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신제국주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신제국주의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 열강들이 산업혁명으로 인한 잉여 자본과 생산물을 해소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를 식민 지배한 현상을 의미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열강들은 민족주의와 사회 진화론을 내세워 식민지 경쟁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콩고 자유국과 같은 인권 유린 사례가 발생했다. 이러한 신제국주의는 열강 간의 갈등을 심화시켜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이 되었으며, 식민지 민족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오늘날까지도 인종차별, 문화적 다양성 파괴 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식민주의사 - 탈식민지화
    탈식민지화는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1960년 결의안을 통해 식민지화된 국가들에게 자결권을 부여하였다.
  • 식민주의사 - 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는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럽 국가들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며 세계를 탐험한 시기로, 유럽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왔지만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 파괴, 노예 무역 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 신제국주의 - 일본 군국주의
    일본 군국주의는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일본 사회를 지배한 군부의 팽창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부국강병 정책, 서구 열강 경쟁 의식, 대공황 등의 배경 속에서 내셔널리즘 고조, 사상 통제, 군부의 독립적인 권력 행사 등의 특징을 보이며 침략 전쟁을 일으켰으나 태평양 전쟁 패배로 종말을 맞이했다.
  • 신제국주의 - 대동아공영권
    대동아공영권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를 지배하에 두기 위해 내세운 슬로건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고 자원 수탈과 억압을 자행한 계획이었다.
  • 미국의 역사 (1865-1918) - 존스타운 홍수
    1889년 5월 31일, 폭우로 펜실베이니아주 존스타운 상류의 사우스 포크 댐이 붕괴되어 발생한 존스타운 홍수는 2,209명의 사망자와 막대한 재산 피해를 초래하며 존스타운 시내와 주변 마을을 파괴했고, 미국 적십자사의 대규모 구호 활동을 이끌어냈으며 댐 건설 및 유지 관리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 미국의 역사 (1865-1918) - 앤드루 존슨
    가난한 환경에서 독학으로 정치 경력을 쌓아 대통령이 된 앤드루 존슨은 남북전쟁 이후 온건한 재건 정책으로 의회와 갈등을 겪고 탄핵 소추를 받았으나 부결되었으며, 이후 상원의원으로 활동한 논쟁적인 인물이다.
신제국주의
개요
로즈 거상 (1892) - 에드워드 린리 삼보른 그림
로즈 거상 (1892) - 에드워드 린리 삼보른 그림
관련 항목제국주의
식민주의
관련 사건탈식민지화
역사적 맥락
시기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주요 특징서구 열강의 아프리카 및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 확대
이전 시대와의 차이점산업 혁명과 국가 간 경쟁 심화가 제국주의적 팽창을 가속화함
이론적 배경
주요 이론가존 앳킨슨 홉슨
블라디미르 레닌
핵심 개념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자유 무역 제국주의
젠틀맨 자본주의
주요 사건 및 현상
아시아아시아의 서양 제국주의
아프리카아프리카 분할
기타그레이트 게임
관련 연구
제국주의 연구잉글랜드의 팽창 (1883년)
자유무역의 제국주의 (1953년)
제국주의 연구 (1902년)
제국주의론 (1918년)
논쟁포터-맥켄지 논쟁

2. 배경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들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인 식민지 팽창 경쟁이 다시 격화되는 신제국주의 시대가 열렸다. 이는 단순히 과거 제국주의의 연장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복합적인 배경 속에서 전개되었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기술 발전과 생산력 증대는 새로운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필요로 했으며,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심화와 맞물려 해외 팽창의 경제적 동력을 제공했다.[3][4]

1870년대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로 유럽의 정치 지형이 재편되고 국가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었다.[5]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각국은 국력 과시와 세력 확장을 위해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렸다. 또한, 당시 널리 퍼진 사회 진화론과 인종주의적 사고는 강대국이 약소 민족을 지배하고 '문명화'해야 한다는 문명화 사명 의식을 부추기며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념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14] 1873년부터 시작된 장기 불황은 보호 무역주의를 강화시켜 식민지 확보의 필요성을 더욱 증대시켰고, 국내의 사회적 갈등을 외부로 돌리려는 사회 제국주의적 동기도 작용했다.[6][7][15]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이념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신제국주의 시대를 추동했다.

2. 1.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 발전

미국 독립 전쟁(1775–1783)과 1820년대 라틴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제국의 붕괴는 유럽 제국주의의 첫 시대를 마감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영국에서 중상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중상주의는 제한된 부를 둘러싼 경쟁을 강조하며 초기 제국주의 확장을 뒷받침했지만, 성장하는 제조업자들은 이러한 규제가 사업 확장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겼다. 1846년 곡물법 폐지는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영국 제조업자들이 더 자유롭게 무역할 길을 열었고 영국은 자유 무역 원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3]

비엔나 회의 대표자들의 유화 그림.
장바티스트 이자베이의 ''비엔나 회의'' (1819). 이 회의는 식민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제국 영토를 분할, 재분배하는 역할을 했다.


1815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 패망 후 열린 비엔나 회의부터 1871년 보불 전쟁에서 제국 독일이 승리하기까지, 영국은 유럽의 군사 및 경제 강국으로서 지배적인 위치를 누렸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린 영국은 효율적인 생산력을 바탕으로 완제품을 대량 생산했으며, 독일 국가들, 프랑스, 벨기에, 미국 등 다른 나라 시장에서 현지 제품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상품을 공급하며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했다.[4]

그러나 보불 전쟁에서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연합이 프랑스 제2제국을 격파하면서 영국의 패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비엔나 회의에서 수립된 유럽 협조 체제를 무너뜨리고 유럽 대륙의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통일과 이탈리아 통일로 새로운 민족 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이전까지 내부 문제에 얽매여 있던 잠재적 경쟁국들이 국제 무대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871년부터 1914년까지의 시기는 겉으로는 평화로운 벨 에포크로 불렸지만, 실제로는 불안정한 평화의 시대였다. 특히 보불 전쟁 결과 독일에게 합병된 알자스-로렌 지역을 되찾으려는 프랑스의 열망과 독일의 제국주의적 야심은 두 나라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을 야기했다.[5]

이러한 경쟁 관계는 1873년부터 1896년까지 이어진 장기 불황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장기 불황은 물가 하락과 심각한 경기 침체가 반복되는 시기였고, 각국 정부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라는 강한 압력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자유 무역은 점차 후퇴하고 보호 무역주의가 강화되었다(독일 1879년, 프랑스 1881년).[6][7]

