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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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개소문은 고구려 평원왕과 영양왕 시기 막리지였던 연태조의 장남으로, 고구려 말기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다. 그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고 대막리지에 올라 당나라와의 갈등을 고조시켰다.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고, 신라와의 외교적 긴장 속에서 천리장성 축조, 도교 장려 등의 활동을 펼쳤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혼란에 빠져 멸망했다. 그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현대에는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재평가되기도 한다. 연개소문은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에 등장하며, 강화도 출생설, 중원 염탐설, 베이징 진출설 등 다양한 전설과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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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태조는 고구려 말기 막리지 연자유의 아들이자 막리지를 역임한 귀족으로, 수나라와의 전쟁 이후 고구려 조정 내 권력 다툼 속에서 북방파를 이끌었으며 그의 사후 아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 연개소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연개소문 |
| 한자 | 淵蓋蘇文 |
| 로마자 표기 | Yeon Gaesomun |
| 다른 이름 | 개금(蓋金)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 |
| 출생 | 594년 |
| 사망 | 666년 |
| 출생지 | 고구려 동부 순노부 (추정) |
| 국적 | 고구려 |
| 직업 | 군인, 정치인 |
| 아버지 | 연태조 |
| 어머니 | 소씨(蘇氏) |
| 형제자매 | 연정토 |
| 자녀 |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
| 관직 | |
| 막리지 | ? ~ 642년 |
| 대막리지 | 642년 음력 10월 ~ 666년 음력 5월 |
| 전임 | 연태조 |
| 후임 | 연남생 |
| 재임 군주 | 고구려 영류왕 고구려 보장왕 |
| 군사 활동 | |
| 소속 | 고구려군 |
| 지휘 | 고구려군 |
| 참전 | 고구려-당 전쟁 |
2. 생애
연개소문은 평원왕과 영양왕 시대에 막리지(현대의 총리에 해당하는 직책)를 지낸 연태조의 장남으로, 명문가인 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연자유 또한 막리지였다.[7] 연개소문의 성(姓)은 당나라 기록에는 천(泉)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연(淵)이 당 고조의 이름과 같아서 당나라의 피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연개소문은 개금(蓋金)으로도 불렸으며, 일본서기에는 이리 가스미(伊梨柯須彌)로 등장한다.[8]
《당서》에는 막리지를 「당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연남생의 묘지명 『천남생묘지명』에 따르면, 남생의 할아버지 즉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태조, 할아버지는 자유라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두 사람 모두 고구려의 막리지 관직을 세습했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원전이 된 《구당서》와 《신당서》 고려전에는 연개소문이 동부대인(東部大人, 혹은 서부) 및 막리지를 지낸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의 자리를 오르려 하였으나 그의 품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반대가 심하여, 그 자신이 직접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애걸한 끝에 겨우 아버지의 자리를 세습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34]
연개소문은 연태조의 후임으로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 역할을 맡아 이를 계기로 장안성의 중앙정계에 발을 들였다. 연개소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가 서쪽 도독(西部大人)이 되어 천리장성을 건설하여 요동을 당나라로부터 방어하는 일을 감독할 때까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연개소문에게는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의 세 아들이 있었다.
631년 영류왕은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맡겼다. 그러나 영류왕과 대신들은 연개소문의 성품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려 모의했다. 이를 눈치챈 연개소문은 642년 자신이 통솔하는 군사 사열식에 대신 1백여 명(《일본서기》에는 '이리거세시 등 180여 명')을 초대하여 모두 살해하고, 대궐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35]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였던 보장왕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었다.
642년 보장왕을 옹립한 후, 연개소문은 신라 김춘추의 군사 요청을 거절하고, 죽령과 조령 이북 땅을 요구하는 등 대외 강경책을 펼쳤다. 643년에는 당항성을 공격하고 석두성을 되찾았다.
644년, 당 태종은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했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했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했지만(당의 고구려 출병), 안시성에서 패퇴했다.
