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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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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서》는 남조 양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요사렴 등이 편찬했으며, 본기 6권, 열전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는 황제의 기록을, '열전'은 다양한 인물들의 전기를 담고 있다. 특히 제54권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어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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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 (역사서)
개요
제목양서
원제梁書
저자요사렴
편찬 시기636년 (정관 10년)
시대당나라
분류기전체
권수56권
수록 범위양나라
언어한문
내용
구성본기 6권, 열전 50권
누락된 내용지와 표가 없음
관련 정보
정사이십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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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편찬 과정

양서》는 총 56권으로, 본기 6권과 열전 50권으로 이루어진 기전체 역사서이다.[1] 이 책의 편찬은 수(隋)대에 요사렴의 아버지인 요찰(姚察)이 시작하였으나, 606년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미완성으로 남았다.[1] 이후 아들 요사렴이 629년 당 태종의 명을 받아 아버지의 저본을 바탕으로 내용을 보충하고 정리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1]

편찬 과정에는 당시 양(梁)·진(陳)·제(齊)·주(周)·수(隋) 다섯 왕조의 역사서 편찬을 감독하던 위징(魏徵)도 일부 관여하였으며[1], 양나라 때부터 진나라에 걸쳐 편찬된 《양사(梁史)》라는 책도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1]

《양서》는 현존하는 양나라의 역사를 비교적 원시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범진(范縝), 완효서(阮孝緖), 도홍경(陶弘景) 등의 열전에는 당시의 사상, 도서 목록, 의학 관련 역사 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다.[1] 다만, 다른 정사들과 달리 표(表)와 지(志)가 없다는 구조적 특징이 있다.[1] 또한, 《진서》 등 같은 시기에 국가 주도로 편찬된 다른 정사들과는 달리,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의 《사기》처럼 개인이 2대에 걸쳐 완성한 사찬(私撰) 사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2]

2. 1. 요찰의 저본 편찬

양서의 저본은 요사렴의 아버지인 요찰(姚察)이 수(隋)대에 편찬하기 시작했다.[1] 요찰은 606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아들 요사렴이 629년 당 태종의 명을 받아 아버지의 저본을 바탕으로 내용을 보충하고 정리하여 7년 만에 완성했다.[1]

당시 위징(魏徵)이 양(梁)·진(陳)·제(齊)·주(周)·수(隋) 다섯 왕조의 역사서 편찬을 감독하는 5사감수관(五史監修官)을 맡고 있었기에, 양서의 〈경제기(敬帝紀)〉 뒤에는 위징이 직접 쓴 논찬(論贊)이 실려 있다.[1] 편찬 과정에서는 양나라 때부터 진나라에 걸쳐 편찬되었던 《양사(梁史)》라는 책도 참고하였다.[1]

《양서》는 같은 시기에 완성된 《진서(晉書)》 등 조정에서 편찬한 다른 정사들과 달리,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가 사기(史記)를 편찬한 것처럼 개인이 2대에 걸쳐 완성한 사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2] 후대의 평가는 대체로 내용이 공정하고 구성이 좋다는 의견이 있으나, 열전의 구성 형태나 편찬 순서가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2] 또한, 인용문을 제외한 서술 부분에서 당시 사용하던 문체가 아닌 옛 문자(古文)를 사용하여 작성한 것도 특징으로 꼽힌다.[2]

2. 2. 요사렴의 완성

양서는 요사렴이 아버지 요찰의 작업을 이어받아 완성한 역사서이다. 요찰은 대에 양서의 저본 편찬을 시작했으나 606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조정의 명으로 629년에 요사렴이 역사 편찬 작업을 맡게 되었고, 아버지의 저본을 바탕으로 내용을 보충하고 정리하여 7년 만에 양서를 완성했다. 당시 위징이 양·진·제·주·수 다섯 왕조의 역사서 편찬을 감독하는 5사감수관(梁陳齊周隋五史監修官)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양서의 〈경제기(敬帝紀)〉 뒤에는 위징이 작성한 논찬(論贊)이 실려 있다. 또한 편찬 과정에서 양나라 때부터 진나라에 걸쳐 편찬되었던 양사(梁史)라는 책도 참고하였다.

