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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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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1년 3월 31일 수립된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러시아 혁명 이후 그루지야 민주 공화국의 일부였던 압하지야 지역에 세워졌다. 붉은 군대의 침공으로 소비에트의 영향력 아래 놓였으며, 처음에는 독립 공화국으로 선언되었으나, 1921년 12월 그루지야 SSR과의 동맹 조약을 통해 "조약 공화국" 지위를 얻었다. 1922년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에 가입했고, 1925년 헌법을 제정하는 등 독자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1931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자치 공화국으로 격하되었다. 이 지역은 담배, 차, 와인 등 농산물 생산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네스토르 라코바가 1921년부터 1936년까지 실질적인 지도자로 통치했다. 1920년대 압하스어의 문자 개혁과 문화 발전을 위한 노력이 있었으며, 1980년대에는 공화국 지위 회복 요구가 있었고, 이는 압하지야 전쟁으로 이어져 1992년 이후 압하지야는 조지아로부터 사실상 독립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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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아브하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현지 명칭ab: Социалисттә Советтә Республика Аҧсны (소치알리스트트ә 소베트트ә 레스푸블리카 아프스느)
ka: საბჭოთა სოციალისტური რესპუბლიკა აფხაზეთი (사브초타 소치알িস্ট우리 레스푸블리카 아프하제티)
ru: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Совет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Абхазия (소치알리스티체스카야 소베츠카야 레스푸블리카 아브하자이야)
일반 명칭아브하스
1921년 아브하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위치
1921년 아브하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위치
아브하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기
아브하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기
아브하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장 (1928-1931)
아브하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장
국가 표어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프로레타리이 프세흐 스트란, 소예디냐이테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국가인터나치오날
수도수후미
공용어러시아어
압하스어
기타 사용 언어압하스어
조지아어
러시아어
아르메니아어
튀르키예어
정치
정치 체제사회주의 공화국
의회소비에트 대회
역사
건국1921년 3월 31일
소멸1931년 2월 19일
이전 국가조지아 민주 공화국
계승 국가아브하스 ASSR
인구
1926년201,016명
통화
통화루블

2. 역사적 배경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압하지야를 합병하고 통치하는 과정에서 민족 구성을 변화시켰다.[1][2][3][4]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압하지야의 정치적 지위는 불안정해졌으며, 북캅카스 산악 공화국 합류 시도, 볼셰비키의 활동, 조지아 민주 공화국으로의 편입 등 혼란기를 겪었다.[5][6][7][8][9] 1921년 붉은 군대의 조지아 침공으로 소비에트 세력이 압하지야를 장악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62] 비록 1921년 조지아 헌법에서 압하지야의 자치가 언급되기도 했으나,[10] 소비에트 통치 확립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했다.[11][12]

2. 1. 러시아 제국 통치와 민족 구성 변화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초 압하지야를 합병했고, 1864년까지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1] 러시아 당국은 민족 기반의 영토 단위를 구성하는 것을 꺼려 압하지야를 쿠타이시현에 편입시켰다.[2] 이 과정에서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하여 압하지야의 민족 구성이 크게 변화했다. 수천 명의 압하스인이 추방되었고, 그 자리를 메그렐인이 채웠다.[3][4]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자 압하지야의 지위는 불확실해졌다.[5]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압하지야는 1917년 북캅카스 산악 공화국 합류를 고려했으나, 지리적 거리 등의 문제로 결국 거부했다. 그러나 압하지야 내부에서는 산악 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민족주의자들과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정당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고, 산악 공화국은 압하지야를 자국 영토로 선언하기도 했다.[6][7]

1918년 2월, 압하스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소비에트와 유사한 코뮌 설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지도자 에프렘 에쉬바와 네스토르 라코바는 도피했다.[8] 이후 압하스 인민 평의회(APC)가 결성되어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1918년 5월 조지아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압하지야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합병했으나, 완전한 통제권을 확립하지는 못했고 1921년 볼셰비키 침공 전까지 APC가 압하지야를 계속 통치하도록 허용했다.[9]

