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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볼드 매클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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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미국의 시인, 극작가, 작가, 변호사, 사서, 정부 관료였다.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나 예일 대학교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파리에서 문학 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와 시집 '정복자'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의회 도서관장과 국무부 차관보를 역임했다. 그는 'J.B.'로 퓰리처상 희곡 부문을, 'Collected Poems, 1917-1952'로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하는 등 세 차례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밥 딜런과 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69년에는 아폴로 11호 달 착륙을 기념하는 시를 발표했고, 이후 학계로 돌아가 활동하다 198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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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볼드 매클리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아치볼드 매클리시
원어 이름Archibald MacLeish
출생1892년 5월 7일
출생지미국일리노이주글렌코
사망1982년 4월 20일
사망지미국매사추세츠주보스턴
직업
직업시인, 극작가, 에세이 작가, 공무원
주요 작품패닉
J.B.
학력
학력예일 대학교 (학사)
하버드 대학교 (석사)
경력
제1대 직위국무부 공보문화 담당 차관보
대통령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임기 시작1944년 12월 20일
임기 종료1945년 8월 17일
전임(신설)
후임윌리엄 벤턴
제9대 직위의회도서관장
대통령프랭클린 D. 루스벨트
임기 시작1939년 7월 10일
임기 종료1944년 12월 19일
전임허버트 퍼트넘
후임루터 H. 에번스

2. 초기 생애 및 교육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1919년에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 정부학과에서 한 학기 동안 법학을 가르쳤다. 잠시 ''뉴 리퍼블릭''의 편집자로 일했으며, 이후 보스턴의 법률 회사 초트, 홀 & 스튜어트에서 3년간 변호사로 활동했다.[7] 1926년에 출판된 그의 시 ''추모의 빗물''은 전쟁에 대한 그의 환멸을 드러냈다.[1]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일리노이주 글렌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스코틀랜드 출신 앤드루 매클리시는 잡화 상인이었으며, 카슨 피리 스콧 백화점의 창립자였다.[2] 그의 어머니 마사(결혼 전 성씨: 힐라드)는 대학교수였으며 록퍼드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다.[3] 그는 미시간호에 접한 저택에서 자랐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 핫치키스 학교에 다녔다. 대학교육을 위해 매클리시는 예일 대학교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파이 베타 카파에 선출되었고, 해골과 뼈 클럽에 선발되었다. 그 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여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자로 활동했다.[4]

2. 2. 학창 시절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일리노이주 글렌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스코틀랜드 출신 앤드루 매클리시는 잡화 상인이었으며, 카슨 피리 스콧 백화점의 창립자였다.[2] 그의 어머니 마사(결혼 전 성씨: 힐라드)는 대학교수였으며 록퍼드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다.[3] 그는 미시간호에 접한 저택에서 자랐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 핫치키스 학교에 다녔다. 대학교육을 위해 매클리시는 예일 대학교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파이 베타 카파에 선출되었고, 해골과 뼈 클럽에 선발되었다. 그 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여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자로 활동했다.[4]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그의 학업은 중단되었는데, 처음에는 구급차 운전병으로, 나중에는 포병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마른 전투에 참전했다.[5] 그의 형제인 케네스 매클리시는 전쟁 중 전사했다.[6] 1919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 정부학과에서 한 학기 동안 법학을 가르친 후, 잠시 ''뉴 리퍼블릭''의 편집자로 일했다. 다음으로 보스턴의 법률 회사 초트, 홀 & 스튜어트에서 3년간 변호사로 활동했다.[7]

2.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매클리시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학업이 중단되자, 처음에는 구급차 운전병으로, 나중에는 포병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마른 전투에 참전했다.[5] 그의 형제인 케네스 매클리시는 전쟁 중 전사했다.[6]

3. 파리 시절 (1923-1928)

1923년, 매클리시는 변호사 사무실을 나와 아내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여 거트루드 스타인어니스트 헤밍웨이를 포함한 문학 망명자 공동체에 합류했다. 그들은 헤밍웨이, 젤다 피츠제럴드, F. 스콧 피츠제럴드, 존 도스 패소스, 페르낭 레제, 장 콕토, 파블로 피카소, 존 O'하라, 콜 포터, 도로시 파커, 로버트 벤츨리 등이 포함된 유명한 리비에라의 제럴드 머피와 사라 머피 부부의 일원이었다. 1928년 미국으로 돌아왔다.[1] 1932년, 매클리시는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을 미국의 경험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한 장시 "정복자"를 출판했고, 1933년에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9]

3. 1. 블랙 선 프레스와의 인연

1923년, 매클리시는 변호사 사무실을 나와 아내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여 거트루드 스타인어니스트 헤밍웨이를 포함한 문학 망명자 공동체에 합류했다.[1] 파리에 있는 동안 블랙 선 프레스의 출판인인 해리 크로스비는 매클리시의 시를 출판하겠다고 제안했다.[8] 매클리시와 크로스비는 모두 사회의 일반적인 기대를 뒤엎고 법률 및 금융 분야의 전통적인 직업을 거부했다. 크로스비는 매클리시의 장시 "아인슈타인"을 150부의 고급판으로 출판했고, 이 책은 빠르게 매진되었다. 매클리시는 이 작품에 대해 200USD를 받았다.[8]