산업 혁명 이후 축적된 잉여 자본이 신제국주의의 주요 동력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카를 카우츠키, 존 A. 홉슨, 그리고 이를 대중화한 블라디미르 레닌 등이 제시한 "축적 이론"에 따르면, 국내 투자 기회가 제한되자 자본가들은 더 높은 수익을 찾아 노동력이 저렴하고 원자재가 풍부하며 경쟁이 덜한 해외 미개발 지역으로 자본을 투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만으로는 자본이 부족했던 이탈리아나 오히려 외국 자본의 순수입국이었던 미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의 식민지 확장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또한 식민지 점령과 유지에 드는 군사적, 관료적 비용이 실제 경제적 이익을 초과하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1880년대 전후 아프리카(이후 남아프리카 연방이 된 지역 제외)에 대한 유럽의 자본 투자는 상대적으로 미미했고, 아프리카 무역에 관여한 회사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제한적이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 체제 이론"은 제국주의를 산업화된 '핵심부' 국가에서 덜 발달된 '주변부' 지역으로 자본 투자가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의 일부로 해석한다. 이 관점에서 보호 무역주의와 공식적인 제국 건설은 독일과 같은 새롭게 산업화된 '반주변부' 국가들이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의 '핵심부'에서 영국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사용한 주요 도구였다.

제국주의 역사가 버나드 포터는 영국의 공식적인 제국주의 채택을 강점의 표현이 아닌, 오히려 세계 무대에서의 상대적 쇠퇴를 보여주는 징후이자 결과로 보았다. 그는 영국이 "낡은 설비와 낡은 기업 조직 형태에 갇혀 있었고,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룬 데 따른 불리한 영향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2. 2. 민족주의와 사회 진화론

보불 전쟁 이후 독일 통일과 이탈리아 통일을 통해 새로운 민족 국가들이 수립되면서, 유럽 내에서는 민족주의적 감정이 고조되고 국가 간 경쟁이 심화되었다. 특히 알자스-로렌의 영유권을 둘러싼 프랑스와 신생 독일 제국 간의 깊은 갈등은 이러한 경쟁을 더욱 부추겼으며, 이는 제국주의적 팽창의 한 원인이 되었다.[5]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서유럽미국에서는 사회 진화론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사회 진화론은 강대국이 약소 민족을 지배하고 문명화한다는 명목 아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확장을 정당화하는 이념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프랑스와 포르투갈 등은 이를 '문명화 사명' (mission civilisatrice|미시옹 시빌리자트리스fra; Missão civilizadora|미상 시빌리자도라por)이라 포장하며 제국주의 정책을 합리화하려 했다.[14]

원주민 아프리카인 병사가 스페인 국기에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 유럽 군대는 자국의 영토에 주둔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원주민을 징집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화 사명'이나 '백인의 짐'과 같은 명분 이면에는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심화시키고, 식민지 주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며, 과도한 군비 지출로 인한 제국주의적 과도 팽창을 야기하는 등 심각한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제국주의는 피지배 지역에 부패한 지배 엘리트를 형성시켜 사회 발전과 경제 개발을 저해하기도 했다.[14]

한편, 독일의 좌파 성향 역사가 한스-울리히 벨러는 제국주의 팽창의 또 다른 동력으로 '사회 제국주의'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사회 제국주의를 "사회적, 정치적 현상 유지를 보존하기 위해 내부의 긴장과 변화의 힘을 외부로 전환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산업화로 인한 국내의 사회경제적 불안정과 갈등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지배 엘리트의 "방어적 이데올로기"라고 분석했다.[15] 벨러에 따르면, 독일 제국의 지배층은 사회 제국주의를 통해 노동 계급 등 내부 불만 세력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고, 기존의 사회·정치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1880년대 독일의 식민지 정책 추진이나 1897년 티르피츠 계획에 따른 대규모 해군력 증강은 이러한 사회 제국주의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15] 이 과정에서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대중 매체미국-스페인 전쟁(1898년),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년), 의화단 운동(1900년)과 같은 사건들을 통해 맹목적 애국심을 부추기며 제국주의적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15]

3. 주요 열강의 식민지 경쟁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면서,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수십 년 동안 국제 외교의 특징이었던 국가 간 경쟁과 상호 불신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하자, 튀니지를 차지하길 희망했던 이탈리아와 15년간 긴장 관계가 이어졌다. 이탈리아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과 동맹을 맺었고, 프랑스와는 10년간 관세 전쟁을 벌였다. 이듬해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프랑스와의 관계는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갈등으로는 1898년의 미국-스페인 전쟁과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이어진 러일 전쟁이 있다. 이 전쟁들은 각각 미국과 일본이라는 새로운 제국주의 강대국의 등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898년의 파쇼다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수십 년 만에 최악의 위기를 초래했지만, 결국 프랑스가 영국의 요구에 굴복하면서 양국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제공했고, 이후 해외 영유권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으로 이어졌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영국의 정책과 극동 지역에서의 독일의 활동은, 1900년대 초까지 고립주의를 유지하던 영국이 극적인 정책 변화를 겪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먼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이후 프랑스 및 러시아와 느슨한 형태의 삼국 협상을 체결하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에 도전하며 삼국 협상을 와해시키려던 독일의 시도는 1905년 탕헤르 위기와 1911년 아가디르 위기를 일으켰다. 이러한 사건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까지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반(反)독일 정서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태평양 지역에서는 독일, 미국, 영국 간의 갈등이 제1차 및 제2차 사모아 내전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또 다른 위기로는 1902-1903년 베네수엘라 위기가 있다. 이 사건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는 베네수엘라미국(드라고 독트린 및 먼로 독트린 참조)이 유럽 국가 연합과 대립했다.

