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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부 게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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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부 게이이치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1994년부터 2004년까지 한신 타이거스에서 투수로 활약했으며, 2005년과 2008년에는 메이저 리그에서 뛰었다. 한신에서는 신인왕을 수상하고,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메이저 리그에서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뛰었으며, 2010년에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은퇴 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코치와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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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부 게이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7년 야부
2017년 야부
본명藪 恵一 (야부 게이이치)
출생일1968년 9월 28일 ()
출생지미에현 미나미무로군 미하마정
신장185cm
체중98kg
포지션투수 / 코치
투구우투
타석우타
선수 경력
NPB 데뷔1994년 4월 13일, 한신 타이거스
MLB 데뷔2005년 4월 9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NPB 마지막 경기2010년 9월 4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MLB 마지막 경기2008년 9월 27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아마추어 경력와카야마현립 신구 고등학교
도쿄 경제대학교
아사히 생명
NPB 소속팀한신 타이거스 (1994년~2004년)
MLB 소속팀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005년)
(2006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8년)
NPB 최종 소속팀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10년)
코치 경력
소속팀한신 타이거스 (2011년~2013년)
수상
수상 내역NPB 센트럴 리그 신인왕 (1994년)
NPB 통계
통산 성적84승 106패
평균 자책점3.58
탈삼진1.27
MLB 통계
통산 성적7승 6패
평균 자책점4.00
탈삼진92
유튜브 채널 정보
채널명야부튜브【藪 恵壹】
채널 URL야부튜브 채널
활동 시작일2020년 6월 17일
장르야구
구독자 수약 1.22만 명
조회수1,770,469회

2. 선수 경력

야부 게이이치는 일본 프로 야구(NPB)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활동한 투수이다. 1994년부터 2004년까지 NPB의 한신 타이거스에서 주로 선발 투수로 활약하며 통산 84승 106패, 평균자책점 3.57을 기록했다.[5][6]

2005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으로 MLB에 데뷔하여 중간 계투로 4승 무패, 평균자책점 4.50을 기록했다.[1] 이후 콜로라도 로키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으나 메이저 리그에 오르지 못하고 방출되어 멕시칸 리그에서 잠시 활동했다.[1] 2008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으로 MLB에 복귀하여 60경기에 등판, 3승 6패, 평균자책점 3.57을 기록했다.[1][2][3]

2010년 NPB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낸 뒤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 1. 프로 입단 전

초등학교 시절 야구 경기 도중 오른팔을 다쳤지만 병원 치료 없이 계속 경기에 나섰다. 부상은 회복되었으나 그 후유증으로 비가 오는 날에는 통증이 생겨, 날씨가 궂은 날 등판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7]

고등학교는 집에서 통학 가능하고, 고시엔 출전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긴키 지역을 고려하여 와카야마현립 신구 고등학교로 진학했다.[7] 2년 선배로는 야마자키 신타로가 있었으나, 야부가 1학년 가을 무렵 부내 폭력 사건이 발생하여 팀은 1년간 대외 경기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다.[8] 3학년 여름에는 와카야마현 대회 8강에서 탈락했으며, 당시 같은 현에 스기우라 마사노리라는 유망주가 있어 야부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도쿄의 몇몇 대학에서 입학 테스트를 받았지만 별다른 실적이 없어 합격하지 못했고, 도쿄에서 1년간 재수 생활을 했으나 목표했던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재수를 포기하고 도쿄 경제대학에 진학했다.[9]

도쿄 경제대학 야구부는 수도 대학 야구 연맹 2부 리그 소속이었지만, 야부는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며 통산 36승을 기록했다.[9] 투수로 등판하지 않는 경기에서는 타자로 출전하여 수위 타자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한신 타이거스를 포함한 일부 구단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아사히 생명 보험에 입사하여 사회인 야구팀인 아사히 생명 경식 야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동시에 영업부원으로도 근무했는데, 영업 실적이 회사 전체에서 최상위권에 들 정도로 우수했다고 한다. 사회인 2년 차에는 구마가이구미 경식 야구부의 보강 선수로 제64회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준결승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7회까지 던졌으나 마운드에서 내려온 후 팀이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10]

여러 프로 구단에서 입단 제의가 있었지만, 무명이었던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관심을 보여준 한신 타이거스를 역지명하여, 1993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1위로 입단했다. 등번호는 에이스 넘버인 '''18'''을 받았으며, 입단을 계기로 성명 판단을 통해 등록명을 '''恵一|게이이치일본어'''로 했다. 야부는 도쿄 경제대학 출신 최초의 프로 야구 선수가 되었다.