643년 연개소문은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들여왔다.[32] 이는 불교 세력을 견제하고,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시간 벌기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면서 당나라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644년, 당 태종은 고구려에 신라 공격 중지를 요구했으나, 연개소문은 과거 수나라 침략 시 신라가 빼앗아간 고구려 영토 5백 리를 반환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645년, 당 태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안시성에서 양만춘에게 막혀 큰 어려움을 겪었다.[2][9] 또한, 평양을 공격하려던 당나라 해군은 연개소문에게 패배했다. 결국 당 태종은 혹독한 겨울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퇴각해야 했고, 퇴각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사망했다.[10][11]
이후에도 당나라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모두 막아냈다. 662년에는 사수(蛇水, 아마도 보통강)에서 당나라 장군 방효태와 그의 13명의 아들을 모두 전사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20][21]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였고, 이후 3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 연개소문의 사망 시기는 그의 장자 연남생의 묘비에 기록된 보장왕 24년(665년)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666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보장왕 23년(66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32]
연개소문은 아들들에게 "너희 형제는 물고기와 물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벼슬자리를 다투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이웃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라고 유언하였으나, 그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고, 고구려는 당과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2. 1. 가계와 초기 활동
연개소문은 평원왕과 영양왕 시대에 막리지(현대의 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였던 연태조의 장남으로, 명문인 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연자유 또한 막리지였다.[7] 연개소문의 성(姓)은 당나라 기록에는 천(泉)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연(淵)이 당 고조의 이름과 같아서 당나라의 피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연개소문은 개금(蓋金)으로도 불렸으며, 일본서기에는 이리 가스미(伊梨柯須彌)로 등장한다.[8]《당서》에는 막리지를 「당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연남생의 묘지명 『천남생묘지명』에 따르면, 남생의 할아버지 즉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태조, 할아버지는 자유라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두 사람 모두 고구려의 막리지 관직을 세습했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원전이 된 《구당서》와 《신당서》 고려전에는 연개소문이 동부대인(東部大人, 혹은 서부) 및 막리지를 지낸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의 자리를 오르려 하였으나 그의 품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반대가 심하여, 그 자신이 직접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애걸한 끝에 겨우 아버지의 자리를 세습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34]
연개소문은 연태조의 후임으로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 역할을 맡아 이를 계기로 장안성의 중앙정계에 발을 들였다. 연개소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가 서쪽 도독(西部大人)이 되어 천리장성을 건설하여 요동을 당나라로부터 방어하는 일을 감독할 때까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연개소문에게는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의 세 아들이 있었다.
2. 2. 쿠데타와 권력 장악
631년 영류왕은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맡겼다. 그러나 영류왕과 대신들은 연개소문의 성품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려 모의했다. 이를 눈치챈 연개소문은 642년 자신이 통솔하는 군사 사열식에 대신 1백여 명(《일본서기》에는 '이리거세시 등 180여 명')을 초대하여 모두 살해하고, 대궐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35]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였던 보장왕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었다.연개소문의 쿠데타는 당나라에 대한 유화책을 지지하는 세력과 군사적 대결을 주장하는 세력 간의 오랜 권력 투쟁의 결과였다. 연개소문은 강경파에 속했다. 많은 현대 한국 역사가들은 그의 동기가 당나라에 대해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도록 고구려를 이끄는 것이었으며, 이는 당나라와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던 영류왕과 대조된다고 주장한다.
642년 보장왕을 옹립한 후, 연개소문은 신라 김춘추의 군사 요청을 거절하고, 죽령과 조령 이북 땅을 요구하는 등 대외 강경책을 펼쳤다. 643년에는 당항성을 공격하고 석두성을 되찾았다.
644년, 당 태종은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했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했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했지만(당의 고구려 출병), 안시성에서 패퇴했다.
643년 연개소문은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들여오기도 했다.[32]
2. 3. 대외 관계와 전쟁
연개소문은 고구려 말기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에는 당나라에 대해 화친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들여오기도 했다.[32] 이는 불교 세력을 견제하고,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시간 벌기라는 해석도 있다.그러나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면서 당나라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644년, 당 태종은 고구려에 신라 공격 중지를 요구했으나, 연개소문은 과거 수나라 침략 시 신라가 빼앗아간 고구려 영토 5백 리를 반환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645년, 당 태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안시성에서 양만춘에게 막혀 큰 어려움을 겪었다.[2][9] 또한, 평양을 공격하려던 당나라 해군은 연개소문에게 패배했다. 결국 당 태종은 혹독한 겨울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퇴각해야 했고, 퇴각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사망했다.[10][11]
이후에도 당나라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모두 막아냈다. 662년에는 사수(蛇水, 아마도 보통강)에서 당나라 장군 방효태와 그의 13명의 아들을 모두 전사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20][21]
그러나 계속된 전쟁으로 고구려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23]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내분과 당나라, 신라의 협공으로 인해 결국 66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9][22][23]
2. 4. 도교 장려와 불교 견제
643년(보장왕 2년)에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의 도사 8명과 『도덕경』을 고구려에 들여오는 등 연개소문은 문화적으로도 공적을 남겼다.[32]2. 5. 말년과 죽음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였고, 이후 3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 연개소문의 사망 시기는 그의 장자 연남생의 묘비에 기록된 보장왕 24년(665년)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666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보장왕 23년(66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32]연개소문은 아들들에게 "너희 형제는 물고기와 물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벼슬자리를 다투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이웃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라고 유언하였으나, 그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고, 고구려는 당과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3.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그와 적대 관계에 있던 사료에 의존하고 있어 왜곡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삼국사기》 연개소문(천개소문) 열전은 《당서》를 편집한 것으로, 중국 측에 의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6] 예를 들어, 연개소문의 성씨는 원래 '연(淵)'이었으나, 당나라 고조의 휘를 피하기 위해 '천(泉)'으로 표기되었다. 조선의 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이를 지적하며, 연개소문의 성이 '연(淵)'임을 밝혔다.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이 "물 속에서 태어났다"며 사람들을 현혹시켰다고 기록했지만, 『천남생묘지명』에는 "샘에서 나왔으니, 신께 의지해 복을 받았고 태어난 곳을 따라 족속의 이름을 붙였다"고 묘사되어 있다.
