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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계 케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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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럽계 케냐인은 케냐에 거주하는 유럽 혈통의 사람들을 지칭하며, 케냐 역사와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대항해 시대에 시작된 유럽과의 교류는 몸바사를 상아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19세기 말 신제국주의 시기에 영국은 케냐를 식민 지배했다. 1895년 영국 동아프리카 보호령으로 지정된 후, 백인 정착을 장려하며 커피와 가축 생산을 위한 토지 할당이 이루어졌다.

1920년 케냐는 영국 왕령 식민지가 되었고,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마우마우 봉기로 대표되는 반식민지 투쟁이 격화되었고, 1963년 케냐가 독립하면서 많은 유럽계 케냐인들이 이주했다. 현재 유럽계 케냐인은 주로 중산층 이상으로, 금융, 운송, 접객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1930년대부터 약물 사용과 문란한 성생활로 악명 높았던 "해피 밸리 세트"와 관련된 사건들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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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계 케냐인
기본 정보
민족유럽계 케냐인
인구42,868명 (2019년)
지역나이로비 주
리프트 밸리 주
해안 주
중앙 주
언어영어
이탈리아어
정착민 스와힐리어
종교주로 기독교

2. 역사

대항해 시대는 오늘날 케냐 지역과 유럽의 첫 교류로 이어졌다. 해안 지역은 동부 무역로의 중요한 발판으로 여겨졌고, 몸바사는 상아 무역의 핵심 항구가 되었다. 포르투갈은 1498년에서 1698년 사이에 200년 동안 이 지역에 거점을 마련했지만, 예수 요새가 함락되면서 오만 술탄국에 해안 통제권을 잃었다.[2]

1844년 독일 선교사 요한 루드비히 크라프와 요하네스 레브만이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유럽의 내륙 탐험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곧 다른 탐험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들의 이야기는 점차 각국 정부가 이 지역의 잠재력을 인식하게 만들었다.[3]

19세기 말 신제국주의의 부상은 이 지역에 대한 유럽의 관심을 심화시켰다. 카를 페터스와 윌리엄 매키넌과 같은 선구적인 사업가들이 이 지역에 수익성 있는 무역로를 구축하려 했고, 이들은 각 정부에 무역 이익을 보호하도록 강요했다. 1885년 동아프리카는 영국, 독일, 프랑스에 의해 분할되었고, 영국은 케냐와 우간다 지역을 장악하고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를 통해 통치했다. 1895년, 영국 정부는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의 영토를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행정 책임을 외무부로 이관했다. 이는 몸바사 해안에서 빅토리아 호 기슭까지 철도를 건설하여 내륙을 무역에 개방하려는 계획과 일치했다.[4]

2. 1. 초기 유럽인과의 접촉 (대항해 시대 ~ 19세기)

대항해 시대는 오늘날 케냐 지역과 유럽의 첫 교류로 이어졌다. 해안 지역은 동부 무역로의 중요한 발판으로 여겨졌고, 몸바사는 상아 무역의 핵심 항구가 되었다. 포르투갈은 1498년에서 1698년 사이에 200년 동안 이 지역에 거점을 마련했지만, 예수 요새가 함락되면서 오만 술탄국에 해안 통제권을 잃었다.[2]

1844년 독일 선교사 요한 루드비히 크라프와 요하네스 레브만이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내륙에 대한 유럽 탐험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곧 다른 탐험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들의 이야기는 점차 각국 정부가 이 지역의 잠재력을 인식하게 만들었다.[3]

19세기 말 신제국주의의 부상은 이 지역에 대한 유럽의 관심을 심화시켰다. 최초의 원동력은 카를 페터스와 윌리엄 매키넌과 같은 선구적인 사업가들이 이 지역에 수익성 있는 무역로를 구축하려는 데 있었다. 이 사업가들은 각 정부에 무역 이익을 보호하도록 강요했고, 1885년 동아프리카는 영국, 독일, 프랑스에 의해 분할되었다. 영국은 케냐와 우간다 지역을 장악하고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를 통해 통치했다. 1895년, 영국 정부는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의 영토를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행정 책임을 외무부로 이관했다. 이는 몸바사 해안에서 빅토리아 호 기슭까지 철도를 건설하여 내륙을 무역에 개방하려는 계획과 일치했다.[4]

2. 2. 영국 동아프리카 보호령 (1895년 ~ 1920년)

