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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미 나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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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가미 나미오는 흉노 문화와 동서 문화 교섭사를 전공한 일본의 고고학자이다.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동아고고학회 연구원으로 중국 베이징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 소장을 역임했으며, 기마민족설을 주장하여 일본 고대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마민족설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일본 고고학의 해외 조사를 장려하는 등 학문적 의의를 지닌다. 그는 또한 시인으로 활동하며,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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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미 나미오
기본 정보
이름에가미 나미오 (江上波夫)
출생1906년 11월 6일
출생지일본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
사망2002년 11월 11일
주요 관심사고고학
모교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직장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정보 없음

2. 약력


  • 도쿄부(東京府) 부립(府立) 제5중학을 거쳐 구제(舊制) 우라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1]
  • 1930년(쇼와 5년),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東洋史学科)를 졸업하고,[2] 동아고고학회 연구원으로서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3]
  • 1931년(쇼와 6년) 동방문화학원 연구원이 되었다.[4]
  • 1935년부터 1941년까지 네이멍구(중국 몽골)의 오론슘 유적을 조사하여 네스토리우스파와 가톨릭 교회 등의 유적을 확인하고, 불교 관련 문서 자료도 발견하였다.
  • 1948년(쇼와 23년)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가 되었다.
  • 1962년(쇼와 37년)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 1967년(쇼와 42년) 도쿄 대학 명예 교수가 되었다.
  • 1968년(쇼와 43년) 매일 출판 문화상을 수상했다.
  • 1969년(쇼와 44년) 자수포장을 받았다.
  • 1973년 (쇼와 48년) 다마 미술 대학 강사, 다마 미술 대학 문양연구소 연구원으로서 근무[5]
  • 1977년(쇼와 52년) 훈3등 욱일중수장을 수여받고, 고대 오리엔트 박물관 관장이 되었다.
  • 1983년(쇼와 58년) 문화공로자로 인정받았다.
  • 1991년(헤이세이 3년) 문화 훈장을 받았다.
  • 2003년(헤이세이 15년) 3월, 에가미 나미오 본인이 요코하마시(横浜市)에 기증한 고고학・역사학・미술・민족 관련 자료 약 2,500점과 문헌 자료 약 25,000점을 토대로 요코하마 유라시아 문화관이 개관되었다.[6][7] 리틀월드 인간 박물관장도 역임했다.

3. 기마민족설

에가미 나미오가 역사・고고학 분야에서 큰 주목을 받은 것은 낭만적인 기마민족 정복왕조설(기마민족설)이었다. 고지키(古事記)나 니혼쇼키(日本書紀) 등의 옛 자료에는 일본인이 기마민족이라고 명시한 기록은 없지만, 도래인이라고 명시한 기록은 매우 많다. 특히 니니기노 미코토천손강림은 일본의 무수한 학자들이 여러 차례 검증했다.

일본 고대 국가의 기원을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에게서 찾으려는 에가미의 학설은 패전 후 3년이 지난 1948년에 도쿄 오차노미즈 역 부근의 다방에서 에가미 나미오와 그의 동료인 오카 마사오, 야하타 이치로, 이시다 에이이치로 세 사람이 모인 좌담회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이 좌담회는 학술연구 잡지 『민족학 연구』의 출판사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팔리는 논문'을 써서 돕기로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으며, 좌담회 내용은 「일본민족=문화의 원류와 일본 국가의 형성」이라는 특집기사로 발표되었다.

기마민족설은 당시 일본 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현재는 야마토 조정의 뿌리를 한반도에서 찾는 가설(4세기 후반에 부여계 기마민족이 일본 열도에 건너와 정복왕조를 세웠다는 설)을 지지하는 일본사, 고고학 연구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기마민족설은 「쇼와의 전설」이 되어, 에가미의 학자로서의 진가를 보여주었고 일본의 고고학에 해외조사라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갖는다.