2. 2.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94-2004)

1994년 데뷔 첫해,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여 팀 내 최다인 9승(9패)을 거두며 센트럴 리그 신인왕 타이틀을 획득했다.[11] 팬 투표로 올스타전에도 출전했으며, 5월 2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는 한신의 일본인 투수로는 처음으로 상대팀 첫 등판에서 완봉승을 거두는 기록을 세웠다.[11] 시즌 25번의 선발 등판 중 17경기에서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하고 8번의 완투를 했다.[11] 당시 팀 성적이 부진했기에 그의 활약은 더욱 돋보였다. 초기에는 주로 화요일에 선발 등판하여 '화요일의 남자'(火曜日の男일본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94년 등록명은 '야부 게이이치(藪 恵壹)'였다.

1995년에는 등록명을 '야부 게이이치(藪 恵市)'로 변경했다. 전년에 이어 규정 투구 이닝에 도달하고 리그 6위의 평균자책점 2.98을 기록했지만, 7승에 그치며 리그 최다인 13패를 기록했다.

1996년에는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고, 리그 최다인 30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개인 첫 두 자릿수 승리인 11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리그에서 가장 많은 안타를 허용했고, 팀 동료 유후네 도시로와 함께 2년 연속 리그 최다 패전 투수가 되는 불명예도 안았다. 1997년에는 팀 내 최다 타이인 10승을 거두며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고, 1998년에는 2년 만에 다시 개막전 선발로 나서 개인 최다 타이인 11승(10패)을 기록,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와 함께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시즌 승수가 패수보다 많은 시즌을 보냈다. 이 시기 야부는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하지만 한신 시절 야부에게는 불안정한 모습도 있었다. 전반기에 좋은 투구를 보이다가도 경기 중반인 6회 이후 갑자기 볼넷을 남발하거나 연타를 맞으며 무너지는 경우가 잦아, 팬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승부처에 약하다'는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또한 봄에는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여름이 되면 컨디션 난조를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1999년에는 6승 16패로 부진하며 개인 통산 세 번째 리그 최다 패전을 기록했는데, 16패는 개인 최악의 기록이었다. 2000년에는 데뷔 후 7년 연속으로 규정 투구 이닝을 채웠으나, 6승 10패로 6년 연속 두 자릿수 패전을 기록했다. 2001년에는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1군 공식전 17경기(선발 8경기) 등판에 그치며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2002년 호시노 센이치 감독 부임과 함께 재기를 노렸다. NPB 투수로서는 드물게 등번호를 '4'번으로 변경했는데,[32] 이는 과거 한신에서 4번을 달았던 진 바크, 매트 키오의 사례가 있었으며, 가와토 고조가 방송(주간 토라토라 타이거즈, 요미우리 TV)을 통해 변경을 권유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4월 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663일 만의 승리를 완투승으로 장식하는 등 시즌 초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시즌 중 부상으로 이탈하여 규정 투구 이닝은 채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4년 만에 10승(6패)을 기록했고, 한신 입단 후 처음으로 시즌 승수가 패수보다 많은 시즌을 보냈다.

2003년에는 개막 로테이션에 포함되었으나 컨디션 기복이 심했고, 7월에 중간 계투로 강등되었다. 시즌 후반에는 중간 계투와 대체 선발 역할을 수행하며 8승 3패(개인 최다 승수 차이 갱신)를 기록하며 팀이 18년 만에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200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04년에도 기복 있는 투구를 보였고, 평균자책점은 전년보다 개선되었지만 6승 9패로 패수가 더 많았다. 시즌 중 해외 FA 자격을 취득했고, 시즌 종료 후 메이저 리그 진출을 목표로 FA를 선언하며 한신과의 결별을 공식화했다. 이후 메이저 리그와 라쿠텐 시절에는 주로 중간 계투로 활약했기 때문에, 선발 투수로서의 경력은 사실상 이 해가 마지막이었다.

한신 타이거스 소속으로 11시즌(1994-2004) 동안 통산 268경기에 등판(선발 206경기)하여 84승 106패, 39완투, 평균자책점 3.57을 기록했다.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 1회에 기여했으며, 개인적으로는 신인왕 1회 수상 경력이 있다.[5][6] 그의 애칭은 '메구미 짱(恵ちゃん)'이었다.