4. 미국 귀환 및 문학 활동 (1928-1939)

1923년, 매클리시는 변호사 사무실을 나와 아내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여 거트루드 스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문학 망명자 공동체에 합류했다. 이들은 F. 스콧 피츠제럴드, 젤다 피츠제럴드, 존 도스 패소스, 페르낭 레제, 장 콕토, 파블로 피카소, 존 오하라, 콜 포터, 도로시 파커, 로버트 벤츨리 등이 속한 제럴드 머피와 사라 머피 부부의 리비에라 모임에도 참여했다. 1928년, 매클리시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파리에 있는 동안 블랙 선 프레스의 출판인 해리 크로스비는 매클리시에게 시 출판을 제안했다. 매클리시와 크로스비는 모두 사회의 일반적인 기대를 저버리고 법률 및 금융 분야의 전통적인 직업을 거부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크로스비는 매클리시의 장시 "아인슈타인"을 150부 한정 고급판으로 출판했고, 이 책은 빠르게 매진되었다. 매클리시는 이 작품으로 200USD를 받았다.[8]

4. 1. '정복자(Conquistador)'와 퓰리처상 수상 (1932)

1932년, 매클리시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을 미국의 경험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한 장시 "정복자"를 출판했다.[9] 이 작품으로 1933년 매클리시는 세 번의 퓰리처상 중 첫 번째 상을 받았다.[9]

4. 2. 사회 참여적 작품 활동

1930년부터 1938년까지 헨리 루스의 ''Fortune''에서 작가이자 편집자로 일했으며,[1] 이 기간 동안 그는 특히 반파시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0년대에 그는 자본주의를 "상징적으로 죽었다"고 생각했으며, 이에 대한 응답으로 시극 ''패닉''(1935)을 썼다.

1932년, 매클리시는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을 미국의 경험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한 장시 "정복자"를 출판했다. 1933년, "정복자"는 매클리시에게 수여된 세 개의 퓰리처상 중 첫 번째를 안겨주었다.[9]

1934년, 그는 니콜라스 나보코프와 레오니드 마신의 발레 ''Юнион Пасифик|Union Pacificru'' (발레 뤼스 드 몽테카를로)를 위한 대본을 썼으며, 이 작품은 필라델피아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8년, 매클리시는 도로시아 랭, 워커 에반스, 아서 로스스타인, 벤 샨, 농업안전청 및 기타 기관이 촬영한 88장의 농촌 불황 사진을 바탕으로 한 장시 "자유의 땅"을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영향을 미쳤다.

1923년 파리로 건너간 그는 T. S. 엘리엇,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에즈라 파운드 등의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24년 「행복한 결혼」, 1925년 「흙 항아리」 등 반전 시로 명성을 얻었다. 1928년 귀국하여 1932년 「정복자(''Conquistador'')」로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시극이나 라디오 드라마도 집필하여 절박한 사회 정세를 호소했으며, "뉴딜의 계관 시인"이라고 불렸다.[35]

5. 의회 도서관장 및 공직 활동 (1939-1945)

1944년의 맥클리시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의회 도서관장(1939-1944)을 지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 전쟁부의 사실과 정보국 국장과 전쟁정보국 부국장을 역임하며 선전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 공공 문제 담당 차관보로서 유네스코 창설에 미국 대표로 참여, 1945년 유네스코 헌장 전문("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므로 평화의 방어는 인간의 마음에서 구축되어야 한다."[17]) 작성에 기여했다.[15][16]

중앙정보국(CIA)의 전신 전략사무국(OSS)의 연구분석부 개발을 지원, 윌리엄 L. 랭어와 함께 미국 학술 단체 협의회와 협력하여 사회과학 전문가들을 모집했다.[14]

미국 국무부 차관보 시절, 포츠담 선언에 관여했으며, 조지프 그루의 천황 안전 보장 대일 강화안에 강력히 반대했다.[37]

5. 1. 의회 도서관장 임명 (1939)

미국 도서관 협회는 매클리시를 미국에서 "20세기 사서직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꼽았다.[10] 매클리시의 도서관 및 공공 봉사 경력은 본인의 의지가 아닌, 가까운 친구인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의 권유와, 매클리시의 표현에 따르면 "대통령이 내가 의회 도서관장이 되기를 결정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11]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매클리시를 지명한 것은 논란이 많았고 매우 정치적인 책략이었으며, 여러 난관에 직면했다.