3. 1. 영국

영국 총리 벤자민 디즈레일리와 빅토리아 여왕


영국에서 신제국주의 시대는 상당한 경제적 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8] 영국은 세계 최초로 산업화에 성공하여 19세기 대부분 동안 기술적으로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있었으나,[9]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독일미국 등이 영국의 기술적, 경제적 우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9] 수십 년간 누려온 독점적 지위는 다른 강대국들이 국제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영국은 지배적인 경제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1870년 영국의 세계 제조업 생산 능력 비중은 31.8%였으나, 1910년에는 14.7%로 감소했다. 반면 같은 기간 미국의 비중은 23.3%에서 35.3%로, 독일은 13.2%에서 15.9%로 증가했다.[10] 이처럼 독일과 미국 같은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제국주의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영국은 해외 무역 및 투자의 규모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0]

20세기 초 영국은 일본, 독일, 이탈리아라는 세 팽창주의 세력과의 긴장된 국제 관계에 직면했다. 1939년 이전까지 이들이 직접적으로 영국 본토를 위협하지는 않았지만, 제국 전체에 대한 위험은 분명했다.[11] 1930년대 영국은 일본이 극동 지역의 영국령뿐만 아니라 인도, 호주, 뉴질랜드까지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11]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에 관심을 두어 영국의 이집트를 위협했고, 독일의 유럽 대륙 지배는 영국 안보에 잠재적 위험 요소였다.[11] 영국은 이들 팽창주의 세력이 국제적 안정을 해칠 것을 우려하여,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안정을 유지하려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11] 결국 영국은 자국의 안정과 해외 영토가 위협받자 저항보다는 양보를 택하는 유화 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11]

신제국주의 시대는 영국 내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대중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 영국인은 제국주의가 불가피하다면 영국이 주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으며,[12] 영국의 제국주의가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12] 1940년, 페이비언 식민지 연구국은 아프리카가 경제적, 사회적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지만, 그러한 발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대영 제국의 일부로 남아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러디어드 키플링은 1891년 시 "영국 국기(The English Flag)"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세상의 바람이여, 대답하라! 그들은 이리저리 끙끙거린다.--

그리고 오직 영국만 아는 자가 영국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가련한 작은 거리에서 자란 사람들은 증기를 뿜고 허세를 부리며,

영국 국기를 향해 짖으려고 침묵 속에서 머리를 들고 있다![13]


이 구절은 키플링이 제국주의 활동에 직접 참여한 영국인들이 영국 내에서만 머문 사람들보다 영국이라는 국가 정체성을 더 잘 이해한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12] 비록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국 내에 반제국주의적 목소리가 존재했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은 미미한 수준이었다.[12]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신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릴 때까지 영국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를 형성했다.[12]

영국령 인도 제국 지도


17세기 영국 상인들이 인도에 도착하여 동인도 회사를 설립한 이후, 회사는 점차 인도 아대륙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1757년 벵골을 시작으로 1849년 펀자브까지 인도 대부분 지역을 병합했으며, 많은 번왕국은 명목상의 독립만 유지했다. 이는 무굴 제국의 쇠퇴와 아우랑제브 사후 발생한 권력 공백, 그리고 프랑스와의 식민지 경쟁으로 인도 내 영국군이 증강되면서 가능해졌다. 1800년대 초 클리퍼선의 발명으로 유럽과 인도 간 항해 시간이 절반으로 단축되었고, 해저 케이블 설치로 전신 통신도 가능해졌다. 1818년경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장악한 영국은 후계자가 없는 번왕국을 병합하는 상속법, 새로운 세금 제도, 산업 독점 등 영국식 제도와 방식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또한 인도 현지 관리들과 협력하여 지배력을 강화했다.

1857년, 일부 힌두교 및 이슬람교도 세포이(용병)들이 영국의 통치에 반발하여 봉기했고, 이는 인도 대반란으로 이어졌다. 영국은 이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인도를 영국 왕실의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직접 통치가 시작되면서 영국은 인도의 경제 구조를 자국에 유리하게 재편했다. 이전에는 유럽이 인도의 직물과 향신료를 구매하기 위해 금괴를 지불해야 했지만, 정치적 통제력을 확보한 영국은 인도 농민들에게 유럽 수출용 현금 작물 재배를 강요했고, 인도는 영국산 직물의 주요 시장이 되었다. 또한 영국은 토지 임대료와 소금 생산 독점권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인도의 전통적인 직조 산업은 영국의 기계제 공산품에 밀려 쇠퇴했고, 식량 작물 대신 면화나 차와 같은 현금 작물 재배가 강요되었다.

한편 영국은 철도와 전신망을 구축하여 인도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고 관개 시설을 건설하는 등 인프라 투자를 진행하기도 했다. 서구식 교육이 도입되면서 인도인들 사이에 새로운 사상이 퍼져나갔지만, 이는 동시에 영국의 통치 이념과 현실 속 차별 대우 사이의 모순을 명확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차별에 대한 반발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인도 지식인들은 평등한 대우와 자치를 요구하며 인도 국민 회의를 설립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역사학 교수 존 로버트 실리는 "인도 점령은 맹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인들이 한 위대한 일 중 인도를 정복하는 것만큼 의도하지 않거나 우연히 이루어진 일은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도의 정치적 통제가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의 정복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1876년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로 즉위하면서 새로운 행정 체제가 확립되었고, 이는 동인도 회사의 통치를 영국 명문 대학 출신의 엘리트 공무원 중심 체제로 대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새로운 행정 체제는 회사가 누렸던 독점권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오히려 확대했다. 1882년 제정된 인도 소금법은 소금 채취 및 제조에 대한 정부 독점을 강화했으며, 1923년에는 소금세를 두 배로 인상하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1850년에서 1914년 사이, 영국은 아프리카 인구의 약 30%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15%), 독일(9%), 벨기에(7%), 이탈리아(1%)를 크게 웃도는 수치였다. 나이지리아 한 곳의 인구만 해도 1,500만 명에 달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전체나 독일 식민 제국 전체 인구보다 많았다. 1914년까지 아프리카에서 유럽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독립 국가는 라이베리아에티오피아뿐이었다.[34]

1882년, 수에즈 운하 장악을 명분으로 시작된 영국의 이집트 점령은 나일강 유역 전체에 대한 통제권 확보 시도로 이어졌다. 이는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인접한 수단을 정복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1898년 9월에는 파쇼다에서 프랑스 원정대와 충돌하기도 했다. 1899년, 영국은 금이 풍부한 아프리카너 국가인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침공하여 제2차 보어 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1814년 케이프 식민지 합병으로 시작된 남아프리카 지역 장악을 완료하려는 시도였다. 이미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이들 공화국의 북쪽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은 회사 회장이자 케이프 지역의 유력자인 세실 로즈의 이름을 따 로디지아로 명명되었다.

