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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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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즈 전쟁은 1868년 보신 전쟁의 일환으로, 교토 수호직을 맡았던 아이즈 번이 신정부군에 저항하며 벌어진 전투이다. 아이즈 번은 뛰어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했으나, 시라카와구치 전투, 니혼마쓰 전투 등에서 패하며 고립되었다. 결국 와카마쓰 성이 포위된 후, 백호대의 비극적인 할복 사건과 신센구미의 참전 등 격렬한 전투 끝에 1868년 11월 6일 항복했다. 이후 아이즈 번은 해체되고, 아이즈 지역은 신정부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사쓰마, 조슈 번과의 갈등은 물론, 역사적 평가와 관련된 다양한 논란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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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아이즈 전쟁
관련 전쟁보신 전쟁
아이즈 와카마쓰 성 공격
아이즈 와카마쓰 성 공격.
날짜1868년 10월 6일 – 1868년 11월 6일
장소아이즈 (37.30)
결과신정부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Flag of the Japanese Emperor.svg|22px]] 신정부군
사쓰초도군:
[[파일:Maru juji.svg|18px]] 사쓰마번
[[파일:Alex K Hiroshima Mori kamon.svg|16px]] 조슈번
[[파일:Japanese crest Tosa kasiwa.svg|18px]] 도사번
[[파일:Alex K Hiroshima Asano kamon.svg|18px]] 히로시마번
[[파일:Kuyo.svg|18px]] 오가키번
사도와라번
기헤이타이
Jinshotai
Shin'itai
교전국 2[[파일:Flag of the Tokugawa Shogunate.svg|border|22px]] 막부 진영
[[파일:Flag of Ouetsu Reppan Domei or the Northern Alliance in Japan.svg|border|18px]] 북부 동맹
[[파일:Flag of Aizu domain.svg|border|18px]] 아이즈번
[[파일:Flag_of_Shinsengumi.svg|18px]] 신센구미
[[파일:Japanese rising sun.svg|18px]] 쇼기타이
조시타이
Yūgekitai
지휘관 및 지도자
신정부군사쓰초도군:
[[파일:Japan Kouzoku Flag 16ben.svg|22px]] 사이온지 긴모치
[[파일:Flag of Tosa domain.svg|22px]] 이타가키 다이스케
[[파일:Flag of Choshu domain.svg|22px]] 야마가타 아리토모
[[파일:Flag of Satsuma domain.svg|22px]] 이지치 마사하루
[[파일:Flag of Satsuma domain.svg|22px]] 구로다 기요타카
[[파일:Flag of Satsuma domain.svg|22px]] 기리노 도시야키
저격병:
[[파일:Flag of Satsuma domain.svg|22px]] 무라타 쓰네요시
막부군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사이고 다노모
야마카와 히로시
가야노 곤베이
다나카 도사†
사이토 하지메
나카노 다케코†
병력 규모
신정부군15,000 전투 병력, 75,000 증원 병력
막부군5,000 전투 병력 (총 9,400명: 번 병사 3,500명, 사무라이 5,900명, 수십 명의 여성 전사)
피해 규모
신정부군알 수 없음
막부군전사 2,977명

2. 역사적 배경

분큐 2년(1862년), 아이즈번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 수호직에 취임하여 신선조를 휘하에 두고 존황양이파 지사들을 단속했다. 금문의 변에서는 막부 측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존황양이파를 제거했다.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구 막부군이 패배하자,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함께 에도로 퇴각한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메이지 신정부의 추토령을 받았다. 가타모리는 근신했지만, 번 내에서는 주전론이 지배적이었다.

게이오 4년(1868년) 3월 11일, 에도성이 무혈 개성(에도 개성)되고, 요시노부가 미토번에서 근신하자, 사쓰마번·조슈번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는 가타모리를 좌막파의 중진으로 보아 적대시하였다.

아이즈 번은 무술 실력이 뛰어났고, 5,000명 이상의 상비군을 유지했으며, 사할린 남부 등 넓은 지역의 치안을 담당했다.[1] 페리 제독의 도착 전후에는 에도 만 주변의 치안 작전에도 참여했다.[1]

9대 영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 수호직을 맡아 교토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조슈 번의 미움을 사고 사쓰마 번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가타모리는 1868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함께 퇴각했다.[1]

삿초가 황실을 장악한 후, 요시노부 사퇴 이후 가타모리와 아이즈를 "조정의 적"으로 처벌하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가타모리는 아이즈가 신정부에 복종할 것임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1868년보신 전쟁에서 전쟁 요구에 동의했다.[1]