1897년 최초의 토지 규제 법이 통과되었지만, 우간다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는 유럽인이 거의 정착하지 않았다. 1902년, 당시 보호령의 찰스 엘리엇 경은 유럽인 식민지 개척자를 백인 고원 지역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시작했다. 엘리엇은 이 고원을 백인들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이 지역이 백인들에게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5] 이에 따라 왕실 토지를 영구 소유권 또는 99년 임대차 형태로 부여하는 왕실 토지 조례가 통과되었다. 엘리엇은 우간다 철도의 수익성을 보장하고 지역 경제를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은 유럽인 정착과 미개척 비옥한 토지에서 그들의 노력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5]

1903년 말까지 정착민의 인구는 100명으로 증가했다.[5] 이후 280명의 보어인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도착했다. 초기 정착민 중에는 대규모 토지를 개발하고 유사 귀족적인 삶을 영위할 자본을 갖춘 델라메어 경, 힌들립 경, 크랜워스 경과 같은 부유한 영국 신사들이 있었다. 토지법은 정착민에게 매우 유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법으로 묘사되었다.[5]

1914년에는 약 1,300명의 유럽인 정착민이 있었으며, 1912년 이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이 케냐 백인 정착민의 다수를 차지했다.[5][6]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이 독일령 동아프리카에 대한 작전의 일환으로 동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케냐의 서비스 경제에서 일하게 되었다. 1915년까지 정부는 정착을 장려하기 위해 999년 임대차를 제공하고 토지세를 면제했다. 또한 국가는 백인 농부들의 생산품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공개 시장에서 흑인 소규모 토지 소유주에 비해 경쟁 우위를 확보하도록 했다.

커피가축 생산에 필요한 높은 초기 비용으로 인해 케냐는 "거물들의 프론티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한 사람들은 남아프리카 연방 또는 호주와 같은 방식으로 케냐를 또 다른 "백인들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으며, 백인 인구를 늘리고 그들의 비전을 위한 더 확고한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소규모 토지에 제한된 자본을 가진 "소시민"의 필요성을 인식했다.[7]

1919년, 영국 정부는 참전 군인 정착 계획을 시작했다. 이 계획은 케냐 역사상 유럽인 정착을 위한 최대 규모의 토지 할당이었으며, 2000000acre 이상의 토지가 포함되었고, 백인 정착 지역을 3분의 1 증가시켰다. 신청자는 전쟁 중 공식적으로 인정된 모든 제국군 부대에서 복무한 순수한 유럽 출신의 영국 시민이어야 했다. 대부분은 영국 출신이었으며, 아일랜드, 영국령 인도 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상당수가 참여했다.[6] 또한 소수의 캐나다의 소 사육사, 호주의 목축업자, 뉴질랜드 농부들이 있었다.[6] 군인 정착민의 상당수는 상류층 출신이었으며, 3분의 1은 영국 공립학교를 졸업했다. 전체적으로, 귀족 출신 군인 정착민들은 영국의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아들, 형제, 처남 또는 조카와 결혼했다.[6] 이 계획의 주목할 만한 참가자로는 비스카운트 버리, 비스카운트 브룸, 경 델비스 브로턴, 경 G.F. 밀른, 허버트 고프 경, 모리스 에거턴, 페드릭 오브라이언 등이 있었다. 이 계획의 결과로, 유럽인 인구는 1921년까지 9,651명으로 증가했다.[5]

2. 3. 케냐 식민지 (1920년 ~ 1963년)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국기


1920년, 보호령은 영국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 토지 몰수, 강제 노동, 그리고 아프리카인의 고등 교육, 관료 기구, 제1차 세계 대전 참여 제한은 1920년대 케냐에서 실질적인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을 촉발하는 데 기여했다. 조모 케냐타와 해리 투쿠와 같은 지도자들은 케냐의 비정착민 인구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견해를 강조했다.

1945년에 케냐로 정착민을 모집하려는 마지막 시도가 있었다. 약 500명의 유럽인만이 케냐로 이주했고, 이는 유럽인 인구가 낮게 유지되었음을 의미하며, 아프리카 인구 5,200,000명에 비해 23,033명에 불과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식민주의에 대한 불만은 키쿠유족이 주도한 마우마우 봉기로 알려진 반식민지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 반란은 케냐 토지 몰수와 백인 정착민의 차별에 의해 부분적으로 동기 부여되었다. 반란 동안 32명의 백인 정착민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혁명 조직인 마우마우에 의해 살해되었다.[8]

2. 4. 케냐 공화국 (1963년 ~ 현재)

