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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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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호덕분은 북주의 대장군 영호정의 손자이자 수나라의 관료 영호희의 아들로, 수나라 멸망 후 당나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당나라가 건국된 후 고조 이연을 섬기며, 비서승, 예부시랑 등을 역임했다. 그는 역사 편찬에 기여하여 《주서》, 《진서》 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율령 편찬에도 관여했다. 고종 시기에는 국자감 제주를 지내고, 84세에 사망하여 '헌'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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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덕분
기본 정보
한자令狐德棻
로마자 표기Linghu Defen
존칭팽양헌공(彭陽憲公)
인물 정보
출생583년
사망666년
주요 활동
직업역사가, 정치가
주요 저서주서
수서

2. 생애

영호덕분은 북주대장군이었던 영호정을 조부로, 수나라에서 홍려소경 벼슬을 지낸 영호희를 아버지로 두었다. 수나라 대업 말년에 문성현 현령이 되었으나, 수나라 말의 전란을 피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통이 태평궁에서 총관을 자칭하자 휘하에서 기실참군을 지냈고, 이연이 장안에 입성하자 대승상부 기실에 임명되었다. 무덕 원년 당나라 건국 후 기거사인으로 전임되어 이연의 측근에서 섬겼다.

무덕 5년 비서승으로 전임되어 진숙달 등과 『예문류취』 편찬에 참여했다. 남조 양, 남조 진, 북제, 북주, 수나라 정사의 수정을 주청하여 허락받고 진숙달, 유검 등과 북주 역사서 편찬 명을 받았다. 정관 3년 태종은 덕분과 잠본문에게 주사 편찬을 거듭 명했다. 정관 6년 예부시랑 겸 수국사가 되었고 팽양현남 작위를 받았다. 정관 10년주서』 완성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정관 11년 신례 완성 공적으로 자작으로 진봉되었고, 『정관씨족지』 편찬을 완성했다.

정관 15년 태자 우서자가 되었다. 정관 17년 황태자가 폐위되자 연좌되어 관작을 박탈당했다. 정관 18년 아주 자사로 재기했지만, 공적인 사건으로 죄를 물어 면관되었다. 곧 태종으로부터 『진서』 편찬 명을 받고 방현령의 추천으로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진서』 완성 후 비서소감에 임명되었다. 영휘 원년 고종으로부터 율령 편찬을 명받아 다시 예부시랑이 되었고 홍문관 학사를 겸했다. 곧 홍문관 학사를 겸한 채 태상경으로 전임되었다. 영휘 4년 국자감 제주로 전임되어 숭현관 학사를 겸했다. 『고종실록』 30권을 편찬했고 작위는 공으로 진봉되었다. 용삭 2년 은퇴를 허락받아 금자광록대부 벼슬이 더해졌다.

건봉 원년 사저에서 사망했으며, 향년 84세였다. 시호는 헌이었다.

덕분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태종 즉위를 주청하는 글을 모아 "홍문전에 사부의 책을 모으고, 군서는 20여 만 권이 되었다"는 것이고(『당회요』 홍문관), 다른 하나는 역사서 편찬으로, "수찬의 근원을 창시하여 덕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받았다(조익 『이십이사찰기』). 24사 중 덕분이 공헌한 것은 『양서』, 『진서』, 『북제서』, 『주서』, 『수서』, 『진서』, 『남사』, 『북사』의 8부였다.

2. 1. 초기 생애와 수나라 시기

영호덕분은 583년 수 문제 치세에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둔황의 귀족 가문인 둔황 영호씨 출신이었으나, 후에 의주(宜州, 대략 현대의 산시성 퉁촨시)로 이주했다. 영호덕분의 아버지 영호희(令狐熙)는 수 문제 때 관료로 복무했으나, 부패 혐의로 허위 고발되어 투옥된 후 분노로 사망했다.[1] 수 양제 통치 말기, 영호덕분은 약성현(藥城, 현대의 안후이성 보저우 시) 현령으로 임명되었지만, 당시 수나라가 농민 반란으로 혼란에 빠져 관직에 부임하지 못했다.[1]

영호덕분의 조부 영호정북주대장군이었고, 아버지 영호희는 수나라의 홍려소경 벼슬을 지냈다. 영호덕분은 수나라 대업 말년에 문성현 현령이 되었으나, 수나라 말의 전란을 피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2]

2. 2. 당나라 건국과 고조 시기

618년, 당 고조 이연수나라 양제가 강도(江都, 현재의 양저우)에서 쿠데타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양유를 독살하고 그로부터 황위를 빼앗아 당나라를 건국하고 고조(高祖) 황제가 되었다. 그는 영호덕분(令狐德棻)을 황실 시중으로 임명했다. 622년, 고조는 영호에게 비서성(秘書丞중국어), 즉 궁중 서고의 서기관 직을 맡기고, 재상 진숙달과 함께 ''예문유취'' 편찬에 참여하게 했다.[2]

당시 수나라 말기의 대혼란 이후 많은 고서들이 유실되었다. 영호는 책을 찾아 구입하고, 구입한 책들을 복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고조는 이에 동의했다. 몇 년 후, 황실 소장품은 더욱 풍부해졌다. 영호는 또한 남조의 역사는 대체로 편찬되었지만, 북주와 수나라의 역사는 정식으로 편찬된 것이 거의 없으며, 고조의 조상들을 포함한 이 두 왕조의 위대한 인물들의 업적이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고조는 소우, 왕경업(王敬業중국어), 은문례(殷聞禮중국어)에게 북위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진, 영호, 유검(庾儉중국어)에게 북주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풍덕이와 안사고에게 수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최선위(崔善為중국어), 공소안(孔紹安중국어), 소덕언(蕭德言중국어)에게 양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배구, 조효손(), 위징에게 남제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그리고 두진(竇璡중국어), 구양순, 요사련에게 진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고조의 조서가 내려진 후, 실제 역사 편찬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이 사업들은 중단되었다.

