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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호 카르펜티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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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쿠바에서 성장한 쿠바의 소설가이자 에세이 작가이다. 그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선구자이자,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중요한 인물로, 아이티 혁명을 다룬 《이 세상의 왕국》, 근대에서 미개로의 여정을 그린 《잃어버린 발자취》등의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쿠바 음악》이라는 평론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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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호 카르펜티에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본명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이 발몽
출생1904년 12월 26일
출생지로잔, 스위스
사망1980년 4월 24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묘지콜론 묘지, 아바나
국적쿠바
직업저널리스트
작가
음악학자
학력
작품 활동
장르소설
음악 평론
에세이
사조마술적 사실주의
대표작《이 세상의 왕국》
데뷔작《에쿠에 얌바 오》
수상
수상미겔 데 세르반테스 상(1977)

2. 생애

1904년 스위스 로잔에서 프랑스 건축가 아버지와 러시아어 교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세에 파리로 이주하여 음악 이론을 공부했고, 쿠바 귀국 후 아바나 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이후 좌익 저널리스트가 되어 헤랄도 마차도 독재 정권을 비난하여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1928년 프랑스로 망명하여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1933년 처녀작 『에크예 얌바 오』를 출간했다. 프랑스 체류 중 스페인을 방문하며 바로크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귀국 후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부두교 의식에 참석하고 아프로-쿠바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1931년에는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 부부를 쿠바로 초대하기도 했다.

1943년 루이 주베아이티를 방문하여 앙리 크리스토프가 건설한 시타델 라 페리에르와 상수시 궁전을 견학하고,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서를 읽으며 1949년작 『이 세상의 왕국』의 영감을 얻었다. 1945년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간섭을 피해 베네수엘라로 망명했다.

쿠바 혁명 이후 1959년 귀국하여 피델 카스트로 정권 아래에서 문화 활동의 리더로 활동했다. 1968년 이후 파리에서 문화 담당관으로 거주하며, 1978년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했다. 1980년 4월 24일 파리에서 사망했고, 2000년 쿠바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카르펜티에르 문학상이 창설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1904년 12월 26일 스위스 로잔에서 프랑스 건축가 아버지와 러시아어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 오랫동안 가족이 이주한 아바나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나, 카르펜티에르 사후 스위스에서 그의 출생 증명서가 발견되었다.[2]

1912년, 카르펜티에르 가족은 쿠바에서 파리로 이주했다. 그는 청소년기에 오노레 드 발자크,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밀 졸라의 작품을 읽었다.[1] 1921년, 아바나 대학교 건축학교에 입학했다. 18세에 부모의 결혼이 파탄나고 아버지가 집을 떠났다. 이듬해 카르펜티에르는 학업을 중단하고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언론인으로 일하며 쿠바 신문 ''카르텔레스''와 ''소셜''에 기고했다. 또한 음악을 공부했다.[3]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이중 언어를 구사했지만, 카르펜티에르는 항상 뚜렷한 프랑스 억양으로 스페인어를 구사했다.

2. 2. 쿠바와 프랑스 망명

1921년 아바나에서 공부하던 카르펜티에는 문화 저널리스트가 되어 주로 예술, 특히 음악의 아방가르드 발전에 대해 글을 썼다.[3] 그는 아바나의 일간지 ''La Discusión''에 칼럼을 기고했으며, 그의 저널리즘은 좌익 성향으로 쿠바 공산당 창당에 기여했다.[3] 1923년과 1924년 동안 ''La Discusión''과 ''El Heraldo de Cuba''에서 음악 및 연극 평론을 편집했다.[3] 1927년에는 호르헤 마냐치, 후안 마리넬로, 프란시스코 이차소, 마르티 카사노바스와 함께 국수주의, 급진주의, 예술 분야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다루는 잡지인 ''Revista de Avance''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3]

1927년 헤라르도 마차도 이 모랄레스 독재에 반대하여 체포되어 40일 동안 감옥에 갇혔으며, 이 기간 동안 첫 소설 ''Ecué-Yamba-O''를 집필하기 시작했다.[3] 석방 후, 로베르 데스노스의 도움으로 쿠바를 탈출하여 1928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 1939년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3]

