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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페트라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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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106년 로마 제국에 병합되어 설치된 속주로, 현재의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시나이 반도 일대에 위치했다. 이 지역은 요르단강 서안의 비옥한 지역과 시나이 반도의 사막 지대로 구분되었으며, 페트라, 보스트라, 아카바 등의 도시가 주요 거점이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로마화가 진행되었고, 기독교 교구가 설치되기도 했다. 7세기에는 이슬람 세력에 정복되면서 로마 제국의 지배가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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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지도
일반 정보
로마자 표기Provincia Arabia Petraea
그리스어Ἐπαρχία Πετραίας Ἀραβίας
아랍어العربية الصخرية
일반 명칭아라비아
역사
시작106년
사건 시작로마의 정복
이전 국가나바테아 왕국
이전 국가 2데카폴리스
종료630년대
사건 1팔라이스티나 살루타리스 설치
사건 1 날짜390년
사건 종료무슬림의 정복
계승 국가팔라이스티나 살루타리스
계승 국가 2가산인
수도
수도페트라
수도 2보스트라
기타
현재 국가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관련 민족가산인
살리흐인
나바테아인

2. 지리

하드리아누스 시기 (재위: 서기 117–138년)의 로마 제국. 남서쪽에 황제 속주인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요르단/NW 사우디아라비아 북서쪽/시나이반도)를 나타내고 있다. 서기 125년 이 속주에 한 개의 군단이 배치됐다.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지역에 따라 지리적 구성이 달랐다. 대부분의 지역은 주민이 적었고, 도시 대부분은 북부 요르단강 주변에 발달했다. 홍해로 연결되는 아카바만의 끝에 위치한 아카바는 이 지역의 유일한 큰 항구였다.

주도 위치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는데, 보스라 한 곳이었다는 설과 페트라도 포함한 두 곳이었다는 설이 있다. 속주 총독은 페트라와 보스라 두 곳을 모두 거점으로 삼았으며, 어느 곳에 있든 칙령을 발표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를 병합할 때 보스라를 주도로 삼고 "트라이아네(Traiane)"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페트라에 대해 유사한 의식을 행했다. 페트라는 로마 제3군단 퀴레나이카의 거점이기도 했다.

2. 1. 요르단 강 서안 지역

모압 고원은 연간 강수량이 200mm로 비교적 비옥한 지역이다.[1]

2. 2. 시나이 반도



요르단강 주변 외에, 시나이 반도 북부에는 네게브라고 불리는 건조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또한, 홍해 연안 지역은 히스마(Hismā)라고 불리는 황무지가 연안 북쪽까지 이어졌으며, 그곳은 바위투성이였다.

2. 3. 네게브 사막

시나이반도 북쪽으로 뻗어 있는 건조 지대는 네게브 사막이다.[1]

2. 4. 홍해 연안

홍해 연안 지역은 히스마라고도 알려진 불모지가 해안까지 이어져 있으며, 바위 투성이 지역이다.[1]

3. 역사

106년 로마에 정복되기 전까지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지역은 나바테아 왕국의 영토였으며, 나바테아의 마지막 왕 라벨 2세(70년부터 재위)가 다스렸다. 라벨 2세가 사망하자, 키레나이카 제3군단은 아이귑투스(이집트)에서 북상하여 페트라를,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제6군단 페라타는 남하하여 보스라를 각각 점령했다. 라벨 2세에게는 오보다스(Obodas)라는 후계자가 있었지만, 어떤 구실로 로마가 침략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두 로마 군단은 나바테아 왕의 친위대로부터 어느 정도 저항을 받았지만, 나바테아인들의 본격적인 저항은 없었고, 정복 후에는 나바테아 군대가 즉시 아욱실리아로 종사하기 시작했다. 트라야누스는 아라비아 원정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라비쿠스(Arabicus)와 같은 칭호를 받지 못했는데, 이는 정복 과정에서 나바테아 왕국 측에 어떤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트라야누스는 이후 티그리스강을 넘어 메소포타미아까지 정복하게 되는데, 나바테아 정복은 그의 야망을 위한 발판을 확보하는 움직임이었다.

