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세 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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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모세 화약은 1893년 일본 해군이 채용한 피크린산을 기반으로 한 폭약으로, 시모세 마사치카가 개발했다. 1771년 독일에서 발명된 피크린산은 금속과의 반응성 및 폭발 위험성 때문에 실용화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시모세는 탄체 내벽에 옻칠과 왁스를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청일 전쟁에서는 대량 생산 부족으로 실전 투입이 늦어졌지만, 러일 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 폭약으로 사용되어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TNT로 대체되었으나, 태평양 전쟁 중 석유 부족으로 인해 다시 사용되었다. 시모세 화약은 자폭 사고, 독성, 불안정성 등의 단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포탄 내부에 충전하는 폭약이며, 추진 화약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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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르산은 쓴맛을 내는 노란색 결정으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며 충격과 마찰에 민감하여 안전에 유의해야 하는 페놀류의 일종이다.
시모세 화약 | |
---|---|
개요 | |
종류 | 폭약 |
발명가 | 시모세 마사치카 |
개발 시기 | 메이지 시대 |
주요 성분 | 피크르산 |
특징 | |
특징 | 습기에 약함 금속을 부식시키는 성질 폭발력 강함 |
역사 | |
개발 배경 | 러일 전쟁 당시 일본 해군 포탄의 위력 부족 문제 해결 |
개발 과정 | 시모세 마사치카가 개발 피크르산을 주성분으로 사용 포탄 내부에 옻칠을 하여 폭발력 강화 및 부식 방지 |
실전 사용 | 러일 전쟁에서 일본 해군 포탄에 사용되어 큰 효과를 거둠 |
2. 역사
피크린산(''Picric acid'')은 1771년 독일에서 처음 발견된 염료였으나, 100여 년 뒤 폭발물로서의 가능성이 확인되었다.[28] 그러나 금속과 쉽게 반응하는 성질 때문에 실용화에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 해군의 시모세 마사치카는 포탄 내벽에 옻칠을 하고 왁스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여 1888년 순수 피크린산을 작약으로 사용하는 데 성공했다.[11] 일본 해군은 1893년 이 화약을 '시모세 화약'으로 명명하고 정식으로 채용했다.
1899년 대량 생산 체제가 갖추어지면서[11], 시모세 화약은 러일 전쟁(1904년-1905년)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 폭약으로 사용되었다. 청일 전쟁(1894년-1895년) 당시에는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다.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 해군이 사용하던 면 화약 등 기존 화약보다 폭발력이 훨씬 강했으며,[8] 폭발 시 3000°C에 달하는 고열을 발생시켰다.[9][10] 일본 해군은 포탄에 시모세 화약을 다량 충전하고([12]), 이주인 고로가 개발한 민감한 신관(이주인 신관)과 함께 사용하여 적함의 비장갑 부위와 승무원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특히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요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3] 당시 러시아 해군 장교는 시모세 화약의 위력을 "포탄이 아니라 어뢰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이며 "철판마저 연소시킨다"고 묘사하기도 했다.[11]
시모세 화약 개발 이후 대량 생산 기술 확보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1898년 시모세는 유럽 시찰 중 독일 기술자로부터 피크린산 제조 기술을 도입하는 계약을 맺었으나, 약속된 대금 5만엔가 지급되지 않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16]
이후 시모세 화약은 충격에 민감한 단점 등으로 인해 점차 TNT 등 다른 화약으로 대체되었으나, 태평양 전쟁 시기 석유 부족 상황에서 석탄을 원료로 생산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구식 수류탄 등에 제한적으로 다시 사용되기도 했다.