해외에 있는 동안, 카르펜티에는 쿠바와의 단절과 파리의 다양한 지식인 및 예술가 그룹과의 교류를 통해 "비판적 시각"을 얻었다.[4]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파리와 쿠바의 잡지에 시와 사설을 쓰기 시작했고, 프랑스어 단편 소설 "Cahiers du Sud"(1933)를 발표하는 등 유럽 독자를 확보하려 노력했다.[4] 그는 또한 ''Documents''와 ''L'Intransigeant'' 등 잡지에 기고했다.[4]

카르펜티에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문학 잡지 ''Imán''을 창간하여 편집장이 되었다.[5] ''Histoire de Lunes''(1933)는 마법적 현실주의 요소가 포함된 실험적인 작품이었다.[6] 그러나 그는 초현실주의에 대한 열정을 잃고 "초현실주의적 시도는 헛수고였다"고 좌절감을 표현했다.[4]

파블로 네루다,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파블로 피카소 등 유명 작가들과 교류했다.[4]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카르펜티에는 문학 작품 외에도 프랑스 작곡가 마린 프랑수아 가이야르와 함께 파리의 ''Théâtre Beriza''에서 공연된 "부르레스크 비극"인 뮤지컬 ''Yamba-O'' 제작, 작곡가 아메데오 롤단과 함께 스트라빈스키와 프랑시스 풀랑 작품의 쿠바 초연 조직, 프랑스 다큐멘터리 ''Le Vaudou''의 텍스트 작성 및 음악 편집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4] 그는 프랑스 라디오 방송국에서 음향 기술자 및 프로듀서로 일하며 Foniric Studios에서 제작한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4]

1933년 마차도 정권이 종식되자 카르펜티에는 귀국을 계획했고, 1936년 쿠바를 방문했다. 1939년, 그는 쿠바에 대한 향수병으로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아바나로 돌아갔다.[4]

2. 3. 아이티 체류와 쿠바 귀환

1943년, 프랑스 연극 연출가 루이 주베와 함께 카르펜티에는 아이티로 중요한 여행을 떠났다.[7] 그곳에서 그는 흑인 왕 앙리 크리스토프가 건설한 라페리에르 요새와 상수시 궁전을 방문했다. 이 여행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역사 순환적 해석에 대한 강독과 함께 그의 두 번째 소설인 ''엘 레이노 데 에스테 문도'' (세상의 왕국) (1949)의 영감을 제공했다.[7]

카르펜티에는 쿠바로 돌아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기에 저널리스트로 계속 활동했다.[7] 그는 쿠바 음악의 역사를 연구하여, 결국 1946년에 ''라 무시카 엔 쿠바''를 출판했다.[7]

2. 4. 베네수엘라 망명

1943년 연출가 루이 주베와 함께 아이티를 방문하여 19세기 흑인 왕 앙리 크리스토프가 건설한 시타델 라 페리에르와 상수시 궁전을 견학했다. 이때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서를 읽고, 그의 순환사관으로부터 『이 세상의 왕국』(1949년)의 착상을 얻었다.[3] 1945년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간섭을 피해 베네수엘라로 망명했으며,[3] 1959년까지 베네수엘라에 거주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그의 소설 《잃어버린 발걸음》(''The Lost Steps'')의 배경이 되는 이름 없는 남아메리카 국가에 영감을 주었다.[3]

2. 5. 쿠바 혁명 이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끈 혁명이 1959년에 성공한 후, 카르펜티에르는 쿠바로 돌아왔다. 국립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바로크 양식의 책 ''빛의 세기''(''성당의 폭발'', 1962)를 완성했다.[3] 이 소설은 신세계에서의 계몽주의 도래와 프랑스 혁명 사상을 다루며, 인쇄기와 단두대라는 두 가지 주제를 통해 "모든 혁명이 독재의 유혹에 직면하면서 내재된 위험에 대한 성찰"로 읽힐 수 있다.[3]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책을 읽고 ''백년의 고독'' 초고를 버리고 다시 썼다고 한다.[8]

