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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안드레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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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니트 안드레예프는 러시아의 소설가, 극작가로, 가난한 유년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고뇌와 사회 부조리를 묘사하는 작품을 주로 썼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와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초기 작품에서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막심 고리키의 권유로 문학에 전념하여,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실패를 겪은 후 비관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1917년 핀란드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했으며, 스탈린 시대에는 작품이 금지되었다가 사후에 복권되었다. 그의 작품은 미국, 일본 등 해외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공포 소설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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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안드레예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레오니트 니콜라예비치 안드레예프
로마자 표기Leonid Nikolayevich Andreyev
출생일1871년 8월 21일
출생지러시아 제국 오룔 현 오룔
사망일1919년 9월 12일
사망지핀란드 무스타매키
1912년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자가 크롬 자화상
오토크롬 자화상, 1912년 출판
직업
직업작가, 극작가
국적
국적러시아
활동 기간
활동 기간1890년대 ~ 1910년대
장르
장르소설, 드라마
사조
사조사실주의
자연주의
러시아 상징주의
표현주의
가족
자녀다니일 안드레예프, 바딤 안드레예프
학력
모교모스크바 제국 대학교 (1897)
대표작
대표작교수형 받은 일곱 명
인간의 삶
뺨을 맞은 자

2. 생애

레오니트 안드레예프와 두 번째 부인 안나


러시아의 작가 레오니트 니콜라예비치 안드레예프는 1871년 8월 21일 러시아 제국 오룔에서 태어났다.[2][3] 그의 어머니는 오래된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4]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가난과 개인적인 시련 속에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초기에는 법원 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1898년 단편 '바르가모트와 가라시카'가 막심 고리키에게 인정받으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5]

안드레예프는 20세기 초 러시아 문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초기에는 사실주의에 기반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그렸으나 점차 상징주의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며 인간 내면의 불안과 고독, 삶의 부조리를 탐구했다. 그의 작품은 종종 염세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를 띠며, 성(性)과 죽음과 같은 금기시되는 주제를 대담하게 다루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민주주의적 이상을 지지하며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냈으나, 혁명의 실패와 이후 사회의 혼란을 겪으며 점차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17년 10월 혁명볼셰비키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결국 핀란드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반(反)볼셰비키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두 번 결혼했으며, 첫 부인 알렉산드라 벨리고르스카이아와의 사이에서 시인 다닐 안드레예프와 바딤 안드레예프를 두었다. 알렉산드라 사후 안나 데니세비치와 재혼했다. 망명지에서의 어려운 생활 끝에 1919년 9월 12일 핀란드 네이볼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8] 그의 작품은 스탈린 시대 소련에서 금지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어 재평가받았고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장되었다. 그의 희곡 ''뺨 맞는 자를 위하여'' 등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져 공연되고 있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러시아 중부 도시 오룔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오래된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2][3] 우크라이나와 핀란드 조상도 있었다고 주장했다.[4] 유년 시절 대부분을 가난한 빈민촌에서 보냈으며, 아버지의 사망으로 생활고가 더욱 심해지자 그림을 팔거나 개인 교습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18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892년 잡지 '별'에 굶주리는 학생을 묘사한 첫 단편소설 '가난과 부'를 발표했다. 1893년에는 학비를 내지 못해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제적당하고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부로 편입했다. 1894년에는 실연의 아픔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이 사건으로 만성 심장병을 앓게 되었다.

1897년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잠시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후 '모스크바 통보'의 법정 통신원으로 일했으며, 같은 해 말 신문 Kur'er|쿠리에르ru에 법정 관련 기사를 쓰면서 체계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898년 발표한 단편 '바르가모트와 가라시카'가 막심 고리키의 눈에 띄면서 문학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고리키는 안드레예프에게 문학에 전념할 것을 권유했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다. 고리키의 소개로 안드레예프는 모스크바의 스레다 문학 그룹 회원이 되었고, 고리키의 즈나니예 출판사를 통해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5] 안드레예프는 결국 법률 실무를 그만두고 문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2. 문학 활동

18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생활고를 겪으며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892년 그는 잡지 '별'에 굶주리는 학생을 묘사한 첫 단편소설 <가난과 부>를 발표했다. 학비 문제로 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제적된 후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부로 편입했다.

