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연남생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연남생은 고구려의 귀족으로, 연개소문의 아들이다. 연개소문 사후 권력 다툼 끝에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 멸망에 기여했다. 그는 대막리지에 올랐으나 동생들과의 갈등으로 당나라에 의탁, 요동 지역을 함락시키고 평양을 공격했다. 당나라에서 특진 등의 벼슬을 받았으며, 679년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679년 사망 - 김천존
    김천존은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장군으로, 도살성 전투 승리, 황산벌 전투 참전, 당나라와의 협력, 백제 부흥군 진압, 당나라, 백제와의 화친, 고구려 정벌 등 다양한 공을 세웠다.
  • 679년 사망 - 다고베르투스 2세
    다고베르투스 2세는 메로빙거 왕조 출신으로 아우스트라시아의 국왕이었으며, 아일랜드로 추방되었다가 잉글랜드에서 결혼 후 복귀했으나 암살당했고, 사후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 고구려의 귀족 - 연태조
    연태조는 고구려 말기 막리지 연자유의 아들이자 막리지를 역임한 귀족으로, 수나라와의 전쟁 이후 고구려 조정 내 권력 다툼 속에서 북방파를 이끌었으며 그의 사후 아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 고구려의 귀족 - 연남건
    연남건은 연개소문의 아들이자 고구려 장군으로, 형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여 대막리지가 되었지만 강경한 대당 정책과 독단적인 통치로 귀족들의 반발을 사 결국 고구려 멸망의 원인이 되었으며, 당나라에 저항하다 패배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연남생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마자 표기Yeon Nam-saeng
출생634년
출생지고구려 요동군 평양성
사망679년 (46세)
사망지안동도호부
매장지당나라 장안 북망산
천남생 묘지
국적고구려당나라
가문
가문연씨
아버지연개소문
형제자매연남건, 연남산
자녀연헌성, 연헌충
친인척연정토
관직 (고구려)
선인642년~648년
군주고구려 보장왕
군주 칭호국왕
재상 칭호대막리지
재상연개소문
중리소형648년~651년
군주고구려 보장왕
군주 칭호국왕
재상 칭호대막리지
재상연개소문
중리대형651년~656년
군주고구려 보장왕
군주 칭호국왕
재상 칭호대막리지
재상연개소문
중리위두대형656년~661년
군주고구려 보장왕
군주 칭호국왕
재상 칭호대막리지
재상연개소문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661년~665년
군주고구려 보장왕
군주 칭호국왕
재상 칭호대막리지
재상연개소문
제2대 대막리지665년~?
전임연개소문
군주고구려 보장왕
군주 칭호국왕
관직 (당나라)
군주당 현종
봉호사지절요동대도독상주국현도군개국공(使特節遼東大都督上柱國), 변국공(卞國公)
기타 정보
남생(男生)
별호천남생(泉男生), 연구려(淵句麗)
원덕(元德)
군사 경력
소속고구려군, 당나라군
참전고구려-당 전쟁
최종 계급평양도행군대총관

2. 생애

연남생은 연개소문의 아들로, 요동군 평양성에서 태어났다. 642년(정관 16년) 아버지의 권세로 선인에 임명되었고, 648년(정관 22년) 중리소형, 651년(영휘 2년) 중리대형, 656년(현경 원년) 중리위두대형을 거쳐 657년(현경 2년)에는 장군을 겸임했다. 661년(용삭 원년)에는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 되어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압록강에서 당나라 군과 대치했으나, 계필하력에게 패하기도 했다.[1]

665년 (린덕 2년) 아버지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얼마 후, 연남생은 대막리지에 올라 고구려의 국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동생인 연남건, 연남산과의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연정토는 권력을 두고 크게 다투었다. 연남생이 얼마 동안 대막리지에 올랐으나, 연남건과 연남산이 연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연남건이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연남생을 쳤다.

