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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노미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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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쓰노미야성 전투는 1868년 보신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구 막부군과 신정부군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구 막부군은 오토리 게이스케, 히지카타 도시조 등이 이끌었으며, 1차 전투에서 승리하여 성을 점령했으나, 이후 신정부군의 반격으로 성을 빼앗겼다. 2차, 3차 전투에서도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고, 결국 신정부군이 우쓰노미야성을 탈환했다. 이 전투는 닛코로 전선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이즈 전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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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노미야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우쓰노미야성 전투
일부보신 전쟁의 일부
시기1868년 5월 10일 – 1868년 5월 14일
에도 시대의 우쓰노미야성
에도 시대의 우쓰노미야성
장소도치기현우쓰노미야시
결과제국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제국군
지휘관 1통치자: 메이지 천황
군대 지휘관 1가가와 게이조, 이지치 마사하루, 도다 다다유키, 아리마 도타, 오야마 이와오, 노즈 미치쓰라, 가와타 가게토모
병력 1700명
증원군 120,000명
사상자 1알 수 없음
교전 2도쿠가와 막부
지휘관 2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군대 지휘관 2다케나카 시게카타, 오토리 게이스케, 히지카타 도시조, 에가미 타로, 다쓰미 나오후미
병력 22,000명
최초 공격 시 병력 21,000명
피해 2파괴: 우쓰노미야성, 후타라산 신사, 48개 사찰
관련 전투
일본어 명칭
로마자 표기Utsunomiyajō no tatakai
한국어 명칭
한국어 명칭우쓰노미야성 전투
1차 공성전
날짜(구력) 게이오 4년 4월 19일 / (신력) 1868년 5월 11일
결과구 막부군의 승리
2차 공성전
날짜(구력) 게이오 4년 4월 23일 / (신력) 1868년 5월 15일
결과신정부군의 승리

2. 배경

1868년 초봄, 오토리 게이스케히지카타 도시조가 이끄는 구 도쿠가와 막부군은 에도를 떠나 国府台|고노다이일본어에 집결했다. 이들은 아이즈 번 병사, 구와나 번 병사, 신센구미 대원 등 다양한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무라이 외에도 오토리의 지휘 아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1] 이들의 목표는 북쪽의 닛코와 아이즈로 가는 길목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우쓰노미야였다.

당시 우쓰노미야의 다이묘 도다 다다토모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명으로 교토에 사죄와 복종의 서신을 제출하러 갔다가 사쓰마-조슈 연합군에 의해 억류된 상태였다.[2] 이는 연합군이 요시노부의 조기 사면을 막아 반(反) 도쿠가와 군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우쓰노미야는 다다토모의 전임자이자 은퇴한 도다 다다유키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항복을 지지했지만 구 막부군의 움직임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2. 1. 일본 국내 정세

게이오 4년(1868년) 4월, 시모우사노쿠니 이치카와의 고우노다이에 막부 신하 등이 모여 약 2,000명의 병력이 되었다. 이들은 지휘관 오토리 게이스케, 히지카타 도시조를 중심으로 신센구미, 덴슈대, 구와나번 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구 막부군은 4월 12일에 2군으로 나뉘어 닛코로 향했다.[1]

구 막부군은 선봉부대를 나누어 아키즈키 노보리노스케가 이끄는 부대는 시모쓰마로, 히지카타가 이끄는 부대는 시모다테로 향했다. 오토리 게이스케가 이끄는 구 막부군 중 후군, 별동대는 4월 16일과 17일에 오야마 부근에서 도산도군 총독부 대군감 가가와 게이조가 이끄는 신정부군과 4번의 전투 끝에 패하였다.[2]

4월 17일, 히지카타는 시모다테성을 포위하고 성 정면에 대포를 설치하여 시모다테번에게 구 막부군 참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시모다테번은 번주 이시카와 후사카네의 병환 등을 이유로 참가를 거절하고 물자 공출에만 동의했다. 이후 아키즈키 부대는 시모쓰마 번에서 30명(10명 설도 있음)의 병사를 징발하여 히지카타 부대와 합류했고, 다음 날인 4월 18일에 우쓰노미야로 향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이 참패한 게이오 4년(1868년) 초, 전국적으로 일어난 "에에 자나이카"와 "세상 바로잡기"가 가미쓰케에서 시모쓰케에도 번졌다. 시모쓰케 남부에서 일어난 농민들은 장원이나 본진 등을 파괴하며 북상했다. 같은 해 4월 1일(4월 23일) 농민 집단은 우쓰노미야 성하 남부에 접근하여 우쓰노미야 번에 설득을 시도했지만, 번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3일(4월 25일)에는 우쓰노미야 성하 야와타야마에 결집하여 규모가 3만 명에 달했다. 농민 집단은 우쓰노미야 성내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가누마와 이마이치 방면에서 파괴 활동을 계속했다(야슈 세상 바로잡기).