2. 3. 메이저 리그 시절 (2005, 2008)

2004년 시즌 종료 후 메이저 리그 도전을 선언하며 FA 자격을 행사했다.[5] 역지명으로 일본 프로 야구(NPB) 구단에 입단했던 선수가 FA 권리를 행사하여 다른 구단으로 이적한 것은 야부가 최초 사례였다.[6]

이듬해 2005년 1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계약하며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다. 등번호는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 받았던 '''13'''번을 선택했다. 그해 중간 계투로 40경기에 등판하여 58이닝 동안 4승 무패, 평균자책점 4.50, 44탈삼진을 기록하며[1] 시즌 4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시즌 종료 후 구단이 계약 연장 옵션을 행사하지 않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2006년에는 콜로라도 로키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으나, 메이저 리그 로스터에 들지 못하자 방출을 요청하여 3월 31일 자유 계약 신분이 되었다.[1] 이후 6월 29일, 멕시칸 리그의 티후아나 포트로스와 계약하여 잠시 활동했다. 2007년에는 소속팀 없이 개인 훈련에만 전념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2008년)


2008년, 메이저 리그 복귀를 목표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스프링 캠프에 참가했다(캠프 등번호 '''72'''번).[1] 시범 경기 활약을 바탕으로 3월 30일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었고, 등번호는 '''22'''번을 받았다.[12] 4월 14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경기에서 구원승을 거두며 3년 만에 메이저 리그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이는 1965년 무라카미 마사노리 이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 일본인 투수의 첫 승리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 199일로, 이는 일본인 메이저 리거 최고령 승리 기록이었다.[13] 또한 5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에서는 3-3 동점이던 8회 무사 1, 2루 상황에 등판하여 타자 케빈 쿠즈마노프를 상대로 단 1개의 공으로 트리플 플레이를 완성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4] 이는 노모 히데오에 이어 일본인 투수로는 역대 두 번째 트리플 플레이 기록이었다. 2008 시즌 자이언츠 소속으로 총 60경기에 등판하여 68이닝을 던지며 3승 6패, 평균자책점 3.57, 48탈삼진을 기록했다.[1]

2009년에는 메이저 리그 계약으로 스프링 캠프에 참가했으나, 시범 경기 부진으로 3월 5일 마이너 리그로 강등되었다.[2] 이후 메이저 리그 40인 로스터 확보를 위한 조치로 3월 20일 방출 통보를 받았다.[2] 다음 날인 21일, 자이언츠 산하 트리플 A급 팀인 프레즈노 그리즐리스와 다시 마이너 계약을 맺었지만,[3] 7월 11일 최종적으로 방출되었다.[15] 이후 야부는 더 이상 메이저 리그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2. 4.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2010)

2010년 7월 26일에 지바 롯데 마린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구단 측은 영입을 보류했다. 이후 7월 29일과 30일에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NPB의 시즌 중 선수 등록 마감일인 7월 31일에 공식 입단했다. 등번호는 '''64'''번[16]으로 배정받았다. 당시 라쿠텐 1군 감독이었던 마티 브라운이 6회를 책임질 구원 투수를 구단에 요청하면서 긴급하게 영입이 이루어졌다.[17]

입단 후 중간 계투로 기용되었고, 8월 10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클리넥스 스타디움 미야기)에서 NPB 복귀 후 첫 등판을 가졌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아웃 카운트 하나만 잡고 4점을 내주며 강판되었다. 이후 10경기에서는 10과 2/3이닝 동안 2자책점만을 기록하며 호투했다. 하지만 9월 16일 삿포로 돔에서 훈련 중 왼쪽 종아리 근육 파열 부상을 당해 시즌을 마감했다.[18]

결국 시즌 종료 후 라쿠텐에서 방출 통보(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18] 방출 직후에는 다른 구단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는 것도 고려했지만, 12월 7일 오클랜드에서 열린 MLB 윈터 미팅 현장에서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그는 MLB 시절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랜딩(착륙)합니다. 아직 (야구를) 할 수 있지만, 이제 42세라 불러주는 구단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7] 라쿠텐에서는 총 11경기에 등판했지만 뚜렷한 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3. 은퇴 후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방출된 후, 친정팀 한신 타이거스로부터 투수 코치직 제의를 받았으나 처음에는 현역 생활 연장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2010년 12월 17일, 한신 구단과 정식으로 2군 투수 코치 계약을 맺고 현역에서 은퇴하며 7시즌 만에 한신으로 복귀했다.[5][6] 코치직을 수락하는 과정에서는 메이저 리그 등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신 훈련법 등에 관한 자료를 파워포인트로 직접 작성하여 구단 수뇌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도 했다.[20] 등번호는 오카다 아키노부 전 감독이 사용했던 80번을 물려받았다.

