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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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881년 오스만 제국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으며,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이탈리아-튀르키예 전쟁,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터키 민족 운동을 이끌며 1919년 삼순에 상륙하여 터키 독립 전쟁을 시작했고, 1923년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칼리프제를 폐지하고 세속주의를 도입하는 등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으며,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문자를 개혁하는 등 사회·문화적 변화를 이끌었다. 그의 외교 정책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터키의 아버지"로 칭송받으며 터키에서 독립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1938년 사망했으며, 그의 정치 노선은 케말주의로 불리며 현대 터키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881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셀라닉주(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무스타파였으며, '케말'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329][308]
2. 유년 시절
어머니는 그가 종교학교에 다니길 원했지만, 무스타파는 세속적인 사립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부모는 무스타파가 무역상이 되길 원했으나, 그는 부모와 상의 없이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tr)에 입학하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315] 1896년에는 마나스트르 군사 고등학교(Manastır Askeri İdadisitr)에 입학했으며, 1899년 3월 14일에는 오스만 군사학교(Mekteb-i Harbiyetr)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tr)을 졸업하며 군 장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2. 1. 출생과 가족
아타튀르크는 1881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셀라닉주(현재 그리스 테살로니키) 아흐메트 수바시 지역 또는 이슬라하네 거리(현재 아포스톨루 파블루 거리)의 코자 카심 파샤 지역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30] 이 집은 현재 테살로니키 시가 튀르키예 정부에 기증하여 아타튀르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알리 리자 에펜디로, 원래 코자드지크(Kocacıktr) 출신이며 군인이자 토지 등기부 담당자, 목재 상인이었다.[38][39][40][41][42][43] 어머니는 쥐베이데 하눔이었다.[308] 아타튀르크에게는 여러 형제자매가 있었으나, 여동생인 마크불레 아타단(1956년 사망)만이 유년기를 지나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31]
아타튀르크의 혈통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47] 앤드류 망고에 따르면 그의 가족은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는 무슬림 중산층 가정이었다.[32] 아버지 알리 리자의 혈통에 대해 일부는 알바니아인이라고 주장하지만,[33][34][35][36][37] 팔리흐 르프크 아타이, 바믹 D. 볼칸, 노먼 이츠코위츠 등 터키 역사가들은 그의 조상이 아나톨리아 아이든 주의 쇠케에서 이주한 튀르크인이라고 주장한다.[38][39][40][41][42][43] 어머니 쥐베이데는 튀르크인 혈통으로 여겨지며,[34][35] 특히 튀르크계 예르크 혈통이라는 설이 있다.[44] 일부에서는 그녀가 알바니아인,[45] 마케도니아 토르베시,[46] 또는 무슬림 불가리아인 출신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47] 한편, 오스만 시대 테살로니키에 유대인 공동체가 컸다는 점을 들어, 아타튀르크의 개혁에 반감을 가진 이슬람주의 반대파들은 그가 도니메(이슬람으로 개종한 유대인) 혈통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48][313]
아타튀르크의 본명은 '''무스타파'''였다. 그의 두 번째 이름인 케말(아랍어로 '완벽' 또는 '성숙'을 의미)은 살로니카 군사 학교의 수학 교사였던 위스퀴프뤼 무스타파 에펜디 대위가 지어준 이름이다.[329] 아페트 이난에 따르면, 교사는 무스타파의 능력과 성숙함에 감탄하여 이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21][22] 다른 설명으로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학생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23][24] 앤드류 망고는 아타튀르크가 민족주의 시인 나믹 케말을 기리기 위해 스스로 선택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25] 1934년 성씨법 제정 이후 '아타튀르크'(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성을 받았고, 이름은 '''케말 아타튀르크'''가 되었다. 1935년에는 잠시 튀르키예어식 표기인 '카말'(Kamaltr, '요새', '군대' 등을 의미[28])을 사용하기도 했으나,[29] 1937년부터 다시 '케말'(Kemaltr) 표기를 사용했다.[26]
어린 시절, 어머니 쥐베이데는 아들이 종교 학교에 다니기를 원했지만, 그는 잠시 마지못해 다녔을 뿐이었다. 아버지 알리 리자는 그가 세속적인 셈시 에펜디 학교(Şemsi Efendi Mektebitr)에 다니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타튀르크가 7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49] 이후 가족은 잠시 삼촌에게 의탁했다. 어머니는 그가 기술을 배우길 원했으나, 아타튀르크는 1893년 부모와 상의 없이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tr)에 입학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315]
2. 2. 어린 시절과 교육
아타튀르크는 1881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셀라닉주(현재 그리스 테살로니키) 아흐메트 수바시 지역 또는 이슬라하네 거리(현재 아포스톨루 파블루 거리)의 코자 카심 파샤 지역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30] 그의 아버지는 알리 리자 에펜디로, 원래 코자드지크( Kocacık|코자즉tr ) 출신의 군인이자 토지 등기부 담당자, 목재 상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쥐베이데 하눔이었다.[308] 그의 부모는 "선택받은 자"를 의미하는 '''무스타파'''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무스타파에게는 여러 형제자매가 있었으나, 여동생인 마크불레 아타단만이 유년기를 넘겨 1956년에 사망했다.[31] 아타튀르크가 태어난 집은 현재 테살로니키 시에서 튀르키예 정부에 기증하여 아타튀르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타튀르크의 가족 배경과 혈통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제기된다.[47] 앤드류 망고에 따르면 그의 가족은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에 속했다.[32] 아버지 알리 리자의 혈통에 대해서는 일부 저술가들이 알바니아인이라고 주장하지만,[33][34][36][37] 팔리흐 르프크 아타이, 바믹 D. 볼칸, 노먼 이츠코위츠 등 터키의 역사학자들은 그의 조상이 아나톨리아의 아이든 주 쇠케에서 이주한 튀르크인이라고 본다.[38][39][40][41][42][43][328] 어머니 쥐베이데는 튀르크인 혈통으로 여겨지며,[34][35] 셰브케트 쉬레야 아이다미르에 따르면 튀르크계 민족인 예르크(외뤼크) 혈통이었다.[44] 다른 주장으로는 그녀가 알바니아인,[45] 마케도니아 토르베시,[46] 또는 무슬림 불가리아인[47], 슬라브족[328] 혈통이라는 설도 있다. 오스만 시대 테살로니키에 유대인 공동체가 컸다는 점 때문에, 개혁에 반감을 가진 이슬람주의 반대파들은 아타튀르크가 겉으로만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대인인 도니메(샤브타이파)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48][313]
무스타파의 두 번째 이름인 '''케말'''(아랍어로 "완벽" 또는 "성숙"을 의미)은 그의 수학 선생님이던 위스퀴프뤼 무스타파 에펜디 대위(또는 유스퀴프뤼 무스타파 사브리 베이 대위[308])가 지어준 이름이다.[329] 아페트 이난에 따르면, 선생님은 무스타파의 수학 실력과 성숙함에 감탄하여 이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21][22] 다른 설명으로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학생과 구분하기 위해 지어주었다는 설[23][24], 또는 무스타파 스스로 민족주의 시인 나믹 케말을 존경하여 선택했을 것이라는 설[25]도 있다. 알칸은 그가 군 복무 중 케말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본다.[26] 1934년 성으로 '아타튀르크'를 받은 후에는 '케말 아타튀르크'로 불렸고, 이름 '무스타파'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1935년에는 잠시 구 튀르키예어[27] 이름인 '카말'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요새', '군대', '방패'를 의미했다.[28] 당시 아나돌루 통신은 이 이름이 아랍어 '케말'과는 다르며 튀르키예어라고 설명했다.[29] 그러나 아타튀르크는 1937년 5월부터 다시 '케말'이라는 표기를 사용했으며, 이는 튀르키예어 개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26]
어린 시절, 어머니 쥐베이데는 아들이 종교학교에 다니기를 원했지만, 무스타파는 잠시 다니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양식 교육을 하는 사립학교인 셈시 에펜디 학교( Şemsi Efendi Mektebi|솀시 에펜디 메크테비tr )에 입학했다.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49] 이후 가족은 잠시 삼촌에게 의탁했다. 어머니가 재혼하자 무스타파는 홀홀 지역의 이모 에미네 하눔의 집에서 지냈다.[314] 어머니는 그가 직업을 배우길 원했지만, 무스타파는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1893년 살로니카 군사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 입학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315] 이 학교에서는 프랑스어 교관 메흐메트 나키 위체쾩의 영향을 받았다. 1896년에는 마나스트르 군사 고등학교(현재 북마케도니아 비톨라)에 입학하여 수학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으며,[50] 역사 교관 메흐메트 테브피크 빌게에게 영향을 받았다. 1899년 3월 14일,[51]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 시쉴리 지역 팡갈티에 있는 오스만 군사학교(Mekteb-i Harbiye)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했다. 이후 1905년 1월 11일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오스만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했다.[51]
3. 군인 시절
육군대학교 졸업 후, 무스타파 케말은 반독재주의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330] 이후 다마스쿠스의 제5군 사령부에서 대위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그는 압둘 하미드 2세의 전제 정치에 반대하며 동료들과 비밀결사 '조국과 자유(Vatan ve Hürriyet)'를 조직했다.[330][317] 1907년 상급 대위로 진급하여 마나스트르의 제3군 사령부로 옮겼고, 이곳에서 통일진보위원회에 가입했다.[317] 1908년 청년 튀르크 혁명에 참여하여 입헌 군주제 회복에 기여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군대의 정치 개입을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한때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파견되기도 했다.[331] 그러나 1909년 이스탄불에서 발생한 반혁명 3월 31일 사건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알바니아 등지에서 근무하고 프랑스에서 열린 군사 훈련에 참관하는 등 경력을 쌓았다.[332]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자원하여 이탈리아군에 맞서 싸웠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토브루크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눈 부상을 입기도 했다.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유럽 전선으로 복귀하여 참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그의 군사적 역량이 두드러졌다. 특히 1915년 갈리폴리 전투에서 제19사단장 및 아나파르타랄 집단 사령관으로서 연합군의 상륙을 성공적으로 저지하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 승리로 그는 '파샤' 칭호를 얻고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케말 파샤'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333] 이후 카프카스 전역과 팔레스타인 전선 등에서 군단을 지휘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오스만 제국의 패배로 끝나고 연합국이 오스만 영토를 분할 점령하기 시작하자, 무스타파 케말은 이에 맞서 터키 민족 운동을 조직하고 터키 독립 전쟁을 이끌었다.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사카르야 전투 등 중요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터키의 독립을 지켜냈다.[334] 그의 군사적 성공은 이후 터키 공화국 수립의 기반이 되었다.