압하지야의 지위는 1921년 조지아 헌법 제107조에서 "업무 관리를 위한 자치"가 보장되며 확인되었다.[10] 하지만 이 헌법은 1921년 2월 붉은 군대의 조지아 침공 이후 선포되었기 때문에, 약속된 자치의 구체적인 내용은 결정되지 못했다.[11] 역사가 티모시 블루벨트는 이 헌법이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압하지야를 별개의 지리적 실체로 정의했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고 평가했다.[12]

러시아 혁명 이후 혼란 속에서 압하지야는 조지아 민주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1921년 2월부터 3월에 걸친 붉은 군대의 침공으로 소비에트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1921년 3월 4일, 붉은 군대는 지역 혁명 게릴라와 함께 압하지야의 수도 수후미를 점령하고 압하스 혁명위원회를 설립했다. 1921년 3월 31일,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 샬바 엘리아바, 에프렘 에쉬바, 네스토르 라코바 등이 참석한 특별 회의에서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의 수립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조지아 및 러시아와의 관계 등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다. 1921년 5월 21일, 조지아 혁명위원회는 독립된 압하지야 SSR의 형성을 인정하고, 양 공화국 의회에서 관계를 설정하기로 합의했다.[62]

2. 2. 러시아 혁명과 독립 시도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초 압하지야를 병합하였고, 1864년까지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1]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압하지야를 별도의 민족-영토 단위로 구성하는 것을 꺼려 쿠타이시현에 편입시켰다.[2] 이 과정에서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하여 수천 명의 압하스인이 추방되었고, 그 자리를 메그렐인이 채우게 되었다.[3][4]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압하지야의 지위는 불분명해졌다.[5]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압하지야는 1917년 북캅카스 산악 공화국 합류를 고려했으나, 지리적 거리 등의 문제로 결국 거부했다. 하지만 압하지야 내부에서는 산악 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민족주의 세력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정당 간의 갈등이 이어졌고, 산악 공화국은 압하지야를 자국 영토로 선언하기도 했다.[6][7]

1918년 2월, 압하스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소비에트와 유사한 코뮌 설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지도자였던 에프렘 에쉬바와 네스토르 라코바는 도피했다.[8] 이후 압하스 인민 평의회 (APC)가 결성되어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1918년 5월 조지아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압하지야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합병하려 했으나,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하지는 못했고, 1921년 볼셰비키 침공 전까지 APC가 압하지야를 계속 통치했다.[9]

압하지야의 지위는 1921년 조지아 헌법 제107조에서 "압하지예티(수후미 구역)"의 자치를 보장하며 확인되었으나,[10] 이 헌법은 1921년 2월 붉은 군대의 조지아 침공 이후 선포되었기 때문에 약속된 자치의 구체적인 내용은 실현되지 못했다.[11] 역사가 티모시 블루벨트는 이 헌법이 압하지야를 처음으로 별개의 지리적 실체로 정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했다.[12]

1921년 2월부터 3월에 걸쳐 붉은 군대가 조지아를 침공하면서 압하지야는 소비에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921년 3월 4일, 붉은 군대는 지역 혁명 게릴라와 함께 압하지야의 수도 수후미를 점령하고 압하스 혁명위원회를 설립했다. 같은 해 3월 31일,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 샬바 엘리아바, 에프렘 에쉬바, 네스토르 라코바 등이 참석한 특별 회의에서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의 수립이 선언되었다. 하지만 조지아 및 러시아와의 관계 설정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21년 5월 21일, 조지아 혁명위원회는 독립적인 압하지야 SSR의 형성을 인정하고, 양측 공화국 대표자 회의에서 관계를 정립하기로 합의했다.[62]

3.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성립 (1921년)

1921년 3월 8일 소비에트 정권 수립 후 수후미에서 열린 첫 번째 집회 중 하나


1921년 2월 15일, 붉은 군대가 조지아 민주 공화국을 침공했고, 이틀 뒤인 2월 17일에는 압하지야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다.[13] 침공 이전 압하지야로 돌아온 볼셰비키 지도자 에프렘 에쉬바와 네스토르 라코바는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준비하기 위해 혁명위원회(레브콤)를 조직했다.[14]

3월 4일, 붉은 군대는 지방 혁명 게릴라와 협력하여 수도 수후미를 점령하고 압하스 혁명위원회(레브콤)를 설립했다.[62] 당시 조지아 본토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압하지야의 레브콤은 예상치 못하게 지역의 유일한 권력 기구가 되었다. 이들은 혼란을 이용하여 압하지야를 독립적인 공화국으로 선포하기로 결정했다.[15]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지도부와 상의한 끝에,[16] 1921년 3월 31일,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 샬바 엘리아바, 에프렘 에쉬바, 네스토르 라코바 등이 참석한 특별 회의에서 "노동자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압하지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17][62]