2011년에는 2군 투수 코치로 활동했으며, 2012년 와다 유타카 감독이 새로 취임하면서 1군 투수 코치로 승격되었다.[19] 하지만 2013년에는 다시 2군 투수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19]

한신 코치 시절 (2012년 8월 17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


한신 코치직 퇴임 후에는 고베시 히가시나다구에 위치한 스포츠 클럽 "Japan Athlete Club STAY COOL"의 강사로 활동했다.[21] 이후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전향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14년부터 마이니치 방송(MBS 라디오·TV) 및 GAORA의 해설을 맡고 있으며, MBS 베이스볼 파크 등 라디오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며 이노우에 요우스이, 나카오 아키라 등의 성대모사를 선보이기도 한다. 2015년부터는 요미우리 TV의 한신 경기 중계(게스트 해설) 및 J SPORTS의 메이저 리그 중계 해설도 담당하고 있다. TV 프로그램 『세야넨!』에도 2015년부터 고정 출연 중이다. 또한 2017년부터 석간 후지, 2023년부터 산케이 스포츠의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주간 베이스볼』의 '연속 사진으로 보는 프로의 테크닉' 코너에서 투수 파트 해설을 담당한다.

2018년 12월에는 해설 활동과 병행하며 학생 야구 지도자 자격 회복 강습회를 수강했고,[22] 2019년 2월 5일 일본 학생 야구 협회로부터 자격을 인정받아 고교 및 대학 야구부 지도도 가능하게 되었다.[23] 야부 본인은 고교 야구 선수인 아들에게 직접 조언해주고 싶었던 점도 자격 회복의 이유 중 하나라고 밝혔다.[22]

2019년 3월 22일에는 애슬레틱스 OB 자격으로 이와무라 아키노리와 함께 도쿄 돔에서 열린 MLB 개막 2차전(오클랜드 애슬레틱스-매리너스) 시구식에 참여하여 켄 그리피 주니어를 상대로 투구했다.[24] 같은 해 12월에는 탄자니아에서 야구 지도 활동을 하기도 했다.[25]

현역 시절 기요하라 가즈히로와의 몸쪽 승부는 유명하다. 특히 인코스 공략에 약점을 보이던 기요하라를 상대로 집요하게 몸쪽 공을 던져 통산 6개의 사구를 기록했다.[26] 1997년 8월 20일 도쿄 돔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시즌 3번째 사구를 맞힌 후에는 기요하라가 손가락 3개를 펴 보이며 "3번째다!"라고 항의하자, 야부가 "연봉 3억이라는 뜻이냐?", "인코스는 약점이니 당신 기술이면 피할 수 있지 않나"라고 도발하여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26] 1998년 7월 10일 같은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도 사구 후 기요하라가 마운드로 걸어와 약 2분간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27] 야부는 기요하라를 상대로 통산 50타수 8안타 무홈런으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26] 은퇴 후 야부는 이 몸쪽 승부에 대해, 당시 기요하라가 1995년 어깨 탈구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코스 대처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고, 한신 벤치에서도 이를 간파하여 "4, 5월에는 인코스를 공략하라. 정타로 맞아도 파울이 될 것"이라는 전략적 지시가 있었음을 밝혔다. 또한 기요하라의 성격상 물러서지 않아 사구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28] 2012년 11월 18일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한신 OB전에서는 기요하라의 요청으로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야부가 타석의 기요하라 등 뒤로 공을 던지고 기요하라가 마운드로 걸어 나오는 장면을 연출해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29]