섬네일까지 트라야누스의 아라비아 지배권을 보여주는 지도]]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중심을 지나는 트라이아나 노바 가도(Via Traiana Nova)가 건설되었다. 이 도로는 보스라에서 페트라를 경유하여 아카바까지 연결되었다. 가도 개설을 기다려 공식적으로 나바테아 정복이 축하되었고, 앞면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흉상, 뒷면에는 낙타를 그린 새로운 동전이 발행되었다. 이 동전은 115년까지 계속 주조되었지만, 그 무렵에는 로마 제국의 관심은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에서 더 동쪽의 영토로 옮겨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가 사망했다고 오인한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시리아 속주와 달리 부나 힘이 없었기 때문에 카시우스를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193년에 시리아 속주 총독 페스케니우스 니게르가 황제를 자칭하며 봉기했을 때에도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즉위 후, 반란을 꾀한 동방의 속주는 처분되었지만,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 총독 P. 아엘리우스 세베리아누스 막시무스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충성심을 인정받아 유임되었다. 로마 제3군단 퀴레나이카는 세베리아나(Severiana)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한편, 반란을 일으킨 시리아 속주는 둘로 분할되었고,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에는 레자(Leja’)와 자발 알 드루즈(Jabal al-Druze)가 증강되었다. 이 지역들은 다마스쿠스 남쪽에 위치하며, 훗날 황제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출생지이다. 204년경에 필리푸스가 태어난 샤바(Shahba)라는 마을은 193년부터 225년 사이의 어느 해에 시리아 속주에서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로 변경되었으므로, 필리푸스 황제는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출생일 가능성이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여 제국 자체를 크게 만들려고 했다.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세베루스가 동방으로 세력 확장을 위한 거점이 되었다. 황제가 동방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여러 번 반란이 일어났던 시리아 속주를 진정시키고 회유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세베루스는 이를 세 가지 전술로 실현했다. 하나는 시리아 속주를 2분할한 것이고, 두 번째는 레자와 자발 알 드루즈를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에 편입시킨 것이며, 세 번째는 시리아의 율리아 돔나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Bowersock에 따르면, 세베루스가 갈리아를 지배하던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의 싸움에 임하고 있을 때, 시리아의 반 아라비아 파가 아라비아 페트라이아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은 아라비아와 정반대 국경에 위치한 갈리아에도 동요를 주었다. 이는 그 정도로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나타낸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세베루스와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으며, 로마 문화의 근본적인 기반으로까지 여겨졌다.

284년에 즉위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사두 정치(4분 통치)에 의한 통치 제도의 재편에 따라,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오늘날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영역까지 확대되었다. 이때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동방 대관구(Praetorian prefecture)의 동방 관구(Diocese of the East)의 일부가 되었다.

7세기가 되자,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정통 칼리파의 우마르가 이끄는 이슬람교도에 의해 정복되었고, 로마 제국의 지배는 끝났다.

3. 1. 로마의 정복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나바테아 왕국을 병합하여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를 설치했다.[6] 로마는 나바테아 왕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최소화하고, 비교적 평화롭게 이 지역을 병합했다. 라벨 2세가 사망하자, 키레나이카 제3군단은 이집트에서 북쪽의 페트라로 진격했고, 시리아 주둔군인 페라타 제6군단은 남쪽으로 이동해 보스라를 점령했다. 나바테아 왕국의 마지막 왕인 라벨 2세에게는 오보다스라는 후계자가 있었음에도, 로마는 나바테아 왕국을 병합했다. 트라야누스는 '아라비쿠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군사적 충돌이 거의 없었음을 보여준다. 나바테아 왕실 근위대를 제외하면, 강한 저항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복 이후, 얼마 안 되어 나바테아 군대가 로마 보조군으로 활동했다.[7]

아라비아 정복은 노바 트라이아나 가도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공식적으로 기념되지 않았다. 이 도로는 보스트라에서 아카바까지 속주의 중심부를 통과했다. 이 도로 건설 계획이 완료된 후, 앞면에는 트라야누스의 흉상이, 뒷면에는 낙타가 새겨진 주화가 아라비아 획득을 기념하며 발행되었다. 이 주화는 115년까지 주조되었다.

