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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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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영공원은 1886년 고종에 의해 설립된 근대식 교육 기관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춘 인재 양성을 목표로 했다. 좌원과 우원으로 나누어 운영되었으며, 영어, 세계사, 지리,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하지만 학생들의 낮은 학업 의욕과 정부의 재정 악화로 인해 1894년 폐교되었으며, 이후 관립영어학교로 계승되었다. 육영공원 출신으로는 이완용, 이한응 등이 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위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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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공원
기본 정보
한글육영공원
한자育英公院
히라가나いくえいこういん
가타카나유기ョン곤원
개요
성격학교
설립 시기1886년
설립 주체조선 정부
교육 목표서양 근대 지식 교육
새로운 인재 양성
특징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립 학교
외국인 교사 초빙
영어 중심의 교육 실시
폐교 시기1894년
설립 배경
시대적 요구개화 정책 추진
서양 문물 수용 필요
근대적 인재 양성 요구
정부 노력고종의 교육 개혁 의지
국가 재정 지원
교육 과정 및 특징
교육 내용영어
수학
과학
역사
지리
교수진미국인 교사 (주로)
조선인 교사
수업 방식영어 강의
서양식 교육 방법 도입
학생 구성양반 자제 중심
관료 자제
일부 평민 자제
역사적 의의
평가조선 근대 교육의 시작
새로운 교육 모델 제시
근대적 인재 양성에 기여
참고 문헌
도서김은신,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년, 154~156쪽, ISBN

2. 설립 배경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과의 외교 및 통상에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1883년 김윤식청나라의 동문관(同文館)을 본떠 동문학을 설립하여 외국어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동문학은 중국인 교관과 자질이 부족한 영국인 교사에 의존하여 학생들의 불만을 샀다.[3]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가 미국을 방문하여 선진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보빙사는 서구식 교육 제도의 도입을 건의했고, 1884년 고종은 육영공원 설립을 윤허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개화파가 몰락하면서 육영공원 설립은 지연되었다.[3]

갑신정변 이후에도 온건 개화파는 개화 정책을 추진했고, 주한미국공사관 무관 포크의 도움을 받아 미국인 교사 초빙을 추진했다. 미국 정부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할버트, 벙커, 길모어를 선발했다. 이들은 1886년 7월 4일 조선에 도착하여 육영공원 설립에 착수했다.[3]

2. 1.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서구식 교육의 필요성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영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이 커졌다. 1883년 김윤식청나라의 동문관(同文館)을 본떠 동문학이라는 외국어 교육 기관을 설치해 통역관을 양성했는데, 이것이 영어 교육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동문학은 초기에 중국인 교관을 초빙했고, 이후 인계받은 영국인은 자질이 부족하여 학생들의 불만이 많았다.[3]

민영익보빙사미국에 다녀온 뒤 1882년부터 영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근대식 교육 기관 설립을 계획했다. 1884년 고종으로부터 육영공원 설치 허가를 받았으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2년 뒤인 1886년에 일류 대학교 출신의 미국인 교사 3인을 초청하여 동문학을 대체하는 육영공원이 설립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국공사관 무관이었던 포크의 노력이 컸다.[3]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조선 보빙사의 미국 파견은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대한 답으로 이루어졌다. 보빙사의 시찰 보고에 따라 신식 교육기관 설치가 건의되었고, 1884년 9월 고종은 육영공원 설치를 허락했다. 풋(L.H. Foote) 주한 미국 공사는 본국 국무장관에게 젊은 교사의 선발 및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계획이 지연되었지만, 개화 사업은 온건 개화파에 의해 계속되었다.

교사 파견 요청을 받은 미국 내무성 교육국(Commissioner of Education)은 뉴욕시의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학생들 중에서 교원을 선발했다. 선발된 사람은 할버트(Homer B. Hulbert), 본(H. E. Bourne), 길모어(George W. Gilmore)였다. 1885년 4월에 인선 선발 완료를 조선에 보고했고, 급여 협상을 통해 교사 1인당 125USD와 여비 600USD, 기혼자인 길모어의 아내 여비 지급을 요구했고 조선 측은 이를 수락했다. 출발 직전 본이 한국행을 포기하고 벙커(Delzell A. Bunker)가 합류하여, 할버트와 길모어 부부 총 4명이 1886년 7월 4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2. 2. 동문학의 설립과 한계

