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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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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겐의 난은 1335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에 반기를 들고 일으킨 내란이다. 다카우지는 겐무 신정에서 소외된 후, 호조씨 잔당의 난을 진압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후 교토를 점령하고 고다이고 천황을 히에이 산으로 몰아낸다. 다카우지는 고곤 천황을 옹립하고 무로마치 막부 성립의 기반을 마련했지만,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에서 남조를 세우면서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엔겐의 난은 무가 정권의 확립과 남북조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일본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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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겐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전투 명칭겐무의 난
전역겐무의 난
시기선명력: 겐무 2년 11월 19일 - 엔겐 원년/겐무 3년 10월 10일
율리우스력: 1336년 1월 2일 – 1336년 11월 13일
장소일본
결과아시카가 가문의 승리
무로마치 막부 성립
남북조 시대의 혼란
교전 세력
교전 대상 1[[파일:Imperial Seal of Japan.svg|20px]] 겐무 정권
교전 대상 220px 아시카가 씨
지휘관 및 지도자
겐무 정권 지휘관[[파일:Imperial Seal of Japan.svg|20px]] 고다이고 천황
존료 친왕
[[파일:Japanese Crest Nitta hitotu Hiki.svg|20px]] 닛타 요시사다
[[파일:Japanese crest Kikusui.svg|20px]] 구스노키 마사시게
[[파일:Sasa Rindō inverted.png|20px]]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기쿠치 다케토시
아시카가 가문 지휘관[[파일:Imperial Seal of Japan.svg|20px]] 고곤 상황
20px 아시카가 다카우지
사사키 다카우지
아카마쓰 노리무라
쇼니 요리히사
규모
규모 (교전 대상 1)알 수 없음
규모 (교전 대상 2)알 수 없음
피해 규모
피해 (교전 대상 1)알 수 없음
피해 (교전 대상 2)알 수 없음

2. 겐무 신정

1333년 고다이고 천황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리고 복귀하면서, 겐무 신정이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었다.[1]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막부 타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무사 가문 출신으로, 종사위하에 서임되고 친수부 장군, 좌효에노카미에 임명되었으며, 무사시 국, 시모사 국, 히타치 국 3개 지행국과 30곳의 영지를 받았다. 또한 고다이고 천황의 이름(尊治)에서 한 글자를 받아 尊氏(다카우지)로 개명했다. 그러나 다카우지는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를 나리요시 친왕의 보좌역으로 가마쿠라에 파견하고,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인 고노 모로요리와 그의 동생 모로야스 등 주요 중신들을 참여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신정(겐무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카우지가 신정권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이 퍼졌고, 세상 사람들은 이를 "존씨(尊氏) 없음"이라고 칭했다.

모리나가 친왕은 다카우지의 이러한 태도에 위기감을 느껴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1334년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가마쿠라의 다다요시에게 유폐되었다.

2. 1. 겐무 신정의 개혁 정치

고다이고 천황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리고 복귀한 후, 겐무 신정이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를 시작했다.[1]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막부 타도에 큰 공을 세워 높은 관직과 영지를 받았지만, 신정권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1]

겐무 정권은 고다이고 천황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혼란을 겪으며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2] 1335년에는 천황 암살 음모가 발각되고,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를 옹립한 나카센다이의 난이 일어났다.[2] 다카우지는 이 난을 진압하고 가마쿠라를 회복했지만, 독자적인 무가 정권 창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2]

1335년 11월 18일,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를 군주의 간신이라며 토벌을 요청했지만,[1] 다음 날 고다이고 천황은 오히려 다카우지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요시사다에게 토벌 명령을 내렸다.[2] 이로써 겐무의 난이 시작되었다.[2]

2. 2. 겐무 신정의 한계와 혼란

겐무 신정고다이고 천황의 이상과는 달리 여러 한계와 혼란을 드러냈다. 신정은 무사 계층의 불만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고, 특히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신정에서 소외감을 느꼈다.[1] 다카우지는 겐무 신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나리요시 친왕의 보좌역으로 가마쿠라에 파견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신정의 중책을 맡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다카우지가 신정권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이 퍼졌고, 세상 사람들은 이를 "존씨(尊氏) 없음"이라고 칭했다.

모리나가 친왕은 다카우지의 이러한 태도에 위기감을 느껴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1334년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가마쿠라의 다다요시에게 유폐되었다.

겐무 정권은 고다이고 천황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혼란이 계속되었고, 백성들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 1335년 전 간토 모신지 사이온지 킨무네와 호조 씨 잔당의 천황 암살 음모가 발각되었고, 시나노 국에서는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를 옹립한 나카센다이의 난이 일어났다. 다다요시는 이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모리나가 친왕을 살해한 후 가마쿠라를 탈출했고, 도키유키 군은 가마쿠라를 점령했다.

