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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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백군은 황해도 남부에 위치했던 지역으로, 현재는 북한에 속해 있다. 지형적으로는 해성반도를 포함한 해안 평야와 구릉성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고구려, 신라, 고려 시대를 거치며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며, 조선 시대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어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이관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연안군과 배천군이 통합되어 연백군이 되었으며, 1935년 연안면이 연안읍으로 승격되었다. 38선 분단 이후에는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관할을 받았으며, 한국 전쟁 중에는 행정 구역 개편을 겪었다. 1953년 휴전 이후에는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연백군은 1개의 읍과 19개의 면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지역별로 특산물과 유명한 것들이 있었다. 1929년에는 1면 1교 정책에 따라 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1934년에는 연안 농업학교가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불교 사찰, 로마 가톨릭 교회, 개신교 교회가 존재했으며, 1942년에는 황해도 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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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백군은 1945년 미소 분할 점령 후 경기도에 편입되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이 되었고, 해방 당시 38선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뉘었다가 북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폐지되어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속한다. - 연백군 - 연백군 (경기도)
연백군은 일제강점기에 연안군과 배천군을 통합하여 경기도에 설치되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인해 군사 분계선 이북 지역이 되면서 폐지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폐지된 군 - 개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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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백군 | |
|---|---|
| 연백군 정보 | |
| 한자 표기 | 延白郡 |
| 로마자 표기 | Yeonbaek-gun |
| 행정 구역 정보 | |
| 국가 | 대한민국 |
| 도 | 황해도 |
| 설치 | 1914년 |
| 폐지 | 1952년 |
| 현재 소속 | 황해남도 연안군 (남부) 경기도 연천군 (북부) |
| 역사 | |
| 1914년 | 연안군과 백천군을 합쳐 연백군으로 개편 |
| 1945년 | 8.15 해방 당시 38선 이남 지역은 경기도에 편입 |
| 1952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방 행정 구역 개편으로 연안군, 배천군으로 분리, 폐지 (경기도 편입 지역 제외) |
2. 자연
황해도의 동남쪽 경기만에 닿아 있으며, 북쪽은 구릉성 수양산맥이 동서로 뻗어 목단산(牧丹山)·운두봉(雲頭峯)·황의산(黃衣山, 479m) 등이 있다. 그 지맥이 남쪽 해안 쪽으로 뻗어 중앙에 해성반도를 돌출시켜, 해안의 단조로움을 깨뜨려 서쪽에 용도만, 동쪽에 호남만으로 분리시켰다. 군의 남반부는 광활한 해안 평야로 동서의 군계를 이루는 례성강·화양강의 2대 강과 옥산강(玉山江)·라진포천(羅津浦川)·풍천(楓川) 등 하천의 퇴적 작용과 해저 융기로 이루어졌고, 해안은 넓은 간석지가 있어 대규모 간척사업이 이루어졌다. 연안 도서로는 역구(驛鷗)·신·구 증산 등 7개 도서가 있다.
연안(延安)은 고구려 때 동음홀(冬音忽)·시염성(豉鹽城)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고려 초에 염주(鹽州)로 개칭되었다. 이후 영응(永膺)·석주(碩州)로 불리다가 충렬왕 때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되었으며, 충선왕 때 연안부(延安府)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창 중 하나인 금곡포창이 설치되었고, 태종 13년(1413) 도호부가 되면서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이관되었다.[3] 1895년에 다시 군이 되었고, 1914년에 배천군과 평산군의 괘궁(掛弓)·목단(牧丹) 2면을 합하여 연백군으로 개칭했다.
3. 역사
배천(白川)은 고구려의 도납현(刀臘縣)·치악성(雉岳城)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는 구택으로 고치고 해고군(海皐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초부터는 배천으로 고치고 태종 13년(1413)에 군이 되었다.[3] 1914년에 연안군과 합쳐졌다.3. 1. 고대 ~ 조선 시대
고구려 때 연안(延安)은 동음홀(冬音忽)·시염성(豉鹽城)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고려 초에 염주(鹽州)로 개칭되었다. 이후 영응(永膺)·석주(碩州)로 불리다가 충렬왕 때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되었으며, 충선왕 때 연안부(延安府)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창 중 하나인 금곡포창이 설치되었고, 태종 13년(1413) 도호부가 되면서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이관되었다.[3]
배천(白川)은 고구려의 도납현(刀臘縣)·치악성(雉岳城)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는 구택으로 고치고 해고군(海皐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초부터는 배천으로 고치고 태종 13년(1413)에 군이 되었다.[3]
3. 2. 일제강점기
3. 3. 38선 분단과 한국 전쟁
1945년 9월 2일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연백군의 대부분 지역이 미군정 관할 아래, 38선 이북인 목단면·금산면 전부, 운산면·화성면 대부분이 소련군정 관할 아래에 들어갔다.[4] (1읍 19면 → 1읍 15면)
1945년 11월 4일 황해도 연백군의 38선 이남 지역(연안읍·괘궁면·도촌면·봉북면·봉서면·석산면(화성면 일부 합면)·송봉면·온정면·용도면·유곡면·은천면(운산면 일부 합면)·해룡면·해성면·해월면·호남면·호동면)이 38선 이남의 벽성군 4개면(내성면·추화면·일신면·청룡면)과 함께 경기도 연백군에 편입되었다.[4][5][6]
195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선 이북의 연백군에 평산군 적암면과 금천군 산외면, 서북면을 편입시키고, 한국전쟁으로 점령한 38선 이남의 연백군에 남연백군을 설치하였다.[7]
1952년 12월 한국 전쟁 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연백군과 남연백군을 폐지하고, 배천군(운산면·화성면·금산면·은천면·석산면·도촌면·해월면과 호동면 일부)과 연안군(용도면·괘궁면·호남면·봉서면·해성면·송봉면과 목단면·호동면·봉북면·해룡면·연안면의 일부)을 신설하였다. 구 벽성군 지역이었던 추화면·내성면·일신면·청룡면에는 청단군이, 구 금천군 산외면·서북면과 구 평산군 적암면에는 평천군이 신설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의 결과, 연백군 전역(全域)이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이 되었다.