한편, 우쓰노미야 번 가로 아카라 노부모리는 이 사태를 이타바시의 도산도 총독부에 보고했다. 농민 집단이 우쓰노미야 성에 접근한 4월 1일, 총독부는 우쓰노미야에 구원군 파견을 결정했다. 다음 날인 2일(24일)에는 도산도 총독부군 대군감 가가와 게이조가 이끄는 병사 200명이 우쓰노미야로 향했다. 도중 가스카베 숙에서 시모사 나가레야마에 신센구미가 잠복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아리마 도다 등을 나가레야마로 보내 고시가야까지 연행된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에게 항복을 설득했지만, 곤도는 거부했다. 가와 등은 곤도를 이타바시의 총독부로 압송했다. 이후 가와가 이끄는 부대는 7일(4월 29일)에 우쓰노미야 성에 입성하여 닛코를 순회했고, 소시키 부대는 유키와 모오카를 거치며 세상 바로잡기 소동을 진정시켰다.

소동 후 12일(5월 4일), 곤도가 체포된 후 신센구미 대원 등 시모사 이치카와 국부대 다이린지 절에 결집했던 구 막부 측 보병 약 2,000명은 도쿠가와 정권의 성지인 닛코 묘(닛코 도쇼구)에서 결전을 벌이기 위해 북상했다. 이 보병대는 당시 최신예 화기[8]를 갖추고 프랑스식 보병 전술로 훈련된 정예 전습대를 중심으로 보병 제7연대, 구와나 번 부대, 카이텐타이, 신센구미 등이 참가했으며, 군 총감과 군 참모는 각각 오토리 게이스케히지카타 도시조가 맡았다. 구 막부군은 시모사 마쓰도 코가네 숙에서 오토리가 이끄는 본대와 히지카타가 이끄는 별동대로 나뉘어 우쓰노미야 성을 동서에서 협공하기 위해 각각 시모쓰케 니부·가누마 및 모오카로 향했다.

구 막부군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총 지휘관오토리 게이스케, 히지카타 도시조, 에가미 타로 (아키즈키 도노스케), 혼다 고시치로, 다쓰미 겐자부로 (다쓰미 나오후미), 야마세 슈마, 소마 사킨고
병력약 2,200명 (후발대를 합하면 약 3,250명)



구분부대명병력대장
전군
(별동대)
전습대 보병 제1대대700명에가미 타로
구와나 번 병200명다쓰미 겐자부로
카이텐타이50명소마 사킨고
신센구미30명히지카타 도시조
중군
(오토리 본대)
전습대 보병 제2대대600명혼다 고시치로
후군
(오토리 본대)
보병 제7연대350명야마세 슈마
포병대250명
후발대어료병100명가토 헤이우치 (기하타)
세이병대 (세이 교대)30명나가쿠라 신파치
초풍대150명아마노 덴시로 (전습대의 상층 부대)
관의대100명마쓰다이라 효고노카미
순의대600명와타나베 쓰나요스케
료소대50명아사히나 시게키치 (군조 번)



오토리 부대(구 막부군 본대)는 15일(5월 7일)에 시모사 고가의 모로카와까지 진군했고, 다음 날인 16일(5월 8일)에는 시모사 국내에서 신정부군과 접촉하여 이를 격퇴하고 북상했다. 오야마 숙에서 우쓰노미야에서 남하해 온 신정부군·가와 부대(히코네 번 병 등)와 교전하여 최신 병장과 병술로 이들을 패주시켰다(오야마 전투). 당초 진입 예정이었던 니부에 이미 신정부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니부 거리 이즈카 숙에서 반전, 18일(5월 10일)에 도치기에 들어가 다음 날인 19일(5월 11일)에는 가누마로 진군했다. 한편, 구 막부군 별동대(에가미, 다쓰미, 히지카타 부대)는 마쓰도 코가네 숙에서 미즈카이도(현 조소 시), 시모쓰마(현 시모쓰마 시), 시모다테(현 지쿠세이 시)를 거쳐 19일에는 모오카 부근까지 진군했다.

한편, 구 막부군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아이즈 번 번사와 번병들이 시모쓰케 국내 고토쿠 번 영지, 닛코 산 영지, 우쓰노미야 번 주변까지 진출하여 각지에서 은밀히 활동을 시작했고, 우쓰노미야 주변 치안은 일촉즉발의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 세력에는 데와쇼나이 번을 목표로 에도를 출발한 구 막부 정예 보병대 일부인 충봉대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우쓰노미야 중북부 주변 산에 진을 치고 신정부군의 북상을 정찰·견제했으며, 우쓰노미야 성 함락과 함께 아이즈로 철수했다고 한다.