2. 1. 개발 배경
피크린산(''Picric acid'')은 1771년 독일의 피터 불프(Peter Woulfe)가 처음 발견한 염료였으나[28], 발견 100여 년 뒤 폭발물로서의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이는 강력한 폭발력을 지녔지만, 금속과 쉽게 반응하여 불안정한 화합물을 형성하는 성질 때문에 실용화에 어려움이 있었다.1885년 프랑스의 외젠 튀르팽이 발명한 멜리나이트는 피크린산을 이용한 작약이었는데, 일본 해군의 시모세 마사치카는 이 멜리나이트 샘플을 분석하여 순수한 피크린산을 작약으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다[6]. 그는 피크린산의 강한 산성이 포탄의 철과 반응하여 폭발할 위험이 있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탄 내벽에 옻칠을 하고 왁스를 주입하여 피크린산과 금속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는 방법을 고안했다[14]. 이를 통해 시모세는 1888년 순수 피크린산을 포탄 작약으로 사용하는 데 성공했다[11]. 일본 해군은 1893년 이 화약을 '시모세 화약'으로 명명하고 정식 채용했다.
시모세 화약이 실용화된 후, 프랑스가 일본에 '신형 화약' 판매를 제안한 일이 있었다[15]. 당시 프랑스에 파견되었던 해군 장교 도미오카 사다야스는 제시된 샘플 소량을 몰래 채취해왔고, 분석 결과 시모세 화약과 동일한 피크린산임이 밝혀졌다[15][29].
2. 2. 시모세 마사치카의 개발
피크린산(Picric acid)은 1771년 독일에서 발견된 염료였으나, 폭발 가능성이 뒤늦게 알려졌다.[28] 강력한 폭발력을 지녔지만, 금속과 쉽게 반응하여 불안정한 화합물을 만드는 문제 때문에 폭약으로 실용화하기 어려웠다.시모세 마사치카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프랑스의 '멜리나이트'(1885년, 프랑스의 유젠느 투르팡이 발명) 샘플을 분석하여 순수 피크린산을 작약으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얻었고,[6] 연구 끝에 1888년 순수 피크린산을 포탄 등에 주입하여 작약으로 사용하는 데 성공했다.[11] 금속과의 반응으로 인한 폭발 위험은 포탄 내벽에 옻칠을 하고,[14] 내벽과 피크린산 사이에 왁스를 주입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개발된 시모세 화약은 거의 순수한 피크린산으로 구성되었다.
시모세 화약이 실용화된 후, 프랑스가 '신형 화약'이라는 이름으로 자국의 피크린산 기반 화약을 일본에 판매하려 했다.[15] 당시 프랑스에 파견되었던 해군 장교 도미오카 사다야스는 프랑스 측이 제시한 '신형 화약' 샘플 소량을 자신의 손톱에 묻혀 몰래 일본으로 가져왔다.[15] 이 샘플을 분석한 결과, 시모세 화약과 동일한 피크린산으로 밝혀졌다.[15][29]
2. 3. 대량 생산과 러일 전쟁
1899년 (메이지 32년) '''해군 시모세 화약 제조소'''[17][18]가 설립되면서 시모세 화약의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다.[11] 이로써 청일 전쟁(1894년–1895년) 때는 대량 생산이 늦어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던 시모세 화약은 러일 전쟁(1904년〈메이지 37년〉 – 1905년〈메이지 38년〉)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 폭약으로 사용되어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11][18] 비록 시모세 화약 제조소는 소규모였고 전쟁 중 확충되지 않았지만, 필요량은 생산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9]러일 전쟁 당시 다른 나라 해군들은 주로 흑색 화약이나 면 화약(니트로셀룰로스)을 작약으로 사용했으며, 러시아 제국 해군 역시 면 화약을 사용했다.[7] 반면 시모세 화약은 이들보다 폭발력이 훨씬 강했고,[8] 폭발 시 3000°C의 고열을 발생시켰다.[9][10] 일본 해군은 포탄에 시모세 화약을 14%나 채운 반면, 러시아 해군은 면 화약을 2.5%만 채웠다.[12] 또한 일본 해군은 위력이 큰 시모세 화약을 이주인 고로가 개발한 예민한 신관(이주인 신관)과 함께 사용하여 유탄으로서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 포탄은 적함의 장갑을 관통하는 능력은 부족했지만, 비장갑 부위나 승무원에게는 파괴력이 높고 연소성이 탁월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세계 최대의 폭발력을 가진 작약이었던 시모세 화약은 일본 제국 해군의 비밀 병기로 여겨졌다.[11]