4. 플레이 스타일



투구 스타일은 예리한 슬라이더와 포크볼을 주무기로 삼았으며, 후에 슈트를 습득하여 땅볼 유도를 노리는 피칭을 했다. 150km/h 이상의 스트레이트를 던질 능력도 있었지만, 지구력 유지를 위해 평소에는 140km/h 전후로 구속을 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신 시절에는 특히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강한 면모를 보여(통산 27승 17패, 프로 첫 승리도 히로시마전), ‘잉어 킬러’(鯉キラー|고이키라일본어)라고 불렸다. 그가 메이저 리그로 이적했을 때 히로시마 구단 수뇌부가 “안심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몸쪽 공(인코스) 공략에 어려움을 겪던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상대로는 집요하게 몸쪽 승부를 펼쳐 많은 사구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7년 8월 2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도쿄 돔)에서는 시즌 3번째 사구를 맞히자 기요하라가 격분하여 손가락 3개를 펴 보이며 항의했는데, 야부는 "연봉 3억 엔이라는 뜻이냐?", "몸쪽은 약점이고, 기요하라 씨 기술이라면 피할 수 있지 않느냐"고 응수하여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26]. 이듬해 1998년 7월 10일 요미우리전(도쿄 돔)에서도 슈트가 몸쪽 높게 빠지며 기요하라의 오른손 엄지를 스치는 사구를 내주자, 분노한 기요하라가 마운드로 걸어 나와 야부를 노려보며 약 2분간 대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27]. 기요하라를 상대로 통산 6개의 사구를 기록했으며, 상대 전적은 50타수 8안타 무홈런으로 압도했다[26].

야부는 은퇴 후 이 '기요하라 공략'의 배경에 대해, 당시 요미우리로 이적한 기요하라가 1995년 겪은 오른쪽 어깨 탈구의 영향으로 몸쪽 공 대처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고, 한신의 스카우트진 역시 "4, 5월에는 몸쪽을 공략하라. 정타를 맞아도 대부분 좌측 파울이 될 것"이라고 투수들에게 지시했었다고 밝혔다. 또한 기요하라 역시 물러서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사구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28].

은퇴 후인 2012년 11월 18일,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대 한신 OB전에서는 기요하라와 당시의 신경전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팬들을 즐겁게 했다. 기요하라가 포수 야노 아키히로를 통해 "그때처럼 맞춰달라"고 요청하자, 야부는 이를 거절하며 대신 등 뒤로 공을 던졌고, 기요하라가 마운드로 걸어 나오는 장면을 연출했다[29].

5. 상세 정보

애칭은 '''메구미 짱'''(恵市|めぐみちゃん일본어)이다.

5. 1. 출신 학교

와카야마현립 신구 고등학교 출신이다. 자택에서 통학이 가능하고 센바츠 출전 기회가 많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이 학교로 진학했다.[7] 재학 중 2학년 때 부내 폭력 사건이 발생하여 1년간 대외 경기 출전이 금지되기도 했다.[8] 3학년 여름 현 대회에서는 8강에서 탈락했으며, 당시 같은 현에 있던 스기우라 마사노리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고교 졸업 후 도쿄의 여러 대학 입학을 시도했으나 실적 부족으로 실패했고, 1년간 재수했으나 목표했던 대학 진학에는 이르지 못했다. 결국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재수를 포기하고 일반 입시를 통해 도쿄 경제대학에 진학했다.[9] 대학에서는 수도 대학 야구 연맹 2부 리그에서 활동하며 통산 36승을 기록했다.[9] 투수로 등판하지 않는 경기에서는 타자로도 출전하여 수위 타자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대학 시절의 활약을 바탕으로 한신 타이거스를 비롯한 일부 구단 스카우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야부는 도쿄 경제대학 출신 첫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기도 하다.

5. 2. 선수 경력

도쿄 경제 대학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 아사히 생명에서 활동하다가, 1993년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스를 역지명하여 1순위로 입단했다. 등번호는 에이스 넘버인 '''18'''번을 받았으며, 입단을 계기로 성명 판단에 따라 등록명을 "'''야부 게이이치'''"(薮 恵市일본어)로 정했다. 도쿄 경제 대학 출신 첫 프로 야구 선수였다.

=== 한신 타이거스 ===

1994년,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1군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여 팀 내 최다인 9승(9패)을 거두며 센트럴 리그 신인왕을 획득했다. 전반기에는 6연승을 기록했고, 올스타전에도 세 리그 투수 부문 팬 투표 1위로 출전했다. 5월 2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는 한신의 일본인 투수로서 처음으로 "대 거인전 첫 등판 첫 완봉승"을 거두었다. 시즌 전체적으로는 선발 등판한 25경기 중 17경기에서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했고, 8경기를 완투했다.[11]

1995년, 등록명을 본명인 "'''야부 게이이치'''"(薮 恵壹일본어)로 변경했다. 전년에 이어 규정 투구 이닝에 도달했고, 리그 6위의 평균자책점 2.98을 기록하며 선발로 7승을 거두었지만, 리그 최다인 13패를 기록했다.