양서는 진서 등 같은 시기에 조정에서 편찬한 다른 정사들과는 달리,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가 사기(史記)를 편찬한 것처럼 개인이 2대에 걸쳐 완성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후대의 평가는 대체로 내용이 공정하고 구성이 좋다는 의견이 많지만, 열전의 구성이나 편찬 순서가 다소 혼란스럽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인용문을 제외한 서술 부분에서 당시의 일상적인 문장이 아닌 옛스러운 문체(古文)를 사용한 것도 특징 중 하나이다.

2. 3. 위징의 참여

양서》가 편찬될 당시 위징(魏徵)은 양(梁)·진(陳)·제(齊)·주(周)·수(隋) 다섯 왕조의 역사서 편찬을 감독하는 5사감수관(五史監修官)을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양서》의 〈경제기(敬帝紀)〉 뒤에는 위징이 직접 지은 논찬(論贊)이 실려 있다.

3. 구성

양서는 총 56권으로 구성된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역사서이다.[1] 구체적으로 황제의 기록인 본기(本紀) 6권과 여러 인물의 전기인 열전(列傳) 5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1]

편찬은 대의 요찰(姚察)이 시작하여 그의 아들 요사렴(姚思廉)이 태종의 명을 받아 629년부터 7년간 작업하여 완성하였다.[1][2] 다른 정사들과 달리 표(表)와 지(志)가 없다는 점이 구성상의 특징이다.[1]

3. 1. 본기(本紀)

무제 상무제(武帝) 소연(蕭衍)남제 건무 2년 (495년) ~ 중흥 2년 (502년 4월)건무, 영원, 중흥권2본기2
무제 중천감 원년 (502년 4월) ~ 천감 18년 (519년 12월)천감권3본기3
무제 하보통 원년 (520년 1월) ~ 태청 3년 (549년 5월)보통, 대통, 중대통, 대동, 중대동, 태청권4본기4
간문제간문제(簡文帝) 소강(蕭綱)태청 3년 (549년 5월) ~ 대보 2년 / 천정 원년 (551년 8월 / 10월)대보, 천정권5본기5
원제예장왕(豫章王) 소동(蕭棟)
후경(侯景)
효원제(孝元帝) 소역(蕭繹)대보 원년 (550년 1월) ~ 승성 3년 (554년 12월)대보, 태시, 천정, 승성권6본기6
경제민제(閔帝) 소연명(蕭淵明)
경제(敬帝) 소방지(蕭方智)승성 3년 (554년 11월) ~ 태평 2년 (557년 10월)승성, 소태, 태평


3. 2. 열전(列傳)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사렴(姚思廉)이 아버지 요찰(姚察)이 (隋)대에 편찬하던 저본을 이어받아, 629년 편찬 명을 받고 7년 만에 완성했다. 당시 위징(魏徵)이 양(梁)·진(陳)·제(齊)·주(周)·수(隋) 5개 왕조 역사서 편찬의 감수관(監修官)을 맡고 있었기에, 〈경제기(敬帝紀)〉 뒤에는 위징이 지은 논찬(論贊)이 실려 있다. 양나라 때부터 진나라에 걸쳐 편찬되었던 양사(梁史)라는 책도 참고하였다.

현존하는 양나라의 역사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사서로 평가받으며, 특히 범진(范縝), 완효서(阮孝緖), 도홍경(陶弘景) 등의 전(傳)에는 당시의 사상, 도서 목록, 의약 방면에 대한 중요한 역사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 구성에서 표(表)와 지(志)는 포함되지 않았다.