2. 1. 막부 말기의 정치적 상황

분큐 2년(1862년), 아이즈번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 수호직에 취임하여 신선조를 휘하에 두고 존황양이파 지사들을 강력하게 단속하였다.[1] 금문의 변에서는 막부 측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존황양이파를 제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1]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 수호직을 맡아 조슈 번의 미움을 샀고, 동맹이었던 사쓰마 번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1]

2. 2. 도바-후시미 전투와 아이즈 번의 고립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구 막부군이 패배하자,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함께 에도로 퇴각한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메이지 신정부로부터 추토령을 받았다. 요시노부는 공순 방침을 따랐지만, 아이즈 번 내에서는 주전론이 지배적이었다.[1]

1868년 3월 11일, 에도성이 무혈 개성(에도 개성)되고 요시노부가 미토번에서 근신하게 되자, 사쓰마번·조슈번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는 교토 수호직을 맡았던 가타모리를 좌막파의 중진으로 보아 적대시하였다.

센다이번·요네자와번도호쿠의 여러 번은 아이즈 번에 동정적이었고, 아이즈 번 사면을 탄원하며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결성하여 결속을 강화했다. 오우 14번은 회의를 열어 아이즈 번과 쇼나이번의 사면을 탄원하고자 신정부의 오우 진무 총독 구조 미치타카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동정 대총독부 하 참모 하야시 미치아키는 '아이즈는 사죄를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방침을 이미 결정했고,[6] 조정에 직접 탄원해도 인정받지 못했다.

오우에쓰 열번 동맹은 처음에는 사면 탄원을 목적으로 했지만, 아이즈 번이 메이지 신정부의 통달에 대해 죄를 인정하지 않고 사죄를 거부하는 답변서를 제시하고,[7] 메이지 신정부의 진무사 세라 슈조가 센다이 번사에게 살해당하면서 전쟁으로 기울게 되었다.[8]

2. 3. 오우에쓰 열번 동맹

게이오 4년(1868년) 3월 11일, 에도 성이 무혈 개성(에도 개성)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미토 번에서 근신하게 되자, 사쓰마 번·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는 좌막파의 중진으로 적대시되던 가타모리에게 굴복을 강요했다.

센다이 번·요네자와 번 등 도호쿠의 여러 번은 아이즈 번에 동정적이었고, 아이즈 번 사면을 탄원하는 한편,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결성하여 결속을 강화했다. 오우 14번은 회의를 열고 아이즈 번과 쇼나이 번의 사면 탄원을 목적으로 신정부의 오우 진무 총독 구조 미치타카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6] 그러나 동정대총독부 하참모 하야시 미치아키는 '아이즈는 사죄를 통한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기본 방침을 이미 결정했고, 조정에 직접 탄원해도 인정받지 못했다.

오우에쓰 열번 동맹 결성 시점(시로이시 회의)에서는 사면 탄원이 목적이었지만, 아이즈 번이 메이지 신정부의 통달(4월 25일)에 대해 죄를 인정하지 않고 사죄를 거부하는 답변서(윤4월 15일)를 제시했고[7], 메이지 신정부의 진무사 세라 슈조가 센다이 번사에 의해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전쟁으로 기울게 되었다.[8]

3. 전투의 전개

아이즈번은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알려져 항상 5,000명 이상의 상비군을 유지했다. 아이즈군은 국가 북부 변경 지역과 사할린 남부 등 넓은 지역의 치안 유지에 자주 투입되었다. 페리 제독이 오기 전후에는 에도 만 주변의 치안 유지에도 참여했다.[1]

9대 영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 수호직을 맡아 교토에 많은 병력을 파견했다. 조슈번의 미움을 사고 동맹인 사쓰마번과 사이가 멀어진 가타모리는 1868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함께 퇴각했다.[1]

삿초도가 황실을 장악한 후, 요시노부의 사퇴 이후 가타모리와 아이즈를 "조정의 적"(朝敵)으로 처벌하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그는 아이즈가 새로운 제국 정부에 복종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1868년 말 보신 전쟁 동안 전쟁에 대한 요구에 동의했다. 아이즈군은 오우에쓰 열반 동맹의 일원으로 싸웠지만, 오토리 게이스케 휘하의 구 막부 군대에 의해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패배한 후 버려졌다. 1868년 10월 6일, 아이즈번의 거점인 쓰루가 성이 포위되면서 한 달간의 포위전이 시작되었다.[1]

백호대(서쪽의 백호)는 젊은 십 대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별동대로, 이모리 산에서 세푸쿠(할복)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불타는 성읍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때문에 성이 함락된 것으로 오인한 백호대는 자결을 선택했다. 유일하게 자살에 실패한 이이누마 사다키치 덕분에 이들의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었다.[1]