마다인 살리까지 트라야누스의 아라비아 지배


노바 트라이아나 가도는 보스라와 아카바뿐만 아니라, 속주의 중심부에 있던 페트라도 연결했다. 트라야누스는 보스라를 속주의 중심 도시로 선언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페트라에 메트로폴리스라는 지위를 주었다.

최근에는 트라야누스 휘하의 로마 군단들이 아라비아 속주 북동쪽의 산악 지역인 히자즈에 있는 마다인 살리를 점령했고,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 남쪽 영역을 늘렸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2]

3. 2. 로마화

로마 제국에 정복된 후,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에는 그리스어라틴어가 공식 언어로 도입되었다. 이는 로마 동방 속주들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아라비아는 이웃 지역들에 비해 헬레니즘화와 로마화의 역사가 짧았고, 로마인들이 도입하기 전에는 그리스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복 이후, 움 알 쿠타인(Umm al Quttain) 지역의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어는 공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정착되어, 사실상 나바테아어와 아람어를 대체했다.[7] 반면 라틴어는 드물게 사용되었으며, 127년에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안니니우스 섹스티우스 플로렌티누스의 묘비와 같이 주로 인명에 한정되어 나타났다.

밀러는 아라비아 지역에서 헬레니즘화가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도 이 지역은 그리스화가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토착민들은 원래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와 함께 공공 사업, 군대 미화 등 전형적인 로마의 사회적 가치와 함께 그리스 문화와 사회적 가치가 도입되었다. 아라비아는 새로운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어 고유의 언어 집단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로마 제정 시기에 흩어져 있는 나바테아 비문들이 존재한다.

이 지역 고유의 기년법인 보스트라 기년법이 도입되었다. 이 기년법의 첫 해는 서기 106년 3월 22일에 해당한다.[7]

3. 3. 후기 로마 제국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라비아는 시리아만큼 부유하거나 정치적 힘이 없었기 때문에 지지를 받지 못했다. 193년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가 황제를 자칭했을 때도 아라비아는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무역의 중요한 중심지인 보스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권력을 잡고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의 반란에 동조한 시리아 도시 안티오키아의 메트로폴리스 지위를 박탈하고 반란 가담자들을 처벌할 때, 키레나이카 제3군단은 "세베리아나"(Severiana)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한 아라비아 총독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세베리아누스 막시무스는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직위를 유지했다. 시리아는 두 개의 속주로 분리되었고, 아라비아는 라자트와 제벨 드루즈를 포함하여 다마스쿠스 남쪽 지역까지 확장되었으며,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출생지이기도 했다.

세베루스는 이미 거대했던 아라비아 속주의 크기를 늘렸다. 그 후 그는 메소포타미아 정복을 통해 제국의 크기를 늘리려 했다. 라자트와 제벨 드루즈의 아라비아 속주 편입은 메소포타미아 정복 이전에 아라비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세베루스 황제의 정치적 행동의 일부였다. 아라비아는 로마의 중동 지역에 대한 세베루스의 정책적 기반이 되었다. 반복해서 반란의 온상임을 보여준 시리아 속주의 힘을 완화시키고 길들여야 할 필요성은 시리아의 행정 개편, 아라비아에 이익이 되는 시리아 속주 영역 감소, 율리아 돔나와 세베루스 황제의 결혼 등 세 가지 부분으로 이뤄졌다.

아라비아는 세베루스 황제에 대한 충성의 상징이 되었으며, 제국이 갈리아에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 맞서는 전쟁 기간에 시리아 세력들은 키레나이카 제3군단이 변절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제국의 반대편 속주에서 한 군단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식은 아라비아가 축적했던 정치적 동요를 나타낸다.

284년-305년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제국의 행정 개편으로, 아라비아 속주는 오늘날 이스라엘 일부를 포함하며 커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편 이후 아라비아는 동방 대관구의 일부인 동방 관구의 일부가 되었다.

3. 4. 비잔티움 제국

동방 관구의 한 곳이었던 아라비아는 비잔티움-사산 전쟁 기간에 최전선이 되었다. 5세기 혹은 6세기에 팔라이스티나 살루타리스로 행정 개편이 되었다.

4. 주요 도시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주요 도시는 요르단강과 하우란 지역 북쪽에 집중되었다. 주요 도시 및 항구는 다음과 같다.

