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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베르투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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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고베르투스 2세는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 출신으로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의 국왕이었다. 그는 다고베르트 1세의 손자이자 지게베르트 3세의 아들로, 어린 시절 납치되어 아일랜드로 추방되었다. 이후 잉글랜드에서 결혼하고 아우스트라시아 왕위 복귀를 시도하여 성공했으나, 중앙집권 정책과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암살되었다. 그는 사후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그의 삶과 통치는 다양한 논란과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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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베르투스 2세
기본 정보
칭호프랑크의 왕
다고베르투스 2세의 금화 트레미시스
통치
계승아우스트라시아의 왕
통치 기간675/6–679년
이전클로비스 3세
계승자테우데리히 3세
상세 정보
아버지지게베르트 3세
어머니힘네힐트
사망일679년
성인 정보
축일12월 23일
숭배 대상가톨릭 교회

2. 생애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아우스트라시아 분국 왕이다.[2] 지게베르트 3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 사후 651년 또는 656년경 궁재 그리모알드에 의해 강제로 삭발당하고 아일랜드로 추방되어 오랜 망명 생활을 했다.[2][5] 그리모알드는 자신의 아들 힐데베르트를 왕위에 앉혔다.[4][6]

망명지에서 요크의 주교 윌프리드 등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5] 675년 킬데리크 2세 암살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676년경 아우스트라시아 왕위를 되찾았다.[2][10]

왕위에 오른 다고베르트 2세는 질서 회복과 중앙집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이는 귀족 세력 및 교회와의 갈등을 유발했다.[9][11] 특히 유력 귀족 피핀 2세와 대립했으며,[11] 이웃 네우스트리아의 테우데리크 3세와도 전쟁을 벌였다.

결국 왕권 강화 정책에 반감을 품은 세력, 특히 피핀 2세가 배후로 의심되는 음모에 의해 679년 12월 23일 사냥 중 암살당했다.[11][12][13] 그의 죽음은 메로빙거 왕조의 실권이 궁재에게 넘어가는 과정을 가속화시켰다.[6] 사후 순교자로 여겨져 스테네 지역에서 추앙받았다.

2. 1. 소년기 및 망명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 출신의 군주인 다고베르트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의 왕이었다.[2] 그는 다고베르트 1세(재위 623–639)의 손자이자 지게베르트 3세(재위 632–651/6)의 아들이다. 지게베르트 3세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지게베르트의 유일한 정식 부인으로 알려진 킴네힐드의 아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킴네힐드의 딸인 빌리힐드와는 이복 남매 관계였다. 이름은 할아버지 다고베르트 1세에게서 따왔다.

727년경 작성된 ''프랑크족의 역사서''에 따르면, 아버지 지게베르트 3세가 사망하자(사망 시점은 656년 또는 651년으로 추정됨), 당시 궁재로서 왕국 내 최고 권력자였던 그리모알드[3]는 어린 다고베르트를 납치했다. 그리모알드는 다고베르트가 죽었다고 거짓 보고를 올리고, 자신의 아들 힐데베르트 아돕티부스를 왕위에 앉히는 것이 선왕의 뜻이었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다고베르트의 어머니조차 아들이 죽었다고 믿게 되었다.[4]

그러나 그리모알드는 다고베르트를 직접 살해하는 것은 망설였고,[4] 비밀리에 푸아티에 주교 디도에게 맡겼다.[5] 디도는 다고베르트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잘라(삭발) 왕위 계승 자격을 박탈한 뒤(메로빙거 왕조의 군주들은 긴 머리를 유지했음), 아일랜드수도원으로 추방했다.[2][5] 이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는 그리모알드의 아들인 힐데베르트 아돕티부스(양자왕)가 차지했다.[6] 한편, 그리모알드는 훗날 네우스트리아의 클로비스 2세(재위 639–657)에게 체포되어 파리로 압송되었고, 정당한 메로빙거 왕조 군주에게 반역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다고베르트는 아일랜드로 보내져 슬레인(Slane) 수도원에서 성년이 될 때까지 머물며 교육을 받았다. 동시대 기록에는 아일랜드에서의 생활이 언급되지 않지만, 18세기 고고학자 머빈 아치달은 구전 전통을 바탕으로 그가 슬레인 수도원에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이는 일부 현대 학자들도 받아들이는 견해이다. 망명 기간 동안 그는 아일랜드의 타라 대왕 궁정을 드나들며[5] 노섬브리아 왕족 및 유력 가문의 자제들과 교류했다.