남부 및 동아프리카에서의 영토 확장은 세실 로즈와 남아프리카 고등 판무관 알프레드 밀너로 하여금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 이어지는 제국 건설 구상을 추진하게 만들었다. 비록 벨기에령 콩고 자유국과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존재로 인해 철도 연결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가능해졌지만, 영국은 전쟁 후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차지함으로써 이 구상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남아프리카에서의 다이아몬드 등 자원 확보를 위한 영국의 팽창 정책은 심각한 사회 문제와 갈등을 야기했다. 영국 자본가들은 백인과 흑인 남아프리카인 모두를 고용했지만, 백인에게는 높은 임금과 상대적으로 안전한 일자리를 제공한 반면, 흑인에게는 낮은 임금을 주며 위험한 광산 노동을 강요했다. 이러한 인종 간 차별과 분리는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극단적인 인종차별 정책으로 이어졌고, 이는 1990년대까지 지속되며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자유 무역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영국은 이미 확보하고 있던 인도라는 거대한 식민지와 더불어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도 가장 큰 이득을 얻었다. 이는 경쟁 초기부터 영국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결과였다.

3. 2. 프랑스

프랑스는 1880년대에 베트남캄보디아를 병합하였고, 이후 10년 동안 라오스까지 병합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제국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시암 왕국(현재의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 세력권 사이의 중립 완충 지대로 남게 되었으나, 불안정한 독립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도 프랑스는 주요 제국주의 열강 중 하나였다. 1914년까지 프랑스는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약 15%를 통제 하에 두었다.[34] 이는 독일 식민 제국 전체나 영국 식민지인 나이지리아 한 곳의 인구(1,500만 명)보다 적은 규모였지만, 광대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등을 포함하는 상당한 규모였다.

3. 3. 독일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독일은 다른 유럽 열강들에 비해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었다. 1850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 동안 독일은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약 9%를 통제하에 두었다.[34] 이는 영국(약 30%)이나 프랑스(15%)보다는 작은 규모였지만, 벨기에(7%)나 이탈리아(1%)보다는 큰 비중이었다.[34] 당시 독일 식민 제국 전체의 인구는 영국의 단일 식민지였던 나이지리아(약 1,500만 명)보다도 적은 수준이었다.[34] 1914년경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럽 열강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국가는 라이베리아에티오피아뿐이었다.[34]

3. 4. 러시아

페르시아 (Persia) 1814년 대(大)게임 시작 시점


중앙아시아, 1848년경


러시아 제국은 19세기부터 중앙아시아로의 팽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제국과의 경쟁이 심화되었는데, 이를 "대(大)게임"이라고 부른다. 러시아에서는 이를 '그림자 토너먼트'(Турниры теней|투르니리 테네이ru)라고도 칭했다. 대(大)게임은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여러 칸국과 토후국을 희생시키면서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벌인 전략적, 경제적, 정치적 경쟁이었으며, 때로는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고전적인 대(大)게임 기간은 일반적으로 1813년 러시아-페르시아 조약부터 1907년 영-러 협약까지로 간주된다. 이 시기 동안 부하라 토후국과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거나 직접적으로 정복당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도 양국의 경쟁은 덜 격렬한 형태로 지속되었으며, 1920년대 중반까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일부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지 시대에 들어서도 '대(大)게임'이라는 용어는 비공식적으로 계속 사용되었는데,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이란/페르시아에서 강대국지역 강국들이 지정학적 권력과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3. 5.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열강으로 발돋움한 일본은 서구 열강을 모방하여 팽창 정책을 추구했으며, 이는 중국의 추가적인 종속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다른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분할에 참여하였다.
충격을 받은 만다린이 공식 복장을 하고 뒤에 서 있고, 빅토리아 여왕(영국), 빌헬름 2세(독일), 니콜라이 2세(러시아), 마리안(프랑스), 사무라이(일본)가 'Chine'(프랑스어로 "중국")를 어떻게 분할할지 논의하고 있다.


1894년, 지역 패권을 둘러싸고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중국은 일본에게 패배하였다. 전쟁 결과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고, 중국은 조선이 조공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정해야 했으며, 이는 이후 대한제국 선포의 배경이 되었다. 또한, 타이완 섬과 랴오둥반도를 일본에 할양해야 했다. (랴오둥반도는 이후 삼국 간섭으로 반환된다.)

19세기 말, 일본과 열강들은 중국으로부터 무역 및 영토 이권을 쉽게 확보했다. 1898년, 러시아가 다롄과 뤼순 조차, 만주 철도 부설권을 확보하자 영국, 프랑스, 일본도 그 해 여러 지역에서 이권을 얻었다.

일본의 팽창은 계속되어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러시아 제국에 승리하였는데, 이는 서구 기술을 받아들인 아시아 국가가 유럽 강대국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러일 전쟁 승리로 일본은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4. 아시아에서의 신제국주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아시아 대륙은 신제국주의 시대를 맞아 서구 열강과 새롭게 부상한 일본의 주요 침략 및 경쟁 무대가 되었다. 각 지역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국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공통적으로 주권 침해와 경제적 수탈을 겪으며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었던 청나라조선(이후 대한제국)이 주요 침략 대상이 되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여러 열강은 아편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 여러 전쟁과 무력 시위를 통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고 영토를 할양받거나 조차했으며, 각종 이권을 침탈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 질서는 붕괴되었고,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으며 한국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영국인도를 거점으로 버마, 말라야, 싱가포르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프랑스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병합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형성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했으며, 미국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오직 시암 왕국(현재의 태국)만이 영국과 프랑스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으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영국러시아가 지역의 패권을 놓고 '그레이트 게임'으로 불리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들의 경쟁은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여러 칸국과 토후국들을 희생시키며 전개되었고, 이 지역 국가들은 두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거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아시아 각지는 신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정치적, 경제적 종속을 강요당했으며, 이는 20세기 아시아 민족들의 독립운동과 저항의 배경이 되었다.

