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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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타 주리아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게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으로, 기독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양녀가 되어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시녀로 일했지만,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신앙을 지키다 이즈 제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유배 이후 나가사키로 피신했으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사후에도 일본과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의 상징으로 추앙받았으며, 소설,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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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주리아 | |
---|---|
인물 정보 | |
이름 | 줄리아 오타 |
일본어 표기 | ジュリアおたあ (Juria Otaa) |
한국어 표기 | 오타 주리아 |
로마자 표기 | Ota Juria |
세례명 | 줄리아 (율리아) |
종교 | 가톨릭교회 |
출생일 | 불명 |
사망일 | 불명 |
수세일 | 1590년대? |
2. 생애
오타 주리아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이다. 기독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양녀로 자랐으며, 세례명은 줄리아이다.[1]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으나,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유배 생활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납치되었으며, 부모는 전투 중 사망·살해 또는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양반의 딸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명이나 가계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맡겨져 그의 양녀로 성장했으며, 고니시 부인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특히 약초에 대한 지식이 깊었고, 당대에는 절세미인으로 이름이 높았다.[1]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패배하고 처형되자, 오타 주리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눈에 띄어 슨푸 성에서 시녀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밤에는 기도를 하고 성서를 읽으며 다른 시녀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등 신앙생활을 이어갔다.[5]
1609년경에는 모리 씨족 가신인 무라타 안세이(村田安政)와 어릴 적 헤어진 남동생으로 추정되는 인연으로 재회하기도 했다. 2023년 4월, 하기 박물관에서 이와 관련된 고소데와 편지가 발견되었다.[1][2]
1612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을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독교를 탄압하면서, 오타 주리아는 배교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신앙을 굽히지 않아 이즈 제도로 유배되었고, 이즈오 섬, 니지마 섬, 고즈시마 섬 등지를 전전하며 유배 생활을 했다.[5] 유배지에서도 기독교를 전파하고 병자를 돌보는 등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1619년 나가사키로 피신하여 복음 전파 활동을 계속했으며, 1622년에는 오사카에서 프란치스코 파체코 신부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5] 이후 오타 주리아의 행적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1950년 고즈 섬에서 오타 주리아의 묘라고 주장되는 공양탑이 발견되어 한일 양국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지만, 1622년 프란치스코 파체코 신부의 편지를 통해 오타 주리아가 고즈 섬을 떠나 오사카와 나가사키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고즈 섬 사망설은 부정되었다.
2. 1. 조선에서의 삶과 일본으로의 피랍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일본군에게 납치되었다.[1] 평양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끌려갔으며, 부모는 전투 중 사망·살해 또는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양반의 딸이라는 설도 있으나, 실명이나 가계 등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줄리아는 천주교 세례명이며, 조선인으로서의 본명은 전해지지 않는다.기독교를 믿는 다이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맡겨져 그의 양녀로 자랐다.[1]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인은 줄리아를 극진히 교육했으며, 특히 약초에 대한 지식이 깊었다고 한다. 당시 줄리아는 절세미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1596년 우토시에서 예수회 신부 페드로 모레혼에게 세례를 받았다.[1]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양아버지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군으로 참전하여 패배하고, 이시다 미쓰나리와 함께 교토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당했다. 이후, 줄리아의 미모와 재능을 알아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 성으로 불러들여 총애하는 시녀로 삼았다.[5] 줄리아는 밤마다 기도를 하고 성서를 가까이했으며, 다른 시녀들과 가신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고 한다.
1612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을 계기로 막부의 기독교 탄압 정책에 따라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줄리아는 이를 거부했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식 측실이 될 것을 권유했으나, 이 역시 거절했다.[5] 결국, 1612년 금교령에 따라 슨푸에서 쫓겨나 이즈오시마, 하치조 섬, 니이지마 섬, 고즈시마 섬 등지로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지에서도 기독교를 전파하고 병자를 간호하며, 다른 유형수들을 격려하는 등 사회 선교 활동을 했다고 한다. 세 번이나 유배 처분을 받은 뒤, 죄를 사면해 주는 조건으로 이에야스의 수청을 제의받았으나, 이마저도 거절했다. 니지마섬에서는 슨푸 시대의 동료 시녀들인 루치아, 클라라 등과 다시 만나 일종의 수도 생활을 했다고 한다.
1619년, 고즈시마 섬을 떠나 나가사키로 피신했는데, 이에야스가 사망할 즈음에 사면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나가사키 부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복음 전파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여러 번 집에서 쫓겨났다.[5] 1622년 2월 15일에 작성된 예수회 신부 프란치스코 파체코의 편지에 따르면, 오타 주리아는 오사카에서 파체코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것이 오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었다.