1966년, 카르펜티에르는 파리에 정착하여 프랑스 주재 쿠바 대사로 활동했다. 1975년 친 델 뒤카 세계 문학상을 수상했고, 1977년 세르반테스 상(Premio Cervantes)[9]을, 1979년에는 ''하프와 그림자''로 프랑스 메디치 상(Prix Médicis) 외국 문학상을 받았다.[9][10][11]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번 거론되었으며,[12] 1965년에 처음 지명되었다.[13]

마지막 소설 ''아르파와 솜브라''를 집필하던 중 암 투병 끝에 1980년 4월 24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쿠바로 송환되어 아바나 콜론 묘지에 안장되었다.

아바나에 있는 프랑스 국제 학교인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아바나 프랑스 학교(École Française de la Havane "Alejo Carpentier")''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 6. 사망

카르펜티에르는 암 투병 끝에 1980년 4월 24일 파리에서 마지막 소설 《아르파와 솜브라》를 완성하던 중 사망했다.[9] 그의 유해는 쿠바 아바나 콜론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

카르펜티에르는 소설, 단편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을 남겼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등과 함께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3. 1. 소설


  • ''¡Écue-Yamba-O!'' (1933) (''주님을 찬양하라!'')
  • ''이 세상의 왕국'' (1949)
  • ''잃어버린 발걸음'' (1953)
  • ''El acoso'' (1956) (''추격'')
  • ''대성당에서의 폭발'' (1962)
  • ''Concierto barroco'' (1974) (''바로크 협주곡'', Baroque Concert영어) 비발디, 헨델,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1709년 만남을 바탕으로 하며, 리하르트 바그너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카메오로 등장하며, 베네치아 작곡가의 오페라 ''Motezuma''에 영감을 주는 신세계의 가공 인물들이 등장한다.
  • ''El Recurso del método'' (1974) (''국가의 이유'')
  • ''La consagración de la primavera'' (1978) (''봄의 제전'')
  • ''El arpa y la sombra'' (1979) (''하프와 그림자'') 콜럼버스를 다룬다.


카르펜티에르의 ''이 세상의 왕국''(1949)은 아프리카 노예들이 자유와 기본적인 인권을 위해 프랑스 식민주의자들과 싸웠던 18세기 아이티 혁명을 조명한다.[32] 이 소설은 아이티 부두교를 포함한 아프리카 신앙과 의식, 육체적 자아와 정신적 자아 사이의 관계를 결합한다.[33] 이야기는 흑인 노예인 주인공 티 노엘의 시각을 통해 전개된다. 아이티 혁명을 주제로 글을 쓴 백인 유럽/쿠바 작가인 카르펜티에는 인종적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티 노엘의 시점에서 글을 쓰기로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34] 카르펜티에르는 소설 전반에 걸쳐 상수시 궁전과 라 페리에르 요새와 같은 구조물로 식민 통치의 독재를 나타낸다.[35]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수로, 아이티 흑인 노예 반란(아이티 혁명)을 그린 『이 세상의 왕국』(1949)이나, 근대에서 미개로 시간이 역행하는 신비한 음악가의 여정을 그린 『잃어버린 발자취』(1953)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 외에도 『대성당에서의 폭발』(1962), 『바로크 협주곡』(1974), 『봄의 제전』(1978), 『하프와 그림자』(1979)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3. 2. 단편 소설


  • El sacrificioes (1923) (희생)
  • Viaje a la semillaes (1944) (씨앗으로의 여행)
  • Oficio de tinieblases (1944) (어둠의 직무)
  • ''Guerra del tiempo'' (1956) (''시간의 전쟁'')
  • Otros relatoses (1984) (''다른 이야기들'')