3. 1. 학계의 비판과 반론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설은 발표 직후부터 야나기타 구니오, 오리구치 시노부 등의 민속학자를 비롯한 각계 연구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사와라 마코토를 비롯해[23] 오카우치 미쓰자네, 아나자와 아코오, 스즈키 야스타미, 야스모토 비텐 등 많은 연구자들이 비판에 참여했다. 히구치 다카야스는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사서 어디에도 대륙에서 현해탄을 건너는 대규모 민족 이동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오히려 중국 사서가 일본 열도의 국가들을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7세기까지 일관되게 '왜'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24] 학설의 허점을 비판했다. 오카우치 미쓰자네 역시 에가미가 주장하는 기마민족이 어떻게 일본에 침입하고 정복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정복 왕조를 세웠는지를 고고학적 측면에서 전혀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며[25] 학설의 근거가 부족함을 지적했다.

에가미는 이러한 '학설의 불비함'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수정과 보강을 계속했다. 비록 일본 학계에서는 기마민족설에 대한 의문이 더 컸지만, 발표 후 50년이 넘도록 일반에 널리 퍼지며 그 생명력을 유지했다. 패전 후 황국사관의 속박에서 벗어난 언론은 에가미의 학설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며 전파에 기여했다. 북방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농경 민족들을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다는 이야기에 낭만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다.[26] 이노우에 미쓰사다처럼 기마민족설을 높이 평가하는 학자도 있었고, 미즈노 유우는 기마민족설의 영향을 받은 네오기마민족설을 주장하기도 했다.[27]

만년에 에가미는 반(反)기마민족설을 주장한 사와라 마코토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그 내용을 담은 저작이 일본에서 발행되기도 했다. 기마민족설은 일본 고대사 가설로서 학계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지만, 끝내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의는 오늘날까지 종종 회자되고 있다. 한편, 에가미는 '정복 왕조'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유럽의 학자 카를 비트포겔이었다고 밝혔다.

현재는 야마토 조정의 뿌리를 한반도에서 찾는 가설(4세기 후반에 부여계 기마민족이 일본 열도에 건너와 정복왕조를 세웠다는 설)을 지지하는 일본사, 고고학 연구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기마민족설은 '쇼와의 전설'이 되어, 에가미의 학자로서의 진가를 보여주었고 일본의 고고학에 해외조사라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3. 2. 수정 및 보완

에가미는 자신의 기마민족 정복왕조설(기마민족설)에 대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수정과 보강을 계속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기마민족설에 대한 의문이 더 컸지만, 발표 후 50년이 넘도록 일반에 널리 퍼지며 그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패전 뒤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기원을 《고지키》나 《니혼쇼키》 속의 신화에서 찾으려 한 황국사관에서 벗어난 언론은 에가미의 설을 보도하며 전파에 기여했다. 북방에서 남하하여 농경 민족들을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다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많았다.[26] 이노우에 미쓰사다처럼 기마민족설을 높이 평가하는 학자도 있었으며, 미즈노 유는 기마민족설의 영향을 받은 네오기마민족설을 주장하기도 했다.[27]

만년에는 반(反)기마민족설을 주장한 사와라 마코토와의 격론을 담은 저작도 일본에서 발행되었다. 이 설은 일본 고대사 가설로서 학계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으나,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관련 의론은 오늘날까지 종종 회자된다. 한편, 에가미는 기마민족설의 '정복 왕조'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유럽의 학자 카를 비트포겔이라고 밝혔다.

3. 3. 대중적 확산과 영향

에가미 나미오가 역사 및 고고학 분야에서 크게 주목받은 것은 낭만적인 기마 민족 정복 왕조설(기마민족설) 덕분이었다.[12] 고지키(고사기), 일본서기(니혼쇼키) 등 고대 문헌에는 일본인이 기마 민족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도래인에 대한 언급은 많다.[13] 특히 니니기노 미코토의 천손강림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검증되었다.[13]

1948년, 도쿄 오차노미즈역 근처 찻집에서 에가미와 오카 마사오, 야하타 이치로, 이시다 에이이치로 등 동료 학자 3명이 모인 좌담회에서 기마 민족 정복 왕조설이 발표되었다. 이 학설은 "일본 민족 = 문화의 원류와 일본 국가의 형성"이라는 특집 기사로 발표되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학술지 '민족학 연구'를 돕기 위해 '팔리는 논문'을 쓰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기마 민족설은 발표 직후 야나기타 구니오, 오리쿠치 시노부 등 민속학자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의 비판을 받았다.[14] 사하라 마코토, 오카우치 미쓰마사, 아나자와 히로미쓰, 스즈키 야스미, 야스모토 요시노리 등도 비판에 참여했다.[14] 그럼에도 에가미는 학설의 미비점을 수정, 보강하며 연구를 이어나갔다. 학계에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강했지만, 발표 후 50년 이상 일반 대중에게 널리 퍼져 그 생명력을 유지했다.[15] 이는 황국사관에서 벗어난 언론이 에가미의 학설을 적극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방 기마 민족이 남하하여 농경 민족을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낭만적으로 다가왔다.[15]