요크의 주교였던 성 윌프리드는 다고베르트와 친분을 쌓고 그의 중요한 조언자가 되었다.[5] 당시 로마 교회와 켈트 교회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는데, 윌프리드는 다고베르트가 왕위를 되찾으면 로마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을 수 있다.[5] 윌프리드의 권고로 다고베르트는 666년 켈트족 공주 마틸데와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다. 이후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로 건너가 노섬브리아 왕국의 요크에 정착했다. 670년 마틸데가 셋째 딸을 낳다가 사망하자,[7] 윌프리드의 주선으로 671년 지젤 드 라제와 재혼했다. 지젤은 서고트 왕 왐바의 누이 기슬리카와 라제 백작 베라 2세의 딸이었다. 결혼식은 지젤의 거처 근처인 렌느샤토의 생마들렌 교회에서 열렸다.[7][8] 다고베르트는 지젤과의 사이에서 두 딸과 아들 시지스베르 4세를 얻었다.[7]

다고베르트가 망명해 있는 동안 프랑크 왕국에서는 정치적 격변이 계속되었다. 662년 클로비스 2세의 둘째 아들이자 다고베르트의 이복 매제인 킬데리크 2세가 아우스트라시아 왕위에 올랐으나, 675년 왕비 빌리힐드 및 아들과 함께 암살당했다.

킬데리크 2세의 죽음은 다고베르트의 복귀 기회를 열었지만, 동시에 프랑크 왕국을 내전 상태로 몰아넣었다. 전 궁재 에브로인은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3세의 아들인 클로비스 3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으로 내세웠고, 레오데가르는 클로비스 2세의 셋째 아들 테우데리크 3세를 네우스트리아 왕위에 올렸다. 이후 에브로인이 클로비스 3세를 버리고 테우데리크 3세를 지지하면서 아우스트라시아 동맹 세력을 잃게 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고베르트는 아일랜드 망명지에서 소환되었다.

다고베르트의 귀환 과정은 8세기 초 리폰의 스테판이 쓴 윌프리드의 생애에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다고베르트의 친구들(amici|아미키la)과 친척들(proximi|프록시미la)이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윌프리드에게 연락하여 그를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를 거쳐 아우스트라시아로 데려와 달라고 요청했다. 그를 소환한 "친구"와 "친척"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친척은 어머니 쪽 가문일 수 있으며, 친구로는 킬데리크 2세 시절의 궁재 울포알드, 에르스탈의 피핀과 라옹의 마르탱, 또는 아일랜드 출신의 생-모-데-포세의 울탕 수도원장 등이 거론된다. 다고베르트가 아들 시지스베르를 얻은 671년 무렵은 그가 왕위로 복귀할 수 있게 된 시기와 겹친다.[7] 다고베르트의 정확한 즉위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킬데리크 2세가 살해된 675년 이후, 676년 7월까지는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2. 왕위 복귀와 통치

3년간 프랑스 서남부 렌느샤토에 은신하며 복귀 시기를 기다렸다. 674년, 오랜 유배 생활 끝에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조언자들에게 귀환을 알리고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반환을 요구했다. 이후 스스로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임을 공식 선언하였다.[7][2] 잉글랜드가톨릭 주교인 윌프리드가 그의 복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스위스 시옹의 주교 성 아마투스 역시 다고베르트의 복위를 도왔다.[6][9]

675년 친족인 힐데리히 2세가 암살당했다. 힐데리히 2세 사후, 다고베르트 2세는 요크의 주교 윌프리드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676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올랐다.[2][10]

왕위에 오른 다고베르트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 전역의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회복하려 노력했으며, 엄격한 통치를 시행했다. 그는 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반항적인 귀족들을 견제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렌느샤토에서 모은 막대한 재산을 아키텐과의 전쟁 자금으로 활용했다.[9]