도시설명
페트라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중심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나바테아 왕국의 고대 도시로, 363년 갈릴리 지진으로 쇠퇴하기 전까지 번영했다.[5][1] 제3 키레나이카 군단 주둔지였다.
보스라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주도.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으며, 제6군단 페라타가 주둔했다.
제라쉬게라사라고도 불렸다.
카나타
아드라
막시미아노폴리스
필리포폴리스
암만필라델피아라고도 불렸다.
아카바홍해아카바만 끝에 위치한 유일한 주요 항구였다.


5. 종교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초기 기독교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다. 교황청 연감에는 이 지역의 옛 교구들이 명목상 교구로 등재되어 있다.[8][4]

하위 섹션에서 기독교 교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다룬다.

5. 1. 기독교 교구

교황청 연감에 명목상 교구로 등재된 아라비아 속주의 옛 교구들은 다음과 같다.[8][4]

  • 아드라아 (Daraa)
  • 아라비아의 보카타 (Khirbet-El-Bascha의 유적지?)
  • 보사나 (Busan)
  • '''보스트라''' - 대주교구
  • 카나타
  • 아라비아의 콘스탄티아 (Buraq)
  • 아라비아의 크리소폴리스
  • 디오니시아스
  • Erra (Es-Sanamein?, Aere?, Ire?)
  • 에스부스 (Hesbân)
  • Eutyme
  • 게라사 (현재 Jerash)
  • 아라비아의 막시밀리아노폴리스
  • 메다바 (현재 Madaba)
  • 아라비아의 네아폴리스
  • Neila (Khirbet-En-Nila의 유적지)
  • 네베
  • 아라비아의 파렘볼라이
  • 파이나 (Al-Masmiyah)
  • 아리비아의 필리폴리스 (Shahba)
  • 조라바 (Ezra')

6.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로마 제국 시대에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이 지역의 역사와 인물들을 통해 로마 제국의 확장 정책과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주요 사건:


  • 나바테아 왕국 병합: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나바테아 왕국을 병합하여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를 설치했다. 이는 로마 제국의 동방 진출을 위한 중요한 단계였으며, 지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트라이아나 노바 가도 건설: 보스라에서 페트라를 거쳐 아카바까지 이어지는 이 도로는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로마의 지배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통치: 세베루스 황제는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고, 로마 제3군단 퀴레나이카에 "세베리아나"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또한, 라자트와 제벨 드루즈 지역을 편입시켜 속주를 확장했다.
  •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출생: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출신 로마 황제일 가능성이 있는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이 지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로마 제국의 확장 정책과 지역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들이다.

6. 1. 인물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와 관련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인물설명
트라야누스106년 나바테아 왕국을 병합하여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를 설치한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보스라에서 페트라를 거쳐 아카바까지 연결되는 로마 가도인 트라이아나 노바 가도([Via Traiana Nova])를 건설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로마 황제로,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로마 제3군단 퀴레나이카에 "세베리아나"(Severiana)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라자트와 제벨 드루즈 지역을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에 편입시켜 속주를 확장했다.
필리푸스 아라부스204년경 샤바([Shahba])에서 태어났으며,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출신 로마 황제일 가능성이 있다.


6. 1. 1. 트라야누스

106년, 로마 제국의 황제 트라야누스나바테아 왕국을 병합하여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를 설치했다. 나바테아의 마지막 왕 라벨 2세가 사망하자, 로마 제3군단 키레나이카는 아이귑투스(이집트)에서 북상하여 페트라를 점령하고, 시리아 주둔 제6군단 페라타는 남하하여 보스라를 점령했다.[6] 라벨 2세에게는 오보다스라는 후계자가 있었음에도, 로마는 나바테아 왕국을 공격했다. 트라야누스는 티그리스강을 넘어 메소포타미아까지 정복하려 했는데, 그 전에 나바테아 왕국을 정복하여 이 지역의 통제권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나바테아 군대는 로마 군대에 거의 저항하지 못했고, 정복 이후에는 로마의 아욱실리아로 활동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다키우스(Dacius)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아라비아 원정에서는 아라비쿠스(Arabicus)라는 칭호를 받지 않았다. 이는 나바테아 왕국 측에 어떤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중심에는 보스라에서 페트라를 거쳐 아카바까지 연결되는 로마 가도인 트라이아나 노바 가도(Via Traiana Nova)가 건설되었다. 이 도로가 개설된 후, 나바테아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트라야누스 황제의 흉상과 낙타를 새긴 새로운 동전이 발행되었다. 이 동전은 115년까지 주조되었지만, 그 무렵에는 로마 제국의 관심이 더 동쪽으로 옮겨갔다.

