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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쿠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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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르 쿠프린은 1870년에 태어나 1938년에 사망한 러시아의 소설가이다. 그는 단편 소설 장르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안톤 체호프, 막심 고리키, 이반 부닌과 함께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쿠프린은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으며, 군 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결투》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러시아 혁명 이후 망명 생활을 하다가 소련으로 귀국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20세기 내내 널리 읽혔으며, 그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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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쿠프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렉산드르 쿠프린, 1910년대
1910년대의 쿠프린
본명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쿠프린
로마자 표기Aleksandr Ivanovich Kuprin
출생일1870년 9월 7일 (구 1870년 8월 26일)
출생지나로프차트, 펜자 현, 러시아 제국
사망일1938년 8월 25일
사망지레닌그라드, 소비에트 연방
국적러시아
직업
직업소설가, 단편 소설 작가, 극작가, 언론인
장르단편 소설
사조자연주의 문학
작품 활동
대표작올레샤 (1898년)
결투 (1905년)
석류 팔찌 (1911년)
야마: 구덩이 (1915년)
영향안톤 체호프
레프 톨스토이
수상푸시킨 상
가족
배우자마리아 카를로브나 다비도바 (1902년-1907년)
옐리자베타 게인리히 (1907년-1938년)
자녀리디아 쿠프리나 (1903년–1924년)
크세니아 쿠프리나 (1908년–1981년)

2. 생애

1909년 리자 게인리히


알렉산드르 쿠프린은 1870년 펜자현 나로프차트에서 공무원 아버지와 볼가 타타르족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4][5][53]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모스크바에서 성장했으며, 군사 학교를 거쳐 장교로 복무했다.[7][8][9] 군 복무 경험과 이후 러시아 남서부 지역을 여행하며 겪은 다양한 직업 경험은 그의 초기 문학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8][55]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한 후 막심 고리키, 안톤 체호프, 이반 부닌 등 당대 주요 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전성기를 맞이했다.[17][18][68] 대표작 《결투》(1905)는 군대 내부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이 외에도 《몰로흐》, 《올레샤》, 《구덩이》, 《석류 팔찌》 등 여러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15][13][35][33]

쿠프린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다비도바(1902년 결혼, 1907년 이혼)와의 사이에서 딸 리디아를 두었으나, 쿠프린의 알코올 문제 등으로 헤어졌다.[4][48] 1907년 옐리자베타 게인리히(1882–1942)와 재혼하여 두 딸 크세니아와 지나이다를 두었다.[8]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백군에 잠시 몸담았다가 프랑스로 망명하여 약 17년간 파리에서 생활했다.[55][61] 망명 생활 동안 향수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창작 활동은 이전보다 줄어들었다.[42][44][93][95]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자 1937년 소련으로 귀국했으나, 이듬해인 1938년 8월 25일 레닌그라드에서 식도암으로 사망하여 볼코보 묘지에 안장되었다.[9][55][61][59]

2. 1. 초기 생애 (1870-1890)

알렉산드르 쿠프린은 1870년 펜자현 나로프차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반 이바노비치 쿠프린은 펜자현의 정부 관리였고,[4] 어머니 류보프 알렉세예브나 쿠프리나(결혼 전 성 쿨룬차코바)는 19세기에 재산을 거의 잃은 귀족 볼가 타타르족 가문 출신이었다.[5][53][58][55] 알렉산드르에게는 소피아(1861-1922)와 지나이다(1863-1934)라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다.[6]

1871년, 그의 아버지가 37세의 나이로 콜레라로 사망하자,[57] 3년 후인 1874년 어머니는 어린 알렉산드르와 함께 모스크바 쿠드리노의 미망인 홈(모자 보호 시설)으로 이사했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이야기 "하얀 거짓말"(1914)에 반영되었다.[7][59] 1876년, 그는 라주모프스키 기숙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어린 시절의 불만' 또는 '어린 시절의 울적함'이라고 회상했지만, 거친 성격을 형성하고 이야기꾼으로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8][60]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1878년)에서 러시아군의 승리에 영감을 받아,[8][60] 쿠프린은 1880년 제2 모스크바 육군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882년 이 학교가 사관 후보생단으로 개칭되면서 그곳으로 전학했다.[9][61] 이 시기의 경험은 쿠프린의 자전적 소설 "전환점에서"(1900), "생명의 강"(1906), "레노치카"(1910) 등에 반영되었다. 그는 훗날 "사관 후보생단에서의 매질에 대한 기억은 평생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라고 쓸 정도로 당시의 체벌 경험을 강하게 기억했다.[10][62]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문학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쿠프린이 젊은 시절 쓴 30여 편의 시 대부분은 사관 후보생단에 있던 1883년부터 1887년까지 4년 동안 창작되었다. 그는 또한 베랑제의 "Les Hirondelles"와 하이네의 "로렐라이" 등 외국 시를 번역하기도 했다.[8][9][60][61] 그의 초기 정치적 자각도 이 시기 작품에서 나타난다. 특히 1887년 4월 14일에 쓴 정치적 시 "꿈"은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선고가 내려지기 하루 전에 쓰여진 것으로, 당시 17세였던 쿠프린의 정치 의식을 보여준다.[9]

1888년 가을, 쿠프린은 사관 후보생단을 졸업하고 모스크바의 알렉산달 사관학교에 입학했다.[59] 1890년 여름, 그는 중위 계급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우크라이나 흐멜니츠키에 위치한 프로스쿠로프에 주둔하던 드니에프르 제46 보병 연대에 배치되어 이후 4년간 군 복무를 시작했다.[60][55][57][61]

2. 2. 군 복무와 문학 활동 시작 (1888-1901)

1888년 가을, 쿠프린은 모스크바의 알렉산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7] 이듬해인 1889년, 그는 시인 리오도르 팔민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데뷔 단편 소설 "마지막 데뷔"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1881년 가수 예블랄랴 카드미나가 무대에서 독극물로 자살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는데, 이는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클라라 밀리치"에도 영감을 준 사건이었다.[5][9][61]

