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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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일도는 일제강점기 시인으로, 본명은 오희병, 아호는 일도이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릿쿄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31년 등단하여 서정시를 발표했다. 1934년 시지 《시원》을 창간하여 예술지상주의를 주도했으나,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고향에 은둔했다. 광복 후 서울로 돌아와 《시원》 복간을 시도했으나 간경변으로 1946년 사망했다. 현재 생가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시비가 있는 오일도 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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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한글 | 오일도 |
한자 | 吳一島 |
히라가나 | ごいっとう |
가타카나 | 오・イルド |
본명 | 오희병 (吳熙秉) |
출생일 | 1901년 2월 24일 |
출생지 | 대한제국 경상북도 영양 |
사망일 | 1946년 2월 28일 |
사망지 | 미 군정 조선 서울 (간경화) |
직업 | 시인 |
장르 | 시문학 |
사용 언어 |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
배우자 | 조필현 |
부모 | 오익휴(부), 의흥 박씨 부인(모) |
친척 | 오희태(형), 오현경(종손자) |
학력 | |
학력 | 일본 릿쿄 대학교 철학과 학사 |
경력 | |
소속 | 前 경성 근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
활동 기간 | 1931년 ~ 1946년 |
2. 생애
오일도는 1931년 문단에 등장하여 《시문학》, 《문예월간》 등에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1934년 《시원》을 창간하여 문단에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했다. <눈이여, 어서 내려 다오>, <노변의 애가> 등 주로 슬픈 서정시를 발표하였다.[1][2]
1942년, 일제의 언론 탄압이 심해지자 붓을 꺾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로 다시 상경했으나, 간경변으로 1946년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에 입원하였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장남의 집으로 옮겨졌으며, 1946년 2월 28일 요절하였다. 그의 유해는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961년에 경기도 양주시 도농에 있는 가족묘로 이장되었다.
연도 | 사건 |
---|---|
1931년 |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거주하며, 근화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
1932년 | 근화학교 (현: 덕성여자중학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
1935년 1월 | 『시원』 창간. |
1936년 | 송현동으로 이사. |
1940년 | 종로구 삼청동으로 이사. |
1942년 | 고향으로 돌아감. |
1944년 | 장녀 난전 출생. |
1945년 8월 | 동대문구 신설동 391번지에 거주. |
1946년 | 간경화증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에 입원. |
1946년 2월 28일 | 요절. |
2. 1. 출생과 성장
본명은 오희병(吳熙秉)이며 일도(一島)는 아호이다. 본관은 낙안(樂安)이며 경상북도 영양에서 출생하였다.[1][2]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릿쿄 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1901년 음력 2월 24일, 낙안 오씨의 집성촌인 경상북도영양군 영양면 감천동 780번지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1][2] 아버지는 낙안 오씨 오익휴, 어머니는 의흥 박씨이다. 칠원 현감 오시준의 10대손이며, 집안은 매우 부유한 대지주였다. 오일도는 태어나자마자 형식적으로 할아버지의 형제에게 입양되었지만, 실제로는 생가에서 교육을 받았다. 14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1915년에 지역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이 우수하여 월반으로 졸업하고, 1918년에 상경하여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한다. 14세 때, 같은 고향의 한양 조씨의 딸 조필현과 결혼한다.[1][2]
1922년, 경성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년 정도 학교에 다닌 후, 리쿄 대학의 철학과에 입학한다. 1929년에 릿쿄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3] 귀국했다.