4. 1. 동아시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동아시아는 서구 열강과 새롭게 부상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중국은 이 시기 제국주의 침탈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1839년 제1차 아편 전쟁과 1856년 제2차 아편 전쟁에서의 패배는 중국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난징 조약(1842년), 톈진 조약(1858년), 베이징 조약(1860년) 등 연이어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중국은 홍콩 섬을 영국에 할양하고 상하이, 광저우 등 주요 항구를 개항해야 했으며, 치외 법권을 인정하고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는 등 심각한 주권 침해를 겪었다. 이는 이후 중국인들에게 깊은 굴욕감을 남겼으며, 이 시기를 '굴욕의 세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구 열강뿐만 아니라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역시 제국주의 팽창에 나서면서 동아시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일본은 청일 전쟁(1894-1895)에서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타이완을 할양받는 등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이후 일본은 러일 전쟁(1904-1905)에서도 승리하며 만주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열강들은 중국 내에서의 이권 확보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벌였다. 독일은 선교사 피살 사건을 빌미로 산둥성자오저우만 일대 이권을 확보했고, 러시아는 다롄과 뤼순을 조차하고 만주 지역 철도 부설권을 얻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도 앞다투어 중국 내 세력 범위를 확장해 나갔다. 이러한 외세의 침략과 이권 침탈은 중국 민중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폭발했다. 의화단이 베이징의 외국 공사관을 공격하자 영국, 일본, 러시아, 프랑스, 독일,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8개국 연합군이 파병되어 의화단을 진압하고 베이징을 점령,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중앙아시아에서는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영국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영국은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티베트를 침공(1904년)하기도 했으며, 러시아와 일리 지역을 둘러싸고 갈등하던 청나라에 군사 고문 찰스 조지 고든을 파견하기도 했다.[22] 청나라는 비록 여러 차례 외세에 굴욕을 겪었지만, 일리 위기 당시 러시아로부터 외교적 승리를 거두거나[27] 중불 전쟁(1884–1885)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육상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31] 군사적 근대화를 통해 저항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청나라는 독일제 마우저, 미국제 윈체스터 등 서구식 무기를 도입하고[23][24][25] 한양 병기창 등에서 자체 생산을 시도했다.[21] 그러나 전반적인 국력의 열세와 특히 해군력의 약점[31]으로 인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결국 20세기 초 동아시아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전통적인 국제 질서는 크게 흔들렸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으며, 한국(조선,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치외법권과 같은 불평등 조항들은 1943년에 이르러서야 영국과 미국에 의해 폐지되었다.

4. 1. 1. 중국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정보가 없습니다.)

4. 1. 2. 한국 (조선, 대한제국)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하던 일본의 부상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조선을 둘러싼 지역 패권을 놓고 청나라와 경쟁했으며, 이는 결국 1894년 청일 전쟁 발발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조선이 조공 체제에서 벗어난 독립국임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고종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타이완 섬 등을 일본에 할양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을 명확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4. 2. 동남아시아

영국인도의 상당 부분을 장악한 후 버마, 말라야, 싱가포르, 보르네오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 식민지는 영국 상품의 추가적인 무역 및 원자재 공급원이 되었다. 프랑스는 1880년대에 베트남캄보디아를 모두 병합했고, 그 다음 10년 동안 라오스를 병합하여 인도차이나 제국을 완성했다. 이로 인해 시암 왕국(현재의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 통치 지역 사이의 중립 완충 지대로 남으면서 불안정한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필리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이 제도를 해외 영토로 장악했다.

4. 3. 중앙아시아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영국 제국과 러시아 제국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벌인 전략적, 경제적, 정치적 경쟁을 일컫는다. 러시아에서는 이를 '그림자 토너먼트'(Турниры теней|투르니리 테네이ru)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경쟁은 주로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여러 칸국과 토후국들을 희생시키며 전개되었다.

고전적인 그레이트 게임의 기간은 일반적으로 1813년 굴리스탄 조약부터 1907년 영-러 협약까지로 간주된다. 이 기간 동안 부하라 토후국과 같은 여러 국가가 두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거나 소멸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도 경쟁의 강도는 낮아졌지만, 1920년대 중반까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양국 간의 긴장과 간섭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지 시대에 들어서도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용어는 비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이란(페르시아) 지역에서 강대국지역 강국들이 지정학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경쟁과 책략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1][2]

5. 아프리카에서의 신제국주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 열강들은 경쟁적으로 아프리카를 침략하고 분할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아프리카의 기존 사회, 문화, 경계는 무시되었고, 대륙 대부분이 유럽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914년경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독립을 유지한 국가는 라이베리아에티오피아뿐이었다.[34]

이 시기 아프리카 식민 통치의 가장 악명 높은 사례 중 하나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자유국 통치였다. 레오폴드 2세는 국제 자선단체를 위장하여 콩고강 유역을 개인 소유지로 확보한 뒤,[35] 고무와 상아 등 자원 수탈을 위해 현지 주민들에게 강제 노동을 부과하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신체를 절단하거나 학살하는 등 극도로 잔혹한 방식으로 통치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착취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낳았으며,[37][38] 국제 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결국 레오폴드 2세는 국제적 압력에 밀려 1908년 콩고에 대한 개인 통치권을 벨기에 정부에 넘겨주었고, 이 지역은 벨기에령 콩고가 되었다.[35] 콩고 자유국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은 신제국주의 시대 식민 통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39][40][41]

5. 1. 베를린 회의 (1884-1885)

1880년과 1913년 아프리카 비교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열린 베를린 회의는 아프리카를 둘러싼 유럽 열강들의 영토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이 회의에서는 특정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유효 점령"을 국제적으로 영토 소유권을 인정받는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는 곧 아프리카 현지 주민들에 대한 무력 사용과 직접 통치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국주의 통치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가혹하게 탄압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1904년부터 1907년까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벌어진 헤레로 전쟁과 1905년부터 1907년까지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마지 마지 반란이 있다. 회의의 또 다른 목표는 중앙 아프리카 지역의 무역, 항해, 국경 설정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프리카 대륙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회의에는 15개의 참가국 중 아프리카 대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회의를 주도한 국가는 프랑스, 독일, 영국, 포르투갈 등이었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기존 문화적, 언어적 경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아프리카 대륙을 재편했다. 회의 결과, 아프리카는 50개의 식민지로 분할되었고, 각 식민지를 어느 나라가 지배할지가 결정되었다. 또한 아프리카 내 노예 무역을 종식시키기 위한 계획도 논의되었으나, 실질적인 약속이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마련되지 않았다.

1850년에서 1914년 사이, 영국은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약 30%를 지배하게 되었고, 프랑스는 15%, 독일은 9%, 벨기에는 7%, 이탈리아는 1%를 각각 통제했다. 단적인 예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이지리아 한 곳의 인구만 해도 1,500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전체나 독일 식민 제국 전체의 인구보다도 많은 수치였다. 1914년까지 유럽 열강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아프리카 국가는 라이베리아에티오피아뿐이었다.[34]

5. 2. 콩고 자유국

1876년까지 벨기에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 국왕이었던 레오폴드 2세는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국제적인 과학 및 자선 단체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레오폴드 2세 개인 소유의 지주 회사였다.[35] 그는 헨리 모턴 스탠리를 고용하여 상아, 고무, 다이아몬드, 금속과 같은 풍부한 자원을 확보할 목적으로 적도 아프리카의 콩고강 유역을 탐험하고 식민지화하도록 했다. 당시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땅이었기에 "암흑 대륙"으로 불렸다.[36] 스탠리는 이후 몇 년간 450개가 넘는 원주민 부족을 제압하고 조약을 맺어 벨기에 영토의 약 67배에 달하는 면적인 약 2343927.59km2 이상의 땅을 확보했다.