이 선언으로 압하지야는 명목상 독립 공화국이 되었으나, 압하지야와 조지아 양측 모두 새로 수립될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조지아 SSR)에 결국 통합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17] 압하지야 SSR의 성립은 조지아 SSR의 통치 기구인 조지아 레브콤에 의해서도 인정받았다. 조지아 레브콤은 1921년 5월 21일 전보를 통해 압하지야의 독립 선언을 환영하며, 두 공화국 간의 관계는 향후 노동자 대표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8][62] 이로써 압하지야 SSR은 소비에트 체제 하의 독립된 정치 단위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3. 1. 조지아와의 관계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초 압하지야를 합병하고 1864년까지 지배력을 강화했다.[1] 러시아 당국은 이 지역을 쿠타이시현에 편입시켰다.[2]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 수천 명의 압하스인이 추방되고 메그렐인이 유입되면서 압하지야의 민족 구성이 급격하게 바뀌었다.[3][4]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후 압하지야의 지위는 불분명해졌다.[5]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압하지야는 북캅카스 산악 공화국 합류를 고려했으나 결국 거부했다.[6][7] 1918년 2월, 압하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와 유사한 코뮌 설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지도자 에프렘 에쉬바와 네스토르 라코바는 도망쳤다.[8] 이후 압하스 인민 평의회(APC)가 결성되어 지역을 통제했다. 1918년 5월 조지아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자 압하지야를 자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고 합병했으나, 완전한 통제는 확립하지 못했고 1921년 볼셰비키 침공 전까지 APC가 압하지야를 통치했다.[9]

압하지야의 지위는 1921년 조지아 헌법 제107조에서 "압하지예티 (수후미 구역)"의 자치를 보장하며 확인되었다.[10] 그러나 이 헌법은 1921년 2월 붉은 군대의 조지아 침공 이후 선포되었기 때문에, 약속된 자치의 구체적인 내용은 결정되지 못했다.[11] 역사가 티모시 블루벨트에 따르면, 이 시기에 처음으로 압하지야가 별개의 지리적 실체로 정의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2]

1921년 2월 15일, 붉은 군대는 조지아를 침공했고, 이틀 뒤 압하지야도 침공당했다.[13] 에쉬바와 라코바는 압하지야로 돌아와 볼셰비키 정부 수립을 위한 혁명위원회(레브콤)를 구성했다.[14] 3월 4일 수도 수후미가 함락되었고, 조지아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레브콤은 압하지야를 독립 공화국으로 선포하기로 결정했다.[15]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등 볼셰비키 지도부와의 논의 끝에,[16] 1921년 3월 31일, "노동자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했다"고 선언되었다.[17]

이로써 압하지야는 명목상 독립 공화국이 되었지만, 압하지야와 조지아 양측 모두 압하지야가 결국 새로 수립된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조지아 SSR)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17] 조지아 SSR의 통치 기구인 조지아 레브콤은 1921년 5월 21일 압하지야의 독립 선언을 환영하며, 양 공화국의 관계 형식은 추후 노동자 회의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18][62]

1921년 12월 16일, 압하지야는 조지아 SSR과 특별 조약을 체결하여 일부 자치권을 위임했다. 이 조약은 압하지야를 "계약 공화국"으로 규정하고, 양국 간 정치, 군사, 금융 연합을 설립했다. 이 범위 내에서 압하지야 SSR은 조지아 SSR에 종속되었다. 1922년 5월 12일, 압하지야 SSR과 조지아 SSR은 함께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에 가입했고, 1922년 12월 30일에는 소련에 가입했다.

압하지야의 "계약 공화국"으로서의 모호한 지위는 1925년 4월 1일 제정된 압하지야 헌법에도 반영되어, "압하지야 SSR은 조지아 SSR과의 합동 특별 조약에 근거하여 연합한다"고 명시했으며, 헌법에 의해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과 소련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924년 소련 헌법에서는 압하지야를 자치 공화국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1931년 2월 19일,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압하지야는 공화국 지위를 박탈당하고 조지아 SSR 내의 자치 공화국으로 격하되었다. 이는 네스토르 라코바가 이끄는 압하지야 공산당이 집단 농장화에 대한 반발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한 것에 대한 처벌로 여겨진다.