이러한 구 막부군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신정부군은 4월 18일, 오야마에서 패전 후 우쓰노미야로 귀환했던 가와 부대 100명, 전 우쓰노미야 번주 도다 다다요시가 이끄는 우쓰노미야 번병 300명, 구원 온 카라스야마 번 병력 100명을 합쳐 우쓰노미야 성 수비를 강화했다. 한편, 도산도 총독부군은 우쓰노미야 성 공성전에 맞춰 긴급 파견한 돗토리 번(가와다 게이요가 이끄는 번병 3개 소대), 도사 번(소후에 가세이가 이끄는 번병 5개 소대와 포병대), 마쓰모토 번 번병이 시모사 고가에, 사쓰마 번(이지치 마사하루가 이끄는 번병 5번대와 포병대), 조슈 번(번병 제1대대 제2중대), 오가키 번(번병 2개 소대) 번병이 동사테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2. 2. 우쓰노미야 번의 상황

게이오 4년(1868년) 초,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이 패배한 후, 가미쓰케에서 시모쓰케에 이르는 지역에 "에에 자나이카"와 "세상 바로잡기" 운동이 확산되었다. 시모쓰케 남부에서 일어난 농민들은 장원이나 본진 등을 파괴하며 북상했다. 같은 해 4월 1일(4월 23일) 농민 집단은 우쓰노미야 성 남부에 접근했고, 우쓰노미야 번은 이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3일(4월 25일)에는 우쓰노미야 성 야와타야마에 3만 명 규모로 결집했다. 농민 집단은 성내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가누마와 이마이치 방면에서 파괴 활동을 계속했다 (야슈 세상 바로잡기).[8]

우쓰노미야 번 가로 아카라 노부모리는 이타바시의 도산도 총독부에 이 상황을 보고했다. 4월 1일, 농민 집단이 우쓰노미야 성에 접근한 날, 총독부는 우쓰노미야에 구원군 파견을 결정했다. 다음 2일(24일)에는 도산도 총독부군 대군감 가가와 게이조가 이끄는 병사 200명이 우쓰노미야로 향했다. 도중 가스카베 숙에서 나가레야마에 신센구미가 잠복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아리마 도다 등을 보내 고시가야까지 연행된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곤도를 이타바시 총독부로 압송했다. 이후 가와 부대와 소시키 부대로 나뉘어 진군, 7일(29일) 우쓰노미야 성에 입성하여 닛코 순회 및 유키, 모오카를 거치며 세상 바로잡기 소동을 진정시켰다.

소동 후 12일(5월 4일), 곤도가 체포된 후 신센구미 대원 등은 시모사 이치카와 국부대 다이린지 절에 결집했다. 약 2,000명의 구 막부 측 보병대는 도쿠가와 정권의 성지인 닛코 묘(닛코 도쇼구)에서 결전을 벌이기 위해 북상했다. 이들은 프랑스식 보병 전술로 훈련된 정예 전습대를 중심으로, 보병 제7연대, 구와나 번 병, 카이텐타이, 신센구미 등으로 구성되었고, 오토리 게이스케히지카타 도시조가 각각 군 총감과 군 참모를 맡았다. 구 막부군은 시모사 마쓰도 코가네 숙에서 오토리 부대(본대)와 히지카타 부대(별동대)로 나뉘어 우쓰노미야 성을 동서에서 협공하기 위해 니부·가누마, 모오카로 향했다.

구 막부군에 호응하여 아이즈 번 병사들이 시모쓰케 국내 고토쿠 번 영지, 닛코 산 영지, 우쓰노미야 번 주변에서 은밀히 활동하며 우쓰노미야 주변 치안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이들 중에는 데와 쇼나이 번을 목표로 에도를 출발한 구 막부 정예 보병대(후의 충봉대)도 있었다. 이들은 우쓰노미야 중북부 산에 진을 치고 신정부군의 북상을 정찰·견제하며, 우쓰노미야 성 함락과 함께 아이즈로 철수했다.

이러한 구 막부군의 움직임에 신정부군은 오야마에서 패전 후 우쓰노미야로 귀환한 가와 부대(100명), 전 우쓰노미야 번주 도다 다다요시가 이끄는 우쓰노미야 번병(300명), 카라스야마 번 병(100명)으로 우쓰노미야 성 수비를 강화했다. 또한 도산도 총독부군은 우쓰노미야 성 공성전에 맞춰 돗토리 번, 도사 번, 마쓰모토 번, 사쓰마 번, 조슈 번, 오가키 번 병력을 긴급 파견했다.

3. 경과

공격 며칠 전, 구 막부군은 성에서 성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히지카타는 1868년 5월 7일과 8일에 히타치 국의 시모츠마와 시모다테 두 영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들 영지는 작았고 다이묘가 도망갔기 때문에 돈이나 물자가 많지 않아 히지카타는 기대했던 것을 얻을 수 없었다.[3] 거의 동시에 우쓰노미야에서 농민 폭동이 일어나 구 막부군에게 공격의 완벽한 기회를 제공했고, 그들은 지체 없이 이를 이용했다.[2] 1868년 5월 10일 아침, 오토리 군은 마쓰모토(시나노 국), 쿠로바네(시모츠케 국), 미부(시모츠케 국), 이와무라타(시나노 국), 스사카(시나노 국), 히코네(오미 국), 오가키(미노 국), 우쓰노미야(시모츠케 국), 카사마(히타치 국)의 병력으로 구성된 연합 황군과 맞서며 우쓰노미야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토다 타다유키는 타테바야시로 도망쳤다.[4] 오토리는 군대의 주력을 이끌고 성에 입성하여 며칠 동안 폭동을 일으켰던 마을 사람들에게 성의 쌀을 나눠주었다.[2]