1890년대 초의 쿠프린


1890년 여름, 쿠프린은 소위 계급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46 드네프르 보병 연대에 배속되어 프로스쿠로프(현재 흐멜니츠키)에서 4년간 복무했다.[4][8][9] 군 복무 기간 동안 그는 꾸준히 글을 썼다. 데뷔작 이후 3년 만인 1892년 12월, 두 번째 작품 "프시케(Psyche)"를 발표했고, 이후 "달빛 아래서"와 같은 작품을 통해 환상과 현실 사이의 모호한 경계와 정신 이상의 문제를 탐구했다.[9][61] 또한 단편 소설 ''어둠 속에서''(1893)와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다룬 여러 단편("슬라브 영혼", "광기", "잊혀진 키스", 모두 1894년)을 발표했다.[9][61]

군 생활 경험은 그의 작품에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1894년 발표된 "조사"는 군 내부의 문제를 다루어 처음으로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러시아 군대를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들("잠잘 곳"(1897), "야간 근무"(1899), "프라포르시크"(1897), "임무"(1901))로 이어졌고, 이는 훗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결투''의 밑거름이 되었다.[8][60] 하지만 "조사"의 발표는 현역 장교였던 쿠프린에게 문제를 일으켰고, 이는 1894년 여름 그가 군대를 떠나는 주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9][11][63]

군에서 제대한 후, 특별한 계획 없이 쿠프린은 러시아 제국 남서부 지역을 약 5년간 여행했다.[8][60] 그는 이 기간 동안 치과 치료 보조, 토지 측량, 연기, 서커스 공연, 시편 가창, 의사 보조, 사냥꾼, 어부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으며, 이 경험들은 훗날 그의 소설에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다.[8][55] 동시에 그는 글레브 우스펜스키의 작품을 탐독하며 독학에 몰두했다.[8][60]

1894년 여름 키예프에 도착한 쿠프린은 그해 9월부터 현지 신문인 ''키옙스코에 슬로보''(Киевское слово, 키예프의 말), ''지즈니 이 이스쿠스토''(Жизнь и искусство, 삶과 예술), 이후에는 ''키예블랴닌''(Киевлянин)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12][65] 그는 저널리스트에게 "미친 용기, 대담함, 넓은 시야, 놀라운 기억력"이 필요하다고 믿었으며, 스스로 이러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생각했다.[12][64] 그는 남서부 지역을 자주 여행하며 노보체르카스크, 로스토프나도누, 차리친(현재 볼고그라드), 타간로크, 오데사 등 여러 도시의 신문에도 글을 기고했다.[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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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활동과 병행하여 쿠프린은 문학 창작 활동도 활발히 이어갔다. 1896년 3월, 키예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8개의 스케치를 묶어 그의 첫 책인 ''키예프 유형''(Киевские типы)을 출판했다.[14][66] 같은 해, 문예지 ''루스스코예 보가트스트보''(Русское богатство)에 그의 첫 번째 주요 작품인 ''몰로흐''(Молох)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급성장하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과 산업 현장의 불안을 비판적으로 묘사하여 주목받았다.[15][67] 이후 산업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는 "혼란"(Смута, 1897)과 "지구의 내장"(В недрах земли, 1899) 등이 있다.[13][67]

1897년 10월에는 두 번째 단편집 ''미니어처''(Миниатюры)를 출판했는데, 여기에 실린 서커스 이야기 "알레!"(Allez!)는 레프 톨스토이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13][66] 1905년 쿠프린은 이 단편집을 "문학의 길에서 내디딘 첫 번째 미숙한 발걸음"이라고 평했지만, 이 시기 작품들은 작가로서 그의 성장을 보여주었다. 특히 1896년부터 1899년까지 돈바스 지역을 방문한 경험은 그의 "산업 스케치"에 반영되었다.[13][15][65][67]

1897년, 쿠프린은 볼히니아 지역에서 잠시 영지 관리인으로 일했고, 이후 남부 벨라루시의 폴레시에 지역으로 가서 마호르카(담배의 일종) 재배를 도왔다.[13][15][65][67] 그는 1920년에 당시 경험을 회상하며 "그곳에서 나는 가장 활기차고, 고귀하며, 광범위하고, 유익한 인상을 흡수했으며... 진정한 러시아어와 풍경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13] 이 폴레시에 지역에서의 경험은 그의 미완성 연작 "폴레시에 사이클"로 구체화되었는데, "오지"(Захолустье), 그의 유명한 사랑 이야기 중 하나인 ''올레샤''(Олеся), 그리고 공포 단편 "늑대인간"(Оборотень) 등이 1898년부터 1901년 사이에 발표되었다.[13][65]

''몰로흐''와 ''올레샤''의 성공은 쿠프린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1901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인기 월간지 ''주르날 델랴 브세흐''(Журнал для всех, 모두를 위한 저널)의 편집자 빅토르 미로류보프는 쿠프린에게 잡지 합류를 제안했고, 그해 12월 쿠프린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새로운 문학 활동의 장을 열었다.[9][61]

2. 3.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과 전성기 (1901-1917)



1901년 9월, 빅토르 미로류보프의 초대로 쿠프린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당시 러시아 문화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9] 그는 안톤 체호프와 가까운 친구가 되어 1904년 체호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언을 구했다.[17][68] 이반 부닌과의 우정은 망명 생활을 포함하여 거의 40년간 이어졌다.[18][69] 월간지 『미르 보지』(신의 세계)의 편집자이자 학자, 평론가인 표도르 바튜시코프 역시 쿠프린에게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방대한 양의 서신이 오갔고 현재 약 150통이 남아있다.[19][70] 쿠프린은 빅토르 미로류보프[20][21][71][72]막심 고리키[17][22][23][73]가 자신의 작가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특히 고리키에 대해서는 "그는 내 작품에 대해 성실하고 정중했을 뿐 아니라, 내가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언급했다.[68][74]