연도 | 사건 |
---|---|
1901년 2월 24일 |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면 감천동에서 출생. |
1915년 3월 | 조필현과 결혼. |
1915년 4월 | 영양읍의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 |
1918년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 |
1921년 | 장남 훈 출생. |
1922년 | 일본으로 건너감. |
1923년 | 리쿄 대학 철학부 입학. |
1925년 | 차남 균 출생. |
1929년 | 리쿄 대학 졸업, 귀국. |
2. 2. 일본 유학과 귀국
1922년, 경성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년 정도 학교를 다닌 후, 릿쿄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여름 방학에 귀향한 후, 관동 대지진의 혼란으로 잠시 도쿄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1929년에 릿쿄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3] 귀국했다.2. 3. 문단 활동과 《시원》 창간
1931년 문단에 등장하여 《시문학》, 《문예월간》 등에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1934년 《시원》을 창간하여 문단에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했다. <눈이여, 어서 내려 다오>, <노변의 애가> 등 주로 슬픈 서정시를 발표하였다.[1][2]1931년,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살면서, 근화학교에서 무보수로 1년간 교편을 잡았다. 작품 활동도 이때부터 시작했다. 1934년, 백부에게 사재를 받아 중학동에 시원사를 세웠다. 집에 거의 돌아가지 않고 시원사에서 숙식하며 잡지 제작에 몰두했다. 1935년 2월, 시지(詩誌) 『시원』의 창간호가 간행되었다. 『시원』은 조선의 시 문학 발전에 기여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8호를 내고 휴간되었다. 오일도는 겉으로 드러나는 반일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신간회의 회원이어서 몇 차례 경찰에 불려갔다.[1][2]
2. 4.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1935년 2월, 오일도는 시지(詩誌) 『시원』 창간호를 간행하였다. 『시원』은 조선 시 문학 발전에 기여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8호를 내고 휴간되었다.[1] 오일도는 겉으로 드러나는 반일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신간회 회원이어서 몇 차례 경찰에 불려갔다.[1] 1942년, 일제의 언론 탄압이 날마다 심해지면서, 오일도는 붓을 꺾고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한다.[1]1945년 8월 15일, 조선은 해방을 맞이한다.[1] 오일도는 해방을 기뻐하며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 친구들과 만나 『시원』 복간을 모색했지만, 우울증으로 인한 폭음으로 건강을 해쳐 간경변을 앓았다.[1][2]
2. 5. 사망과 사후
오일도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이를 기뻐하며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1][2] 친구들과 만나 『시원』의 복간을 모색했지만, 우울증으로 인한 폭음으로 건강을 해쳐 간경변을 앓았다.[1][2] 1946년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에 입원했으나,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되어 장남의 집으로 옮겨졌다. 오일도는 죽는 날까지 시편을 정리하고 유고를 세상에 낼 수 있도록 힘썼다. 1946년 2월 28일, 요절하였다. 그의 유해는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961년에 경기도 양주시 도농에 있는 가족묘로 이장되었다.3. 가족 관계
4. 학력
- 대구보통학교 수료
- 영양보통학교 졸업
-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졸업
- 일본 릿쿄 대학교 철학과 학사
5. 인간 관계
사회운동가 조헌영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
6. 연보
- 1901년 2월 24일 -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면 감천동에서 출생.[1][2]
- 1915년 3월 - 조필현과 결혼.
- 1915년 4월 - 영양읍의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
- 1918년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
- 1921년 - 장남 훈 출생.
- 1922년 - 일본 유학.
- 1923년 - 리쿄 대학 철학부 입학.
- 1925년 - 차남 균 출생.
- 1929년 - 릿쿄 대학 문학부 졸업, 귀국.[3]
- 1931년 - 서울 종로구 견지동 거주.
- 1932년 - 근화학교 (현 덕성여자중학교·고등학교) 교사 재직.
- 1935년 1월 - 시지(詩誌) 『시원』 창간.
- 1936년 - 송현동으로 이사.
- 1940년 - 종로구 삼청동으로 이사.
- 1942년 -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귀향.
- 1944년 - 장녀 난전 출생.
- 1945년 8월 - 동대문구 신설동 391번지 거주.
- 1946년 - 간경변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입원.
- 1946년 2월 28일 - 별세. 미아리 공동묘지 매장.
- 1961년 - 경기도 양주시 도농 가족묘로 이장.
- 1991년 9월 6일 - 생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48호 지정.[2][4]
참조
[1]
웹사이트
"[우리동네 이야기 속으로] 53. 영양 감천마을"
http://www.kyongbuk.[...]
2021-10-24
[2]
웹사이트
일제의 억압에도 굴복않는 올곧은 선비의 절개
http://www.kyongbuk.[...]
2011-08-12
[3]
간행물
立教大学一覧 昭和8年3月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933
[4]
웹사이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오일도생가 (吳一島生家)
https://www.heritage[...]
문화재청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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