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테 (장갑순양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와테는 일본 제국 해군이 러일 전쟁에 대비하여 건조한 장갑순양함이다. 1898년 영국에서 기공되어 1901년에 완공되었으며,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러일 전쟁 당시 제2함대 제2전대에 소속되어 울산 해전과 쓰시마 해전에 참여했으며, 특히 울산 해전에서 류리크의 생존자를 구조한 사건은 국내외에서 칭찬을 받았다. 1921년 해방함으로 변경되었다가 1942년 1등 순양함으로 복귀했으며, 1945년 구레 군항 공습으로 침몰했다. 전후 인양되어 해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순양함 - 나카 (경순양함)
나카는 다이쇼 시대에 건조된 센다이급 경순양함 2번함으로, 간토 대지진으로 재건조 후 태평양 전쟁 초기에 필리핀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침공 작전에 참여했으나 1944년 트럭 섬 공습으로 침몰했다.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순양함 - 이즈모 (장갑순양함)
이즈모는 1890년대 일본 해군 계획에 따라 영국에서 건조되어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중일 전쟁 등에 참전한 장갑 순양함으로, 1945년 구레 군항 공습으로 침몰하여 퇴역했다. - 1900년 선박 - 미카사 (전함)
미카사는 러일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 제국 해군의 전함으로,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 함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으며 현재 요코스카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있는 세계 유일의 현존하는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다. - 1900년 선박 - 러시아 전함 타우리스 공작 포툠킨
러시아 전함 타우리스 공작 포툠킨은 1897년 건조를 시작해 1905년 완공된 러시아 제국 해군 소속 전함으로, 당시 가장 강력한 함선으로 평가받았으며 1905년 선원 반란, 함명 변경,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등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 제1차 세계 대전의 해군 함정 - 다카치호 (방호순양함)
다카치호는 일본 제국 해군의 방호순양함으로, 자매함 나니와와 함께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순양함으로 평가받았으며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나 칭다오 공략전 후 독일 해군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여 일본 해군 군함 중 최초로 교전 중 격침된 함선이 되었다. - 제1차 세계 대전의 해군 함정 - 가스가 (장갑순양함)
일본 제국 해군의 장갑순양함 가스가는 아르헨티나 해군이 발주한 주세페 가리발디급 장갑순양함이었으나 러일 전쟁 직전 일본이 구매하여 취역,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시베리아 간섭 등 다양한 작전에 참여 후 1942년 무장 해제, 부유 막사로 사용되다 1945년 요코스카 공습으로 침몰했다.
이와테 (장갑순양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 |
---|---|
함선 정보 | |
![]() | |
함명 | 이와테 (磐手) |
함명 유래 | 이와테 산 |
건조 | 암스트롱 휘트워스, 영국 |
발주 | 1898년 7월 19일 |
기공 | 1898년 11월 11일 |
진수 | 1900년 3월 29일 |
완공 | 1901년 3월 18일 |
취역 | 미상 |
퇴역 | 미상 |
제적 | 1945년 11월 30일 |
재분류 | 1921년 9월 1일: 1등 해방함 1942년 7월 1일: 1등 중순양함 1943년: 훈련함 |
최후 | 1945년 7월 25일: 공습으로 침몰 1946~1947년: 인양 후 해체 |
제원 | |
함급 | 이즈모급 순양함 장갑순양함 |
배수량 | 9,423톤 |
전체 길이 | 132.28m |
폭 | 20.94m |
흘수선 | 7.21m |
추진 | 2축 |
엔진 | 2 x 3단 팽창 증기 엔진 |
동력 | 24 x 벨빌 보일러 14,500마력 |
속도 | 20.75노트 |
항속 거리 | 10노트에서 7,000해리 |
승무원 | 672명 |
무장 | |
주포 | 2 x 20.3cm/45 41식 해군포 |
부포 | 14 x QF 6인치 포 |
대공포 | 12 x QF 12파운더 12 cwt 해군포 |
기타 화포 | 8 x QF 3파운더 호치키스 야마우치 포 |
어뢰 | 4 x 18인치 어뢰 발사관 |
장갑 | |
수선대 | 89-178mm |
갑판 | 63mm |
포탑 | 160mm |
버베트 | 152mm |
케이스메이트 | 51-152mm |
조타실 | 356mm |
격벽 | 127mm |
2. 배경 및 설계
청일 전쟁 이후 1896년에 수립된 일본 해군의 해군 확장 계획의 일환으로 건조된 장갑순양함이다. 당시 일본은 자체 건조 능력이 부족하여 영국의 조선소에 발주해야 했다. 러시아의 해군력 증강에 대응하여 기존 계획을 수정, 전함 대신 장갑순양함 수를 6척으로 늘린 "육육 함대" 계획에 따라 건조되었다.[1] 당시 일반적인 순양함들이 상업 약탈이나 식민지 방어에 중점을 둔 것과 달리, ''이와테''와 그 자매함들은 함대 정찰 및 주력 함대 간의 함대 결전에 투입될 목적으로 설계되었다.[2]
함선은 전체 길이 약 132.28m, 기준 배수량 약 약 9574210.88kg 규모로,[3] 2개의 왕복 증기 기관과 24기의 벨빌 보일러를 통해 총 14,500 마력(ihp)의 출력을 내도록 설계되었다.[5] 해상 시운전에서는 설계 속도(20.75노트)를 초과하는 22.3노트의 속도를 기록했다.[6] 최대 약 1575888.90kg의 석탄을 적재하여 10노트 속도로 7000nmi를 항해할 수 있었다.[4]
주요 무장으로는 포탑에 장착된 약 20.32cm 주포 4문과 약 15.24cm 속사포 14문으로 구성된 강력한 부포를 갖추었다. 이 외에도 어뢰정 대응을 위한 12파운더 속사포 12문과 2.5파운더 핫치키스 포 8문, 그리고 수중 어뢰 발사관 4문을 탑재했다.[7][8]