1901년 쿠프린은 니콜라이 텔레쇼프가 1899년에 설립한 모스크바의 스레다(수요일) 문학회에 참여했다. 이 모임은 고리키, 부닌,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등 젊은 사실주의 작가들이 중심이었다.[17][68] 1902년 2월, 그는 『미르 보지』 편집자 알렉산드라 다비도바의 양녀인 마리아 카를로브나 다비도바와 결혼했다. 같은 해 알렉산드라 다비도바가 사망하자 마리아가 출판사를 이어받았고, 쿠프린은 『주르날 델랴 브세흐』(모두를 위한 저널)를 떠나 아내가 편집하는 『미르 보지』의 소설 부문을 맡게 되었다.[17][68]

1903년 2월, 고리키가 설립한 출판사 즈나니예(지식)는 쿠프린의 단편 8편을 모아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조사》와 《몰로흐》가 포함되었다.[17] 쿠프린은 "이 깃발 아래 작품을 출판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체호프에게 편지를 썼다.[68] 레프 톨스토이는 이 모음집의 생생한 문체를 칭찬했고, 평론가들은 쿠프린이 체호프와 고리키의 주제 및 기법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호평했다.[17][75] 『미르 보지』의 안젤 보그다노비치는 쿠프린의 간결한 문체와 생동감 넘치는 표현력을 높이 평가했다.[24] 고리키 자신도 1903년 3월 텔레쇼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쿠프린을 체호프와 안드레예프에 이어 러시아 작가 중 세 번째로 꼽았다.[25][76]

문학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기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잡지사 일로 인해 글 쓸 시간이 부족했고, 그의 작품이 아내가 편집하는 『미르 보지』에 실리자 연줄 덕분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17][68] 그는 키예프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삶은 힘들다. 스캔들, 소문, 시기, 증오... 나는 매우 외롭고 슬프다"고 토로했다.[26][77]

1902년부터 1905년 사이 쿠프린의 작품 수는 줄었지만 질적으로는 향상되었다. 그는 러시아 사회의 극명한 대조를 인식하며 '작은 사람들'의 곤경에 주목했는데, 이는 러시아 문학의 중요한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17] 이 시기 주목할 만한 단편으로는 체호프와 톨스토이가 칭찬한 《서커스에서》(1902), 폴레시에 연작과 주제적으로 연결된 《늪》(1902), 그리고 포그롬이 빈번했던 시기에 박해받는 소수 민족에 대한 깊은 공감을 보여준 《유대 여인》(1904) 등이 있다.[17][68] 그 외에도 위선(《조용한 삶》, 1904; 《좋은 친구》, 1905), 편견(《홍역》, 1904), 유한 계급의 타락(《대사제》, 1905)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23][74]

1904년 쿠프린은 군 복무 시절 "군대 생활의 공포와 지루함"을 느끼며 구상했던 장편 소설 《결투》의 집필을 시작하여 1905년 5월 3일에 출판했다.[27][28][78][79] 이 작품은 그에게 일종의 정화 과정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군 복무 기간 동안 쌓인 무거운 인상의 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소설을 결투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나의 결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차르 군대와의 결투 말이다. 군대는 영혼을 불구로 만들고, 인간의 모든 가장 훌륭한 충동을 파괴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타락시킨다... 나는 내가 알고 본 모든 것에 대해 써야 한다. 그리고 나의 소설로 차르 군대에게 결투를 신청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29][30][80][81]

《결투》는 출판되자마자 러시아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05년에만 약 45,500부가 판매되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였다. 소설을 둘러싼 논쟁은 1917년까지 계속되었다. 좌파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전제 정치의 관에 박는 또 하나의 못"이라며 환영했지만,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통치 질서에 대한 배신적인 공격"이라고 비난했다.[31][82] 심지어 한 장교는 신문을 통해 쿠프린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으나,[28][79] 반대로 1905년 여름에는 20명의 장교 그룹이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결투》는 쿠프린의 문학 경력에서 정점을 찍은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러시아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을 확고히 새기게 했다.[28][79]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쿠프린은 정권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세바스토폴흑해 함대 수병들과 교류했으며, 1905년 6월 반란을 일으킨 전함 포템킨에 합류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낙인찍혀 비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9][14][61][66] 그는 발라클라바에서 순양함 오차코프가 파괴되는 사건을 목격하고 이를 기록한 "세바스토폴의 사건"을 썼다. 또한, 후일 발표한 소설 《애벌레》(1918)에서는 불타는 순양함에서 탈출한 수병들을 구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음을 밝혔다.[32][83] 이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된 흑해 함대 사령관 그리고리 추흐닌 제독은 쿠프린에게 48시간 이내에 세바스토폴을 떠나라고 명령하고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다. 추흐닌 제독은 1906년 6월 암살되었지만 소송은 계속되었고, 2년 후 쿠프린은 지토미르에서 벌금형과 10일간의 가택 연금형을 선고받았다.[33][84]

1900년대 중반 그의 잘 알려진 단편으로는 《꿈》, 《건배》, 《예술》, 《살인자》 등이 있으며, 특히 《살인자》는 당시 러시아 사회에 만연했던 폭력 문제를 다루었다. 일본 스파이가 러시아 장교로 위장한 이야기를 그린 《류브니코프 소위》(1906)는 고리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30][81] 단편 《모욕》(1906)과 소설 《감브리누스》(1907)는 1905년 이후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감정적인 모티프들을 요약하며 "세바스토폴의 사건"에서 보인 선언적인 어조를 반복하여 논란을 일으켰다.[33][84]

1905년 이후 쿠프린은 다시 다양한 비문학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시의 첫 번째 국가 두마 선거인으로 나섰고, 1909–1910년에는 유명 스포츠 선수 세르게이 우토치킨과 함께 기구를 타고 비행했으며, 잠수부로서 흑해 깊은 곳을 탐험하고, 비행사 이반 자이킨과 함께 비행기 여행을 하기도 했다.[34][85]