1883년 김윤식청나라의 동문관(同文館)을 본떠 동문학이라는 외국어 교육 기관을 설치해 통역관을 양성한 것이 영어 교육의 효시이다. 그러나 동문학은 처음에는 중국인 교관을 초빙했고 이후 인계받은 영국인은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이라 학생들의 불만이 많았다.[3]

이에 민영익보빙사미국에 다녀온 뒤 1882년에 영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근대식 교육 기관 설립을 계획했다. 1884년 고종으로부터 육영공원 설치 허가를 받았으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2년 뒤인 1886년에 일류 대학교 출신의 미국인 교사 3인을 초청하여 동문학을 대체하는 육영공원이 설립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국공사관 무관이었던 포크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3]

2. 3. 보빙사의 미국 방문과 근대 교육기관 설립 구상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영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이 필요해진 상황에서, 1883년 김윤식청나라의 동문관(同文館)을 본따 동문학이라는 외국어 교육 기관을 설치해 통역관을 양성한 것이 영어 교육의 효시이다. 그러나 동문학은 중국인 교관과 자질이 부족한 영국인 교사로 인해 학생들의 불만이 많았다.[3]

1882년, 민영익보빙사미국에 다녀온 뒤 영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근대식 교육 기관 설립을 계획했다. 1884년 고종으로부터 육영공원 설치 허가를 받았으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2년 뒤인 1886년에 일류 대학교 출신의 미국인 교사 3인을 초청하여 동문학을 대체하는 육영공원이 설립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국공사관 무관이었던 포크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3]

육영공원 구상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대한 답으로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조선 보빙사의 미국 파견에서 시작된다. 이때의 시찰 보고에 따라 신식 교육기관 설치가 건의되었고, 1884년 9월, 고종은 육영공원 설치를 허락한다. 풋(L.H. Foote) 주한 미국 공사는 본국 국무장관에게 젊은 교사의 선발 및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개화 사업은 온건 개화파에 의해 계속되었다.

교사 파견 요청을 받은 미국 내무성 교육국(Commissioner of Education)은 뉴욕시의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학생들 중에서 할버트(Homer B. Hulbert), 본(H. E. Bourne), 길모어(George W. Gilmore)를 선발하였다. 갑신정변으로 출발이 늦어졌지만, 1885년 4월에 인선 선발 완료를 조선에 보고했다. 조선 측은 교사 1인당 125USD와 여비 600USD, 기혼자(길모어)의 아내 여비 지급 요구를 수락했다. 출발 직전 본이 한국행을 포기하고, 대신 벙커(Delzell A. Bunker)가 참가하여, 할버트와 길모어 부부를 포함한 4명이 1886년 7월 4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2. 4. 갑신정변과 설립 지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영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육영공원 설립이 추진되었다. 1883년 김윤식청나라의 동문관(同文館)을 본따 동문학이라는 외국어 교육 기관을 설치해 통역관을 양성했지만, 중국인 교관과 자질이 부족한 영국인 교사로 인해 학생들의 불만이 있었다.[3]

민영익보빙사미국에 다녀온 뒤 1882년부터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근대식 교육 기관 설립을 계획했다. 1884년 고종에게 육영공원 설치 허가를 받았으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설립이 지연되었다. 1886년에 이르러서야 미국인 교사 3인을 초청하여 동문학을 대체하는 육영공원이 설립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주한미국공사관 무관이었던 포크의 노력이 컸다.[3]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조선 보빙사의 미국 파견은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대한 답방이었다. 보빙사의 시찰 보고에 따라 신식 교육기관 설치가 건의되었고, 1884년 9월 고종은 육영공원 설치를 허락했다. 풋 주한 미국 공사는 본국 국무장관에게 젊은 교사 선발 및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계획은 지연되었다. 갑신정변은 실패했지만, 개화 사업은 온건 개화파에 의해 계속되었다.[3]

미국 내무성 교육국은 교원 선발을 주관하면서, 선교를 겸할 수 있는 신학생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뉴욕시의 유니온 신학교 학생들 중에서 할버트, 본(H. E. Bourne), 길모어를 선발했다. 1885년 4월 인선 완료를 조선에 보고하고 급여 협상을 통해 교사 1인당 125USD와 여비 600USD, 기혼자인 길모어의 아내 여비 지급을 요구했고, 조선은 이를 수락했다. 출발 직전 본이 한국행을 포기하고 벙커가 합류하여, 할버트, 길모어 부부, 벙커 4명이 1886년 5월 22일 미국을 출발, 7월 4일 한국에 도착했다.[3]