이후 오토리 군은 히지카타 부대, 전 신센구미 대원 나가쿠라 신파치의 부대인 세이헤이타이[5] 등과 합류하여 북쪽의 미부로 향했으나, 사쓰마 번 군이 이미 미부 성을 점령한 상태였다. 사쓰마 군은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에 놀라 미부 성으로 후퇴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고, 공격자들은 성 마을에 불을 지르려 했지만 폭우로 인해 불가능했다. 연합 부대는 미부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장교 8명을 포함하여 총 60명의 사상자를 내고 우쓰노미야로 후퇴했다.[4]

5월 14일, 남쪽에서 사쓰마 번 군과 오가키 번 군이 선두에 선 황군은 미부 가이도 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진격하여 반격을 시작했고, 같은 날 우쓰노미야 성을 재탈환했다.[2] 패배한 오토리 군은 닛코를 거쳐 아이즈로 북쪽으로 후퇴했다.[6][4]

3. 1. 1차 우쓰노미야 성 공방전 (1868년 음력 4월 19일)

1868년 음력 4월 19일 새벽, 구 막부군 선봉부대가 우쓰노미야 성을 공격했다. 히지카타 도시조가 이끄는 구와나 번 부대는 성의 남동쪽 야나세 교(簗瀬橋)를 돌파하여 시모가와라 문(下河原門)으로 쳐들어갔으나, 신정부군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아키즈키가 이끄는 덴슈 제1대는 나카가와라 문(中河原門)을, 가이텐 대는 남쪽 관문을 공격했다.[3]

전투 중, 구 막부군 병사 한 명이 도망치려 하자 히지카타는 그를 베어 "퇴각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렇다"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구 막부군의 사기가 올라 시모가와라 문을 돌파했다. 신정부군은 니노마루에 불을 지르고 퇴각했고, 우쓰노미야 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우쓰노미야 성의 불꽃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3]

몇 주 전, 구 막부군은 성에서 성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히지카타는 5월 7일과 8일에 히타치 국의 시모츠마와 시모다테 두 영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들 영지는 작았고 다이묘가 도망갔기 때문에 돈이나 물자가 많지 않았고, 히지카타는 기대했던 것을 얻을 수 없었다.[3] 거의 동시에 우쓰노미야에서 농민 폭동이 일어나 구 막부군에게 공격의 완벽한 기회를 제공했고, 그들은 지체 없이 이를 이용했다.[2]

오토리 군은 1868년 5월 10일 아침, 마쓰모토(시나노 국, 60,000 코쿠), 쿠로바네(시모츠케 국, 18,000 코쿠), 미부(시모츠케 국, 18,000 코쿠), 이와무라타(시나노 국, 18,000 코쿠), 스사카(시나노 국, 12,000 코쿠), 히코네(오미 국, 350,000 코쿠), 오가키(미노 국, 100,000 코쿠), 우쓰노미야(시모츠케 국, 77,000 코쿠), 카사마(히타치 국, 80,000 코쿠)의 병력으로 구성된 연합 황군과 맞서며 성을 공격했다.[4] 성은 같은 날 함락되었고, 토다 타다유키는 타테바야시로 도망쳤다.[4] 오토리는 군대의 주력을 이끌고 성에 입성했다. 그의 군대는 며칠 동안 폭동을 일으켰던 마을 사람들에게 성의 쌀을 나눠주었다.[2]

이후 오토리 군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오토리의 부대는 히지카타 부대와 합류했고, 전 신센구미 대원 나가쿠라 신파치의 부대인 세이헤이타이[5] 등을 포함하여 북쪽으로 미부로 향했으며, 그곳에 숨어 기다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 사쓰마 번 군이 이미 성을 점령한 것을 발견했다. 사쓰마 군은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에 놀라 미부 성으로 후퇴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공격자들은 성 마을에 불을 지르려 했지만, 폭우가 쏟아져 불가능해졌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연합 부대는 미부 성을 점령할 수 없었고, 장교 8명을 포함하여 총 60명의 사상자를 내고 우쓰노미야로 후퇴했다.[4]

남쪽에서 사쓰마 번 군과 오가키 번 군이 선두에 선 황군은[4] 5월 14일 미부 가이도 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진격하여 반격을 시작했고, 그 결과 같은 날 우쓰노미야 성을 재탈환했다.[2] 패배에 직면한 오토리 군은 닛코를 거쳐 아이즈로 북쪽으로 후퇴했다.[6][4]

히지카타 도시조가 이끄는 구 막부군 별동대(병력 약 2,000명)는 다데누마 마을(현 가미카와 마치 다데누마)의 만복사에 진을 치고 19일 새벽, 1,000명 이상이 신정부군 주력이 배치된 가도를 피하고 간도를 통해 우쓰노미야 성을 목표로 했다.

