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아일랜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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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앵글로아일랜드인은 17세기부터 20세기 초 아일랜드 독립 이전까지 아일랜드에서 전문직 종사자이자 토지 계급을 형성했던 아일랜드 교회 구성원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들은 잉글랜드의 관습을 유지하며 정치, 상업, 문화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아일랜드 독립과 자치 정부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였다. 앵글로아일랜드인들은 1800년부터 1922년까지 영국과의 연합을 지지했으며, 아일랜드 독립 전쟁 동안 많은 수가 아일랜드를 떠났다. 앵글로아일랜드인 출신으로는 오스카 와일드, 조나단 스위프트, W. B. 예이츠 등 유명 인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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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칼튼은 18세기 영국군 장교이자 행정가로, 7년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으며 특히 퀘벡 총독으로서 1775년 미국 침공으로부터 퀘벡을 방어하는 데 기여했다. - 아일랜드의 민족 - 잉글랜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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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인은 잉글랜드를 기원으로 하는 사람들이지만, 역사적 맥락과 개인적 정체성에 따라 그 정의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며, 앵글로색슨족 후손 이상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반영하고, 영국인과의 혼용 및 소수민족 정체성 인식 등 사회적 요인들을 고려해야 하는 다층적인 문제이다.
앵글로아일랜드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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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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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어명 | Angla-Éireannach (앙글라에라너크) |
관련 민족 | 잉글랜드인 스코트인 아일랜드인 앵글로-노르만인 앵글로-색슨인 얼스터 스코트인 얼스터 개신교도 웨일스인 |
언어 | 영어 아일랜드 영어 북아일랜드 수어 |
종교 | 주류: 아일랜드 성공회 소수: 감리교, 천주교, 기타 개신교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의 종교 참고) |
인구 현황 | |
북아일랜드 | 407,454명 (북아일랜드의 성공회, 감리교, 기타 개신교 신자) |
아일랜드 공화국 | 177,200명 (아일랜드의 성공회, 감리교, 기타 개신교 신자) |
역사적 맥락 | |
기원 | 잉글랜드인들이 식민지 아일랜드에 이주하여 지배 계급을 형성 |
2. 사회 계급
"앵글로아일랜드인"이라는 용어는 17세기부터 20세기 초 아일랜드 독립 이전까지 아일랜드에서 전문직 종사자이자 토지 계급을 이루었던 아일랜드 교회 구성원들에게 자주 적용되었다.[6] 17세기 동안, 이 앵글로아일랜드 토지 계급은 게일 아일랜드인과 구 잉글리시 귀족을 대체하며 아일랜드의 지배 계급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중세 히베르노 노르만 정착민의 후손인 "구 잉글리시"와 구별하기 위해 "'''신 잉글리시'''"라고 불리기도 했다.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시행된 형벌법에 따르면 (적용 강도는 달랐지만), 영국과 아일랜드의 로마 가톨릭 거부자는 공직을 맡을 수 없었으며, 아일랜드에서는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거나 법, 의학, 군대와 같은 전문직에 종사할 수 없었다. 규정된 서약을 거부한 로마 가톨릭 토지 귀족의 토지는 아일랜드 식민지화 동안 대부분 몰수되었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토지를 상속받을 권리는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반면 아일랜드 교회로 개종한 사람들은 대개 잃어버린 재산을 유지하거나 되찾을 수 있었는데, 이는 주로 충성심의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더블린의 아일랜드 의회는 입법 독립을 획득했고, 테스트 법 폐지 운동이 시작되었다.
모든 앵글로아일랜드인이 크롬웰 시대의 개신교 잉글랜드 정착민을 조상으로 둔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웨일스 출신이었고, 다른 일부는 구 잉글리시 출신이거나 심지어 성공회로 개종한 토착 게일인이었다. 이 지배 계급의 구성원들은 흔히 자신을 아일랜드인으로 식별했으며,[6] 정치, 상업, 문화에서 잉글랜드의 관습을 유지했다. 그들은 당시 유행했던 잉글랜드 스포츠, 특히 경마와 여우 사냥에 참여했으며, 영국 지배 계급과 통혼했다. 이들 중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영국 제국의 일부나 영국에서 경력의 많은 부분을 보냈다. 많은 이들이 큰 컨트리 하우스를 건설했는데, 이것은 아일랜드에서 빅 하우스로 알려지게 되었고, 아일랜드 사회에서 이 계급의 지배를 상징하게 되었다.