3. 1. 초창기 경력
1905년 1월 11일 육군대학교를 5등 성적으로 졸업하고 참모대위로 임관한 무스타파 케말은[317] 연수를 위해 다마스쿠스에 주둔한 제5군에 배속되었다.[51] 그러나 졸업 직후, 반독재주의자로서 압둘 하미드 2세의 전제 정치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몇 달 동안 구금되었다.[330][53] 과거 학교 교장이었던 리자 파샤(Rıza Paşa)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330][53]
다마스쿠스에서 그는 알리 푸앗 체베소이, 뤼트피 뮈핏 외즈데시 등과 함께 근무했으며[54], 군의관 무스타파 잔테킨 등과 함께 비밀 혁명 조직인 조국과 자유(Vatan ve Hürriyet)를 결성하고 가입했다.[330][54] 이 조직은 압둘 하미드 2세 술탄의 독재에 반대하는 개혁 성향 장교들의 모임이었다. 그는 마케도니아 지부 설립을 위해 군의 허가 없이 살로니카로 가기도 했다.
1907년 6월 20일, 그는 상급 대위(Kolağası)로 진급했고[55], 같은 해 10월 13일 마나스트르(현재의 비톨라)에 있는 제3군 사령부로 전속되었다.[330][55][317] 그는 마케도니아에서 활동하던 통일진보위원회(CUP, 흔히 '청년 튀르크당'으로 불림)에 회원 번호 322번으로 가입했다.[55] 통일진보위원회는 1906년 '조국과 자유'를 흡수하며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은 이후 위원회 지도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게 된다.
1908년 6월 22일, 그는 동부 루멜리아 지역의 오스만 철도 감독관으로 임명되었고[55], 같은 해 7월 청년 튀르크 혁명에 참여하여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로부터 권력을 되찾고 입헌 군주제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혁명 이후 무스타파 케말은 군대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통일진보위원회 지도부의 반감을 샀다.[53] 그 결과, 1908년 말 그는 현재의 리비아 지역인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견되어 부족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는 사실상 한직으로 밀려난 것이었지만, 그가 자원했다는 기록도 있다.[331][56] 그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1909년 1월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1909년 1월 13일 제3군 예하 살로니카 예비사단 참모장에 임명되었고[317], 같은 해 4월 이스탄불에서 군인들이 일으킨 반혁명 운동인 3월 31일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7] 그는 제3군(살로니카)과 에디르네(과거 아드리아노플)의 제2군에서 차출된 부대로 편성된 “행동군”에 예비 사단 작전과장으로 참여하여 이스탄불 진압 작전에 기여했다.
1910년에는 오스만령 알바니아로 발령받았다.[58][59] 당시 코소보에서는 이사 볼레티니가 주도하는 봉기가 있었고, 알바니아 지역에서도 1910년 알바니아 봉기가 일어난 상황이었다.[332][60][61] 그는 이곳에서 알바니아의 정치인 에크렘 블로라를 만나기도 했다.[62][63]
같은 해 가을, 그는 오스만 제국의 관전 장교 자격으로 프랑스 피카르디에서 열린 대규모 군사 훈련에 참관했다.[75] 통일과 진보 협회 제2회 대회에서는 직업 군인에 의한 정치 활동 금지를 재차 제안했다.[318] 1911년 1월 15일에는 제5군단 사령부에 배속되어 제38보병연대를 거쳤고[317], 같은 해 9월 27일 이스탄불의 전쟁부(Harbiye Nezareti)에서 잠시 근무했다.[317][75]
3. 2.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년 이탈리아가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무스타파 케말은 자원하여 트리폴리타니아로 향했다.[64] 이때 통일과 진보 위원회의 이스마일 엔베르 베이, 알리 페트히 베이 등 다른 장교들도 자원하여 동행하였다. 1911년 11월 27일, 배 위에서 소좌(Binbaşı)로 승진한 무스타파 케말은 신분을 기자 "무스타파 셰레프"로 위장하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경유하여 육로로 벵가지에 잠입했다.[317] 당시 오스만 제국은 예멘에서 발생한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리비아 주둔 병력 상당수를 차출한 상태였고, 이집트를 통치하던 영국은 오스만 군대의 이집트 통과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과 물자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탈리아 해군은 해상로를 통제하고 있어, 아타튀르크와 같은 오스만 군인들은 아랍인으로 변장하여 육로를 통과하거나 소수의 배를 이용해야 했다.[67]
무스타파 케말은 주로 벵가지, 데르나, 토브루크 등지에서 약 2만 명의 베두인과 8천 명의 튀르크 병력으로 15만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군에 맞서 싸웠다.[66][67] 1911년 12월 18일, 벵가지-데르네 지역 동부의 의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는[317]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여러 차례 이탈리아군을 격퇴했으며, 특히 1911년 12월 22일 토브루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12년 1월 16일에서 17일 사이 벌어진 데르나 전투 중, 무스타파 케말은 이탈리아군이 점령한 요새를 공격하던 중 이탈리아 비행기가 투하한 폭탄으로 인해 파괴된 건물 잔해에서 튄 석회암 파편에 왼쪽 눈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으로 영구적인 조직 손상을 입었으나 시력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그는 적신월사의 의료 시설에서 약 한 달간 치료를 받았다. 1912년 3월 6일, 그는 데르나 지역의 오스만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317] 게릴라전을 지휘하며 1912년 10월 18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데르나 지역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1912년 10월 8일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무스타파 케말을 비롯한 오스만 지휘관들은 유럽 전선으로 복귀해야 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1912년 10월 18일 스위스 로잔의 우시 성에서 이탈리아 왕국과 우시 조약(1912년 로잔 조약)을 체결하고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 페잔, 키레나이카(현재의 리비아)를 이탈리아에 할양했다.[68]
3. 3. 발칸 전쟁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리비아에서 소환된 무스타파 케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안과 치료를 받은 후, 1912년 11월 24일 다르다넬스 해협 지역의 혼성부대 사령부 작전과장으로 부임했다.[317] 12월 1일에는 갈리폴리 반도의 새로운 본부에 도착하여, 빈바시 페티 베이가 지휘하는 부대의 일원으로 부라이르 해안 상륙 작전에 참여했다. 이 부대는 이후 보라유르 군단으로 재편되었고, 케말은 같은 직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1913년 1월 26일 부라이르 전투에서 이 부대는 게오르기 토도로프 장군이 이끄는 불가리아 제4군 예하 제7 릴라 보병사단에게 패배했다.[69]
1913년 6월 제2차 발칸 전쟁이 시작되자, 무스타파 케말은 카이마캄 엔베르 베이가 지휘하는 오스만 군대에 합류했다.[71] 이 전쟁에서 오스만 군대는 불가리아에 공세를 펼쳐 7월 15일 케샨, 17일 이프살라, 18일 우주은쿄프뤼를 점령했다. 7월 21일에는 에디르네(1365년부터 1453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에 입성하여 디메토카를 포함한 동부 트라키아 대부분을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전쟁 후인 1913년 10월 27일, 무스타파 케말은 발칸 반도 모든 국가를 담당하는 오스만 제국 군사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부임했다.[317] 그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와 몬테네그로의 수도 체티네 주재 업무도 겸임했다.[317] 1914년 3월 1일에는 카이마캄(중령/대령 계급)으로 승진했다.[51] 소피아에 머무는 동안, 그는 발칸 전쟁 당시 자신의 부대와 싸웠던 불가리아 장군 스틸리얀 코바체프의 딸 디미트리나 코바체바를 만났다. 스위스에서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와 무스타파 케말은 새해 전야 무도회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고 비밀리에 교제했다.[72] 그는 디미트리나의 부모에게 두 차례 결혼 허락을 구했으나(두 번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모두 거절당했고, 이는 그에게 큰 슬픔으로 남았다.[72]
3. 4.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은 1914년 중앙 연합국 편으로 유럽 및 중동 전선에 참전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갈리폴리 전투 기간 중 제5군 예하 제19사단을 창설하고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1915년 1월 20일 제19사단장으로 임명된 케말은 2월 25일 제3군단 예하 메흐메트 에사트 파샤의 지휘 아래 갈리폴리 반도에 배치되었다. 3월 23일, 사단은 제바트 베이의 명령으로 예비 병력으로 이동했고, 이후 독일 제국의 오토 리만 폰 잔데르스 장군이 지휘하는 제5군의 예비대로 편입되었다. 1915년 4월 25일, 연합국 군대가 갈리폴리 상륙 작전을 개시하자, 케말은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군단(ANZAC)이 상륙한 아르부르누(Arıburnu) 지역으로 이동하여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는 연합군의 공격 지점을 정확히 예측하여 최전선 사령관이 되었고, 이 공로로 1915년 6월 1일 대령으로 승진했다. 8월 6일 영국군 제9군단이 수블라 만(Suvla Bay)에 상륙하자, 제5군 사령관 잔데르스 장군은 즉각 반격을 명령했다. 초기 대응이 지연되자 케말은 8월 8일부터 아나파르타랄(Anafartalar) 집단 사령관으로서 지휘권을 위임받아 영국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 활약으로 그는 이스탄불 언론으로부터 "아나파르타랄의 영웅"으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이름은 유럽 등 외국에도 '케말 파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333] 8월 19일부터는 제16군단 사령관도 겸임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승리는 케말의 군사적 명성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2월 10일 아나파르타랄 집단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1916년 1월 14일까지 에디르네에서 복무했다.