매클리시는 하버드 대학교 총장 등에서 지지를 구했지만, 아무런 지원도 얻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시카고 대학교 도서관의 M. 르웰린 레이니와 같은 곳에서 지지를 얻었고, 이는 미국 도서관 협회(ALA)가 매클리시의 지명에 반대하는 서명 운동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12] 의회 내에서 매클리시의 지명에 대한 공화당의 주요 주장은 그가 시인이자 공산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동조자"라는 것이었다. 매클리시는 "내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공산주의자들 자신이 가장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단언했다.[12] 의회에서 매클리시의 주요 지지자는 상원 다수당 대표인 앨번 바클리 켄터키주 민주당 의원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원과 바클리 상원의원의 미국 상원에서의 능숙한 변호로, 63명의 상원 의원이 매클리시의 임명을 찬성하는 호명 투표에서 승리를 거두었다.[12] 매클리시는 1939년 7월 10일 매사추세츠주, 컨웨이의 지역 우체국장에 의해 의회 도서관장으로 선서했다.[1]

매클리시는 대통령과의 비공개 면담에서 도서관에 대한 루스벨트의 견해를 알게 되었다. 루스벨트에 따르면, 급여 수준이 너무 낮고 많은 사람을 해고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 직후, 매클리시는 은퇴하는 의회 도서관장 허버트 푸트남과 뉴욕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푸트남은 도서관에서 계속 일할 의향이 있으며, 명예 도서관장 직함을 받고, 자신의 사무실은 매클리시의 사무실 바로 옆에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만남은 매클리시에게 의회 도서관장으로서 자신이 "불인기적인 신참으로, 현 상태를 뒤흔드는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점을 더욱 명확하게 했다.[12]

의회 도서관 열람실


매클리시의 딸 미미는 "아빠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하시나요? 책을 나눠주나요?"라고 질문했고, 그는 "사서 일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지 발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12] 매클리시는 자신의 직무 설명을 만들고, 도서관이 현재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배우기 시작했다. 1944년 10월, 매클리시는 도서관을 재조직할 의도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든 조치가 필요했고,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겨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고 말했다.[12]

매클리시의 주요 업적은 부서장, 수석 보조 사서 및 기타 행정가들과의 매일의 직원 회의를 시작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후 수집 정책, 재정 운영, 목록 작성, 홍보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대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매클리시에게 도서관 전반의 다양한 문제를 알렸다. 푸트남은 이러한 회의에 참석하도록 명시적으로 초청받지 못했고, 그 결과 명예 도서관장은 "몹시 마음 상해"했지만, 매클리시에 따르면 푸트남을 제외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12]

푸트남 재임 기간 동안 도서관은 도서관 목록을 작성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책을 수집하고 있었다. 1939년 12월의 보고서에 따르면, 도서관 소장품의 4분의 1 이상이 아직 목록화되지 않았다. 매클리시는 의회 도서관 외부의 전문가들로부터 조언을 구하도록 지시받은 또 다른 위원회를 설립하여 수집 및 목록 작성 문제를 해결했다. 이 위원회는 도서관의 많은 주제 영역이 적절하고, 다른 많은 영역은 놀랍게도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을 수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의회 도서관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수 항목을 수집할 수 있도록 수집에 대한 일반 원칙을 설정했다. 이러한 원칙에는 의회 의원 및 정부 관료에게 필요한 모든 자료, 미국 국민의 삶과 업적을 표현하고 기록하는 모든 자료, 미국 국민에게 가장 즉각적인 관심사가 되는 과거와 현재의 다른 사회의 자료가 포함되었다.[12]

매클리시는 운영 구조를 재조직하기 시작했다. 도서관학 분야의 선도적인 학자들에게 도서관의 관리 구조를 분석하는 위원회가 할당되었다. 이 위원회는 1940년 4월에 구성된 지 단 두 달 만에 주요한 구조 조정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35개의 부서를 거느리고 있던 매클리시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도서관 기능을 행정, 처리, 참고의 세 부서로 나누었다. 그런 다음 모든 기존 부서가 적절하게 배정되었다.[12] 매클리시는 의회 도서관 내부 및 외부의 도서관 과학자들을 포함시켜, 그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도서관 커뮤니티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1년 이내에 매클리시는 의회 도서관을 완전히 재구성하여, 도서관이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사물의 신비에 대한 보고"를 할 수 있도록 했다.[13]

매클리시는 다양한 형태의 공공 옹호를 통해 의회 도서관을 홍보했다. 1940년 3월에 의회에 제출한 예산 제안에서 백만 달러가 넘는 예산 증액을 요청한 것이었을 것이다. 도서관은 전액 증액을 받지 못했지만, 367,591달러의 증액을 받았으며, 이는 지금까지 가장 큰 연간 증액이었다.[12] 증액된 예산의 대부분은 급여 수준 개선, 소외된 주제 영역의 수집 증가, 그리고 새로운 직위에 사용되었다. 매클리시는 1944년 12월 19일 의회 도서관장직에서 사임하고 공공 문제 담당 국무차관 직을 맡았다.[1]