당시 벨기에 정부나 국민은 제국주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 땅은 레오폴드 2세 국왕의 개인 소유지가 되었다.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이 땅을 콩고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소유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회의에 참여한 다른 유럽 국가들은 레오폴드 2세가 동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억압하고, 인도주의적 정책을 장려하며, 자유 무역을 보장하고, 콩고 주민의 기독교화를 위한 선교 활동을 장려한다는 조건 하에 이를 허용했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의 주된 초점은 특히 상아와 고무 같은 천연 자원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익을 얻기 위해 그는 학살로 간주될 수 있는 몇 가지 잔혹한 칙령을 통과시켰다. 그는 원주민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고무와 상아를 공급하도록 강요했다. 노동자들이 할당량을 채울 만큼의 고무나 상아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았고, 그렇지 못하면 가족이 살해당했다. 마을이 거부하면 불태웠고, 마을의 아이들은 살해당했으며, 남자들은 손을 잘렸다. 이러한 정책은 봉기를 초래했지만 유럽의 군사력과 기술력에 비해 미약했고, 그 결과 진압되었다. 강제 노동은 다른 방식으로 반대받았다. 주민들은 숲으로 피신하거나, 유럽인들의 고무 수확을 막기 위해 고무 숲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 기간 전후의 인구 통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폭력, 기근, 질병으로 최대 1천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7] 그러나 일부 자료에서는 총 인구가 1,600만 명이라고 한다.[38]

레오폴드 2세 국왕은 콩고에서 가져와 수출한 고무로 700%의 이윤을 얻으며 이 사업으로 이익을 얻었다. 그는 베를린 회의에서 맺은 합의 사항의 거의 모든 부분을 어겼기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들을 억제하기 위해 선전을 이용했다. 예를 들어, 그는 벨기에 1897년 세계 박람회에서 콩고 피그미족에게 노래하고 춤을 추게 하여 그가 콩고 원주민을 문명화하고 교육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상당한 국제적 압력 하에, 벨기에 정부는 1908년에 이 영토를 합병하고 벨기에령 콩고로 이름을 변경하여 국왕의 개인 권력에서 벗어났다.[35] 신제국주의 물결 속에서 정복된 모든 식민지 중 콩고 자유국의 인권 유린이 최악으로 여겨졌다.[39][40][41]

6. 신제국주의의 영향

신제국주의 시대의 팽창 정책은 열강 간의 경쟁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분할과 아시아에서의 세력 확장은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이는 여러 외교적 위기와 지역적 충돌을 거쳐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6. 1.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아시아에서 식민지 지배를 확장하면서,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수십 년간 국제 외교의 특징이었던 경쟁과 상호 의심을 더욱 심화시켰다. 1881년 프랑스튀니지 점령은 튀니지를 차지하려 했던 이탈리아와의 15년간의 긴장을 촉발했다. 이탈리아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10년간 관세 전쟁을 벌였다. 1년 후 영국이집트를 점령하면서 프랑스와의 관계는 눈에 띄게 냉각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충돌은 1898년의 미국-스페인 전쟁과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이어진 러일 전쟁이었다. 이 두 전쟁은 각각 새로운 제국주의 강대국미국일본의 등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898년의 파쇼다 사건은 수십 년 만에 최악의 영국-프랑스 위기를 불러왔지만, 프랑스가 영국의 요구에 굴복하면서 두 나라는 해외 영유권 문제를 해결하고 관계 개선의 길을 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영국의 정책과 극동에서의 독일의 행동은 1900년대 초, 고립주의를 유지하던 영국이 정책을 극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영국은 먼저 일본과 영일 동맹을 맺었고, 이후 프랑스 및 러시아와 느슨한 형태의 삼국 협상을 체결했다.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에 도전하여 삼국 협상을 깨뜨리려던 독일의 시도는 1905년의 탕헤르 위기와 1911년의 아가디르 위기를 초래했다. 이러한 위기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몇 년 동안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반독일 정서를 확산시켰다. 태평양에서는 독일, 미국, 영국 간의 갈등이 제1차 및 제2차 사모아 내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 다른 위기는 1902-1903년 베네수엘라 위기였다. 이 사건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는 베네수엘라와 미국(드라고 독트린 및 먼로 독트린 참조)이 유럽 국가 연합과 대립했다.

7. 비판과 반성

신제국주의 시대는 식민지 민족에 대한 심각한 인권 유린과 경제적 착취를 동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서유럽미국 등 제국주의 열강은 소위 '문명화 사명'이나 '백인의 짐'과 같은 명분을 내세워 침략을 정당화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식민 통치를 통해 자원의 수탈과 노동력 착취를 자행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식민지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은 열등한 것으로 치부되어 파괴되었고, 제국주의 본국의 문화가 강요되면서 문화적 다양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또한, 제국주의는 본국 내부의 정치·사회적 갈등을 외부로 돌리려는 사회 제국주의적 동기와 결합되기도 했다. 지배 엘리트들은 해외 팽창을 통해 국내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돌리고 민족주의 감정을 고취시켜 내부 결속을 다지려 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된 불평등한 국제 관계와 식민지배 구조, 인종차별적 인식은 식민지가 해방된 이후에도 신식민주의와 같은 형태로 지속되며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러한 신제국주의의 폭력성과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비판과 역사적 반성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7. 1. 인권 유린과 착취

서유럽미국 등 제국주의 열강은 사회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문명화 사명"(프랑스어: mission civilisatrice프랑스어; 포르투갈어: Missão civilizadorapt)이나 소위 "백인의 짐"과 같은 명분을 내세웠다. 이러한 명분은 표면적으로 자비심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주민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국주의 정부는 식민지에서 가부장적 통치를 강화하며 주민들의 개인적 자유를 억압했고, 군사 지출을 확대하며 제국주의적 과도 팽창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는 식민지에 잔혹하고 부패한 지배 엘리트를 형성시켰고, 이들은 제국주의 세력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하며 사회 변화와 경제 발전을 저해했다. 또한, 제국주의적 "국가 건설"은 종종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와 같은 부정적인 문화적 감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4]