2. 5. 초기 관학(官學) 설립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영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1883년 김윤식청나라의 동문관(同文館)을 본떠 동문학이라는 외국어 교육 기관을 설치해 통역관을 양성한 것이 영어 교육의 효시였다.[3] 그러나 동문학은 중국인 교관과 자질이 부족한 영국인 교사로 인해 학생들의 불만이 많았다.[3]

이러한 상황에서 민영익보빙사미국에 다녀온 뒤 1882년에 영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근대식 교육 기관 설립을 계획했다.[3] 1884년 고종으로부터 육영공원 설치 허가를 받았으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2년 뒤인 1886년에야 미국인 교사 3인을 초청하여 동문학을 대체하는 육영공원이 설립될 수 있었다.[3] 이 과정에서 주한미국공사관 무관이었던 포크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3]

1883년에는 관립 학교로서 원산학사와 동문학이 세워졌다.[2] 원산학사는 어윤중 등이 함경도 원산에 설립했고, 동문학은 김윤식이 중국인과 영국인을 교사로 초빙하여 영어와 일어를 가르치는 통역관 학교였다.[2] 두 학교 모두 개인이 설립했으나, 설립자가 개화파 관료로서 관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한국 최초의 관립 학교였다.[2]

육영공원 구상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대한 답으로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조선 보빙사의 미국 파견에서 시작된다. 이때의 시찰 보고에 따라 신식 교육기관 설치가 건의되었고, 1884년 9월, 고종은 육영공원 설치를 허락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풋(L.H. Foote) 주한 미국 공사는 본국 국무장관에게 젊은 교사의 선발 및 파견을 요청했다.

교사 파견 요청을 받은 미국은 내무성 교육국(Commissioner of Education) 주관으로 교원 선발에 임했다. 외국에 파견할 교사는 선교도 겸할 수 있는 신학생이 적합하다는 판단에서 뉴욕시의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학생들 중에서 선발하였다. 그렇게 선발된 사람이 할버트(Homer B. Hulbert), 본(H. E. Bourne), 길모어(George W. Gilmore)이다. 갑신정변으로 출발이 늦어졌지만, 1885년 4월에 인선 선발 완료를 조선에 보고했다. 급여 협상에서 교사 1인당 125USD와 여비 600USD, 기혼자(길모어) 1인의 아내 여비 지급을 요구했고 조선 측은 이를 수락했다. 출발 직전에 본이 한국행을 포기하고, 대신 벙커(Delzell A. Bunker)가 참가하여, 할버트와 길모어 부부를 포함한 4명이 한국으로 가게 된다. 그들은 1886년 5월 22일 미국을 출발하여 7월 4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3. 운영과 폐교

육영공원은 조선 정부의 재정 악화와 국력 약화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정부 관리들은 효과적인 정책을 펼치지 못했고, 학생들의 태만도 통제하기 어려웠다. 결국 미국인 교사들은 계약 기간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2]

1891년 계약 만료 시점에 육영공원의 효과가 미미하여 정부와 국왕의 관심이 줄었다. 뱅커(Bunker)만 3년 계약을 연장하고 헐버트(Hulbert)는 귀국했다. 뱅커는 혼자 학교를 운영했지만, 의욕 저하로 1894년 2월 사직 의사를 밝혔다. 이후 뱅커는 배재학당 교사가 되었다.[1]

뱅커의 사직 후, 1894년 4월 일본 고베 주재 미국 영사였던 넨스테드(F. H. Nienstead)가 1년 계약으로 육영공원 교사가 되었다. 강화도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영국인 허치슨(W. du F. Hutchison)도 학생들을 데리고 와 교사가 되었다. 그 결과, 기존 학생 4명을 포함하여 총 64명이 육영공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1]

그러나 1년 후 계약 만료 시점에 조선 측은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고, 육영공원은 1895년 4월 25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조선 정부는 「외국어학교관제」를 발표하고 관립 영어 학교를 설립하였다. 육영공원 학생들은 이 영어 학교로 옮겨졌고, 교사와 건물도 육영공원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육영공원은 관립 영어 학교에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1] 1894년 육영공원은 폐교되었고, 이후 관립영어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로 통합되었다.[2]