방어력 확보를 위해 크루프 피복 강철을 사용한 장갑 설계를 채택했다. 함선 중앙부의 수선 장갑대는 최대 178mm 두께였으며, 갑판 상부 장갑대, 바벳, 포탑, 포곽, 사령탑 등 주요 구획을 두꺼운 장갑으로 보호했다.[9][10]
2. 1. 건조 배경
청일 전쟁 이후 1896년에 수립된 일본 해군의 해군 확장 계획에는 전함 4척과 장갑순양함 4척의 건조가 포함되었다. 당시 일본은 자체적으로 이 함선들을 건조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영국의 조선소에 발주해야 했다. 이후 러시아 제국 해군의 증강 계획을 고려하여, 일본 해군은 기존 계획의 전함만으로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예산 제약으로 전함을 추가 건조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상대적으로 저렴한 장갑순양함의 수를 4척에서 6척으로 늘리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이 수정된 계획은 일반적으로 "육육 함대"로 알려져 있다.[1] 당시 다른 나라의 순양함들이 주로 상업 약탈이나 식민지 및 무역로 방어를 목적으로 설계된 것과 달리, ''이와테''와 그 자매함들은 함대 정찰 및 함대 결전에 투입될 목적으로 설계되었다.[2]함선의 전체 길이는 132.28m이고 수선 간 길이는 121.92m였다. 선폭은 20.94m이며, 평균 흘수는 7.21m였다. ''이와테''의 기준 배수량은 약 9574210.88kg이었고, 만재 배수량은 약 10399241.04kg였다. 함선의 메타센터 높이는 0.73m였다.[3] 승무원은 장교와 사병을 합쳐 672명으로 구성되었다.[4]
''이와테''는 2개의 4기통 왕복 증기 기관을 갖추었으며, 각 기관은 1개의 스크류축을 구동했다.[5] 기관에 증기를 공급하기 위해 24기의 벨빌 보일러가 사용되었고, 기관은 총 14500ihp의 출력을 냈다. 함선은 설계 속도 20.75kn으로, 해상 시운전에서 15739ihp의 출력으로 22.3kn의 속도를 기록했다. 최대 약 1575888.90kg의 석탄을 적재할 수 있었고,[6] 10kn의 속도로 7000nmi를 항해할 수 있었다.[4]
"육육 함대" 장갑 순양함의 주포는 약 20.32cm 포 4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포탑에 쌍으로 장착되어 함교의 전후에 위치했다. 부포는 Elswick Ordnance Company "Pattern Z" 속사포, 약 15.24cm 포 14문으로 구성되었다. 이 포들 중 4문만 주갑판 및 상갑판의 장갑 포곽에 장착되지 않았으며, 상갑판에 장착된 포좌는 포방패로 보호되었다. ''이와테''에는 또한 12문의 12 파운더 (약 7.62cm) 12-cwt 포[7]와 근접 방어용 어뢰정에 대한 8문의 2.5 파운더 (약 3.81cm) 핫치키스 포가 장착되었다. 함선에는 4문의 수중 약 45.72cm 어뢰 발사관이 장착되었으며, 각각의 현측에 2문씩 위치했다.[8]
"육육 함대" 장갑 순양함은 모두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고 동일한 장갑 설계를 사용했다. 수선에 위치한 크루프 피복 강철로 제작된 수선 장갑대는 함선의 전체 길이에 걸쳐 있었으며, 중앙부의 두께는 178mm에서 선수 및 선미의 89mm까지 다양했다. 높이는 2.13m였으며, 이 중 1.33m는 일반적으로 수면 아래에 있었다. 갑판 상부의 장갑대는 두께가 127mm였고, 수선 장갑대의 상단에서 주갑판까지 뻗어 있었다. 전방에서 후방 바벳까지 53.31m 뻗어 있었다. ''이즈모''급은 중앙 장갑 요새의 양 끝을 막는 127mm 경사 장갑 격벽을 가지고 있었다.[9]
바벳, 포탑, 포곽의 전면은 모두 두께가 약 15.24cm였고, 포곽의 측면과 후면은 51mm 두께의 장갑으로 보호되었다. 갑판은 두께가 63mm였고, 사령탑을 보호하는 장갑은 두께가 356mm였다.[10]
2. 2. 설계 특징
1896년 청일 전쟁 이후 일본 제국 해군이 수립한 해군 확장 계획에는 전함 4척과 함께 장갑순양함 4척의 건조가 포함되었다. 당시 일본은 자체적으로 이러한 함선들을 건조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영국의 조선소에 발주해야 했다. 이후 러시아 제국 해군의 증강 계획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 해군은 기존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예산 제약으로 전함을 추가 건조하는 대신, 상대적으로 저렴한 장갑순양함의 수를 4척에서 6척으로 늘리는 수정안을 채택했는데, 이것이 바로 "육육함대" 계획이다.[1] 이와테와 그 자매함들은 당시 일반적인 장갑순양함처럼 통상 파괴나 식민지 및 무역로 보호 임무보다는, 함대 정찰 및 주력 함대 간의 함대 결전에 투입될 목적으로 설계되었다.[2]구분 | 내용 |
---|---|
전체 길이 | 132.28m |
수선 간 길이 | 121.92m |
선폭 | 20.94m |
평균 흘수 | 7.21m |
기준 배수량 | 9,423t |
만재 배수량 | 10,235t |
메타센터 높이 | 0.73m (선박의 복원력과 관련된 지표) |
승무원 | 672명 (장교 및 사병)[4] |
이와테는 2개의 4기통 왕복 증기 기관을 탑재했으며, 각 기관은 1개의 스크류축을 구동했다.[5] 24기의 벨빌 보일러가 증기를 공급하여 총 14,500ihp의 출력을 냈다. 설계 속도는 20.75노트(kn)였으며, 해상 시운전에서는 15,739ihp의 출력으로 22.3노트(kn)의 속도를 기록했다. 최대 1,551t의 석탄을 적재할 수 있었고,[6] 10노트(kn)의 속도로 7,000해리(nmi)를 항해할 수 있었다.[4]
구분 | 종류 | 수량 | 비고 |
---|---|---|---|
주포 | {{cvt | 4문 | 함교 전후 쌍열 포탑 2기 |
부포 | Elswick Ordnance Company "Pattern Z" {{cvt | 14문 | 10문은 장갑 포곽, 4문은 포방패 보호 |
대 어뢰정포 | 12파운더 ({{cvt[7] | 12문 | |
근접 방어 | QF 2.5파운더 ({{cvt | 8문 | |
어뢰 발사관 | 수중 약 45.72cm 발사관 | 4문 | 각 현측 2문[8] |
"육육함대" 장갑순양함들은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동일한 장갑 설계를 채택했다. 수선 부위의 수선 장갑대는 크루프 시멘트 강철로 제작되었으며 함선 전체 길이에 걸쳐 있었다. 중앙부 두께는 178mm였고 선수 및 선미로 갈수록 89mm로 얇아졌다. 장갑대의 높이는 2.13m였으며, 이 중 1.33m는 일반적으로 수면 아래에 위치했다. 갑판 상부의 장갑대는 두께 127mm로, 수선 장갑대 상단에서 주갑판까지 이어졌으며, 전방에서 후방 바벳까지 53.31m 길이로 뻗어 있었다. 이즈모급(이와테 포함)은 중앙 장갑 구역의 양 끝을 막는 127mm 두께의 경사 장갑 격벽을 가지고 있었다.[9]