모리 씨족의 가신인 무라타 안세이(村田安政)가 오타 주리아와 어릴 적 헤어진 남동생과 같은 반점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609년경 편지를 주고받으며 슨푸 성에서 재회하기도 했다. 이때 이에야스는 무라타에게 코소데를 하사했다. 이 ''코소데''와 주리아의 편지는 2023년 4월에 발견되어 현재 하기 박물관 소장품의 일부이다.[1][2]
2. 2. 고니시 유키나가의 양녀 시절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게 납치되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양녀가 되었다.[1] 기독교 신자였던 고니시 부부의 영향을 받아 세례명 '줄리아'로 세례를 받았다.[1] 고니시 가문에서 양육될 당시, 특히 약초 지식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패하고 처형되면서, 오타 주리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5] 후시미 성과 슨푸 성에서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신앙생활을 이어나갔고, 이에야스 저택의 다른 하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도 했다.[5]
1609년경, 오타 주리아는 모리 씨족 가신인 무라타 안세이(村田安政)가 어릴 적 헤어진 남동생과 같은 반점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슨푸 성에서 재회했다.[1][2] 하기 박물관에는 이때 주고받은 편지와 고소데가 소장되어 있다.[1][2]
1612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 이후, 이에야스는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오타 주리아는 신앙을 굽히지 않아 이즈 제도로 유배되었다.[5] 이즈오 섬, 니지마 섬, 고즈시마 섬 등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기독교를 전파하고 병자를 돌보는 등 사회선교 활동을 펼쳤다.[3]
2. 3.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 시절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게 납치된 오타 주리아는 기독교를 믿는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양녀로 입양되어, 고니시 부인에게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약초에 조예가 깊었고, 당시에 미인으로 이름이 높았다.[1]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패배하고 처형된 후, 오타 주리아의 재능과 미모를 알아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 성으로 불러 시녀로 삼았다. 오타 주리아는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았으며, 밤에는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으며 다른 시녀들과 가신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도 했다.[5]1609년경, 오타 주리아는 모리 씨족의 가신인 무라타 안세이(村田安政)로부터 그와 그의 동생이 어릴 적 조선에서 헤어진 그녀의 남동생과 같은 반점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로 확인했다. 두 사람은 슨푸 성에서 재회했고, 이에야스는 이들을 위해 무라타에게 코소데를 하사했다. 이 ''코소데''와 주리아의 편지는 2023년 4월에 발견되어 현재 하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2]
1606년 봄, 이에야스는 오타 주리아를 에도 성에 데려갔으며,[5] 1607년 봄, 슨푸 성에서 은거할 때에도 함께했다.[5] 슨푸 성에서 오타 주리아는 "아타키"라고 불렸다. 1611년 슨푸 성에서 이에야스와 회견한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는 자신의 저서 '금은도 탐험 보고'에 오타 주리아가 동석했음을 기록했다.
2. 4. 기독교 탄압과 유배 생활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맡겨져 양녀로 입양된 오타 주리아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고 처형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으나, 막부의 기독교 탄압 정책에 따라 배교를 강요받았다.[5]오타 주리아는 배교를 거부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식 측실이 되라는 권고에도 난색을 표했다. 결국 1612년 금교령에 따라 슨푸에서 쫓겨나 이즈오 섬, 하치조 섬, 니지마 섬, 고즈 섬 등을 옮겨다니며 유배 생활을 했다.[5]
유배 생활 중에도 오타 주리아는 가는 곳마다 기독교를 전파하고 병자를 간호하며 다른 유형수들을 격려하는 등 사회선교 활동을 펼쳤다.[5] 세 번이나 유배 처분을 받고 사면을 조건으로 이에야스의 수청을 제의받았으나, 다시 거절했다. 니지마섬에서는 슨푸 시대의 동료 시녀들과 다시 만나 일종의 수도 생활을 했다.[10]
1619년, 오타 주리아는 코즈시마 섬을 떠나 나가사키로 피신했는데, 이에야스가 죽을 즈음에 사면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나가사키 부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복음 전파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여러 번 집에서 쫓겨났다. 1622년 2월 15일에 작성된 예수회 신부 프란치스코 파체코의 편지에 따르면, 오타 주리아는 오사카에서 파체코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것이 오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5]
2. 5. 유배 이후의 삶과 사망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독교 탄압 정책을 펼치자, 오타 주리아는 배교를 거부하고 1612년 금교령에 따라 슨푸에서 추방되었다. 이에야스는 측실이 되라는 권유도 했지만, 오타 주리아는 응하지 않았다. 이후 이즈오오시마, 하치조 섬, 니이지마 섬, 고즈지마 섬 등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5] 유배지에서도 기독교를 전파하고 병자를 간호하며 다른 유형수들을 격려하는 등 사회 선교 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3] 세 번의 유배 후 사면을 조건으로 이에야스가 수청을 제안했으나, 오타 주리아는 다시 거절했다. 니지마섬에서는 슨푸 시대의 동료 시녀들과 만나 일종의 수도 생활을 하기도 했다.[10]1950년 고즈 섬의 향토사학자 야마시타 겐이치로는 고즈 섬에 있는 유래 불명의 공양탑을 오타 주리아의 묘라고 주장했다. 이후 매년 5월 한일 양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이 오타 주리아의 위령제를 지내며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파체코 신부가 1622년 2월 15일에 쓴 편지에서 오타 주리아가 코즈지마 섬을 떠나 오사카로 옮겨가 프란체스코 신부의 도움을 받았고, 그 후 나가사키로 이주했다는 내용이 발견되면서, 줄리아 고즈 섬 사망설은 부정되었다.[5]
오타 주리아의 말년 행적에 대한 기록은 뚜렷하지 않다. 슨푸 시대에는 등롱(일본식 조명등)을 만들어 명상했다고 전해지며, 오타 주리아가 쓴 등롱은 기리시탄 등롱으로 불리며 현재 시즈오카시 정토종계 사찰 호다이인(宝台院)에 보관되어 있다.