1907년 쿠프린은 첫 번째 부인과 이혼했고, 1908년 옐리자베타 게인리흐(1882–1943)와 재혼하여 딸 크세니아 쿠프리나를 낳았다.[34] 같은 해, 고리키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그는 즈나니예 출판사를 떠났다. 사회주의자 여주인공의 강간을 다루고 혁명가 남편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단편 소설 《배멀미》(1908)가 출판되자, 고리키는 이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의도적인 비방으로 간주했다.[33][84] 이 시기 다른 주요 작품으로는 그의 동물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에메랄드》(1907), 아가를 바탕으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술라미스》(1908), 자전적 소설 《레노치카》(1910),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적 결말을 그린 《석류 팔찌》(1911)가 있다.[33][84] 발라클라바 어부들의 삶을 그린 스케치 연작 《레스트리고니》(1907–11)는 소박한 삶과 평범한 사람들의 미덕을 서정적으로 예찬했다.[33][84][85] 1909년 10월, 쿠프린은 이반 부닌과 공동으로 푸시킨 상을 수상했다.[8][60]

1908년, 쿠프린은 매춘 문제를 다룬 야심작이자 논란의 중심이 된 소설 《구덩이》(Яма|야마ru, The Pit)의 집필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1909년(1부), 1914년(2부), 1915년(3부)에 걸쳐 출판되었다.[35] 1부는 출간 직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2부와 3부는 상대적으로 무관심 속에 묻혔다. 쿠프린 자신이 이 소설을 다큐멘터리로 쓸지 소설로 쓸지 명확히 정하지 못하고 두 형식을 오가거나 인위적으로 결합하려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매춘굴의 실상을 상세히 묘사한 1부가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33][35] 이 소설은 레프 톨스토이를 포함한 일부 러시아 평론가와 작가들로부터 지나친 자연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젊은 니나 베르베로바와 같은 이들에게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36]

쿠프린과 그의 아내, 제1차 세계 대전 중


《구덩이》는 쿠프린의 마지막 주요 작품으로 여겨지며, 많은 이들은 이 작품 이후 그의 창의력이 쇠퇴했다고 평가한다.[33][35] 1912년부터 1914년 사이에 발표된 그의 단편 중에는 《검은 번개》와 《아나테마》가 있으며, 1912년 프랑스 남부 여행 후에는 20편의 스케치로 구성된 여행기 《코트 다쥐르》를 발표했다.[14][37] 1911년 그는 가족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가치나로 이사했다.[8]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쿠프린은 가치나의 자택에 군 병원을 열고 서부 전선 도시들을 방문하며 지원 활동에 나섰다. 1914년 말에는 언론을 통해 부상병을 위한 기금을 모금했으며, 자신의 문학 경력 25주년 기념 행사도 거절했다. 예비 장교였던 그는 1914년 11월 소집되어 1915년 5월까지 핀란드에서 보병 중대를 지휘했으나, 건강 악화로 제대했다. 이 때문에 러일 전쟁 당시 원했던 종군 기자 활동은 할 수 없었다. 전쟁을 반영한 그의 작품들은 주로 전쟁의 고통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이들을 비판하는 풍자 소설("고가 베셀로프", "칸탈루프", "아빠", "그루냐")이었다.[34][35][37]

1917년 2월 혁명 소식은 쿠프린이 의사의 권고로 헬싱키에 머물 때 전해졌다. 가치나로 돌아온 그는 여러 기사를 통해 차르주의 붕괴에 대한 열정을 표현했으며, 5월에는 사회주의 혁명당의 신문 『스보보드나야 로시야』(자유 러시아) 편집을 맡고 『볼노스트』(자유), 『페트로그라드스키 리스토크』(페트로그라드 소식지) 등에도 기고했다. 그는 2월 혁명이 가져온 자유를 환영하면서도, 혁명 이후 발생할 수 있는 과격한 사태와 러시아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했다.[37]

2. 4. 망명과 귀국, 그리고 죽음 (1917-1938)

2월 혁명 발발 당시 쿠프린은 의사의 진찰을 받기 위해 헬싱키에 있었다.[88] 가치나로 돌아온 그는 차르주의 붕괴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며, 5월에는 사회주의 혁명당의 신문 ''스보보드나야 로시야''(자유 러시아) 편집을 시작했고, ''볼노스트''(자유)와 ''페트로그라드스키 리스토크''(페트로그라드 잎)에도 기고했다. 그는 2월 혁명이 가져온 자유를 환영하면서도, 더 큰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과격한 행동을 경계하며 러시아가 피의 광란에 빠질 것을 경고했다.[37][88]

10월 혁명 이후 쿠프린의 정치적 입장은 명확하지 않았다. 1918년 중반까지 다양한 신문(''페트로그라드스코예 에코''(페트로그라드 에코), ''베체르네예 슬로보''(저녁 단어), ''자리아''(새벽) 등)에 기고한 글에서 새로운 볼셰비키 정권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레닌을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존경하며 "볼셰비즘은 인류에게 불가피한 위대하고 순수하며 사심 없는 교리"라고 말하기도 했다.[38][39][89][90] 그러나 막심 고리키와 함께 잠시 세계 문학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프로드라즈베르스트카(곡물 할당 징발 제도)와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비판하며 볼셰비키가 러시아 문화를 위협하고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8][60] 1918년 6월, 정권을 비판하는 신문 ''몰바''(소문)에 실린 기사 때문에 잠시 체포되기도 했다.[37] 같은 해 발표한 "애벌레"에서는 여성 혁명가의 영웅주의를 칭찬했지만, "가치나의 유령"에서는 새로운 지배자들의 폭정을 묘사하며 반볼셰비키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37][88] 1918년 말, 농민을 위한 신문 ''젬리아''(땅) 발간을 계획하고 레닌의 승인까지 받았으나, 공산주의 원칙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농촌 생활 변화를 지원하려던 이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다.[40][41][91][92]

망명 시기의 쿠프린


1919년 10월 16일, 니콜라이 유데니치 장군이 이끄는 백군이 가치나를 점령하자 쿠프린은 2주간 백군 신문 "프리네프스키 크라이"(네바 컨트리)를 편집했다.[55][61] 백군이 후퇴하자 그들과 함께 얌부르크로 이동하여 가족과 합류했고, 나르바를 거쳐 에스토니아레벨(현재의 탈린)에 도착했다. 12월에는 핀란드로 떠나 헬싱키에서 반년을 보낸 뒤, 1920년 7월 초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여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9][55][61]