구 막부군 (약 1,000명 이상)신정부군 (약 600명)



오전 4시경, 히지카타 등은 스나타 마을에 도착하여 그곳을 수비하던 히코네 번 소대를 급습했다. 고야마 전투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던 히코네 번 병사들은 사기가 저하되어 성내로 철수했다. 구 막부군은 우쓰노미야 번 주력의 제1대가 대비하는 야나세의 배후로 진격했다. 구 막부군의 정예병은 프랑스식 병술로 최신 병기를 다룬 반면, 우쓰노미야 번 병사는 구식 화기밖에 없었으나 선전했다. 그러나 결국 우쓰노미야 성 안으로 철수해야 했다. 신정부군은 타가와 강의 다리를 파괴하지 않아 구 막부군은 쉽게 성 아래로 진입했다. 히지카타 등은 길을 따라 촌장 등 호농의 집에 불을 지르며 진군했고, 남동풍으로 인해 불은 우쓰노미야 성 아래로 퍼졌다.

낮이 되자 전습대 제1대대와 회천대는 성 북동쪽에서, 구와나 번 병사와 신선조는 성 남동쪽에서 공격해 왔다. 히지카타 등은 야나세 다리를 돌파하고 절에도 방화했다. 이때 에이간 사에 연금되어 있던 에도 막부노중 이타쿠라 가쓰키요를 구출했다. 이타쿠라는 이후 하코다테 전쟁까지 구 막부군과 함께 무진 전쟁을 치르게 된다.

구 막부군은 우쓰노미야 성의 가와라 문, 시모가와라 문에 육박했지만, 우쓰노미야 번 군사 봉행인 토다 산자에몬과 번로인 나카지마 토큐로 등이 이끄는 수비대의 화력에 막혀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회천대도 이마코지 문을 공격했지만, 대장 소마 사킨고가 총탄에 쓰러졌다. 시모가와라 문 부근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우쓰노미야 번 측도 십수 명이 목숨을 잃었다. 막부군과 신정부군은 성 남부의 대나무 숲을 사이에 두고 백병전을 벌였다. 구 막부군은 삼노마루 번사 저택에도 불을 질렀고, 성 아래의 불은 바람에 휩쓸려 번져 나갔다. 이노마루 고텐과 후타라야마 신사도 피탄되었고, 성 아래 비전투원도 총탄에 맞아 부상당할 정도였다.

오후 2시가 되어도 병력과 병장기 모두 열세였던 신정부군은 구 막부군을 우쓰노미야 성에서 철수시키지 못했다. 묘진 산에서 성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는 후타라야마 신사에는 아침부터 전투를 구경하는 민중이 모였지만, 낮에는 구 막부군 포병의 최신식 산포가 착탄되어 민중은 도망쳤다. 얼마 후 후타라야마 신사는 구 막부군에 점령되어 방화로 인해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성내의 불길도 쇠퇴하지 않고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이 소모전 중, 신정부군은 결단을 내렸다. 동산도 총독부 참모 아리마 토타는 오토리 본대나 아이즈 번 병사, 충봉대의 공격으로부터 우쓰노미야 성을 지켜낼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병력을 보존하고 동산도 총독부 구원군과 합류하여 우쓰노미야 성을 탈환하는 전략이 유리하다고 카가와 케이조에게 진언했다. 카가와는 이를 받아들여 신정부군은 남쪽으로 철수했다.

신정부군은 먼저 토다 타다히로를 우쓰노미야 성에서 탈출시켰고, 가로 후지타 사쿄 이하 번사 50명이 따랐다. 타다히로 일행은 후타라야마 신사 사가 당주인 나카자토 센조쿠의 집에서 몸을 정돈한 후, 다테바야시 번 주 아키모토 레이다의 집으로 향했다. 카가와 등 동산도 총독부군은 후루카와로 출발했고, 마지막으로 남은 토다 산자에몬 등 우쓰노미야 번 간부는 이노마루 고텐에 불을 지르고 성을 떠나 후루카와·다테바야시로 향했다. 구 막부군도 저녁이 되어 전투를 끝내고 다데누마 방면으로 철수하여 숙영했다. 이로써 제1차 우쓰노미야 성 공성전은 종결되었다.

그날 밤, 우쓰노미야 성 아래의 화염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성내의 건조물은 번교인 수도관 등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성 아래는 방화되었고 후타라야마 신사도 본전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당이 전소되었다. 후타라야마 신사의 보물은 사가에 의해 성 밖의 히라노 신사로 옮겨져 화를 면했다. 성내에는 목 없는 유체나 몸통에서 떨어진 수급이 굴러다녔다. 우쓰노미야 번 병사의 전사자는 10명이었고, 그중 1명은 15세의 야마모토 마츠사부로(야마모토 유조의 숙부)였다.