이에 연남생은 패하여 국내성으로 달아나 아들 연헌성당나라에 보내 항복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고종은 연헌성을 우무위장군에 임명하고, 계필하력·방동선 등으로 하여금 연남생을 원조하도록 했다.[1]

666년(건봉 원년) 9월, 방동선이 고구려 군을 격파하자 연남생은 방동선과 합류했다. 667년(건봉 2년), 설인귀가 연남건을 격파하자 연남생은 설인귀와 합류하여 남소·목저·창암의 세 성을 함락시켰다. 고종은 서대사인 이건역을 파견하여 연남생을 위로하게 했다.[1]

668년(총장 원년), 연남생은 장안으로 들어가 당나라로부터 특진·요동대도독·평양도행군대총관·지절안무대사에 임명되었고, 현토군공에 봉해졌다. 다시 고구려로 돌아와 이적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고, 승려를 이용하여 고구려 내부를 이간질하여 보장왕을 사로잡았다. 이후 장안으로 개선하여 우위대장군으로 진급하고 변국공에 봉해졌다.[1]

677년(의봉 2년), 조서를 받아 요동 땅을 안무하고, 당나라의 주현을 설치하고 유민을 정착시키고, 부세를 공평하게 하고, 노역을 줄였으므로, 백성들은 그 관대한 통치를 기뻐했다고 전해진다.[1]

679년(의봉 4년), 연남생은 46세로 세상을 떠났고, 병주대도독의 지위가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襄)이라고 했다.[1] 그의 묘비는 형 연남건의 묘비와 함께 발견되었으며, 그의 성씨는 연(淵)이 아닌 천(泉)으로 중국에서 표기되었는데, 이는 당 고조의 이름이 연(淵)이었기 때문에 기피한 것이다.

2. 1. 출생과 가계

항목내용
증조부연자유(淵子遊)
조부연태조(淵太祚, 568~631)
조모소씨(蘇氏)
아버지연개소문(淵蓋蘇文, 614~666)
어머니고소연(高蘇淵, 드라마 연개소문) 실상 불명
숙부연정토(淵淨土)
고모연수영
동생연남건(淵男建, 635/638[2] ~ ?)
동생연남산(淵男産, 639년~701년)
아들연헌성(淵獻誠, 651~692)
아들연헌충(淵獻忠)


2. 2. 권력 장악과 형제들과의 갈등

연남생은 연개소문이 사망하기 전 대막리지에 올랐다고 전해지며, 연개소문은 대막리지 자리에서 물러나 명예직인 "대막리지"를 맡았다고 한다. 아버지 사후, 연남생은 과의 전쟁을 준비하여 요동과 왕국 전역의 다른 요새들을 시찰했다. 그는 평양을 연남건연남산에게 맡기고 떠났다. 남건과 남산은 형의 부재를 틈타 평양과 왕실을 장악했다. 그들은 남생을 반역자로 모함하고, 보장왕에게 남생의 체포를 명령하도록 강요했다.[1]

린덕 2년(665년), 연남생은 대막리지 지위에 올라 고구려 국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동생 연남건 및 연남산과 불화하여, 연남건이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연남생은 동생들을 두려워하여 국내성으로 도망쳐 거란·말갈과 결탁하고, 아들 연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갈 곳이 없어진 남생은 삼촌들의 손에서 죽음을 면한 아들의 권유로 당나라로 도망쳤다. 이후, 당나라 군대에서 높은 지위를 받았다.[1]

2. 3. 당나라 투항과 고구려 멸망

《천남생묘지명》에 따르면, 연남생은 요동군 평양성에서 태어났다. 연개소문이 세상을 뜨자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연정토는 권력 다툼을 벌였다. 연남생이 얼마 동안 대막리지에 올랐으나, 남건·남산이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남건이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남생을 쳤다. 이에 연남생은 패하여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의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어 항복하고 구원을 청하였다.[1]

668년,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연남생은 요동 지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였다. 또한 당나라 총사령관 이적과 함께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했다. 연남생은 당나라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았다. 연남생은 안동도호부에서 머물다가 그곳에서 사망한다.[1]

아버지 연개소문 사후, 연남생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여 요동과 왕국 전역의 다른 요새들을 시찰했다. 그는 평양을 연남건과 연남산에게 맡기고 떠났다. 남건과 남산은 형의 부재를 틈타 평양과 왕실을 장악했다. 그들은 남생을 반역자로 모함하고, 보장왕에게 남생의 체포를 명령하도록 강요했다. 갈 곳이 없어진 남생은 삼촌들의 손에서 죽음을 면한 아들의 권유로 당나라로 도망쳤다. 남생은 당나라 군대에서 높은 지위를 받았다.[1]