바벳, 포탑, 포곽의 전면은 모두 약 15.24cm 두께였고, 포곽의 측면과 후면은 51mm 두께의 장갑으로 방호되었다. 갑판 장갑의 두께는 63mm였으며, 사령탑은 356mm 두께의 장갑으로 보호되었다.[10]
2. 3. 무장
"육육 함대" 장갑 순양함의 주포는 약 20.32cm 포 4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포탑에 쌍으로 장착되어 함교의 전후에 위치했다. 부포는 Elswick Ordnance Company "Pattern Z" 속사포, 약 15.24cm 포 14문으로 구성되었다. 이 포들 중 4문만 주갑판 및 상갑판의 장갑 포곽에 장착되지 않았으며, 상갑판에 장착된 포좌는 포방패로 보호되었다. ''이와테''에는 또한 12문의 12파운더 (약 7.62cm) 12-cwt 속사포[7]와 근접 방어용 어뢰정에 대한 8문의 QF 2.5파운더 (약 3.81cm) 핫치키스 포가 장착되었다. 함선에는 4문의 수중 약 45.72cm 어뢰 발사관이 장착되었으며, 각각의 현측에 2문씩 위치했다.[8]2. 4. 장갑
육육함대 장갑순양함은 모두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고 동일한 장갑 설계를 사용했다. 수선에 위치한 크루프 피복 강철로 제작된 수선 장갑대는 함선의 전체 길이에 걸쳐 있었으며, 중앙부의 두께는 178mm에서 선수 및 선미의 89mm까지 다양했다. 높이는 2.13m였으며, 이 중 1.33m는 일반적으로 수면 아래에 있었다. 갑판 상부의 장갑대는 두께가 127mm였고, 수선 장갑대의 상단에서 주갑판까지 뻗어 있었다. 전방에서 후방 바벳까지 53.31m 뻗어 있었다. ''이즈모''급은 중앙 장갑 요새의 양 끝을 막는 127mm 경사 장갑 격벽을 가지고 있었다.[9]바벳, 포탑, 포곽의 전면은 모두 두께가 약 15.24cm였고, 포곽의 측면과 후면은 51mm 두께의 장갑으로 보호되었다. 갑판은 두께가 63mm였고, 사령탑을 보호하는 장갑은 두께가 356mm였다.[10]
3. 함생애
1901년 3월 18일 영국 암스트롱 사에서 준공되었으며, 다음 날 일본으로 출발하여 같은 해 5월 17일 요코스카에 도착했다.[47]
러일 전쟁 당시에는 최신예 장갑순양함으로서 제2함대 제2전대에 소속되어 기함 이즈모의 후방을 담당하는 후미(殿) 함 임무를 맡았다. 이 위치는 적의 공격이 집중되기 쉬워 울산 해전과 쓰시마 해전 등 주요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울산 해전에서는 격침된 러시아 장갑순양함 류리크의 생존자를 구조하여 인도주의적인 행동으로 국내외에서 주목받았다.[48]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칭다오 전투에 잠시 참전했으며, 이후 남태평양 지역에서 활동했다.[34][35] 전쟁 중인 1916년부터는 주로 연습함대에 소속되어 많은 사관생도를 태우고 원양 항해 훈련을 실시하는 연습함 임무를 수행했다.[36] 1921년 9월 1일에는 1등 해방함으로 함종이 변경되었으나,[38] 1931년에 해방함 등급이 폐지되었다. 선체가 크고 거주성이 좋아 연습함 임무에 적합했으며, 이 역할은 1939년까지 이어졌다. 1942년 7월 1일에는 해방함 정의 재검토에 따라 다시 1등 순양함으로 분류되었다.[42]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연습함으로 운용되었으며, 대공 무장을 강화하는 개수를 거쳤다. 1945년 7월 24일 구레 군항 공습 당시 미군 항공기의 폭격을 받아 직격탄은 피했으나 근접 폭발의 충격으로 침수가 발생하여 다음 날인 7월 25일 항구 내 얕은 물에 착저, 침몰했다.[14] 전쟁 후 인양되어 해체되었다.[14]
3. 1. 건조 및 취역


이와테현의 이름을 딴 ''이와테''의 건조 계약은[11] 1898년 7월 19일 영국 암스트롱 휘트워스와 체결되었다. 이 배는 같은 해 11월 11일 엘스윅 조선소에서 기공되었고, 1900년 3월 29일 진수되었다. 진수식에서는 당시 런던 주재 일본 총영사의 부인인 아라카와 여사가 명명했다.[12]
''이와테''는 1901년 3월 18일 암스트롱 휘트워스 사에서 준공 및 인수되었다.[46] 다음 날인 3월 19일, 건조 과정을 감독하고 일본으로 배를 가져오는 임무를 맡았던 초대 함장 야마다 히코하치의 지휘 아래 일본으로 출발했다.[13][46] 같은 해 5월 17일 요코스카에 도착했으며,[47] 야마다 함장은 7월 6일 타케토미 쿠니카네에게 함장직을 인계했다.[14]
3. 2. 러일 전쟁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최신예 장갑순양함이었던 이와테는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지휘하는 제2함대 제2전대에 배속되었다.[15] 자매함 이즈모가 전대의 기함을 맡았고, 이와테는 전열의 가장 후미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후미(殿)' 함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위치는 적의 공격이 집중되기 쉬워 위험 부담이 컸다.이와테는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주요 해전에 참전했다. 1904년 2월 9일 포트 아서 해전을 시작으로,[16] 황해와 동해에서 러시아 함대를 견제하고 일본군 수송을 호위하는 등 다양한 작전에 투입되었다.[19][20]
특히 1904년 8월 14일 벌어진 울산 해전에서는 치열한 교전 끝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23][24] 전투 중 격침된 러시아 장갑순양함 류리크의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행동은 당시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48] 이후 일본에서는 구조 활동을 기리는 '우에무라 장군'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05년 5월 27일~28일의 쓰시마 해전에서는 시마무라 하야오 소장의 기함 역할을 수행하며[27] 러시아 발틱 함대를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도 이와테는 17발의 포탄에 피격되는 등[32] 격전을 치렀지만, 일본의 결정적인 승리에 기여했다. 전쟁 말기에는 사할린 침공 작전을 지원하기도 했다.[33]
러일 전쟁 기간 동안 이와테는 일본 해군의 주력함으로서 최전선에서 활약했으며, 여러 차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중요한 임무들을 수행했다.