1916년 1월 27일, 케말은 제16군단 사령관으로 에디르네에 부임했으며, 이후 카프카스 전역으로 파병되어 디야르바크르로 이동했다. 그는 반 호수와 차팍추르(현 빙골) 사이의 전선을 담당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전공으로 1916년 3월 19일 미르리바(Mirliva, 소장급)로 승진하며 파샤 칭호를 받았다. 8월 7일,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서 러시아 제국군으로부터 비틀리스와 무슈를 일시적으로 탈환하여 러시아군 사령부의 계획을 좌절시켰다.[73][74] 이 승리 후, CUP 정부는 헤자즈에 새로운 군대 창설과 함께 케말을 사령관으로 제안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75]
1917년 3월 7일, 케말은 제16군단 사령관에서 제2군 전체 사령관 대리로 승진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발발로 차르 군대가 철수하면서 동부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75][73] 1917년 7월 5일, 그는 제7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일디림 군단의 에리히 폰 팔켄하인 장군 휘하로 들어갔다.[75] 그러나 케말은 팔켄하인 장군과 전략적 견해 차이로 충돌했으며, 미랄라이 이스메트 베이와 함께 팔레스타인 전선의 열악한 상황과 자원 부족에 대한 보고서를 탈라트 파샤에게 제출했다. 그들은 독일군 대신 터키군 지휘 하에 오스만 시리아 북부에 더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으나, 탈라트 파샤는 이를 무시했다.[75] 보고서가 거부되자 케말은 제7군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이스탄불로 돌아왔다.[75] 10월 9일 다시 제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인 11월 7일 총사령부에 배속되었다.
1917년 12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당시 황태자였던 메흐메트 바히데딘의 독일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방문에 동행했다.[75] 이 기간 동안 그는 서부 전선의 독일군 진지를 방문하고 중앙 연합국의 패배가 임박했음을 확신했으며, 빌헬름 2세와 독일 고위 장성들에게 이러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75] 귀국길에 1918년 5월 30일부터 7월 28일까지 카를스바트와 빈에서 요양했다.[75]
1918년 7월 메흐메트 6세가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하자, 그는 케말을 이스탄불로 소환했고, 여러 차례 회의 끝에 8월 7일 그를 다시 팔레스타인 전선의 제7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76] 술탄은 그에게 "술탄의 명예 부관" 칭호를 수여했다. 케말은 8월 26일 알레포에 도착하여 나블루스의 본부로 이동했다. 9월 19일 메기도 전투가 시작되자 제8군이 와해되었고, 리만 폰 잔더스 장군은 제7군에게 요르단 강 방면으로의 후퇴를 명령했다. 제7군은 후퇴 중 9월 21일 영국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77] 케말은 알레포 북쪽에 성공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킨로스 경은 케말이 전쟁 중 패배를 겪지 않은 유일한 터키 장군이었다고 평가했다.[78]
전쟁은 1918년 10월 30일 체결된 무드로스 휴전 협정으로 막을 내렸다. 10월 31일, 케말은 리만 폰 잔더스의 뒤를 이어 일디림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앙테프(현 가지안테프)의 민간인들에게 무기를 배포하여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 준비를 조직했다.[75] 또한 전선 남쪽에 남겨진 오스만 군대의 귀환을 조직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18년 11월 7일 일디림 군단이 공식적으로 해체되면서 케말은 사령관직에서 물러났고, 11월 13일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수도 이스탄불로 돌아왔다.[75] 그는 한동안 육군부 본부에서 근무하며 1919년 5월 16일까지 이스탄불에 머물렀다.[75]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스만 제국의 분할 계획에 따라 연합국은 아나톨리아를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이스탄불 점령과 이즈미르 점령은 터키 민족 운동과 터키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79]
4. 터키 독립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후 오스만 제국은 연합국에 의해 분할될 위기에 처했다. 1918년 11월 13일, 이스탄불로 돌아온 무스타파 케말은 연합국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봉쇄한 것을 목격했다. 제국 정부가 연합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자, 케말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저항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19년 4월, 제바트 파샤, 페브지 파샤 등은 비밀 회담을 통해 국토 방위를 위한 군 감찰관 구역 설립을 결정했고("삼인의 서약"), 이는 술탄 메흐메트 6세의 승인을 받았다.[319] 무스타파 케말은 제9군 감찰관으로 임명되어 동부 아나톨리아로 파견되었다.[320] 5월 19일, 케말은 반둘마호를 타고 삼순에 상륙하여 본격적인 독립 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이 날은 오늘날 터키에서 '아타튀르크 추모 및 청소년 체육의 날'로 기념된다. 케말은 에르주룸과 시바스에서 회의를 열어 아나톨리아 각지의 저항 세력을 규합하고 '아나톨리아 권리 옹호 위원회'를 결성하여 저항 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1920년 3월 16일, 저항 운동의 확산에 위협을 느낀 연합군은 이스탄불을 공식 점령하고 오스만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에 많은 의원들이 아나톨리아 내륙의 앙카라로 피신하여 권리 옹호 위원회와 합류했고, 4월 23일 튀르키예 대국민의회(GNA)를 개원했다. 대국민의회는 스스로를 터키 민족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선언하고 무스타파 케말을 의장으로 선출하여 튀르키예 대국민의회 정부(앙카라 정부)를 수립했다. 케말은 앙카라 정부 내 반대파를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고, 소비에트 연방과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여 외부의 지원을 확보하는 한편, 국내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견제하기 위해 정부 통제 하의 터키 공산당을 창설하기도 했다.[321][322]
한편, 세브르 조약에 따라 아나톨리아 서부를 할양받은 그리스는 영토 확장을 위해 내륙으로 진격해왔다. 앙카라 정부군은 초기 열세에 몰렸으나, 1921년 8월 무스타파 케말이 총사령관직을 맡아 지휘한 사카랴 강 전투에서 그리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퇴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터키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1922년 9월, 이즈미르를 탈환하며 그리스군을 아나톨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이때 케말이 내린 "군대여, 그대들의 첫 목표는 지중해다. 전진하라!"(Ordular, ilk hedefiniz Akdeniz'dir. İleri!tr)는 명령은 독립 전쟁의 상징적인 구호가 되었다.
군사적 승리를 바탕으로 앙카라 정부는 연합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1922년 10월, 연합국이 로잔 강화 회의에 앙카라 정부와 이스탄불의 오스만 정부를 동시에 초청하자, 무스타파 케말은 이를 계기로 국가의 이중 권력 구조를 해소하고자 했다. 11월 1일, 대국민의회는 술탄제 폐지를 결의하여 600년 이상 지속된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메흐메트 6세는 국외로 망명했고, 대국민의회는 상징적인 칼리프로 압둘메지트 2세를 선출했다(11월 19일).[323] 이후 인도의 무슬림들이 칼리프 지위 유지를 호소하며 보낸 편지를 정치 개입의 증거로 삼아 칼리프제 폐지의 명분으로 활용했고, 결국 1924년 오스만 가문을 국외로 추방하고 칼리프제를 완전히 폐지했다.
1922년 11월부터 시작된 로잔 회의는 터키의 주권과 관련된 여러 쟁점을 둘러싸고 난항을 겪었으나,[100][74] 1923년 7월 24일 마침내 로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터키는 완전한 독립과 주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현대 터키 공화국의 국경이 확립되었다. 이는 터키 독립 전쟁의 최종적인 승리였으며,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 선포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다.[101]
4. 1. 터키 민족 운동의 시작

1922년 11월 21일 로잔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스메트 이뇌뉘가 이끄는 터키 대국민의회(GNA) 대표단은 터키의 주권을 침해하는 어떤 제안, 예를 들어 터키 재정 통제, 조약권, 해협 통제 및 기타 문제들에 대한 요구를 거부했다.[100] 회의는 1923년 2월 4일에 잠시 중단되었으나, 4월 23일부터 주로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재개되었다.[74] 마침내 1923년 7월 24일, 연합국 열강과 터키 대국민의회는 로잔 조약에 서명하여 대국민의회를 터키의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했다.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었다.[101] 이후 매년 10월 29일은 공화국 기념일로 지정되어 국가적으로 기념되고 있다.[102] 앞서 1921년에 제정된 23개조의 터키 헌법은 1923년에 개정되어 국민주권 원칙을 명시했으나, 결국 다음 해인 1924년에 완전히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또한, 터키 대국민의회는 선거를 통해 의원을 선출하기 시작했으며, 의회는 단원제였고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다. 같은 해 수도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겨졌다.