트라야누스는 보스라를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주도로 삼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페트라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메트로폴리스 지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트라야누스 시대에 로마 군단이 마다인 살레를 점령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어,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영역이 남쪽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6. 1. 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세베루스는 이전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아라비아 총독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세베리아누스 막시무스를 유임시켰고, 로마 제3군단 퀴레나이카에는 "세베리아나"(Severiana)라는 칭호를 수여했다.[1]

세베루스는 시리아 속주를 둘로 나누고, 라자트와 제벨 드루즈 지역을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에 편입시켜 속주를 확장했다. 이 지역들은 다마스쿠스 남쪽에 위치하며, 훗날 황제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1]

세베루스는 메소포타미아 정복을 통해 제국을 확장하려 했고,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그의 동방 정책을 위한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그는 시리아 속주를 안정시키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정책을 펼쳤다.

  • 시리아 속주를 둘로 나누었다.
  • 라자트와 제벨 드루즈를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에 편입시켰다.
  • 시리아 출신의 율리아 돔나와 결혼했다.[1]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세베루스와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세베루스가 갈리아에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전쟁을 벌일 때, 시리아의 반대 세력들은 아라비아 페트라이아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는 아라비아 페트라이아가 로마 제국 내에서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

6. 1. 3. 필리푸스 아라부스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204년경 샤바(:en:Shahba)에서 태어났는데, 이 마을은 193년부터 225년 사이의 어느 해에 시리아 속주에서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로 변경되었으므로,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출생일 가능성이 있다.[3]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기에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에 편입된 레자와 자발 알 드루즈(Jabal al-Druze)는 다마스쿠스 남쪽에 위치하며, 훗날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출생지가 되었다.[2]

6. 2. 사건

이 섹션에서는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상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2. 1. 나바테아 왕국 병합

106년, 마지막 나바테아 왕 라벨 2세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나바테아 왕국을 병합하여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를 설치했다. 키레나이카 제3군단은 아이귑투스(이집트)에서 북쪽의 페트라로 진격했고, 시리아 주둔군인 페라타 제6군단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보스라를 점령했다.[6] 나바테아 왕국에는 라벨 2세의 후계자인 오보다스가 있었음에도, 로마는 별다른 구실 없이 나바테아를 병합했다. 이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기 전에 이 지역의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나바테아 군대는 로마 군단에 거의 저항하지 못했고, 일부는 정복 직후 로마의 보조군으로 활동했다. 아라비아 정복은 노바 트라이아나 가도 건설이 완료된 후에야 공식적으로 기념되었다. 이 도로는 보스트라에서 아카바까지 속주의 중심부를 관통했으며, 트라야누스의 흉상과 낙타가 새겨진 주화가 발행되었다. 트라야누스는 보스트라를 속주의 주도로 선언했지만, 메트로폴리스 지위를 부여받은 페트라 또한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다.[6]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로마 군단은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북동쪽의 산악 지역인 히자즈에 있는 마다인 살레까지 점령하여 속주의 영역을 남쪽으로 확장했다.[6]

참조

[1] 서적 Dio Cassius, LXVII. 14, 5
[2] 잡지 Well of Good Fortune http://archive.aramc[...] 2016-03-31
[3] 간행물 The Annexation and Initial Garrison of Arabia
[4] 문서 Annuario Pontificio 2013 Libreria Editrice Vaticana
[5] 서적 Dio Cassius, LXVII. 14, 5
[6] 잡지 Well of Good Fortune http://archive.aramc[...] 2016-03-31
[7] 인용 The Annexation and Initial Garrison of Arabia
[8] 문서 Annuario Pontificio 2013 Libreria Editrice Vati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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