3. 2. 1. 주요 참전
러일 전쟁이 시작될 무렵, 이와테는 미스 소타로 소장이 지휘하는 제2함대 제2전대에 소속되었다.[15] 자매함 이즈모가 기함을 맡았고, 이와테는 전대의 후미를 담당했다. 후미함은 적의 공격이 집중되기 쉬운 위치였다.=== 포트 아서 해전 ===
1904년 2월 9일, 이와테는 포트 아서 해전에 참전했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포트 아서 외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태평양 전대를 공격했다. 도고 제독은 야간 구축함 기습이 큰 성공을 거둘 것으로 예상했지만, 러시아 함대는 기습에서 빠르게 회복하여 방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일본 함대는 순찰 중이던 러시아 방호순양함 보야린에게 발각되어 러시아군에게 경고가 전달되었다. 도고 제독은 주력 함포로 해안 방어 시설을 공격하고, 부포로 러시아 함선과 교전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는 화력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의 8인치 및 6인치 함포는 러시아 함선에 큰 피해를 주지 못했고, 오히려 모든 화력을 집중한 러시아 함선에게 일본 함대가 피해를 입었다.[16] 양측 다수의 함선이 피격되었으며, 러시아군은 약 150명, 일본군은 약 90명의 사상자를 낸 후 도고 제독은 교전을 중단했다.[17] 이와테도 이 교전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18]
=== 황해 및 동해 작전 ===
1904년 3월 초,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지휘하는 증강된 제2전대는 블라디보스토크 근해에서 교란 작전을 펼치라는 임무를 받았다. 3월 6일, 일본 순양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방어 시설을 폭격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이후 제2전대는 근위사단을 한국으로 수송하는 선단을 호위한 뒤, 포트 아서 봉쇄 함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4월 중순, 가미무라 제독은 동해와 대한해협을 방어하며 카를 예센 소장이 지휘하는 블라디보스토크 독립 순양함 전대가 포트 아서의 태평양 전대와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4월 24일, 짙은 안개 속에서 두 함대는 아슬아슬하게 엇갈렸고, 일본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기뢰를 부설한 후 30일 원산으로 복귀했다.[19]
6월 15일, 제2전대는 폭우와 안개로 인해 오키노시마 섬 남쪽에서 히타치 마루 사건 당시 러시아 함대의 수송선 공격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러시아 함대는 6월 30일에 다시 출항했고, 가미무라 제독은 다음 날 오키노시마 근처에서 이들을 요격하려 했으나 어둠 속에서 교전이 이루어졌다. 예센의 함대는 7월 17일에 다시 출동하여 일본 동해안으로 향해 교란 작전을 펼치며 일본 함대를 동해와 황해에서 끌어내려 했다. 러시아 함선들은 7월 19일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여 일본으로 향하는 선박들을 나포하기 시작했다. 24일 러시아 함대가 도쿄 만에 접근하자 일본 제국 해군 군령부는 가미무라에게 예센 함대가 일본을 우회하여 포트 아서로 향할 것을 우려하여 규슈의 도이 미사키로 남하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기이 수도(26일), 도쿄 만(28일)으로 이동 명령이 내려졌으나, 30일에야 쓰시마 섬으로 복귀하라는 최종 명령을 받았다. 같은 날, 예센 함대가 이미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여 8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20]
=== 울산 해전 ===
울산 해전에서 이와테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전투 중 격침된 러시아 장갑순양함 류리크의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이 인도주의적 행동은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 일본에서는 이 구조 활동을 기리는 '우에무라 장군(上村将軍)'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수라바야 해전에서 적군 병사를 구조했던 구도 슌사쿠 역시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이 노래를 자장가처럼 들었다고 전해진다.[48]
'''우에무라 장군 (일부)''' 작사: 사사키 노부쓰나, 작곡: 사토 시게스케
: 울산 앞바다 구름 걷히고 승리 거둔 추격전 끝에
: 함대는 용감히 돌아오는데, 가라앉아 가는 류리크 호라
:
: 원한 깊은 적이지만 버려두면 죽을 목숨
: 영웅의 의로운 마음 어찌 차마 외면하랴
:
: "구조하라" 외치는 소리, 때맞춰 울리는 군악 소리와 함께
: 영원히 드높은 그대의 공훈, 향기로운 그대의 명예
=== 쓰시마 해전 ===

1905년 5월 27일, 발트해에서 출항한 러시아 제2, 제3 태평양 전대가 일본 근해에 접근했다. 이른 아침 일본 정찰 함선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시야 제한과 통신 불량으로 초기 보고는 불확실했다. 그럼에도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함대 출항 명령을 내렸고, 가미무라 히코노조 제독의 제2전대는 오전 11시 30분경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부제독이 지휘하는 러시아 함대를 발견했다. 약 8000m 거리까지 접근한 후 러시아 함대의 포격을 받자, 카미무라 제독은 도고 제독의 주력 전함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26] 이때 시마무라 하야오 소장의 기함이 된 이와테는[27] 제2전대의 마지막 함선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14시 10분, 도고 제독이 러시아 함대에 포격을 개시하자, 이와테를 포함한 제2전대 함선들은 러시아 전함 오슬랴비야를 집중 공격하여 14시 50분경 전열에서 이탈시켰고, 이 함선은 20분 후 침몰했다. 이와테는 14시 50분 이전에 전함 임페라토르 니콜라이 1세에도 포격을 가했다. 약 15시 06분, 러시아 방호순양함 젬추크가 어뢰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와테와 장갑순양함 카스가 및 닛신의 포격으로 격퇴되었다. 15시 35분경, 전함 크냐즈 수보로프가 약 2000m 거리의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자, 카미무라 제독의 함선들은 약 5분간 집중 포격을 가했다. 아즈마와 야쿠모는 어뢰를 발사했지만 명중시키지는 못했다.[28]
17시 30분 이후, 카미무라 제독은 일부 러시아 순양함을 추격했으나 큰 성과 없이 18시 03분경 추격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도고 제독과 재합류했다. 18시 30분경, 그의 함대는 러시아 전열 후미를 발견하고 8000~9000미터 거리에서 포격을 재개했다. 이 포격의 효과는 불분명했으며, 19시 30분까지 포격을 가한 후 어둠이 내리자 20시 08분에 도고 제독과 다시 합류했다.[29]
다음 날 아침, 생존한 러시아 함선들이 발견되었고, 일본 함대는 10시 30분경 러시아 함대가 효과적으로 반격할 수 없는 원거리에서 포격을 시작했다. 반격도, 거리 좁히기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러시아의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소장은 함대의 항복을 결정했다.[30]