연개소문의 가계는 『천남생묘지명』과 『천남산묘지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 연태조와 할아버지 연자유는 모두 고구려에서 막리지 벼슬을 지냈으며, 묘지명은 이들의 임무를 중국 역사의 이윤과 곽광에 비유하며 찬양하고 있다. 형제로는 연정토가 있으며, 민간 전설에는 연개소정이라는 여동생이 등장하기도 한다.
연개소문에게는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 형제간의 권력 다툼은 고구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연남생은 당나라로 도망쳐 고구려 공격에 앞장섰고, 연남건은 평양성 함락 후 유배되어 사망했으며, 연남산은 항복 후 당나라에서 벼슬을 받았다.
3. 1. 긍정적 평가
전통적으로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측 기록은 연개소문을 잔인하고 거만하며 흉폭한 인물로 묘사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서술된 《삼국사기》 역시 연개소문이 많은 대신들을 죽이고 왕을 시해했으며, 시체를 토막내어 버렸다고 기록했다. 또한 귀족이나 무관을 엎드리게 한 후 말을 오르내렸다는 등 교만하고 난폭한 모습을 강조하며, 왕을 시해한 역적으로 비판했다.[36]그러나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의 외모가 웅장하고 의기가 호방했다고 전하며, 북송의 왕안석은 연개소문을 재능 있는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37] 일본 측 자료인 《도지 가전(藤氏家傳)》에서는 덴지 천황이 연개소문을 위징과 같은 명신에 비견될 만한 뛰어난 인물로 언급한 기록이 있다.[38]
《삼국유사》에는 연개소문이 수나라 장수 양명의 환생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도사들을 끌어들이고 천리장성 축조 등으로 국력을 약화시켰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불교 세력의 왜곡으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에도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어졌으나, 드물게 "안시성에서 대군에 맞섰다"[39]거나 "적수가 없는 영웅"[40]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연개소문에 대한 재해석은 민족의 자주정신이 강조되던 20세기에 이루어졌다.[41]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을 위대한 혁명가로 평가했고, 박은식은 〈천개소문전〉에서 독립자주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인물로 평가했다.
3. 2. 부정적 평가
전통적으로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왕을 죽이고 전횡을 일삼아 나라를 기울게 한 역신(逆臣)'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당서와 그것을 전재한 삼국사기의 천개소문전은 그가 "백여 명에 달하는 대신들을 죽이고, 대궐로 쳐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그 시체를 토막내어 시궁창에 버렸다", "귀족이나 무관을 엎드리게 한 후 말을 오르내렸다"[36]는 등 그의 교만하고 난폭한 모습들을 기술하였다. 또한 "바른 도리로 나라를 받들지 못하였고, 잔인하고 포악하여 스스로 아무 거리낌없이 행동하면서 대역죄를 짓기에 이르렀다", "왕을 시해한 역적으로서 몸을 보전해 집에서 죽은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송의 왕개보는 연개소문을 재사(才士)였다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조선 초의 최보는 《동국통감》에서 이러한 왕개보와 김부식의 의론에 대해서 "춘추(春秋)의 대의를 모른 말"이라며 비판하였다.[37]
삼국유사는 연개소문이 정책적으로 도교를 수용하면서 불교를 상대적으로 멀리한 것에 대한 불교 세력의 왜곡으로 보이는 일화를 싣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이러한 경향은 변하지 않았고, 드물게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을 뿐, 유교 사상의 지배를 받던 조선 시대까지 왕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 인물로 평가받았다.