파리에서의 17년은 쿠프린에게 힘든 시기였다. 창의력은 눈에 띄게 쇠퇴했고, 알코올 중독과 싸워야 했다.[55] 러시아를 떠난 것에 대한 깊은 슬픔과 향수는 그를 고독하고 내성적으로 만들었다.[42][93]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옛 친구 이반 자이킨에게 "나는 집 없는 늙은 개처럼 벌거벗겨지고 궁핍해졌다"고 토로했으며,[43][94] 1925년 한 기자에게는 "사람이 재능이 많을수록 러시아가 없는 삶은 더 힘들다"고 말하기도 했다.[45][96]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그의 글쓰기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44][95]

망명 후 그의 작품은 주로 과거를 회상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잃어버린 고국과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을 되새기며 글을 썼다.[42][93] 1925년 프랑스 남서부 방문 경험은 바욘 투우를 다룬 "진홍색 피"(1926)로 이어졌고,[14][66] 1927년에는 가스코뉴와 오트피레네 지방에 관한 스케치 "축복받은 남쪽"을 발표했다. 1928년 망명 러시아 작가 회의 참석차 방문한 베오그라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고슬라비아 관련 스케치를 쓰기도 했다.[41][42][92][93] 이 시기 주요 작품으로는 13개의 스케치로 구성된 소설 형식의 "시간의 수레바퀴"(1929), 자전적인 "생도들"(1932), 노교수와 이웃 소녀의 관계를 그린 낭만적인 "자넷"(1933) 등이 있다.[42][44][93][95]

볼코보 묘지 리테라토르스키 모스트키에 있는 알렉산드르 쿠프린의 묘


1930년대에 들어서도 쿠프린 가족의 빈곤과 빚은 계속되었다. 문학 수입은 빈약했고, 과음은 그의 건강을 해쳤으며, 1932년부터는 시력 악화로 글쓰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아내의 사업 시도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으로의 귀환이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였다. 1936년 말, 그는 마침내 비자를 신청했고, 1937년 5월 29일 딸의 배웅을 받으며 파리 북역을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5월 31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작가 단체 대표들을 만났고 메트로폴 호텔에 머물렀다. 6월 초에는 모스크바 외곽 골리치노의 소련 작가 연맹 소유 별장(다차)으로 옮겨 치료와 휴식을 취했다. 12월 중순, 부부는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로 이사했다.[9][61]

파리에서의 오랜 망명 생활은 쿠프린을 심신이 쇠약한 노인으로 만들었다. 그의 오랜 친구 니콜라이 텔레쇼프는 귀국 직후 그를 만나 혼란스러워하고 비참해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는 육체적으로 매우 튼튼하고 강한 상태로 러시아를 떠났지만... 쇠약하고, 연약하며, 의지가 약한 환자가 되어 돌아왔다. 이것은 더 이상 쿠프린, 즉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 남자가 아니었다."[46][97] 이반 부닌은 쿠프린의 귀국이 자발적이라기보다 병든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46] 그가 돌아온 시기는 대숙청이 절정에 달했던 때였다.[55][93][98]

귀국 후 그의 작품 출판이 허용되었지만, 쿠프린은 새로운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1937년 6월, 고리키 사망 1주년을 맞아 ''이즈베스티야''에 "회고록의 단편"을, 10월에는 "나의 고향 모스크바"라는 스케치를 발표하는 데 그쳤다.[46][97] 소련 당국은 그의 귀환을 체제 선전에 활용하려 했지만, 작가 리디아 노르드 등은 쿠프린이 고향에서 오히려 이방인처럼 느끼며 환멸감에 빠져 있었다고 전했다.[47][99]

1938년 1월부터 쿠프린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7월에는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기존의 신장 질환과 경화증에 더해 식도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도 소용이 없었다. 알렉산드르 쿠프린은 1938년 8월 25일에 사망했으며,[59] 이틀 후 레닌그라드의 볼코보 묘지 내 문학인의 다리(Literaturskiye Mostki)에 안장되었다.[9][55][61]

3. 작품 세계



1889년, 쿠프린은 기성 시인 리오도르 팔민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데뷔 단편 "마지막 데뷔"를 출판했다. 이 작품은 1881년 가수 예블랄랴 카드미나가 무대에서 독극물로 자살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으며, 이 사건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클라라 밀리치"에도 영향을 주었다.[5][9]

"마지막 데뷔" 이후 3년 만인 1892년 12월, 두 번째 작품 "프시케"가 발표되었다. 이 작품과 이후 발표된 "달빛 아래서"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탐구하며 정신 이상의 문제를 다루었다.[9] 쿠프린이 군 복무 중이던 시기에는 단편 소설 ''어둠 속에서''(1893)와 여러 단편("슬라브 영혼", "광기", "잊혀진 키스", 모두 1894년)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예술적으로 연구한 작품들이었다.[9] 그의 첫 번째 비평적 주목을 받은 작품은 군대 생활을 다룬 "조사"(1894)였으며, 이는 러시아 군대를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들("잠잘 곳"(1897), "야간 근무"(1899), "프라포르시크"(1897), "임무"(1901))로 이어졌고, 결국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결투''의 탄생으로 이어졌다.[8]

군 생활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조사"의 출판은 쿠프린이 1894년 군을 떠나는 주요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장교가 자신의 이름으로 군 내부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위험한 일이었다.[9][11]

군에서 나온 쿠프린은 특별한 계획 없이 러시아 제국 남서부 지역을 5년간 여행했다.[8] 그는 치과 진료 보조, 토지 측량, 연기, 서커스 공연, 시편 가창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으며, 이 경험들은 그의 소설에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다. 이 시기 그는 독서와 자기 교육에 힘썼고, 특히 글레브 우스펜스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8] 1894년 키예프에 정착한 쿠프린은 여러 신문사에서 일하며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했다. 그는 저널리스트에게 필요한 자질로 "미친 용기, 대담함, 넓은 시야, 놀라운 기억력"을 꼽았고, 러시아 남서부 여러 도시(노보체르카스크, 로스토프나도누, 차리친, 타간로크, 오데사)의 신문에 기고했다.[12][13]