아일랜드 공화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인 더블린 노동 계급 극작가 브렌든 비한은 앵글로아일랜드인을 아일랜드의 유한 계급으로 보았고, "말을 가진 개신교도"로 정의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7]
앵글로아일랜드 소설가이자 단편 작가인 엘리자베스 보웬은 "아일랜드에서는 잉글리시, 잉글랜드에서는 아일랜드인"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어느 쪽에도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묘사했다.[8]
군대에서의 두드러짐과 보수적인 정치 성향 때문에, 앵글로아일랜드인은 프러시아 융커 계급과 비교되기도 했는데, 코렐리 바넷이 대표적인 인물이다.[9]
2. 1. 저명한 구성원
오스카 와일드, 조나단 스위프트, 조지 버클리, 셰리던 레 파뉴, 올리버 골드스미스, 브람 스토커, J. M. 싱, W. B. 예이츠, 조지 버나드 쇼, 레이디 그레고리, 사무엘 베케트, C. S. 루이스, 엘리자베스 보웬, 윌리엄 트레버 등은 저명한 앵글로아일랜드인 시인, 작가, 극작가였다.[6] 라프카디오 헌은 부계로 앵글로아일랜드 혈통이었으나, 증조모에 의해 가톨릭 신자로 자랐다.19세기 앵글로아일랜드인 중에는 윌리엄 로언 해밀턴, 조지 스토크스, 존 틴들, 조지 존스턴 스토니, 토마스 로마니 로빈슨, 에드워드 세빈, 토마스 앤드루스, 로스 백작 3세, 조지 샐먼, 조지 프랜시스 피츠제럴드 등 저명한 수학자 및 물리학자들이 있었다.[6] 20세기에는 과학자 존 졸리와 어니스트 월턴, 극지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이 앵글로아일랜드인이었다. 윌리엄 와일드, 로버트 제임스 그레이브스, 토마스 릭글리 그림쇼, 윌리엄 스토크스, 로버트 콜리스, 존 럼스덴, 윌리엄 배빙턴은 의학 전문가였다.[6] 윌리엄 데스버러 쿨리는 세계화 과정을 처음으로 설명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6]
리처드 브린슬리 셰리던, 헨리 그라탄, 캐슬리 경, 조지 캐닝, 맥카트니 경, 토마스 스프링 라이스, 찰스 스튜어트 파넬, 에드워드 카슨 등은 영국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6] 조지 다우닝의 이름을 따서 다우닝가가 명명되었다. 리처드 포코크 주교는 18세기 여행 문학에 기여했다.[6]
영국 육군 고위 장교 중에는 로버츠 백작, 고프 자작, 아서 웰즐리, 앨런브룩 경, 튜니스 알렉산더 경, 존 해켓, 헨리 윌슨, 가넷 울슬리 등 앵글로아일랜드인이 많았다.[6]
대영 제국의 공무원 및 행정가로 프레데릭 매튜 달리, 헨리 아서 블레이크, 앤토니 맥도넬, 찰스 개번 더피 등이 활동했다.[6] 도노모어 위원회나 서인도 왕립 위원회 보고서를 이끈 사람들도 있었다.[6]
존 윈스럽 해켓은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여 여러 신문의 소유주이자 편집자가 되었고, 서호주 대학교 설립에 기여하여 초대 총장을 역임했다.[6]
마이클 윌리엄 발페, 존 필드, 조지 알렉산더 오스본, 토마스 로즈그레이브, 찰스 빌리어스 스탠퍼드, 존 앤드루 스티븐슨, 로버트 프레스콧 스튜어트, 윌리엄 빈센트 월리스, 찰스 우드 등은 예술 음악 작곡가였다.[6]
시각 예술 분야에서는 조각가 존 헨리 폴리, 미술상 휴 레인, 화가 대니얼 맥클리스, 윌리엄 오르펜, 잭 예이츠, 발레리나 니네트 드 발루아, 디자이너 겸 건축가 에일린 그레이 등이 국제적으로 유명했다.[6]
윌리엄 데스몬드 테일러는 할리우드 초창기 무성 영화 제작자였고, 각본가 조안나 하우드는 초기 제임스 본드 영화 각본을 썼다.[6]
토마스 존 바나도와 이베 백작은 자선가였다.[6]
패트릭 클리번 장군은 앵글로아일랜드 혈통이었다.[6]
가렛 피츠제럴드 전 총리는 1922년 이전 아일랜드에 강력한 시민 의식이 존재했으며, 주로 개신교도, 특히 성공회 신자들 사이에서였다고 언급했다.[10]
미국 재벌이자 산업 자본가인 헨리 포드는 앵글로아일랜드 혼혈이었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포드는 잉글랜드 서머싯 출신 가문에서 태어나 코크에서 태어났다.[11]
3. 경제
20세기 초, 앵글로아일랜드인은 제이콥스 비스킷, 비울리스, 빔미쉬 앤 크로포드, 제임슨 위스키, W. P. & R. 오들럼, 클리브스, R&H 홀, 마구아이 & 패터슨, 도크렐, 아노츠, 굴딩 케미컬, ''아이리시 타임스'', 아일랜드 철도, 아일랜드 최대 고용주인 기네스 양조장 등 아일랜드의 주요 토착 기업 다수를 소유했다. 또한 아일랜드 은행, 굿바디 증권 등 금융 회사도 통제했다.