이날 구 막부군이 시모가와라 문에 육박했을 때, 한 병사가 도주를 시도하자 히지카타 도시조는 그를 베어 버리고 "퇴각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렇다"라고 말했다. 또한 출진 전 다데누마의 만복사 문전에서는 기누 강을 내려온 구로바네 번 정찰병 수 명이 구 막부군에 붙잡혀 히지카타에게 참수당했다. 이러한 히지카타의 행동은 구 막부군 병사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우쓰노미야 성이 불타고 있다는 보고는 카누마로 진군하던 오토리에게도 전해졌다. 오토리 등은 동쪽 하늘에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별동대가 우쓰노미야 성을 공격했다는 것을 당일 이른 시각에 알고 있었다.

전투 다음 날인 20일(5월 12일), 오토리 대는 본대를 우쓰노미야로 진군시켜 도중 신정부군과 접촉하지 않고 우쓰노미야 성 아래로 들어갔다. 히지카타 도시조 등 별동대도 우쓰노미야 성으로 향했다. 텅 빈 우쓰노미야 성에 입성한 구 막부군은 불에 타 남은 쌀 창고에서 3,000석, 본환 창고에서 금 30000냥을 발견했다. 오토리 등은 소실을 면한 수도관 및 삼노마루의 가로 번저를 본영으로 삼고, 성내에 남겨진 식량을 불에 탄 서민에게도 나눠주며 병사들에게 난폭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포고했다.

3. 2. 미부 전투 (1868년 음력 4월 21일 - 22일)

사쓰마번·조슈번·오가키번·돗토리번·도사번 등으로 구성된 신정부군은 우쓰노미야성 탈환을 위해 4월 21일(음력)에 우쓰노미야로 향했다. 구 막부군은 미부성 공격을 위해 남하했지만, 신정부군은 스가타가와에서 이를 저지하여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이후 신정부군 원군이 도착하자 구 막부군은 퇴각했다.

4월 21일(5월 13일) 우쓰노미야 성을 출발한 구 막부군은 다음 날인 4월 22일(5월 14일) 새벽 신정부군 야스즈카 진지에 총공격을 가했다. 신정부군은 열세였으나, 때마침 쏟아진 폭우로 구 막부군 병사들의 피로가 심해졌고, 미부성에서 출격한 돗토리번 병사의 반격과 동산도 총독부의 추가 파견 구원군이 미부성에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에 구 막부군은 우쓰노미야 성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신정부군은 전사자 16명, 구 막부군은 전사자 60~70명의 피해를 입었다.[4]

3. 3. 2차 우쓰노미야 성 공방전 (1868년 음력 4월 23일)

사쓰마번 병사, 조슈번 병사, 오가키번 병사, 돗토리번 병사, 도사번 병사 등으로 구성된 신정부군은 4월 21일(음력) 우쓰노미야 성 탈환을 위해 진격했다. 구 막부군은 미부성을 공격하려 남하했지만, 신정부군은 스가타 강에서 저지하여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이후 신정부군의 원군이 도착하자 구 막부군은 퇴각했다.

4월 23일(음력) 아침, 신정부군은 우쓰노미야 성 공격을 개시했다. 성 아래 입구인 로쿠도노쓰지가 최전선이 되었다. 신정부군이 로쿠도노쓰지를 점령한 후, 닛코 가도 닛타 마을의 엔메이 원, 게이린 사에 포대를 설치하고 우쓰노미야 성과 구와나 번 부대가 수비하는 묘진산(우쓰노미야 다이묘진), 하치만 산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히지카타 도시조는 구와나 번 병사를 이끌었으나 후타라 산 신사에서 발가락에 총상을 입었고, 아키즈키 노보리도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전장을 이탈하여 이마이치로 호송되었고, 신정부군은 우쓰노미야 성을 탈환했다.[3]

이와이 전투에 참전했던 이치지 마사하루가 이끄는 신정부 측 구원군은 유키에서 급히 도착하여 성 남쪽에서 우쓰노미야 성을 공격했다. 또한, 미부성을 출발한 가와다가 이끄는 돗토리번 병사도 합류하여 묘진산을 공격했고,[12]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히지카타 도시조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전선을 이탈했다. 신정부군 포병대는 성 서쪽의 엔묘인 및 케이린지에 산포를 설치하고 후타라야마 신사와 우쓰노미야 성을 포격했다. 결국 구 막부군은 전사자만 110명[13]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고 하치만야마 방면에서 닛코 산으로 퇴각했다.

4. 결과 및 영향

아이즈 번은 이전에는 항복과 평화로운 협상을 먼저 옹호하고 저항을 나중으로 생각했지만, 우쓰노미야에서 철수한 후 구 막부에 대한 대규모 충성파의 진입으로 무력 저항으로 입장을 굳히게 되었다.[7]

훗날, 오토리는 전투에 대한 기록인 "난카 기행"(南柯紀行)을 저술했는데, 그는 바쿠마츠 역사를 기록하는 데 전념한 잡지인 ''구 막부''(舊幕府)의 편집을 도왔다.