교토에서 아이즈가 감독했던 특수 경찰대인 신센구미 잔당이 사이토 하지메의 지휘 아래 전투에 참여했다. 쇼기타이 생존자들과 도사 진쇼타이, 공격하는 제국군의 정신적 조언자 역할을 수행하는 신토 사제 부대인 신이타이도 전투에 참여했다.[1]

한 달간의 포위 공격 후, 1868년 11월 6일, 아이즈 관료들은 이웃인 요네자와 번의 중재를 통해 항복하기로 동의했다.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와 그의 아들 노부노리, 그리고 고위 가신들은 황실 사령관들 앞에 직접 나타나 무조건 항복을 제안했다. 사무라이들은 쓰가루 반도에 있는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고, 17세기 중반부터 존재했던 아이즈 번은 사라졌다.[1]

분큐 2년 (1862년),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 수호직에 취임하여 신선조를 휘하에 두고 존황양이파 지사들을 강력하게 단속했으며, 금문의 변에서도 막부 측의 핵심으로 존황양이파를 몰아냈다.[1]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구 막부군이 패배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함께 에도로 퇴각한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메이지 신정부의 추토령을 받은 요시노부의 굴종 방침에 따라 아이즈로 귀국하여 근신했지만, 번내에서는 주전론이 지배적이었다. 신정부 측은 아이즈의 굴종 자세를 신용하지 않았다.[1]

아이즈 전쟁은 아이즈번이 교토 수호직이었기 때문에 원한을 사서 일어났다는 오해가 있지만, 아이즈번이 도바·후시미 전투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군사 준비를 하는 등 수상한 행동을 보인 것이 전쟁으로 이어졌다.[1] 세키야도 회담에서 아이즈번은 도바·후시미 전투의 책임은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에게 있으며, 조정도 이를 수리했으니 아이즈 번에 죄를 물을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센다이 보신사)[1]

게이오 4년 (1868년 3월 11일), 에도성이 무혈 개성(에도 개성)되고 요시노부미토번에서 근신하게 되자, 사쓰마번·조슈번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는 좌막파의 중진이었던 가타모리를 적대시하게 되었다.[1]

추토를 명령받았던 센다이번·요네자와번도호쿠의 여러 번은 아이즈에 동정적이었고, 아이즈 사면을 탄원하며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결성했다. 오우 14번은 회의를 열어 아이즈번과 쇼나이번의 사면 탄원을 위해 신정부의 오우 진무 총독 구조 미치타카에게 탄원서(윤4월 12일)를 제출했지만, 아이즈의 답변서를 받고 동정 대총독부 하 참모 하야시 미치아키는 "아이즈는 실실 사죄를 통해것 외에는 없다"라는 기본 방침을 결정했고[6], 조정에 직접 건백을 해도(태정관 건백서) 인정받지 못했다.[1]

오우에쓰 열번 동맹은 사면 탄원을 목적으로 했지만, 아이즈가 메이지 신정부의 통달(4월 25일)에 대해 죄를 인정하지 않고 사죄를 거부하는 답변서(윤4월 15일)를 제시했고[7], 메이지 신정부의 진무사 세라 슈조가 센다이 번사에 의해 살해된 사건으로 전쟁으로 기울게 되었다.[1] 아이즈 탄원서는 총독부 앞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센다이 번 앞으로 그 주선을 의뢰했을 뿐이며, 항복이나 사죄의 내용은 없었다[8].[1]

3. 1. 전투 준비

아이즈번 이에로 니시고 요리모는 전황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고 보고, 종래부터 주장해오던 가즈 교준을 번주 용호에게 권했다.[40] 그러나 용호는 철저한 항전을 주장하며 징병에 나섰다. 농민과 마을 사람들도 무기를 받고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아이즈 번은 영민에게 가혹한 조세를 부과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 또는 전쟁에까지 휘말리게 된 영민들의 사기는 낮아 도주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도바·후시미 전투의 설욕에 불타는 아이즈 번사와는 대조적이었다.

특히 번의 군자금 확보를 명목으로 자산 대부분을 징발당한 아이즈 마을 사람들은 신정부군을 "관군님"이라 부르고 아이즈 번사를 "회적"이라 불렀다.

또한 신정부군의 거점 확보를 저지하기 위해 일부 마을들을 불태운 것도 영민의 원성을 샀다.

이에 따라 신정부군이 아이즈령 마을에서 대량의 인부, 군자금 등을 징발하더라도 반발하기는커녕 환영하며 이에 응하는 자까지 있는 상태였다.