본국의 엘리트 계층 역시 공식적인 해외 확장에서 이점을 발견했다. 대규모 금융 및 산업 독점 기업들은 경쟁과 해외의 국내 정치적 긴장으로부터 해외 투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지원을 원했고, 관료들은 정부 관직을 찾았으며, 군 장교들은 승진을 원했고, 전통적이지만 쇠퇴하는 토지 귀족들은 투자를 위한 이익 증가, 공식적인 칭호, 그리고 고위 관직을 추구했다. 이러한 특별한 이해관계는 역사를 통틀어 제국 건설을 지속시켰다.[14]

중상주의 정책의 시행은 신제국주의를 유지하는 데 역할을 했다. 이는 식민지가 각 수도와만 무역하도록 제한하여 본국 경제를 강화했다. 처음에 특허 회사의 성장과 이후 제국 국가 자체를 통해 신제국주의는 자유 무역, 시장 규제 및 관세 감소, 그리고 종종 군함 외교 또는 계획된 개입주의, 예를 들어 경찰 작전을 통해 외국 시장을 강제로 개방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유럽과 이후 북미에서 대중 사회 시대에 노동 조합주의, 사회주의 및 기타 항의 운동의 부상을 관찰하면서 엘리트들은 제국주의적 맹목적 애국심을 사용하여 산업 노동 계급의 일부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새로운 대중 매체는 미국-스페인 전쟁 (1898년), 제2차 보어 전쟁 (1899-1902년), 그리고 의화단 운동 (1900년)에서 맹목적 애국심을 조장했다. 좌파 독일 역사가 한스-울리히 벨러는 사회 제국주의를 "사회적, 정치적 현상 유지를 보존하기 위해 내부의 긴장과 변화의 힘을 외부로 전환하는 것"과 독일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에 대한 산업화의 파괴적인 영향"에 대항하는 "방어적 이데올로기"로 정의했다.[15] 벨러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 제국주의는 독일 정부가 국내 문제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돌리고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였다. 지배 엘리트들은 사회 제국주의를 파편화된 사회를 결속시키고 사회적 ''현상 유지''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한 접착제로 사용했다. 벨러에 따르면 1880년대 독일의 식민지 정책은 사회 제국주의의 최초 사례였으며, 1897년 티르피츠 계획에 의해 독일 해군을 확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관점에서 식민지 협회 및 해군 동맹과 같은 단체는 정부가 대중의 지지를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럽아프리카 대부분을 합병하라는 요구는 벨러에 의해 사회 제국주의의 정점으로 간주된다.[15]

신제국주의의 가장 큰 동기 중 하나는 인도주의와 아프리카 및 기타 개발되지 않은 지역의 "낮은" 계급 사람들을 "문명화"한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종교적인 동기였으며, "미개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시도였고, 유럽 기독교인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에 근거했다. 제국주의를 지지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종교만이 유일하게 "참된" 종교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가톨릭 선교사들은 개신교 영국, 독일, 미국 선교사들에게 반대했다. 그러나 때로는 제국주의가 식민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는데, 선교사들이 일부 지역에서 노예 제도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더 약한 부족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선교사들과 다른 지도자들은 인육 섭취, 우상 숭배, 어린이 결혼과 같은 "야만적인" 관행을 중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인도주의적 이상은 ''백인의 짐''과 같은 시와 다른 문학 작품에 묘사되었다.

많은 경우, 인도주의는 진심에서 비롯되었지만 종종 잘못된 선택을 동반했다. 일부 제국주의자들은 인도주의라는 개념에 진심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때로는 그들의 선택이 정복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최선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 결과, 일부 현대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신제국주의가 인종적, 문화적 우월주의라는 생각에 더 많이 의해 추진되었으며, "인도주의" 주장은 진심이 아니거나 영토 확장의 구실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49]

7. 2. 문화적 다양성 파괴

사회 진화론이 서유럽미국 등지에서 유행하면서, 프랑스포르투갈에서는 자신들이 식민지 민족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이른바 "문명화 사명"(mission civilisatrice|미시옹 시빌리자트리스fra; Missão civilizadora|미상 시빌리자도라por)이라는 개념이 유럽 정치인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었다. 이는 러디어드 키플링이 말한 '백인의 짐' 개념과 유사하게 표면적으로는 자비심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식민지 고유의 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제국주의 본국의 문화를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추진한 식민지에서의 "국가 건설" 과정은 종종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와 같은 배타적인 문화적 감정을 조장하여 피지배 민족의 문화를 억압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14] 제국주의는 정치적, 경제적 지배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식민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7. 3. 현대 사회에 미치는 영향

사회 진화론이 서유럽미국 등지에서 유행하면서, 프랑스의 "문명화 사명"(mission civilisatrice|프랑스어)이나 포르투갈의 "문명화 사명"(Missão civilizadora|pt)과 같은 명분은 유럽 정치인들에게 제국주의 확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소위 "백인의 짐"이라는 개념에는 표면적인 자선 의도가 담겨 있었지만, 제국주의가 낳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은 이러한 명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제국주의 국가는 국내적으로는 더욱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하며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경향을 보였다. 군사비 지출은 급증하여 종종 "제국주의적 과도 팽창"으로 이어졌으며, 해외에서는 식민지에 잔혹하고 부패한 지배 엘리트를 만들어냈다. 이들 종속 엘리트는 제국주의 세력에 기생하며 권력을 유지하고, 자국의 사회 변화나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 또한, 제국주의적 "국가 건설" 과정은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 감정을 조장하고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4]

유럽의 주요 엘리트 집단 역시 제국주의 확장에서 실질적인 이익을 얻었다. 거대 금융 자본과 산업 독점 기업들은 해외 투자를 보호하고 국내 경쟁 및 정치적 긴장을 피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지원을 필요로 했다. 관료들은 더 많은 정부 직책을 원했고, 군 장교들은 승진 기회를 노렸으며, 전통적인 지주 귀족들은 새로운 투자처와 공식적인 명예, 고위 관직을 추구했다. 이러한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가 제국 건설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14]

중상주의 정책 또한 신제국주의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식민지가 오직 본국과만 무역하도록 강제하여 본국 경제를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초기에는 특허 회사를 통해, 이후에는 제국 국가 자체가 직접 나서 자유 무역 원칙을 왜곡하고, 시장 규제와 관세 장벽을 통해 식민지 경제를 종속시켰다. 때로는 군함 외교나 계획된 개입주의(예: 경찰 작전)와 같은 무력을 동원하여 외국 시장을 강제로 개방하기도 했다.