3. 4. 한국 전쟁 이후
1950년한국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선 이북의 연백군에 평산군 적암면과 금천군 산외면, 서북면을 편입시키고, 한국전쟁으로 점령한 38선 이남의 연백군에 남연백군을 설치하였다.[7]
1952년한국어 12월 한국 전쟁 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연백군과 남연백군을 폐지하고, 배천군(운산면·화성면·금산면·은천면·석산면·도촌면·해월면과 호동면 일부)과 연안군(용도면·괘궁면·호남면·봉서면·해성면·송봉면과 목단면·호동면·봉북면·해룡면·연안면의 일부)을 신설하였다. 구 벽성군 지역이었던 추화면·내성면·일신면·청룡면에는 청단군이, 구 금천군 산외면·서북면과 구 평산군 적암면에는 평천군이 신설되었다.
1953년한국어 7월 27일한국어 한국 전쟁의 결과, 연백군 전역(全域)이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이 되었다.
4. 행정 구역
연백군은 1개의 읍, 19개의 면 및 175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4. 1. 연안읍
해당 지역은 포도주로 유명했다.[2]4. 2. 괘궁면
이 지역은 비단으로 유명했다.[2]4. 3. 금산면
이 지역은 콩과 항아리로 유명했다.[2]4. 4. 도촌면
이 지역에는 오래된 요새가 있었다.[2]4. 5. 목단면
이 지역에서는 해초, 인삼, 담배를 수확했다.[2]4. 6. 봉북면
해당 지역에는 금광이 있었다.[2]4. 7. 봉서면
그 지역은 두루미가 사는 곳이었다.[2]4. 8. 석산면
이 지역은 많은 논밭을 가지고 있었으며 쌀로 유명했다.[2]4. 9. 송봉면
운계사라는 절이 이 지역에 있었다.[2]4. 10. 온정면
인삼과 목화가 특산물이었다.[2]4. 11. 용도면
이 지역은 비옥한 들판이 많았다.[2]4. 12. 운산면
공민왕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이곳에 존재했다.[2]4. 13. 유곡면
그 지역에는 소가 있었다.[2]4. 14. 은천면
이 지역은 콩과 같은 품질 좋은 농작물로 유명했다.[2] 또한, 온천이 있었다.[2]4. 15. 해룡면
이 지역은 풍경으로 유명했다.[2]4. 16. 해송면
이 지역은 4월에 열리는 어업 행사로 유명했다.[2]4. 17. 해월면
이 지역은 대한민국 전체 지역 중 금 생산량 상위 4개 지역 중 하나였다.[2]4. 18. 호남면
해당 지역에는 고인돌 유적이 있었다.[2]4. 19. 호동면
고대 도자기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2]4. 20. 화성면
화성면에는 고려 공민왕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 있었으나, 이후 사라졌다.[2]5. 교육
1929년, 1면 1교 정책에 따라 모든 읍과 면에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2] 1934년에는 연안 농업학교가 설립되었다.[2] 1938년 기준으로, 연백군에는 64개의 서당이 있었다.[2]
6. 종교
1939년 기준으로 50개의 불교 사찰, 19개의 로마 가톨릭 대성당, 19개의 개신교 교회가 있었다.[2]
7. 인구
1942년 연백군에는 35,953가구, 199,942명이 거주했으며, 이는 당시 도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군이었다.[2]
참조
[1]
웹사이트
남연백군
http://cybernk.net/i[...]
cybernk.net
[2]
웹사이트
연백군
http://encykorea.aks[...]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3]
법령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1913-12-29
[4]
웹사이트
황해도 연백군 지도
https://encykorea.ak[...]
2017-02-16
[5]
웹사이트
황해도 벽성군 지도
https://encykorea.ak[...]
2017-02-16
[6]
법령
군정법령 제22호 시, 도직제
s:군정법령 제22호
1945-11-03
[7]
웹사이트
남연백군
http://cybernk.net/i[...]
2017-02-16 # 201년은 오류로 추정, 2017년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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