3. 2. 시라카와구치 전투

시라카와번은 당시 번주가 부재중이었고, 막부 직할령이었다. 구 막부군은 사이고 다노모를 총독으로 하여 게이오 4년 윤4월 20일 (1868년 6월 10일)에 시라카와 성을 점령했다.[1] 이에 신정부군은 사쓰마번 참모 이지치 마사하루의 지휘 아래 윤4월 25일 (6월 15일) 시라카와 공격을 시작, 5월 1일 (6월 20일) 함락시켰다.[1] 구 막부군은 이후 7월까지 약 3개월간 시라카와 탈환을 시도하며 전투를 계속했지만, 실패했다.[1]

3. 3. 니혼마쓰 전투

게이오 4년(1868년) 6월 24일 다나쿠라 성이 함락되고, 7월 16일(9월 2일) 삼춘번이 열번 동맹을 탈퇴하면서 메이지 신정부군은 점점 북상했다. 7월 29일(9월 15일) 대부분의 번병들이 시라카와 구치에 나가 있는 틈을 타 신정부군은 니혼마쓰 성을 공격했다. 성은 함락되었고 니혼마쓰번니와 나가쿠니는 요네자와 번으로 도망쳤다. 니혼마쓰 번은 소년병 부대를 동원하였으며, 이들은 후세 니혼마쓰 소년대로 불렸다. 특히 기무라 총타로가 이끄는 20명은 공성전 도중 대부분 전사해 아이즈 전쟁의 비극 중 하나로 구전되었다.[1]

3. 4. 와카마쓰 성 전투

8월 21일 (10월 6일) 신정부군은 모성고개 전투에서 구막부군을 격파하고 40여 킬로미터를 급진하여 8월 23일(10월 8일) 아침 와카마쓰성 아래로 돌입했다. 신정부군의 전격적인 침공에 앞서 수비대를 각 방면으로 보냈던 아이즈번은 허를 찔려 예비 병력인 백호대까지 투입했지만 어이없이 패했다. 이때 사이고 요리모 저택에서는 농성전의 짐이 되는 것을 괴로워한 어머니와 처자 등 일족 21명이 자결했다.[9] 성 아래에서 발생한 화재를 와카마쓰 성의 함락으로 오인한 백호대 2번대 대원 일부가 이이모리야마에서 자결했다.[9]

4. 아이즈 번의 항복과 전후 처리

아이즈 번은 보신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항복했고, 번은 해체되었다.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와 그의 아들 노부노리는 항복을 제안했고, 사무라이들은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1]

1862년(분큐 2년),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 수호직에 취임하여 존황양이파 지사들을 단속하고 금문의 변에서 막부 측 핵심 역할을 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가타모리는 에도로 퇴각하여 근신했지만, 번 내에서는 주전론이 우세했다. 신정부 측은 아이즈 번의 굴종 자세를 신뢰하지 않았고, 결국 아이즈 전쟁으로 이어졌다.

아이즈 번은 도바·후시미 전투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군사 준비를 하는 등 수상한 행동을 보였다. 에도 성 무혈 개성 이후, 신정부는 좌막파의 중진이었던 가타모리를 적대시했다. 도호쿠 지방의 여러 번들은 아이즈 번에 동정적이었고,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결성하여 아이즈 번 사면을 탄원했지만, 신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사쓰마 번의 군감 기리노 도시아키와 조슈 번의 참모 마에바라 잇세이 등의 배려로 가타모리는 사형을 면하고 근신 처분을 받았다.[17] 전쟁 책임을 지고 가야노 나가오사무가 할복했다. 아이즈 번의 영토는 메이지 정부의 직할지가 되었고, "메이지 정부 민정국"이 설치되었다.

손상된 아이즈 와카마쓰 성 (항복 후에 촬영)

4. 1. 항복 과정

9월에 들어서자 요네자와 번을 비롯한 동맹 번들이 항복하면서 아이즈 번은 고립되었다.[41] 1868년 9월 22일 (11월 6일), 아이즈 번은 신정부군에 항복했다.[10] 동맹 번들 중 끝까지 저항했던 쇼나이번은 이틀 뒤 항복했다.[41]

한 달간의 포위 공격 후, 1868년 11월 6일, 아이즈 관료들은 이웃인 요네자와 번의 중재를 통해 항복하기로 동의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그의 아들 노부노리, 그리고 고위 가신들은 황실 사령관들 앞에 직접 나타나 무조건 항복을 제안했다.[1] 사무라이들은 쓰가루 반도에 있는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고, 17세기 중반부터 존재했던 아이즈 번은 사라졌다.[1]

아이즈 공략전에서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이지치 마사하루 등은 단기 결전을 주장하여 적 본진을 공격했고, 이로 인해 아이즈 번과 쇼나이 번이 프로이센에조치를 매각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었다.[10]