다카우지는 다다요시를 구하기 위해 가마쿠라로 향하려 했으나, 고다이고 천황에게 세이이타이쇼군 임명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1335년 8월 2일, 다카우지는 천황의 허락 없이 군사를 일으켜 다다요시와 합류, 도키유키 군을 격파하고 8월 19일 가마쿠라를 되찾았다.

다카우지는 다다요시의 권유에 따라 가마쿠라에 머무르며 독자적인 무가 정권 수립을 모색했다. 1335년 11월 18일,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를 군주의 간신으로 규정하고 고다이고 천황에게 토벌을 요청했다.[1] 그러나 다음 날인 11월 19일(1336년1월 2일), 고다이고 천황은 오히려 다카우지의 행동을 반역으로 간주하고 요시사다에게 소랴쿠 친왕과 함께 도카이도를 통해 다카우지를 토벌할 것을 명령하면서 엔겐의 난이 시작되었다.[2]

3. 겐무의 난

1335년 12월 11일 (음력) 하코네・타케노시타 전투에서 닛타군을 격파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로 진격을 시작했다. 다카우지는 지묘인통고곤 상황과 연락하여 닛타 요시사다 토벌의 원선을 얻으려 했다. 이는 반란의 오명을 피하고 자신의 거병에 정통성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다헤이키』, 『바이쇼론』 등은 평가한다.[2]

1336년 1월 11일 (음력) 다카우지는 교토에 입성했고,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반격으로 1월 27일 (음력)부터 1월 30일 (음력)에 걸쳐 교토와 그 주변에서 공세에 노출된다. 1월 30일 (음력) 전투에서 패배한 다카우지는 탄바 국 시노무라 하치만구로 철수했고, 2월 2일 (음력)에는 셋쓰 국 효고로 이동하여 서국의 원군을 얻어 교토 탈환을 꾀했다. 하지만 2월 11일 (음력) 도요시마 강변 전투에서 닛타군에게 대패하면서 전략은 붕괴된다. 다카우지는 효고에서 하리마 국 무로츠로 물러나 아카마츠 노리무라(엔신)의 진언을 받아들여 규슈로 향했다.

규슈로 내려가는 도중 2월 20일 (음력) 나가토 국아카마세키에서 쇼니 요리히사에게 영접받고 규슈에 들어갔다. 지쿠젠 국무나카타 대사의 무나카타 우지노리, 분고 국의 오토모 우지야스 등도 이에 참가했다. 이 시기 교토에서는 연호를 "엔겐"으로 개원했지만, 다카우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건무"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 3월 2일 (음력)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키쿠치 다케토시를 격파하고 규슈 각지의 고다이고 천황 측을 공략한 다카우지는 교토로 향할 결의를 굳혔다.

4월 3일 (음력) 하카타를 출발한 다카우지는 5월 3일 (음력) 이쓰쿠시마에서 고곤 상황의 사자인 산포인 켄준으로부터 원선을 받았다. 5월 5일 (음력) 토모에 도착할 무렵에는 원선 수여 소식을 들은 서국 무사들을 급속히 산하에 모아들였다. 다카우지는 나오요시에게 육로로 아카마쓰 엔신이 닛타 요시사다에게 포위당하고 있는 시라하타 성으로 향하게 하고, 자신은 해로로 교토로 향했다. 5월 18일 (음력) 나오요시 군의 접근을 안 닛타 요시사다는 시라하타 성 포위를 풀고 효고로 철수했다.

5월 25일 (음력)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아시카가 군은 닛타・구스노키 군을 격파하고, 구스노키 마사시게 형제는 자결했다. 5월 27일 (음력) 고다이고 천황은 다시 히에이 산으로 피신했고, 지묘인통고곤 상황도 동행을 강요받았다. 고곤 상황은 병을 핑계로 교토로 돌아와 6월 14일 (음력) 입경한 다카우지를 받들어 도지에 들어갔다.

3. 1.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란

1333년 겐코의 난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을 시작하면서, 다카우지는 도막의 1등 공신으로 큰 영지와 권력을 얻었다.[1] 그러나 다카우지는 신정권에 참여하지 않고 동생 다다요시가마쿠라에 보내는 등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은 이를 "다카우지 없음"이라 칭하며 불안해했고, 모리나가 친왕은 다카우지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334년 가마쿠라에 유폐되었다.

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이 일어나자,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세이이타이쇼군 임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다카우지는 칙허 없이 군대를 이끌고 가마쿠라로 향했다.