1905년 5월 27일 벌어진 쓰시마 해전(동해 해전)에서 일본 연합 함대가 러시아 발트 함대를 격파하는 데 시모세 화약의 강력한 소이력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13]
황해 해전(1904년 8월 10일)과 동해 해전에 모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 해군의 블라디미르 세묘노프 중좌는 동해 해전에서 겪은 시모세 화약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1]
> "나는 6개월 동안 뤼순 함대에 있었으므로, 박격포도 시모세 화약도 대개 한 번은 경험했지만, 이것은 완전히 신발명품이다. 함 측에 맞고, 갑판에 떨어지는 것은 포탄이 아니고, 어뢰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이다. 이 위력 있는 포탄은 무엇인가에 잠시 닿으면 곧 폭발한다. 함 측의 철판이나 상갑판 위에 돌출해 있는 것은 분말 미진이 되어 사람을 다치게 하고 쇠 사다리는 만곡되어 고착되어 있는 대포는 뿌리부터 굽는다. 이와 같은 작용은 결코 탄환의 타격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그 폭발력에 근거한다."[11]
> "일본 포탄의 폭발력은 철판마저 연소시킨다. 물론 쇠가 타는 이유는 없지만, 일단 탄환이 명중하면 철판은 진홍색이 된다. 연소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도, 물에 흠뻑 젖은 것이라도, 적탄이 맞으면 곧 불꽃처럼 연소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확실히 7월 28일 (황해 해전)과는 다르다. 시모세 화약은, 폭발할 때, 짙은 검은 녹갈색 연기를 낸다."[11]
2. 4. 기술 도입과 논란
시모세 마사치카가 시모세 화약(순수 피크린산)의 시제품 제작에 성공했지만, 당시 일본의 기술 수준으로는 수공업적 생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대량 생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6]이에 1898년 1월부터 1년간 시모세는 피크린산 제조 기술 도입을 위해 유럽과 미국을 시찰했다.[16] 이 과정에서 독일 그리샴(Griesheim) 사의 전 기술 부장이었던 바니케(Warnicke)를 만나, 5만엔의 대가로 피크린산 합성 공장 설계도 20여 장과 제조 기술을 제공받는 계약을 체결했다.[16] 그러나 약속된 대가 5만엔는 지급되지 않았고, 이에 바니케는 1906년 4월 계약 이행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시모세는 이 서한을 당시 해군대신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에게 전달하며 상신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묵살되었다.[16]
2. 5. 대체와 재사용
피크린산을 주성분으로 하는 시모세 화약은 충격에 민감하다는 단점이 있었다.[20] 이러한 불안정성 때문에 여러 나라와 일본 육군에서는 트리니트로톨루엔(TNT)으로 화약을 전환했지만, 일본 해군은 이러한 전환이 늦어졌다.[20] 해군은 TNT의 원료인 톨루엔 생산량 문제와 육군이 이미 TNT를 채택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22], 시모세 화약을 대체하기 위해 트리니트로아니솔(TNA)계 화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22] 또한 해군은 피크린산 생산 방법 개발에서도 기존의 페놀을 이용한 석탄산법 대신 디니트로법 개발에서 육군보다 뒤처졌다.[21]새로운 폭약이 개발되는 중에도 항공 폭탄에는 여전히 시모세 화약이 사용되었다.[23] 시모세 화약 생산은 민간 기업인 유라 염료와 미쓰이 광산 미이케 염료 공업소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점차 이들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24]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항공 폭탄 수요가 급증하면서 시모세 화약 생산 규모를 늘리려 했으나, 이후 전황 변화로 수요는 다시 감소했다.[25] 결정적으로 1938년 6월 난창에서 피크린산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피격된 아군기의 폭탄이 다른 아군기의 유폭을 유발하는 문제가 발생했다.[26] 이 사건 이후 항공 폭탄에 사용되는 작약은 시모세 화약에서 TNA와 헥사니트로디페닐아민(HNDA)을 혼합한 H 폭약으로 변경되었다.[26]