편찬 방식은 사마담과 사마천(司馬遷) 부자가 사기(史記)를 편찬한 것처럼 개인이 2대에 걸쳐 완성했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 조정에서 편찬한 다른 정사들과 차별화된다. 후대의 평가는 대체로 내용이 공정하고 구성이 좋다는 의견이 많지만, 열전의 구성 형태나 편찬 순서가 다소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인용문을 제외한 서술 부분에서 당시 사용된 문체가 아닌 고문(古文)을 사용한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열전의 상세 구성은 다음과 같다.

부제목록비고
권7열전1황후태조 장황후, 고조 치황후, 태종 왕황후, 고조 정귀빈, 고조 완수용, 세조 서비
권8열전2소명태자, 애태자, 민회태자
권9열전3왕무, 조경종, 유경원
권10열전4소영달, 하후상, 채도공, 양공칙, 등원기
권11열전5장홍책, 유역, 정소숙, 여승진
권12열전6유담, 유침, 석선문(席闡文), 위예, 위애(韋愛)
권13열전7범운, 심약
권14열전8강엄, 임방
권15열전9사굴, 사람
권16열전10왕량(王亮), 장직, 왕영
권17열전11왕진국(王珍國), 마선병, 장제
권18열전12장혜소(張惠紹), 풍도근, 강현, 창의지
권19열전13종쾌, 유탄, 악애(樂藹)
권20열전14유계련(劉季連), 진백지
권21열전15왕첨, 왕지, 왕준, 왕간, 왕훈(王訓), 왕태, 왕분, 왕석, 왕첨(王僉), 장충, 유윤, 채준, 강천
권22열전16태조 5왕임천정혜왕 굉, 안성강왕 수, 남평원양왕 위, 파양충렬왕 회, 시흥충무왕 담
권23열전17장사사왕 업, 영양사왕 백유, 형양사왕 원간, 계양사왕 상
권24열전18소경, 소창, 소앙, 소욱
권25열전19주사, 서면
권26열전20범수, 부소, 부영(傅映), 소침, 육고
권27열전21육수, 도흡, 명산빈(明山賓), 은균, 육양
권28열전22배수, 배고(裴高), 배평(裴平), 배횡(裴橫), 하후단, 하후기(夏侯夔), 어홍(魚弘), 위방
권29열전23고조 3왕남강간왕 적, 여릉위왕 속, 소릉휴왕 륜
권30열전24배자야, 고협, 서리, 포천
권31열전25원앙, 원군정
권32열전26진경지, 란흠
권33열전27왕승유, 장솔, 유효착, 왕균
권34열전28장면, 장찬, 장관
권35열전29남강현후 자각, 기양현후 자범, 영도현후 자현, 신포현후 자운
권36열전30공휴원, 강혁
권37열전31사거, 하경용
권38열전32주이, 하침
권39열전33원법승, 원수, 원원달, 왕신념, 양화, 양간, 양곤, 양아인
권40열전34사마경, 도개, 유현, 유지린, 유지향(劉之享), 허무
권41열전35왕규, 유곡, 종름, 왕승, 저상, 소개, 소흡(蕭洽), 저구, 유유, 유람(劉覽), 유준(劉遵), 유잠, 유효승(劉孝勝), 유효위(劉孝威), 유효선(劉孝先), 은운, 소기
권42열전36장순, 장궐(臧厥), 부기
권43열전37위찬, 강자일, 강자사(江子四), 강자오(江子五), 장승, 침준, 유경례
권44열전38태종 11왕심양왕 대심, 남해왕 대림, 남군왕 대련, 안륙왕 대춘, 유암공 대아(瀏陽公 大雅), 신흥왕 대장, 서양왕 대균, 무령왕 대위, 건평왕 대구, 의안왕 대흔, 수건왕 대지rowspan="2"|
세조 2자충장세자 방등, 정혜세자 방제
권45열전39왕승변
권46열전40호승우, 서문성, 두즉, 두안(杜岸), 두유안(杜幼安), 두감(杜龕), 음자춘
권47열전41효행등담공, 심숭소, 순장, 유검루, 길분, 견념, 한회명, 유담정, 하형, 유사미, 강부, 유제, 저수, 사린
권48열전42유림복만용, 하동지, 범진, 엄식지, 하창, 사마균, 변화, 최령은, 공첨, 노광, 침준, 태사숙명(太史叔明), 공자거, 황간
권49열전43문학 上도항, 구지, 유포, 원준, 유어릉, 유소, 하손, 종영, 주흥사
권50열전44문학 下유준, 사기경, 유협, 왕적, 하사징, 유요, 사징, 장엄, 복정, 유중용, 육운공, 임효공, 안협
권51열전45처사하점, 하은, 완효서, 도홍경, 제갈거, 침의, 유혜비, 범원염, 유우, 유효, 유선, 장효수, 유승선
권52열전46지족고헌지, 도계직, 소시소
권53열전47양리유필, 침우, 범술증, 구중부, 손겸, 복환, 하원
권54열전48제이<해남>
임읍국, 부남국, 반반국, 단단국, 간타리국, 낭아수국, 파리국, 중천축국, 사자국
rowspan="3"|
<동이>
고구려, 백제, 신라, , 문신국, 대한국, 부상국
<서북>
하남국, 고창국, 활국, 주고가국, 아발단국, 호밀단국, 백제국, 귀자, 우전, 갈반타국, 말국, 파사국, 탕창국, 등지국, 무흥국, 예예국
권55열전49예장경왕 종, 무릉정헌왕 기, 임하왕 정덕, 하동문환왕 예
권56열전50후경, 왕위


