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레 바스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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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토레 바스티코는 이탈리아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여러 계급을 거쳐 원수까지 진급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도데카니사 제도 총독, 리비아 총독 겸 북아프리카군 사령관을 역임했으나, 에르빈 롬멜과의 갈등으로 인해 해임되었다. 전쟁 후에는 군사 역사학자 및 작가로 활동하며,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북아프리카 전역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우수한 상급 장교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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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레 바스티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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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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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76년 4월 9일 |
사망일 | 1972년 12월 2일 |
출생지 | 볼로냐, 이탈리아 왕국 |
사망지 | 로마, 이탈리아 |
충성 | 이탈리아 왕국 |
군 종류 | 이탈리아 왕국 육군 |
복무 기간 | 1896년 – 1943년 |
최종 계급 | 이탈리아 원수 |
지휘 | |
주요 참전 전투 |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크루세이더 작전 가잘라 전투 비르하킴 전투 토브룩 함락 메르사 마트루흐 전투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 엘 아게일라 전투 트리폴리 전투 (1943년) |
서훈 | |
경력 | |
직위 |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 |
임기 시작 | 1941년 7월 19일 |
임기 종료 | 1943년 2월 2일 |
군주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총리 | 베니토 무솔리니 |
이전 | 이탈로 가리볼디 |
다음 | 조반니 메시 (대행) |
존칭 접두사 | Maresciallo d'Italia |
지휘 | 포 강 군 |
2. 생애
에토레 바스티코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1928년 준장, 1932년 소장으로 진급하며 군 경력을 이어갔다.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에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과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40년 도데카니사 제도 총독을 거쳐 1941년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 겸 북아프리카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에르빈 롬멜과의 잦은 갈등을 겪었고, 1942년 롬멜과의 계급 균형을 위해 원수로 진급했다. 엘 알라메인 전투 패배 후 1943년 리비아 총독직에서 경질되었다.
전후에는 군사 역사학자 및 작가로 활동했으며, 1957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을 받았다. 1972년 로마에서 96세로 사망했으며, 이탈리아 왕국 육군 원수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에토레 바스티코는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되자 이탈리아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28년 준장(generale di brigata)으로 진급했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통치를 받았다. 1932년 5월 29일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1935년에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동안 제1 CC.NN. 사단 "23 마르초"를 지휘했다. 1935년, 바스티코는 제3군단의 에티오피아 사령관이었으며, 1936년 2월 10일 중장(generale di corpo d'armata)으로 진급했다. 1936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제2군단의 사령관이었다.1937년, 스페인 내전 후반에 바스티코는 마리오 로아타를 대신하여 스페인 주둔 이탈리아 의용군인 ''Corpo Truppe Volontarie''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CTV는 스페인 국민파 측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937년 중반부터 바스티코의 부대는 산탄데르 전투에서 싸웠으며, 이 전투는 국민파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1937년 말, 바스티코는 마리오 베르티로 교체되었다. 1937년 10월, 바스티코는 이탈리아가 공식적으로 전쟁 중이 아닐 경우 부여될 수 있는 최고 계급인 "generale di corpo d'armata designato d'armata"의 장군 계급을 받았다. 1939년 2월, 이탈리아 의용군은 스페인에서 철수했다.
2. 2. 파시스트 정권 하의 군 경력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28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32년에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35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제1검은 셔츠 군단(3월 23일 군단)의 사령관을 맡았고, 1937년 스페인 내전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용병들이 결성한 의용군 군단(Corpo Truppe Volontarie)의 사령관을 맡았다.[1]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0년 8월 7일 도데카니사 제도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1941년 7월 19일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 겸 이탈리아령 북아프리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 군 사령관이었던 에르빈 롬멜과 대립이 많았다. 1942년 8월 12일 원수로 진급했다. 엘 알라메인 전투에 참전했지만 롬멜의 패배와 영국군이 리비아를 완전히 점령하기 직전 1943년 2월 2일 경질되었다.
볼로냐에서 태어난 바스티코는 성년이 되자 이탈리아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28년 준장(generale di brigata)으로 진급했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통치를 받았다.
1932년 5월 29일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1935년에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동안 제1 CC.NN. 사단 "23 마르초"를 지휘했다. 같은 해 제3군단의 에티오피아 사령관이었으며, 1936년 2월 10일 중장(generale di corpo d'armata)으로 진급했다.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제2군단 사령관이었다.
1937년, 스페인 내전 후반에 마리오 로아타를 대신하여 스페인 주둔 이탈리아 의용군 ''Corpo Truppe Volontarie'' 총사령관이 되었다. CTV는 스페인 국민파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937년 중반부터 바스티코의 부대는 산탄데르 전투에서 싸웠으며, 이 전투는 국민파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1937년 말, 바스티코는 마리오 베르티로 교체되었다. 같은 해 10월, 이탈리아가 공식적으로 전쟁 중이 아닐 경우 부여될 수 있는 최고 계급인 "generale di corpo d'armata designato d'armata" 장군 계급을 받았다. 1939년 2월, 이탈리아 의용군은 스페인에서 철수했다.