이후 시모세 화약은 구식화되어 점차 사용이 줄었지만, 태평양 전쟁 시기에 다시 사용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석유 부족 상황에서, 석탄에서 추출한 페놀을 원료로 하여 생산할 수 있는 시모세 화약은 톨루엔(석유 원료)이 필요한 TNT와 달리 생산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다만, 충격에 약한 특성 때문에 포탄과 같이 강한 충격을 받는 용도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고, 주로 구식 수류탄 등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3. 특징
시모세 화약은 시모세 마사치카가 피크린산을 기반으로 개발하여 1893년 일본 해군에 공식 채택된 고성능 폭약이다. 당시 주력으로 사용되던 흑색 화약이나 면 화약과 비교했을 때 월등히 높은 폭발력과 연소 시 발생하는 고열이 주요 특징이었다.[8][9][10]
피크린산 자체는 금속과 접촉 시 불안정한 화합물을 형성하여 폭발 위험이 높아 실용화에 어려움이 있었으나[9], 시모세는 포탄 내벽에 옻칠을 하고 왁스를 주입하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여 안정성을 확보했다.
이러한 강력한 성능 덕분에 시모세 화약은 러일 전쟁(1904-1905) 당시 일본 해군의 핵심적인 전력 요소로 활용되었다. 특히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를 상대로 큰 효과를 발휘하며 일본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1][13] 비록 장갑 관통 능력은 부족했지만, 높은 파괴력과 강한 소이 효과로 적함의 비장갑 구역과 승무원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3. 1. 구성
시모세 화약의 주성분은 피크린산(''Picric acid'')이다.[6] 1931년 2월 시점의 일본 해군 영수 규격에 따르면, 시모세 화약은 거의 순수한 피크린산으로 정의되었다.[6] 피크린산은 본래 1771년 독일의 피터 불프(Peter Woulfe)가 처음 만든 염료였지만[28], 약 100년 후 강력한 폭발성이 발견되었다.피크린산은 폭발력이 강한 반면, 금속과 접촉하면 불안정한 화합물인 피크린산염을 형성하여 폭발하는[9] 민감한 특성 때문에 실용화에 어려움이 있었다. 시모세 마사치카는 포탄 내벽에 옻칠을 하고 피크린산과 내벽 사이에 왁스를 채워 넣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시모세 화약의 폭발 속도는 7,800m/s에 달했으며, 폭발 시 3000°C의 고열을 발생시키는 특징이 있었다.[9][10] 이는 당시 다른 해군에서 주로 사용하던 흑색 화약이나 면 화약(니트로셀룰로스)보다 강력한 폭발력을 지녔다.[7][8]
3. 2. 폭발력 및 성능
시모세 화약은 거의 순수한 피크린산으로 만들어졌다.[6] 폭발 속도는 7,800m/s에 달했으며, 폭발 시 3000°C의 고열을 발생시켰다.[9][10] 이는 당시 다른 나라 해군이 주로 사용하던 흑색 화약이나 면 화약보다 폭발력과 소이력이 월등히 뛰어났다.[8] 러시아 제국 해군은 면 화약을 사용했다.[7]러일 전쟁(1904년-1905년)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폭발력을 가진 작약으로 평가받았다.[11] 대일본제국 해군은 포탄에 시모세 화약을 14% 충전한 반면, 러시아 제국 해군은 면 화약을 2.5%만 충전했다.[12] 시모세 화약은 철과 접촉하면 폭발하기 쉬운 피크린산염을 생성하는 특성이 있었다.[9]
이러한 강력한 성능은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연합 함대가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하는 데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13] 시모세 화약은 적함의 장갑 관통 능력은 부족했지만, 파괴력과 연소성이 뛰어나 함선의 비장갑 부분과 승무원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황해 해전과 쓰시마 해전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 해군의 블라디미르 세묘노프 중좌는 시모세 화약의 위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11]