1896년, 쿠프린은 러시아 자본주의의 급격한 성장과 산업 불안을 비판적으로 그린 첫 주요 작품인 ''몰로흐''를 발표하며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다.[15] 이후 "혼란"(1897), "지구의 내장"(1899) 등에서도 산업화 문제를 다루었으나, 일시적인 관심에 그쳤다는 평가도 있다.[13] 그는 특정 환경이나 직업을 묘사하는 스케치에도 능했는데, 1896년 첫 책인 스케치 모음집 ''키예프 유형''을 출간했고, 1897년에는 두 번째 컬렉션 ''미니어처''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레프 톨스토이로부터 호평받은 서커스 이야기 "알레!"가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작가로서 그의 성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계였다.[13][15]

1897년 볼히니아와 폴레시에 지역에서의 경험은 그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활기차고 고귀하며 광범위하고 유익한 인상을 흡수했고... 러시아어와 풍경을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미완성된 "폴레시에 연작"의 일부인 "오지", 사랑 이야기 ''올레샤'', 공포물 "늑대인간" 등이 1898년에서 1901년 사이에 발표되었다.[13] ''몰로흐''와 ''올레샤''는 쿠프린의 문학적 명성을 확고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01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 월간지 ''주르날 델랴 브세흐''의 초청을 받아 수도로 이주했다.[9]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쿠프린은 러시아 문화계의 중심인물들과 교류했다. 안톤 체호프와는 그의 사망 시까지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언을 구했고,[17] 이반 부닌과는 망명 생활까지 이어지는 40년간의 우정을 쌓았다.[18] 학자이자 평론가인 ''미르 보지''의 표도르 바튜시코프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19] 빅토르 미로류보프와[20][21] 막심 고리키는 그의 작가 경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17][22][23] 쿠프린은 고리키, 부닌,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등이 속한 모스크바의 사실주의 작가 모임 '스레다'(수요일)에도 참여했다.[17] 1902년, 그는 ''미르 보지'' 편집자 알렉산드라 다비도바의 양녀인 마리아 카를로브나 다비도바와 결혼했다. 같은 해 다비도바가 사망했고, 마리아 카를로브나가 출판을 맡게 되었다. 쿠프린은 곧 ''즈르날 랴 브세흐''를 떠나 아내가 편집하는 잡지의 소설 부서를 맡게 되었다.[17]

1903년 고리키가 설립한 출판사 즈나니예(지식)는 쿠프린의 8편의 단편 모음집을 출판했는데, 그중에는 "조사"와 ''몰로흐''가 있었다.[17] 레프 톨스토이는 이 모음집의 생생한 문체를 칭찬했고, 평론가들은 쿠프린이 체호프와 고리키의 주제와 기법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하며 거의 만장일치로 찬사를 보냈다. ''미르 보지''의 안젤 보그다노비치는 쿠프린의 간결한 문체와 활기찬 생동감을 전달하는 능력을 칭찬했다.[24] 고리키 자신은 1903년 3월 텔레쇼프에게 편지를 써서 쿠프린을 체호프와 안드레예프 다음으로 러시아 작가 중 세 번째로 꼽았다.[25]

문학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쿠프린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첫 몇 년은 스트레스가 많았다. 잡지사에서의 고용은 그가 자신의 글을 쓸 시간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그의 작품이 ''미르 보지''에 실렸을 때, 그의 성공이 가족 관계 덕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17] "삶은 힘들다: 스캔들, 소문, 시기, 증오... 나는 매우 외롭고 슬프다."라고 그는 키예프의 한 친구에게 편지에서 고백했다.[26]

쿠프린은 1902년부터 1905년까지 지방에서보다 글을 덜 썼지만, 그의 글의 양이 줄었음에도 그 질은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이제 러시아 사회에 만연한 노골적인 대조에 대해 더 의식하게 된 그는 '작은 사람'의 곤경에 주목했고, 이는 러시아 문학의 가장 훌륭한 전통을 따르는 것이었다.[17] 주목할 만한 단편 소설로는 체호프와 톨스토이가 칭찬한 "서커스에서" (1902), 폴레시에 연작과 주제적으로 연결된 "늪" (1902), 그리고 러시아 남서부에서 포그롬이 정기적으로 발생하던 시기에 쿠프린이 이 박해받는 소수 민족에 대해 깊은 공감을 보여준 "유대 여인" (1904)이 있다.[17] 이 시기 쿠프린의 산문의 다른 주제로는 위선 ("조용한 삶", 1904; "좋은 친구", 1905), 편견 ("홍역", 1904), 그리고 유한 계급의 타락 ("대사제", 1905)이 있다.[23]

1904년 쿠프린은 군 복무 시절 구상했던 ''결투''의 집필을 시작했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군대 생활의 공포와 지루함", 군대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으며, "차르 군대와의 결투"라고 표현할 만큼 강한 비판 의식을 담았다.[27][28][29][30] 1905년 5월 출간된 ''결투''는 그해 러시아 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05년에 약 4만 5천 5백 부가 판매되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였다. 이 소설이 일으킨 논란은 1917년까지 계속되었다. 좌파 평론가들은 ''결투''를 "전제 정치의 관에 박는 또 하나의 못"으로 환영했고,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그것을 "통치 질서에 대한 배신적인 공격"으로 비난했다.[31] 심지어 한 장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신문을 통해 쿠프린에게 결투를 신청했으며,[28] 다른 20명의 장교들은 1905년에 쿠프린에게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보냈다. ''결투''는 쿠프린 경력의 정점이자 러시아 문학사에서 그에게 불멸성을 보장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28]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쿠프린은 정권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게 되었다. 그는 세바스토폴흑해 함대 해군들과 연을 맺었고, 1905년 6월 반란을 일으킨 전함 포템킨에 입대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여겨져 비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9][14] "세바스토폴의 사건"에서 그는 쿠프린이 발라클라바에서 목격한 순양함 ''오차코프''의 파괴를 묘사했다. 그의 후기 작품인 "애벌레" (1918)는 그가 불타는 순양함에서 탈출한 여러 해군들을 구출하는 것을 도왔음을 밝힌다.[32] 흑해 함대 사령관 그리고리 추흐닌 제독은 이 비극에 책임이 있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쿠프린에게 48시간 이내에 세바스토폴을 떠나라고 명령하고 명예 훼손에 대한 법적 절차를 시작했다. 1906년 6월 추흐닌은 암살당했지만, 사건은 종결되지 않았고 2년 후 지토미르에서 쿠프린은 벌금형과 10일간의 가택 연금형을 선고받았다.[33]