말년에 에가미는 반(反)기마 민족설을 주장한 사하라 마코토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그 내용은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기마 민족설은 일본 고대사 가설로서 학계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지만,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했다.[16] 그러나 이 논의는 현재까지도 종종 회자되고 있다.[17] 에가미는 '정복 왕조'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유럽의 역사학자 카를 비트포겔이라고 밝혔다.

기마 민족설은 "쇼와 시대의 전설"이 되었지만, 에가미는 일본 고고학에 해외 조사라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자로 평가받는다.

  •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는 불새 여명편에서 기마 민족 정복 왕조설을 차용했다.
  • 소설가 마츠모토 세이초는 에가미와 여러 차례 대담했다. 세이초는 야마타이국 논쟁에서 큐슈 설을 주장했다.
  • 작가 시바 료타로는 에가미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칭하며, "독자적인 가설 없이는 학문도 없다"라는 신념을 가진 그는 에가미를 "일본의 고고학자 중, 40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가설을 제시할 수 있었던 학자"로서 높이 평가했다.
  • 역사학자 나오키 코지로는 기마 민족 정복 왕조설을 검증하여 카와치 정권론을 주장했다.
  • 고고학자 미즈노 유가 주장한 왕조 교체설은 기마 민족 정복 왕조설의 영향을 받아 "네오 기마 민족 정복 왕조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소마 타카시(츠쿠바 대학 명예 교수)는 도쿄 대학 시절 에가미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저서 『유사해 서고 문화론고 실크로드의 동서 교류』(야마카와 출판사)가 있다.
  • 오오츠카 하츠시게(메이지 대학 명예 교수)는 에가미 사망 후 "일본 고고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선생님만큼 공헌한 사람은 없다. 과연 '거성, 초원에 지다'라는 인상이다. 저 정도로 스케일이 큰 사람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겠지. 고고학계의 큰 손실이다"라고 말했다. 모리 코이치·도지샤 대학 명예 교수, 우에다 마사아키·교토 대학 명예 교수 등도 에가미를 추모했다.
  • 히타치노미야는 에가미에게 "기마 민족의 에가미 선생님이시군요"라고 말을 걸었다.[18] 미카사노미야와는 오리엔트·동양학 연구로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 대한민국대통령 전두환이 공식 방일했을 때, 궁중 만찬회에서 쇼와 천황이 "과거의 불행"에 대해 언급하며 "6, 7세기의 일본 국가 형성 시에 한반도로부터 매우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사하라는 에가미 학설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밝혔다. (에가미 나미오·사하라 마코토 『기마 민족은 왔다? 오지 않았다?』쇼가쿠칸, 2003년판. 262쪽, "어말씀" 참조).

4. 인물

도쿄부립 제5중학교와 구제 우라와 고등학교를 거쳐 1930년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를 졸업했다.[1][2] 대학교 전공은 흉노 문화, 동서 문화 교섭사였다. 도쿄부립 제5중학교 재학 시절, 나가노에서 열린 '전지수양대'에 참가했을 때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접하고 고고학을 지망하게 되었다.[19]

구제 우라와 고등학교 시절에는 결핵으로 어촌인 지바현 오키쓰(가쓰우라시)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바다로 돌출된 암반에서 놀기 위해 매일 8km를 걸었으며, 부모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려고 무엇이든 먹었다고 한다. 에가미는 85세 때 "덕분에 지금도 다리가 튼튼합니다"라고 말했다.

1956년, 도쿄대 이란이라크 유적 조사단장으로 참여했던 북메소포타미아의 테르 사라사트의 원시 농촌 유적 발굴을 시작으로 유라시아 대륙 전역을 무대로 한 조사의 실적은 전후를 통해 20여 차례였다. 1990년부터는 내몽골의 오론숨 유적을 재방문하여 몽골에서 4년 동안 칭기즈 칸능묘를 탐색하는 조사를 지휘했다.