5. 2. 의회 도서관 개혁

미국 도서관 협회는 매클리시를 미국에서 "20세기 사서직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꼽았다.[10] 매클리시는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의 권유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결정으로 의회 도서관장이 되었다.[11] 루스벨트 대통령의 매클리시 지명은 정치적인 책략으로 여겨져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매클리시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시카고 대학교 도서관의 M. 르웰린 레이니 등의 지지를 얻어 미국 도서관 협회(ALA)의 반대 서명 운동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12] 공화당은 매클리시가 시인이자 공산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동조자"라는 이유로 지명을 반대했다. 그러나 매클리시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앨번 바클리 상원 다수당 대표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원으로 미국 상원에서 63명의 찬성표를 얻어 임명되었다.[12] 매클리시는 1939년 7월 10일 의회 도서관장으로 선서했다.[1]

매클리시는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해 도서관의 낮은 급여 수준과 해고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전임 의회 도서관장 허버트 푸트남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불인기적인 신참"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12]

매클리시는 딸 미미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직무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12] 그는 도서관의 조직 구조를 배우고, 1944년 10월까지 "어떤 문제든 조치가 필요했고,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겨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고 말했다.[12]

매클리시는 부서장들과의 회의를 시작하고, 수집 정책, 재정 운영, 목록 작성, 홍보 등 다양한 프로젝트 위원회를 구성하여 도서관 전반의 문제를 파악했다. 푸트남은 회의에 초청받지 않아 불만을 표했지만, 매클리시는 그의 불필요한 참견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12]

매클리시는 1939년 12월 보고서를 통해 도서관 소장품의 4분의 1 이상이 목록화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외부 전문가 위원회를 통해 수집 및 목록 작성 문제를 해결했다. 위원회는 의회 도서관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수 항목을 수집할 수 있도록 일반 원칙을 설정했다. 이 원칙에는 의회 의원 및 정부 관료에게 필요한 모든 자료, 미국 국민의 삶과 업적을 표현하고 기록하는 모든 자료, 미국 국민에게 가장 즉각적인 관심사가 되는 과거와 현재의 다른 사회의 자료가 포함되었다.[12]

매클리시는 도서관학 분야의 학자들에게 도서관 관리 구조 분석을 의뢰하여 1940년 4월에 보고서를 받았다. 보고서에 따라 도서관 기능을 행정, 처리, 참고의 세 부서로 나누고 35개의 부서를 재배치했다.[12] 매클리시는 1년 만에 의회 도서관을 완전히 재구성하여 효율성을 높였다.[13]

매클리시는 1940년 3월 의회에 백만 달러 이상의 예산 증액을 요청하여 367,591달러의 증액을 얻어냈다. 이는 당시 가장 큰 연간 증액이었으며, 급여 수준 개선, 소외된 주제 영역의 수집 증가, 새로운 직위에 사용되었다.[12] 매클리시는 1944년 12월 19일 의회 도서관장직에서 사임하고 공공 문제 담당 국무차관 직을 맡았다.[1]

5. 3. 제2차 세계 대전과 전시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맥클리시는 미국 전쟁부 산하 사실과 정보국 국장과 전쟁정보국 부국장을 역임했다. 이 직책들은 선전에 깊이 관여했는데, 맥클리시는 이전 10년 동안 정치적 동기가 부여된 많은 작품을 썼기 때문에 그의 재능에 매우 적합했다.[15] 그는 공공 문제 담당 차관보로 1년을 보냈고, 유네스코 창설에 미국 대표로 1년을 더 보냈으며, 1945년 유네스코 헌장 전문("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므로 평화의 방어는 인간의 마음에서 구축되어야 한다."[17])에 기여했다.[15][16]

맥클리시는 또한 중앙정보국의 전신인 전략사무국의 새로운 "연구분석부" 개발을 지원했다. 윌리엄 L. 랭어의 감독하에 미국 학술 단체 협의회와 미국 국회도서관 사서였던 맥클리시의 도움으로 사회과학 전반에서 전문적인 직원을 모집했다.[14]

5. 4. 국무부 차관보 시절 (1944-1945)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맥클리시는 미국 전쟁부의 사실과 정보국 국장과 전쟁정보국 부국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직책은 선전에 깊이 관여되었는데, 이는 이전에 정치적 동기가 부여된 많은 작품을 썼던 맥클리시의 재능에 적합했다. 그는 공공 문제 담당 차관보로 1년을 보냈고, 유네스코 창설에 미국 대표로 1년을 더 보냈으며, 1945년 유네스코 헌장 전문("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므로 평화의 방어는 인간의 마음에서 구축되어야 한다."[17])에 기여했다.[15][16] 이후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 학계로 돌아갔다.