한편, 네보가토프 함대에서 뒤처진 러시아 해방전함 아드미랄 우샤코프는 아침 일찍 방호순양함 지요다에게 발견되었으나, 일본 함대는 주력 함대 섬멸에 집중했다. 네보가토프 제독 항복 후인 14시 10분, 시마무라 제독이 아드미랄 우샤코프를 발견하고 이와테와 야쿠모를 이끌고 추격 허가를 받았다. 17시 00분, 러시아 함선에 따라잡아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아드미랄 우샤코프는 일본 순양함을 자신의 함포 사거리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속도가 빠른 이와테와 야쿠모는 거리를 유지하며 포격했고, 러시아 함선은 단 한 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약 30분간의 교전 끝에 아드미랄 우샤코프는 심하게 기울어져 함포 조준이 불가능해졌고, 함장의 명령에 따라 승무원들이 함선을 포기하고 자침용 폭약을 터뜨렸다. 함선은 3분 만에 침몰했고, 일본군은 12명의 장교와 327명의 승무원을 구조했다. 이 교전에서 이와테와 야쿠모는 8인치 포탄 89발과 6인치 포탄 278발을 발사했다.[31]
쓰시마 해전 전체에서 이와테는 총 17발의 포탄에 피격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함선 옆 수면에서 폭발했다. 피탄 구성은 12인치 2발, 8인치 3발, 6인치 2발, 120mm(4.7인치) 1발, 75mm(3인치) 5발, 그리고 식별 불가능한 포탄 4발이었다. 하부 갑판의 두 구획이 침수되었으나 전반적인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었다.[32]
=== 사할린 침공 지원 ===
1905년 7월 초, 일본 제국 해군이 사할린 섬 침공을 준비하는 동안, 이와테, 이즈모, 토키와로 구성된 카미무라 제독의 제2전대는 대한해협 방어 임무를 맡았다. 이후 한국 북동부 해안에서 이루어진 일본 육군의 상륙 작전을 호위했다. 8월 중순에는 러시아 국경에 더 가까운 청진에서의 상륙 작전을 지원했다.[33]
3. 2. 2. 울산 해전
러일 전쟁이 시작될 무렵, 이와테는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지휘하는 제2함대 제2전대에 소속되어 있었다.[15] 이와테는 1904년 2월 9일 여순항 해전에 참가했으며, 이후 3월 초에는 블라디보스토크 근해에서 교란 작전을 수행했다. 4월 중순부터는 대한해협을 방어하며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순양함 전대가 황해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합류하는 것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19]1904년 8월 10일, 포트아서의 러시아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황해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순양함 전대 사령관 카를 예센 소장은 이들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명령 수신이 늦어져 그의 장갑순양함 3척(로시야, 그로모보이, 류리크)은 8월 13일 저녁에야 출항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새벽, 예센 함대는 쓰시마 섬 북쪽 약 약 57.94km 해상에서 가미무라 중장이 이끄는 제2전대의 장갑순양함 4척(이즈모, 도키와, 아즈마, 이와테)과 마주쳤다.[21]

양측은 오전 5시경 서로를 발견하고, 약 5시 23분경 8500m 거리에서 교전을 시작했다. 일본 함대는 러시아 함대의 후미에 있던 류리크에 화력을 집중했다. 류리크는 빠르게 손상을 입고 대열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예센 함대는 거리를 벌리려 기동했으나, 떠오르는 태양 때문에 시야 확보와 포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약 6시경, 예센은 류리크를 구하기 위해 함대를 180도 선회했다. 가미무라 함대도 이를 따라 기동했으나, 아즈마의 엔진 문제로 속도가 느려졌다. 6시 24분 교전이 재개되었고, 류리크는 함미에 추가 피격을 당해 조타 능력을 상실하고 속도가 더욱 느려졌다.[22]
예센은 다시 함대를 선회시켜 류리크를 엄호하려 했으나, 류리크는 전열에서 이탈했다. 양 함대는 치열한 포격전을 이어갔다. 약 7시 45분경, 러시아 함선의 8인치 포탄이 이와테의 우현 전방 상부 6인치 포탑 지붕을 강타했다. 이 피격으로 포탑 내 즉응탄이 유폭되어 화재가 발생했으며, 해당 포탑과 주변 포들이 파괴되었다. 이 공격으로 이와테에서는 사망 40명, 부상 37명이 발생했다.[23][24]
예센은 8시 15분경 류리크에게 단독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남은 두 척의 순양함(로시야, 그로모보이)을 이끌고 최대 속도인 약 18노트로 북쪽으로 후퇴를 시도했다.[23] 이때 가미무라 함대에 구형 방호순양함 나니와와 다카치호가 합류했다. 가미무라는 장갑순양함 4척으로 예센 함대를 추격하고, 나니와와 다카치호에게 류리크를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일본 함대는 러시아 함선을 추격하며 포격을 가해 속도를 15kn까지 떨어뜨렸으나, 약 10시경, 탄약 부족을 우려한 가미무라는 추격을 중단하고 쓰시마 해협 방어를 위해 남하했다. 류리크는 결국 나니와와 다카치호에 의해 격침되었다.[23]
이 전투에서 이와테는 일본 함선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24] 전투 후, 일본 함대는 격침된 류리크의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이 행동은 당시 국제 사회에서 인도주의적인 조치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48], 일본 내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우에무라 장군'이라는 군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9월 중순, 이와테는 제1함대로 전속되었고, 12월 초에는 정비를 위해 본국으로 귀환했다.[25]
3. 2. 3. 쓰시마 해전
러일 전쟁 중 쓰시마 해전 발발 당시, '이와테'는 시마무라 하야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2함대 제2전대의 기함이었다.[27]
1905년 5월 27일, 발트해에서 출항한 러시아 제2, 제3 태평양 전대가 일본 근해에 접근하자, 아침 일찍 정찰 중이던 일본 함선에 의해 발견되었다. 시야가 제한적이고 무선 통신 수신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보고를 바탕으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함대 출항 명령을 내렸다. 제2전대는 오전 11시 30분경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부제독이 지휘하는 러시아 함대를 발견했다. 카미무라 히카노조 제독은 약 8000m 거리까지 접근했으나 러시아군의 포격을 받자 도고 제독의 전함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26] '이와테'는 제2전대의 마지막 순번으로 항해하고 있었다.[27]
14시 10분, 도고 제독이 러시아 함대에 포격을 개시하자 '이와테'를 포함한 제2전대 함선 대부분은 러시아 전함 오슬랴비야를 집중 공격했다. '오슬랴비야'는 14시 50분에 대열에서 이탈했고, 20분 후 침몰했다. '이와테'는 14시 50분 이전에 전함 임페라토르 니콜라이 1세에게도 포격을 가했다. 15시 06분경, 러시아 방호순양함 젬추크가 어뢰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와테'와 장갑순양함 카스가, 닛신의 포격에 의해 격퇴되었다. 15시 35분에는 약 2000m 거리의 안개 속에서 러시아 전함 크냐즈 수보로프가 갑자기 나타나자, 카미무라 제독의 모든 함선이 약 5분간 집중 포격을 가했다. 이때 장갑순양함 아즈마와 야쿠모가 어뢰를 발사했지만 명중시키지는 못했다.[28]
17시 30분 이후, 카미무라 제독은 일부 러시아 순양함을 추격했으나 큰 성과 없이 18시 03분에 추격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도고 제독과 다시 합류했다. 그의 함선은 18시 30분경 러시아 전열 후미를 발견하고 거리가 8000~9000미터로 좁혀지자 포격을 시작했다. 러시아 함선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들은 19시 30분까지 포격을 중단하고 어둠이 내리고 있던 20시 08분에 도고 제독과 재회했다.[29]