3. 1. 1. 나카센다이의 난

1335년 시나노 국에서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도키유키를 옹립한 호조 씨 잔당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나카센다이의 난이라 한다. 다다요시는 이를 막지 못하고 모리나가 친왕을 몰래 살해한 후 가마쿠라를 탈출했고, 도키유키 군은 가마쿠라에 들어갔다. 다카우지는 다다요시를 구하기 위해 고다이고 천황에게 세이이타이쇼군 임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8월 2일 칙허 없이 군대를 이끌고 가마쿠라로 향했다. 다카우지는 8월 19일 가마쿠라를 탈환했다.[1]

3. 1. 2. 다카우지의 가마쿠라 점령과 독자 행동

다카우지는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고 1335년 8월 19일에 가마쿠라를 회복했다.[1] 그는 타다요시의 권고에 따라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두고 독자적인 무가 정권 창시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18일,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를 군주의 간신으로 규정하고 후시미 천황에게 요시사다 토벌을 요청했다.[1]

3. 2. 겐무의 난 전개

1333년 겐코의 난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을 시작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막부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종사위하에 서임되고 친수부 장군, 좌효에노카미에 임명되는 등 큰 상을 받았으나, 신정권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모리나가 친왕이 다카우지 제거를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유폐되었다.

겐무 정권은 혼란을 겪으며 민심을 잃어갔다. 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이 발발하자, 다카우지는 세이이타이쇼군 임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독단으로 군사를 일으켜 난을 진압했다. 이후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 머무르며 독자적인 무가 정권 수립 움직임을 보였고, 1335년 11월 18일 (음력) 닛타 요시사다를 역적으로 규정하며 토벌을 요청했다.[1]

11월 19일 고다이고 천황은 오히려 다카우지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요시사다에게 토벌 명령을 내리면서 겐무의 난이 시작되었다.[2] 다카우지는 조코묘지에 갇혀 은퇴를 선언했지만, 아시카가 군이 각지에서 열세에 몰리자 고다이고 천황에게 반기를 들 것을 결의한다.

1335년 12월 11일 (음력)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닛타 군을 격파한 다카우지는 교토로 진격을 시작, 지묘인 통의 고곤 상황에게 닛타 요시사다 토벌의 원선을 얻으려 했다. 1336년 1월 11일 교토에 입성했으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와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반격으로 1월 30일 교토에서 패배하고 탄바 국 시노무라 하치만구로 철수했다.

2월 2일 셋쓰 국 효고로 이동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2월 11일 도요시마 강변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고 규슈로 피난했다. 규슈에서 세력을 회복한 다카우지는 3월 2일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키쿠치 다케토시를 격파하고, 4월 3일 하카타를 출발, 5월 3일 이쓰쿠시마에서 고곤 상황의 사자로부터 원선을 받았다. 5월 5일 토모에 도착할 무렵에는 서국의 무사들을 급속히 산하에 모아들였다.

5월 25일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닛타, 구스노키 군을 격파하고 구스노키 마사시게 형제를 자결로 몰아넣었다. 5월 27일 고다이고 천황은 다시 히에이 산으로 피신했고, 6월 14일 다카우지는 교토에 입성했다.

3. 2. 1.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

建武일본어 2년(1335년) 12월 11일,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닛타 군을 격파하고 교토로 진격을 시작했다.[1] 이때부터 다카우지는 지묘인 통의 고곤 상황과 연락하여 닛타 요시사다 토벌의 원선을 얻으려 했다. 이는 반란의 오명을 피하고 자신의 거병에 정통성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다헤이키』, 『바이쇼론』 등은 평가한다.[2]

3. 2. 2. 교토 전투와 다카우지의 규슈 이동

1336년 초,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 군을 격파하고 교토로 진격했다. 1월 11일에는 교토에 입성했고,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곧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반격으로 1월 30일 교토에서 패배하고 탄바 국 시노무라 하치만구로 철수했다.

2월 2일, 셋쓰 국 효고로 이동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2월 11일 도요시마 강변 전투에서 다시 패배했다. 결국 아카마쓰 노리무라의 진언을 받아들여 규슈로 피난했다.