''Guerra del tiempo'' (''시간의 전쟁'')은 다양한 스타일의 초현실주의 단편 소설 모음집으로, 카르펜티에르의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작품 능력을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작품은 첫 번째 이야기인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 (The Way of Santiago)로, 발견의 시대에 평민이자 스페인인인 인물이 오늘날에는 군인, 내일은 순례자, 그다음에는 선원, 식민주의자, 죄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모든 꿈을 좇고 모든 실망을 겪는 모험을 그린다. 두 번째 이야기는 "비아헤 아 라 세미야" (Journey Back to the Source)이다. 이 이야기는 화자가 시간 역전을 통해 주인공 돈 마르시알 (마르케스 데 카펠라니아스)의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3. 3. 에세이


  • ''La música en Cuba'' (1946) (''쿠바 음악'') - 16세기부터 유럽 탐험가들의 도착, 출판 당시인 20세기 중반까지의 쿠바 민족 음악학 연구.
  • ''Tristán e Isolda en tierra firme'' (1949) (본토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 ''Literatura y conciencia en América Latina'' (1969)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의식)
  • ''La ciudad de las columnas'' (1970) (기둥의 도시)
  • ''América Latina en su música'' (1975) (음악 속의 라틴 아메리카)
  • ''Razón de ser'' (1976) (존재의 이유)
  • ''Afirmación literaria americanista'' (1979) (아메리카주의 문학적 긍정)
  • ''El adjetivo y sus arrugas'' (1980) (형용사와 그 주름)
  • ''El músico que llevo dentro'' (1980) (내 안의 음악가)
  • ''Conferencias'' (1987) (강연)


카르펜티에르는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쿠바 음악』(1946년)이라는 평론을 썼지만, 한국에서는 출판되지 않았다.

4. 문학적 특징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수로, 아이티 혁명을 다룬 『이 세상의 왕국』(1949년)과 시간이 역행하는 음악가의 여정을 그린 『잃어버린 발자취』(1953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등과 함께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 외에도 『빛의 세기』(1962년), 『바로크 협주곡』(1974년), 『봄의 제전』(1978년), 『하프와 그림자』(1979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쿠바 음악』(1946년)이라는 평론을 썼지만, 한국에서는 출판되지 않았다.

4. 1. 경이로운 현실 (Lo real maravilloso)

카르펜티에르는 '로 레알 마라비요소'(lo real maravilloso|경이로운 현실es)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지리가 외부인에게는 허구적이거나 심지어 마법적으로 보일 정도로 극단적이라는 개념이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는 마법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지역이다. 그는 아이티 혁명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 ''이 세상의 왕국''의 서문에서 자신의 '로 레알 마라비요소'에 대한 비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가 마법적 리얼리즘의 연대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14] 소설 자체는 아이티의 초대 국왕인 앙리 크리스토프의 기이한 (그러나 사실인) 역사를 라틴 아메리카의 실제 역사가 얼마나 기묘해서 허구적으로 보이는지의 예시로 전개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로 레알 마라비요소'를 마법적 리얼리즘과 동의어로 해석하기도 한다.[15] 하지만, 카르펜티에르의 이론과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전개는 예를 들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법적 리얼리즘보다 그 범위가 더 제한적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은 독자들이 결코 현실로 착각하지 않을 사건들(꽃비, 날개 달린 노인 등)을 포함하는 반면, 카르펜티에르는 대부분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지리의 극단적인 측면, 즉 거의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인 측면을 단순히 서술한다.[16]

4. 2. 바로크 양식

바로크 양식은 17세기와 18세기 초 문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44] 이는 대개 "역동적인 움직임, 노골적인 감정, 자신감 넘치는 수사법이 특징인, 매너리즘 시대와 로코코 시대 사이 유럽의 지배적인 예술 양식"으로 정의된다.[45] 카르펜티에르는 처음에는 건축과 조각에서 이 양식에 매료되었지만, 나중에는 ''el barroco''를 ''un espíritu'', 즉 "역사적 양식이 아닌 정신"으로 묘사했다.[46] 웨이크필드는 바로크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카르펜티에르의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통해 그는 탈식민주의에 직면하여 우월한 입장을 취하고 궁극적으로 유럽 양식을 사용하여 라틴 아메리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문학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47]