우쓰노미야성 공방전이 종결된 후,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 간의 공방 무대는 닛코로 옮겨졌다. 구 막부군은 도쿠가와 쇼군가의 성지인 닛코 묘를 배경으로 닛코 산에 진을 쳤다. 한편 신정부군은 우쓰노미야성을 아이즈 전선의 거점으로 확보했으며, 우쓰노미야 번 역시 그 일부 부대로서 시모쓰케 국내에서 아이즈 방면까지 전전하게 된다.

그 후, 신정부군은 구 막부군과 이마이치 부근에서 교전하며, 닛코 산에서의 전투를 앞두고 전초전을 벌였다. 그러나 닛코 산의 승려가 신정부군에게 전역 회피를 간청해 오자, 사령관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구 막부군에게 사자를 보내 닛코 산을 내려올 것을 설득했다. 마침 구 막부군에서는 부상자도 늘고 병사들의 피로도 가중되었으며, 물자도 부족해진 상황이었으므로 일단 닛코 산을 내려와 아이즈로 향하여 아이즈 땅에서 재차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 닛코는 전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를 기려, 신교 곁에는 현재도 커다란 이타가키 다이스케 상이 세워져 있다.

파괴된 후타라야마 신사는 그 후 메이지 신정부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사격도 한때 해제되었던 국폐사에 복귀되었다.

또한, 우쓰노미야성 아래에서의 전투에서 전몰자를 위로하기 위해, 구 막부군 측, 신정부군 측 모두 시내의 사원을 중심으로 전몰자 묘비나 위령비가 세워져 공양되었다. 당시 24개의 사원에 비석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도 도치기현 호국 신사 (충서와 우쓰노미야 번사 97명)나 로쿠도 부근의 호온지, 잇코지, 기요스미초의 케린지 등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5. 등장 인물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오토리 게이스케히지카타 도시조를 중심으로 구 막부군이 재편되었다. 이들은 신센구미, 덴슈대 등 다양한 부대를 이끌고 우쓰노미야성 전투에 참여했다.

도산도군 총독부 대군감 가가와 게이조가 이끄는 신정부군은 오야마 전투에서 구 막부군에게 패배한 후, 우쓰노미야성을 중심으로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5. 1. 구 막부군

게이오 4년(1868년) 4월, 시모우사노쿠니 이치카와의 고우노다이에 막부의 신하 등이 모여 약 2,000명의 병력이 되었다. 지휘관 오토리 게이스케, 히지카타 도시조를 중심으로 신센구미, 덴슈대, 구와나번 부대 등이 참가하였다. 이들 구 막부군은 4월 12일에 2군으로 나뉘어 닛코로 향했다.[1]

구 막부군은 선봉부대를 나누어, 한 부대는 아키즈키 노보리노스케가 이끄는 시모쓰마로 향하고, 또 한 부대는 히지카타가 이끄는 시모다테로 향했다. 오토리 게이스케가 이끄는 구 막부군 중, 후군, 별동대는 4월 16일, 17일에 오야마 부근에서 도산도군 총독부 대군감 가가와 게이조가 이끄는 신정부군과 4번의 전투 끝에 결국 패하였다.

4월 17일, 히지카타는 시모다테성을 포위하여 성의 정면에 대포를 설치, 시모다테번이 구 막부군으로 참가하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시모다테번은 번주 이시카와 후사카네의 병환 등을 이유로 참가를 거절, 물자의 공출에는 동의했다. 그 후 아키즈키 부대는 시모쓰마 번에서 30명(10명 설도 있다.)의 병사를 공출해내, 히지카타 부대와 합류하여, 다음날 4월 18일에 우쓰노미야로 향했다.[3]

1868년 초봄, 오토리 게이스케히지카타 도시조 휘하의 전 도쿠가와 가신들은 에도의 쇼군 수도를 대거 떠나 고노다이|고노다이일본어에 집결했다. 아키즈키 노보리노스케 휘하의 아이즈 병사들과 구와나 병사들, 타츠미 나오후미 휘하의 병사들이 소수 있었으며, 시마자 카이를 비롯한 소수의 생존 신센구미 대원들도 있었다.[1] 그들의 대부분은 사무라이였지만, 오토리의 직접적인 지휘 하에 다른 사회 계층의 구성원들도 많았다.

공격 며칠 전, 구 막부군은 성에서 성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히지카타는 5월 7일과 8일에 히타치 국의 시모쓰마와 시모다테 두 영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들 영지는 작았고 다이묘가 도망갔기 때문에 돈이나 물자가 많지 않았고, 히지카타는 기대했던 것을 얻을 수 없었다.[3]

이후 오토리 부대는 히지카타 부대와 합류했고, 전 신센구미 대원 나가쿠라 신파치의 부대인 세이헤이타이|세이헤이타이일본어[5] 등을 포함하여 북쪽으로 미부로 향했으며, 그곳에 숨어 기다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 사쓰마군이 이미 성을 점령한 것을 발견했다. 사쓰마군은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에 놀라 미부 성으로 후퇴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공격자들은 성 마을에 불을 지르려 했지만, 폭우가 쏟아져 불가능해졌다. 이 연합 부대는 미부 성을 점령할 수 없었고, 장교 8명을 포함하여 총 60명의 사상자를 내고 우쓰노미야로 후퇴했다.[4]