규슈로 가는 도중 2월 20일 나가토 국 아카마세키에서 쇼니 요리히사의 영접을 받았고, 지쿠젠 국 무나카타 대사의 무나카타 우지노리, 분고 국의 오토모 우지야스 등도 합류했다. 3월 2일,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고다이고 천황 측의 키쿠치 다케토시를 격파하며 세력을 회복한 다카우지는 다시 교토로 향할 결심을 굳혔다.[1][2]

3. 2. 3. 다타라하마 전투

1336년 3월, 아시카가 군이 규슈에서 고다이고 천황 측의 키쿠치 타케토시를 격파한 전투이다.[2]

나카센다이의 난 이후 1335년 토키유키를 옹립한 호조 씨 잔당을 토벌하고 가마쿠라에 머무르며 독자적인 무가 정권 창시의 움직임을 보인 다카우지는 11월 18일 (음력) 닛타 요시사다를 군주의 간신이라 칭하며 후시미 천황에게 토벌을 요청한다.[1] 그러나 다음 날 후시미 천황은 반대로 다카우지 측의 움직임을 반역으로 간주, 요시사다에게 소랴쿠 친왕을 동반시켜 도카이도를 경유해 다카우지를 토벌할 것을 명한다.[2]

하코네・타케노시타 전투에서 승리하고 교토로 진격한 다카우지는 1336년 1월 11일 교토 입성에 성공하지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닛타 요시사다의 반격으로 30일 교토에서 패배, 시노무라 하치만구를 거쳐 2월 11일 셋쓰 국 도요시마 강변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며 규슈로 후퇴하게 된다.

규슈로 향하던 20일 나가토 국아카마세키에서 쇼니 요리히사의 영접을 받고 규슈에 들어간 다카우지는 무나카타 우지노리 등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회복한다. 3월 2일, 지쿠젠 다타라하마에서 고다이고 천황 측의 키쿠치 타케토시를 격파하고 규슈 각지의 고다이고 천황 측 세력을 공략하며 다시 교토로 향할 결의를 굳힌다.

3. 2. 4. 미나토가와 전투

1336년 5월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아시카가 군닛타 요시사다구스노키 마사시게 군을 격파했다.[2] 이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 형제는 자결했다.[2]

『바이쇼론』에 따르면, 구스노키 마사시게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재기와 승리를 예상하고, 닛타 요시사다를 처분하고 다카우지를 사면하도록 몰래 상주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태평기』에 따르면 시라하타 성에서 철수한 닛타 군의 소식을 들은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다시 히에이 산으로 피난하도록 부탁하고 요시사다와 자신이 다카우지 군을 협공하는 계책을 상주했지만, 조정의 체면을 중시하는 보몬 키요타다 등에게 저지당했다.

4. 무로마치 막부 성립

아시카가 다카우지1336년 11월 26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같이 곤다이나곤에 임명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가마쿠라 도노"라 칭하며 가마쿠라 쇼군의 후계자임을 선언했고,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가 실질적으로 성립되었다.[3]

4. 1. 고묘 천황 즉위와 겐무 식목 제정

고곤 상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입경한 다음 날인 엔겐 원년(1336년) 6월 15일에 치천의 군의 권한으로 앞선 엔겐 개원을 무효로 하고 연호를 겐무로 되돌렸다. 이어서 다카우지는 고곤 상황의 의향을 받아 8월 15일에 그의 동생 도요히토 친왕을 고묘 천황으로 즉위시켰다.[3] 그러나 고묘 천황에게는 삼종신기가 없었기 때문에, 히에이 산의 고다이고 천황이 소지하고 있는 삼종신기를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닛타 요시사다 군 등이 히에이 산을 지키고 있어 교토 탈환을 위한 싸움이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다카우지는 히에이 산의 고다이고 천황에게 화의를 신청했다.[3] 고다이고 천황은 몰래 닛타 요시사다에게 황태자 쓰네나가 친왕과 이복형 다카요시 친왕을 받들어 호쿠리쿠로 내려가도록 명하고, 10월 10일에 교토로 돌아왔다. 교토로 돌아온 고다이고 천황은 가잔인에 유폐되었고, 11월 2일에 고묘 천황에게 신기 양도를 강요받아 "태상 천황"의 존호를 받았다.[3] 그 직후인 11월 7일, 다카우지는 겐무 식목 17조를 정하고 새로운 무가 정권의 기본 방침을 정했다.[3]

4. 2. 남북조 시대의 시작

고곤 상황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입경한 다음 날인 1336년6월 15일에 치천의 군의 권한으로 이전의 엔겐 연호를 무효로 하고 겐무로 되돌렸다. 다카우지는 8월 15일에 고곤 상황의 동생 도요히토 친왕을 고묘 천황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고묘 천황은 삼종신기가 없었기 때문에, 히에이 산에 있는 고다이고 천황이 소지한 삼종신기를 확보해야 했다.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화의를 신청했고, 고다이고 천황은 몰래 닛타 요시사다에게 황태자 쓰네나가 친왕과 다카요시 친왕을 호쿠리쿠로 보내도록 명하고, 10월 10일에 교토로 돌아왔다. 교토로 돌아온 고다이고 천황은 가잔인에 유폐되었고, 11월 2일에 고묘 천황에게 신기를 넘겨주도록 강요받아 "태상 천황"의 존호를 받았다. 11월 7일, 다카우지는 겐무 식목 17조를 제정하고 새로운 무가 정권의 기본 방침을 정했으며, 11월 26일에는 곤다이나곤에 임명되었다. 다카우지는 스스로를 "가마쿠라 도노"라고 칭하며 가마쿠라 쇼군의 후계자임을 선언, 무로마치 막부가 실질적으로 성립되었다.