"고고학은 현장 조사가 기본"이라는 지론을 갖고, 작업복에 등산 모자 차림으로 습지나 강을 개의치 않고 걸었으며, 저녁 식사에는 엄청난 식욕을 보였다.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날 때마다 "(능묘는) 이거일지도 몰라!"라고 외치는 에가미에 주변은 술렁거렸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른 시대의 유적이었다. 현장에서 질문을 하면, 초원에 앉아 파리가 떼로 몰려드는 것도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발자취를 남긴 나라들에서의 인기도 높아, 그 비범한 열정에 각국 요인들도 매료되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파격적인 삶을 관철한 에가미의 학문을 위한 건강 비결은 "관리직이 되지 않는다"였다.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한 스케일이 큰 연구는 만년까지 멈추지 않았다.

시인으로서의 측면도 있으며, 겐닌(幻人)이라는 필명으로 낸 시집 「겐닌 시초」는 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도 찬탄할 정도였다. 1996년 출판된 신판 "겐닌 시초" 중 1991년 작품 "몽골 겔에서 여행하며 잠들기를 거듭하며"를

:<이제 노년에 이르러 다시/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 칭기즈 칸의 능묘 탐사대에 참여한다><초원은 나의 꿈이 떠도는 곳/ 예순여 년 지금도 떠돈다>로 맺고 있다.

"사람의 본성은 인가 인가"라는 질문에 "악이다"라고 즉답했다. 그러나 나가이 잇켄은 "에가미만큼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평했다.

5. 평가 및 영향

에가미 나미오는 낭만적인 기마민족 정복왕조설(기마민족설)로 역사·고고학계의 관심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12] 고지키(古事記), 니혼쇼키(日本書紀) 등의 옛 자료에는 일본인이 기마민족이라는 내용은 없지만, 도래인에 관한 내용은 많이 나온다. 특히 니니기노 미코토의 천손강림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검증을 거쳤다.[13] 일본 고대 국가의 기원을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에게서 찾으려는 이 학설은 1948년에 발표되어 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23]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 등 민속학자를 비롯한 각계 연구자들이 비판에 나섰고, 사하라 마코토(佐原眞) 등 많은 연구자들도 비판에 가담했다.[14]

에가미는 '학설의 불비(不備)함'을 지적받으면서도 수정과 보강을 이어나갔다. 학계에서는 의문시하는 태도가 더 강했지만, 발표 뒤 50년이 넘도록 일반에 널리 퍼져 그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황국사관(皇國史觀)의 속박에서 벗어난 언론은 에가미의 설을 보도하며 전파에 일조했고, 북방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농경 민족들을 정복해 새로운 왕조를 세운다는 이야기에 낭만을 품는 사람도 많았다.[15] 미즈노 유(水野祐)는 기마민족설의 영향을 받은 네오기마민족설을 주창하기도 했다.[27]

만년에 반(反)기마민족설을 주장한 사하라 마코토(佐原眞)와의 격론을 담은 저작도 일본에서 발행되었다. 이 설은 일본 고대사상의 가설로써 학계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으나, 끝내 정설로써는 인정받지 못하였다.[16] 그럼에도 의론 자체는 오늘날까지 종종 회자되고 있다.[17] 한편, 에가미 본인은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의 "정복왕조"라는 말을 꺼낸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유럽의 역사학자 카를 비트포겔이 최초였다고 밝히고 있다.

기마민족설은 「쇼와의 전설」이 되었지만, 에가미의 학자로서의 진가는 일본 고고학에 해외조사라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갖는다.