영호덕분의 조부 영호정북주대장군이었고, 아버지 영호희는 수나라의 홍려소경 벼슬을 지냈다. 덕분은 수나라 대업 말년에 문성현 현령이 되었으나, 수말의 전란을 피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통이 태평궁에 근거하여 총관을 자칭하자, 덕분은 그 휘하에서 기실참군을 지냈다. 이연이 장안에 입성하자, 덕분은 대승상부 기실에 임명되었다. 무덕 원년(618년), 당나라가 건국되자, 덕분은 기거사인으로 전임되어, 고조 이연의 측근에서 섬겼다.

무덕 5년(622년), 비서승으로 전임되어 진숙달 등과 함께 『예문유취』 편찬에 참여했다. 남조 양, 남조 진, 북제, 북주, 수나라의 정사의 수정을 주청하여 허락받아, 진숙달, 유검 등과 함께 북주의 역사서를 편찬하도록 명을 받았다.

2. 3. 태종 시기

629년, 당 태종은 역사 편찬에 관심을 가지고 영호덕분(링후더펀)과 천원번에게 북주의 역사(《주서》)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백약에게는 북제의 역사(《북제서》)를, 야오쓰롄에게는 양나라(《양서》)와 진나라(《진서》)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웨이징에게는 수나라(《수서》)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하고, 팡쉬안링과 함께 전반적인 편찬 작업을 감독하게 했다.[2] 이들은 북위 역사에 대해서도 논의했으나, 위수 (현재 《위서》로 알려짐)와 위단(魏澹, 위수의 사촌, 별도의 《위서》 편찬)이 이미 편찬했으므로 새로운 편찬은 불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영호덕분의 제안으로 추이런스가 북주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영호덕분 자신도 양, 진, 북제, 수의 역사 편찬에 기여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전반적인 프로젝트를 주도한 영호덕분을 칭찬했다.[2]

632년, 영호덕분은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었지만 황실 역사가로서 계속 복무했다. 그는 또한 펑양 남작에 봉해졌다.[2]

636년, 《주서》가 완성되었고 영호덕분은 비단을 하사받았다.[2]

637년, 영호덕분의 또 다른 작품인 《신례(新禮)》가 완성되었고, 그의 작위는 펑양 자작으로 승진했다. 또한 그해에 영호덕분이 참여한 또 다른 프로젝트인 《씨족지(氏族志)》도 완성되었으며, 그는 다시 비단을 하사받았다.[2]

641년, 영호덕분은 태종의 아들 이승건 태자의 참모가 되었다. 643년, 이승건이 폐위된 후, 영호덕분은 그의 직무에서 해임되었다.[2]

644년, 영호덕분은 다시 공직에 복귀하여 야안시의 태수가 되었지만, 그곳에서의 행동으로 인해 나중에 해임되었다. 그러나 곧, 팡쉬안링이 서진의 역사(《진서》) 편찬을 맡게 되자, 영호덕분은 118명의 편집자가 참여하는 이 프로젝트의 주 편집자가 되었고, 다른 편집자들은 대체로 영호덕분의 지시에 따랐다. 648년에 작업이 완료된 후, 영호덕분은 비서감(秘書監)이 되었고, 이는 기록 보관국의 수장이었다.[2]

2. 4. 고종 시기와 말년

640년, 고종은 영호덕분에게 법률 편찬을 맡기고, 다시 예부시랑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홍문관 학사로 임명했다. 그는 곧 태상경(太常卿)으로 임명되었고, 계속해서 학사로도 재직했다.

643년, 영호덕분은 국자제주(國子祭酒), 즉 황실 대학의 수장이 되었다. 영호덕분은 639년 이후 태종의 치세를 기록했기 때문에, 비단을 하사받고 숭현관(崇賢館) 학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나중에 고종의 치세를 기록하는 일도 맡았으며, 작위는 팽양공(彭陽公)으로 승진했다. 662년, 그는 은퇴를 요청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으며 은퇴했다. 666년에 사망했다.

영휘 원년(650년), 고종으로부터 율령 편찬을 명받아, 다시 예부시랑이 되었고, 홍문관 학사를 겸했다. 곧 홍문관 학사를 겸한 채, 태상경으로 전임되었다.[1] 영휘 4년(653년), 국자감 제주로 전임되어, 숭현관 학사를 겸했다. 『고종실록』 30권을 편찬했고, 작위는 공으로 진봉되었다. 용삭 2년(662년), 덕분은 은퇴를 허락받아, 금자광록대부의 벼슬이 더해졌다.[1]

건봉 원년(666년), 사저에서 사망했다. 향년 84세였다. 시호는 헌이었다.[1]

3. 평가

영호덕분은 역사 편찬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태종 즉위 관련 글을 모아 홍문관에 보관한 것과, 여러 역사서 편찬에 참여한 것이 돋보인다.


  • 홍문관 서적 수집: 태종의 즉위를 요청하는 글을 모아 "홍문관에 사부의 책을 모으고, 군서는 20여 만 권이 되었다"라고 당회요에 기록될 정도로 많은 서적을 수집했다.
  • 역사서 편찬: 조익은 이십이사찰기에서 "수찬(역사 편찬)의 근원은 덕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평가했다. 24사 중 양서, 진서, 북제서, 주서, 수서, 진서, 남사, 북사 등 8개 역사서 편찬에 기여하여,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참조

[1] 서적 Jiu Tang Shu 666 # 건봉 원년
[2] 서적 Jiu Tang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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