그런데, 고다이고 천황은 12월 21일에 유폐되어 있던 가잔인을 탈출하여 야마토국가나요를 거쳐 산속으로 도망쳤다. 12월 28일에는 요시노깃스이인을 안궁으로 정하고, 도요히토 친왕에게 양도한 삼종신기는 가짜이며 진짜 신기는 자신이 요시노에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하며 독자적인 조정(남조)을 수립했다. 동시에 닛타 요시사다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에게 다시 다카우지 토벌을 명했다.

이로써 이후 60년 가까이 이어지는 남북조 내란이 시작되었다.

5. 난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

엔겐의 난은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 붕괴와 무로마치 막부 성립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난으로 인해 일본은 약 60년간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고곤 상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교토에 입성한 다음 날인 1336년 6월 15일, 치천의 군의 권한으로 이전의 엔겐 연호를 무효로 하고 겐무로 되돌렸다.[3]

5. 1. 무가 정치의 확립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곤 상황의 의향을 받아 엔겐 원년 11월 7일 겐무 식목 17조를 제정하여 새로운 무가 정권의 기본 방침을 정했다.[3] 11월 26일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같은 곤다이나곤에 임명되었다.[3] 다카우지는 스스로를 "가마쿠라 도노"라 칭하며 가마쿠라 쇼군의 후계자임을 선언했고,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가 실질적으로 성립되었다.[3]

5. 2. 남북조 시대의 혼란과 그 이후

고다이고 천황1336년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남조를 세우면서, 일본은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다.[3] 고다이고 천황은 고묘 천황에게 양도한 삼종신기는 가짜이며, 진짜는 자신이 요시노에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이후 약 60년간 남북조 내란이 이어졌으며, 1392년 (메이토쿠 3년) 메이토쿠의 화약으로 남북조가 통일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428년 (쇼초 원년) 지묘인통계의 쇼코 천황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다이카쿠지통 계열의 사람들, 즉 후남조 세력은 양통 립립 원칙에 따라 자신들이 천황을 배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 제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고코곤 천황의 증손 고하나조노 천황을 즉위시켰다.

이에 반발한 후남조 세력은 1443년 (가키 3년) 킨켓의 변을 일으켜 고하나조노 천황 암살을 시도하고 어소에 난입, 삼종 신기 중 검과 야사카니노 마가타마를 탈취하여 히에이 산으로 달아났다. 검은 곧 탈환되었지만, 야사카니노 마가타마는 이후 14년간 후남조가 소지했다.

1457년 (초로쿠 원년), 아카마쓰 씨는 후남조 세력을 기습하여 지도자 형제를 살해하고 야사카니노 마가타마를 일시 탈환했다. 이후 야사카니노 마가타마는 요시노 백성들에 의해 다시 빼앗겼으나, 1458년 (초로쿠 2년) 아카마쓰 씨의 재차 습격으로 결국 후남조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초로쿠의 변). 이 사건을 계기로 후남조는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이후 후남조의 후예들은 오닌・분메이의 난 중인 1471년 (분메이 3년) 서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옹립되거나(니시진 남제), 1479년 (분메이 11년) 7월 19일 "남방의 궁"이 에치고에서 에치젠으로 옮겨지는 등의 기록이 남아있다. 1499년 (메이오 8년)에는 호조 소운이즈국으로 유배된 "왕"을 사가미국으로 퇴거시켰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것이 남조 및 후남조에 대한 사료상의 마지막 기록으로 여겨진다.

참조

[1] 문서 大日本史料』6編2冊695–704頁 https://clioimg.hi.u[...]
[2] 문서 大日本史料』6編2冊705–713頁 https://clioimg.hi.u[...]
[3] 서적 後南朝史論集:吉野皇子五百年忌記念 原書房 1981-07
[4] 논문 『博多日記』の文芸性と九州の元弘の乱 2006-03
[5] 서적 日本中世史事典 朝倉書店
[6] 웹사이트 延元の乱 20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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