그는 그곳에서 권력을 되찾기 위해 당나라가 지원하는 고구려 원정을 이끄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원정은 결국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는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평양에 설치되어 고구려 옛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국 행정 기구인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서 사망했다. 남생은 당나라의 동쪽 수도인 뤄양의 망산에 묻혔다.[1]

린덕 2년(665년), 대막리지의 지위를 더해 고구려의 국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동생 연남건 및 연남산과 불화하여, 연남건이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연남생은 동생들을 두려워하여 국내성으로 도망쳐 거란·말갈과 결탁하고, 아들 연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고종은 연헌성을 우무위장군에 임명하고, 계필하력·방동선 등으로 하여금 연남생을 원조하도록 했다.[1]

건봉 원년(666년) 9월, 방동선이 고구려 군을 격파하자, 연남생은 방동선과 합류했다. 건봉 2년(667년), 설인귀가 연남건을 격파하자, 연남생은 설인귀와 합류하여 남소·목저·창암의 세 성을 함락시켰다. 고종은 서대사인 이건역을 파견하여 연남생을 위로하게 했다. 총장 원년(668년), 연남생은 장안으로 입조하여 특진·요동대도독·평양도행군대총관·지절안무대사에 임명되었고, 현토군공에 봉해졌다. 다시 고구려로 돌아와 이적과 함께 평양을 공격하고, 승려를 이용하여 고구려 내부를 이간질하여 보장왕을 사로잡았다.[1]

2. 4. 당나라에서의 활동과 죽음

연개소문이 세상을 뜨자 연남생은 연남건, 연남산, 연정토와 권력 다툼을 벌였다. 연남생이 얼마 동안 대막리지에 올랐으나, 남건·남산이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남건이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남생을 쳤다. 이에 남생은 패하여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의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어 항복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668년,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연남생은 요동 지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였고, 당나라 총사령관 이적과 함께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했다. 연남생은 당나라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는 당나라가 고구려 멸망 이후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서 머물다가 그곳에서 사망한다.

남생의 묘비는 그의 형 남건의 묘비와 함께 발견되었다. 남생의 성씨는 연(淵)이 아닌 천(泉)으로 중국에서 표기되었는데, 이는 당나라의 창시자이자 초대 황제인 당 고조 (이연 李淵)의 이름이 연(淵)이었고, 중국 전통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 기피되었기 때문이다.

린덕 2년(665년), 연남생은 대막리지 지위에 올라 고구려 국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동생 연남건 및 연남산과 불화하여, 연남건이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연남생은 동생들을 두려워하여 국내성으로 도망쳐 거란·말갈과 결탁하고, 아들 연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고종은 연헌성을 우무위장군에 임명하고, 계필하력·방동선 등으로 하여금 연남생을 원조하도록 했다.

건봉 원년(666년) 9월, 방동선이 고구려 군을 격파하자, 연남생은 방동선과 합류했다. 건봉 2년(667년), 설인귀가 연남건을 격파하자, 연남생은 설인귀와 합류하여 남소·목저·창암의 세 성을 함락시켰다. 고종은 서대사인 이건역을 파견하여 연남생을 위로하게 했다. 총장 원년(668년), 연남생은 장안으로 입조하여 특진·요동대도독·평양도행군대총관·지절안무대사에 임명되었고, 현토군공에 봉해졌다. 다시 고구려로 돌아와 이적과 함께 평양을 공격하고, 승려를 이용하여 고구려 내부를 이간질하여 보장왕을 사로잡았다. 장안으로 개선한 뒤, 우위대장군으로 진급하고, 변국공에 봉해졌다.

의봉 2년(677년), 조서를 받아 요동 땅을 안무하고, 당나라의 주현을 설치하고 유민을 정착시키고, 부세를 공평하게 하고, 노역을 줄였으므로, 백성들은 그 관대한 통치를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의봉 4년(679년), 연남생은 46세로 세상을 떠났고, 병주대도독의 지위가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襄)이라고 했다.

3. 연남생에 대한 평가

연남생에 대한 평가는 현재 남아있는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하게 내리기 어렵다.

4. 대중 문화에서의 등장



하위 섹션 내용과 중복되므로, 영화 부분만 간략하게 남기고 드라마 관련 내용은 모두 제거함.

4. 1. 드라마

4. 2. 영화

참조

[1] 서적 The Silk Road Encyclopedia Seoul Selection
[2]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