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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국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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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정국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아버지 우공에게 법률을 배우고 옥리, 정위의 사, 어사중승 등을 거쳐 승상에 이르렀다. 소제의 죽음 이후 창읍왕 유하의 음란함을 간언하여 선제 즉위 후 중용되었으며, 정위로 18년간 재직하며 공정한 재판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어사대부, 승상을 역임하며 서평후에 봉해졌으나, 원제 시기 천재지변으로 질책을 받고 승상에서 물러난 뒤 사망했다. 시호는 안(安)이며, 아들 우영 또한 어사대부에 이르렀다.

2. 생애

아버지 우공(于公)[1]에게서 법률을 배운 우정국은 현의 옥리(獄吏)를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중앙으로 진출하여 정위의 사(史), 어사중승의 종사(從事), 시어사, 어사중승 등을 역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선제가 즉위한 후에는 광록대부 겸 평상서사(平尙書事)로 발탁되어 중용되었으며, 수형도위를 거쳐 지절 원년(기원전 69년) 정위에 임명되었다.

정위로서 18년간 재직하며 공정한 판결로 명성을 쌓았고,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이후 감로 2년(기원전 52년) 어사대부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승상에 올라 서평(西平侯)에 봉해졌다.

원제가 즉위한 후에도 구관(舊臣)으로서 존경받았으나, 어사대부 공우와의 의견 충돌 및 천재지변, 일식 발생 등의 문제로 원제의 질책을 받았다. 결국 영광 원년(기원전 43년) 승상직에서 물러났다. 3년 후인 영광 4년(기원전 40년)에 사망하였으며, 안후(安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우영이 작위를 계승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아버지 우공(于公)[1]은 현의 옥리(獄吏)였는데, 공정한 판결로 동해군에서 명성이 높아 살아있을 때부터 그의 사당이 세워질 정도였다. 또한, 마을 문을 다시 지을 때 우공은 "나는 공정한 재판으로 음덕을 쌓았으니, 자손 중에 높은 관직에 올라 훌륭한 수레를 탈 인물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문을 크게 만들어 훌륭한 수레도 드나들 수 있게 하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정국은 아버지에게서 법률을 배웠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뒤를 이어 옥리가 되었다. 이후 정위의 사(史)가 되었으며, 어사중승의 종사(從事)로 발탁되어 반란 사건의 옥사(獄事)를 처리하였다. 능력을 인정받아 시어사(侍御史)와 어사중승으로 승진하였다.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세상을 떠나고 창읍왕 유하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창읍왕의 행실이 음란하자 우정국은 이를 비판하며 간언하였다. 창읍왕이 폐위되고 선제가 즉위하자, 이전에 창읍왕에게 간언했던 인물들이 모두 중용되었다. 이때 우정국도 발탁되어 광록대부 겸 평상서사(平尙書事)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이후 본시 3년(기원전 71년)에는 수형도위를 역임하였다.

2. 2. 중앙 정치 진출

아버지 우공(于公)[1]에게서 법률을 배운 우정국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뒤를 이어 옥리(獄吏)가 되었다. 이후 중앙으로 진출하여 정위의 사(史)가 되었고, 어사중승의 종사(從事)로 발탁되어 반란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였다. 능력을 인정받아 시어사와 어사중승으로 승진하였다.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붕어하고 창읍왕 유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창읍왕의 행실이 음란하자 우정국은 이를 간언하였다. 창읍왕이 폐위되고 선제가 즉위하자, 이전에 창읍왕에게 간언했던 인물들이 모두 발탁되었다. 이때 우정국도 광록대부 겸 평상서사(平尙書事)로 임명되어 중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본시 3년(기원전 71년)에는 수형도위를, 지절 원년(기원전 69년)에는 정위를 역임하였다.

우정국은 스승에게서 《춘추》를 익혔으며 유자를 존중하였다. 재판을 할 때에는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죄가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가벼운 쪽으로 따르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장석지가 정위가 되니 천하에 억울한 사람이 없어졌고, 우정국이 정위가 되니 백성들이 억울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칭송하였다. 또한 우정국은 술을 즐겼으나, 오히려 술을 마신 후에 복잡한 사건을 명확하게 판결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정위 직책을 18년 동안 맡은 후, 감로 2년(기원전 52년)에 은퇴한 두연년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다음 해인 감로 3년(기원전 51년)에는 사망한 황패의 후임으로 승상에 임명되었고, 서평(西平侯)에 봉해졌다.

원제가 즉위한 후에도 우정국은 선제 때의 구관(舊臣)으로서 존경받았다. 전임 어사대부였던 진만년과는 달리 새로 임명된 공우는 종종 우정국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대부분 우정국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으나, 때마침 발생한 천재지변과 그로 인한 유민 발생의 책임이 대신들에게 있다는 여론이 일자 원제는 승상 우정국과 어사대부 공우를 함께 질책하였다. 영광 원년(기원전 43년), 일식이 일어나자 재차 질책을 받은 우정국은 결국 승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2. 3. 승상 재임과 말년

감로 2년(기원전 52년) 정위를 18년간 역임한 우정국은 은퇴한 두연년을 대신하여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듬해인 감로 3년(기원전 51년)에는 사망한 황패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고, 서평(西平侯)에 봉해졌다.

선제가 사망하고 원제가 즉위하자, 우정국은 구관(舊臣)으로서 존경받았다. 전임 어사대부였던 진만년은 우정국과 충돌하는 일이 없었으나, 새로 임명된 공우는 종종 우정국에게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대부분 우정국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지만, 때마침 천재지변과 그로 인한 유민 발생이 대신들의 책임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원제는 승상 우정국과 어사대부 공우를 함께 질책하였다.

영광 원년(기원전 43년), 일식이 일어나자 이와 관련하여 재차 질책을 받은 우정국은 결국 승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승상에서 물러난 지 3년 후인 영광 4년(기원전 40년)에 사망하였고, 안후(安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우영이 후작위를 계승했으며, 우영 또한 훗날 어사대부의 지위에 올랐다.

3. 평가

우정국은 아버지 우공(于公)에게서 법률을 배웠으며[1], 공정한 일 처리로 능력을 인정받아 선제 때 크게 중용되었다. 그는 스승에게서 《춘추》를 익혀 유생을 귀하게 여겼다.

재판을 할 적에는 사회적 약자를 동정하고 신중한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죄목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결하여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당시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아, "장석지가 정위가 되니 천하에 누명을 쓰는 이가 없어졌고, 우정국이 정위가 되니 누명을 쓸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정위 직책을 18년 동안 맡았다.

승상이 된 후에는 원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새로 어사대부가 된 공우와는 정책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다. 영광 원년(기원전 43년)에 일식이 일어나자, 천재지변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승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후에는 안(安)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4. 가족 관계

아버지는 우공(于公)이며, 아들은 우영(于永)이다.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우공(于公)현의 옥리(獄吏). 공정한 판결로 명성이 높아 생전에 사당이 세워짐.[1] 우정국에게 법률을 가르침.
아들우영(于永)아버지 우정국의 서평후 작위를 계승함. 벼슬이 어사대부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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