맥클리시는 또한 중앙정보국의 전신인 전략사무국의 새로운 "연구분석부" 개발을 지원했다. 이 작전은 하버드 대학교의 저명한 역사학자 윌리엄 L. 랭어가 감독했으며, 미국 학술 단체 협의회와 미국 국회도서관 사서였던 맥클리시의 도움을 받아 사회과학 전반에서 전문적인 직원을 모집했다.[14]

국무 차관보 시절에는 포츠담 선언에 관여했으며, 조지프 그루가 작성한 천황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일 강화안에 강력히 반대했다.[37]

6. 전후 활동 및 말년 (1945-1982)

매클리시는 마르크스주의의 장점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했지만, 1940년대와 1950년대에 J. 에드거 후버조지프 매카시를 포함한 반공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는 그가 미국 작가 연맹과 같은 좌익 단체에 관여하고 저명한 좌익 정치 작가들과 친분을 맺은 것과 관련이 있었다.[18] 타임지의 휘태커 챔버스는 1941년 기사에서 그를 동조자로 언급하기도 했다.[18]

매클리시는 초기 작품에서 시인이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모더니즘적 입장을 받아들였고, 그의 가장 유명한 시 "Ars Poetica"는 "시는 의미가 있어서는 안 된다 / 존재해야 한다"라는 모더니스트 미학의 고전적인 표현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모더니즘의 순수 미학과 결별하고, 공적인 삶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시인에게 적절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역할이라고 믿게 되었다.

일리노이주 쿡군에서 태어난 매클리시는 예일 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변호사로 일했다. 1923년 파리로 건너가 T. S. 엘리엇,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에즈라 파운드 등의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24년 「행복한 결혼」, 1925년 「흙 항아리」 등 반전 시로 명성을 얻었다. 1928년 귀국 후 1932년 「정복자(''Conquistador'')」로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시극이나 라디오 드라마도 집필하여 절박한 사회 정세를 호소했으며, "뉴딜의 계관 시인"이라고 불렸다.[35]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강한 신임을 얻어 연설문 작성자도 담당했다.[36]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의회 도서관 관장, 1944년부터 1945년까지 국무부 차관보 등 정부 요직을 역임했다. 국무 차관보 시절에는 포츠담 선언에 관여했으며, 조지프 그루가 작성한 천황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일 강화안에 강력히 반대했다.[37]

6. 1. 학계 복귀 및 창작 활동

매클리시는 1949년 하버드 대학교의 보일스턴 수사학 및 웅변학 교수가 되었고, 1962년 은퇴할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18] 1959년에는 그의 희곡 ''J.B.''가 퓰리처상 희곡 부문을 수상했다.[19] 1963년부터 1967년까지는 앰허스트 칼리지의 존 우드러프 심슨 강사였다.[19]

매클리시는 T. S. 엘리엇에즈라 파운드를 매우 존경했으며, 그의 작품은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46년부터 1958년까지 반역죄로 워싱턴 D.C.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 수감되어 있던 에즈라 파운드를 석방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문학적 인물이었다.[18]

1969년, 매클리시는 ''뉴욕 타임스''로부터 아폴로 11호 달 착륙을 기념하는 시를 써달라는 의뢰를 받아 "달로의 항해"라는 시를 썼다. 이 시는 1969년 7월 21일자 ''타임'' 잡지 표지에 실렸다.[2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매클리시는 정부를 떠나 창작에 전념했다. 1953년, ''Collected Poems, 1917-1952''로 전미 도서상 및 두 번째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1962년부터 하버드 대학교 명예 교수였다.[38]

6. 2. 두 번째, 세 번째 퓰리처상 수상

매클리시는 1932년 "정복자(''Conquistador'')"로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3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창작에 전념하던 중, 1953년 ''Collected Poems, 1917-1952''로 전미 도서상과 두 번째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38] 1959년에는 희곡 ''J.B.''로 퓰리처상 희곡 부문을 수상하며 세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19]

6. 3. 에즈라 파운드 석방 노력

에즈라 파운드T. S. 엘리엇을 매우 존경했던 매클리시는 그의 작품에서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매클리시는 1946년부터 1958년까지 반역죄워싱턴 D.C.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 수감되어 있던 에즈라 파운드를 석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문학적 인물이었다.[18]

6. 4. 밥 딜런과의 협업 시도

1969년, 매클리시는 밥 딜런을 만나 스티븐 빈센트 베네의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를 바탕으로 쓰고 있던 뮤지컬 ''스크래치''에 곡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19] 그러나 이 협업은 실패로 끝났고, ''스크래치''는 음악 없이 개봉되었다. 딜런은 그의 자서전 ''연대기, 1권''의 세 번째 장에서 이 협업에 대해 설명한다.[20][21]

6. 5. 달 착륙 기념 시

1969년, 뉴욕 타임스는 매클리시에게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기념하는 시를 써달라고 의뢰했다. 매클리시는 이 시를 "달로의 항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시는 1969년 7월 21일자 타임 표지에 실렸다.[22] 당시 타임의 편집장이었던 A. M. 로젠탈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는 우주인들이 착륙했을 때 타임의 표지에 무엇이 필요할지 결정했다. 시인이 무엇을 썼는지가 가장 중요했지만, 우리는 또한 독자들에게 '여러분, 이 신문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 표현할 방법을 모르며,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이니, 우리 모두를 위해 시도할 시인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달이나 우리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 한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다음에는 그의 영혼에 더 많은 열정을 가진 사람, 3개의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치볼드 매클리시를 위해 더 높이 뻗어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정시에 시를 제출했고 '달로의 항해'라는 제목을 붙였다."[22]