유럽과 북미에서 노동 조합 운동,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이 부상하자, 지배 엘리트들은 제국주의적 맹목적 애국심을 이용하여 노동 계급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새롭게 등장한 대중 매체는 미국-스페인 전쟁(1898년),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년), 의화단 운동(1900년) 등에서 이러한 맹목적 애국심을 부추기는 데 적극 활용되었다. 독일의 역사가 한스-울리히 벨러는 이러한 현상을 사회 제국주의라고 명명하며, 이를 "사회적, 정치적 현상 유지를 위해 내부의 긴장과 변화의 동력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자 산업화가 가져온 사회경제적 혼란에 맞서는 "방어적 이데올로기"라고 분석했다.[15] 벨러에 따르면, 사회 제국주의는 독일 정부가 국내 문제에서 대중의 관심을 돌리고 기존의 사회 정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지배 엘리트들은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고 현상 유지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사회 제국주의를 이용했다. 1880년대 독일의 식민지 정책과 1897년 티르피츠 계획에 따른 해군력 증강은 사회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식민지 협회나 해군 동맹과 같은 단체들은 정부가 대중의 지지를 동원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벨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유럽과 아프리카의 광대한 영토 합병을 요구했던 것을 사회 제국주의의 극치로 보았다.[15]

참조

[1] 서적 Ends of British Imperialism: The Scramble for Empire, Suez, and Decolonization https://books.google[...] I.B.Tauris 2017-08-10
[2] 서적 Key Concepts in Political Geography https://books.google[...] SAGE 2017-08-09
[3] 백과사전 Corn Law https://www.britanni[...] 2010-11-10
[4] 서적 Imperialism and Colonialism Macmillan
[5] 백과사전 Franco-German War https://www.britanni[...] 2010-11-10
[6] 논문 "Foreign Trade and Economic Growth: Lessons from Britain and France, 1850–1913"
[7] 서적 The Lion's Share: A Short History of British Imperialism 1850–1995 London: Longman
[8] 간행물 Divide et Impera: Vertical and Horizontal Dimensions of British Imperialism http://aura.abdn.ac.[...] 2016
[9] 웹사이트 England in the 19th Century http://www.localhist[...] 2008
[10] 간행물 "Economic Factors in British Policy during the 'New Imperialism.'" https://www.jstor.or[...] 1968-04
[11] 서적 A History of Britain, 1885–1939 MacMillan Press
[12] 서적 Britishness Since 1870 Routledge
[13] 서적 The English Flag https://www.readbook[...] Readbookonline.org 2015-03-23
[14] 웹사이트 "Empire: Public Goods and Bads" http://econjwatch.or[...] 2007-01
[15] 서적 Social Imperialism Garland Publishing
[16] 문서 History of the British salt tax in India
[17] 서적 'De ontwikkeling van het zelfbesturend landschap in Nederlandsch-Indië.' Walburg Press
[18] 서적 'Indonesian Banda: Colonialism and its Aftermath in the Nutmeg Islands.'
[19] 웹사이트 Colonial Voyage – The website dedicated to the Colonial History https://www.colonial[...]
[20] 서적 The Malay Archipelago http://www.papuaweb.[...] Harper
[21] 서적 Some Did it for Civilisation, Some Did it for Their Country: A Revised View of the Boxer War https://books.google[...] Chinese University Press 2010-06-28
[2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Late Chʻing, 1800–1911, pt. 2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3] 서적 The Russian General Staff and Asia, 1860–1917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6-11-22
[24] 서적 The Russian General Staff and Asia, 1860–1917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6-11-22
[25] 서적 The Russian General Staff and Asia, 1860–1917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6-11-22
[26] 서적 The Russian General Staff and Asia, 1860–1917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6-11-22
[27]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Late Chʻing, 1800–1911, pt. 2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8] 서적 China and the International System, 1840–1949: Power, Presence, and Perceptions in a Century of Humiliation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08-11-07
[29] 서적 China and the International System, 1840–1949: Power, Presence, and Perceptions in a Century of Humiliation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08-11-07
[30]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Late Chʻing, 1800–1911, pt. 2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1] 학위논문 Conceptualizing the Blue Frontier: The Great Qing and the Maritime World in the Long Eighteenth Century http://archiv.ub.uni[...] Ruprecht-Karls-Universität Heidelberg 2013-06-28
[32] 서적 Macartney at Kashgar: New Light on British, Chinese and Russian Activities in Sinkiang, 1890–1918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11-05
[33] 서적 To-morrow in the East https://books.google[...] Chapman & Hall, Limited
[34] 간행물 Egba United Government https://www.tandfonl[...] 2019-05-04
[35] 웹사이트 Belgian Colonial Rule – African Studies – Oxford Bibliographies – obo http://www.oxfordbib[...] 2019-01-16
[36] 웹사이트 The Dark Continent https://www.vice.com[...] 2014-05-16
[37] 서적 Casemate report on the Administration http://www.urome.be/[...] British Parliamentary Papers
[38] 뉴스 "King Leopold's Ghost": Genocide With Spin Control The New York Times 1998-08-30
[39] 백과사전 Congo, Democratic Republic of the http://www.oxford-mo[...] Oxford University Press 2010-11-18
[40] 웹사이트 Belgian Congo http://www.yale.edu/[...] Yale University 2010-11-11
[41] 문서 Congo (Kinshasa) World Book 2010-11-18
[42] 서적 The Asia-Pacific Profile Routledge 1998
[43] 웹사이트 French Polynesia 1797–1889 http://www.zum.de/wh[...] 2021-03-28
[44] 웹사이트 A Guide to the United States' History of Recognition, Diplomatic, and Consular Relations, by Country, since 1776: Hawaii https://history.stat[...] U.S. Department of State 2021-03-28
[45] 웹사이트 Treaty of Peace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Spain; December 10, 1898 http://avalon.law.ya[...] Yale Law School 2021-03-28
[46] 웹사이트 American Samoa https://www.doi.gov/[...] 2015-06-11
[47] 문서
[48] 서적 Chile and the United States: Empires in Conflict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90
[49] 백과사전 Imperialism Grolier Online 2010-11-18
[50] 문서 'Development policy in the early 20th century' Koninklijk Instituut voor Taal-, Land- en Volkenkunde 1993
[51] 서적 A History of Modern Indonesia since c.1300 Macmillan
[52] 서적 Ends of British Imperialism: The Scramble for Empire, Suez, and Decolonization https://books.google[...] I.B.Tauris 2017-08-10
[53] 서적 Key Concepts in Political Geography https://books.google[...] SAGE 2017-08-0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