4. '조약 공화국'으로서의 지위

압하지야 SSR의 지위는 조지아 SSR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압하지야 혁명위원회는 카프뷰로의 압력으로 1921년 10월 조지아 SSR과 협상을 시작했고,[19] 같은 해 12월 16일 연합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두 공화국 간의 정치, 군사, 재정-경제적 연합을 명시하고, 관련 인민위원회의 통합을 규정했다.[20]

이 조약으로 압하지야는 조지아 SSR에 명목상 종속되지만 독자성을 지닌 "조약 공화국"(АССР Аҧсны|ASSR Apsnyab)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얻었다.[21] 이 지위는 1922년 조지아 헌법과 1925년 압하지야 헌법에서 "특별 연합 조약"에 근거한 관계로 명시되었다.[22]

압하지야는 조지아와의 연합 상태를 유지하며 1922년 12월 13일 아르메니아 SSR, 아제르바이잔 SSR과 함께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TSFSR)에 가입했고,[23] 이후 1922년 12월 30일 TSFSR의 일원으로 소련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소련 내 유일한 '조약 공화국'이라는 압하지야의 독특하고 모호한 지위는 이후 논란의 대상이 되어 결국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28]

4. 1. 독특한 지위와 상징

1922년의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압하지야 SSR은 분홍색으로 강조 표시되어 있다.


압하지야 혁명위원회가 권력을 잡은 후, 지역 통제권 상실을 우려하여 압하지야의 미래 지위를 결정하는 회의 소집을 꺼렸으나, 카프뷰로의 압력으로 1921년 10월 조지아와의 조약 협상이 시작되었다.[19] 그 결과 1921년 12월 16일, 두 조항으로 이루어진 연합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압하지야를 조지아에 명목상 종속된 "조약 공화국"(АССР Аҧсны|ASSR Apsnyab)으로 규정했다.[21] 압하지야의 이러한 특별한 지위는 1922년 조지아 헌법에서 "특별 연합 조약"으로 언급되며 강화되었고, 1925년 압하지야 헌법 역시 조지아와 "특별 조약에 기초하여" 연합했다고 명시했다.[22] 1922년 12월 13일, 압하지야는 조지아와 연합한 상태로 아르메니아 SSR, 아제르바이잔 SSR과 함께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TSFSR)에 가입했다. 이 연방은 표면적으로 경제적 목적을 위해 창설되었으나, 실제로는 이 지역에 대한 소비에트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3]

압하지야는 소비에트 연방의 다른 자치 공화국들과는 달리, 완전한 공화국에게만 부여되는 자체 국가 상징(국기 및 국장)과 국가 군 부대를 보유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가졌다.[24] 국장은 1925년 헌법에 처음 묘사되었는데, "압하지야 풍경을 배경으로 한 금색 망치와 낫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압하스어로 '압하지야 SSR'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기술되었다.[25] 1926년에는 여기에 공화국의 모토인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가 압하스어, 조지아어, 러시아어로 추가되었다 (이전에는 압하스어로만 표기).[25] 또한 1925년 4월 1일에는 자체 헌법을 제정했는데, 이 역시 완전한 공화국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26] 1924년 소련 헌법에서는 압하지야를 자치 공화국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지아와의 연합은 압하지야 주민이나 지도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으며,[12] 조지아 내에서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볼셰비키에 적대적이었던 조지아인들은 이를 모스크바 당국에 대한 조지아의 반감을 압하지야로 돌리려는 책략으로 간주했다.[27] 소련 내 유일한 "조약 공화국"이라는 압하지야의 모호한 지위는 다른 지역들이 유사한 지위를 요구할 것을 우려한 소비에트와 조지아 당국에게 불안 요소였다.[28]

결국,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로 압하지야의 지위를 격하하기로 결정되었고, 1931년 2월 19일 압하지야는 압하지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재편성되어 조지아 SSR에 완전히 종속되었으며, TSFSR의 회원 지위는 유지했다.[29] 이러한 조치는 네스토르 라코바가 이끌던 압하지야 공산당이 집단 농장화에 대한 반발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한 것에 대한 처벌적 성격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이 결정은 압하지야에서 소련 당국에 대한 첫 대규모 항의 시위를 촉발했다.[30]