당와 신라의 기록들은 연개소문을 다섯 자루의 칼을 동시에 차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엎드리게 한 뒤 그들의 등을 딛고 말에 오르내릴 정도로 잔혹하고 오만한 독재자로 묘사하고 있다.
3. 3. 현대적 재평가
전통적으로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삼국사기의 천개소문전은 연개소문이 "백여 명에 달하는 대신들을 죽이고, 대궐로 쳐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그 시체를 토막내어 시궁창에 버렸다"고 기록하는 등 그의 교만하고 난폭한 모습들을 기술하였다.[36] 또한 "바른 도리로 나라를 받들지 못하였고, 잔인하고 포악하여 스스로 아무 거리낌없이 행동하면서 대역죄를 짓기에 이르렀다"고 비판하였다.하지만 북송의 왕안석은 연개소문을 재능있는 선비(재사, 才士)로 평가하기도 하였다.[37] 일본측 자료인 《도지 가전(藤氏家傳)》에서는 661년 백제 부흥 운동을 지휘하던 덴지 천황의 입을 통해 연개소문이 당의 위징과 함께 언급되며, "각기 그 나라를 맡아 이름을 만리까지 떨쳤으니 이는 모두가 그 땅의 준걸(俊傑)로서 지략이 보통 사람을 넘었다 한다."라고 평가되기도 하였다.[38]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부정적인 경향은 변하지 않았으나, 민족의 자주정신이 요구되던 20세기에 들어서며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가 재해석되기 시작했다.[41]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을 위대한 혁명가로 평가했고, 박은식은 〈천개소문전〉에서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일인자로 평가했다.
4. 전설과 기타
19세기 《부닝현지》(阜宁县志)에 따르면, 현지 중국 전설에는 당 태종이 정찰 중 연개소문의 진영을 발견하고 낡은 우물에 숨어 간신히 탈출했으며, 이후 그 장소 근처에 몽롱탑(朦朧塔)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4][25]
4. 1. 강화도 전설
19세기 《부닝현지》에 따르면, 당 태종이 정찰 중 연개소문의 진영을 발견하고 낡은 우물에 숨어 간신히 탈출했으며, 이후 그 장소 근처에 몽롱탑(朦朧塔)을 세웠다는 전설이 현지(중국)에 전해진다.[24][25]4. 2. 중원 염탐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와 홍대용은 소설 《규염객전》 속의 등장인물 규염객은 바로 연개소문이라고 지적하였는데, 20세기 초 단재 신채호는 이 《규염객전》과 함께 《갓쉰동전》이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한국의 고소설(古小說)을 서로 분석하여, 규염과 갓쉰동은 마찬가지로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을 모티브로 한 것이고, 연개소문이 젊어서 중국 대륙을 염탐했던 흔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갓쉰동전》의 주인공인 '갓쉰동'은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蓋蘇文)'을 중국 발음으로 '카이쑤원'이라고 읽는 것을 거꾸로 한국어로 음사하여 개(蓋)를 ‘갓’으로,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은 것으로, 《갓쉰동전》은 연개소문의 이야기를 가지고 쓴 소설이라는 것이 단재의 주장이다. 《갓쉰동전》의 존재는 현재까지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42]19세기 푸닝현지(阜宁县志)에 따르면, 현지 중국 전설에는 태종 황제가 군대 앞에서 정찰 중 연개소문의 진영을 발견하고 연개소문에게 인식되었으나, 낡은 우물에 숨어 간신히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태종 황제는 그 장소 근처에 몽롱탑(朦朧塔)이라는 탑을 세웠다고 한다.[24][25]
4. 3. 베이징 진출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와 홍대용은 소설 《규염객전》 속 등장인물 규염객이 바로 연개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20세기 초 단재 신채호는 《규염객전》과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한국 고소설 《갓쉰동전》을 분석하여, 규염과 갓쉰동은 연개소문을 모티브로 한 것이며 연개소문이 젊어서 중국 대륙을 염탐했던 흔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단재는 《갓쉰동전》의 주인공 '갓쉰동'은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蓋蘇文)'을 중국 발음 '카이쑤원'을 거꾸로 한국어로 음사하여 '개(蓋)'는 '갓',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은 것으로, 《갓쉰동전》은 연개소문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갓쉰동전》은 현재까지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42]단재 신채호는 중국 베이징 조양문 바깥 7리 지역을 비롯해 산하이관(山海關)부터 베이징까지 '황량대(謊糧臺)'라는 유적이 10여 곳 남아 있는데, 현지에서는 당 태종이 고구려군의 내습에 대비해 모래를 쌓아 군량창고처럼 보이게 하고 고구려군이 오면 공격하던 곳이라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고 하였다. 신채호는 이 황량대가 베이징 근교까지 걸쳐 있는 것은 연개소문이 베이징까지 당 태종을 추격한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요동 지역을 벗어나 산동이나 직예 등지에 '고려'라는 지명이 남아있으며, 베이징 정안문 바깥의 '고려영(高麗營)'이라고도 불리는 '고려진(高麗鎭)', 하북성 하간현 서북쪽 '고려성(高麗城)' 등은 연개소문이 점령했던 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고려진'과 '고려영'이라는 행정구역명은 오늘날까지 베이징 북부 지역에 남아있다.[24][25]
5. 대중문화 속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도교 문신(문지기 신)으로 사찰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당 장군 설인귀와 함께 나타난다. 일부 중국 전설에서는 설인귀와 연개소문이 각각 백호성과 청룡성의 환생으로 여겨진다.[26]
2006년 7월부터 2007년 6월까지 한국 SBS는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한 대하사극 《연개소문》을 방송하였다.