1923년, 무스타파 케말은 자신의 측근인 이스메트 이뇌뉘에게 터키 최초의 내각 구성을 맡겼다. 이뇌뉘 내각은 약 1년간 지속되었고, 다음 해에는 페트히 오크야르에게 내각 구성이 맡겨졌다. 그러나 1925년에 다시 이뇌뉘가 총리직에 복귀하여 1937년 제랄 바야르에게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장기 집권했다.
초기에 무스타파 케말은 온건한 야당 육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5년을 전후하여 야당인 Progressive Republican Party (Turkey)|영어이 개혁에 저항하고, 동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종교 지도자 Sheikh Said|영어가 주도한 Sheikh Said rebellion|영어 등 케말의 개혁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정책 방향을 바꾸었다. 1926년에 발생한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체포하여 정계에서 축출했다. 다음 날, 무스타파 케말은 의회에서 6시간에 걸쳐 연설하며 마지막에 "내가 터키다!"라고 선언했다. 이로써 무스타파 케말이 당수로 있는 공화인민당에 의한 일당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 1930년에는 잠시 Serbest Cumhuriyet Fırkası|tr의 결성을 허용하기도 했으나, 당 내부에 이슬람 과격파 세력이 침투하자 당수 페트히 오크야르는 자발적으로 당을 해산했다.
이 시기 이슬람 과격파가 세력을 넓히고 있었으며, 군의 소위였던 무스타파 페흐미 쿠브랄이 보수파의 봉기 과정에서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4. 2. 앙카라 정부 수립
1922년 11월 21일 로잔 회의가 시작되었다. 터키 대국민의회는 이스메트 이뇌뉘를 대표로 파견하여 터키의 주권을 침해하는 어떤 제안도 거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터키 재정 통제, 조약권, 해협 문제 등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100] 회의는 1923년 2월 4일에 잠시 중단되었으나, 4월 23일부터 주로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재개되었다.[74] 결국 1923년 7월 24일, 열강과 터키 대국민의회는 로잔 조약에 서명하였고, 이로써 대국민의회는 터키의 합법적인 정부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었다.[101] 이후 매년 10월 29일은 공화국 기념일로 지정되어 국가적인 기념일로 지켜지고 있다.[102] 앞서 1921년에는 23개 조항으로 구성된 터키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923년에는 이 헌법을 개정하여 국민주권 원칙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4년에는 완전히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또한, 터키 대국민의회는 선거를 통해 의원을 선출하는 단원제 의회로 구성되었고,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다. 같은 해(1923년),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이전하였다.
1923년, 무스타파 케말은 자신의 측근인 이스메트 이뇌뉘에게 터키 최초의 내각 구성을 맡겼다. 이뇌뉘 내각은 약 1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페트히 오크야르에게 잠시 내각 구성 책임이 넘어갔으나, 1925년에 다시 이뇌뉘가 총리직을 맡아 1937년 젤랄 바야르에게 넘겨줄 때까지 장기간 내각을 이끌었다.
초기에 무스타파 케말은 온건한 야당의 육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5년을 전후하여 진보공화당의 개혁 저항 움직임과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종교 지도자 Şêx Seîd|셰이크 사이드ku가 주도한 셰이크 사이드 반란 등 케말의 개혁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정책 방향을 바꾸었다. 특히 1926년에 발생한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반대파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여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이 사건 다음 날, 무스타파 케말은 의회에서 6시간에 걸쳐 연설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연설 말미에 "내가 터키다!"라고 선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해 무스타파 케말이 당수로 있는 공화인민당의 일당 독재 체제가 사실상 확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에는 자유공화당의 결성을 허용하기도 했으나, 당 내부에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침투하자 당수 페트히 오크야르는 자발적으로 당을 해산하였다.
이 시기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군 소위였던 무스타파 페흐미 쿠빌라이가 보수파의 봉기 과정에서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4. 3. 그리스-터키 전쟁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은 삼순에 상륙하여 터키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과 시바스를 거치며 제국군 사령관들과 구 통일진보위원회 유력자들을 규합하여 오스만 제국 영토의 보전을 요구하는 선언을 발표하고, '아나톨리아 권리 옹호 위원회'를 결성하여 저항 운동을 조직화했다.1920년 3월 16일, 연합군이 이스탄불을 점령하자 오스만 제국 의원 다수가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탈출하여 권리 옹호 위원회와 합류했다. 이들은 앙카라에서 대국민의회(GNA)를 열고, 스스로를 오스만 제국 의회를 대신하는 국가 대표 정부로 선언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대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튀르키예 대국민의회 정부(앙카라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앙카라 정부가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서부에서는 그리스군이 앙카라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사카랴 강 전투에서 그리스군을 격퇴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터키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1922년 9월, 지중해 연안의 주요 도시 이즈미르를 그리스로부터 탈환했다. 이때 무스타파 케말은 "전군에 고하노니, 너희들의 첫 번째 목표는 지중해다, 전진하라!"(Ordular, ilk hedefiniz Akdeniz'dir. İleri!tr)는 유명한 명령을 내렸다.
터키군의 연이은 승리로 앙카라 정부는 연합국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다. 1922년 11월 21일 로잔 회의가 시작되었고, 이스메트 이뇌뉘가 이끄는 터키 대표단은 터키의 재정 통제, 조약권, 해협 문제 등 터키의 주권을 침해하는 어떤 제안도 거부했다.[100] 회의는 잠시 중단되었으나 1923년 4월 23일 재개되어 주로 경제 문제에 집중하여 논의를 이어갔다.[74] 마침내 1923년 7월 24일, 연합국과 대국민의회는 로잔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대국민의회를 터키의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하고 터키의 독립과 주권을 확립했다. 이 조약은 세브르 조약을 대체하며 현대 터키 공화국의 국경을 확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5. 대통령 시절
1923년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국가 현대화를 목표로 삼고 본격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103] 그의 개혁은 오스만 제국의 유산에서 벗어나 터키를 현대적이고 민주적이며 세속주의적인 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104],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 과정에서 보수 세력의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122]
5. 1. 공화국 선포와 초기 개혁
1923년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국가 현대화를 목표로 광범위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새 정부는 프랑스, 스웨덴, 이탈리아, 스위스 등 서구 국가들의 제도와 헌법을 분석하여 터키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고자 했다. 아타튀르크는 자신의 군사적 명성을 바탕으로 페브지 차크막, 카짐 외잘프, 이스메트 이뇌뉘와 같은 동료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하여 개혁을 실행에 옮겼다.[103] 그의 목표는 터키 사회를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중심적 유산에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민주적이며 세속주의적인 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104] 그는 국가의 완전한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며, 이는 정치, 경제, 사법, 군사,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의 자주성을 의미했다.[105]
이러한 개혁의 이념적 토대는 케말주의, 또는 "여섯 개의 화살"로 불리는 원칙들에 기반했다. 케말주의는 아타튀르크의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바탕으로[108] 민족주의, 대중주의, 국가주의, 세속주의, 공화주의, 개혁주의를 핵심 가치로 삼았다. 특히 케말주의적 세속주의는 다른 국가들과는 구별되는 터키 고유의 방식으로 적용되었다. 아타튀르크의 개혁 아이디어 중 상당수는 이미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논의되던 것들이었으나[107], 그는 이를 강력한 리더십으로 구체화하고 실현시켰다.
정치 및 법률 개혁가장 상징적인 개혁 중 하나는 1924년 3월 3일, 632년부터 약 1300년간 지속되어 온 칼리파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것이다.[121][122] 1922년 술탄제 폐지 이후 명목상 칼리파로 선출된 압둘메지드 2세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자[119][120], 아타튀르크는 공화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칼리파제 폐지를 단행했다. 그는 의회 연설에서 "이슬람교는 과거와 같이 정치적 도구가 되는 것을 그만두면 더욱 숭고해질 것"[121]이라고 주장하며 폐지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칼리파의 모든 권한은 터키 대국민의회(GNA)로 이관되었다. 이 조치는 국내 보수 세력의 강력한 반발[122]과 일부 이슬람 국가들의 논란을 야기했으나[122], 아타튀르크는 이를 터키의 주권 문제로 간주하고 타협하지 않았다.[123]
1924년 4월 8일에는 샤리아 법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124][125], 1925년에는 수피 교단의 활동이 금지되는 등 종교가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한 조치들이 이어졌다. 1926년에는 스위스 민법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민법을 도입하여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했다. 1928년에는 헌법에서 이슬람교를 국교로 규정한 조항을 삭제하여 정교분리 원칙을 더욱 공고히 했다.
국제적으로는 1923년 로잔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 시대에 맺어진 불평등 조약을 폐기했으며, 1936년 몽트뢰 조약 체결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회복했다.