다음 날 아침 생존한 러시아 함선이 발견되었고, 일본 함선은 10시 30분경 포격을 시작했으며, 러시아 함선이 효과적으로 반격할 수 없는 사거리 밖에서 공격했다. 이에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소장은 반격도, 사거리 좁히기도 불가능했기에 함선의 항복을 결정했다.[30]
한편, 연안 방어함 아드미랄 우샤코프는 네보가토프 제독의 함선들보다 한참 뒤쳐져 있었고, 아침 일찍 방호순양함 지요다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일본은 고립된 한 척의 함선을 공격하기보다는 러시아 함대의 주력을 찾는 데 더 집중했다. '아드미랄 우샤코프'는 네보가토프 제독의 항복 후 14시 10분에 시마무라 제독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는 '이와테'와 '야쿠모'를 이끌고 추격하라는 허가를 받았다. 그들은 17시 00분에 러시아 함선을 따라잡아 항복을 요구했다. '아드미랄 우샤코프'는 일본 순양함을 자함의 사정권 내에 두기 위해 거리를 좁히려 했지만, 일본 순양함은 충분히 빨라 거리를 유지했고 러시아 함선은 단 한 발도 맞추지 못했다. 약 30분 후, '아드미랄 우샤코프'는 심하게 기울어져 함포가 충분히 높이 앙각될 수 없게 되자 함장은 승무원에게 함선 포기를 명령했고, 자침 폭탄이 폭발했다. 함선은 3분 만에 침몰했고, 일본군은 12명의 장교와 327명의 승무원을 구조했다. '야쿠모'와 '이와테'는 교전 중에 89발의 8인치 포탄과 278발의 6인치 포탄을 발사했다.[31] '이와테'는 전체 전투 과정에서 17번의 피탄을 받았으며, 이 중에는 함선 옆의 수면에서 폭발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하부 갑판의 두 구획이 침수된 것은 경미한 피해였다. 이 피탄은 12인치 포탄 2발, 8인치 포탄 3발, 6인치 포탄 2발, 120mm(4.7인치) 포탄 1발, 75mm(3인치) 포탄 5발, 그리고 신원 불명의 포탄 4발이었다.[32]
3. 3.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와테는 칭다오 전투 초기에 참전하여 독일 제국에 맞서 싸웠다. 전투 후 같은 해 10월 2일 사세보로 귀환했다.[34] 다음 달, 이와테는 피지와 마르케사스 제도 등 남태평양 지역을 담당하는 제1 남양 함대에 배속되어 활동했다.[35]1915년 9월 1일부터는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의 장거리 항해 및 장교 훈련을 위한 연습함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16년 4월 20일, 장갑순양함 아즈마와 함께 16번의 훈련 항해 중 첫 번째 항해를 시작하여 오스트레일리아와 동남아시아를 방문하고 8월 22일에 귀국했다. 배는 다음 달 임무에서 해제되었지만, 다음 훈련 항해를 준비하기 위해 1년 후 연습 함대에 다시 합류했다. 1918년 3월 2일에는 두 번째 연습 항해를 떠나 중앙 아메리카, 하와이, 남양군도를 방문하고 같은 해 7월 6일에 돌아왔다.[36]
3. 4. 연습함 시대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4년 10월 2일 사세보로 돌아오기 전에 칭다오 전투 초기에 잠시 참여했다.[34] 다음 달, 피지와 마르키즈 제도에 주둔한 제1남양함대에 배속되었다.[35]1915년 9월 1일, ''이와테''는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원양 항해 및 장교 훈련을 위한 연습함대에 배속되었다. 1916년 4월 20일, 동형함 아즈마와 함께 첫 번째 연습 항해를 시작하여 오스트레일리아와 동남아시아를 방문한 후 8월 22일에 귀국했다.[36] 이를 시작으로 ''이와테''는 총 16번의 원양 연습 항해에 참여했으며, 주로 연습함으로 활용되어 1939년까지 많은 사관생도를 태우고 원양 항해 훈련을 계속했다. 1918년 3월 2일에는 중앙 아메리카, 하와이, 남양군도로 향하는 두 번째 항해를 시작하여 7월 6일에 귀환했다.[36]
1920년 8월 21일에는 남아메리카와 남양군도를 방문하는 세 번째 항해를 시작하여 1921년 4월 4일에 귀환했다.[37] 같은 해 9월 1일, 함종이 1등 해방함으로 변경되었고,[38] 1931년에는 해방함 등급이 폐지되었다.
1922년 6월 26일, ''이와테''는 이즈모, 야쿠모와 함께 하와이, 로스앤젤레스, 파나마 운하를 거쳐 리오데자네이루까지 이어지는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했다. 리오데자네이루에서는 브라질 독립 100주년 기념 박람회를 견학했다.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 더반을 거쳐 인도양을 통해 1923년 2월 8일 귀국했다.[14]
1924년에는 무장 변경이 이루어져 12파운드포 4문과 모든 QF 2.5파운드포가 제거되고, 8cm/40 3년식 대공포 1문이 추가되었다.[39] 1931년에는 다시 개조되어 어뢰 발사관이 제거되고 주 갑판의 6인치 포와 포탑이 덮였다. 남은 무장은 12파운드포 2문과 8cm/40 3년식 대공포 3문이었다.[39] 또한 보일러가 6기의 야로우 보일러로 교체되어 출력은 7,000 마력으로 감소했고, 최고 속도도 16 노트로 줄었다. 석탄 탑재량은 약 1434658.36kg, 연료유 탑재량은 약 329199.23kg가 되었으며, 승무원은 726명으로 구성되었다.[4]

''이와테''는 보통 2년 간격으로 연습 항해를 계속했으며, 북아메리카 동해안과 지중해 등지를 방문했다.[37] 1925년부터 1926년까지의 항해에는 가초 히로노부 왕자가 생도로 탑승했다.[40] 1928년 12월에는 요코하마 항에서 열린 관함식에서 히로히토 천황을 호위했다.[41] 1932년부터는 1935년을 제외하고 1939년 말까지 매년 연습 항해가 이루어졌다.[37]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인 1940년 2월 1일, 제3지원함대 제12전대에 배속되었다. 노후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함 정의 재검토에 따라 1942년 7월 1일 1등 순양함으로 잠시 복귀했다가 1943년에 다시 연습함으로 분류되었다.[42]
1945년 3월 19일, 미국 해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아 승무원 1명이 사망했지만 함 자체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그 직후, 주포인 8인치 포가 12.7cm 89식 양용포 2연장 포좌 2기로 교체되었고, 남아있던 6인치 포 4문도 제거되었다. 대공 무장 강화를 위해 96식 25mm 대공포 9문(3연장 1기, 2연장 2기, 단장 2기)과 13.2mm 호치키스 기관총 2정(단장 2기)이 추가되었다.[14][42]
1945년 7월 24일, 구레 군항 공습 당시 미군 항공기의 폭격을 받았다. 직격탄은 없었으나 근접한 폭탄 3발의 폭발 충격으로 선체 이음새가 벌어져 침수가 시작되었고, 다음 날인 7월 25일 구레 항 내의 얕은 물에 착저 침몰했다.[14] 1945년 11월 30일 해군 목록에서 제적되었으며, 선체는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 하라시마 조선소에 의해 인양되어 해체되었다.[14]
3. 5. 태평양 전쟁
1940년 2월 1일, 제3 지원 함대의 제12 전대에 배속되었다.[42] 비록 구형함이었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인 1942년 7월 1일 해방함의 정의가 재검토됨에 따라 잠시 1등 순양함으로 재분류되었다.[42] 그러나 1943년에 다시 훈련함으로 분류되었다.[42]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19일, 구레에 정박 중 미 해군 항공모함 함재기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승무원 1명이 사망했지만, 함 자체에는 심각한 손상을 입지 않았다.[14][42] 이 공격 이후 대공 능력 강화를 위해 무장이 변경되었다. 기존의 8인치 주포를 철거하고 12.7cm 89식 양용포 2연장 포좌 2기(총 4문)를 설치했으며, 남아있던 6인치 부포 4문도 제거되었다. 대신 경대공 무장으로 96식 25mm 기관총 9문(3연장 1기, 2연장 2기, 단장 2기)과 단장 13.2mm 기관총 2문이 추가되었다.[14][42]
1945년 7월 24일, 미군의 대규모 구레 군항 공습 당시 다시 폭격을 받았다. 함체에 직접 명중한 폭탄은 없었으나, 근접한 위치에 떨어진 폭탄 3발의 충격으로 선체 이음새가 파손되어 침수가 시작되었다.[14] 결국 다음 날인 7월 25일, 침수로 인해 구레 항 내의 얕은 바다에 착저하며 가라앉았다.[14] (다른 자료에서는 7월 26일 침몰로 기록되기도 한다.)