7. 유산 및 평가

매클리시는 예술, 문화, 도서관 발전에 힘썼으며, 미국 계관시인 제도 확립에 기여한 최초의 국회 도서관 사서였다.[12] 그는 이 직책을 종신직이 아닌 순환직으로 만들었다.[12]

1972년 6월 5일자 ''The American Scholar''에 실린 에세이에서 매클리시는 도서관과 사서직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밝히며, 이 주제에 대한 현대적 사고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매클리시의 논문 두 컬렉션은 예일 대학교 베이네케 희귀본 및 원고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24][25] 그의 논문과 개인 도서관 자료 13,500여 점은 매사추세츠주 그린필드의 그린필드 커뮤니티 칼리지 아치볼드 매클리시 컬렉션에 보관되어 있다.[26] 스미스 칼리지의 매클리시 야외 연구소는 매클리시와 그의 아내 에이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7]

일리노이주 쿡군 출신인 매클리시는 예일 대학교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1923년 파리로 건너가 T. S. 엘리엇,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에즈라 파운드 등의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 1924년 「행복한 결혼」, 1925년 「흙 항아리」 등 반전 시로 명성을 얻었다. 1928년 귀국, 1932년 「정복자(''Conquistador'')」로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시극과 라디오 드라마를 집필하며 사회 현실을 비판했고, "뉴딜의 계관 시인"으로 불렸다.[35]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연설문 작성자로도 활동했다.[36]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의회 도서관 관장, 1944년부터 1945년까지 국무부 차관보를 역임하며 포츠담 선언에 관여했고, 조지프 그루의 천황 안전 보장 대일 강화안에 반대했다.[3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창작에 전념, 1949년부터 1962년까지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3년 ''Collected Poems, 1917-1952''로 전미 도서상과 두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고, 1962년부터 하버드 대학교 명예 교수로 활동했다.[38]

7. 1. 미국 계관시인 제도 확립 기여

매클리시는 예술, 문화, 도서관 발전에 힘썼다. 특히, 미국 계관시인 제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최초의 국회 도서관 사서였다.[12] 1937년, 부유한 조선업자 아처 M. 헌팅턴의 기부로 의회 도서관 계관시인 자문위원 직책이 만들어졌다. 헌팅턴은 시인 조셉 아우스랜더를 이 직책에 임명하길 원했지만, 매클리시는 아우스랜더의 작품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클리시는 아우스랜더를 통해 로빈슨 제퍼스, 로버트 프로스트와 같은 훌륭한 시인들이 도서관에서 낭독회를 열도록 이끌 수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자문위원 직책을 종신직이 아닌 순환직으로 만들었다.[12]

1943년, 매클리시는 루이즈 보겐을 계관시인으로 임명하여 시와 의회 도서관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드러냈다. 보겐은 오랫동안 매클리시의 작품을 비판해왔던 인물이었기에, 그녀는 매클리시에게 임명 이유를 물었다. 매클리시는 그녀가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답하며, 의회 도서관과 예술 발전에 대한 자신의 신념이 개인적인 갈등보다 우선함을 보여주었다.[23]

8. 수상 경력

9. 작품 목록

아치볼드 매클리시의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시집'''


  • ''Class Poem'' (1915)
  • ''Songs for a Summer's Day'' (1915)
  • ''Tower of Ivory'' (1917)
  • ''The Happy Marriage'' (1924)
  • ''The Pot of Earth'' (1925)
  • ''Nobodaddy'' (1926)
  • ''Streets in the Moon'' (1926)[33]
  • ''The Hamlet of A. Macleish'' (1928)
  • ''Einstein'' (1929)
  • ''New Found Land'' (1930)
  • ''Conquistador'' (1932)
  • 엘페노르(''Elpenor'') (1933)
  • ''Frescoes for Mr. Rockefeller's City'' (1933)
  • ''Poems, 1924–1933'' (1935)
  • ''Public Speech'' (1936)
  • ''The Land of the Free'' (1938)
  • ''Actfive and Other Poems'' (1948)
  • ''Collected Poems'' (1952)
  • ''Songs for Eve'' (1954)
  • ''The Collected Poems of Archibald MacLeish'' (1962)
  • ''The Wild Old Wicked Man and Other Poems'' (1968)
  • ''The Human Season, Selected Poems 1926–1972'' (1972)
  • ''New and Collected Poems, 1917–1976'' (1976)


'''산문'''