영국은 1960년대 초, 케냐를 식민지로 유지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줄어들었고, 1962년 랭커스터 하우스 협정에서 케냐 독립 날짜를 정했다. 로디지아의 마우마우 반란 이후 로디지아의 일방적인 독립 선언과 같은 방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6만 명의 백인 정착민 대다수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고려했다.[9] 케냐의 인도인 인구와 함께 유럽인과 그 후손들은 영국 여권을 유지하고 권리 감소를 감수하거나, 새로운 케냐 여권을 취득하는 선택을 받았다. 시민권을 취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많은 백인 케냐인들이 이 나라를 떠났다. 세계 은행은 '백만 에이커' 계획으로 알려진, 기꺼이 구매하고 기꺼이 판매하는 방식을 주도했으며, 이는 주로 비밀리에 영국 정부의 보조금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이 계획은 백인 소유 농지의 상당 부분을 새로 부유해진 키쿠유 엘리트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1979년 총선에서 필립 리키는 독립 이후 처음으로 케냐 국회의 백인 의원이 되었다.[10]

케냐 통계청(KNBS)에 따르면, 2019년 케냐에는 69,621명의 유럽인이 있었으며, 이 중 42,868명이 케냐 시민이었다. 2010년 이중 국적 제도가 시행되면서 케냐 시민의 비율이 증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케냐에는 인종에 관계없이 영국 시민권자도 거주하고 있으며, BBC에 따르면 2006년에는 약 32,000명으로 집계되었다.[11]

3. 사회경제

케냐의 유럽계 사람들은 대부분 중산층 또는 중상류층에 속한다. 이들은 과거 '백인 고원'이라 불리는 고원 지역에 주로 거주했으나, 독립 이후 백인 정착민들이 떠나면서 대부분의 토지는 백만 에이커 정착 계획에 따라 아프리카인들에게 판매되었다.[12] 오늘날에는 소수만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주로 가축 및 사냥 농장주, 원예가, 농부), 대다수는 금융, 수입, 항공 운송, 접객업 등 3차 산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3. 1. 20세기 초

1897년 최초의 토지 규제 법이 통과되었지만, 우간다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는 유럽인이 거의 정착하지 않았다. 1902년, 당시 보호령의 찰스 엘리엇 경은 백인 고원 지역에 유럽인 식민지 개척자를 정착시키는 정책을 시작했다. 엘리엇은 이 고원을 백인들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지역이 백인들에게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5] 이에 따라 왕실 토지를 영구 소유권 또는 99년 임대차 형태로 부여하는 왕실 토지 조례가 통과되었다. 엘리엇은 우간다 철도의 수익성을 보장하고 지역 경제를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은 유럽인 정착과 미개척 비옥한 토지에서 그들의 노력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5]

1903년 말까지 정착민의 인구는 100명으로 증가했다.[5] 이후 280명의 보어인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도착했다. 초기 정착민 중에는 대규모 토지를 개발하고 귀족적인 삶을 영위할 자본을 갖춘 델라메어 경, 힌들립 경, 크랜워스 경과 같은 부유한 영국 신사들이 있었다. 토지법은 정착민에게 매우 유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법으로 묘사되었다.[5]

1914년에는 약 1,300명의 유럽인 정착민이 있었으며, 1912년 이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이 케냐 백인 정착민의 다수를 차지했다.[5][6]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이 독일령 동아프리카에 대한 작전의 일환으로 동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케냐의 서비스 경제에서 일하게 되었다. 1915년까지 정부는 정착을 장려하기 위해 999년 임대차를 제공하고 토지세를 면제했다. 또한 국가는 백인 농부들의 생산품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공개 시장에서 흑인 소규모 토지 소유주에 비해 경쟁 우위를 확보하도록 했다.

커피가축 생산에 필요한 높은 초기 비용으로 인해 케냐는 "거물들의 프론티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한 사람들은 남아프리카 연방 또는 호주와 같은 방식으로 케냐를 또 다른 "백인들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으며, 백인 인구를 늘리고 그들의 비전을 위한 더 확고한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소규모 토지에 제한된 자본을 가진 "소시민"의 필요성을 인식했다.[7]