1945년 11월 30일 일본 제국 해군의 제적되었으며,[14] 선체는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 하라시마 조선소 (현 IHI)에 의해 인양되어 해체되었다.[14]
3. 6. 최후
1940년 2월 1일, 제3 지원 함대의 제12 전대에 배속되었다.[42] 노후함이었지만 1942년 7월 1일에 1급 순양함으로 잠시 재분류되었고[42], 1943년에는 훈련함으로 다시 분류되었다.[42]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주로 훈련함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3월 19일, 미 해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아 승무원 1명이 사망했으나 함 자체에 큰 피해는 없었다.[14][42] 이 공격 이후 대공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8인치 주포를 철거하고 12.7cm 89식 양용포 2연장 포좌 4문으로 교체했으며, 남아있던 6인치 부포 4문도 제거했다. 추가로 25mm 96식 기관포 9문(3연장 1기, 2연장 2기, 단장 2기)과 13.2mm 기관총 2정(단장)을 증설했다.[14][42]
1945년 7월 24일, 구레 공습 당시 미군기의 폭격을 받았다. 직격탄은 피했지만 근접한 곳에 떨어진 폭탄 3발의 충격으로 선체 이음새가 파손되어 침수가 발생했고, 다음 날인 7월 25일 구레 항 내의 얕은 바다에 착저 침몰했다.[14] 1945년 11월 30일 일본 해군의 해군 목록에서 제적되었으며,[14] 선체는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 하라시마 조선소에서 인양되어 해체되었다.[14]
4. 함장 목록
구분 | 계급 |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회항 위원장 | 대좌 | 야마다 히코하치 | 1899년 6월 17일 - 1900년 9월 1일 | |
함장 | 대좌 | 야마다 히코하치 | 1900년 9월 1일 - 1901년 7월 6일 | |
함장 | 대좌 | 다케토미 구니테이 | 1901년 7월 6일 - 1905년 1월 12일 | |
함장 | 대좌 | 가와시마 레이지로 | 1905년 1월 12일 - 1906년 2월 2일 | |
함장 | 대좌 | 야마시타 겐타로 | 1906년 2월 2일 - 1906년 11월 22일 | |
함장 | 대좌 | 아리마 료키치 | 1906년 11월 22일 - 1907년 12월 17일 | |
함장 | 대좌 | 이시다 이치로 | 1907년 12월 27일 - 1908년 9월 15일 | |
함장 | 대좌 | 마노 이와지로 | 1908년 9월 15일 - 1909년 3월 4일 | |
함장 | 대좌 | 기타노 가쓰야 | 1909년 3월 4일 - 1910년 12월 1일 | |
함장 | 대좌 | 마쓰오카 슈조 | 1910년 12월 1일 - 1911년 5월 23일 | |
함장 | 대좌 | 하시모토 마타키치로 | 1911년 5월 23일 - 1911년 12월 1일 | |
함장 | 대좌 | 후나코시 기시로 | 1911년 12월 1일 - 1912년 7월 13일 | |
함장 | 대좌 | 하라 세이고 | 1912년 7월 13일 - 1913년 3월 7일 | |
함장 | 대좌/소장 | 야마구치 구주로 | 1913년 3월 7일 - 1913년 5월 24일 | (겸임, 본직: 사쓰마 함장) |
함장 | 대좌 | 가미무라 게이키치 | 1913년 5월 24일 - 1913년 8월 31일 | (겸임, 본직: 사쓰마 함장) |
함장 | 대좌 | 이데 겐지 | 1913년 8월 31일 - 1913년 12월 1일 | |
함장 | 대좌 | 히로세 히로키 | 1913년 12월 1일 - 1914년 10월 27일 | |
함장 | 대좌 | 야마구치 사토시 | 1914년 10월 27일 - 1915년 4월 1일 | |
함장 | 대좌 | 햐쿠타케 사부로 | 1915년 7월 19일 - 1916년 9월 1일 | |
함장 | 대좌 | 나카자토 시게지 | 1916년 12월 1일 - 1918년 8월 15일 | |
함장 | 대좌 | 쓰치도 지로 | 1918년 8월 15일 - 1919년 11월 20일 | |
함장 | 대좌 | 도리자키 야스조 | 1919년 11월 20일 - 1921년 6월 15일 | |
함장 | 대좌 | 아리타 히데미치 | 1921년 6월 15일[49] - 1921년 11월 20일[50] | |
함장 | 대좌 | 오데라 료키치 | 1921년 11월 20일 - 1923년 3월 5일 | |
함장 | 대좌 | 요나이 미쓰마사 | 1923년 3월 5일 - 1924년 7월 18일 | |
함장 | 대좌 | 야스미 산사부로 | 1924년 7월 18일 - 1924년 11월 1일 | |
함장 | 대좌 | 이시카와 기요시 | 1924년 11월 1일 - 1925년 5월 1일 | |
함장 | 대좌 | 에다하라 유리이치 | 1925년 5월 1일[51] - 1926년 9월 15일 | |
함장 | 대좌 | 이노세 기조 | 1926년 9월 15일 - 1927년 12월 28일 | |
함장 | 대좌 | 구게 다네쓰구 | 1927년 12월 28일[52] - 1928년 12월 10일[53] | |
함장 | 대좌 | 스즈키 기이치 | 1928년 12월 10일 - 1929년 12월 24일 | |
함장 | 대좌 | 이노우에 가쓰즈미 | 1929년 12월 24일[54] - 1930년 12월 1일 | |
함장 | 대좌 | 시라이시 구니오 | 1930년 12월 1일[55] - 1931년 4월 1일[56] | |
함장 | 대좌 | 오카다 슌이치 | 1931년 4월 1일 - 1932년 9월 26일 | |
함장 | 대좌 | 스즈키 가스케 | 1932년 9월 26일 - 1933년 8월 25일 | |
함장 | 대좌 | 하라 기요시 | 1933년 8월 25일 - 1934년 9월 1일 | |
함장 | 대좌 | 후지모리 세이이치로 | 1934년 9월 1일 - 1934년 11월 15일 | |
함장 | 대좌 | 야마다 쇼조 | 1934년 11월 15일 - 1935년 11월 15일 | |
함장 | 대좌 | 가쿠다 가쿠지 | 1935년 11월 15일 - 1936년 12월 1일 | |
함장 | 대좌 | 다이고 다다시게 | 1936년 12월 1일 - 1937년 12월 1일 | |
함장 | 대좌 | 이치세 신이치 | 1937년 12월 1일 - 1938년 7월 15일 | |
함장 | 대좌 | 고야나기 도미지 | 1938년 7월 15일 - 1939년 1월 28일 | |
함장 | 대좌 | 이와코시 간키 | 1939년 1월 28일 - 1939년 5월 1일 | (겸임, 본직: 나치 함장) |
함장 | 대좌 | 오가타 마키 | 1939년 5월 1일 - 1939년 12월 27일 | |
함장 | 대좌 | 시미즈 다키오 | 1939년 12월 27일[57] - 1940년 11월 10일[58] | |