  • 《미국의 유대인》 (1936)
  • 《미국은 약속이었다》 (1939)
  • 《무책임한 자들: 선언》 (1940)
  • 《미국의 대의》 (1941)
  • 《말할 시간》 (1941)
  • 《미국의 여론과 전쟁: 리드 강연》 (1942)
  • 《행동할 시간: 선별된 연설》 (1943)
  • 《자유는 선택할 권리이다》 (1951)
  • 《예술 교육과 창의적 과정》 (1954)
  • 《시와 경험》 (1961)
  • 《아치볼드 매클리시와 마크 반 도렌의 대화》 (1964)
  • 《엘리너 루스벨트 이야기》 (1965)
  • 《계속되는 여정》 (1968)
  • 《어떤 대의의 챔피언: 사서직에 관한 에세이와 연설》 (1971)
  • 《시와 의견: 에즈라 파운드의 피산 칸토스》 (1974)
  • 《지구의 기수: 에세이와 회상》 (1978)
  • 《아치볼드 매클리시의 편지, 1907–1982》 (1983)


'''희곡'''

  • 《유니언 퍼시픽》(발레) (1934)
  • 《패닉》(Panic) (1935)
  • 《도시의 멸망》(The Fall of the City) (1937)
  • 《공습: 라디오를 위한 운문극》(Air Raid: A Verse Play for Radio) (1938)
  • 《주를 위한 대화》(Colloquy for the States) (1943)
  • 《아메리카 이야기: 10번의 방송》(The American Story: Ten Broadcasts) (1944)
  • 《트로이의 목마》(The Trojan Horse) (1952)
  • 《이 음악은 물 위에서 나를 스쳐 지나갔다》(This Music Crept By Me on the Waters) (1953)
  • 《J.B.》(J.B.) (1958)
  • 《세 개의 단편극: 자유의 비밀. 공습. 도시의 멸망》(Three Short Plays: The Secret of Freedom. Air Raid. The Fall of the City.) (1961)
  • 《콩웨이로의 저녁 여행》(An Evening's Journey to Conway) (1967)
  • 《헤라클레스》(Herakles) (1967)
  • 《스크래치》(Scratch) (1971)
  • 《마법의 감옥: 에밀리 디킨슨의 시》(Magic Prison: the Poetry of Emily Dickinson) (1975)
  • 《위대한 미국 독립 기념일 퍼레이드》(The Great American Fourth of July Parade) (1975)
  • 《6개의 희곡》(Six Plays) (1980)

9. 1. 시집


  • ''Class Poem'' (1915)
  • ''Songs for a Summer's Day'' (1915)
  • ''Tower of Ivory'' (1917)
  • ''The Happy Marriage'' (1924)
  • ''The Pot of Earth'' (1925)
  • ''Nobodaddy'' (1926)
  • ''Streets in the Moon'' (1926)[33]
  • ''The Hamlet of A. Macleish'' (1928)
  • ''Einstein'' (1929)
  • ''New Found Land'' (1930)
  • ''Conquistador'' (1932)
  • 엘페노르(''Elpenor'') (1933)
  • ''Frescoes for Mr. Rockefeller's City'' (1933)
  • ''Poems, 1924–1933'' (1935)
  • ''Public Speech'' (1936)
  • ''The Land of the Free'' (1938)
  • ''Actfive and Other Poems'' (1948)
  • ''Collected Poems'' (1952)
  • ''Songs for Eve'' (1954)
  • ''The Collected Poems of Archibald MacLeish'' (1962)
  • ''The Wild Old Wicked Man and Other Poems'' (1968)
  • ''The Human Season, Selected Poems 1926–1972'' (1972)
  • ''New and Collected Poems, 1917–1976'' (1976)

9. 2. 산문


  • 《미국의 유대인》 (1936)
  • 《미국은 약속이었다》 (1939)
  • 《무책임한 자들: 선언》 (1940)
  • 《미국의 대의》 (1941)
  • 《말할 시간》 (1941)
  • 《미국의 여론과 전쟁: 리드 강연》 (1942)
  • 《행동할 시간: 선별된 연설》 (1943)
  • 《자유는 선택할 권리이다》 (1951)
  • 《예술 교육과 창의적 과정》 (1954)
  • 《시와 경험》 (1961)
  • 《아치볼드 매클리시와 마크 반 도렌의 대화》 (1964)
  • 《엘리너 루스벨트 이야기》 (1965)
  • 《계속되는 여정》 (1968)
  • 《어떤 대의의 챔피언: 사서직에 관한 에세이와 연설》 (1971)
  • 《시와 의견: 에즈라 파운드의 피산 칸토스》 (1974)
  • 《지구의 기수: 에세이와 회상》 (1978)
  • 《아치볼드 매클리시의 편지, 1907–1982》 (1983)