1897년 변호사 자격을 얻고 모스크바 대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변호사로 일하다가 '모스크바 통보'의 법정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말, 신문 '쿠리에르(Kur'er)'에 법정 관련 기사를 쓰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898년 발표한 단편 <바르가모트와 가라시카>("Bargamot and Garaska")는 막심 고리키의 주목을 받았고, 고리키는 안드레예프에게 문학에 집중할 것을 권유했다. 이후 안드레예프는 고리키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고리키의 즈나니예 출판사를 통해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5]

초기 단편들에서 안드레예프는 주로 소외된 계층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가난에 시달리는 아이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 하층 관리, 노동자, 부랑자, 성매매 여성 등 부르주아 도시의 무산 계급이 겪는 삶의 무게와 고통스러운 노동, 끊임없는 가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인간의 개성을 억압하고 정신적 독자성을 획일화하는 사회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함께, 고립된 인간과 단절된 인간관계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혁명이나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독자적인 문학, 즉 비정치적 예술을 추구하고자 했다.

1901년 첫 단편 소설집은 출간 즉시 25만 부가 팔리며 그를 러시아 문학계의 스타로 만들었다. 같은 해 "스체나"("The Wall")를 발표했고, 1902년에는 "베즈나"("The Abyss")와 "브 투마네"("In the Fog")를 출판했다. 특히 뒤의 두 작품은 성(sex)에 대한 솔직하고 대담한 묘사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6] 1902년부터 1905년까지 그는 러시아 지방의 삶, 법정과 감옥(자신의 변호사 및 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의료 환경 등 다양한 주제의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인간 심리와 정신 의학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의 작품에서 인간 정신을 탐구하는 특징으로 나타났으며, 1902년 단편 "미슬"("Thought")과 같이 러시아 문학사에서 기억될 만한 인물들을 창조해냈다.[7]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안드레예프는 민주주의적 이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사회·정치적 논쟁에 참여했다. 이 시기 발표된 "붉은 웃음"("Красный смех", 1904년), ''총독''("Губернатор", 1905년), ''사형수 이야기''("Рассказ о семи повешенных", 1908년) 등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8] 1905년부터는 희곡 창작에도 힘을 쏟아 ''인생의 삶''(1906년), ''차르 굶주림''(1907년), ''검은 가면''(1908년), ''우리 삶의 날들''(1909년) 등을 발표했다. 특히 ''인생의 삶''은 1907년 모스크바 예술 극장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볼로트 메이예르홀드에 의해 동시에 무대에 오르며 큰 주목을 받았다.[7]

그러나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실패 이후, 안드레예프의 작품 세계는 점차 절대적인 비관주의와 깊은 절망감으로 기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인간과 사회의 조화는 불가능하며 세상은 본질적으로 부조화하다는 염세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8월, 그의 가장 유명한 희곡 중 하나인 ''뺨 맞는 자를 위하여''를 완성했고, 이 작품은 같은 해 10월 혁명 이후 1922년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1]

1916년에는 '루스카야 볼랴(Русская воля)' 신문의 문학 부문 편집자를 맡았다. 그는 2월 혁명을 지지했지만, 볼셰비키의 집권이 가져올 비극을 예감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1917년 핀란드로 이주하여 망명 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볼셰비키 정권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상주의자이자 반항아였던 그는 말년을 극심한 가난 속에서 보냈으며, 1919년 9월 12일 핀란드의 시골 마을 네이볼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8]

스탈린 시대에 안드레예프는 반동 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은 1930년 이후 소련 내에서 출판이 금지되었다. 1956년 스탈린 사후에야 복권되어 재평가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유해는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장되었다.