카르펜티에르는 자신이 바로크 작가라고 칭하기 전에 초기 작품에서 바로크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발전시켰다. 그는 여러 발전 단계에서 이 기법을 실험했다. 즉 "처음에는 심미적 매력의 문화적 양식으로, 나중에는 시대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문학적 장치로, 마지막으로는 탈식민적 자부심, 반항, 우위 의식을 위한 무기로" 사용했다.[48] 이 양식은 초기 작품인 《에쿠에-얌바-오》와 널리 알려진 《이 세상의 왕국》을 비교할 때 강하게 나타나는데, 후자에서 카르펜티에르가 민족적으로 영감을 받은 등장인물의 진정한 언어 대신 더 역사적으로 유창한 어휘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유럽적 기준을 통합함으로써 "토착주의"의 전형성을 벗어나지만, 주인공 티 노엘이 의심할 여지 없이 사용할 구어체를 사용하지 않고도 정상적인 느낌을 계속해서 얻는다.[49]

카우프는 라틴 아메리카가 계몽주의나 "유럽적 근대성"과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르펜티에르가 "신세계 바로크"라고 알려진 것을 활용한다고 주장한다.[50] 이 ''contraconquista'' (반정복)를 통해 신세계 작가들은 새로운 정체성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실험할 수 있다.[51] 카르펜티에르는 1975년 에세이에서 "아메리카 바로크는 ''크리올'' 문화와 함께 발전했다...: 타자, 새로움, 공생, ''크리올''이 됨에 대한 인식; 그리고 ''크리올'' 정신 자체가 바로크 정신이다."라고 언급했다.[52] 신세계 바로크의 이러한 ''크리올''은 종종 라틴 아메리카에서 하위 문학적 구성으로 등장하는 유럽 문학의 지배적 양식으로 여겨진다.[53]

4. 3. 음악

어린 시절 카르펜티에는 많은 음악을 접했다. 카르펜티에 자신도 피아노를 연주했고, 그의 어머니도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파블로 카잘스에게 사사받아 첼로를 연주했고, 그의 할머니는 오르간을 연주했다.[17] 카르펜티에는 파리에서 처음 거주할 때 리세 장송 드 세이에서 음악 이론을 공부했다.[18] 카르펜티어의 작곡은 그를 당대 쿠바 음악계의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쿠바 음악의 기원과 정치적 뉘앙스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유럽 예술 양식을 라틴 아메리카 음악 양식에 적용하려는 그의 헌신은 아프로-쿠바 음악 주제에 대한 그의 존경심에서도 드러난다.[19]

경력 초기에 카르펜티에는 쿠바 음악의 뿌리를 탐구하려는 다른 젊은 음악가들과 협력했다. 그러한 협력자 중 한 명이 쿠바 출신의 프랑스 음악가인 아마데오 롤단이었다.[20] 그들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다리우스 미요, 모리스 라벨, 잔 프란체스코 말피에로, 프란시스 풀랑크, 에릭 사티와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당대 인기 오케스트라 음악인 'Conciertos de música nueva' (새로운 음악의 콘서트)의 쿠바 초연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카르펜티어와 롤단은 그들 자신의 음악에 관해서는 아프리카 리듬과 멜로디를 작품에 통합하는 데 훨씬 더 관심이 있었고, 유럽 음악 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포기했다. "¡Abajo la lira, arriba el bongó!" (수금은 사라지고, 봉고가 떴다!)는 그들의 음악 스타일을 위한 인기 슬로건이었다. 카르펜티어와 롤단은 1925년 오케스트라 곡 'Obertura sobre temas cubanos' (쿠바 주제에 대한 서곡)을 포함한 수많은 작품에서 협력했는데, 이 곡은 아프로-쿠바에서 영감을 받은 음악을 선호하여, 당시 제대로 된 유럽식 교향곡으로 여겨지던 것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스캔들로 여겨졌다.[21] 두 사람의 다른 잘 알려진 협업으로는 1926년에 제작된 'Tres pequeñas poemas: Oriente, Pregón, Fiesta negra' (세 개의 작은 시), 그리고 두 개의 아프로-쿠바 발레인 'La Rebambaramba'(2부로 구성된 식민지 발레, 1928)와 'El milagro de Anaquille'(1929)가 있다.[22]