프랑크족의 역사서(Book of the History of the Franks)가 다고베르트 2세의 망명 상황을 기록한 유일한 자료인 반면, 그의 귀환에 대해서는 8세기 초 리폰의 스테판이 쓴 윌프리드의 생애(Life of Wilfrid)가 유일한 기록이다. 스테판에 따르면, 다고베르트 2세는 어린 시절 아일랜드로 망명했으며, 그의 친구와 친척들이 그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윌프리드에게 그를 잉글랜드로 데려와 아우스트라시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윌프리드의 생애는 누가 다고베르트 2세를 소환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친구'(amicila)와 '친척'(proximila)이라고만 언급한다. 친척은 모계 쪽 인물일 수 있으며, 친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힐데리히 2세 치하의 궁재였던 울포알드, 675년 권력을 잡은 에르스탈의 피핀과 라옹의 마르탱, 혹은 아일랜드 출신의 생-모-데-포세의 울탕 수도원장 등 여러 추측이 있지만 합의된 바는 없다.

다고베르트 2세의 정확한 즉위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힐데리히 2세가 675년에 살해된 후 676년 7월 이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다고베르트 2세의 금화 트레미시스. 앞면에는 왕관을 쓴 흉상, 뒷면에는 십자가가 있는 지구본이 새겨져 있다.


다고베르트 2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족하다. 네우스트리아의 관점을 반영하는 프랑크 왕국 역사는 그의 망명 이후 그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역사학자 리처드 게르버딩은 이 역사서의 저자에 대해 "그는 다고베르트가 왕이 되기 위해 돌아왔다고 믿지 않았거나, 우리가 그것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폴 포에이커는 저자가 다고베르트 2세를 정당한 왕으로 여기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이는 그가 네우스트리아의 지지 없이 선택되었거나, 오랜 망명 생활로 이방인 취급을 받았거나, 혹은 그의 출생(어머니가 첩이었음) 때문에 왕위 계승 자격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일 수 있다.

7세기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쓰여진 기록 중 다고베르트 2세의 치세를 언급하는 유일한 자료는 라옹의 아베스 사달베르가의 생애인데, 그것도 간략하게 언급한다. 이 책은 사달베르가가 예감 때문에 수도원을 부르고뉴 북부의 랑그르 교외에서 라옹 시로 옮겼는데, 이는 나중에 "다고베르트 왕과 테우데리크 왕 사이의 최근 전투"로 사실임이 증명되었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다고베르트 2세와 그의 사촌 테우데리크 3세(네우스트리아) 사이의 전쟁에 대한 유일한 언급이다. 이는 에브로인아우스트라시아인들 사이의 지속적인 적대감을 나타내는 것이며, 비록 샹파뉴에서 국경 분쟁으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네우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부르고뉴 깊숙한 곳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은 다고베르트 2세가 한동안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전쟁 중에 에르스탈의 피핀과 라옹의 마르탱이 테우데리크 3세를 공격했다가 유명한 루코파오 전투에서 에브로인에게 패배하여 마르탱이 사망했을 수 있다. 이 전투는 다고베르트 2세 사후에 벌어졌을 수도 있지만, 더 유력한 시기는 679년 9월로, 다고베르트 2세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징집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라옹의 아베스 사달베르가의 생애에 언급된 전쟁의 정확한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다. 677년 9월 초에 끝났을 수도 있다.

676년, 다고베르트 2세는 롬바르드족과 "가장 확고한 평화 조약"(foedus ... pacis firmissimaela)을 체결했다. 이 사건의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는데, 그에 대한 유일한 다른 출처인 8세기 말에 파울루스 디아코누스가 쓴 롬바르드족의 역사는 같은 해 8월에 혜성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 혜성은 아일랜드에서 일본까지 전 세계적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 조약을 671년에 사망한 롬바르드 왕 그리모알드의 통치 시기에 있었던 것으로 잘못 기록했는데, 다고베르트 2세는 아직 아일랜드에서 돌아오지도 않았다. 혜성이 나타났을 당시의 롬바르드 왕은 실제로 페르타리트였다.