  •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는 「불새 여명편」에서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을 채용하였다.
  • 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는 에가미와 자주 대담을 가졌다.
  •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는 에가미 나미오를 “몹시 경애하는 사람”이라 칭했다.
  • 역사학자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郎)는 기마민족설을 검증한 끝에 가와치 정권론(河内政権論)을 제창하였다.
  • 고고학자 미즈노 유가 제창한 왕조 교체설은 기마민족설의 영향을 받은 점이 지적되며 「네오 기마민족설」이라 불리고 있다.
  • 오오쓰카 하쓰시게(大塚初重)는 에가미 나미오의 죽음에 대해 “일본의 고고학을 세계에 알리는데 선생만큼 기여한 사람이 없다."라고 말했다.
  • 히타치노미야는 궁중에서 에가미를 보고 "기마민족의 에가미 선생님이시군요"라고 말을 걸었다.[18]
  •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이 공식 방일했을 때, 궁중 만찬회에서 쇼와 천황은 "6, 7세기의 일본 국가 형성 시에 한반도로부터 매우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는 에가미 학설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있다.[29]

5. 1. 한일 관계에 대한 시사점

에가미 나미오가 제창한 기마민족 정복왕조설(기마민족설)은 일본 고대 국가의 기원을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에게서 찾으려는 학설이었다. 이 학설은 1948년에 발표되어 일본 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23] 많은 연구자들이 이 학설을 비판했는데, 특히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사서 어디에도 대규모 민족 이동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과[24]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25]

에가미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학설을 수정하고 보강했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기마민족설을 의문시하는 태도가 더 강했다. 그러나 이 학설은 일반에 널리 유포되었는데, 패전 후 황국사관의 속박에서 벗어난 언론이 이 학설을 적극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이다.[26]

기마민족설은 결국 정설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일본 고대사에 대한 가설로서 학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오늘날까지도 종종 회자되고 있다. 이 학설은 일본 고고학에 해외조사라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갖는다.

6. 소속 단체 및 역임 직책

직책
도쿄부(東京府) 부립(府立)제5중학, 구제 우라와 고등학교 졸업[1]
1930년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 졸업[2], 동아고고학회 연구원
1931년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学院) 연구원[4]
1948년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
1962년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1967년 도쿄 대학 명예 교수
1973년 다마 미술 대학 강사, 다마 미술 대학 문양연구소 연구원[5]
1977년 고대 오리엔트 박물관 관장
일본 오리엔트 학회 회장
일본 몽골 친선 협회 회장
나라 실크로드 박람회 학식 위원장
리틀월드 인간 박물관장


7. 저서

에가미 나미오는 광범위한 주제에 걸쳐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주요 단독 저서'''


  • ユラシア古代北方文化|유라시아 고대 북방 문화일본어 (산카와 출판사, 1950년)
  • 騎馬民族国家|기마 민족 국가일본어 (주오코론신서, 1967년, 1991년 개정판, 주오코론 문고, 1984년)
  • 皇仁始草|환인 시초일본어 (세카이분카샤, 1975년, 다이코샤, 1996년)
  • 学問の探検|학문의 탐험일본어 (고세이 출판사, 1985년) - 회상기
  • 江上波夫の日本古代史騎馬民族説45年|에가미 나미오의 일본 고대사 기마 민족설 45년일본어 (다이코샤, 1992년)
  • 学問と夢と騎馬民族 私の履歴書|학문과 꿈과 기마 민족 나의 이력서일본어 (일본경제신문 출판사, 1995년)
  • 江上波夫の蒙古高原横断記|에가미 나미오의 몽골 고원 횡단기일본어 (이케우치 오사무 편・해설, 5월 서방, 1997년)
  • オロン・スム遺跡調査日記|오론・스무 유적 조사 일기일본어 (에가미 야스시 편, 산카와 출판사, 2005년)


'''주요 공저 및 편저'''

  • 《북아시아사 세계 각국사 12》 (야마카와 출판사, 1956년, 신판 1965년)
  • 《세계사》 무라카와 켄타로・야마모토 타츠로・하야시 켄타로 공저 (야마카와 출판사, 1952년, 1964년부터 《상세 세계사》)
  • 《일본 고대 문화의 성립》우에다 마사아키와 공편 (마이니치 신문사, 1973년)
  • 《논집 기마 민족 정복 왕조설》 공저 (다이와 서방, 1975년)
  • 《시민 강좌・일본 문화 입문》 공편 (요미우리 신문사, 1975~76년)
  • 《대론 기마 민족설》모리 코이치와 공저 (도쿠마 서점, 1982년)
  • 《문명 이전 동서 문명을 대비하다》이토 슌타로와 공저 (주오코론 신사, 1984년)
  • 《중앙 아시아사 세계 각국사 16》 (야마카와 출판사, 1987년)
  • 《꿈 만년-성수 전설》 감수 (고단샤, 1988년)
  • 《동양학의 계보》, 《- 제2집》 (다이슈칸 서점, 1992-94년)
  • 《기마 민족은 왔는가? 안 왔는가?》사하라 마코토와 공저 (쇼가쿠칸, 1990년, 신판 2003년)
  • 《일본 민족의 원류》 편저 (고단샤 학술 문고, 1995년)
  • 《몽골 제국과 기독교》(후쿠하라 요코 역, 상파울루, 2000년). 일본어・영문 저작