1996년,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개막 투수를 맡아, 세 리그 최다인 30경기에 선발 등판했다. 본인 첫 두 자릿수 승리인 11승을 거둔 반면, 피안타는 리그 최다였고, 팀 동료인 유후네 도시로와 함께 2년 연속 최다 패전 투수가 되었다.

1997년, 팀 내 최다 타이인 10승을 거두며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1998년, 2년 만에 개막 투수를 맡아, 시즌 개인 최다 타이인 11승으로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 10패를 기록했지만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시즌 승수를 패수보다 많이 기록했다.

1999년에는 6승 16패로 개인 통산 세 번째로 리그 최다 패전 투수가 되었다 (16패는 개인 최악의 기록이다).

2000년, 입단 첫해부터 7년 연속 세 리그 최종 규정 투구 이닝에 도달했지만, 6승 10패로 6년 연속 두 자릿수 패전을 기록했다.

2001년,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인해 1군 공식전 17경기(선발 8경기)에 등판했지만, 프로 입단 후 첫 무승을 기록했다.

2002년, NPB 투수로서 드물게 한 자릿수 등번호 '''4'''로 변경했다. 4월 2일 요코하마전에서 663일 만에 승리를 완투로 장식했고, 개막부터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중간에 이탈한 영향으로 규정 투구 이닝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4년 만에 10승을 기록했고 한신 입단 후 처음으로 시즌 2개 이상의 승수를 기록했다.

2003년, 개막부터 로테이션에 합류했지만 컨디션 기복이 심했고, 7월에 중간 계투로 강등되었다. 후반에는 중간 계투와 땜빵 선발을 맡아, 8승 3패라는 성적(승률은 개인 최다를 갱신)으로 팀의 18년 만의 세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등판 기회가 없었다.

2004년, 전년에 이어 컨디션 기복이 심했고, 평균자책점은 1점 가까이 개선되었지만 6승 9패로 패수가 승수보다 많았다. 시즌 중에 해외 FA 권리를 획득했다. 시즌 종료 후, MLB 진출을 목표로 FA 권리 행사를 선언했다. 메이저 진출 후부터 라쿠텐에서의 현역 은퇴까지 중간 계투로 기용되었기 때문에, 선발 투수로서의 커리어는 이 해가 마지막이 되었다. 한신 타이거스 소속으로 통산 268경기에 출전하여 206번의 선발 등판에서 84승 106패, 39완투, 통산 평균자책점 3.57을 기록했다.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

2004년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하고 메이저 리그 도전을 선언했다. 2005년 1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입단이 결정되었고, 등번호는 야구를 시작할 때 처음 받은 번호인 '''13'''번으로 정했다. 역지명으로 NPB 구단에 입단한 선수가 FA 권리를 행사하여 타 구단(NPB 포함)으로 이적한 것은 야부가 최초였다. 2005년 오클랜드에서 중간 계투로 40경기에 등판하여 58이닝 동안 4승 무패, 평균자책점 4.50, 44탈삼진을 기록했다. 그러나 시즌 종료 후 오클랜드가 2년차 계약 옵션을 행사하지 않아 자유 계약 신분이 되었다.

2006년에는 콜로라도 로키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으나, 메이저 리그 로스터에 들지 못하자 방출을 요청하여 3월 31일자로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이후 6월 29일 멕시칸 리그의 티후아나 포트로스와 계약하여 잠시 활동했다. 2007년 시즌에는 소속팀 없이 개인 훈련에만 전념했다.

2007년 12월, 스프링 트레이닝 초청을 조건으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 2008년 스프링 캠프와 시범 경기(등번호 '''72'''번)를 거쳐 3월 30일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었고, 등번호는 '''22'''번을 받았다.[1] 4월 14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전에서 3년 만에 메이저 리그 승리를 기록했다. 당시 39세 199일의 나이로, 이는 일본인 메이저 리거 최고령 승리 기록이었다.[13] 또한 5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전 8회, 3-3 동점 무사 1, 2루 상황에서 구원 등판하여 타자 케빈 쿠즈마노프를 단 1구로 트리플 플레이로 처리하는 진기록도 세웠다.[14] 이는 1996년 노모 히데오 이후 일본인 투수로는 두 번째 트리플 플레이 기록이었다. 2008 시즌 자이언츠 소속으로 60경기에 등판하여 68이닝 동안 3승 6패, 평균자책점 3.57, 48탈삼진을 기록했다.