4. 2. 스탈린 시대와 지위 격하 (1931년)

소련 내에서 유일하게 "조약 공화국"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가졌던 압하지야 SSR의 모호한 상태는 소련과 조지아 SSR 당국 모두에게 우려의 대상이었다. 다른 지역들이 압하지야와 유사한 지위를 요구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28] 이미 1924년 소련 헌법에서는 압하지야를 자치 공화국으로 언급하고 있었으나, 정작 1925년 4월 1일에 제정된 압하지야 자체 헌법에서는 조지아 SSR과 "특별 조약에 기초하여" 연합한다고 명시하여[22] 지위의 불확실성을 드러냈다.[26]

결국 압하지야의 지위를 격하하기로 결정되었고, 1931년 2월 19일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압하지야 SSR은 압하지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재편성되었다. 이로써 압하지야는 조지아 SSR에 완전히 종속된 자치 공화국이 되었으며,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TSFSR)의 일원으로 남게 되었다.[29] 이러한 지위 격하는 네스토르 라코바가 이끌던 압하지야 공산당이 집단 농장화 정책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한 것에 대한 처벌적 조치였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이 조치는 압하지야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소련 당국에 대한 첫 대규모 항의 시위로 이어졌다.[30]

5. 정치

네스토르 라코바, 1921년부터 1936년 사망할 때까지 압하지야의 사실상 지도자였다. 그는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초기에는 에프렘 에슈바가 의장을 맡은 압하지야 혁명위원회가 더 영구적인 기구가 설립될 때까지 압하지야를 통제했다.[18] 1922년 2월 17일, 인민위원평의회가 설립되었고, 네스토르 라코바가 의장으로 선출되어 공화국의 정부 수장이 되었다. 이는 1921년 볼셰비키가 통제권을 장악한 이후 라코바가 사실상 압하지야를 통치해왔기 때문에 형식적인 절차였다.[31][32] 그는 에슈바와 함께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라코바와 에슈바는 1918년 2월과 4월에 압하지야를 점령하려다 두 번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가 실패한 후, 그들은 도망쳤다가 볼셰비키의 통제가 공고해진 1921년 3월에 돌아왔다. 에슈바는 곧 다른 직책으로 옮겨졌고, 라코바는 압하지야의 수장으로 남게 되었다.[33]

라코바는 압하지야를 개인 영지처럼 효과적으로 통제했는데, 이는 농담으로 "라코비스탄"이라고 불렸으며, 공화국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의 지위는 결코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34] 그는 집단화를 포함하여 소비에트 연방의 다른 지역에서 시행되던 많은 탄압 정책에 저항했다. 라코바는 또한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과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통해 압하지야 귀족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35]

6. 경제

요제프 스탈린의 리차 호숫가 별장, 압하지야에 있는 스탈린의 별장 중 하나


압하지야는 소련 시대에 주요 담배 생산지였으며, 1930년대에는 소련 담배 수출량의 최대 52%를 담당했다.[36] 차, 와인, 감귤류, 특히 귤을 포함한 다른 농산물도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이로 인해 압하지야는 소련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고, 조지아보다 훨씬 더 부유했다.[37] 이러한 자원의 수출은 이 지역을 "전쟁으로 황폐해진 코카서스 지역의 번영의 섬"으로 만들었다.[38] 소련의 전반적인 개발의 일환으로 이 지역에 여러 공장이 건설되었지만, 압하지야의 전반적인 경제력에 미치는 영향은 적었다.[39]

압하지야는 또한 소련의 엘리트와 일반 대중 모두에게 주요 휴가지로 여겨졌다. 요제프 스탈린은 1920년대 내내 매년 방문했고, 그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이 시간을 활용한 크렘린의 측근들과 합류했다.[40] 당시 압하지야의 지도자였던 라코바는 스탈린과 점점 더 가까워졌고 그의 측근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압하지야에 대한 그의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41] 이는 라코바가 집단화 시행을 거부했을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그는 압하지야 지역에 ''쿠라크''(부유한 농민)가 없다고 주장했다.[42] 이러한 정책은 스탈린에 의해 옹호되었는데, 그는 반 쿠라크 정책이 "압하지야 사회 구조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사회 공학의 러시아 모델을 기계적으로 압하지야 토양으로 이전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했다.[43] 집단화는 1931년 압하지야의 지위가 격하된 후에 처음으로 시행되었고, 라코바가 사망한 후 1936년에 완전히 시행되었다.[44]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존속하는 동안 소련 루블이 공식 통화였다.[45]