사회 및 문화 개혁1925년에는 복장 개혁이 시행되어 전통적인 복장 규제가 완화되었고, 특히 여성들의 복장 선택의 자유가 확대되었다. 또한 여성의 교육권이 보장되고 남녀평등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30년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이 부여되었다.[311] 같은 해(1925년) 이슬람력이 폐지되고 서양식 그레고리력이 공식 도입되었다.
1928년에는 튀르키예어 표기 문자를 기존의 아랍 문자에서 로마자 기반의 새로운 알파벳으로 변경하는 혁명적인 문자 개혁이 단행되었다.[310] 이는 터키어의 발음 구조에 더 적합하고 배우기 쉬운 문자를 보급하여 문해율을 높이고 서구와의 교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와 함께 터키어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어휘를 터키 고유어나 고어에서 찾은 단어로 대체하려는 터키어 순화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학교에서는 페르시아어와 아랍어 강좌가 폐지되고 터키어 교육이 강화되었다.
그리스와 터키의 인구 교환을 통해 국내 민족 구성을 동질화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며, 아르메니아어, 쿠르드어, 그리스어 등 비(非)터키어에서 유래한 지명들을 터키식으로 변경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문화 진흥을 위해 1931년 아타튀르크는 사재를 출연하여 를 설립했고, 이후 앙카라에 터키어학회를 세워 터키의 역사와 언어 연구를 장려했다.[324] 1936년에는 현재 사용되는 초승달과 별 문양의 터키의 국기와 터키 국가가 공식 제정되었다.
교육 개혁

아타튀르크는 교육을 국가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보고, "국가 교육 문제에서 성공해야 하며 성공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교육 개혁에 힘썼다.[126] 그는 교육을 통해 국민들을 독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독립 전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여겼다.
1924년 3월 3일, '교육통합법'(Tevhid-i Tedrisat Kanunu, 제430호)이 제정되어 기존의 메드레세(전통 종교 학교), 탄지마트 시기 설립된 근대식 학교, 외국인 및 소수민족 학교 등 다양한 교육 체계를 국립교육부 산하의 단일한 시스템으로 통합했다.[127] 이 법에 따라 메드레세는 폐지되었고(종교 교육은 고등 교육 기관으로 이전), 모든 학교는 국가가 정한 공통 교육과정을 따르게 되었다.
1924년 여름에는 미국의 저명한 교육학자이자 철학자인 존 듀이를 앙카라로 초청하여 터키 교육 시스템 개혁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127] 공교육의 목표는 모든 국민의 읽기 능력을 향상시키고,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공공 문화"를 지닌 세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남녀 공학 제도가 도입되었고, 모든 아동에게 의무 초등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새로운 고등 교육 기관들도 설립되었다. 1925년에는 앙카라 법학교가, 1928년에는 공과대학이 문을 열었으며, 1932년에는 기존의 다르ülfünun을 개편하여 현대적인 이스탄불 대학교가 개교했다. 또한 1924년에는 교원 조합법이 제정되었고, 1928년에는 터키 교육 협회가 설립되어 교육 개혁을 뒷받침했다.
종교 관리세속주의 원칙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종교 기관에 대한 국가의 통제도 강화되었다. 1924년 종교청(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이 설립되어 이슬람교 관련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종교청은 이슬람 교리 교육 및 계몽 활동을 담당하는 한편, 종교가 공화국의 세속적 정체성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맘(이슬람 성직자) 등 종교 지도자들은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5. 2. 민법 개정과 여성 참정권
스위스 민법을 모델로 한 새로운 민법이 1926년에 제정되었다.[311] 이 신민법을 통해 여성의 권리가 이전 시대에 비해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이슬람 사회의 오랜 관습이었던 일부다처제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일부일처제가 확립되었다.[311]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1929년에는 터키 최초로 여성이 판사에 임명되었으며, 1930년에는 지방 선거에서 여성이 입후보하고 투표할 수 있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되었다.[311] 또한 여성이 외과의사가 되거나 외무부에서 근무하는 등 다양한 전문 분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1934년에는 터키 대국민의회 선거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전면적으로 실현되었다.[311] 이는 터키 여성사에서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받는다.
5. 3. 경제 정책
아타튀르크는 터키 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을 핵심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경제적 자립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105] 그는 "완전한 독립이란 물론 경제적, 재정적, 사법적, 군사적, 문화적 독립과 모든 문제에 대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독립을 박탈당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이 모든 독립을 박탈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강조하며 경제 정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106]1923년 이즈미르 경제 회의에서 제시된 초기 경제 정책 방향은 당시 터키의 현실을 반영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민간 부문의 투자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타튀르크 정부는 농업, 기계, 섬유 산업 분야에서 다수의 국영 공장을 설립하며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을 추진했다.[237] 이러한 정책은 아타튀르크와 이스메트 이뇌뉘 등이 국가 통합, 경제에 대한 외세 지배 종식, 국내 통신망 개선, 지역 간 균형 발전을 목표로 추진한 국가 통제 경제 노선의 일환이었다.[238]
경제적 독립을 위한 중요한 조치 중 하나는 터키 담배 산업의 국유화였다. 당시 터키의 주요 산업 작물이었던 담배 재배와 제조는 오스만 제국의 조약권 아래 프랑스 독점 기업인 레지 회사(Regie Company)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239][240] 1925년, 터키 정부는 레지 회사를 인수하여 국영 기업인 테켈(Tekel)을 설립함으로써 담배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이는 케말주의 정부의 대표적인 국유화 성과로 평가받는다. 이와 함께 면화 산업도 적극적으로 육성되어 1930년대 초에는 터키의 두 번째 주요 산업 작물로 자리 잡았다. 1926년에는 철강 및 석유 국유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1928년에는 무역법을 제정하여 국가의 자원 통제와 무역 질서 확립을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국가 주도 경제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 금융 시스템 정비에도 힘썼다. 1924년에는 아타튀르크의 주도로 최초의 터키 국립 은행인 이쉬 은행(İş Bankası)이 설립되어 국가 경제 활동 지원, 저축 장려, 산업 자금 공급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241] 1931년에는 환율 통제를 목적으로 터키 공화국 중앙은행이 설립되었고,[242] 이후 쉬메르방크(Sümerbank, 1932년), 할크 은행(Halk Bankası, 1933년), 에티방크(Etibank, 1935년) 등 특수 목적 은행들이 연이어 설립되었다.
산업화의 기반이 되는 인프라 구축에도 주력했다. 1927년 터키 국영 철도가 설립되어 국가 철도 운송망 개발을 추진했으며, 이는 아타튀르크가 산업화의 중요한 단계로 간주했던 사업이었다. 또한 1924년에는 농업축산국을 설립하여 현대적인 농업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공화국 초기 터키 경제는 여전히 농업 중심이었고, 생산 방식이나 운송 시설은 낙후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터키 경제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아타튀르크 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통합적인 경제 정책을 강화하고 중앙은행을 통해 환율을 통제하려 했으나, 수입품 조달의 어려움과 터키 리라화 가치 하락 등의 문제를 겪었다.[238] 또한 1929년에는 오스만 공공 부채 상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터키의 부채 구조조정 조약에 서명했다.

대공황 시기, 경제 정책 방향을 둘러싼 논의도 있었다. 1930년 알리 페티 오키야르가 창당한 터키 자유 공화당은 국가 독점 종식, 외국 자본 유치 등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주장했으나, 아타튀르크는 외국 자본 유치에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즉 국가 자본주의 노선을 유지했다. 그는 1931년 "경제 분야에서...당의 프로그램은 국가주의이다."라고 선언하며 이를 명확히 했다.[243] 일부 지식인(야쿠프 카드리 카라오스마노울루 등)들은 아타튀르크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모색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44]
1930년대 초반부터는 소련의 경제적 지원(1932년 거액의 융자와 경제 고문단 파견)을 받아 5개년 계획을 도입하여 수입 대체 산업 육성에 집중했다. 제1차 5개년 계획(1929~1933)에 이어 1937년에는 제2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으나, 아타튀르크 사후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245] 이 무렵 터키는 토지의 약 70%를 국가가 소유하는 등 강력한 국가 주도 경제 체제를 구축했다.


아타튀르크는 신산업 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항공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미래는 하늘에 있다"고 강조하며,[247] 1925년 터키 항공 협회 설립을 지시했다.[248] 1931년에는 최초의 국산 항공기 MMV-1 개발을 지원했으며, 1936년에는 산업가 누리 데미라그가 이스탄불에 터키 최초의 항공기 공장을 설립하여 누리 데미라그 누 D.36, 누리 데미라그 누 D.38 등을 생산했다.[253] 자동차 산업 육성을 위해 1923년 터키 자동차 협회가 설립되기도 했다.[255]

1932년에는 자유주의 경제학자 첼랄 바야르를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하여(1937년까지 재직) 혼합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기도 했다.[249] 이 기간 동안 영국으로부터 차관을 받아 섬유, 설탕, 제지, 철강 등 민간 부문 주도의 공장이 설립되었으며, 정부는 공공-민간 부문 협력과 민간 기업 확장을 장려했다. 1935년에는 주요 산업 중심지로 부상한 나질리에 터키 최초의 면직물 인쇄 공장인 '나질리 캘리코 인쇄 공장'이 문을 열었다.[250][251][252] 그러나 아타튀르크는 말년에 경제 자유화를 일부 시작하기도 했다.
경제 발전과 더불어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력도 이루어졌다. 1936년에는 노동법이 제정되어 터키 사회보장 정책의 기초를 마련했다.