3. 사후 평가 및 기념
오타 주리아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묘지가 이즈 제도에 여럿 남아 있다. 이즈 오시마에는 그녀의 묘라고 주장하는 곳에 신사가 세워졌는데, 이는 기독교 무덤 위에 신토 신사가 세워진 드문 경우이며, 기독교인의 영혼이 ''가미''로 존경받는 곳이다. 코즈시마에는 1958년 일본과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세운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졌고, 매년 5월 섬에서 그녀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5] 1972년, 코즈시마에 있는 그녀의 묘라고 주장되는 곳의 흙은 한국 기독교인들을 위한 기념 사당인 서울 절두산으로 상징적인 귀향을 위해 가져와졌다.[6]
1950년대 신진도의 향토사가 야마시타 히코이치로는 섬에 있는 유래를 알 수 없는 공양탑이 오타의 묘라고 주장하면서, 신진도에서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했다. 이후 이 섬에서는 매년 5월 한일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오타의 위령제가 열렸고, 1972년 대한민국 가톨릭 순교지인 절두산에 신진도 촌장과 촌의원 등이 오타 묘의 흙을 매장하고 석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후 상술한 『일본 발신』이 발견되면서 석비는 철거되었고, 진상이 완전히 밝혀질 때까지 절두산 순교 박물관 내에 보관되게 되었다.
1967년부터 1968년경, 상지대학교 교수 Hubert Cieslik|후베르트 치에슬릭de은 로마 예수회 기록소나 런던 대영 박물관 등에서 줄리아에 관한 여러 자료를 발견했다.
1975년 신진도 촌장은 줄리아의 순교를 보고했고, 교황의 대리가 신진도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으며, 줄리아를 성인으로 인정했다.
슨푸 시대에는 등롱을 만들어 묵상하게 했다고 전해지며, 그 "키리시탄 등롱"은 현재 보대원으로 옮겨져 있다.
4. 문화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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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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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사잔 올 스타즈의 곡 꿈 속에서 사라진 줄리아 (2004년 발매). 쿠와타 케이스케는 작사, 작곡 후 오타 주리아 전설을 알게 되었으며, 곡 내용도 전설과 유사하다. |
소설 | 아라야마 토오루의 『사랑, 슬픔을 넘어』 (분게이슌주, 2005년 5월 단행본 간행, ISBN 4163239405). 문고판은 『사랑·고향 잊지 않으려고 하옵니다』로 제목 변경 (2008년 6월 간행, ISBN 4167717859). |
영화 | 나카지마 사다오 감독, 아키노 요코 출연의 『사나다 유키무라의 모략』 (1979년). |
뮤지컬 | 와라비좌의 『오타 주리아』 (2015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 공연으로, 어린 시절부터 슨푸성에서 배교를 강요받기까지를 그린다.[11] |
만화 | 카와무라 에리의 『봄 안개의 난』 (1990년, 아키타 쇼텐 프린세스 코믹스 『베개 그림책』에 동시 수록, 1990년 8월 간행, ISBN 4253074006). |
참조
[1]
웹사이트
Letters by tragic 17th century Korean Christian causing a buzz
https://www.asahi.co[...]
2023-08-04
[2]
웹사이트
VOX POPULI: Letter by Korean taken to Japan in 1500s sheds light on her tragic life
https://www.asahi.co[...]
2023-08-04
[3]
웹사이트
Pilgrims revere Korean-born woman expelled from Tokyo for her faith
https://www.ucanews.[...]
1985-06-05
[4]
웹사이트
宝台院(静岡市)
https://www.sizutabi[...]
2023-08-04
[5]
웹사이트
ジュリアおたあ (Julia Ota)
https://kotobank.jp/[...]
The Asahi Shimbun Publications
2017-10-29
[6]
뉴스
Seoul shrine honors Korea's 'Helen'
http://www.koreahera[...]
2001-01-19
[7]
뉴스
家康の侍女 流刑の朝鮮人キリシタン:ジュリアおたあ直筆書状/山口・萩博物館 出自裏付け 捕らえられた体験記す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23-05-17
[8]
간행물
2017
[9]
웹사이트
萩藩士宅に家康の小袖 背景に秀吉の朝鮮出兵 山口で特別公開
https://news.yahoo.c[...]
毎日新聞
2023-04-28
[10]
간행물
http://joliechat5.bl[...]
2017
[11]
웹사이트
ミュージカル「ジュリアおたあ」 信仰守り希望与えた純真さ描く
http://www.kirishin.[...]
キリスト新聞
202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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