2. 3. 혁명과 망명



안드레예프는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민주주의적 이상을 옹호하며 사회적, 정치적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많은 지식인처럼 혁명에 동정적이었으며, 이 시기의 정신을 담아낸 '붉은 웃음'(Красный смех|크라스니 스메흐ru, 1904), ''총독''(Губернатор|구베르나토르ru, 1905), ''사형수 이야기''(Рассказ о семи повешенных|라스카스 오 세미 포베셴니흐ru, 1908)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혁명의 실패를 목격하면서 이를 모든 사회사상의 실패로 인식했고, 인간과 사회의 조화는 불가능하며 세상은 본질적으로 조화롭지 못하다는 비관적인 결론에 이르렀다.[5] 혁명 실패 이후 점차 보수적인 입장으로 돌아섰으며, 1905년 이후 그의 작품들은 깊은 비관주의와 절망적인 분위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1916년에는 신문 ''루스카야 볼랴''(Русская воля|루스카야 볼랴ru)의 문학 부문 편집자가 되었다. 그는 2월 혁명을 지지했지만, 볼셰비키의 집권이 가져올 비극을 예견했다. 결국 1917년 10월 혁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해 핀란드로 망명했다. 핀란드 망명지에서 그는 볼셰비키 통치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비판적인 목소리를 이어갔다. 이상주의자이자 반항아였던 안드레예프는 망명지에서 극심한 가난 속에 말년을 보냈으며, 1919년 9월 12일 핀란드의 시골 마을 네이볼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8] 그의 조기 사망은 10월 혁명의 결과에 대한 깊은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촉진되었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8] 그는 사망 며칠 전 마지막 소설인 ''사탄의 일기''를 완성했다.[8]

스탈린 시대에 안드레예프는 판금 작가로 분류되며 그의 작품은 소련 내에서 출판이 금지되었다. 1930년 이후 그의 이름은 문단에서 거의 지워졌으나, 스탈린 사후인 1956년 공식적으로 복권되어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유해는 레닌그라드(현재 페테르부르크)로 이장되었다.

2. 4. 사후

1917년 10월 혁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안드레예프는 그해 핀란드로 이주했다.[8] 핀란드에 있는 자택에서 그는 볼셰비키의 통치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발표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8] 이상주의자이자 반항아였던 그는 망명지에서 가난 속에 말년을 보냈다.[8] 1919년 9월 12일, 핀란드의 시골 마을 네이볼(Neivola)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8]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10월 혁명의 결과에 대한 그의 깊은 정신적 고통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8] 그는 사망하기 며칠 전에 마지막 소설인 ''사탄의 일기''를 완성했다.[8]

스탈린 시대에 안드레예프는 반동 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은 탄압받았다. 1930년 이후 그의 저작들은 소련 내에서 출판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1956년 스탈린 사후 해빙기를 거치면서 공식적으로 복권되었고, 그의 문학적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이후 그의 유해는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장되었다.

안드레예프의 작품 중 일부는 사후에도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특히 그의 희곡 ''뺨 맞는 자를 위하여''는 1922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되었으며,[1] 이후 여러 차례 영화, 오페라, 뮤지컬 등으로 각색되어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그의 작품으로 남아있다.[1] MGM 스튜디오는 1924년 이 작품을 영화화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인생의 삶''(1917), ''사비네 여인의 강탈''(1922), ''파문''(1923) 등이 미국에서 공연되었다.[8] 그의 단편 소설 ''사색''을 바탕으로 파벨 코호트가 각색한 연극 ''불쌍한 살인자''는 1976년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었다.

3. 작품 세계

안드레예프는 '러시아의 에드거 앨런 포'로 불리기도 하며, 그의 작품 세계는 어둡고 상징적인 특징을 보인다. 그는 단편 소설부터 희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인간 심리와 사회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경향을 보였다.[9]

3. 1. 주제와 특징

1914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에서는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안드레예프는 '러시아의 에드거 앨런 포'로 불리며 그의 작품 번역본이 영어권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졌다. 그의 작품은 The Crushed Flower, and other stories영어 (1916), The Little Angel, and other stories영어 (1916), When The King Loses His Head, and other stories영어 (1920) 등 다양한 책 형태로 번역되었다. 또한 그의 단편 소설 번역본은 1920년대 Weird Tales 잡지에도 실렸는데, 예를 들어 1927년 3월호에는 Lazarus영어가 게재되었다.