1919년, 영국 정부는 참전 군인 정착 계획을 시작했다. 이 계획은 케냐 역사상 유럽인 정착을 위한 최대 규모의 토지 할당이 되었으며, 2000000acre 이상의 토지가 포함되었고, 백인 정착 지역을 3분의 1 증가시켰다. 신청자는 전쟁 중 공식적으로 인정된 모든 제국군 부대에서 복무한 순수한 유럽 출신의 영국 시민이어야 했다. 대부분은 영국 출신이었으며, 아일랜드, 영국령 인도 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상당수가 참여했다.[6] 또한 소수의 캐나다의 소 사육사, 호주의 목축업자, 뉴질랜드 농부들이 있었다.[6] 군인 정착민의 상당수는 상류층 출신이었으며, 3분의 1은 영국 공립학교를 졸업했다. 전체적으로, 귀족 출신 군인 정착민들은 영국의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아들, 형제, 처남 또는 조카와 결혼했다.[6] 이 계획의 주목할 만한 참가자로는 비스카운트 버리, 비스카운트 브룸, 경 델비스 브로턴, 경 G.F. 밀른, 허버트 고프 경, 모리스 에거턴, 페드릭 오브라이언 등이 있었다. 이 계획의 결과로, 유럽인 인구는 1921년까지 9,651명으로 증가했다.[5]

3. 2. 현재

경제적으로, 케냐의 거의 모든 유럽인은 중산층과 중상류층에 속한다. 그들은 이전에 이 나라의 고원 지역, 소위 '백인 고원'에 밀집해 있었다. 백인 고원은 독립 전에 백인 정착민들이 떠났고, 대부분의 토지는 백만 에이커 정착 계획에 따라 아프리카인들에게 판매되었다.[12] 오늘날 소수의 사람들만이 여전히 토지 소유주(가축 및 사냥 농장주, 원예가 및 농부)이며, 대다수는 금융, 수입, 항공 운송 및 접객업과 같은 3차 산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4. 사회적 통합

리처드 리키(왕립 학회(F.R.S.))와 같은 몇몇 예외적인 인물을 제외하면, 케냐 백인들은 케냐 정치에서 사실상 완전히 물러났으며, 더 이상 공무원 및 준정부기관에 대표되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의 마지막 직원들은 1970년대에 은퇴했다.

책과 영화 ''화이트 미스치프''는 촐몬들리 가문의 초기 구성원 중 한 명인 제4대 델라메어 남작(일반적으로 톰 델라메어로 알려짐)을 다루었다. 그는 해피 밸리 세트의 일원인 다이애나 콜드웰과 결혼했는데, 1941년 나이로비에서 다이애나의 연인이 살해당했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조크 델브스 브로턴은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로 풀려났다.[13] 2005년, 백인 케냐의 낙농 및 축산 농부이자 사냥터 운영자인 토마스 촐몬들리 경(영국 귀족의 후손)이 게임 레인저인 샘슨 올레 시시나를 살해한 사건은 영연방 국가의 사법 제도의 계급 편향과 많은 케냐인들이 백인 특권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14]

5. '해피 밸리 세트'와 관련된 논란

'해피 밸리 세트'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케냐와 우간다 식민지 내 아베르데어 산맥 근처 완조히 계곡의 해피 밸리 지역에 정착했던 쾌락주의적인 영국 및 앵글로-아일랜드 귀족과 모험가 그룹이었다. 1930년대부터 이들은 약물 사용과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타락한 생활 방식과 방탕한 행위로 악명이 높아졌다.[15]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케냐의 백인 사회는 정착민과 식민지 관리 및 상인이라는 두 개의 뚜렷한 파벌로 나뉘었다. 이들은 모두 상류 중산층과 상류층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주로 앵글로-아일랜드)이 주도했지만, 토지 할당에서 원주민을 대하는 방식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자주 의견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관리와 상인들은 해피 밸리 세트를 당혹스럽게 여겼다.

해피 밸리 세트의 영향력은 1920년대 후반에 절정에 달했다. 1929년 월가 주식 시장 붕괴로 인한 경기 침체는 케냐 식민지로의 새로운 유입과 자본 유입을 크게 감소시켰다.