음악에 대한 카르펜티어의 관심은 그의 산문 쓰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바로는 카르펜티어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독자라기보다는 청취자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23] 구어 방언의 서정적 사용, 두운과 유사음과 같은 문학적 리듬, 그리고 이야기 세계 내 음악의 주제 (드럼, 발소리 등)는 음악이 카르펜티어의 작품에 미치는 영향의 몇 가지 예이다.[17]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음악은 내 모든 작품에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24] 카르펜티어에게 쿠바 정체성에 대한 분석은 쿠바 음악에 대한 분석에 기초했다. 따라서 카르펜티어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쿠바 정체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음악을 그의 글쓰기에 열정적으로 통합했다.[25]

음악에 대한 이러한 내재적 이해와 쿠바 정체성에 대한 매료됨을 바탕으로, 카르펜티에르는 쿠바 음악의 기원을 좀 더 학문적인 의미에서 연구하기 시작했다.[26] 1946년, 카르펜티에르는 유럽 음악, 이식된 아프리카 음악, 그리고 섬의 원주민 음악이 모두 혼합되어 쿠바 음악을 만들어낸 과정을 탐구하는 민족음악학 연구서인 ''쿠바의 음악''(La Música en Cuba)을 출판했다. 카르펜티에르는 특히 아프로-쿠바 테마에 관심을 가졌다.[27]

특히 쿠바 음악에서 아프리카 음악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매료된 카르펜티에르는 ''로 아프로쿠바노''(lo afrocubano, 즉, 고도로 즉흥적이고 리듬 기반의 음악)라고 불리는 아프로-쿠바의 영향을 받은 음악을 ''로 과히로''(lo guajiro)라고 불리는 유럽 스타일에 의존하는 더 격식 있는 음악 장르에 도입했다. 카르펜티에르는 "로 과히로"에 대해 "매우 시적이지만, '로 과히로'는 음악이 아니다... 반면에, 혼혈 및 흑인 음악에서는... 풍부한 소재가 믿을 수 없는 풍요로움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국가적 표현의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썼다.[28] 백인 쿠바인과 흑인 및 크리오요 쿠바인 사이의 인종적 긴장으로 인해, 이러한 선호는 세기 중반의 쿠바 엘리트층에게 환영받지 못했다.[29] 카르펜티에르는 음악학 연구의 대부분을 쿠바에 존재하는 아프로-쿠바의 영향에 할애했다. 예를 들어, 카르펜티에르는 유럽 음악과 춤 스타일인 콩트라단자(Contredanse)에서 파생된 매우 인기 있는 쿠바 춤인 콩트라단자(Contradanza)에 특히 주목했다. 음악적 즉흥 연주를 위한 충분한 공간과 그룹 댄스 요소는 즉흥 연주와 춤이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아프리카 음악 전통에 쉽게 적용되었다. 따라서 쿠바 고유의 하이브리드 음악 형태가 만들어졌다.[30] 카르펜티에르는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음악에 내재된 즉흥 연주가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여 지역적 차이와 그에 따른 지역 정체성을 촉진했으며, 이것이 쿠바가 그렇게 다양한 음악적 정체성을 가지게 된 이유라고 결론지었다.[31]