4. 아일랜드 독립에 대한 태도
앵글로아일랜드인은 대체로 아일랜드 독립과 자치 정부 개념에 반대했다.[12] 이들은 1800년부터 1922년까지 존속했던 영국과의 연합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토지 소유 계급에게 연합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점, 영국 기득권과의 밀접한 개인적·가족적 관계, 그리고 연합 체제하에서 앵글로아일랜드인이 아일랜드에서 누렸던 정치적 지위 등 여러 가지였다. 많은 앵글로아일랜드인들이 영국 육군 장교, 아일랜드 교회 성직자로 복무했고, 영국 제도 전역에 토지나 사업상 이익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요소는 연합주의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장려했다. 19세기 중반부터 1922년까지 앵글로아일랜드인은 특히 아일랜드 남부 3개 주에서 아일랜드 연합주의 연합과 같은 운동에 대한 지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14]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의원 톰 케틀은 앵글로아일랜드 지주 계급을 프로이센의 융커에 비유하며 "영국은 유럽에서 자유를 위해, 아일랜드에서는 융커주의를 위해 싸운다"고 말했다.[15]
그러나 아일랜드의 개신교도, 특히 앵글로아일랜드 계급이 영국과의 정치적 연합에 전적으로 헌신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 교회의 성직자였던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1667–1745)는 지주들의 통치하에서 평범한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의 고통을 격렬히 비난했다. 헨리 그래튼(1746–1820), 울프 톤(1763–1798), 로버트 에멧(1778–1803), 존 그레이 경(1815–1875), 찰스 스튜어트 파넬(1846–1891)과 같은 개혁 정치인들 역시 개신교 민족주의자였으며,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주도하고 정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798년 아일랜드 반란은 앵글로아일랜드와 얼스터 스코트 계급의 구성원들이 주도했는데, 그중 일부는 영국과의 임박한 연합이 초래할 정치적 결과를 두려워했다.[16] 그러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는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점점 더 로마 가톨릭 정체성과 결부되었다.[16] 20세기 초, 아일랜드 남부의 많은 앵글로아일랜드인들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과의 정치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호레이스 플런켓 경과 몬티글 경과 같은 앵글로아일랜드 정치인들은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책을 찾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1919–1921) 동안, 많은 앵글로아일랜드 지주들은 가족의 집 방화 공격으로 인해 그 나라를 떠났다.[17] 방화는 계속되었고, 조약 반대 IRA에 의해 아일랜드 내전 동안 많은 종파적 살인이 자행되었다. 아일랜드 정부가 그들을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한 많은 앵글로아일랜드 계급 구성원들은 차별적인 법률과 사회적 압력에 시달릴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아일랜드를 영원히 떠났다. 아일랜드 인구에서 개신교의 비율은 독립 후 25년 동안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10%(300,000명)에서 6%(180,000명)로 감소했으며,[18] 대부분 그레이트 브리튼으로 재정착했다. 아일랜드 전체에서 개신교의 비율은 26%(110만 명)였다.
앵글로-아일랜드 조약에 대한 앵글로아일랜드인의 반응은 엇갈렸다. 이 조약은 아일랜드 자유국의 설립을 구상했다. J. A. F. 그레그, 아일랜드 교회의 더블린 대주교는 1921년 12월(조약이 서명된 달)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25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이혼을 불법화하려 하자, 앵글로아일랜드 시인 W. B. 예이츠는 아일랜드 상원에서 자신의 계급에 대한 유명한 찬사를 보냈다.