이후 제2군에 배속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 계곡 지역에 주둔한 새로운 기동 제6군 "포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이탈리아 왕국 상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을 때, 에게해 이탈리아령 섬(도데카네스 제도) 지사였으며, 1940년 8월 7일 정식 장군(Generale d'Armata)으로 진급했다.
1941년 7월 19일, 이탈리아 리비아 총독이자 북아프리카 모든 추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에르빈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롬멜의 계획은 먼저 바스티코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1942년 2월, 리비아와 이탈리아 유대인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된 자이도 강제 수용소 사령관이 되었다.
바스티코는 1942년 8월 12일 이탈리아 원수(Maresciallo d'Italia)로 진급했는데, 이는 주로 롬멜이 6월 22일 원수(Generalfeldmarschall)로 진급하여 바스티코보다 계급이 낮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리비아가 영국 제8군 진격으로 손실되었을 때, 1943년 2월 2일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휘관 없이 남겨졌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0년 8월 7일 도데카니사 제도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1941년 7월 19일에는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 겸 이탈리아령 북아프리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렇지만 나치 독일의 군 사령관이었던 에르빈 롬멜과의 대립이 많았다.[1] 1942년 8월 12일에는 원수로 진급했다. 엘 알라메인 전투에 참전했지만 롬멜의 패배와 영국군들이 리비아를 완전히 점령 직전 1943년 2월 2일에 경질되고 만다.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을 때, 바스티코는 에게해 이탈리아령 섬(도데카네스 제도)의 지사였으며, 1940년 8월 7일 정식 장군 (Generale d'Armata)으로 진급했다.
1941년 7월 19일, 바스티코는 이탈리아 리비아의 총독이자 북아프리카의 모든 추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에르빈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공식적으로 이탈리아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롬멜의 계획은 먼저 바스티코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바스티코는 1942년 2월에 리비아와 이탈리아 유대인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된 자이도 강제 수용소의 사령관이 되었다.
바스티코는 1942년 8월 12일 이탈리아 원수 (Maresciallo d'Italia)로 진급했는데, 이는 주로 롬멜이 6월 22일 원수 (Generalfeldmarschall)로 진급하여 바스티코보다 계급이 낮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리비아가 영국 제8군의 진격으로 인해 손실되었을 때, 1943년 2월 2일부터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휘관 없이 남겨졌다.
2. 4. 전후 활동
바스티코는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아프리카 상실이 눈앞에 다가온 1943년 2월에 리비아 총독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종전까지 군무에 종사하지 않았다.[1]전후에는 군사 역사학자이자 작가로 활동했으며, 1957년에는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1972년 로마에서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탈리아 왕국 육군 원수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3. 군사적 평가
1970년대까지 바스티코에 대한 평가는 처참했다. 바스티코와 같은 시기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함께 싸운 롬멜이 '유능한 독일 군인'으로 신격화되면서 롬멜과 대립했던 바스티코는 수구적이고 무능한 이탈리아 군 장군의 전형적인 예로 폄하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구데리안, 만슈타인 등 다른 독일군 장교들의 회고록에서 이탈리아군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가 장교에서 병사에 이르기까지 나약하고 군비도 빈약하다는 평가를 내린 것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군사사 연구에서 독일군의 재검토가 진행되고, 롬멜의 전략 입안 능력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위와 같은 평가는 크게 수정되었다. 구체적으로, 당시 북아프리카에 축적된 물자 데이터 등을 검토한 결과, 보급 및 작전 지원 관점에서 엘 알라메인으로의 진격을 반대했던 바스티코, 카발레로, 케셀링의 시각은 타당하다고 지적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바스티코는 현재 북아프리카라는 전장을 잘 이해하고 보급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인식했던 우수한 상급 장교로 재평가되고 있다.
4. 저서
- Il 3° Corpo d'Armata di ferro in Africa Orientale|아프리카 동부의 철의 제3군단it (1937)
- Evoluzione dell'arte della guerra|전쟁 기술의 진화it (1930)
5. 서훈
훈장 이름 | 수여 날짜 |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기사 | 1957년 6월 2일 |
사보이 군사 훈장 대십자 기사 (대장교: 1939년 5월 1일; 사령관: 1936년 7월 9일) | 1942년 2월 17일[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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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 승리 메달 | |
스페인 군사 공로 십자장 | |
프랑스 전쟁 십자장 (1914-1918) | |
독일 십자장 금장 | 1942년 12월 5일[2] |
참조
[1]
서적
The Command of the Air
Office of Air Force History, Washington, D.C.
[2]
서적
2001
[3]
서적
伊和中辞典
小学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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