1900년대 중반 그의 잘 알려진 이야기로는 "꿈", "건배", "예술", "살인자" 등이 있으며, 이 중 "살인자"는 당시 러시아를 휩쓴 폭력의 문제를 다루었다. 일본 스파이가 러시아 장교로 위장한 이야기를 담은 "류브니코프 소위" (1906)는 고리키의 칭찬을 받았다.[30] "모욕" (1906)과 "감브리누스" (1907)는 1905년 이후 그의 글쓰기의 많은 모티프를 감정적으로 요약한 것으로, "세바스토폴의 사건"의 선언적 어조를 반영하여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다.[33]

1905년부터 쿠프린은 다시 수많은 비문학 분야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시의 첫 번째 국가 두마 선거인으로 나섰다. 1909–1910년 그는 유명한 스포츠 선수 세르게이 우토치킨과 함께 열기구를 타고, 잠수부로서 흑해의 깊은 곳으로 모험을 떠났으며, 비행사 이반 자이킨과 함께 비행기 여행을 동행했다. 1907년 그는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1908년 딸 크세니아 쿠프리나를 낳은 옐리자베타 게인리흐(1882–1943)와 결혼했다.[34]

thumb (1910년대 만화)]] 1908년 쿠프린과 고리키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그는 즈나니에를 떠났다. 같은 해에 사회 민주주의자 여주인공의 강간을 다루고 혁명가 남편을 불리하게 묘사한 단편 소설 "배멀미"가 출판되었는데, 고리키는 이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의도적인 비방으로 간주했다.[33] 이 시기 쿠프린의 다른 작품으로는 그의 동물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에메랄드" (1907), "술라미스" (1908, 아가를 바탕으로 한 '영원한 사랑'에 대한 송시), 자전적인 "레노치카" (1910), 그리고 그의 유명한 '비극적 로맨티시즘' 소설인 ''석류 팔찌'' (1911)가 있으며, 여기에서 희망 없는 사랑은 조용하고 비극적인 종착점을 찾는다.[33] ''레스트리고니'' (1907–1911)는 발라클라바의 어부들에 대한 일련의 스케치로, 단순한 삶에 대한 서정적인 찬가이자 단순한 사람들의 미덕에 대한 서사적 찬양을 제공했다.[33][34] 1909년 10월 쿠프린과 부닌은 공동으로 푸시킨 상을 수상했다.[8]

1908년, 쿠프린은 그의 가장 야심차고 논란이 많은 작품인 ''구덩이'' 작업을 시작했다. 이 소설 형식의 매춘 연구는 1909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1914년에 두 번째, 1915년에 세 번째가 출판되었다.[35] 1부는 출간되자마자 광범위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2부와 3부는 거의 모두 무관심 속에 묻혔다. 쿠프린은 자신의 소설이 다큐멘터리인지 소설인지 결정하지 못했던 탓인지,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흔들리거나 인위적인 방식으로 결합하려 했다. 매춘굴의 세부 사항을 담은 1부가 단연 최고라는 평가가 있다.[33][35] 이 소설은 일부 러시아 평론가와 작가(레프 톨스토이 포함)로부터 과도한 자연주의로 비판을 받았고, 이를 칭찬한 사람들 중에는 젊은 니나 베르베로바가 있었다.[36]

''구덩이''는 쿠프린의 마지막 주요 작품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창의력 쇠퇴를 알리는 신호였다.[33][35] 그의 가장 유명한 1912-1914년 단편으로는 "검은 번개"와 "아나테마"가 있으며, 1912년 4월에서 7월 사이에 프랑스 남부를 방문한 후 20개의 스케치로 이루어진 여행 인상 주기인 "코트 다쥐르"가 탄생했다.[14][37] 1911년 그는 가족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가치나로 이사했다.[8]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쿠프린은 자신의 가치나 집에 군 병원을 열고 서부 전선 도시들을 방문했다. 1914년 말에는 언론을 통해 부상병을 위한 기금을 모금했고, 12월에는 문학 경력 25주년 기념 행사를 거부했다. 예비 장교로서 그는 1914년 11월에 소집되어 1915년 5월까지 핀란드에서 보병 중대를 지휘하다가 건강 악화로 제대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1904-1905년 러일 전쟁 동안 열망했던 종군 기자로 활동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의 전쟁을 반영한 몇 안 되는 이야기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조국의 고통을 이용하여 재산을 모으는 냉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풍자("고가 베셀로프", "칸탈루프", "아빠", "그루냐")였다.[34][35][37]

1910년대의 쿠프린


2월 혁명은 쿠프린을 의료상의 조언을 따라 헬싱키에 가게 만들었다. 가치나로 돌아온 그는 일련의 기사에서 차르주의 붕괴에 대한 열정을 표현했고, 5월에는 사회주의 혁명당의 신문 ''스보보드나야 로시야''(자유 러시아)를 편집하기 시작했으며, ''볼노스트''(자유)와 ''페트로그라드스키 리스토크''(페트로그라드 잎)에도 기고했다. 2월 혁명이 가져온 자유를 환영하면서도, 그는 더 많은 격변이 가져올 수 있는 과잉을 예견하고 러시아가 피의 광란에 빠지는 것을 경고했다.[37]