2009년, 메이저 리그 계약으로 스프링 캠프에 참가했지만 시범 경기 부진으로 3월 5일 마이너 리그로 강등되었다. 메이저 리그 40인 로스터 확보를 위한 조치로 3월 20일 방출 통보를 받았다.[2] 다음 날 자이언츠 산하 트리플 A팀인 프레즈노 그리즐리스와 마이너 계약을 다시 맺었지만,[3] 7월 11일 최종적으로 방출되었다.

=== NPB 복귀 및 은퇴 ===

2010년, MLB 구단으로부터의 제안을 기다리며 미국 내에서 훈련을 계속했지만, 7월 26일부터 이틀간 지바 롯데 마린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최고 구속 146km/h를 기록하며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당시 42세의 나이 때문에 최종 불합격했다.[17]

이후 7월 29일부터 이틀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NPB 시즌 중 지배하 선수 등록 마감일인 7월 31일 라쿠텐 입단이 발표되었다. 등번호는 '''64'''번이었고 시즌 종료까지 계약했다.[16] 당시 라쿠텐 감독 마티 브라운이 1군 불펜 강화를 위해 구단에 영입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17]

입단 후 8월 10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전(클리넥스 스타디움 미야기) 7회 초에 NPB 복귀 후 첫 1군 등판을 했으나, 아웃 카운트 하나를 잡는 동안 4실점하며 강판되었다. 이후 10경기에 등판하여 10과 2/3이닝 동안 2자책점으로 중간 계투로서 호투했지만, 9월 16일 삿포로 돔 훈련 중 러닝을 하다가 왼쪽 종아리 근육 파열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되었다. 시즌 종료 후 라쿠텐에서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18]

전력 외 통보 직후 다른 구단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는 것도 고려했지만, 12월 7일 미국 오클랜드에서 개막한 MLB 윈터 미팅 현장에서 은퇴를 공식 표명했다.[17]

5. 3. 지도자 경력

라쿠텐에서 방출된 후, 친정팀인 한신 타이거스로부터 투수 코치직 제의를 받았다. 처음에는 현역 생활 연장 의사를 보였으나, 2010년 12월 15일 한신 구단 사장과 면담 후, 12월 17일에 코치로 정식 계약하며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 이로써 7시즌 만에 한신으로 복귀하게 되었다.[19]

2011년부터 한신 타이거스의 2군 투수 코치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등번호는 오카다 아키노부 전 감독이 사용했던 80번을 물려받았다. 코치직을 수락할 당시, 메이저 리그 등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신 훈련법과 연습 계획에 대한 자료를 파워포인트로 직접 만들어 구단 수뇌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기도 했다.[20]

2012년에는 와다 유타카가 감독으로 새로 부임하면서 1군 투수 코치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2013년에는 다시 2군 투수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19]

5. 4.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신인왕 (1994년)
  • 월간 MVP: 1회 (투수 부문: 1994년 5월)
  • JA 전농 Go・Go 상: 1회 (최다 탈삼진상: 1997년 5월)
  • 우수 JCB・MEP 상: 1회 (1998년)
  • 산스포 MVP 신인상 (1994년)[30]

5. 5. 개인 기록

; NPB 첫 기록

  • 첫 등판·첫 선발 등판: 1994년 4월 13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6이닝 3실점으로 패전 투수
  • 첫 탈삼진: 상동, 1회 초 마쓰이 다쓰노리로부터
  • 첫 승리·첫 선발 승리·첫 완투 승리: 1994년 4월 19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차전(오카야마 현립 야구장), 9이닝 1실점
  • 첫 완봉 승리: 1994년 5월 24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7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 첫 홀드: 2010년 8월 19일, 대 오릭스 버팔로스 21차전(스카이마크 스타디움), 6회 말 2사에서 두 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 NPB 기록

; NPB 기타 기록

  • 올스타전 출장: 6회(1994년 ~ 1997년, 1999년, 2000년)