다고베르트 2세가 발행한 유일하게 남아있는 진품 헌장은 스타블로-말메디 수도원의 재산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헌장에서 다고베르트 2세는 아버지의 기증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를 추방했던 그리모알드가 수도원을 세웠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다고베르트 2세는 금화 주조를 재개했는데, 이는 670년경 힐데리히 2세에 의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금화 트레미시스는 오래된 프랑크 스타일에서 벗어나, 당시의 비잔틴 솔리두스의 십자가를 모방했다. 다고베르트 2세는 또한 마르세유에서 그의 이름을 딴 동전을 주조한 마지막 왕이기도 했다. 613년부터 679년까지 지속된 마르세유의 중요한 왕실 주화는 항상 왕의 이름으로 주조되었는데, 이는 프랑크 동전이 일반적으로 조폐사 및 조폐소의 이름만 포함하는 것과는 다른 이례적인 일이었다.

679년, 다고베르트 2세는 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로 가는 길에 윌프리드의 궁정에 머물렀는데, 다고베르트 2세는 그가 아일랜드에서 돌아오는 것을 도운 주교에게 감사했다. 다고베르트 2세는 윌프리드를 "자신의 왕국의 수석 주교구"라고 부르는 스트라스부르 주교구에 임명하려 했지만, 윌프리드는 거절했다. 다고베르트 2세는 그에게 로마로 가는 여정에 필요한 무기와 동반자를 제공했다. 이탈리아에서 윌프리드는 다고베르트 2세의 새로운 동맹국 페르타리트의 궁정에 잠시 머물렀다.

679년 말, 윌프리드의 방문 직후, 다고베르트 2세는 암살당했다. 윌프리드의 생애는 이것이 주교들의 동의를 얻은 "배신자 공작"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늦은 전승에 따르면, 그는 보에브르 숲에서 사냥을 하던 중 자신의 대자 요한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의 사망 전통 날짜인 12월 23일 역시 늦은 출처에 근거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고베르트 2세가 사망한 후, 에브로인은 테우데리크 3세의 권위를 아우스트라시아에까지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680년 윌프리드가 아우스트라시아를 통해 돌아오는 길에, 그는 에브로인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었는데, 그들은 그가 다고베르트 2세의 귀환을 주선했다고 비난했다. 윌프리드의 생애 기록에 따르면, 다고베르트 2세는 "도시들을 파괴하고, 대신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과세로 백성을 줄이고, ... 하나님의 교회와 주교들을 멸시하는 자"였다. 도시 파괴에 대한 언급은 에브로인이 루코파오에서 승리한 후 그 땅을 황폐화시켰을 때 다고베르트 2세가 그들을 보호하지 못한 것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

2. 3. 중앙집권 정책과 갈등

친정을 시작한 다고베르투스 2세는 왕권 강화를 목표로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여러 세력과의 갈등을 유발했다. 특히 잉글랜드 출신의 주교 윌프리드는 다고베르투스 2세가 교회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기를 기대했으나, 왕은 그의 기대와 달리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다고베르투스 2세는 가톨릭 교회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려 했으며, 이에 불만을 품은 프랑크 고위 성직자가 윌프리드에게 비판적인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9] 또한 다고베르투스 2세가 세금을 부과하고 교회와 주교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난도 있었다.[11] 그의 아내의 가문인 서고트족이 아리우스파를 따랐던 점이나, 다고베르투스 2세 자신도 한때 아리우스파에 동조했다는 주장[11] 역시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왕권 강화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자치권을 유지하려는 귀족들은 중앙집권화에 강하게 저항했으며, 다고베르투스 2세는 이들을 억누르면서 적개심을 샀다.[11] 대표적인 정적으로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였던 피핀 2세가 있었는데, 그는 다고베르투스 2세의 궁정에 첩자를 보내는 등[11] 노골적으로 적대 행위를 보였다.

다고베르투스 2세의 정책은 주변 지역과의 갈등으로도 이어졌다. 《라옹의 아베스 사달베르가의 생애》에는 다고베르투스 2세와 그의 사촌인 네우스트리아의 왕 테우데리히 3세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당시 아우스트라시아네우스트리아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한때 다고베르투스 2세가 전쟁에서 우위를 점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 시기 피핀 2세와 마르탱이 테우데리히 3세를 공격했다가 루코파오 전투에서 패배한 사건 역시 이러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제적으로 다고베르투스 2세는 금화 주조를 재개하여 왕권을 과시하려 했다. 그의 트레미시스 금화는 전통적인 프랑크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 비잔틴의 솔리두스 화폐처럼 십자가 도안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마르세유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동전을 발행한 마지막 프랑크 왕이기도 했다.