4. 2. 전후 처우와 갈등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아이즈 번이 항복할 때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죄인처럼 묶여 끌려나오는 대신, 가마를 타고 성을 나와 항복하는 것을 허락하여 번사들의 체면을 지켜주었다.[42] 또한, "항복한 이상은 모두 동등한 왕민"이라며 아이즈 번의 죄를 감면해주는 '관전론'을 주장했다. 이는 해외 여러 나라와 대치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혹한 처벌로 유한을 남기고 일본 민족 통합에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44]

그러나 기노 다카요시 등은 엄벌론을 주장하여 신정부 내에서 의견 대립이 있었다. 본래 칙허 없이 영토를 할양한 것은 큰 죄였으나,[43] 아이즈 전투의 주장이었던 이타가키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이타가키는 번사들의 가난한 상태를 보고 특별 공채 발행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타가키는 공정한 가치관을 가지고 아이즈 번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많은 아이즈인들이 유신 후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44]

사쓰마 번의 군감 기리노 도시아키나 조슈 번의 참모 마에바라 잇세이 등도 아이즈 번의 태도에 공감하여 엄벌을 피하려는 노력을 했다.

가로였던 사이고 다노모 등이 할복하려 했으나, 사이고는 행방불명이었고 다른 가로들은 이미 자결한 상태였기에 차석인 가야노 나가오사무가 전쟁 책임을 지고 할복했다.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에도로 호송되었는데, 가신들은 단장의 심정으로 배웅했지만, 영민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46]

아이즈 번의 영토는 메이지 정부의 직할지가 되었고, 와카마쓰 성 아래에는 "메이지 정부 민정국"이 설치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농민들의 봉기를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않고, 아이즈 번의 옛 관리들에게 교섭을 맡겨 농민들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었다.

1870년, 영토를 잃은 아이즈 번사들은 근신이 해제된 후 이나와시로 정(후쿠시마현 야마 군)과 도난(현재의 아오모리 현 무쓰 시) 중 한 곳으로 이주할 것을 제시받았고, 최종적으로 도난을 선택했다. 구 아이즈 번사 4,700여 명이 이주하여 산노헤 번을 세우고, 도난 번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도난"이라는 명칭은 한시에서 따왔다는 설이 널리 알려졌지만, 해당 한시가 존재하지 않아 아키즈키 테이지로의 시에서 유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 도난 번의 대속이었던 다케무라 도시히데는 "도난"이 "외 남부"의 약칭이었으나, 후에 "북두 이남"의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기록했다.[22]

4. 3. 탈영병과 아이즈 세상 바로잡기 봉기

구 막부군 잔존 병력은 아이즈를 떠나 센다이에서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합류하여 에조치(홋카이도)로 향했다(하코다테 전쟁).

아이즈 번이 항복하자,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야야-야-봉기'(아이즈 세상 바로잡기 봉기)를 일으켰다.[45]

5. 역사적 유산과 갈등

아이즈 전쟁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갈등 중 하나로, 그 역사적 유산과 평가는 복잡한 양상을 띤다. 특히 전사자 매장 문제와 지역 감정 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다.
전사자 매장 논란: 1960년대부터 신정부군이 아이즈 번 전사자의 매장을 금지했다는 '매장 금지설'이 널리 퍼졌으나,[19] 2016년 발견된 '전사 시신 수습 금전 입용장' 사본은 이러한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19][20] 이 사료에 따르면, 신정부는 아이즈 번 항복 열흘 후인 1868년 음력 10월 2일에 매장을 명령했고,[19] 아이즈 번사 4명이 중심이 되어 시신 567구를 수습하여 시내 64곳에 매장했다.[19] 다만, 아미타사에서 유해를 개장한 것이 '반년 동안 방치'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지적도 있다.[19]
지역 감정과 역사 인식 왜곡: 관광사학의 영향으로 아이즈 지방에서는 "일방적으로 '조적', '적군' 취급을 받았다는 유감이 있다"라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24] 실제로는 일반 백성들이 아이즈 번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신정부군에 협력하는 경우가 많았다.[24]

서남 전쟁 당시 구 아이즈 번사들이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원한을 품고 정토군에 지원한 사례,[25] 쇼와 시대에 하기시아이즈와카마쓰시에 화해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한 사례,[26] 헤이세이 시대에 아베 신조 총리가 아이즈와카마쓰시를 방문하여 사과한 사례[26] 등은 아이즈 전쟁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최근까지도 아이즈 지방에는 조슈에 대한 반감이 남아있으며,[31] 국도 49호와 관련된 오해[26]나 결혼 반대 사례[32] 등은 이러한 감정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2022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센다이 육영 학원 고등학교와 시모노세키 국제 고등학교가 맞붙자, SNS 상에서 아이즈 전쟁에 비유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33][34]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5. 1. 사쓰마 번, 조슈 번과의 관계

분큐 2년 (1862년),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 수호직에 취임하여 신선조를 휘하에 두고 존황양이파 지사 단속을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금문의 변에서도 막부 측 핵심으로 존황양이파를 배제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구 막부군이 패배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함께 에도로 퇴거한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메이지 신정부의 추토령을 받은 요시노부의 굴종 방침에 따라 아이즈로 귀국하여 근신했지만, 번내에서는 주전론이 지배적이었다. 신정부 측에서도 아이즈의 굴종 자세를 신용하지 않았다.