'러시아의 에드거 앨런 포'로 종종 언급되는 안드레예프는 번역을 통해 두 명의 중요한 공포 작가, H. P. 러브크래프트로버트 E. 하워드에게 영향을 미쳤다. 공포 작가 H. P. 러브크래프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서재에서는 안드레예프의 The Seven Who Were Hanged영어와 The Red Laugh영어 사본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S.T. Joshi의 Lovecraft's Library영어 목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로버트 E. 하워드는 안드레예프를 자신이 생각하는 역대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7인 중 한 명으로 꼽았다.[9]

레오니트 안드레예프의 손녀이자 바딤 안드레예프의 딸인 미국의 작가이자 시인 올가 안드레예프 칼라일(1931년 출생)은 1987년에 그의 단편 소설 모음집인 Visions영어를 출판했다.

3. 2. 주요 작품

1898년 모스크바의 '쿠리에르'(Курьерru) 신문에 첫 단편 소설 "바르가모트와 가라시카"(Баргамот и Гараськаru)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 작품은 막심 고리키의 주목을 받아 그의 격려로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5] 1901년 첫 단편집은 출간 즉시 25만 부가 팔리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초기 주요 작품으로는 성(性)에 대한 대담한 묘사로 논란을 일으킨 "베즈나"(Безднаru, 1902)와 "브 투마네"(В туманеru, 1902), 인간 심리를 탐구한 "미슬"(Мысльru, 1902) 등이 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시기에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며 민주주의적 이상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는 러일 전쟁의 참상을 그린 "붉은 웃음"(Красный смехru, 1904), ''총독''(Губернаторru, 1905) 및 사형 제도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사형수 이야기''(Рассказ о семи повешенныхru, 1908)가 있다. 이 시기부터 희곡 창작에도 힘써 상징주의적 색채가 강한 ''인간의 삶''(Жизнь человекаru, 1906), ''차르 굶주림''(Царь Голодru, 1907), ''검은 가면''(Чёрные маскиru, 1908), ''파문''(Анатэмаru, 1909), ''우리 삶의 날들''(Дни нашей жизниru, 1909) 등을 발표했다. 특히 ''인생의 삶''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와 세볼로트 메이예르홀드에 의해 각각 모스크바 예술 극장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연되기도 했다.[6]

1915년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희곡인 ''뺨 맞는 자를 위하여''(Тот, кто получает пощёчиныru)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 초연되었고,[7] 이후 영어로 번역되어 1922년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1] 여러 차례 영화, 오페라, 뮤지컬 등으로 각색되며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희곡이 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에 맞선 벨기에인들의 저항을 그린 희곡 ''벨기에의 슬픔''(Бельгийские скорбиru)을 쓰기도 했다. 이 희곡은 미국에서 ''인생의 삶'' (1917), ''사비네 여인의 강탈'' (1922), ''뺨 맞는 자를 위하여'' (1922), ''파문'' (1923)과 함께 제작되었다. MGM 스튜디오는 1924년에 ''뺨 맞는 자를 위하여''의 영화 버전을 제작했다.

말년에는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며 정치적 글쓰기에 몰두했으며, 1917년 이후 작품 활동은 줄어들었다. 사망 직전 마지막 소설인 ''사탄의 일기''(Дневник Сатаныru)를 완성했다.[8] 파벨 코호트가 각색한 그의 단편 소설 ''미슬''을 바탕으로 한 ''불쌍한 살인자''는 1976년 브로드웨이에서 개봉했다.

그 외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그렇게 있었다』(Так былоru, 1906년)
  • 『어둠』(Тьмаru, 1907년)
  • 『사시카 제굴료프』(Сашка Жегулёвru, 1911년)

4. 영향

레오니트 안드레예프의 작품은 20세기 초 해외 여러 나라, 특히 미국일본 문학계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는 '러시아의 에드거 앨런 포'로 불리며 H. P. 러브크래프트로버트 E. 하워드[9] 같은 공포 문학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1906년 우에다 빈의 번역을 시작으로 소개되어 나쓰메 소세키[11], 시가 나오야[12]다이쇼 시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일본에 체류하던 중국의 문학가 루쉰에게도 소개되었다.