4. 특징

양서》는 총 56권으로, 본기 6권과 열전 50권으로 이루어진 기전체 사서이다. 수(隋)의 요찰(姚察)이 시작하여 그의 아들 요사렴(姚思廉)이 당나라 때인 636년에 완성하였다. 위징(魏徵)이 편찬을 감독하며 일부 논찬(論贊)을 남겼다.

국가 주도의 관찬(官撰) 사서와 달리, 사마천 부자의 《사기》처럼 개인이 2대에 걸쳐 완성한 사찬(私撰) 사서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편찬 시 양나라 때부터 진나라에 걸쳐 편찬된 《양사(梁史)》도 참고하였다.

내용상 양나라 역사를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기록했으며, 범진(范縝), 완효서(阮孝緖), 도홍경(陶弘景) 등의 열전에는 당시 사상, 도서 목록, 의학 관련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사서의 체제인 표(表)와 지(志)가 없다.

문체는 당시 유행하던 변려문 대신 고문(古文)을 사용했으며, 권54 열전 제48 '제이(諸夷)'에는 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5]. 후대에는 대체로 공정하고 체제가 잘 갖추어졌다는 평가와 함께, 열전 구성 등에 대한 비판도 받는다.

4. 1. 개인 사서

양서》는 같은 시기에 완성된 《진서》 등 조정에서 편찬한 정사(官撰 正史)와는 달리,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가 《사기》를 편찬한 것처럼 개인이 2대에 걸쳐 편찬한 사찬(私撰) 사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총 56권으로 본기 6권과 열전 50권의 기전체로 구성되어 있다. 요사렴의 아버지 요찰(姚察)이 수(隋) 시대에 이 책의 저본을 편찬했으나 606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요사렴이 629년 역사 편찬의 명을 받아 아버지의 작업을 이어받아 7년 만에 완성했다. 당시 위징(魏徵)이 양·진·제·주·수 다섯 왕조의 역사서 편찬을 감독하는 직책(梁陳齊周隋五史監修官)을 맡고 있었기에, 〈경제기(敬帝紀)〉 뒤에는 위징이 쓴 논찬(論贊)이 실려 있다. 또한 양나라 때부터 진나라에 걸쳐 편찬되었던 《양사(梁史)》라는 책도 참고하였다.