함장 | 대좌 | 오와다 노보루 | 1940년 11월 10일 - 1941년 1월 6일 | |
함장 | 대좌 | 히라쓰카 시로 | 1941년 1월 6일[59] - 1941년 10월 15일[60] | |
함장 | 대좌 | 이시하타 시로 | 1941년 10월 15일[60] - 1942년 1월 15일[61] | |
함장 | 대좌 | 오카 쓰네오 | 1942년 1월 15일[61] - 1942년 5월 25일[62] | |
함장 | 대좌 | 마쓰모토 다케시 | 1942년 5월 25일 - 1942년 9월 5일 | |
함장 | 대좌 | 사사키 기요지 | 1942년 9월 5일[63] - 1943년 2월 18일[64] | |
함장 | 대좌 | 이노세 마사모리 | 1943년 2월 18일[64] - 1943년 10월 10일[65] | |
함장 | 대좌 | 오이시 겐지로 | 1943년 10월 10일[65] - 1944년 7월 25일[66] | |
함장 | 대좌 | 다무라 야스오 | 1944년 7월 25일[66] - 1944년 10월 20일[67] | |
함장 | 대좌 | 오카다 유사쿠 | 1944년 10월 20일[67] - 1945년 1월 6일[68] | |
함장 | 대좌 | 시미즈 다키오 | 1945년 1월 6일[68] - 1945년 8월 8일[69] |
※ 각주가 없는 한, 『일본 해군사』 제9권, 제10권의 "장관 이력" 및 『관보』에 근거함.
5. 동형함
참조
[1]
서적
Evans & Peattie
[2]
서적
Milanovich
[3]
서적
Milanovich
[4]
서적
Jentschura, Jung & Mickel
[5]
서적
Milanovich
[6]
서적
Brook 1999
[7]
문서
"Cwt" is the abbreviation for [[hundredweight]], 12 cwt referring to the weight of the gun.
[8]
서적
Milanovich
[9]
서적
Milanovich
[10]
서적
Chesneau & Kolesnik
[11]
서적
Silverstone
[12]
뉴스
Naval & Military intelligence - The Japanese cruiser Iwate
The Times
1900-03-30
[13]
서적
Milanovich
[14]
서적
Hackett & Kingsepp
[15]
서적
Kowner
[16]
서적
Forczyk
[17]
서적
Corbett 1994
[18]
서적
Warner & Warner
[19]
서적
Corbett 1994
[20]
서적
Corbett 1994
[21]
서적
Brook 2000
[22]
서적
Brook 2000
[23]
서적
Brook 2000
[24]
서적
Brook 2000
[25]
서적
Corbett 1994
[26]
서적
Corbett 1994
[27]
서적
Kowner
[28]
서적
Campbell
[29]
서적
Campbell
[30]
서적
Corbett 1994
[31]
서적
McLaughlin
[32]
서적
Campbell
[33]
서적
Corbett 1994
[34]
서적
Burdick
[35]
서적
Corbett 1938
[36]
문서
Lacroix & Wells, pp. 657–58
[37]
문서
Lacroix & Wells, p. 657
[38]
문서
Hackett & Kingsepp
[39]
문서
Chesneau, p. 174
[40]
뉴스
Japanese Training Cruiser on World Tour
http://www.britishne[...]
Gloucester Citizen
1926-01-22
[41]
뉴스
Great Naval Review: British Warships Take Part in Yokohama Pageant
http://www.britishne[...]
Western Morning News
1928-12-05
[42]
문서
Fukui, p. 4
[43]
문서
p.36
[44]
문서
p.21
[45]
문서
p.9、明治二十九年
[46]
문서
『官報』第5311号、明治34年3月20日。
[47]
문서
『写真日本海軍全艦艇史』資料篇、4頁。
[48]
뉴스
【消えた偉人・物語】 工藤俊作と上村彦之丞 再現された少年時代の“手本”
産経新聞
2011-03-19
[49]
문서
『官報』第2662号、大正10年6月16日。
[50]
문서
『官報』第2793号、大正10年11月22日。
[51]
문서
『官報』第3807号、大正14年5月4日。
[52]
문서
『官報』第302号、昭和2年12月29日。
[53]
문서
『官報』第587号、昭和3年12月11日。
[54]
문서
『官報』第898号、昭和4年12月26日。
[55]
문서
『官報』第1179号、昭和5年12月2日。
[56]
문서
『官報』第1275号、昭和6年4月2日。
[57]
간행물
昭和14年12月27日付 海軍辞令公報 (部内限) 第425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58]
간행물
昭和15年11月13日付 海軍辞令公報 (部内限) 第553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59]
간행물
昭和16年1月6日付 海軍辞令公報 (部内限) 第578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60]
간행물
昭和16年10月15日付 海軍辞令公報 (部内限) 第728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61]
간행물
昭和17年1月15日付 海軍辞令公報 (部内限) 第794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62]
간행물
昭和17年5月25日付 海軍辞令公報 (部内限) 第866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63]
간행물
昭和17年9月5日付 海軍辞令公報 (部内限) 第937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64]
간행물
昭和18年2月18日付 海軍辞令公報 (部内限) 第1056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65]
간행물
昭和18年10月13日付 海軍辞令公報 (部内限) 第1237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66]
간행물
昭和19年7月29日付 海軍辞令公報 甲 (部内限) 第1549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67]
간행물
昭和19年10月25日付 秘海軍辞令公報 甲 第1627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68]
간행물
昭和20年1月11日付 秘海軍辞令公報 甲 第1690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69]
간행물
昭和20年8月16日付 秘海軍辞令公報 甲 第1887号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