679년, 다고베르투스 2세는 여러 방면에서 적을 만든 상태였다. 그는 로마로 향하던 윌프리드를 만나 스트라스부르 주교구를 제안하며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윌프리드는 이를 거절했다. 그해 말, 윌프리드가 떠난 직후 다고베르투스 2세는 암살당했다. 《윌프리드의 생애》에 따르면 이 암살은 주교들의 동의를 얻은 "배신자 공작들"에 의해 계획되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679년 12월 23일, 아르덴 근처 보에브르 숲에서 사냥 중이던 다고베르투스 2세가 휴식을 취하다가 자신의 대자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11][12][13] 이 암살의 배후에는 피핀 2세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1][12]

《윌프리드의 생애》는 다고베르투스 2세를 "도시들을 파괴하고, 대신들의 조언을 무시하며, 과도한 세금으로 백성을 괴롭히고, 하느님의 교회와 주교들을 경멸한 자"로 묘사하며 당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명목상 테우데리히 3세 아래 통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브로인아우스트라시아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6]

2. 4. 암살과 최후

친정을 시작한 다고베르트 2세는 왕권 강화를 목표로 중앙집중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 방향은 그를 복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던 윌프리드의 기대와는 달랐다. 윌프리드는 다고베르트가 교회의 충실한 지지자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으나, 다고베르트는 오히려 가톨릭 교회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려 했다는 추정도 있다.[9] 실제로 한 프랑크족 고위 성직자는 윌프리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고베르트가 세금을 부과하고 교회와 주교들을 조롱한다며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11] 또한 다고베르트 2세는 재혼한 아내의 지참금으로 랑그독 등 서고트족의 영토를 획득했는데, 당시 서고트 왕실은 명목상 가톨릭에 충성했으나 실제로는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다고베르트 2세 역시 한때 아리우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11]

679년 무렵 다고베르트 2세는 세속과 교회 양쪽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자치권을 되찾으려는 귀족들을 억압하면서 그들의 강한 반감을 샀고, 가톨릭 교회의 팽창을 견제하여 교회의 반발을 샀으며, 중앙집권화 정책은 주변 국가 군주들의 질투와 불안감을 자극했다.[11] 귀족 세력 중 특히 피핀 2세는 다고베르트 2세의 궁정에 첩자를 심어두고 정적들과 비밀리에 협력하며 반역과 암살을 준비하고 있었다.[11]

결국 679년 12월 23일, 다고베르트 2세는 아르덴 근처 스테네이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암살당했다.[11] 정오 무렵 사냥에 지쳐 개울가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을 때, 그의 대자로 추정되는 부하가 나타나 잠든 왕의 눈을 찔러 살해했다. 이 암살의 배후에는 피핀 2세가 있었다.[12][13] 왕궁에 남아있던 다고베르트의 가족들 역시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았으나, 그 이후의 구체적인 과정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13] 다행히 딸 난테힐데스와 아들 시지스베르는 목숨을 건졌으며, 시지스베르를 통해 혈통이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2] 다고베르트 2세가 사망한 후, 프랑크 왕국의 모든 영토는 명목상 테오도리히 3세의 통치 아래 통합되었다.[6]

스테네의 생 다고베르트 성당 지하 묘에 있는 다고베르트 2세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조각상


다고베르트 2세의 암살에 대한 기록은 《윌프리드의 생애》가 유일하지만, 9세기 말 이전에 이미 그가 아르덴 지역에서 순교자로 존경받았다는 사실은 암살설을 뒷받침하는 정황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존재한다. 8세기 초 루앙의 오도인 주교가 쓴 《생애》에 따르면, 다고베르트는 루앙의 생 피에르 교회에 선임자인 힐데리히 2세, 그의 왕비 빌리킬트, 그리고 다고베르트라는 이름의 어린 아들과 함께 묻혔다고 한다. 이 자료는 그의 망명, 귀환, 통치에 대한 언급 없이 "그리모알드가 삭발시킨 다고베르트"라고만 언급한다.