5. 귀족
"앵글로아일랜드인"이라는 용어는 17세기부터 20세기 초 아일랜드 독립 이전까지 아일랜드에서 전문직 종사자이자 토지 계급을 이루었던 아일랜드 교회 구성원들에게 자주 적용되었다.[6] 17세기 동안, 이 앵글로아일랜드 토지 계급은 아일랜드의 지배 계급으로서 게일 아일랜드인과 구 잉글리시 귀족을 대체했다. 그들은 중세 히베르노 노르만 정착민의 후손인 "구 잉글리시"와 구별하기 위해 "'''신 잉글리시'''"라고 불리기도 했다.
모든 앵글로아일랜드인이 크롬웰 시대의 개신교 잉글랜드 정착민을 조상으로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일부는 웨일스 출신이었고, 다른 일부는 구 잉글리시 출신이거나 심지어 성공회로 개종한 토착 게일인이었다. 이 지배 계급의 구성원들은 흔히 자신을 아일랜드인으로 식별했으며,[6] 정치, 상업, 문화에서 잉글랜드의 관습을 유지했다.
9년 전쟁 (1594–1603)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한 후, 1607년의 "백작들의 도주"로 인해 전통적인 게일 아일랜드 귀족이 아일랜드에서, 특히 크롬웰 시대에 밀려났다. 윌리엄 전쟁에서의 패배와 그 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연합 이후, 1707년까지 아일랜드의 귀족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성공회 가문이 지배했다. 이들 중 일부는 아일랜드 교회에 복종하여 토지와 특권을 유지하기로 선택한 아일랜드 가문이었다. 예를 들어 레스터 공작 (그들의 성은 피츠제럴드이며, 히베르노-노르만 귀족의 후손이다) 또는 게일 기네스 가문이 있다. 일부는 영국 또는 혼혈 영국 혈통의 가문으로 아일랜드에서의 지위가 왕실에 기인했다. 예를 들어 코크 백작 (그들의 성은 보일이며, 조상 뿌리는 잉글랜드 헤리퍼드셔에 있다)이 있다.
저명한 앵글로-아일랜드 귀족은 다음과 같다.
- 코크 1대 백작: 아일랜드 재무부 장관이자 과학자 로버트 보일의 아버지.
- 글레너비 1대 남작: 두 번째 마지막 아일랜드 대법관이자 초대 아일랜드 상원 의장 (1922).
- 코닝엄 8대 후작: 슬레인 성 록 공연장의 소유주이자 최근 아일랜드 총선에서 피네 게일 후보.
- 이바 3대 백작: 게일 아일랜드 혈통; 아일랜드 상원 (1973–1977)에서 활동한 기네스 가문의 수장.
- 발레리 골딩 부인: 재활 연구소 설립자이자 전 타오이섹 (총리) 찰스 호이의 가까운 동료.
- 롱포드 6대 백작: 1950년대 더블린 게이트 극장의 기획자.
- 롱포드 7대 백작: 위의 형제를 백작 작위로 계승, 영국 노동 내각 장관, 전기 작가이자 에이먼 데 발레라의 친구.
- 로스 3대 백작: 천문학자이자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인 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 건설자.
- 던세니 18대 남작: 작가.
- 페르모이 1대 남작: 아일랜드 귀족.
- 오르몬드 1대 공작: 17세기 정치가, 두 차례 아일랜드 부총독을 역임했으며, 아일랜드 연맹 전쟁에서 왕당파 군대를 지휘하며 찰스 1세를 대신하여 아일랜드 연맹과 협상했다.
- 머로, 인치퀸 1대 백작: 인치퀸 6대 남작(1618–1674), 게일 아일랜드 혈통; 아일랜드 연맹 전쟁 (1644–1648)에서 의회 사령관이었으나, 삼국 전쟁과 아일랜드의 크롬웰 정복 (1649–53) 동안 왕당파 군대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기 위해 진영을 변경했다.
- 웰링턴 1대 공작: 육군 원수, 많은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하고 나폴레옹을 워털루 전투에서 격파한 앵글로-아일랜드 장군. 그는 나중에 대영 제국 및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총리가 되었다.
1800년까지 아일랜드 귀족은 모두 더블린의 아일랜드 의회 상원인 아일랜드 귀족원에 자리를 가질 자격이 있었다. 1800년 이후 연합법의 규정에 따라 아일랜드 의회가 폐지되었고 아일랜드 귀족은 28명의 귀족을 선출하여 런던의 영국 귀족원에 아일랜드 대표 귀족으로 앉을 자격이 있었다.[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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