:나는 6개월 동안 뤼순 함대에 있었으므로, 박격포도 시모세 화약도 대개 한 번은 경험했지만, 이것은 완전히 신발명품이다. 함 측에 맞고, 갑판에 떨어지는 것은 포탄이 아니고, 어뢰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이다. 이 위력 있는 포탄은 무엇인가에 잠시 닿으면 곧 폭발한다. 함 측의 철판이나 상갑판 위에 돌출해 있는 것은 분말 미진이 되어 사람을 다치게 하고 쇠 사다리는 만곡되어 고착되어 있는 대포는 뿌리부터 굽는다. 이와 같은 작용은 결코 탄환의 타격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그 폭발력에 근거한다.[11]
:일본 포탄의 폭발력은 철판마저 연소시킨다. 물론 쇠가 타는 이유는 없지만, 일단 탄환이 명중하면 철판은 진홍색이 된다. 연소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도, 물에 흠뻑 젖은 것이라도, 적탄이 맞으면 곧 불꽃처럼 연소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확실히 7월 28일 (황해 해전)과는 다르다. 시모세 화약은, 폭발할 때, 짙은 검은 녹갈색 연기를 낸다.[11]
3. 3. 옻칠과 왁스
피크린산은 금속과 쉽게 화학 반응을 일으켜 불안정한 화합물로 변하는 성질 때문에 폭발물로 실용화하기 어려웠다. 시모세 마사치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탄의 안쪽 벽(탄체 내벽)에 옻칠을 하고, 옻칠된 벽과 피크린산 사이에 왁스를 채워 넣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 방법은 피크린산이 포탄의 금속 부분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아, 시모세 화약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 단점
시모세 화약은 주원료인 피크린산의 특성상 몇 가지 단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피크린산은 금속과 쉽게 반응하여 충격에 민감한 불안정한 염을 만드는 성질이 있었다.[28] 이 때문에 포탄 내벽에 옻칠을 하거나 왁스를 주입하는 등의 조치가 완벽하지 않으면 포탄 본체와 반응하여 자폭할 위험성이 커졌다. 시모세 화약은 노후화되면 충격에 더욱 민감해지는 경향이 있어 불발탄 처리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또한, 시모세 화약을 사용한 함포에서 포탄이 포신 내에서 폭발하는 강발(腔發) 사고가 자주 발생했는데, 이는 피크린산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포탄 제조 및 화약 충전 기술의 미숙함 때문으로 추정된다. 큰 포탄에 녹인 화약을 충전할 때 기포를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워 핫스팟이 생기기 쉬웠고, 이것이 발사 충격으로 인해 자폭의 원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피크린산 자체의 높은 독성[30][27] 역시 문제점이었다. 이러한 여러 단점 때문에 시모세 화약은 이후 트리니트로톨루엔(TNT) 등 더 안정적인 폭약으로 대체되었으며, 서양에서는 릿다이트나 D폭약과 같이 피크린산의 단점을 보완한 폭약을 개발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4. 1. 불안정성
피크린산은 금속과 화학적으로 쉽게 반응하여 불안정한 화합물을 만드는 성질이 있었다.[28] 이 때문에 포탄이나 어뢰 등에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시모세 마사치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탄 내벽에 옻칠을 하고 왁스를 채워넣어 피크린산이 금속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하지만 시모세 화약을 채용한 함포에서는 강발(腔發)(포신 내 자폭) 사고가 잇따랐다. 이는 피크린산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는 당시 일본의 포탄 제조 및 화약 충전 기술이 미숙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 기술로는 큰 포탄에 녹인 화약을 부어 채울 때 내부에 생기는 기포를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웠고, 이로 인해 핫스팟이 형성되기 쉬웠다. 