아이즈 전쟁은 아이즈번이 교토 수호직이었기 때문에 원한을 사서 일어났다는 오해가 있지만, 아이즈번이 가타모리 노신 애청서로서 도바·후시미 전투의 개전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굴종 자세를 보이면서도 군 편성을 하는 등 수상한 행동을 보였기 때문에 전쟁으로 발전했다.

세키야도 회담에서 아이즈번은 도바·후시미 전투의 개전 책임에 대해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이 책임을 지고 사죄 탄원서에 "나 일신의 죄이며, 그 외 장수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기재하여 조정도 이를 수리했으니, 아이즈번에 죄가 있었다 해도 그 죄는 이미 무효가 되었고 토벌받을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센다이 보신사)

게이오 4년 (1868년 3월 11일), 에도성이 무혈 개성(에도 개성)되고 요시노부미토번에서 근신하게 되자, 사쓰마번·조슈번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의 화살은 좌막파의 중진이었던 가타모리를 향하게 되었다.

추토를 명령받았던 센다이번·요네자와번도호쿠 제번은 아이즈에 동정적이었으며, 아이즈 사면을 탄원하는 한편 오우에쓰 열반 동맹을 결성하여 결속을 강화했다. 오우 14번에서는 회의를 열어 아이즈번과 쇼나이번의 사면 탄원을 목적으로 신정부의 오우 진무 총독 구조 미치타카에게 탄원서(윤4월 12일)를 제출했지만, 동정 대총독부 하 참모 하야시 미치아키에 의한 "아이즈는 실실 사죄를 하는 것 외에는 없다"라는 기본 방침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6], 조정에 직접 건백을 행해도 (태정관 건백서) 인정받지 못했다.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결성 시점 (시로이시 회의)에서는 사면 탄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아이즈가 메이지 신정부의 통달 (4월 25일)에 대해 죄를 인정하지 않고 사죄를 거부하는 답변서 (윤4월 15일)를 제시한 것[7]과, 메이지 신정부의 진무사인 세라 슈조가 센다이 번사에 의해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전쟁으로 기울게 되었다.

아이즈 탄원서는 총독부 앞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센다이 번 앞으로 그 주선을 의뢰했을 뿐이며, 문중에는 항복·사죄의 글자도 없었다[8].

페리 제독의 도착 전후 기간 동안 아이즈군은 에도 만 주변의 치안 작전에 참여했다. 9대 영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재임 기간 동안 아이즈 번은 교토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는데, 가타모리가 교토 수호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슈 번의 미움을 사고 동맹인 사쓰마 번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가타모리는 1868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함께 퇴각했다.

삿초도가 황실을 장악한 후, 요시노부의 사퇴 이후, 가타모리와 아이즈를 "조정의 적" (朝敵)으로 처벌하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그는 아이즈가 새로운 제국 정부에 복종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1868년 말 보신 전쟁 동안 전쟁에 대한 요구에 동의했다. 아이즈군은 오우에쓰 열반 동맹의 일원으로 싸웠지만, 결국 오토리 게이스케 휘하의 구 막부 군대에 의해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버려졌다. 이제 고립된 채 싸우게 된 아이즈는 1868년 10월 6일, 아이즈 번의 거점인 쓰루가 성에서 포위되었다. 이것이 한 달간의 포위전의 시작이었다.

5. 2. 역사적 평가와 논란

메이지 유신 이후 아이즈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러 논란을 야기했다.