''쿠바의 음악''(''La música en Cuba'')은 16세기 유럽 탐험가들의 도착부터 20세기 중반 출판 시점까지의 쿠바의 음악에 대한 민족음악학 연구이다. 흑인, 백인, 물라토, 크리오요와 원주민 등 다양한 문화의 융합은 쿠바의 두 가지 주요 음악 스타일, 즉 기독교 유럽 음악과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과 섬의 원주민들이 가져온 기본 타악기 및 리듬 기반 음악의 융합을 반영한다.[36] 이 책은 식민지 라틴 아메리카 음악의 일반적인 역사와 쿠바의 음악과 춤 스타일, 영향력 있는 쿠바 음악가, 그리고 쿠바의 음악적 정체성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카르펜티에르는 아프리카 후손들이 쿠바 음악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그는 "Los Negros"("흑인")라는 제목의 전체 장을 할애하여 아프리카 음악이 라틴 아메리카 음악 전체에 영향을 미친 많은 중요한 방식을 탐구했다.[37] 카르펜티에르에 따르면 쿠바 음악에 대한 아프리카의 영향은 특히 18세기와 19세기 쿠바의 식민주의적 편견에 의해 의도적으로 은폐되었다. 책이 출판될 당시 많은 백인 쿠바인들은 문화의 융합을 인정하는 것조차 꺼려했고, 더더욱 이를 조사하는 것을 꺼렸다.[38] 그러나 카르펜티에르는 이를 기꺼이 하려 했고, 쿠바의 과거와 광범위한 문화와의 통합적 관계에 대한 대담한 발언을 함으로써, 음악을 통해 쿠바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심층적인 학문적 관점을 쿠바에게 되돌려주는 데 성공했다.[39]

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어, 『쿠바의 음악』(1946년)이라는 평론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미간행되었다.

4. 4. 초현실주의의 영향

로베르 데스노스의 도움으로 카르펜티에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작품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5] 프랑스에서 카르펜티에는 1931년에 ''Imán''이라는 문학 잡지를 창간하여 편집장이 되었다.[5] ''La Revolution Surrealiste''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대부분의 작가들은 "''Conocimiento de America''"라는 제목으로 ''Imán''에 작품을 기고했다.[6] 카르펜티에는 단편 소설 ''Histoire de Lunes'' (1933)을 기고했는데, 이는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특징지어지는 환상과 민속 요소가 포함되어 당시에는 실험적인 작품이었다.[6]

초현실주의는 카르펜티에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미국의 삶의 맥락과 측면을 볼 수 있도록 도왔다. 주요 예술가들 사이에서 한동안 활동한 후 카르펜티에는 초현실주의 내에서의 그의 작업에 대해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았고, 그의 "초현실주의적 시도는 헛수고였다"고 느끼며 좌절감을 표현했는데, 그는 "프랑스에서 이 운동에 더할 것이 없다"고 느꼈다.[4]

카르펜티에는 프랑스 초현실주의 운동의 많은 인물들을 만나 협력했으며, 초현실주의 이론에 매료되었다. 그는 동시대인, 주로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파리 저널리스트 로베르 데스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3의 아름다움"이라고 불리는, 있을 법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묘사하려는 초현실주의 이론은 세상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포용했다.[55] 초현실주의 이론에는 원시주의 또는 선행 민속 전통에 대한 존경이라는 개념이 있었다.[56]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영감을 받은 카르펜티에르는 쿠바의 고향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그는 쿠바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벅찬 자부심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포착하려는 예술적 목표를 가지고 프랑스를 떠났다.[55]

5. 한국과의 관계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작품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적이 없으며, 현재까지 한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위에 제시된 출판물 목록은 일본에서 번역, 출간된 카르펜티에르의 작품들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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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A Hammock Beneath the Mangoes: stories from Latin America Penguin Group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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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La Musica en Cuba Mexico 1972
[8] 문서 Echevarría
[9] 웹사이트 Une autre vision de Cuba http://www.chez.com/[...]
[10] 문서 Prix Médicis
[11] 웹사이트 Lettres de Cuba, Alejo Carpentier http://www.lettresde[...] 2007-11-25
[12] 서적 Alejo Carpentier: The Pilgrim at Home University of Texas Press 2014
[13] 웹사이트 Nomination archive: Alejo Carpentier y Valmont https://www.nobelpri[...] nobelprize.org 2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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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서적 The Chase New York: Farrar, Straus, Giroux
[41] 서적 The Chase Farrar, Straus, Giroux
[42] 서적 The Columbia Guide to the Latin American Novel Since 1945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7-09-21
[43] 서적 The Logic of Fetishism: Alejo Carpentier and the Cuban Tradition https://books.google[...] Bucknell University Press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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