7. 인구 구성과 언어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민족적으로 다양한 지역이었으며, 러시아 제국에 병합된 이후 수십 년 동안 인구 통계가 크게 변화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는 최대 10만 명에 달하는 압하스인이 주로 오스만 제국으로 추방되는 아픔을 겪었다.[46]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형성될 무렵, 압하스인은 전체 인구의 30% 미만을 차지했다. 그러나 소련 시대에 소수 민족을 장려하기 위해 시행된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으로 압하스인의 인구는 다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1922년과 1926년 사이에 압하스인은 약 8% 증가한 반면, 조지아인의 수는 6% 감소했다.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기에 유일하게 실시된 1926년 소련 인구 조사 결과는 당시의 복잡한 민족 구성을 잘 보여준다. 총인구 201,016명 중 주요 민족 집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47][48]

1926년 소련 인구 조사에 따른 압하지야 SSR의 주요 민족 구성[47]
민족인구수비율 (%)
압하스인55,918명27.82%
조지아인67,494명33.58%
아르메니아인25,677명12.77%
코카서스 그리스인14,045명6.99%
러시아인12,553명6.25%
주요 5개 민족 합계175,687명87.41%
총 인구201,016명100%


7. 1. 언어 정책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에는 압하스어에 사용되는 문자가 수정되었다. 소련의 소수 민족 장려 정책인 코레니자치야 하에서 압하스인은 "선진" 민족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압하스인의 언어와 문화 발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49]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압하스어는 1928년에 소련의 라틴 문자화 정책에 따라 기존의 키릴 문자 기반 표기법에서 라틴 문자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50]

압하스 문화 발전에도 중점을 두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를 위해 1922년에는 압하스 과학 학회가, 1925년에는 압하스어 및 문학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51]

압하지야 내 여러 민족 집단을 고려하여, 1925년 압하스 헌법 제8조는 압하스어, 조지아어, 러시아어 세 가지 언어를 공식 언어로 규정했다. 이후 수정된 헌법에서는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은 민족 문화 및 일반 국가 기관에서 모국어를 자유롭게 발전시키고 사용할 권리를 보장받는다"고 명시하여 언어적 권리를 보장하고자 했다.[52][53]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주민이 압하스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 기관에서는 러시아어가 주로 사용되었고, 각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가 통용되었다.[54]

8. 유산

수후미의 "영광의 공원", 1992-1993년 전쟁에서 전사한 압하지야 군인들을 기념함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조약 공화국"으로서의 정확한 지위는 그 존재 기간 동안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역사가 아르센 사파로프는 당시 관리들조차 그 지위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위는 과거 독립 국가를 가졌던 기억을 간직한 압하지야 사람들에게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56]

1980년대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시행되면서, 압하지야에서는 과거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9년 리크니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는 소련 당국에 압하지야를 완전한 연방 공화국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요구했으며, 이때 압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존재를 선례로 내세웠다.[57]

1990년 압하지야가 독립을 선언했을 때는 1925년 헌법의 복원을 요구했다. 이 헌법은 압하지야와 조지아의 통합을 규정하면서도 두 국가 간의 미래 연합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58] 1925년 헌법 복원 요구는 이후 1992-1993년 압하지야 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 전쟁의 결과로 압하지야는 1992년부터 사실상 조지아로부터 독립적인 상태가 되어 현재까지 그 지위를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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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서적 Eastern Europe, Russia and Central Asia Taylor & Francis
[64] 논문 The Establishment of Soviet Power in Transcaucasia: The Case of Georgia 1921-1928 1988-10
[65] 웹사이트 Constitution of the Soviet Socialist Republic of Abkhazia http://www.rrc.ge/la[...] Regionalism Research Center 2008-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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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서적 A Modern History of Georgia Weidenfeld and Nicol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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