3. 1. 미국인 교사 초빙과 교육 과정

1886년 9월 17일(양력), 육영공원 운영 방침을 논의한 끝에 「육영공원 설학절목(育英公院設学節目)」이 제정되었다.[1] 강의와 교재는 모두 영어로 진행되었다.[1] 그러나 학생들은 알파벳조차 몰랐기 때문에, 문과 출신 조교가 통역을 담당했으나, 영어 학습 효과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1]

육영공원은 좌원과 우원 두 개의 반으로 나뉘었다. 좌원은 젊은 현직 관리, 우원은 15세에서 20세 사이의 총명한 젊은이들 중에서 선발되었다.[1] 학생 선발은 사색당파를 안배하여 이루어졌다.[2] 운영비는 호조선혜청이 절반씩 부담하였고,[1] 시험은 국왕 앞에서 치러졌다.[1]

김은신의 책 《이것이 한국 최초》에 따르면,[2] 좌원은 한문, 역사, 경서, 영어를, 우원은 수학, 의학, 농학, 지리, 각국 언어 등을 가르쳤다. 수업 연한은 3년이었고, 미국에서 가져온 기초반 및 고급반용 교육 자료를 사용했다.[2]

초기에는 의무 기숙사 생활을 했으나, 곧 개인행동을 했다. 육영학원은 침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책과 매달 담뱃값 명목으로 6KRW(600전)씩 지급했다. 당시 설렁탕 한 그릇은 2전 5리였다.

호머 헐버트는 개교 1주일 만에 육영공원 설립과 출발에 대한 글을 뉴욕 트리뷴에 기고하여 1886년 10월 1일 '한국의 교사들'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4]

3. 2. 좌원과 우원의 분리 운영

육영공원은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좌원에는 현직 젊은 관리들을 학생으로 받았고, 우원에는 아직 관직에 나가지 않은 명문가 자제들을 입학시켰다.[2] 학생 선발은 사색당파를 안배하여 이루어졌으며, 영어, 세계사, 지리,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2] 학교 운영 비용은 인천, 부산, 원산 항구에서 받는 해관세로 충당했다.[2]

김은신의 책 《이것이 한국 최초》에 따르면, 좌원은 연소자 10명 정원으로 한문, 역사, 경서, 영어를 가르쳤고, 우원은 15세에서 20세 사이의 젊은이 20명을 선발하여 수학, 의학, 농학, 지리, 각국 언어 등을 가르쳤다. 수업 연한은 3년이었다.[2]

강의는 영어로 진행되었고, 영어 교재가 채택되었다. 초기에는 학생들이 알파벳조차 몰랐기 때문에 문과 출신 조교가 통역을 담당했지만, 영어 학습 효과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1] 운영비는 호조선혜청이 절반씩 부담했다.[1]

3. 3. 학생들의 태도와 학업 성취

육영공원 학생들은 대체로 신학문에 대한 열의가 부족했다. 이들은 대부분 양반 가문 출신으로, 출세를 위해서는 여전히 과거 급제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유학 공부가 우선이었기에, 영어와 신지식 습득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1]

이러한 태도는 교사들과의 갈등을 빚기도 했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엘리트 교육을 제공하려 했으나, 학생들은 학업에 소극적이었다. 질병이나 공무를 핑계로 결석하는 일이 잦았고, 심지어 종을 데리고 등교하는 학생도 있었다.[1] 무료로 제공되는 책과 침식, 매달 지급되는 담뱃값(6원)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규칙이 까다롭다며 불평했다. 심지어 학생들의 요청으로 수업 시간이 단축되기도 했고, 가사와 공무를 핑계로 결석하는 일도 빈번했다.[2]

호머 헐버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고종에게 수업 시간 단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2] 1889년 조선 정부는 육영공원 학생들에게 과거 시험에서 우대 조치를 취했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1]

길모어의 증언에 따르면, 초기에는 학생들이 매우 열심이었고 교사들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영어로 수업이 진행되었음에도 학생들의 지식 욕구와 학문적 태도는 교사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2] 그러나 이러한 열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3. 4. 교사와 학생 간의 갈등

초기에는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곧 개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육영공원에서는 무료로 숙식과 책을 제공하고 매달 담뱃값 명목으로 6KRW을 지급했다. 당시 설렁탕 한 그릇이 2전 5리였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금액이었다.[2] 학생들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다녔으며, 가마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도 있었다. 책과 담뱃대는 하인이 들고 다녔다.[2]