전사자 매장 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신정부군이 아이즈 번 전사자의 매장을 금지했다는 '매장 금지설'이 1960년대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나,[19] 2016년 발견된 '전사 시신 수습 금전 입용장' 사본은 이러한 주장이 사실과 다름을 보여준다.[19][20] 이 사료에 따르면, 신정부는 아이즈 번 항복 열흘 후인 1868년 음력 10월 2일에 매장을 명령했고,[19] 이후 아이즈 번사 4명이 중심이 되어 시신 567구를 수습하여 시내 64곳에 매장했다.[19] 매장에는 약 74(현재 약 450만 엔)과 연인원 384명이 동원되었으며, 발견 당시 시신의 상태와 야마모토 곤파치 등 이름까지 상세히 기록되었다.[19] 다만, 아이즈와카마쓰시사 연구회의 노구치 신이치는 1869년 2월에 아미타사에서 유해를 개장한 것이 '반년 동안 방치'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한다.[19]

관광사학의 영향으로 역사 인식이 왜곡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아이즈 지방에서는 "일방적으로 '조적', '적군' 취급을 받았다는 유감이 있다"라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24] 실제로는 아이즈 번사(와 그 친족)에 의한 사쓰초에 대한 유감만이 존재했을 뿐, 일반 백성들은 아이즈 번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신정부군에 협력하는 경우가 많았다.[24] 메이지 정부가 아이즈 번의 통치 방식을 유지하려 했을 때 백성들의 반발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24]

서남 전쟁 당시 구 아이즈 번사들이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원한을 품고 정토군에 지원한 사례나,[25] 쇼와 시대에 하기시아이즈와카마쓰시에 화해를 제안했지만 '아직 12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며 거절당한 사례,[26] 헤이세이 시대에 아베 신조 총리가 아이즈와카마쓰시를 방문하여 사과한 사례[26] 등은 아이즈 전쟁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최근까지도 아이즈 지방에는 조슈에 대한 반감이 남아있으며,[31] 국도 49호와 관련된 오해(메이지 시대가 아닌 쇼와 시대에 제정)[26]나 결혼 반대 사례[32] 등은 이러한 감정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2022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센다이 육영 학원 고등학교와 시모노세키 국제 고등학교가 맞붙자, SNS 상에서 아이즈 전쟁에 비유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33][34]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6. 등장 작품

서적



영상 작품


6. 1. 서적


  • 강연겸정, 《보신낙일》(문예춘추, 1978년), 후(문춘문고).[1]
  • 사오토메 미쓰구, 《아이즈 사혼》(역사소설)[2]
  • 성량일, 《아이즈 백호대》 (역사소설)[3]
  • 미야자키 138, 《이야기 아이즈 전쟁 비화》(역사 소설)[4]
  • 간도 이사오·코히야마 로쿠로 편, 《막부 말기·아이즈 번사 명명전》[5]
  • 스기야마 요시노리, 코지마 코유, 《백호대》, 니혼TV방송망주식회사, 1986년[6]
  • 강연겸정, 《무진 낙일》(분게이슌주, 1978년), 이후 분슌 문고.[7]
  • 사오토메 코, 《아이즈 사무라이 정신》(역사 소설)[8]
  • 호시 료이치, 《아이즈 백호대》(역사 소설)[9]
  • 미야자키 토미야, 《이야기 아이즈 전쟁 비화》(역사 소설)[10]
  • 마지마 이사오・코히야마 로쿠로 편, 《막말・아이즈 번사 명명전》[11]
  • 스기야마 요시노리, 코지마 고우세키, 《백호대》, 일본 텔레비전 방송망 주식회사, 1986년[12]
  • 나쿠라 테츠조 외, 《무진 전쟁의 새로운 시점》(프로이센의 의도), 킷카와 코분칸, 2018년[13]
  • 이케즈키 에이, 《아이즈 군상 №47》, 〈돈이 없었던 무진 전쟁(아이즈 번과 프로이센)〉, 역사 춘추사, 2024년 2월[14]

6. 2. 영상 작품

다음은 아이즈 전쟁을 다룬 영상 작품들이다.

  • 꽃의 백호대 (1954년 대하 드라마)
  • 세 자매 (1967년 NHK 대하 드라마)
  • 사자의 시대 (1980년 NHK 대하 드라마)
  • 백호대 (1986년 TV 드라마/일본 TV연말 사극 스페셜)
  • 백호대 (2007년 TV 드라마/TV 아사히)
  • 백호대~ 패배하지 않은 자들 (2013년 TV 드라마/TV 도쿄)
  • 야에의 벚꽃 (2013년 NHK 대하드라마)
  • 꽃의 백호대 (1954년 다이에이 영화)
  • 타오르는 백호대 (1965년 텔레비전 드라마 / TBS)
  • NHK 스페셜 '노려진 보신 전쟁' (프로이센의 의도) (2022년 10월)