반면, 《다고베르트의 생애》는 다고베르트가 생 레미기우스에게 헌정된 교회인 스테네에 묻혔다고 말한다. 스테네는 오스트라시아의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에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자료는 890년대에 작성되었으며 질병으로 사망한 다고베르트 3세 (711–715)와 다고베르트 2세를 혼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872년, 서프랑크 왕국의 왕(840–877)인 대머리 카를은 다고베르트의 컬트를 부활시켜 그의 유해를 스테네에 특별히 지어진 바실리카로 옮기고 자체 정경 사제들을 배치했다. 이 시기는 카를이 870년 메르센 조약을 통해 획득한 로타링기아 지역에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려 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해 이전에 대한 내용은 《다고베르트의 생애》와 고르즈 수도원의 카르툴라리에 보존된 헌장에서 언급되어 있으며, 이 헌장에는 날짜가 명시되어 있다.

생 다고베르트 바실리카의 기증은 고르즈의 카르툴라리에 있는 1124년의 헌장에서 알려졌다. 이 기증은 어느 시점에서 베아트리체에게 넘어갔는데, 그녀는 하 로렌 공작 고드프리 3세의 아내였으며, 1069년에 고르즈 수도원에 기증했다. 정경 사제들이 해이해지자, 수도승들은 이를 베네딕토회 수녀원으로 전환했다.

다고베르트의 축일은 12월 23일이었다. 이 날짜는 《다고베르트의 생애》, 프랑스의 로타르 왕(954–986)의 아내인 이탈리아의 엠마를 위해 제작된 현재는 유실된 성인력, 그리고 현대 벨기에 지역의 우스아르드의 순교록에 대한 지역 추가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 추가본은 그의 축일을 9월 11일로 기록하고 있다. 비엔의 아도의 순교록에 대한 리에주 필사본 역시 다고베르트의 사망일을 12월 23일로 기록하고 있다.

다고베르트의 축제는 스테네 밖에서는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다고베르트 1세와 관련된 장소와 연관되었다. 16세기까지 베르됭에서 기념되었다. 스테네의 수석 사제는 1580년에 해산되었고, 1591년에는 건물이 위그노들에 의해 약탈되었다. 다고베르트의 유해는 분산되어 일부는 생-질랭에 정착되었다.

3. 암살 배경과 논란

다고베르투스 2세의 정확한 암살 배경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친정을 시작한 후 귀족 가문을 억압하고 가톨릭 세력을 통제하며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려 하자, 각지에서 반발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암살 배후에는 당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궁재 에브로인 혹은 피핀 드 헤르스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고베르투스 2세는 시게베르트 3세(재위 632–51/6)와 알려지지 않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시게베르트의 유일한 부인으로 알려진 킴네힐드 사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은 낮으며, 킴네힐드의 딸인 빌리힐드의 이복 형제였다. 그는 할아버지인 다고베르트 1세(623–639)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727년에 작성된 ''프랑크족의 역사서''에 따르면, 시게베르트가 죽은 후, 그리모알드, 궁재이자 왕 밑에서 가장 강력한 관리는 다고베르투스를 삭발시키고 디도 푸아티에 주교의 보호 아래 두도록 조치했다. 삭발은 메로빙거 왕들이 항상 긴 머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다고베르투스를 왕위 계승에 부적합하게 만들었다. 그 후 디도는 다고베르투스를 아일랜드로 보냈다. 이 사건들의 연대는 불확실하다. 일반적으로 656년으로 추정되지만, 651년으로 보는 설도 있다.

어떤 동시대 자료도 다고베르투스가 아일랜드에서 보낸 시간을 언급하지 않는다. 18세기의 고고학자 머빈 아치달은 다고베르투스와 아일랜드의 특정 장소와의 연관성을 기록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통용되던 구전 전통에 따르면 다고베르투스가 슬레인 수도원에 있었으며, 이는 일부 현대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결론이라고 기록했다.

그리모알드는 그의 아들 킬데베르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위에 앉혔지만, 클로비스 2세(639–657) 치하의 네우스트리아인들은 그리모알드를 체포하여 파리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그의 주군", 즉 정당한 메로빙거 왕위 계승자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클로비스의 둘째 아들 킬데리크 2세는 아직 미성년자였지만 662년에 아우스트라시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다고베르투스의 이복 누이인 빌리힐드와 결혼했고, 킴네힐드의 섭정을 받았다. 그는 675년에 그의 왕비와 아들과 함께 암살되었다.