5. 1. '해피 밸리 세트'의 구성원

1920년대부터 1940년대 사이에 케냐와 우간다 식민지 내 아베르데어 산맥 근처 완조히 계곡의 해피 밸리 지역에 정착한 쾌락주의적인 영국 및 앵글로-아일랜드 귀족과 모험가 그룹인 해피 밸리 세트의 구성원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15]

  • 제3대 델라메어 남작과 그의 아들, 상속자인 제4대 델라메어 남작
  • 명예 데니스 핀치 해튼
  • 명예 버클리 콜 (얼스터 출신의 앵글로-아일랜드 귀족)
  • 서 조크 델브스 브로턴, 제11대 준남작
  • 제22대 에롤 백작
  • 레이디 이다이나 삭빌
  • 앨리스 드 잔제 (J. 오그덴 아머의 사촌)
  • 프레데릭 드 잔제
  • 레이디 다이애나 델브스 브로턴
  • 길버트 콜빌
  • 휴 디킨슨
  • 잭 소임스
  • 니나 소임스
  • 레이디 준 카버리 (후아니타 카버리의 계모)
  • 디키 펨브로크
  • 줄리안 레자드


작가 남작부인 카렌 블릭센 (이사크 디네센) 또한 로드 에롤의 친구였다.

5. 2. 현대의 논란

케냐 백인들은 케냐 정치에서 사실상 완전히 물러났으며, 더 이상 공무원 및 준정부기관에 대표되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의 마지막 직원들은 1970년대에 은퇴했다.

책과 영화 ''화이트 미스치프''는 촐몬들리 가문의 초기 구성원 중 한 명인 제4대 델라메어 남작(일반적으로 톰 델라메어로 알려짐)을 다루었다. 그는 해피 밸리 세트의 일원인 다이애나 콜드웰과 결혼했는데, 다이애나의 연인은 1941년 나이로비에서 살해당했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조크 델브스 브로턴은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로 풀려났다.[13] 2005년, 백인 케냐의 낙농 및 축산 농부이자 사냥터 운영자인 토마스 촐몬들리 경(영국 귀족의 후손)이 게임 레인저인 샘슨 올레 시시나를 살해한 사건은 영연방 국가의 사법 제도의 계급 편향과 많은 케냐인들이 백인 특권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14]

나이바샤 주변 지역은 백인이 케냐에 처음 정착한 곳 중 하나였으며, '해피 밸리 세트'의 주요 사냥터 중 하나였다.[16] 아베르데어 산맥 동쪽에 있는 식민 도시 네리는 해피 밸리 정착민들의 중심지였다.[17]

2015년 이후 해피 밸리 세트의 후손들이 뉴스에 등장했는데, 특히 유명한 로드 델라메어의 증손자인 톰 촐몬들리의 손에 의한 사망 사건이 보도되었다.[18][19]

참조

[1] 웹사이트 2019 Kenya Population and Housing Census Volume IV: Distribution of Population by Socio-Economic Characteristics https://www.knbs.or.[...] 2021-07-28
[2] 서적 A history of modern Africa : 1800 to the present Wiley-Blackwell
[3] 서적 A History of the Church in Africa
[4] 간행물 Studies in District Administration in the East Africa Protectorate (1895–1918). By T. H. R. Cashmore. Cambridge: African Studies Centre, 2010. Pp. xiv+254. No price given, no ISBN. 2011-03
[5] 간행물 Kenya: Demographic Constraints on the Growth of European Settlement, 1900-1956 1987
[6] 간행물 'Men of the Officer Class': The Participants in the 1919 Soldier Settlement Scheme in Kenya 1993
[7] 간행물 Beadoc – the British East Africa Disabled Officers' Colony and the White Frontier in Kenya 1992
[8] 서적 Imperial Reckoning: The Untold Story of Britain's Gulag in Kenya Macmillan 2005
[9] 뉴스 A lost world https://www.theguard[...] 2006-10-26
[10] 웹사이트 Philip Leakey: poster boy for a question-driven life https://www.seattlet[...] 2011-08-19
[11] 뉴스 Brits Abroad: Country-by-country http://news.bbc.co.u[...] BBC News 2006-12-11
[12] 간행물 Promised Land: Settlement Schemes in Kenya, 1962 to 2016 2021-08-01
[13] 뉴스 Eight months for Kenya aristocrat http://news.bbc.co.u[...] BBC News 2009-05-14
[14] 뉴스 A trial that will decide the future of Kenya 2006-11-04
[15] 웹사이트 Storm clouds over Happy Valley http://www.smh.com.a[...] 2009-05-16
[16] 웹사이트 Naivasha, Kenya http://www.go2africa[...]
[17] 웹사이트 Forest>Aberdares>Cultural Safari http://www.magicalke[...]
[18] 웹사이트 Thomas Cholmondeley, Scion Implicated in Killings of 2 Kenyans, Dies at 48 https://www.nytimes.[...] 2016-08-18
[19] 웹사이트 Delamere heir Tom Cholmondeley dies at 48 after surgery https://www.business[...] 202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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