1935년까지 터키는 아타튀르크가 설정한 서유럽 모델을 기반으로 한 산업 사회로 나아가고 있었으나,[257] 그의 목표와 실제 사회 구조 사이에는 여전히 격차가 존재했다.[257] 1937년 10월, 아타튀르크는 첼랄 바야르를 제9대 총리로 임명했으나, 아타튀르크 사후 대통령이 된 이스메트 이뇌뉘(국가 통제 지지)와 바야르(자유주의 지지) 사이의 경제 노선 갈등이 심화되면서 1939년 1월 바야르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254]
5. 4. 외교 정책
아타튀르크의 대외 정책은 그의 모토인 "내부의 평화, 세계의 평화(Peace at home, peace in the world)"[281]를 따랐으며, 이는 그의 문명화 및 근대화 프로젝트와 연관된 평화에 대한 인식이었다.[201] 아타튀르크 정책의 결과는 공화국에 의해 수립된 국회 주권의 힘에 달려 있었다.[202] 터키 독립 전쟁은 아타튀르크가 다른 국가들과의 문제 해결에 군사력을 사용한 마지막 사례였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외교 문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되었다.'''모술 문제'''
모술 문제는 영국과 모술 주(모술 주) 지배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새롭게 수립된 공화국의 최초의 외교적 논란 중 하나였다. 메소포타미아 전역 당시, 윌리엄 마셜 중장은 영국 전쟁부의 지시에 따라, 무드로스 휴전 협정(1918년 10월 30일) 서명 3일 후에 모술을 점령했다.[203] 1920년, 미사크-이 밀리는 모술 주가 역사적인 터키 중심지의 일부라고 선언했다. 영국은 모술 문제로 인해 불안정한 상황에 처했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거의 비슷한 절박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20년 여름 영국에 대한 이라크 반란은 RAF 이라크 사령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영국의 관점에서 볼 때, 아타튀르크가 터키를 안정시키면 그는 모술로 눈을 돌려 메소포타미아로 진입할 것이고, 그곳의 원주민들은 그의 대의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사건은 인도에 있는 영국 영토와 가까운 곳에 반란을 일으키고 적대적인 무슬림 국가가 생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1923년, 아타튀르크는 로잔 조약에서 국제 연맹의 중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모술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터키가 더 강해질 때를 기다리는 것임을 GNA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은 양쪽 주민들에게 불안한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 터키는 석유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되었는데, 국경은 영국 지구 물리학자들이 석유 매장량 위치를 기반으로 그었기 때문이다. 아타튀르크는 이러한 분리를 원하지 않았다.[204] 아타튀르크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조지 커즌 영국 외무장관은 모술 지역에 석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려고 했다. 1923년 1월 23일, 커즌은 석유의 존재는 가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203]
1924년 국제 연맹 위원회의 감찰관 3명이 이 지역에 파견되어 상황을 감독하는 동안, 셰이크 사이드 반란(1924-1927)은 터키의 메소포타미아와의 연결을 끊을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반군과 영국 간의 관계가 조사되었다. 사실, 반군이 반란이 스스로는 버틸 수 없다고 결정한 후 영국의 지원을 요청했다.[205]
1925년, 셰이크 사이드 반란이 고조됨에 따라 국제 연맹은 이 사건을 연구하기 위한 3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북부 국경(오늘날의 이라크 북부)을 따라 계속되는 불확실성 때문에, 위원회는 영국이 메소포타미아 영국 위임 통치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이 지역이 이라크에 연결되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1925년 3월 말까지 필요한 병력 이동이 완료되었고, 셰이크 사이드 반란 지역 전체가 포위되었다.[206] 이러한 작전의 결과로 반란은 진압되었다. 영국, 이라크, 그리고 아타튀르크는 1926년 6월 5일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대부분 연맹 이사회의 결정을 따랐다. 이 협정은 쿠르드족 인구의 상당 부분과 이라크 투르크멘족을 터키가 아닌 쪽 국경에 남겨두었다.[207][208]
'''소련과의 관계'''


1920년 4월 26일, 아타튀르크는 볼셰비키 지도자이자 러시아 SFSR 정부 수반인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볼셰비키의 "제국주의 정부에 대한 투쟁"과 군사 작전을 조율할 것을 약속하고, 군대에 대한 "긴급 지원"으로 금 500만 튀르키예 리라와 무기를 요청했다.[209] 1920년에만 레닌 정부는 케말리스트들에게 소총 6,000정, 탄약 500만 발 이상, 포탄 17,600발, 금괴 200.6kg을 공급했다. 이후 2년 동안 지원 규모는 증가했다.[210]
1921년 3월, 모스크바에 있는 GNA 대표들은 소련 러시아와 모스크바 조약("우정과 형제애 조약")에 서명했는데, 이는 케말리스트들에게 중요한 외교적 돌파구였다. 모스크바 조약은 같은 해 10월에 체결된 카르스 조약과 함께 튀르키예가 당시 명목상 독립 국가였던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희생으로 북동부 국경에 대해 유리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두 국가 간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공통의 적(영국과 서구)에 대한 반대라는 사실에 기반을 두었다.[211] 1920년 아타튀르크는 국가가 통제하는 튀르키예 공산당을 이용하여 국가 내 공산주의 사상의 확산을 막고 코민테른의 자금 지원을 받으려는 생각을 했다.
소련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를 공산주의에 헌신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와의 우정은 튀르키예에 공산주의 이념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211] 또한 아타튀르크는 "공산주의는 사회 문제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조건, 종교 및 국가적 전통은 러시아 공산주의가 튀르키예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견해를 확인해준다"고 선언했다.[212] 그리고 1924년 11월 1일 연설에서 그는 "우리의 오랜 친구인 소비에트 러시아 공화국과의 우호 관계는 매일 발전하고 진보하고 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공화국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진정하고 광범위한 우호 관계를 우리 외교 정책의 초석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211]
1925년 12월 16일 튀르키예가 제네바에서 대표단을 철수시킨 후, 그들은 튀르키예의 동의 없이 모술 지역에 대한 위임 통치를 영국에 부여하기 위해 국제 연맹 이사회를 떠났다. 아타튀르크는[213] 12월 17일에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대응했다.[214] 1935년에는 이 조약이 10년 더 연장되었다.[215]
1933년 소련 국방장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튀르키예를 방문하여 공화국 1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216]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 그리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를 경제적으로 통합하는 발칸 연방 계획에 대한 그의 입장을 설명했다.[216]
1930년대 후반 아타튀르크는 영국과 다른 주요 서구 열강과의 관계를 강화하려고 했는데, 이는 소련의 불만을 샀다. 소련 대백과사전 제2판(20권, 1953년)은 아타튀르크 집권 말년의 정책을 명확하게 비판하며, 그의 국내 정책을 "반인민적"이라고, 그의 외교 노선을 "제국주의 열강"과의 "화해"를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217]
'''그리스와의 관계'''
그리스의 전후 지도자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또한 자국과 터키 간의 정상적인 관계 수립을 결심했다. 전쟁은 서부 아나톨리아를 황폐화시켰고, 그리스에서 온 오스만계 무슬림 난민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은 관계 개선을 막았다. 베니젤로스는 해군 군비 문제와 터키의 오스만계 그리스인들의 재산 문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터키와의 협정을 추진했다.[218] 터키의 그리스에 대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아타튀르크는 역사적 적대감의 압력에 저항했고 과거의 긴장에 민감했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터키 군인이 그리스 군인에게 총검을 꽂는 그림을 제거하라고 명령하며 "얼마나 역겨운 장면인가!"라고 말했다.[219]
그리스는 터키 영토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했고, 양측은 1930년 4월 30일 협정을 체결했다. 10월 25일, 베니젤로스는 터키를 방문하여 친선 조약에 서명했다.[220] 베니젤로스는 심지어 1934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아타튀르크를 추천하기도 했다.[221] 베니젤로스가 실각한 후에도 그리스-터키 관계는 우호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실제로 베니젤로스의 후임인 파나기스 찰다리스는 1933년 9월 아타튀르크를 방문하여 그리스와 터키 간의 ''앙탕트 코르디알''이라는 더 포괄적인 협정에 서명했는데, 이는 발칸 협약의 발판이 되었다.