10월 혁명은 쿠프린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18년 중반까지 다양한 신문(그중에는 ''페트로그라드스코예 에코''(페트로그라드 에코), ''베체르네예 슬로보''(저녁 단어), ''자리아''(새벽) 등)에 기고한 그의 기사에서 새로운 정권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여전히 양가적이었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인식하고 레닌을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존경하며 "볼셰비즘은 인류에게 불가피한 위대하고 순수하며 사심 없는 교리"라고 말했다.[38][3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막심 고리키와 함께 잠시 세계 문학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프로드라즈베르스트카와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비판하며, 볼셰비키가 러시아 문화를 위협하고, 그들의 불충분한 국가 지식이 농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주장했다.[8] 1918년 6월, 쿠프린은 정권을 비판하는 신문 ''몰바''(소문)의 기사 때문에 잠시 체포되었다. 그의 1918년 이야기 중 하나("애벌레")는 여성 혁명가들의 영웅주의를 칭찬했고, 다른 하나("가치나의 유령")는 러시아의 새로운 지배자들의 폭정에 대한 반볼셰비키 이야기였다.[37]

1918년 말, 쿠프린은 특히 농민을 위해 설계된 신문 ''젬리아''(땅)에 대한 정교한 계획을 세웠다. 그의 제안된 프로그램은 공산주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방식으로 농촌 생활의 급격한 변화에 정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고리키의 지원을 받고 1918년 12월 25일 쿠프린을 만난 레닌의 승인을 받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다.[40][41]

1919년 10월 16일, 니콜라이 유데니치 장군이 이끄는 백군가치나를 점령했다. 쿠프린은 2주 동안 유데니치 군사령부에서 발행하는 신문인 "프리네프스키 크라이"(네바 컨트리)를 편집했다. 10월, 백군이 서쪽으로 후퇴하면서 쿠프린은 그들과 함께 얌부르크로 이동하여 아내와 딸과 합류했다. 나르바를 거쳐 가족은 에스토니아의 레벨에 도착했고, 12월에는 핀란드로 떠났다. 헬싱키에서 반년을 보낸 후, 1920년 7월 초 파리에 도착하기 위해 프랑스로 항해했다.[9]

그 후 파리에서 보낸 17년 동안 쿠프린의 창의력은 쇠퇴했고, 그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러시아와의 이별에 슬퍼하며 그는 고독하고 내성적이 되었다.[42] 가족의 가난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쿠프린은 옛 친구인 이반 자이킨에게 "나는 집 없는 늙은 개처럼 벌거벗겨지고 궁핍해졌다"고 썼다.[43] 이 모든 것이 그의 글쓰기를 방해했다.[44] 쿠프린은 1925년 한 기자에게 "사람이 재능이 많을수록 러시아가 없는 삶은 더 힘들다"고 말했다.[45]

쿠프린의 향수는 그가 망명한 후 그의 작품에서 회고적인 특징을 설명해준다. 그는 초기 작품의 익숙한 주제로 돌아가 잃어버린 고국과 그를 연결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되새겼다.[42] 1925년 프랑스 남서부 방문은 바욘에서의 투우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은 "진홍색 피"(1926)에 영감을 주었고, 1927년에는 가스코뉴와 오트피레네에 관한 네 편의 스케치인 "축복받은 남쪽"이 이어졌다.[14] 그 후 1928년 쿠프린이 망명한 러시아 작가들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결과물인 유고슬라비아에서 제작된 주로 도시적인 스케치가 나왔다.[41][42] 쿠프린의 파리 시절의 주요 작품 세 편은 "시간의 수레바퀴"(1929, 소설 형식의 13개의 스케치), 자전적인 "생도들"(1932), 그리고 이웃의 어린 소녀에 대한 노교수의 애정을 묘사한 낭만적인 "자넷"(1933)이었다.[42][44]

3. 1. 주요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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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 목록
연도작품명 (원제)비고
1889마지막 데뷔 (Последний дебютru)단편
1892프시케 (Психеяru)단편
1893달빛 아래서 (Лунной ночьюru)단편
1893어둠 속에서 (Впотьмахru)중편소설
1894조사 (Дознаниеru)단편
1896몰로흐 (Молохru)중편소설
1896키예프 유형 (Киевские типыru)스케치 모음
1897미니어처 (Миниатюрыru)단편 소설집
1897알레! (Allez!ru)단편 (《미니어처》 수록)
1898올레샤 (Олесяru)중편소설
1902서커스에서 (В циркеru)단편
1903말 도둑 (Конокрадыru)단편
1905결투 (Поединокru)장편소설
1906류브니코프 2등 대위 (Штабс-капитан Рыбниковru)단편
1906삶의 강 (Река жизниru)단편
1907에메랄드 (Изумрудru)단편
1907감브리누스 (Гамбринусru)단편
1908술라미스: 고대의 로맨스 (Суламифьru)중편소설
1909–1915야마 (구덩이) (Ямаru)장편소설
1911석류 팔찌 (Гранатовый браслетru)중편소설
1907–1911레스트리고니 (Лестригоныru)스케치 연작
1913액체 태양 (Жидкое солнцеru)소설
1929시간의 수레바퀴 (Колесо времениru)소설 형식 스케치
1933생도 (Юнкераru)자전적 소설 (1928–1932 집필)
1933자네트 (Жанетаru)소설


4. 평가 및 영향

니콜라스 루커는 쿠프린이 1860년대 러시아 대문호들의 시대 이후, 단편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고 평가했다. 쿠프린은 동시대 작가인 안톤 체호프의 절제, 막심 고리키의 확신, 이반 부닌의 섬세함과는 다른, 자신만의 빠른 서사 전개, 탄탄한 줄거리 구성, 풍부한 주제를 통해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탐구는 그의 작품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흥미롭게 읽히는 이유이다.[46]

쿠프린은 소설 ''결투''(1905)로 큰 명성을 얻었으며[52], 안톤 체호프, 막심 고리키,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이반 부닌 등 동시대 작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4] 특히 레프 톨스토이는 쿠프린을 체호프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칭찬했다. 당대 문학계의 실험적인 경향과 달리, 쿠프린은 혁신보다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썼으며, 그의 인물들은 체호프 작품 속 인물들의 비관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쿠프린의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모험과 그들의 신경질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면모 때문에 그를 "러시아의 키플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53]

20세기 내내 알렉산드르 쿠프린은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고전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작품은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는데, 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불행한 사랑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군대나 사창가 같은 현실적인 공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시대를 초월하는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53]

1979년 소련의 천문학자 니콜라이 체르니흐가 발견한 소행성 3618 쿠프린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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