4. 1. 해외 영향

1914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에서는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러시아의 포'로 불리던 안드레예프의 작품은 영어권 독자들에게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The Crushed Flower, and other stories'' (1916), ''The Little Angel, and other stories'' (1916), ''When The King Loses His Head, and other stories'' (1920) 등 다양한 단행본으로 번역되었다. 단편 소설 번역본은 1920년대 Weird Tales 잡지에도 실렸으며, 1927년 3월호에는 "Lazarus"가 게재되었다.

안드레예프는 번역을 통해 H. P. 러브크래프트로버트 E. 하워드 같은 유명 공포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러브크래프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서재에서는 안드레예프의 ''The Seven Who Were Hanged''와 ''The Red Laugh''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S.T. Joshi의 "Lovecraft's Library" 목록에 기록되어 있다. 로버트 E. 하워드는 안드레예프를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 7명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다.[9]

안드레예프의 손녀이자 바딤 안드레예프의 딸인 미국 작가이자 시인 올가 안드레예프 칼라일(Olga Andreyev Carlisle, 1931년 출생)은 1987년에 그의 단편 소설 모음집인 ''Visions''를 출판했다.

일본에서는 1906년 우에다 빈이 「여행」을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1908년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피의 웃음」을 번역했다. 1909년에는 쇼 쇼무(昇曙夢) 등 여러 번역가와 러시아 문학 연구자들에 의해 많은 작품이 소개되었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던 중국의 문학가 루쉰 역시 자신의 번역 소설집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에 안드레예프의 「거짓말」과 「침묵」 두 편을 수록했다. 나쓰메 소세키도 고미야 도요타카의 소개나 독일어 번역본을 통해 안드레예프의 소설을 접했으며[10], 자신의 소설 『그 후』에서 주인공 다이스케가 안드레예프의 『일곱 명의 교수형 죄수』(七人の死刑囚)를 읽는 장면을 묘사했다.[11] 이처럼 안드레예프는 일본 문학, 특히 다이쇼 시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시가 나오야의 작품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아래는 일본에서 번역된 주요 작품 목록이다.

제목번역가출판사 및 총서연도
피의 웃음후타바테이 시메이이풍사1908
마음 소설우에다 빈춘양당1909
신앙 소설나카무라 키치조(中村吉蔵)스기모토 료코도(杉本梁江堂) 외1909
인간의 일생모리 오가이춘양당1911
일곱 사형수 이야기소마 교쿠후해외문예사, 해외문예총서1913
일곱 사형수 이야기코다이라 타케시(小平武)카와이데 쇼보 신샤1975
안드레예프 희곡 선집. 상권 (기아왕, 아나테마, 대양)쿠마자와 후쿠로쿠(熊沢復六)겐시샤(原始社)1926
아나테마이토 로쿠로(伊藤六郎)타이헤이칸 서점(泰平館書店)1913
반역자 유다니시미야 후지토모(西宮藤朝)아카사카 서원(赤坂書院)1914
이스카리옷의 유다요네카와 마사오신초샤, 해외 문학 신선1924
별의 세계로오사나이 카오루모미야마 서점(籾山書店)1914
별의 세계로 전역모리타 소헤이(森田草平)히요시도 본점(日吉堂本店)1914
러시아 현대 문호 걸작집 제1편 (안드레예프 걸작집)노보리 아케무오쿠라 서점(大倉書店)1920
구원 없는 기도이토 킨지(伊藤欽二)일본평론사 출판부1921
안드레예프 선집미야하라 코이치로(宮原晃一郎)러시아 현대 작가 총서, 사토 출판부(佐藤出版部)1921
맞는 "그 녀석"요시다 코시타로(吉田甲子太郎)겐분샤 출판부(玄文社出版部)1923
뺨을 맞는 그쿠마자와 후쿠로쿠, 키타무라 키하치(北村喜八)슈에이카쿠(聚英閣)1926
안드레예프 희곡 선집쿠마자와 후쿠로쿠겐시샤1926-27
이웃의 사랑오사나이 카오루겐시샤1926
심연 외노보리 아케무소겐 문고1952
악마의 일기코다이라 타케시20세기의 러시아 소설, 하쿠스이샤1972
안개 속에서하라 타쿠야(原卓也)슈에이샤 갤러리 "세계의 문학" 15, 러시아 Ⅲ1990