그리스 총리 이오아니스 메탁사스는 아타튀르크에 대해 "...그리스는 명성 높은 지도자이자 영웅적인 군인이며 터키의 계몽적인 건설자를 가장 높이 평가합니다. 우리는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공통의 이상과 평화로운 협력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터키-그리스 동맹의 창시자였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두 나라 간의 우정을 발전시켰고, 그것은 해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는 고귀한 터키 국가의 불변의 미래 경로를 결정한 이 위대한 사람의 열렬한 기억을 간직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22]
'''아프가니스탄과의 관계'''
1919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은 개혁기를 맞이하여 아마눌라 칸의 지배를 받았다. 아프가니스탄 외무장관 마무드 타르지는 아타튀르크의 국내 정책을 따랐다. 타르지는 아마눌라 칸에게 사회 및 정치 개혁을 장려했지만, 개혁은 강력한 정부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920년대 후반, 아프가니스탄-소련 우호에 대한 영국의 우려로 영국-아프가니스탄 관계는 악화되었다. 1928년 5월 20일, 아마눌라 칸과 그의 왕비인 소라야 타르지 왕비가 이스탄불에서 아타튀르크를 만나면서 영국-아프가니스탄 관계는 긍정적인 전망을 얻게 되었다.[223] 이 만남 이후 1928년 5월 22일 터키-아프가니스탄 우호 협력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타튀르크는 아프가니스탄의 국제 기구 편입을 지지했다. 1934년 아프가니스탄은 국제연맹에 가입하면서 국제 사회와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다.[224] 마무드 타르지는 1933년 11월 22일 이스탄불에서 사망할 때까지 아타튀르크의 개인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란과의 관계'''

아타튀르크와 이란의 지도자 레자 샤는 영국 제국주의와 그들의 국가에 대한 영향에 대해 공통된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어 앙카라와 테헤란 사이의 느리지만 꾸준한 관계 개선으로 이어졌다. 두 정부는 터키 독립 전쟁 동안 서로에게 외교 사절단과 우호 메시지를 보냈다.[225] 이 시기 앙카라 정부의 정책은 이란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재확인하기 위해 도덕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226] 두 나라 간의 관계는 칼리파제 폐지 이후 긴장되었다.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은 아타튀르크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란의 종교 권력 중심부는 아타튀르크의 개혁 뒤에 숨겨진 진짜 동기는 성직자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라고 인식했다.[226] 1930년대 중반까지 레자 샤의 노력은 이란 전역의 성직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종교와 정부 사이의 격차를 넓혔다.[227] 러시아와 영국이 중동에서 세력을 강화하자 아타튀르크는 이러한 유럽 열강에 의한 이란의 점령과 분할을 우려했다.[226] 아타튀르크처럼 레자 샤도 이란의 국경을 확보하기를 원했고, 1934년 샤는 아타튀르크를 방문했다.
1935년 사다바드 조약이 될 초안이 제네바에서 작성되었지만, 이란-이라크 국경 분쟁으로 인해 서명이 지연되었다. 1937년 7월 8일 터키,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은 테헤란에서 사다바드 조약에 서명했다. 서명국들은 공동 국경을 보존하고, 공동 관심사에 대한 모든 문제에 대해 함께 협의하고, 서로의 영토에 대해 공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은 아프가니스탄 국왕 자히르 샤의 더 큰 동양-중동 협력에 대한 요구, 레자 샤의 소련과 영국의 영향으로부터 이란을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될 터키와의 관계 확보 목표, 그리고 아타튀르크의 지역 안정 보장 외교 정책을 통합했다. 그러나 이 조약의 즉각적인 결과는 이탈리아 지도자 무솔리니가 중동에 개입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228]
'''해협 문제'''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에는 로잔 해협 협정이 포함되었다. 로잔 해협 협정은 다르다넬스 해협이 모든 상선에 개방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외국 군함의 통과는 평화 시 특정 제한을 받았으며, 중립국이더라도 터키는 전시에 군사 통행을 제한할 수 없었다. 로잔 해협 협정은 해협이 비무장화되고 그 관리가 해협 위원회에 맡겨져야 한다고 명시했다. 비무장 지대는 터키의 해협에 대한 지배와 주권을 크게 제한했으며, 해협을 통과하는 수역에 대한 주권 없이는 이스탄불의 방어가 불가능했다.
1936년 3월,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무장은 아타튀르크에게 해협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회복할 기회를 주었다. 아타튀르크는 "유럽의 상황은 이러한 움직임에 매우 적합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229] 터키의 외무장관인 테프빅 뤼슈튀 아라스는 해협 체제를 개정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아라스는 이스메트 이뇌뉘 총리가 아닌 아타튀르크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뇌뉘는 해협 문제로 영국, 프랑스, 발칸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가 손상될까 우려했다. 그러나 세계 정치의 변화로 무제한 군사 통행이 터키에 불리해짐에 따라 로잔 조약 체결국들은 회의에 참여하기로 동의했다. 아타튀르크는 터키 외무부 회원들에게 수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터키에 이전하는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1936년 7월 20일, 몽트뢰 해협 조약이 불가리아,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일본, 루마니아, 소련, 터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 의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는 상선과 군함의 통행을 규율하는 주요 문서가 되었다. 이 협정은 GNA에 의해 1936년 7월 31일에 비준되었고 1936년 11월 9일에 발효되었다.[230]
'''발칸 협정'''

1930년대 초까지 터키는 공동 우호 및 중립 협정을 통해 서방 국가들과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양자 협정은 아타튀르크의 세계관과 일치했다. 1925년 말까지 터키는 서방 국가들과 15건의 공동 협정을 체결했다.
1930년대 초, 세계 정세의 변화와 발전은 터키가 안보 강화를 위해 다자간 협정을 체결해야 할 필요성을 불러일으켰다. 아타튀르크는 평등의 원칙에 기반한 발칸 국가 간의 긴밀한 협력이 유럽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력히 믿었다. 이들 국가는 수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강력한 세력임을 증명했다. 발칸 협정의 기원은 192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발칸 협약은 1930년대 중반에 체결되었다. 터키-그리스 동맹 관계 개선과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간의 관계 개선과 같은 유럽의 여러 중요한 발전이 초기 구상을 실현하는 데 기여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터키의 외교 정책을 주도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탈리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지중해 전체를 이탈리아의 통제하에 두겠다는 의도를 자주 공표했다. 터키와 여러 발칸 국가 모두 이탈리아의 야망에 위협을 느꼈다.
발칸 협약은 아타튀르크가 그리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 함께 협상했다. 이 상호 방위 협정은 불가리아나 알바니아와 같은 다른 발칸 국가의 공격으로부터 조인국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점점 공격적으로 변하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외교 정책과 잠재적인 불가리아-나치 독일 연합의 영향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타튀르크는 발칸 협약을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루는 수단으로 생각했다.[231] 그는 특히 유럽에서 터키 서쪽에 안보 및 동맹 지역을 구축하는 데 특히 열정적이었는데, 발칸 협약은 이를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232]
발칸 협약은 정기적인 군사 및 외교 협의를 규정했다. 이 협정의 중요성은 아타튀르크가 그리스 총리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 발칸 협약 동맹국의 국경은 하나의 국경입니다. 이 국경을 탐내는 자는 태양의 불타는 광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국경을 방어하는 세력은 하나이며 불가분의 세력입니다.[233]
발칸 협약은 2월 28일 GNA에 의해 체결되었다.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의회는 며칠 후 이 협정을 비준했다. 만장일치로 비준된 발칸 협약은 1935년 5월 18일 공식적으로 채택되었고 1940년까지 지속되었다.
발칸 협약은 아타튀르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이유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불가리아가 도브루자 문제를 제기하려고 시도하면서 협약은 실패했고, 1939년 4월 7일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으로 끝났다. 이러한 분쟁은 빠르게 확산되어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을 촉발했다. 아타튀르크가 동남유럽을 보호하려던 목표는 협약 해체와 함께 실패했다.
'''하타이 문제'''

1936년 아타튀르크는 국제연맹에서 "하타이 문제"를 제기했다. 하타이는 오스만 제국의 옛 행정 구역인 알렉산드레타 산자크를 기반으로 했다. 국제연맹을 대표하여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터키의 대표들은 하타이를 시리아 내의 자치 산자크로 설립하는 헌법을 작성했다. 몇몇 민족 간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 지역 의회에 의해 선거가 실시되었다. 안타키아(안티오크)와 이스켄데룬(알렉산드레타)은 1939년에 터키에 합병되었다.[236]
5. 5. 말년과 죽음
아타튀르크는 생애 대부분 동안 하루에 0.5L의 라키를 마시는 등 중등도에서 심한 음주 습관을 가졌으며, 주로 담배를 피웠다.[335][336][337][277][278][279] 1937년부터 그의 건강이 악화되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8년 초, 얄로바로의 여행 중에 심각한 병으로 고통을 받았고, 치료를 위해 이스탄불로 가서 간경화증 진단을 받았다.[338][280] 이스탄불에 머무는 동안 평소 생활 방식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11월 10일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38][280] 사인은 간경화증으로 진단되었으며, 과도한 업무와 함께 과음이 주요 원인으로 여겨진다.
아타튀르크의 장례식은 터키 국민들에게 큰 슬픔과 동시에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17개국이 특별 대표를 파견했으며, 9개국은 장례 행렬에 무장 부대를 지원했다.[281] 그의 유해는 처음에 앙카라 민족학 박물관에 안치되었다가, 사망 15년 후인 1953년 11월 10일에 42ton 무게의 석관에 담겨 앙카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아니트카비르로 이장되었다.[282]
아타튀르크는 자신의 유언을 통해 모든 재산을 공화인민당에 기증했다. 다만, 재산에서 발생하는 연간 이자[283]는 그의 여동생 마크뷜레와 입양한 자녀들을 돌보고, 이스메트 이뇌뉘 자녀들의 고등 교육을 지원하는 데 사용하도록 조건을 명시했다.[284] 남은 유산은 튀르키예어 협회와 튀르키예 역사 협회에 기증되었다.[285][284]
6. 현재 튀르키예에서의 위상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에서 독립 영웅이자 국부로서 추앙받고 있다. 터키 국회는 1934년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라는 경칭을 수여하였고, 많은 공공건물이나 거리의 이름이 이 명칭으로 바뀌었다. 현재 터키 리라 지폐 속 인물도 오직 아타튀르크 한 명이다.[339]
케말 아타튀르크는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골든혼(할리치)을 가로지르는 아타튀르크 다리, 아타튀르크 댐, 그리고 아타튀르크 경기장 등 터키 전역에 있는 많은 기념물들로 기념되고 있다. 터키 정부는 모든 터키 도시에 아타튀르크 동상을 세웠고, 대부분의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 그의 얼굴과 이름은 터키 전역에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그의 초상화는 공공 건물, 학교, 모든 터키 리라 지폐, 그리고 많은 터키 가정의 집에서 볼 수 있다.[286] 그의 서거일인 매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 아타튀르크 사망 정각에는 전국 도로의 대부분 차량과 사람들이 1분간 묵념을 한다.[287] 그의 묘는 앙카라 시내 구릉 위에 세워진 아타튀르크 묘소에 있으며, 매일 국내외에서 많은 참배객이 찾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건축물이 되고 있다.