킬데리크의 살해는 다고베르투스의 귀환을 위한 계기를 마련했지만, 즉각적인 결과는 내전이었다. 전 궁재 에브로인은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3세(658–673)의 아들인 클로비스 3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선포했고, 클로비스 2세의 셋째 아들 테우데리크 3세는 레오데가르에 의해 네우스트리아 왕위에 올랐다. 레오데가르가 체포된 후, 에브로인은 클로비스를 버리고 테우데리크를 지지했고, 그 과정에서 아우스트라시아 동맹국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고베르투스는 아일랜드 망명에서 소환되었다.

4. 사후 성인 추대

다고베르투스 2세의 사후 매장지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윌프리드의 생애》는 그의 암살을 기록한 유일한 동시대 자료이지만, 매장 장소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9세기 말 이전에 아르덴 지역에서 그가 순교자로 존경받았다는 사실은 암살설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8세기 초 루앙의 오도인 주교가 쓴 《생애》에 따르면, 다고베르투스는 루앙의 생 피에르 교회에 선임 왕이었던 힐데리히 2세 부부 및 그의 어린 아들과 함께 묻혔다고 한다. 이 기록은 그의 망명이나 통치에 대한 언급 없이 "그리모알드가 삭발시킨 다고베르트"라고만 지칭한다.

반면, 890년대에 쓰인 《다고베르트의 생애》는 그가 스테네에 있는 생 레미기우스에게 헌정된 교회에 묻혔다고 주장한다. 스테네는 당시 오스트라시아 왕국의 중심부였으므로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기록은 다고베르투스 2세를 질병으로 사망한 다고베르트 3세와 혼동하는 오류를 보이기도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스테네의 성 레미 왕실 부속 예배당에 매장되었으나 이후 망실되었고, 현재는 두개골만이 다고베르트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고 전해진다.[13]

872년,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 카를은 다고베르투스 2세에 대한 신앙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의 유해를 스테네에 새로 지은 바실리카로 옮겼다. 이는 카를 왕이 870년 메르센 조약을 통해 획득한 로타링기아 지역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유해 이전 사실은 《다고베르트의 생애》와 고르즈 수도원의 카르툴라리에 보존된 헌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다고베르투스 2세는 공식적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13]

다고베르투스 2세의 축일은 12월 23일이다.[6] 이 날짜는 《다고베르트의 생애》, 프랑스의 로타르 왕의 왕비 이탈리아의 엠마를 위해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사라진 성인력, 그리고 우스아르드의 순교록의 지역 추가 기록 등에서 확인된다. 다만, 일부 기록에는 축일이 9월 11일로 나타나기도 한다. 비엔의 아도가 작성한 순교록의 리에주 필사본 역시 그의 사망일을 12월 23일로 기록하고 있다.

생 다고베르트 바실리카는 이후 베아트리체(하 로렌 공작 고드프리 3세의 아내)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1069년 그녀에 의해 고르즈 수도원에 기증되었다. 수도승들은 기존 정경 사제들의 규율이 해이해지자 이곳을 베네딕토회 수녀원으로 바꾸었다.

다고베르투스 2세에 대한 신앙은 스테네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다른 지역으로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주로 다고베르트 1세와 관련된 장소에서 그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는 정도였다. 16세기까지는 베르됭에서도 그를 기념하는 의식이 있었으나, 1580년 스테네의 수석 사제직이 폐지되고 1591년에는 위그노들에 의해 성당 건물이 약탈당하면서 그의 유해는 흩어져 일부가 생-질랭으로 옮겨졌다.

흥미로운 점은 17세기까지 다고베르투스 2세에 대한 기록이 의도적으로 은폐되었다는 사실이다. 1646년 이전에 편찬된 프랑크 왕국의 역대 통치자 명단이나 가계도에서는 그의 이름이 삭제된 채 다고베르트 1세에서 바로 다고베르트 3세로 넘어가 있었다.[14] 다고베르투스 2세가 다시 프랑크 왕들의 가계도에 포함된 것은 1665년 이후의 일이다.[14]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역사 기록에서 삭제되었던 이유를 그의 후손이나 후계자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시도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는 그의 존재가 후대에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위협적이었음을 시사한다.[14]