4. 2. 일본 문학에의 영향

일본에서는 1906년 우에다 빈이 『여행』을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안드레예프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1908년에는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혈소기』를 번역했으며, 1909년에는 쇼 쇼무를 비롯한 번역가와 러시아 문학 연구자들에 의해 다수의 작품이 번역되었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던 중국의 문학가 루쉰 역시 번역 소설집 『역외 소설집』에 안드레예프의 단편 「거짓말」과 「침묵」을 수록했다.

나쓰메 소세키 또한 고미야 도요타카와 함께 독일어 번역본으로 안드레예프의 소설을 읽었으며, 고미야의 소개로 영어 번역본을 읽었다는 설도 있다[10]. 소세키는 자신의 소설 『그 후』에서 주인공 다이스케가 안드레예프의 『7인의 교수형』을 읽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다[11]. 이처럼 안드레예프는 일본 문학, 특히 다이쇼 시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시가 나오야의 작품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다음은 일본에서 번역된 주요 작품 목록이다.

작품명번역가출판사/총서출판 연도
『피의 웃음』후타바테이 시메이이풍사1908년
『마음 소설』우에다 빈춘양당1909년
『신앙 소설』나카무라 키치조스기모토 료코도 외1909년
『인간의 일생』모리 오가이춘양당1911년
『일곱 사형수 이야기』소마 교쿠후해외문예사, 해외문예총서1913년
『일곱 사형수 이야기』코다이라 타케시카와이데 쇼보 신샤1975년
『안드레예프 희곡 선집. 상권』
(수록 작품: 기아왕, 아나테마, 대양)
쿠마자와 후쿠로쿠겐시샤1926년
『아나테마』이토 로쿠로타이헤이칸 서점1913년
『반역자 유다』니시미야 후지토모아카사카 서원1914년
『이스카리옷의 유다』요네카와 마사오신초샤, 해외 문학 신선1924년
『별의 세계로』오사나이 카오루모미야마 서점1914년
『별의 세계로 전역』모리타 아리추히요시도 본점1914년
『러시아 현대 문호 걸작집 제1편 (안드레예프 걸작집)』노보리 아케무오쿠라 서점1920년
『구원 없는 기도』이토 킨지일본평론사 출판부1921년
『안드레예프 선집』미야하라 코이치로러시아 현대 작가 총서, 사토 출판부1921년
『맞는 "그 녀석"』요시다 코시타로겐분샤 출판부1923년
『뺨을 맞는 그』쿠마자와 후쿠로쿠, 키타무라 키하치하라 아네샤1926년
『안드레예프 희곡 선집』쿠마자와 후쿠로쿠겐시샤1926년-1927년
『이웃의 사랑』오사나이 카오루겐시샤1926년
『심연 외』노보리 아케무소겐 문고1952년
『악마의 일기』코다이라 타케시20세기의 러시아 소설, 하쿠스이샤1972년
『안개 속에서』하라 타쿠야슈에이샤 갤러리 "세계의 문학" 15, 러시아 Ⅲ1990년


참조

[1] 서적 Border Crossing: Russian Literature into Film https://www.jstor.or[...] Edinburgh University Press
[2] 서적 Leonid Andreyev: a study Clarendon P.
[3] 서적 Seven Russian Short Novel Masterpieces Popular Library
[4] 서적 Degeneration, Decadence and Disease in the Russian fin de siècle: Neurasthenia in the life and work of Leonid Andreev Oxford University Press
[5] 서적 A Writer Remembers Hutchinson, NY
[6] 서적
[7] Художественная литература "fiction"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шести томах
[8] 서적 Satan's Diary Boni and Liveright
[9] 간행물 letter to Tevis Clyde Smith The Robert E. Howard United Press Association 1928-02-20
[10] 서적 富永太郎 中央公論社
[11] 문서 藤井
[12] 문서 下斗米&島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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