이 책은 현존하는 양나라의 역사를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기록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범진(范縝), 완효서(阮孝緖), 도홍경(陶弘景) 등의 열전에는 당시의 사상, 도서 목록, 의학 관련 자료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 책에 연표(表)와 각종 제도 및 문물 등을 다루는 지(志)가 빠져 있다는 한계가 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양서》가 대체로 공정한 시각에서 서술되었고 체계도 잘 갖추어져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열전(列傳)의 인물 선정 기준이나 배열 순서 등이 다소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또한, 인용문을 제외한 서술 부분에서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변려문 대신 고풍스러운 고문(古文)을 사용한 점도 이 책의 특징 중 하나이다.

4. 2. 고문 사용

양서》는 인용문을 제외한 서술 부분에서, 당시 유행하던 문체인 변려문을 사용하지 않고 고문(古文)을 사용하여 작성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같은 시기에 편찬된 다른 사서들과 구별되는 점 중 하나이다.

4. 3. 평가

동시대에 완성된 《진서》 등 국가 주도로 편찬된 정사와는 달리, 사마천 부자가 《사기》를 편찬한 것처럼 개인이 대를 이어 편찬한 사찬(私撰) 사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후세에는 대체로 내용이 공정하고 체계가 잘 갖추어진 좋은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열전의 인물 선정 기준이나 배열 순서 등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인용문을 제외한 서술 부분에서 당시 유행하던 변려문 대신 고문을 사용한 점도 특징이다.

권54 열전 제48 '제이(諸夷)' 편에는 당시 를 비롯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5]. 특히 왜 관련 기록에는 왜의 오왕 중 무(武)가 남조로부터 대장군 칭호를 제수받은 사실 등이 언급되어 있다.

5. 한국 관련 기록

양서 제54권 열전 제48에는 당시 남조 양나라와 교류하거나 알려졌던 동아시아 및 주변 지역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6] 이 기록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삼국 시대의 주요 국가들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고대 한국사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된다.

또한 , 왜의 동북쪽 7천여 리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문신국(文身國), 문신국의 동쪽 5천여 리에 위치했다는 대한국(大漢國) 등 주변 세력에 대한 설명도 찾아볼 수 있다.[6]

특히 중국 동쪽 2만 리 거리에 있다는 부상국(扶桑國)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 이는 승려 혜심(慧深)이 전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록되었다.[6] 양서에 따르면 혜심은 "부상(扶桑)은 대한국(大漢國)의 동쪽 2만여 리에 있는데, 땅은 중국(中國)의 동쪽에 있으며, 그 땅에 부상목(扶桑木)이 많으므로 그 이름으로 삼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양서』에서 사용된 중국의 거리 단위인 리는 약 400m에 해당한다.[1]

이 외에도 열전 제48에는 림읍국, 푸난, 사자국, 하남왕국, 파사국 등 다양한 국가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6]

5. 1. 삼국 시대 국가

양서 제54권 열전 제48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시대와 관련된 국가를 포함하여 당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6] 해당 열전에 기록된 삼국 시대 관련 주요 국가는 다음과 같다.

5. 2. 왜(倭)

는 고대 일본의 왕국이었다. 오늘날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수도인 야마타이는 규슈 또는 긴키 지방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왜에 관해서는, 그들은 스스로를 태백의 후손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문신을 새겼다. 그들의 영토는 우리나라에서 약 20,000리(1500km) 떨어져 있으며, 대략 회계(오늘날의 사오싱(저장성) 동쪽에 위치해 있다.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대방군에서 그곳으로 가려면 해안을 따라 한국의 남동쪽으로 약 500km를 가서 처음으로 75km 떨어진 작은 섬으로 바다를 건너야 하고, 그 다음 75km를 다시 건너 미로국(未盧國)으로 가야 한다. 남동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이토국(伊都國)이 있다. 남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노국(奴國)이 있다. 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불미국(不彌國)이 있다. 배로 남쪽으로 20일 거리에 투마국(投馬國)이 있다. 배로 남쪽으로 10일 또는 육로로 한 달 거리에 야마타이국(邪馬臺國)이 있다. 그곳에 왜인의 왕이 거주한다.[2]