5. 가족 관계

다고베르투스 2세는 시게베르트 3세 (재위 632–51/6)와 알려지지 않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시게베르트의 유일한 부인으로 알려진 힘네힐데스 사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은 낮으며, 힘네힐데스의 딸인 빌리힐데스의 이복 형제였다. 그는 할아버지인 다고베르트 1세 (623–639)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727년에 작성된 ''프랑크족의 역사서''에 따르면, 시게베르트 3세가 죽은 후, 궁재이자 당시 가장 강력한 관리였던 그리모알드는 다고베르투스를 삭발시키고 디도 푸아티에 주교에게 맡겼다.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긴 머리를 유지하는 전통이 있었기에, 삭발은 다고베르투스를 왕위 계승에서 배제시키려는 의도였다. 이후 디도는 다고베르투스를 아일랜드로 보냈다. 이 사건들의 정확한 연대는 불확실하며, 일반적으로 656년으로 추정되지만 651년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모알드는 자신의 아들 킬데베르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위에 앉혔으나, 클로비스 2세 (639–657) 치하의 네우스트리아인들에게 체포되어 파리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이후 클로비스 2세의 둘째 아들이자 다고베르투스 2세의 사촌인 힐데리히 2세가 662년 아우스트라시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다고베르투스 2세의 이복 누이인 빌리힐데스와 결혼했으며, 힘네힐데스가 섭정을 맡았다. 힐데리히 2세는 675년에 왕비 빌리힐데스 및 아들과 함께 암살당했다.

힐데리히 2세의 죽음은 다고베르투스가 아일랜드 망명에서 돌아올 기회를 만들었지만, 곧바로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다고베르투스는 아우스트라시아로 소환되었다.

'''다고베르투스 2세의 가계'''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다고베르트 1세 (Dagobert I)
아버지지게베르트 3세 (Sigebert III)아우스트라시아 국왕 (재위 632–651/656)
어머니미상
계모힘네힐데스지게베르트 3세의 부인
누이 (이복)빌리힐데스654년 - 673년, 힐데리히 2세의 아내
조카다고베르트? - 673년
조카힐페리히 2세670년 - 721년, 네우스트리아 및 프랑크 전체의 국왕
의붓형제양자왕 힐데베르트 3세 (Childebert III the Adopted)? - 662년, 그리모알드의 아들, 지게베르트 3세의 양자
배우자 1마틸다 드 켈트 (Mathilde)
성 아델라 (Saint Adela)? - 730년, 팔젤 수도원장
사위알베리히 (Alberich)
성 이르미나 (Saint Irmina)? - 706년경, 오에렌 수도원장
미상
배우자 2기셀라 드 라제 (Gisela de Razès)? - 679년 12월
기셀라 드 아우스트라시아 (Gisela de Austrasia)
로틸드 (Rothilde)
라그나트루드 (Ragnetrude)
아들지게베르트 4세 (Sigebert IV)671년? ~ 758년? (전설적 인물일 가능성 있음)
며느리가스코뉴의 막달레네 (Magdalene of Narbonne)
손자지게베르트 5세 (Sigebert V)
아들 (기타)후고베르트 (Hugobert)665년? - 697년 (출처에 따라 다름)
숙부클로비스 2세 (Clovis II)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국왕
사촌클로타르 3세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국왕
사촌힐데리히 2세650년 - 675년, 아우스트라시아 및 프랑크 전체의 국왕, 누이 빌리힐데스의 남편
사촌테오데리히 3세 (Theuderic III)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아우스트라시아의 국왕


참조

[1] 문서 성혈 성배에는 651년생으로 되어 있다
[2] 백과사전 다고베르트 2세 http://100.empas.com[...]
[3] 문서 피핀 1세의 아들이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직을 세습하였다
[4] 서적 성혈과성배 자음과모음
[5] 서적 성혈과성배 자음과모음
[6] 백과사전 daum 백과 사전 http://enc.daum.net/[...]
[7] 서적 성혈과성배 자음과모음
[8] 서적 성혈과성배 자음과모음
[9] 서적 성혈과성배 자음과모음
[10] 서적 다빈치코드의 진실(사전편) 예문
[11] 서적 성혈과성배 자음과모음
[12] 서적 다빈치 코드 2 베텔스만 코리아(주)
[13] 서적 성혈과성배 자음과모음
[14] 서적 성혈과성배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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