'''저작집'''

  • '''에가미 나미오 저작집''' 전 12권·별권 (헤이본샤, 1984~1986년)


제목
1고대와 현대의 대화
2문명의 기원과 그 성립
3오리엔트 세계
4동서 교섭사화
5성서 전설과 점토판 문명
6기마 민족 국가
7일본인이란 무엇인가
8왜인의 나라에서 야마토 조정으로
9아시아의 민족과 문화의 형성
10내륙 아시아의 자연과 문화
11미술의 탄생
12역사·인간·여행
별권환인시초 나의 성장 기록


  • '''에가미 나미오 문화사 논집''' 전 8권 (야마카와 출판사, 1999~2001년)


제목
1고대 일본의 민족과 국가
2동아시아 문명의 원류
3흉노의 사회와 문화
4북아시아 제 민족의 역사와 문화
5유목 문화와 동서 교섭사
6문명의 원점 오리엔트
7세계의 고고학
8인류사의 구상


7. 1. 주요 단독 저서


  • ユラシア古代北方文化|유라시아 고대 북방 문화일본어 (산카와 출판사 1950년)
  • 騎馬民族国家|기마 민족 국가일본어 (주오코론신서 1967년, 1991년 개정판, 주오코론 문고 1984년)
  • 皇仁始草|환인 시초일본어 (세카이분카샤 1975년, 다이코샤 1996년)
  • 学問の探検|학문의 탐험일본어 (고세이 출판사 1985년) - 회상기
  • 江上波夫の日本古代史騎馬民族説45年|에가미 나미오의 일본 고대사 기마 민족설 45년일본어 (다이코샤 1992년)
  • 学問と夢と騎馬民族 私の履歴書|학문과 꿈과 기마 민족 나의 이력서일본어 (일본경제신문 출판사 1995년)
  • 江上波夫の蒙古高原横断記|에가미 나미오의 몽골 고원 횡단기일본어 (이케우치 오사무 편・해설, 5월 서방 1997년)
  • オロン・スム遺跡調査日記|오론・스무 유적 조사 일기일본어 (에가미 야스시 편, 산카와 출판사 2005년)

7. 2. 주요 공저 및 편저


  • 《북아시아사 세계 각국사 12》 (야마카와 출판사 1956년, 신판 1965년)
  • 《세계사》 무라카와 켄타로・야마모토 타츠로・하야시 켄타로 공저 (야마카와 출판사 1952년, 1964년부터 《상세 세계사》)
  • 《일본 고대 문화의 성립》우에다 마사아키와 공편 (마이니치 신문사 1973년)
  • 《논집 기마 민족 정복 왕조설》 공저 (다이와 서방 1975년)
  • 《시민 강좌・일본 문화 입문》 공편 (요미우리 신문사 1975~76년)
  • 《대론 기마 민족설》모리 코이치와 공저 (도쿠마 서점 1982년)
  • 《문명 이전 동서 문명을 대비하다》이토 슌타로와 공저 (주오코론 신사 1984년)
  • 《중앙 아시아사 세계 각국사 16》(야마카와 출판사 1987년)
  • 《꿈 만년-성수 전설》 감수 (고단샤 1988년)
  • 《동양학의 계보》, 《- 제2집》 (다이슈칸 서점 1992-94년)
  • 《기마 민족은 왔는가? 안 왔는가?》사하라 마코토와 공저 (쇼가쿠칸 1990년, 신판 2003년)
  • 《일본 민족의 원류》 편저 (고단샤 학술 문고 1995년)
  • 《몽골 제국과 기독교》(후쿠하라 요코 역, 상파울루, 2000년). 일본어・영문 저작