양서 제54권 열전 제48에는 왜(倭)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6]

5. 3. 문신국(文身國)과 대한국(大漢國)

양서에는 중국 동쪽에 위치한 여러 국가에 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중 문신국(文身國)과 대한국(大漢國)에 대한 설명이 있다. 참고로, 『양서』에서 사용된 중국의 거리 단위인 리는 약 400m에 해당한다.[1]

'''문신국'''(文身國|Wénshēn-guó중국어)은 왜국에서 북동쪽으로 7,000리(약 2800km)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3] 이곳 사람들은 온몸에 맹수를 묘사한 문신을 새겼으며, 특히 이마에는 세 개의 문신 자국으로 신분을 구별했다. 귀족은 곧은 모양의 문신을, 천민은 작은 모양의 문신을 새겼다.[3] 그들은 음악을 좋아했지만,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인색하여 낯선 이에게는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집은 있었으나 은 없었으며, 왕이 거주하는 곳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건물 주위에는 너비 약 3m의 도랑을 파고 수은을 채웠는데, 비가 오면 수은 위로 빗물이 흘렀다고 전해진다.[3] 시장에는 희귀한 물건이 많았으며, 형벌 제도가 있었다. 가벼운 죄는 가죽 채찍으로 다스렸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으면 사나운 짐승에게 던져 먹히게 했다. 만약 죄가 없다고 판단되면 짐승이 해치지 않았다고 하며, 음식을 주지 않고 감옥에 가두는 형벌도 있었다.[3]

'''대한국'''(大漢國|Dàhàn-guó중국어)은 문신국에서 동쪽으로 5,000리(약 200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4] 이곳 사람들은 군대가 없고 공격적이지 않았으며, 풍습은 문신국과 비슷했지만 언어는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4]

양서 제54권 열전 제48에는 이 두 나라 외에도 , 부상국 등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6]

6. 의의 및 영향

총 56권으로 본기 6권과 열전 50권의 기전체(紀傳體)로 구성되어 있다. 나라 때 요사렴의 아버지 요찰(姚察)이 편찬을 시작했으나 606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아들 요사렴이 태종의 명을 받아 629년부터 아버지의 작업을 이어받아 보충하고 정리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 당시 위징(魏徵)이 양·진·제·주·수 다섯 왕조의 역사서 편찬 책임자(五史監修官)였기에, 〈경제기(敬帝紀)〉 뒤에는 위징이 쓴 논찬(論贊)이 실려 있다. 또한 양나라 때부터 진나라에 걸쳐 편찬되었던 『양사』(梁史)라는 책도 참고하였다.

진서(晉書) 등 같은 시기 조정에서 편찬한 다른 정사들과 달리,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가 사기(史記)를 편찬한 것처럼 개인이 2대에 걸쳐 완성한 사서라는 점에서 독특한 의의를 가진다. 후대에는 대체로 내용이 공정하고 구성이 좋다는 평가를 받지만, 열전의 구성이나 편찬 순서가 다소 혼란스럽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인용문을 제외한 서술 부분에서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문장이 아닌 옛스러운 문체(고문, 古文)를 사용한 것도 특징으로 꼽힌다.

6. 1. 양나라 연구의 중요 자료

양서는 현존하는 양나라의 역사를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특히 범진(范縝), 완효서(阮孝緖), 도홍경(陶弘景) 등 인물들의 전(傳)에는 당시의 사상, 서적 목록, 의약 분야에 관한 귀중한 역사 자료가 보존되어 있어, 양나라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평가받는다.