패배에 직면한 오토리군은 닛코를 거쳐 아이즈로 북쪽으로 후퇴했다.[6][4]

구 막부군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총 병력약 2,200명 (후발대를 합하면 약 3,250명)
지휘관오토리 게이스케, 히지카타 도시조, 에가미 타로 (아키즈키 도노스케), 혼다 고시치로, 다쓰미 겐자부로 (다쓰미 나오후미), 야마세 슈마, 소마 사킨고



구분부대명병력대장
전군전습대 보병 제1대대700명에가미 타로
전군구와나 번 병200명다쓰미 겐자부로
전군카이텐타이50명소마 사킨고
전군신센구미30명히지카타 도시조
중군전습대 보병 제2대대600명혼다 고시치로
후군보병 제7연대350명야마세 슈마
후군포병대250명
후발대어료병100명가토 헤이우치 (기하타)
후발대세이병대|세이병대일본어 (세이 교대|세이 교대일본어)30명나가쿠라 신파치
후발대초풍대150명아마노 덴시로 (전습대의 상층 부대)
후발대관의대100명마쓰다이라 효고노카미
후발대순의대600명와타나베 쓰나요스케
후발대료소대50명아사히나 시게키치 (군조 번)



오토리대(구 막부군 본대)는 15일(5월 7일)에 시모사 고가의 모로카와까지 진군, 다음 16일(5월 8일)에는 시모사 국내에서 신정부군과 접촉, 이를 물리치고 기세를 몰아 북상, 오야마 숙에서 우쓰노미야에서 남하해 온 신정부군·가와대(히코네 번 병 등)와 교전하여, 최신 병장과 최신 병술로 이를 패주시켰다(오야마 전투). 당초 들어갈 예정이었던 니부에 이미 신정부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니부 거리 이즈카 숙에서 반전, 18일(5월 10일)에 도치기에 들어가 다음 19일(5월 11일)에는 가누마로 전진했다. 한편, 구 막부군 별동대(에가미, 다쓰미, 히지카타대)는, 마쓰도 코가네 숙에서 미즈카이도(현·조소 시), 시모쓰마(현·시모쓰마 시), 시모다테(현·지쿠세이 시)를 거쳐, 19일에는 모오카 부근까지 진군하고 있었다.

한편, 구 막부군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아이즈 번의 번사·번병이 시모쓰케 국내 고토쿠 번 영지나 닛코 산 영지, 우쓰노미야 번 주변에까지 진출, 각지에서 조용히 활동을 시작하여, 우쓰노미야 주변의 치안은 일촉즉발의 상태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 세력에는 데와쇼나이 번을 목표로 에도를 출발한 구 막부의 정예 보병대의 일부, 즉 후의 충봉대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우쓰노미야 중북부 주변에 산재하는 산에 진을 치고 신정부군의 북상을 정찰·견제하여, 우쓰노미야 성의 함락과 함께 아이즈로 철퇴했다고 한다.

5. 2. 신정부군

18일 오야마 전투에서 패배한 신정부군은 우쓰노미야로 돌아와 수비를 강화했다. 가와 부대 100명, 전 우쓰노미야 번주 도다 다다요시가 이끄는 우쓰노미야 번병 300명, 가라스야마 번 지원 병력 100명이 이에 해당했다.

도산도 총독부군은 우쓰노미야 성 공성전에 맞춰 긴급히 병력을 파견했다. 돗토리 번(가와다 게이요가 이끄는 번병 3개 소대), 도사 번(소후에 가세이가 이끄는 번병 5개 소대와 포병대), 마쓰모토 번의 각 번병은 시모사 고가로, 사쓰마 번(이지치 마사하루가 이끄는 번병 5번대와 포병대), 조슈 번(번병 제1대대 제2중대), 오가키 번(번병 2개 소대)의 각 번병은 사테로 진군했다.[4]

참조

[1] 간행물 Nanka Kikō 1898
[2] 서적 Utsunomiya-han Yūzankaku 1989
[3] 서적 Shinsengumi Hyakuichi no Nazo Shin Jinbutsu Ōraisha 2000
[4] 서적 Aizu Boshin Senshi Tōkyō Daigaku Shuppankai 1931
[5] 서적 Shinsengumi Tenmatsu-ki Shin Jinbutsu Ōraisha 2003
[6] 뉴스 History at a Glance https://www.pressrea[...] The Borneo Post 2017-05-14
[7] 서적 Aizu-han no Kakuryō to Hanron Shin Jinbutsu Ōraisha 1984
[8] 문서 明治維新の際に幕府兵伝習隊が有していた火器の性能は、当時の日本の各藩が標準装備していた銃より射撃間隔が短く、また射程も倍程度あったと言われている。
[9] 문서 1968
[10] 문서 1968
[11] 문서 2016
[12] 문서 1968
[13] 문서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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