1951년, 아드난 멘데레스 수상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 하의 터키 의회는 아타튀르크에 대한 범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그의 기억에 대한 모욕(hatırasına alenen hakaret)과 그를 나타내는 물건의 파괴를 금지했다.[288] 이 법은 아타튀르크 자신의 공화인민당에 대한 보수적인 야당이었던 민주당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비판과 모욕의 경계는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법무부 장관이 5조에 따라 검찰이 아닌 법률 집행을 담당하도록 지정되었다. 이 법을 위반하는 웹사이트를 고발하기 위한 정부 웹사이트도 만들어졌다.[289] 2010년, 프랑스에 본부를 둔 NGO 국경 없는 기자회는 이 법이 유럽 연합의 뉴스 미디어 언론의 자유 기준과 상반된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290]
아타튀르크의 국제적 위상도 높다. 1981년, 아타튀르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유엔과 유네스코는 이를 "세계 아타튀르크의 해"로 선포하고 아타튀르크 탄생 100주년 결의안을 채택했다.[18][19] 터키 외에도 여러 국가에 아타튀르크 기념물과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구분 | 국가 | 도시 | 명칭 |
---|---|---|---|
기념물 | 멕시코 | 멕시코시티 | 아타튀르크 기념비 (레포르마 거리) |
아제르바이잔 | 바쿠 | 아타튀르크 기념비 | |
카자흐스탄 | 알마티 | 아타튀르크 기념비 | |
뉴질랜드 | 웰링턴 | 아타튀르크 기념비 (갈리폴리 전투에서 사망한 ANZAC 군인들을 위한 기념비 역할도 함) | |
오스트레일리아 | 캔버라 | 아타튀르크 기념관 (앤잭 퍼레이드) | |
칠레 | 산티아고 | 플라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 |
거리/광장/지역 | 이탈리아 | 로마 | 라르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광장 |
인도 | 뉴델리 | 케말 아타튀르크 마르그 | |
방글라데시 | 다카, 치타공 | 케말 아타튀르크 애비뉴 | |
파키스탄 | 이슬라마바드 | 아타튀르크 애비뉴 | |
파키스탄 | 라르카나 (신드주) | 아타튀르크 로드 | |
튀니지 | 튀니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거리 | |
도미니카 공화국 | 산토도밍고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거리 (나코 지구) | |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 아타튀르크 거리 및 기념관 (암스테르담-노르트) | |
오스트레일리아 | 올버니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 아타튀르크 해협 (프린세스 로열 항구 입구) |
북키프로스에도 아타튀르크의 이름을 딴 많은 동상과 거리가 있다.
급진적인 세속 개혁에도 불구하고, 아타튀르크는 이슬람 세계에서도 널리 인기를 얻었다.[291] 그는 기독교 세력의 침략 시대에 새롭고 완전히 독립적인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고 서구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인물로 기억된다.[291] 그가 사망했을 때, 전인도 무슬림 연맹은 그를 "이슬람 세계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인물, 위대한 장군, 그리고 위대한 정치가"라고 칭송하며 그의 기억이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용기, 인내, 그리고 남성다움을 고무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291] 파키스탄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무함마드 이크발과 방글라데시의 국민 시인 카지 나줄 이슬람은 그의 명예를 기리는 시를 썼다. 이집트의 민족주의 여성 운동가 후다 샤아라위는 1935년 이스탄불에서 열린 제12차 국제 여성 회의에서 아타튀르크를 만난 후, 그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고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스탄불 회의가 끝난 후, 우리는 현대 터키의 해방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주최한 축하 행사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말했습니다: 만약 터키인들이 당신을 그들의 아버지로 여기고 당신을 아타튀르크라고 부른다면, 저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아타샤르크' [동방의 아버지]입니다. 그 의미는 어떤 여성 대표단장에게서도 나온 것이 아니었고, 그는 저에게 큰 영향을 준 것에 대해 매우 감사했으며, 그 후 저는 그에게 ''레집티엔느'' 잡지에 게재할 그의 각하 사진을 제공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301]
아타튀르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적이었던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부터 독일의 나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292][293][294][295]까지 그를 숭배하는 이들이 있었다. 히틀러는 아타튀르크를 "어둠 속의 별"이라고 불렀다.[296]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존 F. 케네디를 포함한 일부 미국 대통령들도 아타튀르크를 존경했으며,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아타튀르크 사망 25주년에 그를 기렸다.[297] 국가 주권을 장려하는 모범으로서, 아타튀르크는 식민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개척한 인물로 여겨져 제3세계 국가들에서 특히 존경받았다. 이란의 레자 팔레비,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튀니지의 하비브 부르기바,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등이 그를 존경한 지도자들이다.[298][299][300]
그러나 아타튀르크에 대한 칭찬만 있는 것은 아니다. H. C. 암스트롱은 1932년에 출판된 그의 전기 ''그레이 울프, 무스타파 케말: 독재자에 대한 친밀한 연구''의 에필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시대에 맞지 않게 태어난 인물, 시대착오적인 인물, 대초원의 타타르족으로 회귀한 인물, 사나운 원초적인 힘을 지닌 인물입니다. 만약 그가 중앙아시아 전체가 움직이던 세기에 태어났다면, 그는 술리만 샤와 함께 그레이 울프의 깃발 아래 기병으로 나섰을 것이고, 그레이 울프의 심장과 본능을 지녔을 것입니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과 감정, 충성심 또는 도덕성으로 약해지지 않은 무자비한 결단력으로, 그는 위대한 야만인 기병대의 선두에서 국가를 정복하고, 도시를 집어삼키고 파괴하며, 전투 사이의 평화의 간격을 포도주와 여성의 야만적이고 끔찍한 향연으로 채운 타메를레인 또는 징기스칸이 되었을 것입니다."[302] 또한,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의 터키 민족 운동 시기에는 연합군과 이스탄불의 기자 알리 케말 등에 의해 "산적 두목"으로 불렸으며, 영국 외무장관 발푸어 경은 그를 "가장 끔찍한 터키인들 중 가장 끔찍한 자"라고 비판했다.[303]
아타튀르크가 터키 혁명의 일련의 개혁에서 보여준 터키 공화국의 정치 노선은 “케말주의(Kemalizm)” 또는 “아타튀르크주의”라고 불리며, 무스타파 케말에 대한 개인숭배와 결부되어 현대 터키의 정치 사상에서 중요한 흐름이 되고 있다. 다만, 케말주의 신봉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좌파적·탈이슬람적인 세속주의 지식인에서부터 극우적·이슬람 옹호적인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으며, 실제로는 케말주의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주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터키 정치의 중요한 담당자 중 하나인 터키군 상층부는 “케말주의”, “아타튀르크주의” 고수를 터키 공화국의 불가침의 기본 원리로 여겨왔다. 터키 군은 1960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케말주의로부터의 일탈 시정 또는 케말주의 옹호를 명목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무스타파 케말은 세속주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등을 기둥으로 하는 터키 공화국의 기본 방침을 세웠다. 일당 독재를 구축하고 반대파를 배제하며 강경하게 개혁을 추진했지만, 그의 정권과 후계자 이스메트 이뇌뉘의 정권은 다른 독재 정권과 비교할 때 정변 없이 유지되었다. 결과적으로 터키는 독재 정권 하에서도 국가적 안정을 이룬 사례로 평가받기도 하며, 무스타파 케말은 사후 현재까지도 국부로서 터키 국민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구국의 영웅, 근대 국가의 건설자로서의 평가는 터키에서 확고하다. 1926년 의회에서 “내가 터키다!”라고 외친 일화나, “우리는 터키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그의 입버릇은 그의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여준다. 그의 시신이 일시적으로 안치되었던 앙카라 민속 박물관의 비석에는 “내 육체는 멸망하더라도, 터키 공화국은 영원해야 한다”라고 새겨져 있다.[325]
터키에서 이루어지는 철저한 무스타파 케말 숭배에 대해서는 터키 국내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세속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지나친 신격화”이며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많은 관찰자들은 터키의 국가 체제 유지와 무스타파 케말에 대한 개인숭배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1980년 쿠데타 이전에는 철저한 정교분리주의(Laiklik)가 케말주의의 이름 아래 국가 체제와 불가분의 것으로 여겨졌으나, 1980년대 이후 체제에 의해 민족주의와 이슬람의 조화가 시도되면서, 체제가 허용하는 “바람직한 이슬람”이 아타튀르크가 원했던 이슬람의 모습이라고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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