다만, 양서는 본기 6권과 열전 50권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다른 정사들과 달리 표(表)와 지(志)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6. 2. 한국 고대사 연구의 사료

『양서』중국 동쪽에 위치한 여러 국가에 대한 기록과 남조 양나라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 기록들은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참고로, 『양서』에서 사용된 중국의 거리 단위 리(里)는 당시 약 400m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하나,[1] 실제 기록상의 거리와 현대적 환산 거리 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어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양서』 「제이전」(諸夷傳)에는 다음과 같은 동쪽 국가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6. 3. 동아시아사 연구의 중요 자료

양서남량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지만, 제54권 열전 제48에는 중국 동쪽의 여러 국가를 포함하여 당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어 이들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6]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고대 한국사에 대한 기록과 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동쪽 국가들에 대한 기록'''

양서에는 중국 동쪽에 위치한 여러 국가에 대한 묘사가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승려 혜심(慧深)이 언급한 부상에 대한 기록이 있다.

참고로, 『양서』에서 사용된 중국의 거리 단위 리는 약 400m에 해당한다.[1]

'''제54권 열전 제48 수록 국가'''

제54권 열전 제48에는 아래와 같이 다양한 국가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 중에는 역사적 실재가 확인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섞여 있다.[6]

국가명개요
림읍국본래 한나라 일남군 상림현으로, 옛 월상의 경계.
부남국
반반국
단단국
간타리국남해 주에 위치.
랑아수국남해 중에 위치.
파리국광주 동남쪽 남해 중의 주에 위치.
중천축국대월지 동남쪽 수천 리. 천축(인도)과 동일.
사자국현재의 스리랑카. "천축의 곁에 있는 나라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문신국(文身國)왜국의 동북쪽 7000리에 위치.
대한국(大漢國)문신국의 동쪽 5000리에 위치.
부상국(扶桑國)대한국의 동쪽 20000리에 위치.
하남국선조는 선비 모용씨에서 나옴.
고창국
활국차사(車師)의 별종.
주고가국활국 옆의 작은 나라.
아발단국활국 옆의 작은 나라.
호밀단국활국 옆의 작은 나라.
백제국(白題國)왕의 성은 지(支). 선조는 흉노 별종인 호(胡).
구자국서역의 옛 나라.
우전국서역에 속함.
갈반타국우전 서쪽의 작은 나라. (타슈쿠르간 타지크 자치현[7])
말국한(漢) 시대의 차말국(且末國).
파사국선조 파사닉(波斯匿)왕의 이름을 따 국호로 삼음.
당창국강(羌)의 종족.
등지국서량주 경계에 위치. 강(羌)의 별종, 백수강(白水羌)이라고도 함. (쓰촨성 주자이거우현)
무흥국본래 구지(仇池).
예예국흉노의 별종.


참조

[1] 서적 The Indianized States of Southeast Asia University of Hawaii Press
[2] 문서 倭人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去帶方萬二千餘里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絶遠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歴韓國 乍東乍南 七千餘里始度一海 海闊千餘里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里 名未盧國 又東南陸行五百里 至伊都國 又東南行百里 至奴國 又東行百里 至不彌國 又南水行二十日 至投馬國 又南水行十日 陸行一月日 至邪馬臺國 即倭王所居
[3] 문서 文身國 在倭國東北七千餘里 人體有文如獸 其額上有三文 文直者貴 文小者賤 土俗歡樂 物豐而賤 行客不齎糧 有屋宇 無城郭 其王所居 飾以金銀珍麗 繞屋爲塹 廣一丈 實以水銀 雨則流于水銀之上 市用珍寶 犯輕罪者則鞭杖 犯死罪則置猛獸食之 有枉則猛獸避而不食 經宿則赦之
[4] 문서 大漢國 在文身國東五千餘里 無兵戈 不攻戰 風俗並與文身國同而言語異
[5] 웹사이트 梁書卷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http://zh.wikisource[...]
[6] 웹사이트 梁書卷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http://zh.wikisource[...]
[7] 서적 대당서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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