5. 6. 등번호


  • '''18''' (1994년 ~ 2001년): 한신 타이거스 입단 초기부터 사용한 등번호이다.
  • '''4''' (2002년 ~ 2004년): 호시노 센이치 감독 부임 후 재기를 다짐하며 변경한 등번호이다.[32] 투수로서는 드문 번호였으며, 과거 한신 타이거스에서 진 바크, 매트 키오 등이 사용했다. 가와토 고조의 권유로 변경하게 되었다.
  • '''13''' (2005년): MLB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시절 사용한 등번호로, 야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 받았던 번호이다.
  • '''22''' (2008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사용한 등번호이다.[12] (캠프 및 오픈전에서는 72번을 사용했다.)
  • '''64''' (2010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사용한 등번호이다.[16]
  • '''80''' (2011년 ~ 2013년): 은퇴 후 한신 타이거스 코치로 복귀하여 사용한 등번호로,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 퇴임 후 비어 있던 번호이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Official Site of The San Francisco Giants: News: Holm, Yabu get spots on Giants' roster http://sanfrancisco.[...]
[2] 웹사이트 SF Giants Cut Yabu http://www.npbtracke[...] 2009-03-21
[3] 뉴스 A.M. NOTES: Yabu re-signed, Zito’s fastball, etc. http://blogs.mercury[...]
[4] 서적 週刊ベースボール 2023年12月8日号増刊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3-11-09
[5] 문서 신인왕
[6] 웹사이트 藪恵壹 | プロフィール・成績・速報・ドラフト・ニュースなど選手情報 -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https://sp.baseball.[...]
[7] 뉴스 【藪恵壹 攻め続けた男】憧れ甲子園へ緻密な計算で和歌山・新宮高進学 https://www.sanspo.c[...] 2023-04-18
[8] 뉴스 【藪恵壹 攻め続けた男】人生でポッカリ空いた日々 高校時代の1年間対外試合禁止 https://www.sanspo.c[...] 2023-04-25
[9] 문서 '94スポニチプロ野球手帳 スポーツニッポン新聞社
[10] 문서 都市対抗野球大会80年史 日本野球連盟
[11] 문서 別冊ベースボール よみがえる1990年代のプロ野球PART.1(1994年編)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1
[12] 뉴스 藪39歳最終カット突破、開幕メジャー https://www.nikkansp[...] 2011-02-15
[13] 문서 斎藤隆의 41歳183日
[14] 뉴스 藪初球で三重殺にガッツポーズ https://www.nikkansp[...] 2017-10-08
[15] 뉴스 藪 ジャイアンツ傘下3Aを解雇に http://www.daily.co.[...] 2011-02-15
[16] 웹사이트 藪恵壹選手との契約合意について http://www.rakutenea[...]
[17] 뉴스 【7月30日】2010年(平22) 駆け込み入団 楽天 極秘テストで藪恵壹獲得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2-07-30
[18] 웹사이트 来季の選手契約について http://www.rakutenea[...]
[19] 웹사이트 来季のコーチ契約について http://hanshintigers[...] 阪神球団公式サイト 2013-10-05
[20] 서적 阪神タイガースはなんで優勝でけへんのや? (光文社新書 1254) 光文社 2023-04-19
[21] 뉴스 阪神前2軍投手コーチの藪氏が小中学生を指導 https://www.daily.co[...] 2014-01-01
[22] 뉴스 藪氏、息子と「言葉交わすため」資格回復研修を受講 https://www.nikkansp[...] 2019-02-16
[23] 웹사이트 学生野球資格回復に関する規則 第4条による認定者 https://www.student-[...] 日本学生野球協会
[24] 뉴스 スレチックスOB藪氏&岩村氏が始球式に登場 打席にはグリフィー氏 https://www.sponichi[...] 2019-03-23
[25] 뉴스 【内田雅也の追球】アフリカで触れた神髄 https://www.sponichi[...] 2020-01-21
[26] 뉴스 小林繁、藪恵壹、遠山奨志……。「○○キラー」の快投は消えたのか? https://number.bunsh[...] 2020-07-04
[27] 뉴스 “死球王” 清原和博のブチ切れ伝説 「今度来たら顔ゆがめたる…」【久保田龍雄】 https://dot.asahi.co[...] 2020-07-04
[28] 뉴스 藪恵壹 「凄さを認めた上での対策だったんです」 https://number.bunsh[...] 2020-07-04
[29] 뉴스 清原氏が提言「もっと個性磨け」/OB戦 https://www.nikkansp[...] 2020-07-04
[30] 뉴스 【ファン交歓会一問一答】原口、関西弁の女性「いいと思います」(画像6)歴代サンスポMVP大賞、新人賞の受賞者 https://www.sanspo.c[...] 産業経済新聞社 2017-09-08
[31] 간행물 月刊タイガース 2000-05
[32] 문서 2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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