그럼에도 학생들은 규칙이 까다롭다며 불평했다. 신학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절반이 현직 관리였던 학생들은 출세를 위해서는 글공부가 우선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2] 결국 학생들의 요청으로 수업 시간이 단축되기도 했고, 가사와 공무를 핑계로 결석하는 일도 잦았다. 호머 헐버트는 수업 시간 단축에 반대하여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2]

교사들은 엘리트 교육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려 했지만, 학생들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출세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유학 공부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1889년 육영공원 학생들에게 과거 시험 우대 조치를 취했지만, 이 역시 과거 제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1] 이러한 상황은 교사와 학생 간의 갈등과 불신을 야기했다.

3. 5. 정부 재정 악화와 폐교

조선 정부의 재정 악화와 국력 약화로 인해 정부 관리들은 제대로 된 정책을 펼치지 못했고, 학생들의 태만도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미국인 교사들은 실망하여 계약 기간을 마치고 돌아갔다.[2] 1891년 계약이 만료되었을 때, 육영공원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정부와 국왕은 관심을 잃었다. 뱅커(Bunker)만 3년 계약을 맺고 헐버트(Hulbert)는 귀국하였다. 뱅커는 홀로 학교를 운영했지만, 의욕이 떨어져 1894년 2월에 사직 의사를 밝혔다. 이후 뱅커는 배재학당 교사가 되었다.[1]

뱅커가 교사직을 그만둔 후, 4월에 일본 고베 주재 미국 영사였던 넨스테드(F. H. Nienstead)가 육영공원 교사로 1년 계약을 맺었다. 또한 강화도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영국인 허치슨(W. du F. Hutchison)이 학생들을 이끌고 교사가 되었다. 그 결과, 원래 재직 중이던 학생 4명을 포함하여 총 64명이 육영공원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계약 만료 시점에 조선 측은 계약 갱신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육영공원은 1895년 4월 25일 명목상 폐지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조선 정부는 「외국어학교관제」를 발표하고 관립 영어 학교를 설립하였다. 육영공원 학생들은 이 영어 학교로 이관되었고, 교사도 육영공원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육영공원은 관립 영어 학교에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1] 조정에서는 육영공원을 영국인 허치슨에게 넘기면서 1894년 육영공원은 폐교되었고, 이후 관립영어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로 통합되었다.[2]

3. 6. 폐교 이후

1891년, 계약 만료 시점에 육영공원의 효과가 미미하여 정부와 국왕의 관심이 줄었다. 뱅커(Bunker)만 3년 계약을 연장하고 헐버트(Hulbert)는 귀국했다. 뱅커는 혼자 학교를 운영했지만, 의욕 저하로 1894년 2월, 계약 기간 만료 전에 사직 의사를 밝혔다. 이후 뱅커는 배재학당 교사가 되었다.[1]

뱅커의 사직 후, 4월에 일본 고베 주재 미국 영사였던 넨스테드(F. H. Nienstead)가 1년 계약으로 육영공원 교사가 되었다. 강화도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영국인 허치슨(W. du F. Hutchison)도 학생들을 데리고 와 교사가 되었다. 그 결과, 기존 학생 4명을 포함하여 총 64명이 육영공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계약 만료 시점에 조선 측은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고, 육영공원은 1895년 4월 25일 폐지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조선 정부는 「외국어학교관제」를 발표하고 관립 영어 학교를 설립하였다. 육영공원 학생들은 이 영어 학교로 옮겨졌고, 교사와 건물도 육영공원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육영공원은 관립 영어 학교에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1]

4. 육영공원 출신 주요 인물

육영공원 출신 주요 인물로는 총리대신을 지낸 이완용, 주불(駐佛) 한국 공사를 역임한 민영돈, 주영(駐英) 한국 공사를 지내고 제2차 한일협약에 분개하여 순직한 이한응 등이 있다.[1]

5. 육영공원 터

육영공원은 처음에 서소문동 38번지 일대(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있었으나, 설립 후 5년 후에 박동의 독일영사관(옛 묄렌도르프 저택)과 자리를 맞교환하여 이전하였다.

6. 육영공원 출판사

고용훈 박사가 육영공원의 브랜드를 이어 전통 학습법 및 인지과학, 어학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11-01
[3] 간행물 The Korea Review 1901-08
[4] 서적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참좋은친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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