참조

[1] 서적 Remembering Aizu: The Testament of Shiba Goro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08
[2] 뉴스 福島会津若松、殉難志士の冥福祈る 茨城新聞 2014-05-02
[3] 문서 うち少年兵500余
[4] 문서 旧幕府兵・民兵など含む、諸説あり
[5] 문서 城内防衛
[6] 서적 戊辰戦争史
[7]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防長回天史』第6篇上 246頁 https://dl.ndl.go.jp[...]
[8] 서적 東北戦争 教育社歴史新書
[9] 문서 最年少隊士の[[飯沼貞吉]]のみは蘇生し、[[昭和]]6年([[1931年]])まで生存。
[10] 서적 板垣精神 一般社団法人板垣退助先生顕彰会編纂
[11] 서적 板垣退助君傳記
[12] 문서 という説はあるが、信頼できる一次史料で確認できるものはない
[13] 문서 条約書面上は「99年間の租借」
[14] 서적 無形板垣退助
[15] 문서 牧野登「会津人が書けなかった会津戦争」より
[16] 서적 英国公使館員の維新戦争見聞記 1974
[17] 서적 幕末悲劇の会津藩主 松平容保 中経出版 2013
[18] 문서 中須賀哲朗・訳「英国公使館員の維新戦争見聞記」より
[19] 뉴스 “半年間、遺体を野ざらし”はなかった? 薩長の「埋葬禁止令」を覆す新史料 https://dot.asahi.co[...] AERA dot 2018-03-08
[20] 서적 会津戊辰戦死者埋葬の虚と実 歴史春秋社 2017
[21] 웹사이트 会津藩士埋葬の史料発見 「戦死屍取仕末金銭入用帳」の写し http://www.minpo.jp/[...] 福島民報 2017-09-25
[22] 서적 野辺地町史 通説編第二巻
[23] 서적 会津戊辰戦史 会津戊辰戦史編纂会 1933
[24] 서적 野辺地町史 通説編第二巻
[25] 웹사이트 ある明治人の記録:会津人柴五郞の遺書(柴 五郎著) https://www.komazawa[...] 駒澤大学 2017-07-15
[26] 간행물 会津VS長州だけじゃない日本の郷土紛争 彦根VS薩摩の争点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2015-07-11
[27] 뉴스 2011年4月2日 会津若松へ長州・萩から義援金 旧敵でも「ありがたい」 http://www.asahi.com[...] 朝日新聞社 2011-04-02
[28] 웹사이트 萩市 平成23年 萩市の主な出来事 http://www.city.hagi[...] 2012-11-25
[29] 웹사이트 福島民報 2012-11-25 山口の萩市長が観光支援で若松訪問 http://www.minpo.jp/[...] 2012-11-25
[30] 뉴스 『八重の桜』描写 山口・福島県民の怒り温度差にNHKが配慮 https://www.news-pos[...] 小学館 2013-03-31
[31] 뉴스 『八重の桜』の長州藩描写 山口県民は受け入れ難いの意見多し https://www.news-pos[...] 講談社 2013-03-31
[32] 웹사이트 新婚さんいらっしゃい 【婿養子は見た!妻家族の怪奇風習&37年越しの愛の奇跡!】 の番組概要ページ https://tvtopic.goo.[...] gooテレビ番組(関東版) 2019-02-17
[33] 웹사이트 【甲子園】さあ決勝、SNSで“令和の戊辰戦争”話題沸騰の理由 初Vかけ仙台育英VS下関国際 https://www.nikkansp[...] 2022-08-22
[34] 웹사이트 甲子園、仙台育英が悲願の初優勝…高校野球を “追放” された渡部建は何を思うのか https://smart-flash.[...] 2022-08-22
[35] 웹사이트 【夏の甲子園】仙台育英が“東北勢悲願の初V” 下関国際に勝利 斎藤蓉が好投&5番岩崎生弥が満塁ホームラン https://news.ntv.co.[...] 2022-08-23
[36] 뉴스 福島会津若松、殉難志士の冥福祈る 茨城新聞 2014-05-02
[37] 문서 うち少年兵500余
[38] 문서 旧幕府兵・民兵など含む、諸説あり
[39] 문서 城内防衛
[40] 웹사이트 유카리의 인물 일람 | 아이즈 무가의 저택 http://bukeyashiki.c[...]
[41] 서적 이타가키 정신 일반사단법인 이타가키 퇴조선생 현창회 편찬
[42] 서적 이타가키 타이스케군전기
[43] 문서 조약 서면상은 '99년간의 조차'
[44] 서적 무형판 울타리 퇴조
[45] 문서 마키노보루 '아이즈인이 쓸 수 없었던 아이즈 전쟁'에서
[46] 문서 나카스카 테츠로·역 「영국 공사관원의 유신 전쟁 견문기」에서
[47] 웹인용 "= 회진번사매장의 자료 발견 '전사말 금전입용장' 사본 http://www.minpo.jp/[...] refactercess
[48] 서적 아이즈 보신전사 아이즈 보신전사편찬회 쇼와 8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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