 연왕 노관이 반란을 꾀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고제는 심이기와 어사대부 조요를 보내 노관을 맞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노관은 이를 의심하여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1]
같은 해에 고조가 붕어하였다. 여후는 황태자의 나이가 어림을 걱정하여 심이기와 모의하고 고제의 죽음을 공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역상은 심이기를 설득하였고, 결국 여후는 고제의 죽음을 공표하였다.[1]
혜제 7년(기원전 188년), 심이기는 전객이 되었고, 이듬해에 왕릉이 태부로 전직되면서 심이기는 우승상으로 승진하였다. 심이기는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낭중령처럼 궁궐 안을 감시하였고, 모든 관료는 심이기를 통하여 결재를 받았다.[1]
한때 심이기는 모함을 받아 혜제에게 수감되고 주살될 위기에 놓였다. 비록 여후의 총애를 받는 몸이었으나 대신들을 워낙 많이 해쳤기에 아무도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친분을 맺은 변사 주건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1]
여후가 죽고 문제가 즉위하자, 심이기는 우승상에서 면직되었다.[2] 여후가 죽은 후 여씨 일족이 주멸되었는데, 심이기는 여후의 총애를 받았었음에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는 육고와 빈객 주건이 힘써준 덕분이었다.[2]
2. 4. 회남왕 유장과의 악연과 죽음
문제 3년, 회남왕 유장은 평소 어머니를 진심으로 돕지 않았던 심이기를 원망하여 그를 찾아가 만남을 청하였다. 심이기는 뵈러 나왔다가 회남왕이 휘두른 철추에 맞았고, 회남왕의 종자 위경(魏敬)에게 목을 베였다.[1] 심이기 사후, 시호는 유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심평이 이었다.[1]
3. 가계
심이기의 손자 심경(審卿)은 공손홍과 친분이 있었다.[3]
원강 4년(기원전 62년), 심이기의 증손 심비(審非)가 조서를 받들어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3]
4. 평가
참조
[2]
서적
사기 (역사서) 권56 진승상세가
[3]
문서
경은 존칭으로, 이름은 알 수 없다.
[4]
서적
사기, 한서 비교
[5]
문서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6]
서적
사기
[7]
서적
사기, 한서 비교
[8]
서적
사기
[9]
서적
사기, 한서 비교
[10]
문서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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