7. 3. 저작집


  • '''에가미 나미오 저작집''' 전 12권·별권 (헤이본샤 1984~1986년)

제목
1고대와 현대의 대화
2문명의 기원과 그 성립
3오리엔트 세계
4동서 교섭사화
5성서 전설과 점토판 문명
6기마 민족 국가
7일본인이란 무엇인가
8왜인의 나라에서 야마토 조정으로
9아시아의 민족과 문화의 형성
10내륙 아시아의 자연과 문화
11미술의 탄생
12역사·인간·여행
별권환인시초 나의 성장 기록


  • '''에가미 나미오 문화사 논집''' 전 8권 (야마카와 출판사 1999~2001년)

제목
1고대 일본의 민족과 국가
2동아시아 문명의 원류
3흉노의 사회와 문화
4북아시아 제 민족의 역사와 문화
5유목 문화와 동서 교섭사
6문명의 원점 오리엔트
7세계의 고고학
8인류사의 구상


8. 기념 논집


  • 야마카와 출판사에서 1977년에 출판된 『에가미 나미오 교수 고희 기념 논집』(전 3권)이 있다.
  • 야마카와 출판사에서 1984년에 출판된 『고대 오리엔트 논집 에가미 나미오 선생님 희수 기념』이 있다.
  • 야마카와 출판사에서 1995년에 출판된 『문명학 원론 에가미 나미오 선생님 미수 기념 논집』이 있다.

9. 회상

동방학회에서 펴내고 도스이 서방에서 2000년에 출간한 『동방학 회상 Ⅷ 학문의 추억〈3〉』에서 고 마사오, 하야시 토시오 등과 좌담회를 가졌다.[4]

참조

[1] 서적 "[https://dl.ndl.go.jp/info:ndljp/pid/1464007/123 浦和高等学校一覧 第6年度(自昭和2年至昭和3年)]" 浦和高等学校
[2] 간행물 "『官報』第1000号、昭和5年5月3日、p.76" https://dl.ndl.go.jp[...]
[3] 뉴스 江上波夫と内モンゴルのオロン・スム遺跡調査 http://www.eurasia.c[...] 2019-09-10
[4] 서적 "[https://dl.ndl.go.jp/info:ndljp/pid/1438532/13 東方文化学院一覧]" 東方文化学院
[5] 웹사이트 http://www.shiro1000[...]
[6] 웹사이트 "江上波夫先生旧蔵ユーラシアコレクション" http://umdb.um.u-tok[...] 西秋良宏
[7] 서적 図録 文字から見る歴史と文化 江上波夫蒐集品を中心に 山川出版社
[8] 서적 江上志馬雄、江上恒之 https://dl.ndl.go.jp[...] 帝国秘密探偵社
[9] 서적 江上定雄 https://jahis.law.na[...] 人事興信録
[10] 서적 江上恒之 https://jahis.law.na[...] 人事興信録
[11] 서적 江上恒之君 https://dl.ndl.go.jp[...] 橋本白水 南国出版協会
[12] 뉴스 読売新聞 2002-11-16
[13] 서적 騎馬民族国家 中公新書
[14] 인용
[15] 뉴스 朝日新聞 2002-11-16
[16] 웹사이트 엔카르타 백과사전 https://megalodon.jp[...]
[17] 서적 日本古代史大辞典 大和書房
[18] 기타 佐原真との対談「騎馬族は来た?来ない?」ほか
[19] 웹사이트 長七と藤村の浅からぬ因縁 http://shiyu-dosokai[...] 紫友同窓会 2018-08-15
[20] 서적 騎馬民族は来なかった NHK出版 1993-09-01
[21] 간행물 森安通信 http://www.let.osaka[...] 大阪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東洋史学研究室 2020-09
[22] 서적 기마민족국가 주고신서(中公新書)
[23] 인용
[24] 서적 『전망 아시아의 고고학 ― 히구치 다카야스 교수관 기념 논집』 신쇼사(新潮社)
[25] 서적 『고분 시대의 연구 13』
[26] 인용
[27] 서적 『일본대백과전서』
[28] 기타
[29] 서적 기마민족은 왔는가 오지 않았는가 쇼카쿠칸(小学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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