9. 3. 희곡


  • 《유니언 퍼시픽》(발레) (1934)
  • 《패닉》(Panic) (1935)
  • 《도시의 멸망》(The Fall of the City) (1937)
  • 《공습: 라디오를 위한 운문극》(Air Raid: A Verse Play for Radio) (1938)
  • 《주를 위한 대화》(Colloquy for the States) (1943)
  • 《아메리카 이야기: 10번의 방송》(The American Story: Ten Broadcasts) (1944)
  • 《트로이의 목마》(The Trojan Horse) (1952)
  • 《이 음악은 물 위에서 나를 스쳐 지나갔다》(This Music Crept By Me on the Waters) (1953)
  • 《J.B.》(J.B.) (1958)
  • 《세 개의 단편극: 자유의 비밀. 공습. 도시의 멸망》(Three Short Plays: The Secret of Freedom. Air Raid. The Fall of the City.) (1961)
  • 《콩웨이로의 저녁 여행》(An Evening's Journey to Conway) (1967)
  • 《헤라클레스》(Herakles) (1967)
  • 《스크래치》(Scratch) (1971)
  • 《마법의 감옥: 에밀리 디킨슨의 시》(Magic Prison: the Poetry of Emily Dickinson) (1975)
  • 《위대한 미국 독립 기념일 퍼레이드》(The Great American Fourth of July Parade) (1975)
  • 《6개의 희곡》(Six Plays) (1980)

참조

[1] 웹사이트 Archibald MacLeish, 9th Librarian of Congress 1939-1944 https://www.loc.gov/[...] Library of Congress 2016-07-19
[2] 웹사이트 Guide to the MacLeish Family Papers, 1898-1946 https://www.vassar.e[...] 2022-09-28
[3] 웹사이트 Nuggets of History https://www.rhsil.or[...] 2019-01-17
[4] 웹사이트 Lives of the Poet https://www.nytimes.[...] 1986-08-10
[5] 서적 Archibald MacLeish: an American Life https://archive.org/[...] Houghton Mifflin 1992
[6] 서적 Yale in the World War: Volume I Yale University Press 1925
[7] 서적 Broken Contract: A Memoir of Harvard Law School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99
[8] 서적 Black Sun: The Brief Transit and Violent Eclipse of Harry Crosby https://books.google[...] New York Review of Books
[9] 웹사이트 Archibald MacLeish's Life and Career http://www.english.i[...] Modern American Poetry 2016-07-19
[10] 간행물 100 of the Most Important Leaders We Had in the 20th century American Libraries 1999
[11] 서적 Uphill with Archie : a son's journey https://archive.org/[...] Simon & Schuster
[12] 서적 Archibald MacLeish an American life Authors Guild Backprint
[13] 서적 Riders on the Earth: Essays and Recollections https://archive.org/[...] Houghton Mifflin Company 1978
[14] 문서 "German Historians in 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An Interrupted Past: German Speaking Refugee Historians in the United States After 1933 1991
[15] 웹사이트 UNESCO --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 International Affairs Office https://www2.ed.gov/[...] 2012-07-19
[16] 논문 UNESCO 1945: birth of an ideal https://unesdoc.unes[...] 1985-10
[17] 웹사이트 UNESCO Constitution http://portal.unesco[...] 2022-03-10
[18] 간행물 The Revolt of the Intellectuals http://www.time.com/[...] 1941-01-06
[19] 문서 'Bob Dylan: Behind the Shades: The 20th Anniversary Edition' 2011
[20] 뉴스 Bob Dylan’s First Musical Had a Devil of a Time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20-11-03
[21] 문서 Chronicles, Volume One 2004
[22] 뉴스 "ON MY MIND; Standby Update Moon Poem"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89-07-18
[23] 논문 On Archibald MacLeish http://washingtonart[...]
[24] 논문 Archibald MacLeish Collection (YCAL MSS 38)
[25] 논문 Archibald MacLeish Collection Addition (YCAL MSS 269)
[26] 웹사이트 Archibald MacLeish Collection https://www.gcc.mass[...] Greenfield Community College 2019-12-10
[27] 웹사이트 Land Use History of MacLeish: A Cultural and Ecological Timeline of the Smith College Field Station https://storymaps.ar[...] 2021-04-08
[28] 웹사이트 Archibald MacLeish http://www.poets.org[...] 2010-12-03
[29] 논문 We Pay Our Respects To—Archibald MacLeish Broadcasting Publications, Inc. 1942-05-11
[30] 웹사이트 Archibald MacLeish https://www.amacad.o[...] 2023-02-09
[31] 뉴스 "National Book Awards – 1953" National Book Foundation 1953
[32]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33] 문서 Houghton Mifflin Company, Boston 1926
[34] 뉴스 "Verse Play for Radio by Archibald MacLeish" https://www.newspape[...] The Hartford Courant Magazine 1938-12-18
[35] 웹사이트 マクリーシュとは https://kotobank.jp/[...] 2020-10-11
[36] 웹사이트 ルーズベルトと演説 http://presidentsusa[...] 2020-10-11
[37] 웹사이트 ルーズベルトの罪状 http://bewithgods.co[...] 2020-10-11
[38] 웹사이트 アーチボルド マクリーシュとは https://kotobank.jp/[...] 20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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