베이징 오페라에서 연개소문은 당 장군 설인귀가 연개소문의 추격으로부터 당 태종을 구출하는 이야기의 악당으로 그려진다.[27][28]
연개소문은 설인귀에 관한 여러 고전 중국 문학 작품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설인귀가 연개소문의 손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당 태종을 구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29]
5. 1. 드라마
| 작품명 | 방송사 | 방영년도 | 배우 |
|---|---|---|---|
| 삼국기 | KBS | 1992년~1993년 | 조경환 |
| 연개소문 | SBS | 2006년~2007년 | 유동근, 이태곤, 은원재 |
| 대조영 | KBS | 2006년~2007년 | 김진태 |
| 계백 | MBC | 2011년 | 고인범 |
| 대왕의 꿈 | KBS | 2012년~2013년 | 최동준 |
| 칼과 꽃 | KBS | 2013년 | 최민수 |
| 한국사기 | KBS | 2017년 | 구중림 |
| 황산벌 | 영화 | 2003년 | |
| 안시성 | 영화 | 2018년 |
5. 2. 영화
5. 3. 소설
| 출판 연도 | 제목 | 작가 | 출판사 | 비고 |
|---|---|---|---|---|
| 1968년 | 요하(遼河) | 김성한 | 동아일보 | |
| 1984년 | 연개소문 (전2권) | 강무학 | 문예춘추사 | |
| 1986년~1992년 | 연개소문 (전7권) | 유현종 | 행림출판사 | |
| 1986년 | 잃어버린 왕국 (전5권) | 최인호 | 우석출판사 | |
| 1992년 | 삼국기 (전2권) | 이남교 | 고려원 | |
| 1998년 | 삼국의 혼 (전4권) | 김정산 | 고도컨설팅그룹출판부 | |
| 2003년~2004년 | 삼한지 (전10권) | 김정산 | 중앙M&B | |
| 2003년 | 한단고기 (상하권) | 김태영 | 유림 | |
| 2003년~2006년 | 연개소문 (전6권) | 박혁문 | 중명 | |
| 2003년 | 연개소문 | 이언호 | 큰방 | |
| 2004년 | 천년전쟁 (전2권) | 김종철 | 삶과꿈 | |
| 2005년 | 고구려 (전7권) | 정수인 | 새움 | |
| 2006년 | 연개소문 | 김영진 | 신성문화사 | |
| 2006년 | 안시성 | 명건영 | 한솜미디어 | |
| 2006년 | 우리나라 삼국지 (제9권 연개소문) | 임동주 | 마야 | |
| 2009년 | 고구려 국선랑 을지소 (전2권) | 정지아 | 랜덤하우스코리아 | |
| 2010년 | 연수영 | 황원갑 | 바움 | |
| 2012년 | 고구려의 섬 (상하권) | 배상열 | 황금책방 |
연개소문(Gai Suwen)은 베이징 오페라에서 당 장군 설인귀가 연개소문의 추격으로부터 당 태종을 구출하는 이야기의 악당으로 그려진다.[27][28]
연개소문은 설인귀에 관한 여러 고전 중국 문학 작품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설인귀가 연개소문의 손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당 태종을 구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29]
5. 4. 만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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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무협소설은 동양적 정서를 담아내는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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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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