포탄 발사 시의 충격이 이 핫스팟에 가해지면서 저속 폭굉이 발생하여 포탄이 자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포탄 내부의 옻칠이나 왁스에 아주 미세한 틈이라도 생길 경우, 피크린산이 포탄의 철과 같은 중금속과 반응하여 충격에 매우 민감한 염을 생성할 수 있었다. 이 불안정한 염이 생성되면 작은 충격에도 포탄이 폭발할 위험성이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시모세 화약은 시간이 지나 노후화되면 충격에 더욱 민감해지는 경향이 있어, 불발탄을 다룰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피크린산 자체의 높은 독성[27][30]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여러 단점과 불안정성 때문에 시모세 화약은 점차 트리니트로톨루엔(TNT)이나 트리메틸렌트리니트로아민과 같은 더 안정적이고 성능이 우수한 폭약으로 대체되었다. 한편 서양 국가에서는 피크린산의 불안정성을 개선하기 위해 암모늄 등 알칼리와 혼합하여 염 형태로 만든 릿다이트, 에크라지트, D폭약 등을 개발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4. 2. 자폭 사고
시모세 화약을 사용한 함포에서는 포탄이 포신 내부에서 폭발하는 자폭 사고(강발(腔發))가 잇따랐다. 이는 피크린산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는 포탄에 화약을 충전하는 기술의 미숙함 때문으로 추측된다. 당시 기술로는 큰 포탄에 녹인 피크린산을 충전할 경우 기포를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포탄 내부에 핫스팟이 생기기 쉬웠고, 포탄 발사 시의 충격으로 인해 저속 폭굉이 발생하여 자폭한 것으로 생각된다.또한, 피크린산은 철과 같은 중금속과 반응하여 충격에 매우 민감한 염을 만드는 성질이 있다. 따라서 포탄 내부의 옻칠이나 왁스 처리에 아주 미세한 틈이라도 생겨 피크린산이 포탄 본체와 직접 접촉하게 되면 자폭의 위험성이 급증했다. 시모세 화약은 노후화되면 충격에 과민해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불발탄의 취급에 세심한 주의를 요했다.
4. 3. 독성
시모세 화약의 주성분인 피크린산은 독성이 높은 물질이었다.[30][27]4. 4. 대안
서양 국가에서는 피크린산의 불안정성과 독성[27] 등의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피크린산을 암모늄 등 알칼리와 혼합하여 염 형태로 만든 릿다이트(Lyddite), 에크라지트(Ecrasite), D폭약 등을 개발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시모세 화약은 점차 트리니트로톨루엔(TNT)이나 트리메틸렌트리니트로아민(RDX)과 같은 고리형 니트로아민계 고성능 폭약으로 대체되었다.5. 오해
시모세 화약은 '''포탄에 충전하는 폭약'''이며, 포탄을 발사하는 추진 화약이 아니다. 만약 시모세 화약처럼 폭발 속도가 빠른 화약을 추진 화약으로 사용하면 포가 파열될 위험이 있으므로, 추진 화약으로는 폭발 속도가 느린 것을 사용해야 한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 해군은 영국에서 수입한 코르다이트를 추진 화약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발사 시 연기가 적었다. 반면, 러시아 해군은 흑색 화약을 추진 화약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발사 시 연기가 많이 발생했다.
간혹 "시모세 화약은 연소 시 흑연을 발생시키지 않아 일본 해군은 시야를 가리지 않고 연사가 가능했지만, 러시아 해군은 발사에 흑색 화약을 사용하여 시야를 가려 연사가 불가능했다"는 설명이 보이지만, 이는 몇 가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앞서 설명했듯이 시모세 화약은 추진 화약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시모세 화약의 주성분인 피크린산은 천천히 가열하면 흑연을 내면서 완만하게 연소하므로, 흑연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설명도 사실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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